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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 원로배우는 - '살아있는 연기교과서'…후배들에 무서운 선배 정평

박근형은 배우 생활만을 천직으로 삼고 54년을 외길로 달려왔다. '살아있는 연기교과서''연기의 신(神)'이란 말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다. 넘치는 '끼'에다 끊임없는 절차탁마의 숙련기간을 거쳤기에 가능했다. 그러는 사이 신산(辛酸)의 고통이야 왜 없었겠는가. 배고픔을 견뎌야 했고 방송사의 잘못된 풍토를 바로잡기 위해 나섰다 핍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매 작품마다 탁월한 인물 성격의 묘사를 통해 그가 아니면 상상이 안 되는 연기력을 보여줬다.박근형은 1940년 정읍시내 본정통에서 여관업과 음식점을 크게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셋째였다. 어려서부터 남 흉내내기를 잘 했고 어른들 앞에서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그런 끼는 초등학교 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했다. 정읍 서초등학교 4학년 때 연극부에서 무언극으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어 전체 3등으로 입학한 호남중학교에서 브라스 밴드에 들어가 큰 북을 쳤다. 그리고 휘문고 1학년 때는 유치진 선생이 주도하는 제1회 전국남녀 중고교 연극경연대회에서 사육신 박팽년 역을 맡았다. 그리고 중앙대 연극영화과 1기로 입학했다. 하지만 부친은 배우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소위 '딴따라'생활이 불안정하다는 이유였다. 반면 모친은 학원비를 대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부친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1973년이었다. 그가 주연한 영화 '국회 프락치사건'을 대한극장에서 보고 "이제야 내 아들이 제대로 하는구나"하고 안도하셨다.연극을 배우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소운 이진순 이해랑 안광남 이근삼 선생 등이다.연극에 전념하다 1963년 KBS TV 공채 3기로 옮겼다.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고 TV나 영화 등 다른 장르에도 관심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입사 2년만에 쫓겨나야 했다.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하고 정읍으로 낙향했다. 1년간 음식점 일을 돕고 있는데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극단에서 같이 연극하던 이효영씨가 "연극 딱 한편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게 덜컥 제3회 동아연극상을 받게 됐다. 결국 KBS에 화려하게 복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TBC와 MBC로 옮겼으나 겹치기 출연으로 배우의 생명력이 단축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1971년 프리랜서 선언을 했다. 하지만 프리랜서 생활은 어려움이 많았다. 방송사마다 제 식구를 우선 챙겼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1974년 영화 〈이중섭〉으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TV 배우가 대종상 영화상을 타기는 초유의 일이었다.그러다 1980년 전두환 정권 들어, 열악한 방송 환경을 개선하고자 '한국방송연기자협회'창설을 주도했다. 당시 출연료가 회당 4300원이었다. 너무 힘들어 출연료를 올려 달라고 1주일 동안 파업을 했다. 요주의 인물로 찍혀 4년간 거의 방송 출연을 하지 못했다.그는 후배들에게 무서운 선배로 정평이 나 있다. 칸의 여왕인 전도연이나 제69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수 등은 그에게 혼나 눈물 꽤나 흘렸다. 덕분에 오늘날 연기자로 대성했다. 김남주는 딸과 같이 생각한다. 김자옥도 30대 초반 슬럼프로 2년간 연기를 떠나 있었다. 그때 "너는 이 시대가 공들여 키운 배우다. 너란 배우가 한명 나오려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호통을 쳐 다시 돌아오게 했다.그리고 가수 송대관과는 특별한 관계다. 고향 후배이기도 하지만 송대관 공연을 위해 자신의 공연을 펑크 낼 정도로 아꼈다. 송대관 역시 "뭘 줘도 아깝지 않은 형님"이라고 살갑게 얘기한다.박근형은 그 동안 TV 드라마 150여 편, 영화 70여 편, 연극 50여 편, CF 20여 편에 출연했다. 그리고 백상예술대상, 대종상, 한국방송대상, KBS MBC SBS 연기대상 등을 수상했다. 가족으로는 고향 후배인 부인 이경자(67)여사와 사이에 2남1녀가 있다. 딸 재은(43)은 연기 아카데미를, 막내아들 상훈(33)은 배우겸 작곡가로 아버지 뒤를 잇고 있다.

  • 기획
  • 조상진
  • 2012.10.30 23:02

원로배우 박근형 "54년 배우 인생…아직도 대본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

박근형(73)은 스스로를 '굿쟁이'라고 부른다. 연기에 대한 자긍심과 욕심이 대단하다. 배우 인생으로 54년을 보냈지만 "아직도 극본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할 정도다. '영원한 현역'인 셈이다. 연기에 대한 '무한 욕심'을 보이는 덕분에 대한민국의 시청자와 관객들은 행복하다. 그러한 열정의 비밀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흔히 '살아있는 연기교과서'라는 찬사를 받고 있어 대하기가 어려울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스스럼없고 소탈했다. 꿈나무를 키우기 위해 매달 고향인 정읍에 내려와 골프모임을 갖는데, 막 라운딩을 끝내고 그 모습 그대로 달려왔다. 정읍경찰서 맞은 편 찻집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1시간 30분가량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정읍을 자주 내려오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매달 내려옵니다. 두 가지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는 골프 모임이고, 또 하나는 조그맣게 설립된 장학회 일 때문입니다."- 골프 모임이라뇨?"정읍에 있는 기업인들이 매달 모여서 골프를 치는 정타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골프 꿈나무를 키웁니다. 그 애들이 국가상비군이 될 때까지. 5명을 키우고 있죠. 키운다기보다 보조하고 있죠."- 정타회는 어떻게 운영되는데요?"회원이 40명입니다. 회원들이 스스로 조금씩 출연하고, 저희들이 기부하는 돈도 있고, 거기서 학생들을 지원하는 거죠. 이번에 전북교육감배 골프대회에서 1등을 한 아이가 정타회에서 지원하는 아이입니다. 여자 골퍼인 이정은 파이브(24 호반건설)도 정읍 출신입니다."- 장학회는요?"이름이 법인장학회인데 순수 민간인들이 모여서, 한 15년 됐습니다. 회원들이 있어 월 회비를 내시고, 저희들은 고문이랄까 해서 일정액을 내놓고 있고"- 말하자면 지역인재 양성에 기여하는 거군요?"제가 한 3-4년 후면 정읍에서 조그맣게 아이들 공부를 시킬 수 있는 그런 걸 하려고 해요. 그런 일로 미리 와서 고향을 자꾸 둘러보고 "- 아이들 일이라면 무엇을?"연기에 대한 거죠. 제가 어차피 나이를 먹고 그러면 귀향해야 되는데, 미리 준비를 해 가지고 연차별로, 여기서 버스 편으로 갈 수 있는 숲이 있는 곳에서 애들하고 같이 지내면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그 동안 꾸준히 연기활동을 해오셨지만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하신 것 같습니다. SBS 월화드라마 〈추적자〉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KBS2 〈승승장구〉에서 오랜 경륜과 만만치 않은 입담을 과시하셨는데요?"제가 1958년도부터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그쯤해서 우리나라 대학극 동아리가 서울대 연대 고대에서 출범해서 우리나라 연극계를 이끌기 시작했어요. 그 가운데 제가 끼어들어가 있었어요. 우리나라 연극이 동인제 연극단체에서 상업극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제가) 같이 있었고, 그것이 지나서 영상미디어 쪽으로 TV가 나오고, 그러면서 영화 쪽이 활발히 움직이고, 이런 부분을 제가 다 겪었기 때문에 그 때 좋은 선생님한테 배운 전통극에 대해서 제가 상당히 귀하게 알고 가지고 있습니다. 그대로 답습을 하고, 그걸 좀 더 발전을 시키면서 그 동안 연기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20 몇 년 전부터 트렌디 드라마(Trendy Drama)가 인기를 끌면서 유행에 따른 극들이 많이 나왔어요. 저희들은 전통파라고 자처하니까, 전통극이 활발하게 움직여야 사람들한테 감동을 줄 수 있는 극이 나오거든요. 그 부분을 고수하는 분이 이순재씨, 신구씨, 저, 최불암씨죠."- 이른바 H4(할배 4인방)이군요? 그 명칭은 누가 붙인 겁니까?"꽃미남 아이돌하고 얘기하다가, 한류 아이돌이 붙인 것 같애요."(그는 〈승승장구〉에서 H4 중 내가 막내다. 내가 노래 부르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줘 '박카수'라 불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H4중 누가 제일 외모가 나은 것 같냐?'는 MC 김승우의 질문에 망설임없이 '내가 제일 낫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이순재씨는 키가 너무 작다, 신구씨는 벌써 틀니를, 최불암씨는 앞뒤로 나오고 쳐졌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낸 바 있다.)- 선생님은 한때 연기생활과 관련해 자살을 시도했다면서요?"1963년에 KBS TV 공채 3기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입사 2년 만에 김혜자씨 등 4명이 연기를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났습니다. 그 때 세상이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고 느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실제로 국립극단 출신인 그를 좇아낸 이유는 드라마의 문제점을 자주 지적해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말라리아 치료약인 키니네로 자살하려고 여러 약국을 돌아다니며 한 웅큼을 모았습니다.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먹고 난 뒤 다 토해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정읍으로 내려갔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스타는 많은데 배우는 없다"고 쓴소리를 하십니다. 원로배우 입장에서 소위 한류 스타들이 연기력을 갖추지 못한데도 우쭐거리는 것을 지적하신 건가요? "아니죠. 그런 나무람이 아니고요. 그것은 사회적인 경향이니까 이야기할 생각은 없고, 소위 의식을 가지고 대중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이 정도 되면 작품성과 이런 것으로 감동을 줘야 되고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길러야 하는데 유행에 영합하는 그런 얄팍한 걸 가지고는 오래 갈 수 없다는 얘기죠. 그런 쪽으로 스타는 있을 수 있어도 우리나라 전체로 봐서 순수예술이나 연극, 대중예술이나 그런 배우가 많이 없다는 얘기죠." - '연기란 여러 사람이 어울리는 공동작업이다' 이런 말씀을 강조하시는데요?"연기예술이라는 게 연극이 모체가 되니까요. 연극은 제8의 예술로서, 문학, 건축 미술, 음악 등 여러 분야가 모여서 하기 때문에 한 가지만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죠. 그리고 항상 준비되어야죠. 예를 들어 작품을 분석하고 거기에 대비한 인물 창조를 하기 위해서 인물간 서로 교류라든가, 그 작품이 뭔가를 남기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아야 하죠. 거기다가 나의 메시지도 넣어서 연기술로서 표현할 수 있는 작가적인 입장이 돼야 그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거죠. 그냥 시키는 대로 기계를 향해서 연기하는 것은 배우예술이 아니라는 거죠." - 선생님은 흔히 '살아있는 연기교과서'라고 불립니다. 자신의 연기철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과찬입니다. 저의 경우는 우선 작품을 분석해서 그 인물에 대한 주변상황을 다 알고, 만약에 내가 그 사람이라는 가정 하에 출발을 해서 가능성을 여러 가지 두고, 그동안 내가 관찰해 왔던 다른 여타의 인물들 중에서, 그 특성들을 모아서, 인물을 창조해 내는 거죠. 그 안에는 소위 상황에 의해서 변해지는 그런 인물, 우리 본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희로애락이라든가 이성이나 감성이라든가 모든 걸 포함해서 그냥 표피적인 걸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면의 깊은 면까지 표현해야 되는데 그 역할창조가 저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저는 작품을 대할 때도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고 항상 저의 상상의 세계 속에서 계속해서 갈등을 하는 거죠. 나만이 갖는 내 형태로서, 내안에서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내는 거죠."- 어쩌면 교과서적인 이론에다 생생한 경험이 합쳐진 살아있는 얘기군요?"그렇습니다. 연기이론이라는 게 소련의 스타니슬라브스키, 미국 액터 스튜디오의 리스트라스버그 연기이론도 있고, 유럽이나 인도 등 여러 이론이 있습니다. 이런데서 비롯된 이론은 아주 순수한 백지 위에 색깔을 칠해 나가듯이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은 대체로 공통적이라고 봐요. 그 이론에다가 우리나라 것, 성리학 쪽에서 가져오는 인의예지라든가, 또 이성과 감성이 어떻게 충돌해서 어떻게 해 내는가, 변해가는 과정이라든가. 어차피 동서양 사람이 사는 과정이 같고 감성이나 이성이 같은 거라 보면, 우리 것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해서, 저는 그 쪽을 추구하고 있죠. 그리고 이론과 실제라는 것이 전부 훈련입니다. 꾸준한 연습이죠."- 50년 넘게 한 우물만 파셨는데 연기가 싫증난 적은 없었습니까?" 저는 아직도 극본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연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의 역할이 탐날 때도 있어요. 한 마디로 무한욕구죠. 저희는 끝이 없어요. 그리고 저희는 완성도라는 것을 거의 믿을 수 없으니까요. 어느 정도가 완성된 것인지 저희는 잘 모릅니다. 관객들이 보고서 평가해 주실 적에 그걸로 위안을 삼는 거고, 제 상상력으로 만드는 인물들이 감동을 줬을 때 저에 대한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죠. 그게 좋은 거죠."- 지금 출연하고 계신 작품과 앞으로 계획은?"tvN 〈제3병원〉과 채널A 〈판다양과 고슴도치〉에 출연 중이고 〈추적자〉 이후 SBS 월화드라마 〈드라마의 제왕〉이 11월 5일 첫 방송될 예정입니다. 영화 〈가문의 영광5- 가문의 귀환〉이 촬영 중이고 〈고령화 가족〉을 11월에 찍습니다. TV(KBS2)는 내년 1월에 이순재씨 신구씨와 저, 3명이 시트콤을 합니다. 또 〈추적자〉를 했던 작가분 작품이 내년 6월에 방송될 예정입니다."- 그 동안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이번에 소속사(레젤이엔엠코리아)에 처음 둥지를 트셨는데 그 이유는 뭡니까?"다작(多作)을 하다 보니까 혼자 힘으로는 해내기가 너무 어려워졌어요. 젊은 시절에는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기획사에서 개인적인 홍보라든가 그런 걸 일괄 책임을 지기 때문에 제가 정신을 덜 쓰겠죠."-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걷는 것, 스트레칭 하는 것, 또 골프를 좋아하니까 골프연습을 하지요. 저는 서울서는 거의 필드에 나가지 않습니다. 고향에 내려와서 이틀이고 삼일이고 하고 올라가고 그렇습니다."- 아, 그리고 사모님한테 두 번 퇴자 맞으셨다면서요?"그렇습니다."- 당시 잘나가지 않으셨는가요?"그렇지 않았어요. 저희가 먹고 살만한 때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언제적이냐면 KBS 방송공사 설립이후 좀 나아진 거죠. 그 전까지 방송 3사가 있어도 생활이 힘들었어요. 지금도 저희는 용역입니다. 근로자가 아니에요. 그 전에는 국민연금도 못 들어갔습니다."- 요즘 젊은 아이들이 서로 연예계에 진출하려는데 대해?"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의식을 가지고 좀 더 발전적으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너나할 것 없이 '전 국민의 연예인화' 이것은 곤란하다는 거죠." - 끝으로 도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저희는 예향의 고장이라는 것은 다 아는 거고요. 한 가지 섭섭한 것은 영화제라든가 문화적인 행사를 할 때, 고향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육성해 주는 쪽이 낫지, 이름을 빌려와서 하는 행사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처음은 어려우나 시간이 가면 분명히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문화회관, 문예회관 등 건물 짓기를 좋아하죠. 그런데 문화적인 혜택을 시민들한테 못주고 있는 형편이에요. 그런 것을 지어 놨으면 시민 자신들이 자주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이 되어야죠."

  • 기획
  • 조상진
  • 2012.10.30 23:02

안완식 박사는 - 전국 돌며 '토종' 발굴…한국종자은행 산파역

2002년 농업생명공학연구원에서 퇴임한 뒤 우리나라 토종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토종지킴이'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육종학회와 한국작물학회 부회장을 지냈고 1999년 한국토종연구회를 만든 뒤 지금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토종 발굴에 몰두하고 있다. 서울 출신으로 용산고와 서울대 농과대학을 나왔다. 농촌진흥청에서 근무하던 1983년 일본에서 식물유전자원 관련 연수를 받은 것이 계기가 돼 종자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귀국 후 직제에도 없는 식물유전자원 연구를 시작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종자은행 업무를 시작했다. 이 때 우리 농업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고 사라져 가는 토종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식물과 꽃을 좋아했다. 열살 무렵 한국전쟁 때 어느 불탄 집 마당에 새싹이 돋아난 걸 신기하게 관찰하고 나팔꽃백합을 집에 옮겨오기도 했다. 고교 시절엔 변산반도에 갔다가 변산중 교정에 나 있는 빨간 꽃이 너무 좋아 서울 집으로 가져온 일도 있다. 이런 관심 때문에 대학도 농과대학에 들어가 한 평생을 이 분야에 종사했다. 농촌진흥청 맥류연구소 연구관, 농업과학기술원 유전자원 과장 등을 지냈고, 강원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멕시코 국제맥류옥수수연구소, 일본 농생물자원연구소, 미국 오리건대학교 연수를 마친 뒤 귀국해 밀 육종과 식물 유전자원 연구에 매진했다. 식물유전자원 관련 연구 논문이 55편에 이른다. KBS MBC EBS의 토종 관련 다큐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전주MBC 창사 35주년 기념 특집 제작 때에도 미국 멕시코 일본을 다니며 출연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종자' '내 손으로 받는 우리 종자' '한국 토종작물자원 도감' '식물유전자원학 개론' '육종실험의 길잡이' '종자은행의 종자관리 요령' '우리매화의 모든 것'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고려대와 단국대, 성신여대에서 강사로 활동했고 국립 몽골대학 객원교수를 지냈다. 전국여성농민회와 전국귀농운동본부 회원들과 함께 5년 전 만든 인터넷 다음 카페 '토종씨드림' 대표를 맡아 전국을 돌며 토종 종자를 발굴하고 있다. 1999년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종자'를 저술해 공무원 문예대전 최우수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2002년엔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부인 채숙자 여사(68)와 사이에 1녀(39) 1남(37)을 두었다. 부인은 30년 동안 화원을 경영했다. 호는 매화와 친구라는 뜻의 '매우(梅友)'와 종자의 집이란 뜻의 '인제(仁薺)' 두개다. 일본 연수시절 매화에 매료돼 귀국한 뒤에도 매화에 푹 빠졌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전국의 매화 350여점 중 250여점을 선별해 책으로 엮은 '우리 매화의 모든 것'을 펴냈다.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 좌우명이다. 최선을 다한다는 '진(盡)'이 아니라 수양을 통해 인간됨을 지향한다는 '수(修)' 자를 쓴 게 이채롭다. 취미는 매화와 동백 분재.

