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재 서양화가 "그림은 작가가 만드는 자기 세계…지금도 공부라 생각해"
"나는 가끔은 울컥하고 눈물이 치솟는 순간이 있다. 그 눈물은 이유도 없고 나도 알 수 없는 눈물이다. 다만 이번 전시를 임하고 그래도 열심히 살았구나 하는 것이 나에게 남는 것이듯.이번 전시가 끝나고 나면 정말 외롭게 더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뚜벅 뚜벅 걸어 갈 것이다." (2011년 11월 2일 작가노트) 서양화가 박남재 화백(84)은 지난해 11월 2일부터 9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한 '박남재 화업 60년 초대전'을 담은 화집 말미에서 이 같이 밝혔다. 아마 화가로서 살아온 지난날들을 정리하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생을 살아가려는 여유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망구의 나이에도 불구, 그의 화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 화백은 여전히 열정적이다. 공부하고 붓질하며 작업실을 지키고 있다. 박 화백의 작품에서는 항상 강렬한 색감과 붓의 필치를 느낄 수 있다. 지리산, 대둔산, 강천산, 설악산 등 산을 비롯해 바다, 하늘, 들녘 등 풍경화를 많이 그리는 박 화백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자신의 방식과 직관으로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한 번에 짚어 그린다. 사물에 대한 직감을 그대로 그려내기 때문에 작품에 꾸밈이 없고 항상 맑고 소탈하다는 평이 뒤따른다. 방법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 이는 자기의 인격을 연마해 사물의 내면을 뚫어볼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공부하며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지난 9일 오전 10시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 옛 KBS건물 뒷동네에 살고 있는 박남재 화백을 찾아 그의 인생과 그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바쁘신 가운데 시간 내 주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완주군에서 주최하는 제1회 이코리아 전북비엔날레가 열립니다. 축사도 있고, 작품도 출품하시던데요. "참석해서 축사를 합니다. 이런 행사를 전주시나 도청도 아니고 완주군에서 한다고 하니까 참 고맙더라고요. 전라북도 기관장들이 그런 면에 무관심해요. 미술, 음악 등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이 너무 없어요. 목정상이 그나마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광주 쪽에는 오지호 상 등 몇 개가 있는데, 광주 시민이 주는 상이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위엄이 있는 상인가요. 이번 전북비엔날레에 제 작품은 '김제 백산의 가을 들의 구름'(30호)을 출품했어요. 요즘 가을 풍경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오는 12월 1일에는 KBS 전주방송총국에서 초대전이 있는데, 그때는 100호 8점과 조그만 것 2점 가져 갈려고 그럽니다.-옛 날 이야기를 좀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어려서 꿈은 뭐였는가요?"815 해방 후에는 중학생들도 정치활동을 많이 했는데, 중학교 4학년 때 민주학생연맹 등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중학교 때 유치장 생활도 했어요. 농구선수로도 뛰었습니다. 당시 축구, 배구 등은 지방 학생들도 잘 했는데, 농구는 서울을 따라잡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서울 아현동에 있는 한성중학교로 갔습니다. 1950년 초 한성중학교에 5학년으로 들어간 박남재는 특유의 집념과 노력으로 농구에 몰두했다. 