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서약서에 쓴대로 내가 신라왕이 되고 나면 바로 백제와 합병을 할 것이오.”
계백은 시선만 주었고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그것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안돈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오.”
계백은 시선만 주었고 김춘추의 말에 열기가 띠어졌다.
“합병에 장애물이 되는 놈들은 제거해야 되겠소. 덕솔이 도와주시오.”
“어떻게 말이오?”
계백이 입을 떼었더니 김춘추가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이 배안에도 부사(副使) 김문생, 경호장 김배선, 그리고 그가 데려온 비담 일파의 군관들까지 10여명이나 타고 있소. 그놈들이 귀국하고 나면 내가 백제와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을 낼 것이 분명하오.”
“……”
“덕솔이 그놈들을 없애주시오.”
계백이 한동안 김춘추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계백이 손을 들자 옆으로 나솔 윤진, 장덕 백용문, 하도리까지 다가와 섰다.
“배에 탄 신라 관리를 모두 갑판으로 모아라.”
그리고는 김춘추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비담 일파가 누군지 적어주시오.”
“알겠소.”
김춘추가 아래쪽에 선 아들 김인문을 눈짓으로 부르더니 서둘러 위쪽 누각으로 올라갔다. 명단을 작성하려는 것이다. 이른바 살생부다. 잠시 후에 갑판에 모인 사신 일행중에 정사선(正使船)에 남아있던 관리들의 살육이 일어났다. 김춘추가 적어준 명단대로 비담 일파로 지목된 관리와 군관을 차례로 베어 죽인 것이다. 시체는 바로 바다에 던졌기 때문에 배에는 핏자국만 남았다. 살육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계백이 휘하 장수들과 함께 신라 정사선을 떠난다. 백제 전함을 옆에 붙여놓고 나서 계백이 김춘추에게 말했다.
“이찬, 부디 왕위에 오르시오.”
“그렇게 되면 1년 안에 신라는 백제와 합병이 될 것이오.”
김춘추가 바로 대답했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백제선과 연결된 널빤지를 타고 옮겨 갔다. 이윽고 장수들과 군사들까지 모두 옮겨가고 널빤지가 치워졌다. 배가 흔들거리면서 신라선은 동쪽으로 백제 함선은 서쪽으로 떼어져 간다. 거리가 50보쯤 떨어졌을 때 김춘추가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계백에게 인사를 했다. 정중한 인사다. 계백과 뒤에 선 장수들이 답례를 했고 배들은 점점 더 멀어졌다. 곧 1백보 거리쯤이 되었을 때 김춘추는 몸을 돌렸다. 그때 김인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님, 합병을 하실 것입니까?”
“당연히.”
머리까지 끄덕인 김춘추가 웃음 띤 얼굴로 김인문을 보았다.
“신라가 백제를 합병한다. 저 머저리같은 놈들은 그때 모두 죽었거나 아니면 내 발밑에 엎드려 있을 것이다.”
그 시간에 계백이 멀어져가는 신라선을 바라보며 옆에 선 장수들에게 말했다.
“김춘추는 지금 우리를 속였다고 웃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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