  • 기획
  • 이경재
  • 2012.10.23 23:02

'토종 지킴이' 안완식 박사 "전북, 육종산업 메카 되려면 상품성 높은 종자 개발해야"

토종 종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외환 위기 이후 종묘회사들도 외국기업에 넘어갔다. 우리 토종 씨앗도 이젠 로열티를 주고 사와야 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종자주권' '식량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종자산업. 부가가치가 높은 유망 업종이다. 농업비중이 높은 전북은 종자산업을 꽃 피울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지만 아직은 인프라가 취약하다. 최근 들어 방사선 육종연구센터와 민간 육종연구단지를 유치하는 등 종자산업에 눈을 뜨고 집적화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도민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농촌진흥청과 산하 관련 기관, 한국농수산대학이 전주혁신도시에 이전해 오면 생산과 연구, 인력공급이 본 궤도에 오를 것이다. 우리나라 종자은행 개설의 산파역을 했고 유전자원 연구에 몰두했던 안완식 박사(70)를 만났다. '토종 지킴이'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지금도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토종 종자 발굴에 심혈을 쏟고 있다. 인터뷰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그의 자택 서재에서 이뤄졌다. 토종 종자와 종자산업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었다. 종자산업 메카의 꿈을 키우는 전북에 대한 조언도 궁금했다.-토종 씨앗 살리는 의병대장, 토종지킴이, 토종연구분야 최고권위자 등 별칭이 많습니다. 부담은 없나요."종전에는 무덤덤했는데 근래에는 부담되기도 하고 책임감마저 듭니다."-한자 성함 安完植을 풀이하면 이름 대로 세상을 사시는 것 같습니다만."완식이란 이름은 지관을 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는데 살고 보니 '완전하게 심어서(完植) 큰 탈 없이 편안하게(安)' 살아온 것 같습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은 토종이란 말을 매우 좋아하는데 역설적으로 토종 종자들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요. 특히 외환위기 때 심했는데 어떤 실정입니까. "당시 국내 채소 종자시장의 67%를 차지했던 서울종묘, 흥농종묘, 중앙종묘 등이 외국 유명 종묘회사인 몬산토, 신젠타, 다끼이 등에 인수합병됐어요. 몬산토 같은 글로벌 회사는 우리나라 농산물 종자사업권의 대부분을 흡수했어요. 우리나라를 발판 삼아 중국에 진출하려 한 것이지요. 결국 우리 밥상에 오르는, 우리 땅에서 길렀던 채소 대부분을 이젠 로열티를 물고 먹어야 하는 실정입니다."-우리 기업이 되찾아 온 경우는 없나요."동부팜한농이 얼마전(9월11일) 몬산토코리아를 인수했어요. 청양고추를 포함한 고추와 토마토파프리카시금치 등 310개 종자 중 20%를 제외한 250개 종자사업권을 되찾게 된 겁니다. 참으로 다행이지요." -우리 토종들이 사라지는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국내외의 새 품종이 보급되면 농가들은 품종을 바꾸게 되니까 먼저 심었던 토종들은 사라지게 돼요. 농촌 일손 부족도 토종 소멸을 부채질한 원인입니다. 1985년 토종을 수집했는데 8년 뒤 같은 지역에서 같은 방법으로 다시 조사했더니 74%나 소멸됐고, 다시 7년 뒤에는 12%가 소멸된 것이 확인됐어요."-토종 종자연구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어려서부터 식물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농대를 지원했고요. 토종과의 인연은 1983년 일본 쯔꾸바 과학도시에 있는 농업연구센터에서 3개월 동안 식물유전자원에 관한 연수를 받은 것이 계기였어요. 귀국 후 식물유전자원 연구를 하라는 청장의 지시로 종자은행 업무를 시작했고, 이때 우리나라 농업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고민했어요. 결국 사라져 가는 토종을 수집, 확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책도 쓰기 시작했지요."-전국을 돌아다니며 토종 발굴에 매진하고 계시는데 성과는 좀 있습니까."도시화가 빠른 지역일수록 토종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군 지역을 빠짐 없이 조사하면 300400점 정도는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얼마전 정읍지역에서 토종종자를 살펴보고 가셨는데 다른 지역에는 없는, 전북에만 있는 토종도 있나요."전국여성농민회 정읍회원들과 함께 옹동태인정우이평면에서 활동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많은 토종을 볼 수 있었어요. 콩녹두팥돈부강낭콩 등 두류 토종이 많고 상추시금치호박오이갓 등의 토종 채소와 메밀땅콩참깨들깨 등의 유류 작물 토종도 다양했습니다. 특히 대를 이어 심어온 뿔시금치검은찰옥수수감자녹두시금자깨청호박 등이 오래된 토종들이었습니다. 전국 어디나 그곳에서만 나는 토종은 거의 없고 같은 작물이라 하더라도 그 지역에 나는 품종은 그 지역에서 적응되어 온 그 지역만의 토종입니다."-토종을 발굴하고 가꾸는 철학이 있을 텐데요."처음엔 의무감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엔 몸에 배면서 재미를 느껴요. 토종을 수집하고 사진 찍고 정리해서 책으로 펴내면 자신감도 생기게 돼요. 토종은 한번 사라지면 다시 찾을 수 없는 귀중한 자원이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해야 한다는 소신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거지요. "-토종은 수량이 적고 모양이나 품질이 떨어지는 문제점도 있지 않나요."개량품종에 비해 수량성이 낮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질을 더 따지지 않습니까. 토종 맛이 우리 입맛에 맞기 때문에 토종을 선호하는 예가 많아요. 넓은 면적에서는 개량종을 재배해 다수확을 올리고, 토종은 유기농 재배에 적합하기 때문에 넓지 않은 면적에서는 토종 유기농산물을 재배한다면 그만큼의 가치를 가격으로 보상받을 수 있겠지요." -농업비중이 높은 전라북도는 지금 종자산업의 발판을 다지고 있습니다. 오랜 유전자 연구원 생활을 하셨는데 어떤 방향성을 갖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종자산업은 부가가치가 큽니다. 종자시장을 넓게 보아야 합니다. 안정성을 위해 내국시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되 중국과 동남아 등을 집중 공략하기 위한 현지 수요자 중심의 연구개발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현지인들의 입맛과 취향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려면 다양한 유전자원을 현지에서 확보해야 하고 연구소도 현지에 두어야 합니다. 그에 따른 체계적인 인력양성도 과제겠지요."-종자산업은 다국적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데 후발주자로서 가능성이 있을까요.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를 인수해서 다행이지만, 되찾지 못한 20%는 우리 채소의 핵심이 되는 고추파프리카시금치토마토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배추무고추육종은 한국 연구진이 세계에 앞서 있고, 고추 연구기술은 파프리카나 토마토 연구와도 상통하는 것이어서 연구개발 투자를 늘린다면 가능성은 크다고 봅니다."-농촌진흥청 재직 시절 종자은행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종자은행은 잘 운영되고 있나요."1974년 종자저장시설(5만점 보존 규모)을 신축했고 농촌진흥청 연구기관에 보유하고 있던 종자 3만3000점을 이곳에 저장했지요. 이 일을 시작하면서 전국의 농촌지도소 요원 7000여명을 동원해 토종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이 때 5170점을 수집했는데 이것이 지금 보유하고 있는 토종의 근간이 되고 있지요. 2006년에는 종자저장시설인 '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가 최첨단 무인관리(로봇) 시스템으로 수원에 건설돼 국내 유전자원 16만점을 보존하고 있어요. 국제식량농업기구(FAO) 공인 안전중복보존센터로 지정돼 아시아 지역의 '유전자원 허브뱅크'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이 전주혁신도시로 이전해 오면 이 시설도 같이 따라 오게 됩니까."아니예요. 이 시설은 수원에 보존되고 전주혁신도시에는 새로 지어질 겁니다. 조선시대 여러 곳에 보관해 안전을 도모했던 사고(史庫)와 같은 이치이지요."-전북은 방사선육종연구센터와 민간육종연구단지를 유치했습니다. 종자의 다양성이 기대되는데 향후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100여년간 수원이 농업연구기관이 집결 지역으로서 성과를 거두었듯이 전북도 육종연구기관이 집적화되면 큰 성과를 거둘 것으로 봐요. 다만 연구기관 간 연계체제가 원활해야 하고, 시설 및 기자재 활용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사전 연구인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방사선 육종이 부가가치가 높을 것으로 전망되는데 예를들면 어떤 품목들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미국 일본 중국 등 방사선돌연변이 육종 선진국을 따라 잡으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방사선돌연변이는 종자에 의한 생산물을 이용하는 곡물의 육종 보다는 영양체를 이용하거나 영양체로 번식하는 작물에서 효과가 잘 나타납니다. 다양한 품목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한다면 좋은 결과가 도출될 수 있어요. 방사선돌연변이 육종에 대한 오해와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도 숙제입니다."-자치단체가 해야 할 일을 꼽으신다면."자치단체 힘만으로는 종자산업을 발전시킬 수 없어요. 정부의 육종 연구기관과 민간 육종연구기관들이 부단히 노력해야 해요. 이들 연구기관들이 어려움 없이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행정적인 배려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자치단체로서는 중요한 일입니다."-적기 예산지원 등 정부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할 터인데요. "정부 차원의 큰 사업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겠어요?"-인력확보와 양성도 중요한 과제일 텐데 현재 우리나라 인력풀은 잘 돼 있나요."우리 학력수준은 세계 제일입니다. 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수학한 석학들도 많아요. 인력풀은 충분하지만 중요한 건 대우예요. 훌륭한 대우가 우수한 인력을 낳는다고 하지 않습니까."-지구촌이 농업 유전자원을 선점하기 위한 종자전쟁시대를 맞고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수준입니까."현재 세계 6위의 농업유전자원(27만2000점)을 확보하고 있어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세계종자안전중복보존소'로 인증 받고 또 '국제유전자원협력센터'를 설치하는 등 선진 인프라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천연의약소재, 기능성 신소재, 식품소재, 바이오 에너지작물, 아열대 과수 및 미생물 자원 확보에 주력해 2017년에는 세계 5위의 유전자원을 확보할 예정입니다. 2020년까지 세계 종자시장의 선두그룹에 올라서겠다는 계획을 세운 만큼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종자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신성장 동력사업이 될 겁니다. "-우리나라 민간기업의 종자산업은 어느 수준입니까."토종 메이저급으로는 동부팜한농과 농우바이오, 한농종묘 등이 있어요. 주로 채소류와 화훼류 종자를 취급하고 있는데 상당히 많은 유용한 유전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경쟁력도 있습니다. 사까다종묘, 다끼이종묘 등 100년 이상된 육종기술을 갖고 있는 일본을 제외하면 국내 육종기술 수준은 거의 세계적 수준입니다."-육종 문제는 결국 인프라가 많은 농촌진흥청이 주도해야 하고 기업들도 육종연구에 투자를 해야 할 터인데 잘 될까요."농진청은 정부 연구기관으로서 당연히 새로 형성되는 종자산업 클러스터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야 해요. 민간 기업 투자를 유도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이고요."-전북에는 방사선육종연구센터-민간육종연구단지-농촌진흥청농수산대학-국가식품클러스터 등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종자 육종산업의 메카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오는데 과제라면 무엇을 들 수 있겠습니까."종자 육종산업의 메카로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외국 회사에 대적할 만큼 경쟁력을 갖춰야 해요. 외국산 품종에 뒤지지 않는 상품성 높은 종자를 개발해야 하고, 국내는 물론 수출용 종자를 육성해야 합니다. 사전 연구인력과 자원 확보도 중요하고요. 전북은 고급 인력이 올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행정편의를 제공하면서 일하기 쉽게 원스톱 지원체제를 갖춰야 합니다. 정부도 관련 산업 및 업체에 대한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고."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열심히 살아야지요. 팔자소관이랄까요, 눈 감기 전까지는 종자분야에 진력할 생각입니다. 15년 전 창립한 '한국토종연구회'와 '토종씨드림' 활동을 통해 토종을 찾아 종자은행에 보존하고 확산시킬 거예요. '한 농가 한 토종 갖기운동'으로 승화시킬까 합니다."

  • 기획
  • 이경재
  • 2012.10.23 23:02

박 남 재 화가는 - '생명과 자유'표현 왕성한 활동…한국화단 발전에 기여

1929년 순창에서 태어난 박남재 화백은 서울대 미대 중퇴 후 우리나라 인상주의 거두 오지호 화백을 만나면서 다시 붓을 잡는다. 1960년 조선대 미술대를 졸업한 박 화백은 전주여고 교사를 거쳐 원광대 미술대 교수와 학장을 지냈다. 풍경을 주로 그려온 박 화백은 대상을 재현하는데 머물지 않고 이의 해체를 통해 작가의 세계관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산, 들, 나무 등은 작가의 심연에 등장하는 의식들이 카오스적 혼돈상태를 일으킬 때 작가에 의해 제어되어 나타난 새로운 자연, 즉 '자연으로 승화된 자아'다.1970년대의 〈설경〉, 〈雲〉을 비롯해 1980년대 이후 〈내장산 秘景〉, 〈지리산 하경〉, 〈성산일출봉〉, 〈제주 비자림〉, 〈파도〉 등으로 이어지는 작품들을 통해 박 화백은 생명과 자유라는 가치를 보여준다. 1958년 제7회 국전 입선(국립현대미술관)을 시작으로 수차례의 각종 대회 수상을 했으며, 초대전, 개인전 등을 꾸준히 펼쳐왔다. 지난해 11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그의 60년 화업을 조명하는 초대전을 했고, 최근에도 크고 작은 전람회에 작품을 꾸준히 출품하고 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신라미술대전 심사위원, 대한민국 예술원상 심사위원 등 각종 미술 관련 활동을 활발히 해오며 지역 및 한국 화단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12.10.16 23:02

박남재 서양화가 "그림은 작가가 만드는 자기 세계…지금도 공부라 생각해"