슛팅 10개 중에서 4개가 들어가면 우수한 슈터였지만, 10개 시도해서 10개 못 넣을 것도 아니라는 신념을 갖고 달빛 아래에서 슈팅 연습을 할 만큼 뭘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는 근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첫 갈림길이 닥쳤다.-중학교 때 농구선수였는데 어떻게 미술을 할 수 있었는가요? "그 해 4월 마산에서 학생종별농구선권대회가 있었는데, 연습 도중 갑자기 호흡 곤란과 함께 심한 통증이 왔어요.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과격한 운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해요. 결국 농구를 포기하고, 미술을 택했죠. 농구를 곧바로 그만 둘 수 없어 오전에는 그림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농구를 했죠. 4월15일 마산종별선수권대회(4위)를 다녀오고, 남산 미술연구소에서 5개월 정도 공부해 서울미대 시험을 보아 합격했죠. 손톱이 닳도록 데생을 열심히 했어요. 서울대에 들어간 얼마 후 625가 발발했는데, 사실 서울대는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요." 박남재는 7월13일에 한강을 나룻배로 건넜다. 그리고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고향 친구 박춘호(남원 대강)와 함께 걸어서 고향 순창으로 돌아왔다. 고향엔 사람을 마구 죽이는 공포감이 뒤덮었고, 그는 회문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생활도 했다. 국군의 총공세에 진안 운장산으로 도망쳤지만, 백운면에서 붙잡혔다. 결국 1951년 1월1일 광주포로수용소에 수용되는 신세가 됐다. -스승이신 오지호 화백은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광주포로수용소 안에서 만났어요. 수용소 안에서 '(그림 등)기술자들 모이라'고 해서 나갔죠. 거기서 오지호 선생을 만났어요. 그 분 때문에 제가 그림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겁니다.1951년 9월25일 광주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박남재는 방랑 생활을 많이 했다. 농구선수 출신인지라 군산고등학교 농구코치도 하고, 전북대 군산상과대학 농구선수로 3년간 부정 출전도 했다. 부정선수 시비가 붙었지만, 피해갔다. 그렇게 20대가 흘러갔다. -10대, 20대 때 미술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군요."서른이 다 돼서야 제대로 시작했죠. 마침 조선대 미술대에 있던 오지호 선생이 불러주었습니다. 그래서 조선대 미대(1960년 졸업)에서 본격적으로 그리게 됐지요. 그 때는 미술교사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지호 선생 때문에 화가로서 제대로 된 길을 걷게 됐어요. 그 때 선생님이 세 가지를 말해주었는데 '첫째 자네는 인간이 돼 먹었네, 둘째 자네는 색에 대한 감각이 좋네, 셋째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태도가 좋네. 이 세 가지면 안 될 일이 없으니까 정말로 마음 먹고 그림을 한 번 그려보게' 해. 그 때 참 데생을 손톱 닳도록 했어요."-오지호 선생님의 배려도 있었지만 대단한 집념을 발휘하셨군요."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장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농구를 하며 기초운동의 중요성을 알았고, 그 덕분에 미술에서도 기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눈 위를 맨발로 걸어다니면서 살아보았고, 5일간 물만 마시고도 살아봤다는 점입니다. 그런 역경 속에서 인내라는 것을 배운 것이죠. 기초와 인내는 나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지요." -1979년에 파리에 다녀오셨더군요. 어떤 수확을 얻었습니까. "파리에 가기 전 제자들이 '선생님은 이번에 파리에 다녀오시면 그림이 굉장히 변할 겁니다'라고 하더군요. 파리 생활 5개월을 접고 돌아온 뒤 제자들에게 '내 그림 한 번 보아라. 오히려 후퇴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어요.