"나는 가끔은 울컥하고 눈물이 치솟는 순간이 있다. 그 눈물은 이유도 없고 나도 알 수 없는 눈물이다. 다만 이번 전시를 임하고 그래도 열심히 살았구나 하는 것이 나에게 남는 것이듯.이번 전시가 끝나고 나면 정말 외롭게 더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뚜벅 뚜벅 걸어 갈 것이다." (2011년 11월 2일 작가노트) 서양화가 박남재 화백(84)은 지난해 11월 2일부터 9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한 '박남재 화업 60년 초대전'을 담은 화집 말미에서 이 같이 밝혔다. 아마 화가로서 살아온 지난날들을 정리하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생을 살아가려는 여유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망구의 나이에도 불구, 그의 화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 화백은 여전히 열정적이다. 공부하고 붓질하며 작업실을 지키고 있다. 박 화백의 작품에서는 항상 강렬한 색감과 붓의 필치를 느낄 수 있다. 지리산, 대둔산, 강천산, 설악산 등 산을 비롯해 바다, 하늘, 들녘 등 풍경화를 많이 그리는 박 화백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자신의 방식과 직관으로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한 번에 짚어 그린다. 사물에 대한 직감을 그대로 그려내기 때문에 작품에 꾸밈이 없고 항상 맑고 소탈하다는 평이 뒤따른다. 방법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 이는 자기의 인격을 연마해 사물의 내면을 뚫어볼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공부하며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지난 9일 오전 10시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 옛 KBS건물 뒷동네에 살고 있는 박남재 화백을 찾아 그의 인생과 그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바쁘신 가운데 시간 내 주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완주군에서 주최하는 제1회 이코리아 전북비엔날레가 열립니다. 축사도 있고, 작품도 출품하시던데요. "참석해서 축사를 합니다. 이런 행사를 전주시나 도청도 아니고 완주군에서 한다고 하니까 참 고맙더라고요. 전라북도 기관장들이 그런 면에 무관심해요. 미술, 음악 등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이 너무 없어요. 목정상이 그나마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광주 쪽에는 오지호 상 등 몇 개가 있는데, 광주 시민이 주는 상이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위엄이 있는 상인가요. 이번 전북비엔날레에 제 작품은 '김제 백산의 가을 들의 구름'(30호)을 출품했어요. 요즘 가을 풍경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오는 12월 1일에는 KBS 전주방송총국에서 초대전이 있는데, 그때는 100호 8점과 조그만 것 2점 가져 갈려고 그럽니다.-옛 날 이야기를 좀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어려서 꿈은 뭐였는가요?"815 해방 후에는 중학생들도 정치활동을 많이 했는데, 중학교 4학년 때 민주학생연맹 등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중학교 때 유치장 생활도 했어요. 농구선수로도 뛰었습니다. 당시 축구, 배구 등은 지방 학생들도 잘 했는데, 농구는 서울을 따라잡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서울 아현동에 있는 한성중학교로 갔습니다. 1950년 초 한성중학교에 5학년으로 들어간 박남재는 특유의 집념과 노력으로 농구에 몰두했다. 슛팅 10개 중에서 4개가 들어가면 우수한 슈터였지만, 10개 시도해서 10개 못 넣을 것도 아니라는 신념을 갖고 달빛 아래에서 슈팅 연습을 할 만큼 뭘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는 근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첫 갈림길이 닥쳤다.-중학교 때 농구선수였는데 어떻게 미술을 할 수 있었는가요? "그 해 4월 마산에서 학생종별농구선권대회가 있었는데, 연습 도중 갑자기 호흡 곤란과 함께 심한 통증이 왔어요.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과격한 운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해요. 결국 농구를 포기하고, 미술을 택했죠. 농구를 곧바로 그만 둘 수 없어 오전에는 그림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농구를 했죠. 4월15일 마산종별선수권대회(4위)를 다녀오고, 남산 미술연구소에서 5개월 정도 공부해 서울미대 시험을 보아 합격했죠. 손톱이 닳도록 데생을 열심히 했어요. 서울대에 들어간 얼마 후 625가 발발했는데, 사실 서울대는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요." 박남재는 7월13일에 한강을 나룻배로 건넜다. 그리고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고향 친구 박춘호(남원 대강)와 함께 걸어서 고향 순창으로 돌아왔다. 고향엔 사람을 마구 죽이는 공포감이 뒤덮었고, 그는 회문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생활도 했다. 국군의 총공세에 진안 운장산으로 도망쳤지만, 백운면에서 붙잡혔다. 결국 1951년 1월1일 광주포로수용소에 수용되는 신세가 됐다. -스승이신 오지호 화백은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광주포로수용소 안에서 만났어요. 수용소 안에서 '(그림 등)기술자들 모이라'고 해서 나갔죠. 거기서 오지호 선생을 만났어요. 그 분 때문에 제가 그림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겁니다.1951년 9월25일 광주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박남재는 방랑 생활을 많이 했다. 농구선수 출신인지라 군산고등학교 농구코치도 하고, 전북대 군산상과대학 농구선수로 3년간 부정 출전도 했다. 부정선수 시비가 붙었지만, 피해갔다. 그렇게 20대가 흘러갔다. -10대, 20대 때 미술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군요."서른이 다 돼서야 제대로 시작했죠. 마침 조선대 미술대에 있던 오지호 선생이 불러주었습니다. 그래서 조선대 미대(1960년 졸업)에서 본격적으로 그리게 됐지요. 그 때는 미술교사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지호 선생 때문에 화가로서 제대로 된 길을 걷게 됐어요. 그 때 선생님이 세 가지를 말해주었는데 '첫째 자네는 인간이 돼 먹었네, 둘째 자네는 색에 대한 감각이 좋네, 셋째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태도가 좋네. 이 세 가지면 안 될 일이 없으니까 정말로 마음 먹고 그림을 한 번 그려보게' 해. 그 때 참 데생을 손톱 닳도록 했어요."-오지호 선생님의 배려도 있었지만 대단한 집념을 발휘하셨군요."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장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농구를 하며 기초운동의 중요성을 알았고, 그 덕분에 미술에서도 기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눈 위를 맨발로 걸어다니면서 살아보았고, 5일간 물만 마시고도 살아봤다는 점입니다. 그런 역경 속에서 인내라는 것을 배운 것이죠. 기초와 인내는 나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지요." -1979년에 파리에 다녀오셨더군요. 어떤 수확을 얻었습니까. "파리에 가기 전 제자들이 '선생님은 이번에 파리에 다녀오시면 그림이 굉장히 변할 겁니다'라고 하더군요. 파리 생활 5개월을 접고 돌아온 뒤 제자들에게 '내 그림 한 번 보아라. 오히려 후퇴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어요.파리에 가서 보니까 그 사람들은 잘못 그린 그림도 그냥 버리지 않고 굉장히 아끼더군요. 남이 보면 창피할 텐데 소중히 아끼면서 (타산지석 삼아)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창피하니까 감추거든요. 그걸 보고 내가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는 그들과 함께 모델을 놓고 유화를 하는데, 동색을 채색해가지고 점점 색을 분리해요. 그렇게 계속해서 최후에 정말 아름다운 색을 내더라고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조금 하다가 아름다운 색이 나왔다며 그걸 취해버려요. 그 뜻은 더 아름다운 색을 내 그림을 더 이상 고치지 않겠다는 것이죠. 지금 서울의 대가라고 하는 사람들 그림 보면 형편이 없어요. 나이가 많아지면서 그림이 좋아져야 하는데 왜 나빠지는가 하고 생각해 봤어요. 첫째, 정말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태도로 기초를 단단히 다져서 공부를 안했다는 것이죠. 둘째, 인내해서 꾸준히 가야하는데 나이 들면 싫거든요. 대충 하거든요. 그래서 그림이 좋지 않다고 봐요. 저는 지금도 공부해요. 공부라 생각하고 그림을 그립니다. 기초를 소홀히 한 작가는 몇 층 올라가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해요. -아름다운 색이란."작가가 인간이 되면 아름다운 색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옵니다. 그림은 절대 머리로 그리는 작업이 아닙니다. 머리는 일정한 시스템으로 움직이지만, 감각(가슴)은 헤아릴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시스템으로 움직입니다.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쓰러진 노인을 내 친부모처럼 부추겨 일으켜 주는 그 따뜻한 감정, 바로 그런 감정으로 대상을 대하고 그림을 그려야 진정 아름다운 색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주로 자연, 풍경 그림을 많이 하셨고, 광한루에 있는 춘향 그림도 그리셨습니다. 특히 자연 풍경에 매료돼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저는 지금도 인물화를 굉장히 그리고 싶어해요. 그런데 인물화는 모델이 있어야 하고, 모델과 나하고 시간을 맞춰야 해요. 어려움이 있지요. 그런데 자연은 사시사철 그대로 있잖아요. 풍경은 그대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예요. 작가가 자기 세계를 만들어야 돼요. 그래서 어려워요. 저는 지금도 이류화가들 사생 갈 적에 한 달에 24번은 이젤을 가지고 따라가요. 촌에 가서 밥 사먹는 맛도 재미가 있거든요. 화가는 자연을 그리면서 가슴을 키워야 합니다. 웅장한 산을 보고 그림을 그리게 되면 그 산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고, 자기 가슴에 낀 때를 볼 수 있어요. 그 때를 씻어내면 내 가슴에 주먹 만한 것이 느껴지고요. 그렇게 가슴을 정화하고, 키우는 것이 사생이거든요. 화가는 풍경사생을 자주 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어떤 제자 그림의 색이 하도 유치해서 "너, 이류화가들 사생 다니는데 좀 따라댕겨라"라고 했더니 서운해 하더군요. -지금도 그림 작업을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챙피한 말이지만, 제가 세수를 않고 산지가 오래됐습니다. 목욕탕에 가지만 별도로 세수를 안해요. 대학 졸업하고 전주여고 미술교사로 들어갔는데, 여름방학을 이용해 국전 출품작을 준비했습니다. 한참 그리고 있는데 어느새 개학일이 닥쳤어요. 난감했죠. 이래서는 그림 한 장 제대로 못그리겠더라고요. 결국 사표를 냈죠. 얼마 후 원광대에 출강(1974년)하게 됐는데, 이 무렵부터 세수를 못했어요.새벽에 일어나면(박 화백은 지금도 새벽 4시면 일어나 작업을 한다) 여기(2층 작업실)에 올라와서 그림을 그립니다. 한참 그리다가 아침밥 먹고, 수저 놓으면 곧바로 올라와 그림을 그렸죠. 그러다 낮 12시가 되면 점심 먹고 원대로 달려갔죠. 작업에 몰두하다보니 세수할 시간이 없었어요.-학생들하고 함께 그림 그리면서 강의했다고 들었습니다."저는 학교에서 월급 받으면서 내 공부를 했습니다. 학생들과 나란히 이젤 펴 놓고 똑같이 모델을 그렸거든요. 화집에 나와 있는 인물화는 모두 그때 그린 그림들이지 특별히 인물화를 그리려고 한 적은 없어요. 학생들하고 함께 그림 그리면서 가르치면 같은 애기를 자꾸 반복할 필요도 없고, 학생들도 직접 선생님이 그리는 과정을 보니까 공부가 잘되고, 그 자리에서 그림 평도 하고 하니 좋았지요. -1992년 개관한 남원 광한루 춘향관에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3백호짜리 대형 작품이 무려 9점이 걸려 있는데 어떻게 제작했습니까."남원 만인의총에도 기록화가 있어요. 그것은 이의주천진봉 씨가 그렸어요. 그런데 그 그림은 사람 얼굴이 똑같아요. 나는 자동차 8대를 동원해서 학생들을 선발해 실고 용인 민속촌에 가서 영화 촬영 때 쓰는 조선시대 의상을 입힌 뒤 각 장면에 맞게 해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래서 광한루 그림은 얼굴들이 다 달라요.남원시가 춘향 그림을 전시하면서 제대로 관리를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워요. 기회가 닿으면 다시 손질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화제를 잠시 바꿔서, 전북도립미술관 건립이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04년 10월 개관한 전북도립미술관은 나 때문에 지었어요. 당시 도지사고, 시장이고 간에 도립미술관 지을 생각이나 했나요. 어림도 없어요. 김태식 의원이 예산 가져와서 지었거든요. 그 무렵 우석대학교에서 화가들을 데리고 금강산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 때 화가들이 금강산 그림을 하나씩 출품, 2000년 9월에 서울 공평아트갤러리에서 전람회를 하게 됐어요. 그곳에 이협김태식 의원이 왔어요. 제가 단상에 올라가 인사말을 하면서 한 마디 했죠. '어떻게 해서 지사나 시장 등 기관장들이 예술에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전북을 예도(藝道)라고 합니까'라고 했죠. 그리고 전주에 온 일본인들이 지역 미술관이 없다는 말에 놀라는 모습을 보고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는 어떤 기자 이야기도 들려줬죠. 그러자 축사를 하러 단상에 올라간 김태식 의원이 '박남재 선생에게서 내가 참 좋은 얘기를 들었다.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더니 단상에서 내려와 '내가 오늘 문화관광부 직원들을 만나니까 예산에 반영하겠다'고 말했어요. 김태식 의원이 정말로 도립미술관 건립 예산을 가지고 왔어요. 전주시장과 도지사가 부지를 확보하지 못하는데 완주군수가 현재의 부지를 확보해 건립한 거예요."-예향의 도시에 사는 도민들에게 예술인으로서 한 말씀해 주시죠. "도민들이 미술 전람회 등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요. 경남 거창 미술관에서 열린 초대전에 가보니 미술관을 참 잘 지었더군요. 너무 고마워서 축사를 하러 단상에 올라간 김에 제가 큰절을 했어요. 전주엔 없잖아요. 서양화 대작들 펴 놓고 전시하면 와서 볼 만 해요. 강암 서예관 옆에 서양화 미술관 하나 있고 하면 한옥마을이 제대로 살아날 것이라고도 생각해요. -끝으로 한 말씀해 주시죠."저는 화가로서 사명은 갖고 살아요. 길가에 뒹글어 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주어다가 책상 위에 놓고 평생 쳐다보면 무슨 진리든 나올 것 아니냐는 생각을 중학교 때 했어요. 기왕 그림 하면서 남보다 뒤지고 싶지 않아요. 그 일념으로 삽니다. 지난해 예술의 전당 전람회를 끝내 놓고 정리를 하다보니까 300호짜리 3장, 200호짜리 6장, 120호짜리 여러 장 등 모두 합하면 예술의 전당 전람회를 또 할 수 있겠더라고요. 지난해 마지막 전람회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예요. 예술원 회원, 예술원상 등을 놓고 주변에서 권하기도 하지만, 지방 사람은 힘들어요. 결국은 좋은 그림 그려야 해요. 고흐도 생전에 그림 한 장 팔았다고 하잖아요. 요즘 고흐그림 한 장에 465억 원 그래요. 거기에는 뭐 금이 붙었나요. 이중섭, 박승훈의 그림, 그런 그림을 그려놓을 겁니다. 열심히 그려야지 별도리가 있습니까?

  • 기획
  • 김재호
  • 2012.10.16 23:02

유럽의 한국영화 전문가… 외화 프로그래밍 주도

1942년 진안 용담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부와 명예를 두루 갖춘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 대부터 몰락하기 시작해 가난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형제 자매라고 해야 스무 살 위인 오빠와 둘 뿐이었던 그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고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형편 때문에 꿈을 접었다. 언어에 관심이 많아 중고등 학교 때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 덕분에 영어실력이 빼어났다. 문학 대신 간호사가 되는 길을 택해 들어간 전주 예수간호학교의 선교사들이 영어 잘하는 그를 눈여겨보고 미국유학을 추진했지만, 계획이 틀어져 결국 선배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났다. 시카고에 있는 병원의 교환간호사였는데 그곳에서 3년 동안 일을 했다. 그의 목표는 한 가지. 돈을 벌어 한국에 돌아가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었지만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스위스 바젤에 가있던 친구가 그를 불러 1969년 스위스로 갔다. 바젤의 시립병원에서 일하면서도 학업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병원에 취직한지 7개월 만에 바젤에서 그리 멀지 않은 프리부룩 대학 신문학과에 들어갔다. 나이 서른한 살에 대학생이 된 그는 문학 대신 영화를 택했다. 학기동안 공부하고 방학이 되면 다시 바젤의 병원으로 돌아가 일해 학비를 벌었다. 1학년 1학기 방학 때 병원에 실습 나온 스위스인 의과대학생을 만났다.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75년에 결혼했다. 반공주의 나라에서 태어난 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적 이념문제였다. 국가와 개인,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고 갈등했지만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불러낸 것은 1989년 로카르노영화제다. '달마가 동쪽으로 떠난 까닭은'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배용균 감독 인터뷰를 계기로 그는 유럽권의 한국영화전문가가 됐다. 90년대 초반부터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 회고전을 비롯해 유럽영화제의 한국영화 프로그래밍 대부분에 참여했다. '칸 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8년동안 부산영화제 고문으로 활동했고 2002년 '아시아독립영화포럼' 심사위원으로 전주영화제와 첫 인연을 가진 이후, 2004년에는 전주영화제 부집행위원장에 선임돼 2008년까지 해외영화 프로그래밍을 주도했다. 2008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전주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가 열정을 모두 쏟아 준비했던 '중앙아시아 특별전'은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지금은 영화제나 영화와 관련된 공식적인 업무를 다 정리하고 가끔씩 글쓰기하면서 여행을 즐기고 있지만, 아직도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 기획
  • 김은정
  • 2012.10.09 23:02

영화평론가 임안자 前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연륜 짧은 영화제일수록 교류·인적 네트워크 구축 중요"

2004년 전주국제영화제의 이슈는 단연 쿠바영화였다. 그해 특별전이란 이름으로 엮어낸 쿠바영화는 열일곱 편. 아름다운 영상과 혁명정신으로 무장한 영화에 관객들은 기대 이상으로 감동했으며 열광했다. 쿠바는 한때 연간 1백5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영화강국이었지만 한국관객들에게는 오랫동안 미지의 대상이었다. 비수교국의 굴레와 정치적 장벽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쿠바특별전은 그런 점에서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실험의 장이었다. 실제로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지난했던 쿠바영화특별전은 전주영화제에 특별한 역사를 안겼다. 그 역사를 있게 한 사람, 영화평론가 임안자 전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70)이다. 그는 쿠바영화 말고도 마그렙영화나 소비에트영화, 터키영화, 중앙아시아영화 등 보석 같은 영화들을 전주영화제와 극적으로 조우하게 했던 주역이다. 사실 낯설지만 빛나는 영화를 발견해내는 전주영화제의 가치는 이들 영화들로 온전히 실현될 수 있었다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69회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을 때, 일찌감치 부터 김기덕표 영화를 지지했었던 그가 생각났었다. 진안이 고향이지만, 1960년대에 한국을 떠나 스위스에 살고 있는 그를 9월 말, 전주의 한옥마을에서 만났다. 한국 방문은 3년만이다. 부산영화제의 공식초청을 받아 내친김에 두 달 동안의 여행 계획을 세워 방문한 여정이다. 올해 은퇴한 남편과 함께 한 이번 여행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다. 그는 2008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영화에 관한 모든 공식적인 일을 모두 정리했다. 그렇지만 인터뷰 내내 그의 관심은 영화와 영화제에 놓여있었다. 전주영화제를 향한 그의 애정은 여전히 크고 깊었다. 지면에 옮겨낼 수는 없으나 그만큼 귀 기울여야 할 조언이 적지 않았다. -선생님을 뵈니 쿠바영화특별전이 다시 생각납니다. 참 일이 많았었죠. "말로는 다 못하죠.(웃음) 지금 생각하면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나라와 아무런 교류가 없었던 나라잖아요. 그래서 필름 수급도 어려웠고, 영화 몇 편은 포대 자루에 필름을 담아 전달받기도 했어요. 게다가 지프(JIFF)에 참석하기로 했던 다니엘 디아즈 토렌즈 감독과 페르난도 페레즈 감독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이 묶여 한국입국이 불투명했다가 겨우 들어왔지요."-그렇게라도 쿠바영화를 가져와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제가 쿠바영화를 본 것이 1976년 페사로 영화제에서였어요. 영화 두 편을 봤는데 그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이 충격적이었어요. '언젠가 쿠바 영화를 소개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30년이 지나서야 현실로 이뤄낼 수 있었죠."-쿠바영화의 어떤 점이 선생님의 마음을 잡았나요. "쿠바영화는 정치성이 강합니다. 그러나 제가 좋아하는 것은 그런 정치적인 알레고리 때문이 아니에요. 쿠바 영화는 역사의 전진을 가로막는 구습을 타파하기 위해 카메라를 무기로 삼고 있습니다. 혁명과 예술의 이상적 결합, 그 미학적 모험을 시도한 쿠바 영화 에서는 진한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죠. 제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쿠바영화 말고도 마그렙(이슬람 세계의 서단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의 지방) 영화나 중앙아시아 영화까지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셨습니다. 쿠바와 마그렙 영화는 특히 전주영화제가 발견한 보석으로 평가받는데 이 영화들이 모두 만만치 않은 절차를 거쳐야 했지 않나요. "2005년 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을 때 내가 영화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되더군요. 영화제 자체를 빛나게 하는 일이 필요했지요. 그런데 전주영화제는 경제적으로 한계가 있어 노력과 열정으로도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유럽의 영화제에서 간간히 만나는 고유한 문화성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영화들을 주목했습니다. 주목 받지 못한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가치를 높이 사는 전주영화제라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죠. 좀 어려운 절차를 거쳐야했지만 고집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이들 영화 대부분이 주류 영화가 아닙니다. 세계사적 질서에서도 주변부로 밀려나있는 나라들이구요. 그런 점에서 보면 선생님께서 지켜온 철학이나 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쿠바도 그렇고 마그렙 영화를 선택한데는 분명한 계기가 있었어요. 미국의 무역센터 폭발사건 이후 아랍권에 비난이 쏟아졌죠. 매스컴을 통해 벌어지는 반 아랍 정책을 대하면서 그들의 문화 전반까지 매도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랍의 무궁무진한 역사나 그들의 미학, 그들의 노래, 그들의 삶을 읽어내는 일이 필요하더군요. 영화는 그 통로였습니다. 9.11사태로 불신과 차별, 마치 테러의 온상처럼 인식되고 있는 이슬람 종교 문화권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고 싶었죠."-이런 영화들을 고르고 협의해 영화제프로그램으로 기획하기까지 해결해야 할 일이 많지요. 돈으로만 되는 일도 아니어서 프로그래머의 역량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경험도 답이 될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참 흥미로워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일도 인적 네트워크로 해결되는 일이 많거든요. 그럴 때마다 영화제의 기본은 역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곤 합니다. 특히 연륜이 짧은 영화제일수록 교류를 갖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과제일겁니다."-선생님의 인적 네트워크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정도로 그 폭이 넓고 깊습니다. 그런 인맥을 어떻게 쌓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군요. "1989년 8월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수상한 배용균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계기로 유럽권에서 한국영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배감독 인터뷰를 계기로 뮌헨에서 열렸던 임권택 감독님 회고전에도 참여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의 영화전문지에 글을 쓰게 되었어요. 한국영화를 유럽에 소개하고 또 유럽의 영화를 한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면서 많은 영화제에 참여하고, 그렇다보니 영화인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죠. 그래서 한국 영화감독들이 영화제를 찾았을 때 통역이나 프레스 지원역으로 유럽영화계에 소개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영화인들은 선생님을 유럽에 한국영화를 소개한 주역으로 꼽습니다. 실제로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셨고, 덕분에 한국영화 바람을 일으켰죠."영화제를 다니다보니 한국영화를 소개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더군요. 임권택 감독님과는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은데, 덕분에 스위스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네 번의 한국영화 특별전을 열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일본영화가 고전으로 넘어가고 중국영화가 뜨기 시작할 때였는데 이 기회에 한국영화를 좀 더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시점으로 부터로 치자면 23년이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의 유럽진출과 선생님의 활동이 온전히 같은 연상에 놓여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요. 사실 저는 영화공부를 늦게 시작했습니다. 서른한 살에 대학에 다시 들어갔으니까요. 결혼과 개인생활 때문에 영화평론 등의 글쓰기나 영화제 관련 업무를 한 것은 그보다도 한참 뒤의 일이예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히려 늦게 시작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좀 더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한국 안에서의 활동도 그때부터였겠군요. "그렇죠. 1998년에는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에서 한 학기분 강의도 했어요. 생각해보면 참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당초 저에게 주어진 것이 이론보다는 실질적인 경험, 국제적인 영화의 흐름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한 학기는 너무 길어서 두 배로 압축해서 수업을 진행했어요. ' 유럽영화의 역사'였는데 스위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직접 필름으로 받은 영화를 보고 함께 공부했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가 놀랐던 것이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영화이론이나 이미 정립해놓은 영화사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한편의 영화, 한명의 감독을 제대로 알려면 그 시대의 사회적 조건, 정치적 조건, 역사의 흐름, 철학적 배경 등을 읽어내는 지식과 눈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더군요." -부산영화제와의 인연은 전주영화제보다 훨씬 먼저였지요."부산영화제가 만들어진 해에 베를린영화제에서 만난 관계자들로부터 제안 받았고, 그때부터 2003년까지 8년 동안 고문으로 일했습니다. 부산영화제도 초창기에는 경험이 없으니 어려움이 많았죠. 고문이라 사실 할 일이 없었는데, 크고 작은 교류와 대형스크린 프로젝트, 국제영화평론가협회를 부산영화제와 연계시키는 일을 했어요. 2002년에 전주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게 된 것을 계기로 그 다음해부터 전주영화제 일을 하게 되었죠." -부산영화제에 비해 전주영화제는 규모도 작고 연륜도 짧은 한계가 있는데, 어땠습니까. 수많은 영화제를 다녀보신 입장에서 당시에도 전주영화제가 가능성이 있어보였나요."2002년 전주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이 그만두면서 상황이 매우 어렵더군요. 당시 서동진 프로그래머가 위기를 참 잘 극복했던 것 같아요. 그 짧은 시간에 좋은 프로그램을 구성해놓은 것을 보고 능력 있고 좋은 프로그래머라고 생각했습니다. 2003년에는 옵서버로 참여했는데, 20여 년간 동서유럽의 크고 작은 영화제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던 오랜 경험이 전주영화제를 들여다보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인적, 조직체의 약점이 보이더군요. 국제영화제 경험이 적은데다 경제적 여건이 좋았던 것도 아니어서 빠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영화제의 가능성이 보이고 꼭 살아있어야 할 존재가치가 돋보이더군요. 전주라는 도시의 정체성도 한몫했을 겁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모든 일이 쉽지 않은 과정을 갖고 있었지만 그 순간순간이 모두 빛나는 결실이지 않았는가하는. 전주영화제를 떠나신 것이 2009년이었나요. "생각해보면 행복한 시간이었죠. 50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고, 2008년 뇌경색으로 활동을 정리할 때까지 정말 바쁘게 살았어요. 2008년 전주영화제의 중앙아시아 특별전을 다 준비해놓고 쓰러졌는데, 다행히 거의 완치되어 다음해에 전주영화제에 올 수 있었죠. 2009년 폐막식장에서 공로패를 받을 때에는 감회가 새로웠습니다."-폐막식장에서 전주국제영화제는 사람으로 따지면 어렵고 가난하게 성장했지만 스스로 이만큼의 위치까지 올라온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자수성가한 전주영화제의 갈 길이 여전히 편해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쉬운 일은 없습니다. 일이 잘되면 사람들이 안심하고 쉽게 생각하지요. 그럴 때일수록 더 긴장하고 노력해야합니다. 저는 전주영화제가 규모를 늘리기보다는 탄탄한 영화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주영화제는 좋은 덕목이 많죠. 독립이나 대안영화와 같은, 실력은 있으나 미처 발견되지 못한 감독과 영화들에게 전주영화제는 희망입니다. 그것을 꼭 지켜갔으면 좋겠습니다. 새집행위원장님을 맞았으니 기대가 더 큽니다." 그는 떠나야할 시기에 전주영화제를 떠나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전주영화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해 줄(?) 일은 아직도 적지 않다. 인터뷰 말미에 겨우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건강이 허락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나쁘지는 않겠다"는 답을 얻었다. 그리고 덧붙인 이야기. "사실 다 준비해놓고 못 가져온 영화들이 있어요. 그루지아 영화지요. 전주영화제가 꼭 가져와야 해요. 아프리카 영화도 있고." 올해 칠순을 맞은 그의 눈빛이 빛났다. 전주영화제가 그를 언제라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 기획
  • 김은정
  • 2012.10.09 23:02