파리에 가서 보니까 그 사람들은 잘못 그린 그림도 그냥 버리지 않고 굉장히 아끼더군요. 남이 보면 창피할 텐데 소중히 아끼면서 (타산지석 삼아)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창피하니까 감추거든요. 그걸 보고 내가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는 그들과 함께 모델을 놓고 유화를 하는데, 동색을 채색해가지고 점점 색을 분리해요. 그렇게 계속해서 최후에 정말 아름다운 색을 내더라고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조금 하다가 아름다운 색이 나왔다며 그걸 취해버려요. 그 뜻은 더 아름다운 색을 내 그림을 더 이상 고치지 않겠다는 것이죠. 지금 서울의 대가라고 하는 사람들 그림 보면 형편이 없어요. 나이가 많아지면서 그림이 좋아져야 하는데 왜 나빠지는가 하고 생각해 봤어요. 첫째, 정말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태도로 기초를 단단히 다져서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죠. 둘째, 인내해서 꾸준히 가야하는데 나이 들면 싫거든요. 대충 하거든요. 그래서 그림이 좋지 않다고 봐요. 저는 지금도 공부해요. 공부라 생각하고 그림을 그립니다. 기초를 소홀히 한 작가는 몇 층 올라가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해요. -아름다운 색이란."작가가 인간이 되면 아름다운 색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옵니다. 그림은 절대 머리로 그리는 작업이 아닙니다. 머리는 일정한 시스템으로 움직이지만, 감각(가슴)은 헤아릴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시스템으로 움직입니다.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쓰러진 노인을 내 친부모처럼 부추겨 일으켜 주는 그 따뜻한 감정, 바로 그런 감정으로 대상을 대하고 그림을 그려야 진정 아름다운 색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주로 자연, 풍경 그림을 많이 하셨고, 광한루에 있는 춘향 그림도 그리셨습니다. 특히 자연 풍경에 매료돼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저는 지금도 인물화를 굉장히 그리고 싶어해요. 그런데 인물화는 모델이 있어야 하고, 모델과 나하고 시간을 맞춰야 해요. 어려움이 있지요. 그런데 자연은 사시사철 그대로 있잖아요. 풍경은 그대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예요. 작가가 자기 세계를 만들어야 돼요. 그래서 어려워요. 저는 지금도 이류화가들 사생 갈 적에 한 달에 24번은 이젤을 가지고 따라가요. 촌에 가서 밥 사먹는 맛도 재미가 있거든요. 화가는 자연을 그리면서 가슴을 키워야 합니다. 웅장한 산을 보고 그림을 그리게 되면 그 산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고, 자기 가슴에 낀 때를 볼 수 있어요. 그 때를 씻어내면 내 가슴에 주먹 만한 것이 느껴지고요. 그렇게 가슴을 정화하고, 키우는 것이 사생이거든요. 화가는 풍경사생을 자주 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어떤 제자 그림의 색이 하도 유치해서 "너, 이류화가들 사생 다니는데 좀 따라댕겨라"라고 했더니 서운해 하더군요. -지금도 그림 작업을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챙피한 말이지만, 제가 세수를 않고 산지가 오래됐습니다. 목욕탕에 가지만 별도로 세수를 안해요. 대학 졸업하고 전주여고 미술교사로 들어갔는데, 여름방학을 이용해 국전 출품작을 준비했습니다. 한참 그리고 있는데 어느새 개학일이 닥쳤어요. 난감했죠. 이래서는 그림 한 장 제대로 못그리겠더라고요. 결국 사표를 냈죠. 얼마 후 원광대에 출강(1974년)하게 됐는데, 이 무렵부터 세수를 못했어요.새벽에 일어나면(박 화백은 지금도 새벽 4시면 일어나 작업을 한다) 여기(2층 작업실)에 올라와서 그림을 그립니다. 한참 그리다가 아침밥 먹고, 수저 놓으면 곧바로 올라와 그림을 그렸죠. 그러다 낮 12시가 되면 점심 먹고 원대로 달려갔죠. 작업에 몰두하다보니 세수할 시간이 없었어요.-학생들하고 함께 그림 그리면서 강의했다고 들었습니다."저는 학교에서 월급 받으면서 내 공부를 했습니다. 