트로트의 황제 송대관 "구수한 청국장처럼 가슴에서 우러난 노래 불러요"

"니가 기쁠 때 내가 슬플 때 누구나 부르는 노래/ 내려 보는 사람도 위를 보는 사람도 어차피 쿵짝이라네./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서민들이 즐겨 부르는 송대관(67)의 '네박자'라는 노래다. 구수한 목소리도 좋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쿨'해서 좋다. 흔히 '뽕짝'이라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의 노래에는 서민들의 애환이 그대로 녹아있고, 그것이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요계의 정상에 우뚝 섰고 우리 가요계를 이끄는 리더 역할도 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활력 넘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인기와 건강 비결을 듣고 싶었다. 사양하는 인터뷰를 가까스로 성사시켰다. 지난 14일 전북대삼성문화회관에 행사차 내려온 그를 분장실로 찾아가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굉장히 바쁘시던데 근황부터 들려주시죠."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쁠 겁니다. 마누라 얼굴도 못 볼 정도예요.(웃음) 중국 미국 등 해외 공연도 밀려있고"- 고향인 정읍에는 자주 다녀옵니까?"태인에는 어른들 산소가 있고 할아버지 31탑도 태인고등학교 뒤편에 있으니까, 전북에 내려오면 태인을 슬며시 찾아가죠. 조상의 넋을 기리기 위해 꽃다발도 하나씩 놓고 가고요."- 유난히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강한 것 같습니다."물론이죠. 저만 고향 있는 사람 같아요. 왜냐면 4인방(트로트 빅4) 중에 저만 전라도고, 태진아는 충청도, 현철과 설운도는 부산인데, 유독 우리 전라도 쪽이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해요. 어디 타관, 예를 들어 제주도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하기 위해 버스에 타고 있는데 막 사람들이 창문을 두드려요. 옆에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나 고향 사람이야!'그래요. 사인 하나 해주고 나면 또 두드려요. 다른 가수들이 있다가 '송대관 밖에 고향있는 사람이 없구만'이렇게 된 거예요. 딴 사람 보기가 미안할 정도죠."- 최근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듯합니다. TV 드라마에 출연해 좋은 연기력을 보여주고 계시는데요. 연기는 노래와는 좀 다르지 않은가요?"물론 자기 본업에 대해서는 자기만큼 충실하게 잘하는 사람은 없겠죠. 가수가 대사와 함께 연기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카메라가 돌아가면서 상대방 여러 명하고 같이 할 때 내가 미스가 나면 다시 해야잖아요. 두어 번 미스가 나면 제 정신이 아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면 할수록 칭찬이 올라오니까요. 그러나 노래보다 어려워요. 또 반대로 탤런트가 노래를 부른다면 더 어려운 거예요. 만인들 앞에서 노래 부른다는 것이 아랫도리 떨려서 못하는 거라고요."- 이제 할아버지 얘기로 넘어가 볼까요. 독립운동가 후손인데 왜 그동안 자랑을 안 하셨습니까?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하셨지 제가 한 게 아니니까요. 할아버지는 1919년 3월 16일 태인 장날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장꾼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자수성가하신 증조할아버지는 만석꾼으로 금광을 운영하셨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다가 일본인들에게 금광과 땅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할아버지는 군산형무소에서 고초를 겪다 돌아가셨어요. 애국자인 조상 덕분(?)에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달걀도 먹어 본 기억이 없어요. 봄엔 새싹 뜯어먹고 소나무 껍질 벗겨먹고."- 가수 입문은 어떻게 했습니까? "고등학교 다닐 때 갈등이 있었습니다. 공무원 시험이라도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주체할 수 없는 내 끼에 가요계 진출의 꿈을 이룰 것인가. 그런 도중에 전주방송(KBS) 전속가수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아니, 지방방송국에 전속가수가 있었다고요?"예, 상당히 앞서 갔죠. 밴드도 있었고. 지역에 다니면서 공연도 하고 그랬는데 거기서 노래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죠."- 서울로 진출하신 계기는요?"전속가수 생활을 하다 전주방송 대표로 서울 시민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노래경연대회에 나갔습니다. 3위를 했어요. 그 다음에 서울 KBS TV에서 연락이 왔어요. 매주 몇 명씩 나와 겨뤄서 1등을 뽑는데 3주 연속 1등을 하면 자동으로 장원탄생이 돼요. 제가 3주 1등을 했어요. 유청씨 아들 유훈근씨(가수 김상희 남편)가 그 프로그램 프로듀서로 있었어요. 서울로 올라오라는데 잠잘 데도 없고. 고심 끝에 친구들이 양복 한 벌 해주고 여비도 좀 챙겨줬어요. 그것을 어머니한테 드리고 돈 200원 갖고 서울 올라간 거예요. 기차는 무임승차하고 슬리퍼 신고. 그 때부터 파란만장한 서울 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1975년에'해뜰날'로 그야말로 쨍하고 떴는데요. 직접 작사를 하셨죠?"레코드사에 들어갔는데 신인가수들에겐 좋은 곡을 안주더라고요. 돈 있고 빽 있어야 하는데 저한테는 찌꺼기만 와요. 몇 년을 허송세월 하다가 안되겠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겠다. 나도 저 정도 작품가사는 능가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중고등학교 시절 책을 많이 봤거든요. 그래서 최초로 쓴 게 '세월이 약이겠지요'에요. 어머니가 너무 아프시고, 그걸 바라보면서 약 한첩 못 사주는 안타까운 마음이었거든요. 전국 차트에 1위로 올라가고, 그랬지만 내 양에 차는 곡은 아니었죠. 그러다 2-3년 있다 '해뜰날'을 썼죠." - 해뜰날은 그 때 참 엄청난 인기였는데요."그 때 역사가 시작된 거죠. 당시 10대 가수에 이미자씨를 비롯해서 남진 나훈아 등 가요사에 남을 쟁쟁한 분들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싹 쓸어버리고 가수왕이 된 거죠. 최고 인기가수 등 3관왕을 했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미국으로 가게 됐습니까?"진짜 내 세상을 만났는데, 질곡이 또 생긴 거예요. 우리 직업이 극장식 리사이틀이었잖아요. 전국 다니면서. 그런데 칼러 TV로 바꿔지면서 극장산업(나이트클럽)이 완전히 내리막길이 돼 버렸죠. 직장을 잃어버린 거나 똑같더라고요. 방송국 출연료는 몇 만원밖에 안돼요. 쇼를 해야 되는데 서울에 (나이트 클럽이) 2-3개 밖에 없었어요. 그거 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없는 상황이죠."- 잠깐만요. 사모님하고 만난 에피소드가 꽤 재미있던데요."결혼할 때 처가쪽 반대가 심했어요. 당시 저는 무명가수였으니까요. 아내가 일본 동경에서 유학중일 때 처음 만났는데 제가 그 땐 곱상하게 생겼었어요. 샌님같이,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바람 맞고 전화로 쌍욕을 해댔어요. 그러자 이것 봐라, 남자다운 데가 있네, 그렇게 해서 만났는데 교제 3년하고 결혼을 했어요. 교제 당시 아내 집에 가서 휘파람을 불면 장인 어른이 몽둥이를 들고 나오곤 했죠. 그러다 첫 아이를 임신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해줬죠.(웃음)"- 미국 생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당시 처가쪽이 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요. 초기엔 직장이 없는 저를 대신해 일어에 능통한 아내가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독립운동가 후손이 기모노 입고 일하는 아내한테 빌붙어 산다는 게 너무 한심해 그 때부터 정신차리고 일을 했죠. 샌드위치 전문점에 슈퍼마켓도 여러 개 운영했고 버지니아에서 쇼핑몰을 구입해 큰 돈을 만졌어요. 그런데 살만해지니까 몸이 아픈 겁니다. 이유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홈식(home sick 향수병)이래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 온 겁니다."- 바로 돌아와서 재기에 성공했는데요?"요즘 젊은 아이들하고는 달리, 트로트 가수가 다시 와서 재기하기는 힘들었죠. 그렇지만 저는 '혼자랍니다'를 시작으로 '정 때문에''차표 한 장'등 부르는 족족 히트를 했으니까요."- 대한가수협회장을 역임했기 때문에, 대중가요 활성화 문제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요즘 TV에서는 아이돌 가수와 K-pop 등의 영향으로 트로트가 설 자리가 좁아진 듯한데요? "1990년대 후반부터 음악 프로그램 출연자가 아이돌 중심으로 짜여지면서 성인가요나 포크음악 가수들의 무대가 점점 좁아졌죠. 방송국에 여러 차례 시정요구도 했는데 KBS를 제외한 방송은 상업방송이라 시청률하고 직결돼 있어요. 방송국 관계자들이 오히려 사정을 해요. 또 회장으로 있을 때는 전체적인 가요 장르에 대해 신경을 써야 했고요."- 가수 데뷔 45년째입니다. 그 동안 무명의 설움도 있었고 영광의 순간도 있었는데 왜 자신의 노래가 인기 있다고 생각합니까?"대중들의 심리를 잘 꿰뚫어 봐야죠. 옛날에는 누가 잘 울리느냐, 그것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그것을 요구하는 시대가 아녜요. 겉보리 흉년시대는 지났어요. 이제는 가사를 즐겁고 재미있게 만들어야 해요. 한번은 신나게 하고, 한번은 약간 복고로 흘러가고, 옷을 자꾸 갈아 입혀주듯이 해야 돼요. 첫째 너무 어렵지 않아야 하고, 둘째 남이 쓰지 않는 용어가 그 노래 속에 들어서 독창력이 돋보여야 돼요. 가령 '끈끈한 정 때문에'처럼 정(情)에다 끈끈한 이란 형용사를 내가 썼는데 그런 특별한 용어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 입담이 보통이 아니고 유머 감각도 뛰어난데요?"저는 처절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는데 남들은 재미있다고 웃는 거예요. 유머는 순발력이예요. 예능프로그램 (초청이) 밀려있는데 그런 이유 중의 하나는 재미있고, 비방이 아닌 현실적인 얘기를 바로 받아치면서 창의적으로 하니까요. 그 속에는 제가 겪었던 것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요. 가령 쟈니 윤쇼에서 한 말인데요. 미국 뉴욕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할 때 음식에서 파리가 나왔는데 증거인멸을 위해 먹어버렸어요. 손님이 고발을 해서 한 달 영업정지 시키면 저는 망하는 거예요. (손님에게) Can I see?(좀 볼까요?) bean cover, delicious!(콩 껍데기인데, 맛있는데요!) 하면서 파리를 먹어버렸어요. 쟈니 윤이 까무러치게 웃는데, 저는 그게 살 떨리는 불안한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어요. 노래도 그래요. 인생을 달관하다 보면 노래도 삭혀서 나와요. 구수한 청국장처럼. 저는 지금 가슴으로 노래를 부르지, 목구멍으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녜요."- 전라도 사투리가 이쪽 사람들이 들을 때는 구수한데, 다른 지역 사람들은 거북해 하지 않는가요?"그걸 지금까지 다 극복해 왔어요. 결과론을 얘기하자면 지금은 제 말을 더 재미있어 하고 배우려고 그래요. 친하게 지내는 방송국 부장이 표준말을 좀 쓰라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바로 '여보, 현철이가 서울 말 쓰면 나도 쓸께. 가(현철)는 표준말이여, 왜 나만 사투리여' 그랬죠. 그랬더니 얼굴이 벌개지더라고요."- 태진아씨는 실제로 라이벌 관계입니까?"찰떡 궁합예요. 우리는 아주 친하고 모든 게 설정(컨셉)이에요. 제 인생의 든든한 방파제죠. 10월 14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태진아와 함께'쏭의 전쟁'공연이 있어요."- 정읍 송대관가요제는 2009년 10월에 이틀간 열리고 말았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안타까운 문제인데, 약간의 정치적인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단풍철에 내장산 관광지를 알리는 좋은 기회인데. 다시 한번 불을 지폈으면 해요."(이 부분에서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아꼈다.)- 항상 활력이 넘치고 젊게 사는데 건강 비결은?"운동에 미쳤어요. 남산에 매일 올라가고, 청계산에도 가고, 또 헬스클럽에 나가 근육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하니까요. 스태미너가 운동에서 나오니까요."- 가요 팬들에게 한 말씀 해주죠."제가 부르는 노래를 받아주지 않으면 죽은 가수죠. 그런데 저에게 많은 사랑을 주고. 어떤 분들은 공연장에 쫓아 와서 악수 한번 하고 돌아서면서 '나, 이제 죽어도 소원이 없다'고 해요. 이럴 정도로 제가 사랑을 받는데, 너무나 감사하죠."- 끝으로 전북 도민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저는 정말 전북 도민들에게 빚이 많아요. 전라북도가 없으면 제가 이렇게 탄탄하게 되지 못했을 거예요. 옛날에 가수왕을 우편으로 집계할 때 전라북도내 우체국에 우편엽서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제게 사랑을 주었죠. 그런 사랑을 받고 살아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답례를 하려고 합니다.

  • 기획
  • 조상진
  • 2012.09.25 23:02

임진모 교사는

2000년 처음으로 교단에 선 뒤 왕성한 동아리 활동을 하는 12년차 화학교사다. 안병만 교장과 동료 교사들은 '아이들 중심으로 사시는 선생님'이라고 평한다. 제자들한테도 살갑고 다정다감한 '쌤'으로 통한다. 삼겹살데이 때에는 직접 삼겹살을 사다 아이들과 함께 구워먹는 자상함도 있고, 수능시험을 앞두고는 아이들 이름을 가슴에 달고 새만금에서 수능대박 기원 마라톤을 뛰는 열정도 있다. 그의 싸이월드 미니 홈페이지에는 'Carpe Diem'이란 말이 내걸려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하루 하루를 후회 없이 보내려는 의지의 표현이겠다. 이런 글도 있다. " 늘 교무수첩 첫 장에 써 내려갔던 어느 퇴직 교사의 글! '10년은 열정으로, 10년은 기술로,다음 10년은 사랑으로' 이제, 그 첫 10년을 채웠다." 교단에 선 뒤 10년이 지날 즈음 느낀 소회이자 다짐이겠다. 동아리활동은 2003년 방송부를 지도하면서 심취했다. 인성과 창의력을 기르고 입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지금은 과학탐구동아리인 'C&C'와 올바른 학교문화정착 동아리인 '근영나래' 두 동아리를 지도하고 있다. 동아리활동은 단순한 탐구나 봉사활동이 아니라 재능 나눔과 기부 봉사가 돼야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전북교육정보과학원 발명영재원 연구위원 겸 지도교사, 발명영재 교재개발연구회 연구위원, 전북도교육청 수능문제 개발위원, 전북e-스쿨 논술 지도교사, 전북학생UCC경진대회 심사위원, 대한민국 영상페스티벌 심사위원, 한국사이언스챌린지대회 심사위원 등 경력이 화려하다. 수상 경력은 A4 용지 4쪽 분량에 이를 만큼 다채롭다. '올해의 과학교상'은 발명 등의 탐구활동에서 청소년 멘토링 자원봉사활동으로 영역을 넓힘으로써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역량을 강화한 공로로 선정됐다. 익산 출신으로 원광고와 우석대 화학과를 나온 뒤 우석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래의 꿈은 항상 더 재미있는 일을 개발하고 실험하는 일이다. 마흔 한살 동갑내기 부인 전연희 여사와 사이에 1남(초등 4년) 1녀(초등 2년)를 두었다. 아이들도 장래 희망을 과학 분야에 두고 있더냐고 물었더니 꿈이 일주일마다 변한다고 했다. 하지만 특출난 호기심 같은 것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로보트 팔을 조작하면서는 잘 되지 않으니까 울더라며 그러면서도 끝내 해내더라고 했다.

  • 기획
  • 이경재
  • 2012.09.18 23:02

동아리 지도의 '달인' 임진모 교사 "탐구활동·과학체험은 사고력·창의력 발달에 도움"

과학동아리 하면 근영여고를 떠올릴 만큼 등식의 이미지가 굳어져 있다. 각종 전시, 공모, 시상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과학동아리 출신 학생들이 입학사정관 테스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유명 대학에 진학한 것도 이미지를 높인 계기가 됐다. 과학동아리는 이제 발명이나 탐구활동을 뛰어넘어 탐구활동에서 얻은 결과물을 갖고 봉사에 나서는 등 영역을 넓히고 있다. 자원봉사 활동 역시 스펙 쌓기 차원이 아닌, 진정성 있는 봉사라는 점이 인정돼 전국 최우수 단체로 평가받고 있는 중이다. 이런 활동의 중심에 임진모 지도교사(41)가 있다. 동아리 지도활동의 '달인'이다. 지식왕, 올해의 과학교사상을 수상했고 과학동아리가 전국자원봉사대축제 대상과 전국자원봉사대회 은상 등을 수상할 수 있도록 지도한 주인공이다. 궁금한 점이 많은 터에 푸르덴셜 사회공헌재단이 주최하는 전국자원봉사대회 은상 수상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중이라고 했다. 인터뷰는 수상한 다음날인 12일 근영여고 송지관 진학실에서 2시간 동안 이뤄졌다.-3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과학동아리를 지도하고 때로는 토일요일에 체험활동을 해 왔는데 힘들지 않나요. "동아리활동은 움직이는 만큼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비록 몸은 힘들지라도 변화에 대처하면서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항상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어제(11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국중고생자원봉사대회 시상식에 다녀오셨죠. 분위기가 어땠어요."봉사활동하는 청소년들, 대단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또 한번 배우고 왔어요. 봉사활동의 테마와 트랜드 등에서 교훈되는 점이 많았는데 새롭게 시도하려 합니다."푸르덴셜 사회공헌재단이 주최하는 올해 전국중고생자원봉사대회에서 전주 근영여고 '과학탐구동아리 C&C'는 은상 수상자(이소정 양 등 20명)로 선정됐다. 이 대회에는 전국에서 총 1,759건(6,406명)이 응모했고 지난 11일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지난달에는 전국자원봉사대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는데 어떤 내용입니까."4월에 계획서를 작성해서 5월 한달 동안 봉사활동을 펼쳐 경연을 벌이는 대회인데, 봉사활동의 진정성을 높이 평가 받았습니다. 과학축전 과학축제 등 교외 과학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폐안경 나눔 캠페인과 재활용비누 제작 판매 등의 활동을 펼쳤습니다."-최근 3년간 수상경력이 19차례나 되던데 웬 상을 이렇게 많이 받았습니까."과학탐구대회와 과학체험, 청소년 멘토링자원봉사 활동과 관련한 것들인데 몇년 동안 이런 활동을 하다 보니 공모전 참여가 마치 취미처럼 됐어요. 아이들한테 입시에 도움도 되고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했지요. 노하우가 축적되다 보니 이젠 경쟁력이 강해져 마약처럼 돼 버렸어요."-과학동아리 'C&C'('C&C'는 Chaos와 Cosmos 이니셜)는 어떤 동아리입니까."1998년쯤 천문관측과 과학교과 관련 스터디그룹으로 시작된 동아리예요. 처음엔 교내 활동에 주력했는데 나중에 밖에 나가 활약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하는 의견이 있었어요.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접목한 뒤 전국적인 축전이나 공모전, 선진 사례 등에 참여하고 발표하면서 노하우를 축적했다고 볼 수 있지요. 과학탐구와 체험, 봉사활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언제부터 이 동아리를 맡아 지도해 왔습니까."2003년부터 맡았는데 당시 과학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1년씩 지도했어요. 그런데 나중엔 맡아 할려는 선생님이 안 계셔서 제가 맡았어요."-어떻게 운영하고 있나요. 예를 든다면."활동적인 동아리로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탐구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는데 2004년 영화속 과학원리 찾기를 주제로 한 탐구가 교육청 공모에서 선정되면서 자신감을 가졌어요. 대한민국과학축전을 견학하면서 과학체험 프로그램 운영의 방향을 모색하고 실생활에서 과학원리를 찾아 제품을 만들어 기부도 하고 있고요. 폐안경 활용과 재활용비누 등을 판매해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하고 자림원 등 시설을 찾아 봉사하는 등의 활동을 병행합니다."-작년에 '올해의 과학교사상'(교과부 주최)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어떤 계기였나요."과학동아리 운영과 과학탐구, 과학 관련 우수 활동사례를 평가한 것인데 심사를 잘 해주신 것 같습니다."-상금도 주던가요."500만원 받았습니다."-지난 2007년에는 제6대 지식왕(한국과학창의재단)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지식왕이란 것은 뭡니까."학생들의 과학 관련 질문에 답변한 것을 놓고 평가하는 것인데 어려운 질문들이 많아요. 답변중에 선택에 도움이 되면 좋은 평가를 받아요. 공부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창의력을 높이자는 취지에서 선정합니다." -대학입시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데 대학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입학사정관들이 방문하면 특장점들을 설명하는데 그때마다 진정성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해 주었습니다. 외부 수상의 경우 사교육에 의존한 것인지, 학생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를 중요하게 판단해 결정하게 되는데 봉사대회의 경우 동아리 회원들의 적극적인 의지에 의한 것으로 입학사정관들이 평가해 주었습니다."-학생들에겐 어떤 점들이 도움이 됩니까."탐구활동이 과학체험 프로그램으로 이어져 호기심과 창의력이 길러지고 봉사활동까지 병행하기 때문에 '사람공부'도 하게 됩니다. 장애인 등 여러 계층과 만나 함께 프로그램을 운영하다 보면 그들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효과가 있어요. 선후배간 입시경험 공유, 공동체 의식 함양, 발표력 향상 등 좋은 점이 많아요."-창의력 향상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그렇습니다. 과학체험 봉사활동의 경우 이론적인 바탕에다 시범 운영, 다양한 방법의 설명, 프로그램 실험방법 전환 등의 학습을 하게 됩니다. 동영상을 제작할 때도 스스로가 디자인하고 기획출연제작하기 때문에 창의력이 향상되고 옆에서 돕기 때문에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되지요. 이런 활동을 하게 되면 자기소개서 등을 작성하는데 아주 효과적입니다."-동아리 회원은 아무나 가입할 수 있나요."매년 선발을 통해 학생들을 뽑아요. 과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남다른 학생들이 모집 대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의지가 강한 학생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1학년에서 3학년까지 22명인데 희망한다고 해서 모두 가입되지는 않아요. 인성 적성 등 기본적인 걸 다 봅니다. 적성을 가장 많이 고려합니다." -학생들은 수능이다, 괴외다 해서 선뜻 동아리 활동을 하려 하지 않을 텐데요."학기 초에 들어왔다가 적성이 맞지 않거나 활동이 너무 다양해서 나중에 탈퇴하는 경우도 있어요.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싶어하는 인문계 학생이 있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과학체험을 하고 싶다고 해서 과학체험을 할 때마다 데리고 다닌 적도 있어요. 그 학생은 지금 교사가 돼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입시제도가 기계적인 수치를 적용치 않고 창의력을 테스트하는 쪽으로 비중이 높아지고 있어 앞으로 인기를 더 끌 수도 있겠네요."사실은 향후 입시제도가 창의력에 비중을 두는 쪽으로 변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에 이런 활동을 시작한 측면도 있어요. 여학생 특유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활동, 개별적 활동보다 공동체의 활동을 유도하는 쪽으로 동아리 활동을 전개시켜 나가려 합니다." -대학 입시에선 어떤 성적을 거두었나요."재작년 이화여대 미래인재 전형에서 뛰어난 실적을 거두었고 작년 서울과학기술대와 전주교대, 전북대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좋은 결과를 나타냈습니다."-동아리 활동에 매진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나요."2003년 방송부와 과학동아리를 함께 맡았었는데 과학 관련 여러 단체의 활동이 과학교사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어요. 학생 중심의 활동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고 여학생들이 할 수 있는 즐거운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이 동기라면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지원사업에 관심을 가졌고 교육청과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지원에 힘입어 공모전 참여 등으로 확대했어요. 돈이 문제인데 지원금을 통해 학생들의 적극성과 도전의식이 커져갔고 지도하는 것 역시 역동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동아리의 우수한 실적이 학교 이미지에도 크게 보탬이 됐겠어요. "저 뿐만 아니라 과학교사들의 노력을 통해 과학과 관련한 우수한 실적을 거두었어요. 학부모와 학생뿐 아니라 지역사회에서도 학교 이미지 향상효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대한민국 좋은 학교 박람회'에 우수사례로 소개돼 홍보효과가 컸고 박람회 체험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젠 '과학체험동아리=근영여고' 등식이 성립했다고 자부합니다. 중학생 대상 우수학생 유치활동 때 덕을 많이 보아요."-학교 차원의 인센티브는 없나요."대학입시에 치중하다 보니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는 걸 꺼리는 학교들이 많은데 우리 학교에서는 이런 활동 하는 걸 허용하고 포용합니다. 이 자체가 인센티브라고 해야죠. 입시가 코앞인데 아이들 데리고 어딜 나가느냐는 학교가 사실 많습니다. 수상하면 교장선생님께서 플래카드도 걸어주시고 관심이 많아요."-동료 교사 얘기 들어보니까 실력뿐 아니라 열린 사고와 아이들 입장에서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하더군요."좋게 평해 주신 것이겠죠. 가급적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생각하고 관찰하려고 노력합니다. 아이들과 소통하고 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면 눈높이를 맞춰야 하고 이이들과 어우러져야 합니다. 아이들 관찰하는 게 습성이 됐어요. 그랬더니 불편함이 사라지고 아이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얼굴 표정을 보고 "너 어제 엄마하고 싸웠지"하면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와요."-그런 열정이나 철학은 어디에서 나오나요."학교 다닐 때 '수면제'라는 별명을 가진 선생님이 계셨어요. 졸리게 수업한다는 뜻이지요. 교단에 섰을 때 혹시 나에게도 그런 별명이 붙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수업때 음료수 5개를 준비해 두고 학생들 반응이 시원찮을 때마다 음료수를 들이마시며 '화, 맛있다'하며 주의를 환기시키며 수업을 했는데 다행히 음료수 한개 마시고 수업을 마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자기노력과 도전이 반복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데 입시에 소홀하지는 않을까요."동아리 운영은 곧 입시와 연계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3학년 담임을 맡아 수행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돼요. 입시 변화 흐름을 알 수 있고 대처하는 방법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 잇점이 있어요. 몸은 힘들지만 동아리 활동을 하면 플러스 효과를 볼 수 있어요."-동아리 지도교사 활동을 하다 보면 아쉬운 점도 있을 텐데요."이런 활동을 하지 않아도 대학 갈 수 있는데 굳이 어렵게 그런 활동을 하는 이유가 뭐냐는 기류가 있어요. 일부 학부모는 물론 동료 교사들까지도 성적의 중요성만을 고집하며 동아리활동을 폄하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이런 게 제일 힘들어요. 초창기 땐 학생은 지원하고 싶어 하는데 부모가 말리는 일도 많았어요. 지금은 교내외 활동 모습을 보고는 함부로 안해요. 동아리 활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활동을 통해 성숙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나눔보다는 개인적인 욕심에 치우친 활동을 하는 학생들도 있어 상처 아닌 상처를 받는 일도 있어요."-학생들의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한마디 조언한다면. "학생들의 창의력은 곧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목표의식이 있어야 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극이 있어야 해요. 자극이 있어야 동기유발이 되고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고 봐요. 동기를 부여하고 의욕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마인드가 중요합니다. "

  • 기획
  • 이경재
  • 2012.09.18 23:02

김옥정 이사장은 - 고아·학대 받는 여성들의 大母…사회복지 산증인

고아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 학대 받는 여성들의 대모(大母)인 사회복지법인 삼성원 김옥정 이사장(82)은 전라북도 사회복지분야의 산증인이다.1931년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김 이사장은 전주여상과 이리 제일보육학교를 졸업하고 간호대학에 입학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학업을 잇지 못하고 군산 구암유치원에서 보육교사로 7년간 일했다. 이후 전주 삼성보육원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한 것을 계기로 1971년 삼성보육원 보모장을 맡게 돼 지난 41년 동안 2000여명이 넘는 아이들을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시켰다. 또한 가정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나온 여성들과 미혼모를 위한 삼성여성의 쉼터를 지난 1996년 문 열어 2000여명에 달하는 여성들을 돌보아 왔다. 긴급 구호나 상담이 필요한 위기의 여성을 위한 여성긴급전화 1336도 개설해 13년간 운영해오다 지난해 7월 천주교전주교구 유지재단으로 운영을 이관했다.김 이사장 집안은 독립운동으로 명망있는 집안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큰 외삼촌이 전주 3.1운동은 주도한 김인전 목사(1876~1923)로 지금의 국회의장 격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4대 의장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김 목사는 전주 서문교회 2대 담임목사를 역임했으며 전주 다가공원 내에 추모 기념비가 있다. 작은 외삼촌인 김가전 목사(1892~1951)도 전주 3.1운동을 주도했으며 전주신흥학교 교목과 전주북중 교장, 3대 전라북도 지사로 재임했으나 6.25 전쟁 중에 순직했다. 어머니 김인애 선생과 아버지 김종곤 선생도 전주 3.1운동에 함께 참여했으며 어머니는 현장에서 붙들려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지난 2009년 독립유공자로 뒤늦게 지정됐다. 김 이사장의 다섯 형제자매는 일제 치하 때 일본식 이름 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해 가슴에 빨간 표찰을 달고 다녔지만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남편(고 소준영)과는 30년전 사별했으며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소병문씨(58)는 외항선 선장이자 목사로서 선교활동에 힘쓰고 있으며 딸 소향아씨(57)는 전북도 보건환경연구원 인수공통감염과장으로 재직중이며 차남 소병무(55)씨는 미국에 거주중이다. 1975년 한국선명회장상 1985년 국무총리상 1993년 보건복지부장관상(아동복지부문) 2002년 사회복지대상을 받았다.