학생들과 나란히 이젤 펴 놓고 똑같이 모델을 그렸거든요. 화집에 나와 있는 인물화는 모두 그때 그린 그림들이지 특별히 인물화를 그리려고 한 적은 없어요. 학생들하고 함께 그림 그리면서 가르치면 같은 애기를 자꾸 반복할 필요도 없고, 학생들도 직접 선생님이 그리는 과정을 보니까 공부가 잘되고, 그 자리에서 그림 평도 하고 하니 좋았지요. -1992년 개관한 남원 광한루 춘향관에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3백호짜리 대형 작품이 무려 9점이 걸려 있는데 어떻게 제작했습니까."남원 만인의총에도 기록화가 있어요. 그것은 이의주천진봉 씨가 그렸어요. 그런데 그 그림은 사람 얼굴이 똑같아요. 나는 자동차 8대를 동원해서 학생들을 선발해 실고 용인 민속촌에 가서 영화 촬영 때 쓰는 조선시대 의상을 입힌 뒤 각 장면에 맞게 해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래서 광한루 그림은 얼굴들이 다 달라요.남원시가 춘향 그림을 전시하면서 제대로 관리를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워요. 기회가 닿으면 다시 손질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화제를 잠시 바꿔서, 전북도립미술관 건립이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04년 10월 개관한 전북도립미술관은 나 때문에 지었어요. 당시 도지사고, 시장이고 간에 도립미술관 지을 생각이나 했나요. 어림도 없어요. 김태식 의원이 예산 가져와서 지었거든요. 그 무렵 우석대학교에서 화가들을 데리고 금강산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 때 화가들이 금강산 그림을 하나씩 출품, 2000년 9월에 서울 공평아트갤러리에서 전람회를 하게 됐어요. 그곳에 이협김태식 의원이 왔어요. 제가 단상에 올라가 인사말을 하면서 한 마디 했죠. '어떻게 해서 지사나 시장 등 기관장들이 예술에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전북을 예도(藝道)라고 합니까'라고 했죠. 그리고 전주에 온 일본인들이 지역 미술관이 없다는 말에 놀라는 모습을 보고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는 어떤 기자 이야기도 들려줬죠. 그러자 축사를 하러 단상에 올라간 김태식 의원이 '박남재 선생에게서 내가 참 좋은 얘기를 들었다.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더니 단상에서 내려와 '내가 오늘 문화관광부 직원들을 만나니까 예산에 반영하겠다'고 말했어요. 김태식 의원이 정말로 도립미술관 건립 예산을 가지고 왔어요. 전주시장과 도지사가 부지를 확보하지 못하는데 완주군수가 현재의 부지를 확보해 건립한 거예요."-예향의 도시에 사는 도민들에게 예술인으로서 한 말씀해 주시죠. "도민들이 미술 전람회 등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요. 경남 거창 미술관에서 열린 초대전에 가보니 미술관을 참 잘 지었더군요. 너무 고마워서 축사를 하러 단상에 올라간 김에 제가 큰절을 했어요. 전주엔 없잖아요. 서양화 대작들 펴 놓고 전시하면 와서 볼 만 해요. 강암 서예관 옆에 서양화 미술관 하나 있고 하면 한옥마을이 제대로 살아날 것이라고도 생각해요. -끝으로 한 말씀해 주시죠."저는 화가로서 사명은 갖고 살아요. 길가에 뒹글어 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주어다가 책상 위에 놓고 평생 쳐다보면 무슨 진리든 나올 것 아니냐는 생각을 중학교 때 했어요. 기왕 그림 하면서 남보다 뒤지고 싶지 않아요. 그 일념으로 삽니다. 지난해 예술의 전당 전람회를 끝내 놓고 정리를 하다보니까 300호짜리 3장, 200호짜리 6장, 120호짜리 여러 장 등 모두 합하면 예술의 전당 전람회를 또 할 수 있겠더라고요. 지난해 마지막 전람회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예요. 예술원 회원, 예술원상 등을 놓고 주변에서 권하기도 하지만, 지방 사람은 힘들어요. 결국은 좋은 그림 그려야 해요. 고흐도 생전에 그림 한 장 팔았다고 하잖아요. 요즘 고흐그림 한 장에 465억 원 그래요. 거기에는 뭐 금이 붙었나요. 이중섭, 박승훈의 그림, 그런 그림을 그려놓을 겁니다. 열심히 그려야지 별도리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