  • 기획
  • 권순택
  • 2012.09.11 23:02

대모(大母) 김옥정 삼성원 이사장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들어갈 때 가장 기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 평생 부모없는 아이들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위해 헌신해 온 김옥정 삼성원 이사장(82). 지난 6월말로 41년간 봉사해 온 삼성보육원 원장직을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아이들과 여성들을 위한 일만은 쉬지 않고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사실 김 이사장의 외가와 부모는 일제치하 때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이끌어 온 애국지사들이지만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큰 외삼촌은 지금의 국회의장 격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김인전 목사이고 전라북도 지사로 재임하다 625 전쟁때 순국한 김가전 목사가 작은 외삼촌이다. 부모들도 전주 31운동을 주도한 외삼촌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투사 이지만 '집안 일을 내세우지 말라'는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그 공적이 가려져 왔었다.그 같은 가풍 때문인지 김 이사장도 인터뷰 요청에 "낯 간지럽다. 자랑하기 위해 한 일이 아니다."며 한사코 고사했지만 기자의 무례한 무단 침입(?)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김 이사장을 전주 효자동 사회복지법인 삼성원 사무실에서 만났다.-지난 6월말로 41년간 맡아왔던 삼성보육원 원장직을 그만두셨는데 평생을 헌신해 온 보육사업에서 은퇴하신 소회는."나 좋아서 한 일인데 헌신은 무슨 헌신. 내가 내 놀이터를 잘 만난 것이지 자랑할 거리는 아니예요. 아이들을 보면 꼭 꽃봉오리 같아요. 물주고 잘 보살피면 예쁘고 사랑스럽게 피는 꽃 같죠. 아이들을 데려다 10여년을 함께 보내면 어느새 청년이 되고 20년이 지나면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죠. 그렇게 잘 성장하는 모습들을 보면 아이들에게 고맙죠. 은퇴했다고 하지만 지금도 시간 되는대로 나와서 사무적인 일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만두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어려운 아이들과 가정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을 위해 평생을 일해 오셨는데 어떻게 이러한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까."어려서 예수병원 뒷동네에서 살았어요. 이웃에 목사님 선교사님 등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사셨는데 그 분들의 삶을 통해 많이 배웠죠. 나도 저 분들처럼 살았으면 하고요. 또 저희 집이 잘 산 것은 아니지만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와 기전학교 교사이신 어머니로부터 가정교육을 잘 받았습니다. 그러나보니 자연스레 부모없는 아이들과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죠."-삼성보육원은 어떻게 운영하게 되었나요."간호대학을 다닐 때 625 전쟁이 터져 학교를 못 다니고 군산에서 유치원 교사로 7년 정도 다녔어요. 그 뒤에 삼성보육원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했어요. 아이들을 돌보면서 빨래도 해주고 밥도 해주면서. 그런데 보육원 원장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마땅한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보육원 운영을 떠맡게 됐습니다."-여자로서 한 둘도 아니도 100여명이 넘는 아이들을 돌보는게 쉽지 안았을 텐데요."당시에도 아이들이 130여명 정도 보육원에서 생활했죠. 그런데 힘들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들었어요. 아이들도 착하고 말도 잘 듣고 제 기억에 아이들이 큰 사고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평생동안 아이들을 때려본 적이 없으니까요. 또 내 아이처럼 모든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내 자녀들과 똑같이 대해주었죠."-그 많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운영하시는데 어려움은 없었는가요. "제가 먹고 쓰는 것 외에는 모두 아이들 보육하는데 들어갔죠.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누군가 희생이 없이는 운영을 할 수 없습니다. 내 것을 내 놓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죠."-지난 1985년에 사회복지법인인 삼성원에 전 재산을 후원하셨지요."나 잘 먹고 잘 살려고 보육사업 한 일이 아니고 내 자랑 할려고 하는 일도 아닌데 그런 것은 물어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지금까지 삼성보육원에 들어와 성장해서 나간 아이들은 얼마나 되는가요."글쎄요. 정확한 숫자 통계를 내보지 않았는데. 한번 들어오면 대략 10~20년 정도 여기서 생활하다 자립하니까 그동안 2000여명은 넘을 것 같아요."-지나온 일들이 힘들었겠지만 보람도 크시겠습니다."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올바르게 성장해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목회자나 사회복지 분야로도 많이 진출했죠.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갈 때가 가장 기쁘죠. 밤 새워 공부할 때 라면이라도 배불리 먹이지 못하고. 제대로 간식거리도 챙겨주지도 못했는데.(금새 눈시울이 붉어져 말을 잇지 못해 이야기를 잠시 중단했음) -밖에 나가면 인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겠는데요."시내나 마트에 나가면 '할머니'하고 좇아오는 아이들이 많아서 고개를 못들고 다녀요. 택시를 타면 목소리로 알아보고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아이들도 있고요. 그래서 택시를 타게 되면 행선지만 말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가요. 그래도 알아보는 아이들이 있는데 내릴 때 택시비는 뒷자리에 놓아두고 거스름돈은 아이들 과자 사다 주라고 하죠. 저희들은 반가워서 그렇겠지만 혹시 나 때문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항상 조심스러워요. 그래서 요즘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외출도 안해요."-이 곳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보육원을 후원하는 사람들도 있겠네요."제가 절대 못하게 합니다. 그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전혀 없어요. 아무런 기반이 없죠. 그런데 나 도와주겠다고 하다가 그 아이들이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면 안되죠. 그래서 '나 도와주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으니까 너희들이 잘 살고 절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말라'고 항상 당부합니다. 못하게 하니까 나 모르게 자녀들 이름으로 후원하는 아이들도 있는 것 같아요. 나중에 알게 되면 너부터 자립하라고 합니다." -성장해서 보육원을 나가는 아이들에게 3가지를 꼭 당부하신다고 들었는데요."먼저 가장으로서,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합니다. 자녀들을 너와 같이 보육원에 맡기는 일이 절대 없도록 말입니다. 또 국가와 사회와 이웃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마지막은 남의 것을 절대 탐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가정폭력이나 성폭력으로 어려움을 당한 여성들을 위한 쉼터도 만들어 운영하셨지요."1995년도에 정부에서 전국 시도마다 여성쉼터를 만들도록 했어요. 전라북도에서 마땅히 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제가 맡았죠. 1996년 9월에 여기 삼성원에다 쉼터를 개설했습니다."-여성 쉼터는 어떤 사람들을 돌보는가요."여성 쉼터는 학대받은 여성들과 그 아이들을 위한 피난처죠. 주로 가정 폭력에 시달린 여성들과 성폭력 피해를 당한 미혼모들인데요, 각각 처한 상황과 여건이 달라서 돌보는데 어려움이 많죠. 특히 마음과 육체적 상처를 안고 살아 온 사람들이기에 치유하는데도 힘들어요. 하지만 어머니 같이, 할머니 처럼 대해주니까 지금까지 불상사는 단 한 번도 없었어요."-부부 갈등 때문에 위기의 순간도 많았다고 들었는데. "다투고 싸우고 하다보니 남편들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찾아오는 경우도 많이 있죠. 이 곳까지 가방 속에 흉기를 넣어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내가 미리 알아채고 '아기 줄려고 과자까지 사왔구나'하면서 가방을 따로 맡아두죠. 그럴 때면 주위에서 '내가 예수 안 믿었으면 아마 점쟁이가 됐을 것이라고 그래요. 어떻게 그 가방 속에 흉기가 있는지 알았냐고.' 한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하면 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항상 긴장할 수 밖에 없어요."-이 곳을 다녀간 여성은 얼마나 되는지요."매년 평균 100여명 정도 돌보고 있어요. 퇴소할 때 엄마와 아빠가 아이들 손잡고 함께 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대략 2000여명 정도 돌본 것 같아요."-1998년에는 여성긴급전화 1366을 개설해서 운영했었죠."1366도 역시 정부 시책으로 설치 운영했는데요, 제가 13년 정도 하고 지난해 7월부터는 천주교유지재단에서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긴급전화를 하루 24시간 운영하려면 보통 힘들지 않았을 텐데요."상담원들은 주로 낮에 근무하고 야간 당직은 저 혼자 했어요. 그러다보니 전화대기 때문에 외출 한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긴급 상황이 주로 밤에 많이 발생해요. 부부싸움도 낮보다는 밤에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죠."-가정폭력의 주 원인은 무엇인가요. 문제점과 대책이 있다면. "예전엔 주벽 등 이유없는 폭력이 많았는데 요즘은 주로 경제적 이유와 종교적 갈등이 많아요. 여자들도 책임감을 갖고 살아야 하지만 남편들도 아내를 어머니처럼 여겨서는 안돼요. 무엇이든 다 내 맘에 맞게 해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얘기죠. 서로 참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감싸주면 문제가 있을 수 없죠. 그리고 제가 미국에 가봤더니 미국에선 가정폭력이 발생하면 남편을 격리하는데 우리나라는 남편은 집에 놔두고 여성과 아이들을 피난시켜요. 잘못한 사람이 큰 소리치고 집에 있다는 것은 모순이예요. 남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일정한 장소로 격리해서 일정기간 순화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요즘 성폭력, 특히 아동 성범죄가 심각한데요."성폭력 문제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개연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인 동시에 국가도 정신차려야 합니다. 성범죄자는 전자발찌 정도가 아니라 특별한 관리대책을 세워야합니다. 성범죄자들 인권을 얘기하는데 몸과 마음에 평생 씻을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인격과 영혼까지 파괴하는 사람에게 인권운운 하는 것은 사치에 불과합니다. 인간을 존중할 줄 알고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인권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저항능력이 없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자는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마땅합니다."-가족 이야기 좀 할까요. 명망높은 독립운동가 가문인데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전주 31운동을 주도한 김인전 목사와 김가전 목사가 외삼촌이고 어머니 김인애 선생님(1898-1970) 역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혹독한 옥고를 치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외삼촌인 김인전 김가전 목사님이 31만세운동을 주도할 당시 어머니는 기전학교에 계셨는데 그 때 학생들 13명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치마폭에 숨겼다가 남문 인경 소리에 맞춰 장터로 나가 뿌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투옥됐죠. 6개월간 옥고를 치르셨는데 한 번은 추운 겨울에 여학생들을 밖으로 끌어내 무릎을 꿇리고 찬물을 온 몸에 부었다고 그래요. 그러니 치마까지 얼어붙어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고문 후유증 때문인지 노년에는 파킨슨병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죠." -어머니께서 일경에 잡히시자 이름대신 가명을 써서 가족들이 면회 갔다가 못하고 돌아왔다는 얘기가 있던데요."두 오빠에게 누가 될까봐 김인애 라는 이름 대신에 최귀물이라고 외가 성씨에 아명을 댔다고 그래요. 가족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면회를 신청하니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해서 면회를 못하고 가족들이 넣어준 옷가지 등 물건도 받지 못했다고 그래요."-아버지 김종곤 선생님도 전주 31운동에 참여했다가 6년여동안 망명생활을 하셨었고 자녀들도 신사참배나 창씨개명을 안했다죠."아버님도 31만세운동 당시에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했다고 그래요. 또 저희들에게 일본말은 못쓰게 하셔서 초등학교에 1000여명이 다녔는데 우리 형제자매들만 창씨개명을 안했어요. 등교 때도 신사참배를 안하자 학교에서 가슴에 빨간 리본을 달고 다니게 했어요. 그리고 교장실로 불려가서 매일 정신교육을 받아야 했었죠."-부모님께서 그렇게 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는데 어머니 김인애 선생님만 지난 2009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어요. 왜 독립유공자 신청을 안하셨는지요."기전학교 출신으로 어머니와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던 임영신 상공부장관이 전주 방문 때 독립유공자 신청을 권유했는데 아버님께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하는 일인데 신청할 필요가 없다.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면서 단호히 거절했다고 그래요. 어머니도 '가족들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느냐'고 만류했기 때문에 안했죠. 그런데 몇년 전에 손자가 할머니의 독립운동 공적을 신청해서 어머니에 대한 독립유공자 지정이 이뤄졌습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9.11 23:02

신경민 의원은

1953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북중과 전주고를 나왔다.유년과 소년시절을 즐겁게 보낸 고향 전주를 아끼고 자랑스러워한다.어린 시절 그는 신문기자였던 아버지(전북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신현근씨) 덕분에 많은 책을 읽었다.문학전집류부터 <조선총독부> 같은 정치물까지 집에 있는 책은 가리지 않고 읽었지만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그의 말로는 특별히 잘하는 것 없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정직하고 바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성적은 중 상정도 유지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달라졌다.서울대에 가고 싶었지만 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겠다고 깨달은 후 밤새워 공부하기 시작한 결과였다.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에는 전체 10등 권에 들었다.국어 사회 영어는 상위권이었으나 수학과 과학 성적이 형편없어 서울대 사회학과를 선택했다.독재의 엄혹한 70년대에 대학을 다녔지만 거리로 나가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지적세례에 흠뻑 빠졌다.적극적인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독재가 얼마나 국가를 피폐하게 하고 인간을 파멸로 내모는지를 직시하면서 독재를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혁명이란 단어는 그때 그의 가슴을 울렸던 단어다.군대에 다녀와 취직할 곳을 찾다가 몇 년씩 공부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언론사에 응시했다.1981년 엠비시 기자가 됐다.기자로 지내면서도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의 갈래는 고민하지 않았다.권력과 기득권과의 싸움을 원칙으로 삼았을 뿐이다.1986년부터 크고 작은 뉴스 앵커로 활동했으며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고, 법조와 외교 분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2008년 3월부터 엠비시 9시 뉴스 앵커를 맡아 클로징 멘트의 의미와 가치를 시청자들에게 안겼지만 그 때문에 온갖 압력과 핍박, 수모를 당했다.그래도 버텨 정년을 채우고 퇴직했다.은퇴이후 민주당 프러포즈를 받아 입당했으며 대변인을 거쳐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텃밭인 영등포지역에 출마, 적지 않은 표차이로 이겨 국회의원이 됐다.독서량이 큰 자산인 그는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마음을 움직인 책으로 꼽는다.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것을 알게 해준 이 책을 통해 그는 오늘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알게 됐다.특별히 좋아하는 운동도 없고, 골프도 하지 않는다.음주가무와도 거리가 멀다.그래서 기자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그래도 꼭 노래를 불러야 할 때는 송창식 노래를 부른다.앵커시절 클로징 멘트도 그랬지만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모든 글은 직접 쓴다.특별히 글에 염격해서 의원실 참모들을 긴장하게 한다.

  • 기획
  • 김은정
  • 2012.09.04 23:02

민주통합당 신경민 국회의원 "언론, 지배 권력과 싸우면서 원칙과 독립 지켜야"

"회사 결정에 따라서 저는 오늘자로 물러납니다. 지난 1년여, 제가 지닌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힘은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서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과 매일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희망을 품은 내일이 언젠가 올 것을 믿습니다. 할 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 멘트를 여기서 클로징 하겠습니다."다소 긴 이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고 싶었다. 할 말은 많이 남았는데 더 이상 할 말을 못하게 되었던 사람. MBC의 간판기자이자 앵커였던 민주당 신경민의원(59)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클로징 멘트는 2009년 4월 13일 밤 문화방송 아홉시 뉴스로 그를 만났던 시청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한국사회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또 한명의 '폴리널리스트'가 됐다. 사실 그는 30여년 방송기자 생활동안 여러 번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선거철이 되면 고향 지역구와 서울을 막론하고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때마다 "정치는 체질에 맞지 않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며 벽을 쌓았다. 그의 변신이 어찌 보면 '배반'이고 '모순'으로 보이는 이유다. 방송계 선후배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방송기자, 가장 신뢰받는 앵커로 꼽혔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8년 3월부터 2009년 4월까지 그의 이름은 인터넷 상에서 뜨거웠던 이슈의 중심에 놓여있다. 덕분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체질에 맞지 않다'는 정치권에 들어가야 했던 이유를 직접 듣고 싶었다. 그래서 만났다. 태풍 볼라덴이 한반도를 휩쓸고 간 다음날이었다. 국회에서 그를 만나기로 한 날,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도로 옆 태풍 지나간 자리에 놓인 사물과 풍경은 더 뚜렷하게 보였다. 기자 신경민 아닌 국회의원 신경민 역시 태풍처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후여서인지 세상을 더 진지하고 신중하게 분석했으며, 단호하고 명쾌하게 답을 내렸다. 그의 변신이 단순한 입신양명의 '배신'이 아니라 그 자체로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어지러운 시절에 '희망'을, 그것도 정치판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막 기자회견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분주해보입니다. "오늘 한꺼번에 일이 쏟아지네요. 기자회견도 그렇지만 오늘 국회의원 재산공개가 있었어요. 지난 연말에 했고, 5월 30일에 신고한 것인데, 불과 5개월 만에 제 재산이 18억이나 늘었어요. 그것 때문에 언론사에서 취재들을 하느라고. 뉴스가 될 만하죠."-18억 원이면 천문학적인 숫자인데요. 그것도 5개월 만 에라면 주목받을 수밖에 없겠어요. "저도 당황스러운 일이예요. 사실 제가 재산이 좀 여유롭습니다. 아파트와 주식이 있어요. 처가가 '우성사료'인데 상장회사여서 장인이 여러 해 전에 자손들에게 주식을 나눠주셨죠. 제 처와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나눠주셔서 제 재산의 주요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식이 지난해 말부터 갑자기 뛰기 시작했어요." -혹시 신의원님 영향이 아닐까요.(웃음) "그렇지 않아도 알아보니까 소위 '작전세력'이 붙었답니다. 그런데 그 작전 세력의 정보가 아주 잘못된 것이에요. 제가 안철수 원장과 친하다는 것이 이유라는데 저는 안원장과 일면식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안원장이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뛴답니다. 잘못된 정보라고 알려졌는데도 '안철수 주식'으로 분류되었다니 황당한 일이죠." -오늘 기자회견은 어떤 내용인가요. "지역방송에 관한 겁니다. 지역방송은 매우 어렵고 현안도 많습니다. 물론 경제적 어려움이나 악화되어가는 환경은 언론계의 총체적 과제지만, 우선은 법적으로라도 대안을 마련해보자는 것이 취지입니다. 이제 한국방송광고공사가 해체되고 미디어랩으로 광고가 넘어가면 지역방송사들이 안게 될 어려움은 더 커집니다. 본사와 지역사와의 관계가 매우 건강하지 못한 관계로 갈 가능성이 크죠. 지역민방의 경우는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보이는데, 지방사에 가해지는 과도한 압력은 십중팔구 부당하고, 불법적 수준까지도 갈 겁니다." -지역방송사들의 독립성 자율성을 지켜낼 수 있는 장치가 되겠군요. 그런데 언론의 현안이라는 것이 방송뿐이 아니라 총체적인 난국이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한국사회는 각 분야 간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 모두 나뉘어 있죠. 지역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해져 있습니다. 게다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 수도권 중심의 구조 때문에 지역이 낙후되어가는 상황은 심화되고 있지요. 이 문제는 한국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겠지만 그 대안을 찾는데는 무엇보다도 언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벌써 해낼 일들을 다 정리해놓으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듣다보니 정치는 체질에 맞지 않는다던 말씀이 빈말이었던 것처럼 들리는군요.(웃음) "지금도 맞지 않는 것은 확실합니다. 사실 저같이 정치에 전혀 맞지 않고 정치를 잘할 수 없는 사람이 이렇게 정치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자체가 한국사회의 체질을 드러내주는 것 아닌가 싶어요." -'할 수밖에 없는'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2008년엔가 매체들과의 인터뷰를 보니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밝히셨더군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정치인이 되셨거든요. 그렇다면 그 후의 2-3년이란 시간이 신의원님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 일 텐데 그 배경은 결국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현실일 수도 있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생각을 바꾼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2009년 4월 뉴스앵커 자리에서 쫓겨난 이후 삶의 환경입니다. 앵커를 그만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뉴스 클로징 멘트 논란 때문이죠. 당시에는 사사건건 엄청난 간섭과 압력을 받았습니다. 앵커는 보도의 한복판에서 언론인의 기본적인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에요. 앵커니까 중립적으로 진행이나 잘하라고 한다면 상식에 반하는 것이죠. 만약 제가 정부 편을 드는 멘트를 했어도 그런 압력과 시비가 있었을까요."(그가 2008년 3월부터 2009년 4월까지의 앵커 생활동안 받았던 핍박과 압력의 흔적을 묶어낸 책 '신경민, 클로징을 말하다'에는 우리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 특히 방송 권력을 장악하는 구조적 모순의 실상이 낱낱이 고발되어 있다.)-당시 앵커 역할을 두고 뜨거운 논란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지금도 앵커의 역할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시죠. "물론입니다. 당시도 제가 옳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80년대부터 크고 작은 코너의 앵커를 맡았었어요. 그때부터의 멘트를 따라가 보더라도 역대 모든 정권과 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살아있는 현재의 권력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댔었습니다."-그럼 그때의 핍박이 정치 쪽으로 이끌었습니까. "그 영향도 있지만 앵커를 그만둔 이후의 경험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앵커에서 물러난 이후 방송은 단 1초도 못했어요. 회사를 법률적으로 그만둔 것이 2011년 9월이니까 2년 5개월 정도될텐데, 그때 온갖 수모를 당했습니다. 사실 30여년 기자생활하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말년에 제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핍박과 압력은 정치권으로부터도 당했지만, 회사내부에서 가해지는 수모가 훨씬 더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웠어요. 잘 지냈던 선후배들이 등을 돌렸죠.(그는 이 대목에서 그답지 않게 '비수를 꽂았다'는 표현을 썼다. 그만큼 그에게는 깊은 상처였다.)"-정치권 제안은 사실 여러 번 받았고 그때마다 거절하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물론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엠비시 파업이 절정으로 가고 있을 때였죠. 이렇게 무너진 방송환경을 바로 잡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지도자로부터 오는 것이지 않습니까. 기본상식과 기본자질을 갖춘 지도자가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구체적으로는 어떤 역할을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현실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언론의 탈정치화입니다. 특히 공영방송의 탈정치화가 핵심인데, 그것이 정치적인 독립성과 각 분야, 지방자치와도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의 경우, 비교적 공영방송을 열심히 잘하고 있는 나라들을 보면 시민사회와 지방자치가 발전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토대위에서 자유를 구가하면서 정치권, 특히 지배 권력과 싸우면서 언론의 원칙과 독립을 지켜가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토대가 아예 없습니다."-단단한 결기까지 느껴지는데요. "엠비정부가 가르쳐준 귀중한 가르침(?)의 효과일겁니다. 저는(신의원은 '우리는'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고쳐 말했다) 그 가르침을 통해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현행 법률안에서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또 형식적 법 절차를 지키면서도 본질을 훼손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죠. 이런 부조리를 바로 잡으려면 폴리널리스트라고 욕을 먹더라도 먹물 든 사람으로서, 언론에 31년 복무한 자로서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방송기자로 살아오신 31년 동안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고난은 시절마다 있지 않았을까요. "이보다 어려운 시절도 있었겠죠. 그러나 그때는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9년 4월에는 그러한 희망이 보이지 않았어요. 은퇴할 날자는 2011년 9월로 정해져있는데 내 눈앞에서 방송이 처참하게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내 일생도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죠. 그 절망감과 무력감은 뭐라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언론계의 많은 후배들이 존경하는 선배로 신의원님을 꼽습니다. 시청자들은 앵커 신경민의 덕목으로 신뢰를 꼽습니다. 방송기자로서 지켜온 가치관이 궁금합니다."저는 방송을 잘하는 기자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지적을 많이 받는데, 힘이 없다거나 말이 느리다거나 이야기를 어렵게 한다거나 방송기자로서는 단점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방송에서는 외모가 중요한데 저는 적어도 얼굴로 먹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우선은 취재에 공을 많이 들였지요. 팩트를 확인하고 선정하는 기준, 그것을 어떻게 나열하고 어떤 단어를 사용할지를 놓고 연구했습니다. 오랜 시간 여러 통로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는 태도와 습관은 지금 의회 활동을 하는데 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마 동료들이나 시청자들이 저를 좋게 봐주신다면 그것이 원동력일겁니다."-많은 부문에서 활동하셨는데 여기서도 '체질'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분야가 가장 잘 맞았습니까. "워싱턴 특파원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워싱턴이라는 도시로서의 배경과 잘 어울렸던 것 같기도 하구요.(웃음) 88년에 1년 동안 공부한 곳이기도 하고, 정부초청 등으로 여러 번 왕래도 했었고, 기자로서의 전공도 외교와 법조여서 워싱턴이라는 도시와 미국이라는 나라의 토픽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교적 영어도 능숙한 편이어서 특파원으로서 역할을 비교적 잘했다고 생각하죠.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중요한지, 영향을 얼마나 어떻게 미치는지, 외교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청자들에게 열심히 설명했던 시절이었습니다."-오랜 기자생활동안 특종이나 기억날만한 뉴스도 적지 않을 텐데요."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미국 정부가 미군 철수하겠다며 우리를 협박했던 일입니다. 그때 우리정부는 이해도 잘못했고 대응도 잘못했는데, 그 기사를 쓰고 정부 관계자로부터 협박을 받았어요. 회사 내부에서도 압력이 심했죠. 제가 보고한 정보를 모두 부인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저는 '더블체크' 했거든요. 확신을 갖고 쓴 것이죠. 사실이 아니면 징계 대상이었죠. 정부와 당의 고위관계자가 저를 찾아 와서 '국익'을 생각하지 않는 기자라고 비난하더군요. 국익은 저도 많이 생각하죠. 다만 당시 이 기사를 쓰는 것이 저는 국익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기자들이 확인한 기사라면 쓰는 것이 국익입니다. 통킹 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만해도 그 당시에 썼더라면 베트남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죠. 무엇이 국익이냐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언론은 쓰는 것이 국익입니다." -대선이 앞에 와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나라를 이끌 수 있는 인물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수권능력이 아닐까요. 국가의 현안은 계속 정리를 해나가고 있는 과정 속에서 이미 도출되어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것을 과연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겠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일겁니다. 국민들은 리더 뿐 아니라 리더 주변 인물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런 그룹이 안보이죠." -리더의 자격과 능력도 중요하지만 함께 갈 그룹이 더 중요하다고 보시는군요. "그렇죠. 최근의 경험만으로도 국민들은 리더 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면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충분히 체득했다고 봅니다. 이번 선거는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 기획
  • 김은정
  • 2012.09.04 23:02

박문기 선생은

평생 고향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박문기 선생은 이름 앞에 여러 타이틀이 붙는다. 재야 사학자요, 한글학자요, 친환경 농업인이 그것이다. 1948년 정읍시 입암면 신면리 진등마을에서 박봉선씨와 최영단 여사의 7남매 증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때 징용으로 한 팔을 잃었고 어머니는 경북 군위군에서 보천교를 신앙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그는 고향에서 대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공민학교를 3개월 가량 다닌 게 학력의 전부다. 아버지를 대신해 어렸을 때부터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밤이면 동네 유학자들을 찾아가 한학을 배웠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으로 웬만한 도서관 하나쯤은 가득찰 만큼의 독서를 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한창 공부할 때는 방의 불이 꺼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무르팍에 꾸덕살이 백히도록' 책을 읽은 것이다. 물론 책은 한문으로 된 것이다. 그런데다 그는 아무리 어렵고 긴 내용의 책이라도 두세번만 읽으면 그대로 외울 수 있는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한자라는 문자 속에 박힌 세상의 이치가 그를 끝없이 매료시켰다. 또 근원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탐구심은 민족의 뿌리인 상고사(上古史)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그렇게 혼자 공부해서 세상에 내놓은 책이 1987년에 나온 맥이(貊耳)를 비롯 대동이(大東夷), 본주(本主), 숟가락, 한자는 우리 글이다, 정음(正音)선생 등 12권이다. 그리고 지금 12권으로 된 정음천자문을 집필 중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신화와 전설로만 알려졌던 동이족의 수천년 역사를 논문과 소설로 재현해 냈다. 삼황오제 시대의 중국 은(殷)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며, 순(舜)임금과 공자가 동이족의 후예임도 밝히고 있다. 또 주류 역사학계가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의 2000년 역사를 몽땅 떼어내 버렸다고 비판한다. 이같은 파격적인 주장을 아직 사학계는 이단으로 보고 있다. 또 '한자가 원래 우리 글이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얼핏 보면 황당무계한 주장인듯 보이지만 그는 낱낱이 그 근거를 제시한다.그러면서도 그는 평생 손에서 농사일을 놓지 않았다. 현재 논 4만 평과 밭 6000평을 농약없이 경작하고 있다. 우리의 고유종인 다마금(多摩錦)쌀도 연변에서 처음 들여왔다. 1995년 경작지의 토양을 검사한 결과 전국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이 증명돼 국립농산물검사소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2002년엔 일본 동경방송에서 나와 3개월 동안 심층취재해 보도했다. 지금은 한국농업대학교의 현장교수로 위촉돼 있다.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어머니 최영단 여사다. 최 여사는 1960년대와 70년대 말, 쳐다보기만 해도 낫는다는 신유(神癒)의 신통력으로 유명했다. 전국에서 하루 수천명이 몰려 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간이역인 천원역에 특급열차가 섰고 인근 논밭이 주차장으로 변했다. 광주은행에서 직원을 상주케 할 정도였다. 그는 한때 동이학교를 짓고 민족 교육에 힘을 쏟기도 했다. 부인과 사이에 3남2녀가 있다. 큰 아들은 연세대 행정학과에 붙었으나 농업대학으로 돌려, 농사를 짓고 있다.

  • 기획
  • 조상진
  • 2012.08.28 23:02

박문기 농부 사학자 "한자(漢字)는 중국문자가 아니라 우리 고유 문자"

"한자는 중국문자가 아니라 우리 고유 문자다." "중국의 은(殷)나라는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만든 나라다." 이 같은 주장은 허무맹랑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근거도 조목조목 댄다. 중국의 경전이며 역사서 등을 광범위하게 인용한다. 학계의 정설을 뒤집는 이러한 주장이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했다. 더구나 평생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있는 농사꾼이라는 게 더욱 놀랍다. 그가 정읍 입암의 재야 사학자요, 한글학자인 박문기(朴文基) 선생이다. 그는 스스로를 농초(聾樵귀머거리 나무꾼)라 부른다. 또 전통방식으로 농사를 짓다보니 친환경 농업인으로도 꽤 알려져 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 그의 집을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들려주시죠."농사짓고 지내죠. 오전에도 논에 가서 일하고 왔어요. 글은 주로 겨울에 씁니다."- 올해 농사는 잘 됐습니까? "아직까지는 작황이 좋아요. 논농사는 지을만 해요. 우렁이가 제초를 하니까 힘들지 않는데, 밭농사가 제초하는 게 없어서 힘들어요. 또 아들이 많이 도와줍니다."- 올해는 폭염과 가뭄, 폭우까지 겹쳐서 병충해가 심할 것 같은데요?"병해충도 사람하고 똑 같아요. 화학비료를 많이 하고 그러면 벼(작물)가 연해요. 연하니까 병해충도 새끼들이 먹고 살기 좋게끔 연한데다 알을 까요. 그런데 화학비료 안하고 유기질 비료해서 키워 놓으면 아주 싸나움이 쫙쫙 흐르고 뻣뻣해서 그 땅에는 절대 알을 안까요. 그러니까 벌레 같은 것 걱정 안해도 돼요. " - 우선 선생님이 주장하는 '한자(漢字)는 중국문자가 아니라 우리 고유 문자다'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처음 듣는 사람은 의아해 할수 밖에 없는데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원래 우리는 한자(漢字)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았어요. 조선왕조실록에 10여 번 나올 뿐 승정원일기나 일성록에는 단 한번도 한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요. 우리말에 한(漢)이라는 글자는 인명이나 지명에 쓰일 때는 하늘의 은하수를 상징하기도 했지만 대개 지극히 미천한 남자를 일컫는 말로 쓰였거든요. 예를 들면 백정은 도한이(屠漢伊), 소금 굽는 자를 염한이(鹽漢伊)라 했어요. 또 조선시대 소를 밀도살하면 크게 처벌 받았어요. 그래서 관청에 끌고 가 허가를 받는데'漢'이라는 낙인을 찍어 줬어요. 우리는 지금도 행실이 나빠 마땅히 죽어야 할 놈에게 漢자를 쓰거든요. 괴한(怪漢), 치한(癡漢), 악한(惡漢), 색한(色漢)이 다 그런 말이죠. 이로 미루어 우리 조상들이 우리 문자를 한자(漢字)라는 이름으로 일컬었을 리가 없죠. 한자라는 말은 조선총독부가 우리 정음(正音)을 교란시키고 국격을 낮추기 위해 상투적으로 내세웠던 말이고 급기야는 조선어한문폐지령까지 내린 일이 있었으니까요. 이후 박정희의 우민화 정책도 한 몫을 했죠."- 그것이 꼭 한자가 우리 글이라는 근거가 되기는 약하지 않은가요?"중국 진(秦)나라 때 분서갱유가 있었어요. 책을 불 태우고 선비를 묻어 죽인거죠. 그 이전 주(周)나라 때도 문자가 있었어요. 더 나아가 은(殷)나라때 이미 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갑골문이나 청동기 명문 등에 증명이 되었어요. 이 은나라가 단군의 후예였다는 사실도 명백히 증명되었어요. 다시 말해 문자가 없는 주(周) 진(秦) 한(漢) 등 화하족(華夏族)의 나라가 다 우리 옛 조선에서 이어진 은나라 문자를 그대로 가져다 썼던 거예요."- 또 한자는 중국 문화나 인성제자(因聲制字)원리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시는데요?"한자는 중국 역사나 문화, 중국 관습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모두 우리 문화와 관련이 있어요. 양국간에 같은 문자어의 발음을 비교해 보면 중국어는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인성제자의 원리에 전혀 맞지 않아요. 소리라는 게 열리는 소리가 있으면 닫히는 소리가 있어야 하고, 또 펴나가는 소리가 있으면 걷어 들이는 소리가 있어야 하죠. 개발수폐(開發收閉)가 맞아야 해요. 가령 감옥(監獄)은 우리 말로 '감옥'하면 가두는 느낌이 드는데 중국은 '잰유이'하거든요. 이것은 나가는 소리지 가두는 소리가 아니죠. 수갑(手匣)도 우리는 채우는 느낌인데, 중국말로'써우'하면 풀어주는 소리예요. 글자는 하나인데 두 소리, 세 소리로 발음하는 것은 정음이 아니라 변음(變音)이죠." - 훈민정음 서문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등의 해석도 한글학자들과 달리하시는데요? 학자들은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아니하여서'라고 해석하는데"별스럽게 해도 세종대왕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가르쳐야 해요. 그것을 거꾸로 가르쳐선 안되거든요. 이것은 '우리나라 문자말의 음절(발음)이 중국에서는 달라 문자로서는 서로 시원하게 통하지 아니할세라'라고 해야 맞아요. 이호중국(異乎中國)에서 이(異)는 우리를 주체로 한 것이지 중국을 주체로 한 것이 아니에요. 또 호(乎)는 '-에서'라고 해야 옳아요. 훈민정음에 분명히 '중국에 달아'라고 했잖아요. 중국과 다르다고 하면 완전히 반대로 되어버리죠. 한글학자들의 주장이 맞으려면 여문자(與文字)도 기문자(其文字)로 해야 해요."(박 선생은 어제훈민정음(御製訓民正音)과 해례본을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풀이를 해줬다. 다양하게 쓰이는 용례며 용비어천가 등의 예도 들었다.) -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한글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하거나, 항의를 받은 적이 없습니까?"제가 교육부와 문광부에 '교과서를 바꿔야 한다'는 글을 올렸어요. 그런데 반응이 없어요. 세종대왕 말씀대로 가르쳐야 해요. 학자들이 세종대왕을 갈보로 만들고 우리를 완전히 사생아로 만들면 되겠어요"- 한글전용에 반대하고, 또 우리 말 우리 글이 세계 공통이 되어야 제대로 된 세상이 온다고 주장하시는데 너무 국수주의적인 것 아닙니까? "우리 말글 즉 언문(諺文)과 우리 글말 즉 문언(文言)은 다 천지자연의 법칙에 따른 정음으로 되어 있어요. 만일 저승이나 극락에 공통어가 있다면 거기에는 아마 우리 말이 공통어가 되지 않겠나, 저는 확신을 해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독특하게 맥이(貊耳)족이라 하는데 이것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맥(貊)은 우리 조상들이 신수(神獸)로 숭상했던 쇠를 먹고 사는 짐승이고, 다른 민족이 우리를 맥족(貊族)이라 했어요. 후한서(後漢書) 구려전(句麗傳)에 보면 맥이(貊耳)는 고구려의 처음 국명이죠. 환인 복희 신농 치우 소호 단군 대련 대순 천을이 모두 우리 맥족의 조상이고, 순 임금이나 공자 또한 맥족의 후예죠."- 선생님은 상고사를 깊게 연구해 새로운 주장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 중 중국의 은(商 또는 殷)나라를 단군조선에서 파생한 우리 민족(東夷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십니다. 근거는?"서전(書傳)이나 맹자(孟子) 등에 다 나와 있는 얘기에요. 맹자에는 '순(舜)임금은 제풍(諸馮)에서 출생했으니 동이인이다(舜生於諸馮 東夷之人也)'고 되어 있어요. 순이 태어날 때 단군임검이 왕위에 오른지 17년 되는 해였어요."- 이번 런던올림픽은 통쾌했습니다. 특히 양궁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선수들이 휩쓸고 있습니다. 동이(東夷)의 이(夷)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오랑캐 이로 해석하는데 반해 선생님은 大 + 弓, 즉 큰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해석합니다. 지금은 이것이 대세인 듯합니다만."자치통감에 나와 있는 얘기에요. 활은 옛 효자 대정씨(大庭氏)로 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대정씨는 바로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원시조상이었어요. 지금으로 부터 약 5000여 전 일이죠. 그 당시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는 법이 없었고 백모(白茅)로 싸서 들판에 내다 버렸어요. 그런데 대정씨는 부모님의 시신이 짐승의 밥이 되는 것을 차마 볼수 없어서 나뭇가지를 잘라 줄을 매고 싸릿대로 살을 먹여 짐승을 쫓았어요. 그래서 살에 활을 먹인 형상인 조(弔)를 쓰죠."- 선생님은 상나라의 예를 들어 철기시대가 청동기시대 보다 앞섰다며 정설은 뒤집고 있는데요?"근래 출토된 은나라 시대의 청동기 유물만 보고 청동기시대가 철기시대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청동기는 원료 채취가 힘들고, 배합의 비율이 정확해야 하는 등 고도의 합금술이 있어야 해요. 반면 철기는 불만 사용할 줄 알면 쉽게 제작할 수 있어요. 두 금속의 강도만 단순 비교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억측이예요."- 쌀과 숟가락 문화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해석을 하셨던데요."쌀이란 본시 벼알의 껍질을 까놓은 것을 일컫는 말이죠. 하지만 밥을 해서 수저로 먹을 수 있는 곡류에만 '쌀'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보리쌀 서속쌀 기장쌀 수수쌀 녹쌀(메밀) 등이 그렇죠. 제가 생각하기에 쌀은 씨알(氏斡)의 합성어가 아닌가 해요. 여기서 씨(氏)는 남자가 서서 손으로 자신의 양근(陽根)을 잡고 있는 형상이요, 알(斡)은 둥글다 돌아온다는 뜻이니까요. 우리는 씨알로 밥을 해서 숟가락으로 먹어 왔어요. 또 예전부터 숟가락을 쓰는 민족은 우리 밖에 없어요. 중국과 일본은 젓가락 문화고 서양은 칼과 창으로 먹잖아요, 그런데 숟가락을 형상하는 문자는 비(匕) 자인데 匕는 북두칠성 문양과 여자의 아랫동네를 형상하여 만든 것이에요. 우리의 숟가락 문화는 8000년에 이르고 숟가락은 쌀농사와 관계가 깊은 거죠. 동의보감에 이르기를 사람의 기운과 정신이 다 쌀에 따라 변화하여 나온다고 했어요. 기운 기(氣)자와 정신 정(精)자에 다 쌀 미(米)가 들어 있잖아요. 그런데 이 숟가락 문화가 위기에 빠져 걱정이에요."- 친환경 농사를 짓게 된 동기는?"한평생 신명세계를 사시다 가신 어머니께서 선천적으로 화학조미료는 물론 농약을 사용한 곡식이나 채소를 일체 못드셨어요. 어쩌다 그걸 드시면 잇몸이 새까맣게 붓고 잇몸에서 피고름이 나오는 고통을 겪었어요. 그러셨기 때문에 김을 매고 벌레를 잡아내는 옛날 방식 그대로 했어요. 요즘에야 유기농산물이니 친환경 농산물이니 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용어조차 없었어요. 당시는 농약 한번만 치면 될 걸 안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미련하고 답답한 노릇이었죠. 헌데 지금은 높은 가격을 받고 환경농업의 선구자로 인정을 받고 있어요.(웃음)"- 풍장(風場)굿으로 병해충을 퇴치한다고 하는데 효과가 있습니까?"굿의 묘한 것을 설명하기가 힘든데요. 사람도 그 소리를 들으면 어깨가 우쭐거리고 다리가 껑충거려지잖아요. 확실히 식물도 그런 느낌이 있는 모양에요. 가령 전봇대 밑에 벼는 여물이 안들어요. 잠을 자야 하는데 못자니까요. 요즘 첨단치료법이 향기와 소리라고 하죠. 볏대 대궁이같이 밀폐된 공간에 있는 병해충은 내장이 파열해 버려요. 누에가 천둥소리가 심하면 집을 제대로 짓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선생님은 서양 사람들을 개의 자손이라거나 개(방우)에 비유하고 낮게 보는 듯합니다만."그것을 문자로 한번 보죠.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데 미국을 지배하는 세력이 있어요. 유태인이죠. 유태(猶太)라는 글자를 쓰면 개에 우두머리 추(酋)자여서 개의 우두머리 아니에요. 그리고 수입 소고기, 수입곡류 이런 것이 곡(哭)소리 나는 거예요. 사람의 입 둘이 개(犬)한테 얹혀요. 세계 곡물 회사들이 다 유태인 것 아녜요. 광우병은 동류(同類)를 먹였기 때문에 생긴거구요."- 자녀교육이 독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는데 이유는 뭡니까?"우리는 아이들 학교 가는 것이 정말 내키지 않았어요. 저도 학교 안 다니고, 집 사람도 학교 안 다니고, 그래도 불편한 게 없어요. 요즘 교육정책이 효율성과 경쟁력을 강조하는데 첫째로 사람이 돼야 해요. 인성교육부터 해야지요. 사람되는 교육은 문자를 제대로 가르치는 게 사람되는 거예요. 요즘 부모들은 자식을 땀 흘리지 않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불한당(不汗黨)이나 건달(乾達)로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해요."

  • 기획
  • 조상진
  • 2012.08.28 23:02

백동연죽장 황영보 선생 "'나는 담뱃대 왕'…전통 문화재 관심 더 가져야"

담뱃대는 한자어로 연죽(煙竹)이다. 백동(白銅)은 구리 합금의 일종인데 니켈이 들어가 흰 빛을 띤다. 검은 빛을 띠는 것은 오동(烏銅)이다. 백동연죽(白銅煙竹)은 동(銅)에 금, 은, 아연 등을 합금 처리해 전통적인 수공 기법으로 만든 담뱃대이다. 남원의 담뱃대는 예부터 전국에서 명성이 제일 높았다. 남원에서 전통적으로 제작돼 왔던 담뱃대가 오동상감(烏銅象嵌) 송학죽이다. 죽전(竹田) 황영보(黃永保80) 선생이 그 기능보유자다. 지난 93년 무형문화재 65호로 지정됐다. 그가 살고 있는 남원시 왕정동 강정몰 마을에서는 70여 가구중 50여 가구가 담뱃대를 제작하며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번성했지만 이젠 전국적으로도 담뱃대를 제작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그가 명맥을 잇고 있다. 그는 대대로 담뱃대를 만든 집안 출신이다. 3대째다. 그의 할아버지 황찬서(黃贊西) 선생은 1991년 애국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다. 담뱃대를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도 했다. 광복 67주년을 맞은 지난 15일 백동연죽장 황영보 선생을 찾았다. 과거에 언론에도 가끔 등장했지만 최근에는 뜸한 터였다. 남원 춘향테마파크에 있는 백동연죽전수관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전수관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이름에 걸맞는, 그럴듯한 공간을 상상했는데 실망스러울 정도로 초라했다. 백동연죽 전수조교인 그의 아들 기조(51)씨가 4대째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인터뷰 자리에 배석해 얘기를 거들어 주었다.-요즘도 백동연죽 제작을 활발히 하십니까."옛날에는 어려운 것은 내가 하고 쉬운 건 전수조교(아들)한테 맡겼는데 거꾸로 됐어. 이젠 나이가 들어 쉬운 건 내가 하고 어려운 건 아들이 해."-말씀이 약간 어눌하시군요."8년전 풍을 맞았어. 식사하다 쓰러졌는데 말 하는 게 자연스럽지가 않아. 다른 데는 이상이 없고"-지금도 전시회 등은 꾸준히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지난 4월과 5월에 기획행사를 열었고 연 네차례 복지관을 찾아 '찾아가는 전시회'도 열고 있어."-맨 처음 담뱃대를 만들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열다섯살 때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권유해서 했지."-당시 기술 전수는 어떻게 하셨습니까."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우기도 했고 나중엔 기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일을 잘못 할 때는 (나한테)공구를 던지기도 했지. 한 우물을 파면 성공해. 지금도 자식들한테는 한 우물을 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어."-아버지가 무서운 분이셨나 봅니다."기골이 장대하고 위엄이 있었지. 동네에서는 호랑이 할아버지로 불렸어." -그동안 돈 좀 벌었습니까."당시엔 담뱃대가 없어서 못 팔았지. 625 무렵 다른 사람이 만든 건 1500원씩이었는데 내가 만든 건 2500원씩 받았어. 내 제품이 최고였지. 돈도 벌었어. 한 45억 벌었는데 이젠 다 자식들한테 나누어줬어. 내가 가진 것은 1000만원도 안돼."-나이 들면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들 하던데 왜 일찌감치 나누어 주셨습니까."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갖고 있으면 뭐해."-만드신 담뱃대를 당시엔 어떤 경로를 통해 팔았나요."나는 만들고 각시(아내)가 내다 팔았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매처에 팔았어. 팔아 오라고 일 많이 시켰어. 여자 몸으로 참으로 고생 많이 했지."-무형문화재가 되셨는데 타고난 소질이 있었던가 봐요."매년 무슨 무슨 대회에서 수상하다 보니 기록이 쌓이고 한 우물을 파게 된 거지. 임실의 추오판 선생이 기능 보유자였는데 아들까지 작고하는 바람에 유일하게 조명을 받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거지."-지금 만드시는 백동연죽은 얼마에 팔리나요."대왕죽(상품)은 600만원, 송학죽은 500만원, 민죽은 100만원씩 하지." 민죽이란 아무런 문양 없이 백동으로만 만든 일반 담뱃대다. 서민이 주로 이용하던 저렴한 것이었다. 부산 마산 안성 울산 광주 등 담뱃대를 만드는 곳이 여럿이었지만 전라도 지역에서는 남원이 그 중심이었다. 민죽은 3일이면 만들 수 있지만 송학죽은 일주일, 대왕죽은 보름이 걸릴 정도로 금속 세공에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담뱃대가 지체와 신분을 상징하는 수단이자 사치품이기도 했다. 60년대 궐련이 나오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굉장히 비싼데 수요는 좀 있습니까."거의 없어. 문화재청이 인간문화재 지원 차원에서 몇개씩 구입하는 정도야."-백동연죽의 핵심 기술은 무엇입니까."백동은 계속 두드리면 깨져버리기 때문에 불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면서 두드려야 해. 수만번 손길이 가야 하는 것이라 고생이 많아. 67일 걸려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핵심 기술은 수 놓는 것이야. 솔잎매화학용 등의 문양을 새길 때 오동상감기법으로 수를 놓는데 이 기술이 어려워."황영보 선생은 오동(烏銅)의 배합법이 특이하고 설대(담뱃대의 몸통 부분)를 끼워넣는 배토리 부분에 봉황과 솔잎, 매화, 학 등의 문양을 상감기법으로 새겨 넣는 기술이 뛰어나다. 연죽은 민 담뱃대와 오동상감 담뱃대로 나뉘는데 오동상감 연죽은 불 인두로 소나무와 학 등의 낙화(烙畵)를 넣어 만든 제품이다. 이 전통적 연죽 제작 기능이 원형 그대로 4대째 전수되고 있다. 그의 아들인 전수조교한테 물었다.-담뱃대가 이미 사양길이고 팔리지 않는 제품을 만드는 건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뭔가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맞습니다. 행안부에서 명품 담뱃대를 생산하기 위해 디자인 개발에 들어가 있습니다. 성공할려면 휴대용으로 소지할 수 있어야 하고 멋스러움이 있어야 해요. 이런 제품이 올해 생산되고 내년부터 홍보에 들어갈 겁니다."-외국인에게는 담뱃대와 갓, 호랑이민화가 한국을 상징하는 3대 전통공예품인데 저렴한 비용의 선물용 담뱃대가 개발된다면 수요가 있지 않을까요."다양한 형태의 모델이 개발중에 있어요. 2030㎝ 길이의 휴대용 담뱃대에다 한약재나 향신료를 넣어 들이 마실 수 있도록 고안된 것도 있어요. 건강이 좋지 않는 분들이 담뱃대로 한약 성분을 흡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연구개발 중에 있습니다."-일반인들이 기술을 전수받으려 하는 경우는 없나요."없어요. 체험활동은 합니다만."-오늘이 광복절이기도 하고 해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할아버지 얘기로 화제를 돌려볼까요. 황 선생님의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담뱃대를 제작하면서도 태극기를 갖고 다니셨어. 담뱃대 판 돈을 가방에 넣어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도 했지." -일본 순사 총탄에 순절하셨는데 어떤 운동을 하시다 변을 당하셨나요."기미 독립만세운동의 해였어. 4월4일이 남원장인데 이날 임실 순창 곡성 등에서 1000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어. 독립만세 함성이 들끓자 일본 헌병대와 수비대가 감당을 못하고 무차별 총을 쏘아댔지. 다섯명이 현장에서 사망을 했어. 할아버지는 사격을 하던 왜경 수비대에 달려들어 총을 빼앗으려 격투를 하다 옆에 있던 수비대 총탄에 맞았어. 전주에 있는 자혜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입원 9일만에 숨을 거두었어. 당시 할아버지 나이 47세였고 장례는 동민장(洞民葬)으로 치러졌어." -항일정신이 투철한 분이셨는가 봐요."남원에도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일본인들은 터를 잡기만 하면 잘 사는데 우리 주민들은 가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을 항상 못마땅해 하셨다고 해. 과감하게 항일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일본상품 불매운동, 일본인 돈 안 꾸어쓰기, 세금 안내기 운동, 일본인에게 땅 안팔기 운동 등을 벌였어. 일본인에겐 눈엣가시여서 헌병대에 고발당하기도 하고 두차례에 걸쳐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구금되기도 했어." -70여년 동안 쇠를 두드리며 외길 인생을 사셨는데 후회하지는 않습니까."후회는 없어. 그런데 밥벌이가 안돼. 인간문화재라고 해서 다른 일은 못하게 하고 밥벌이는 안되고. 이것이 문제지 다른 건 없어."-스스로를 한마디로 표현하신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담뱃대 왕'이야. 우리나라에서 최고 아름다운 댐뱃대를 만들었으니까."-아들이 기능을 전수하고 있는데 만족하십니까."공무원 하면 월 몇백만원씩 버는데 쥐꼬리만한 돈으로 잘 이어갈까 걱정스러워. 계속 할지 모르겠어."-백동연죽전시관이 이렇게 비좁고 초라한 줄 몰랐습니다. "30평인데 너무 비좁아요.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 전수관에서 기거를 해야 원칙인데 그런 공간도 없어요. 겨우 작업장 하나 있는데 불편하기가 이를 데 없지요. 문화재청에 기거할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아들 기조씨가 거들었다. 백동연죽전수관은 국비와 지방비 2억원을 들여 1997년 10월 남원관광단지 내에 지어졌다. 연죽 제작과정을 담은 사진 액자와 연죽들이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을 만큼 협소하다. -가족들이 이 분야에 모두 헌신하고 있는데 자치단체나 정부 차원의 관심은 어떻습니까."문화재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있어요. 잘 나가는, 인기 있는 무형문화재는 종업원을 수십명씩 두고 일하기도 합니다. 스포츠로 따지면 비인기 종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비인기 문화재라 힘들고 외로워요. 비인기 분야에도 정부가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당장 가장 시급한 현안은 무엇입니까."아까 말한 기거할 공간을 전수관 부지 안에 만들어 주는 것이겠지요. 사업비가 약 2억원 정도 된다던데.문화재청에 요구해 놓고 있어요."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 보완할 부분이나 절실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온고지신이란 말처럼 옛 것에서 새로움이 탄생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옛 것을 귀중하게 여기고 전통에 관심을 가졌으면 해요. 문화재에 대한 애착과 관심도 더 많이 갖기를 바랍니다."

  • 기획
  • 이경재
  • 2012.08.21 23:02

전북여성경제인협회 초대 회장 지낸 노군자 장등석재 대표 "여성이 경영하는 기업에 일감·판로 적극 지원해야"

커다란 원석을 자르는 요란한 절삭기계 소리와 차바퀴에 날리는 돌가루를 비집고 익산 석재단지 내에 있는 장등석재를 찾았다. 대표적 3D업종으로 남자들도 감당하기 힘든 석재업종이기에 이런 석재회사를 경영하는 대표는 보통 여장부가 아닐 것이란 선입견이 앞섰다. 하지만 단아하면서도 낭랑한 목소리로 반갑게 맞아 준 노군자 장등석재 대표(魯君子70)를 보는 순간, 올해로 고희(古稀)라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갑작스런 암 선고와 투병생활로 교직을 떠난 뒤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자신도 장애를 입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석재회사를 떠맡아 전국 최대 석재업체로 키운 노 대표는 진짜 여장부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3차례나 다시 일어섰고 IMF 당시 파산위기에 몰렸던 회사를 회생시켰으며 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부 설립의 산파역을 맡았던 노군자 대표를 익산 낭산면에 있는 장등석재 사무실에서 만났다.- 올해 고희(古稀)이신데도 5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데요, 사람들이 직접 뵈면 놀라지 않는가요."잘 봐주셔서 그렇죠. 학교에 있을 때는 목소리가 좋다고 해서 교내방송을 도맡아 했었어요. 요즘도 사무실 전화를 직접 받으면 사람들이 여직원인줄 알아요. 목소리 덕분에 어느 정도 비즈니스에도 도움이 됩니다."- 29년간 교직에 계셨는데 왜 그만두셨는지요."1990년도에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전주예수병원에서 암 수술을 받았죠.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너무 좋아서 처음에는 학교에 복직하려고 대체교사를 썼는데 투병생활이 길어지면서 사직을 했습니다."- 남자들도 힘든 석재사업에는 어떻게 발길을 들여놓았는가요."퇴직 후 집에 있으려니 우울증이 올 것 같아서 남편 회사에 나가 이것 저것 도와주었죠. 그런데 1994년 1월 25일이예요.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버스가 와서 우리 차를 들이받았어요. 이 사고로 남편은 현장에서 숨지고 저는 얼굴이 찢겨져 뼈가 드러나고 팔과 다리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지금도 오른손을 잘 못쓰는데 그 때 입은 장애 때문입니다. 석달간 투병 끝에 퇴원했는데 당장 가정과 회사를 추스러야 하기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어요. 그 때부터 회사를 맡았죠." - 갑자기 석재업을 맡으신데다 회사경영에 대한 경험도 없었는데 처음에 사업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 "물론 힘들었죠. 업종 자체가 거칠고 험한데다 사람들도 억세고 특히 여성에 대해선 굉장히 배타적이예요. 그래서 몸뻬 바지 20벌과 장화를 구입해서 현장을 돌며 공부했습니다. 직원들이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보이더군요. 그렇지만 허드렛일을 내가 직접하고 직원들 한 사람 한 사람씩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살피면서 본인과 가족들 생일도 챙겨주고 하니까 조금씩 마음을 열더라구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식구처럼 지내게 됐습니다."- 여자로서 석재업을 감당하기에는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사업수주 활동이나 거래처, 대인관계 등에서 어려움은 없었는지요."암과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2번이나 넘기고 평생 의지하고 살았던 남편까지 보내고 나니 처음에는 제가 처한 상황을 감당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물려받은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사람들 앞에선 웃음을 잃지 않고 밝고 명랑하게 대했죠. 그랬더니 거래처 사람들마다 '장등석재에 전화하면 너무 좋다'면서 환대해주는 거예요. 무엇보다 큰 힘은 남편이 익산석재조합이사장을 하면서 쌓았던 인간관계와 신용이 큰 도움이 되었죠. 석재조합과 발주처 거래처 등에서도 많은 배려를 해줘서 회사가 빨리 정상 궤도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차를 권하는) 손을 보니까 (거칠고 투박한 것이) 마치 남자 손 같은데요."작업 중에 돌 부스러기가 레일위에 떨어지면 기계고장의 원인이 됩니다. 한번 수리하려면 몇 백만원씩 들어가고 해서 직원들 대신 제가 치우다 기계에 부딪치거나 돌에 맞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다보니 상처투성이죠. 저에겐 고난의 흔적들이죠."- 한 때 회사가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셨다면서요."1997년 IMF 때 남편과 매우 가깝게 지내시던 분이 석재업에 뛰어들었다가 어려워지니까 제게 어음할인을 부탁했어요. 그게 누적되다보니 수십억원대에 달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분이 회사를 부도내고 미국으로 도피를 했어요. 고스란히 그 피해를 제가 떠안게 됐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기에 장등석재마저 회생불능상태에 빠졌죠. 그래서 죽으려고 못 먹는 술을 몇 대접 마시고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아들이 발견해서 서울 병원으로 후송해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책은 없는데다 빚 독촉은 심해지고 해서 다시 유서를 쓰고 저수지로 갔으나 막상 뛰어 들려니까 세 아이들 얼굴이 아른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포기하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북은행을 찾아갔죠. 지점장님께 하소연하고 도움을 청하니 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분이 제 생명의 은인이죠."- 그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전국 최대 석재업체로 키우셨다지요."위기는 기회라고 큰 고비를 넘기니까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저희 회사는 원래 경계석으로 전국에 명성을 쌓았죠. 대전엑스포에 납품하면서 유명세를 탔기에 빨리 회생할 수 있었죠. 또 품질 향상과 신제품 개발에도 주력해서 Q마크 획득과 ISO인증을 받았고 야광경계석(바이오 솔라스톤 경계석 블라드)으로 특허등록과 실용신안 등록도 했습니다. 호황기 때는 절삭기계만 37대에 40여명의 직원들이 밤낮없이 일을 해도 수주물량을 채우기가 어려울 정도로 잘 됐습니다."- 요즘은 석재산업이 사양길인데요, 어떻게 활로를 찾습니까."석제품 발주물량 자체가 크게 줄어든데다 원석 구입난으로 원석 값은 치솟고 여기에 값싼 중국산 제품까지 밀려 와 가격 폭락으로 석재업계가 3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 달 매출이 예전의 하루 매출도 안될 정도로 힘겨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제품을 만들수록 손해가 날 정도입니다. 납골묘석이나 조경석 등으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물량 자체가 많지 않아 어려움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3차례나 죽을 고비를 이겨내셨다고 들었는데."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직에 있을 때 암 투병을 했었고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가다 큰 사고를 당했으나 저만 기적처럼 살아났고요, 지난해 3월에는 뇌종양으로 서울서 대수술을 받았는데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뇌수술 후유증 때문인지 자꾸 기억이 없어지고 생각이 잘 안나요. 그래서 책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요즘은 아들이 사다 준 '안철수의 생각'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3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파산상황에서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늘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며 감사하며 나누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 계획은."회사 부지가 산업단지로 편입됨에 따라 현재 이 곳으로 이전하면서 회사 규모를 대폭 줄였습니다. 현재 절삭기계가 7대 있지만 2~3대정도만 가동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는 계속 할 생각입니다." - 1999년 7월 창립된 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부의 산파역을 맡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셨는데 어떻게 여성경제인협회를 설립하게 됐습니까."여성경제인협회는 법적단체입니다. 1999년 2월 여성기업지원에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에 따라 여성경제인협회가 만들어졌어요. 전북지부 설립은 중소기업청의 권유로 제가 주도하게 됐는데 당시에 상공회의소와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여성기업인 명단을 넘겨받아 전화를 넣었는데 IMF 여파로 거의 모든 업체들이 연락이 안 되더군요. 하는 수 없어 택시 한 대를 전세 내서 도내 시군을 돌며 여성기업인들 참여를 설득했어요. 그렇게해서 7월 19일 열린 창립총회에 모두 50명이 참석했습니다."- 현재 도내 여성기업인 회원수는 얼마나 됩니까."도내 여성기업인 회사는 대략 300여곳 정도 됩니다. 여성경제인협회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회원 수는 100여명 정도 됩니다."- 여성경제인협회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하는지요."저소득 여성가장에 대한 생계형 창업을 지원하고 여성기업의 유망제품 온라인 홍보마케팅 서비스를 지원하는 한편 제품 판로 개척 및 여성기업의 자생력 제고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또 도내 여성CEO들의 경영혁신포럼을 개최하고 여성CEO들의 전국 경영연수에도 참여하며 여성기업인의 날 행사를 개최해 모범 여성기업인과 여성기업지원 유공자, 여성기업 모범근로자를 선정, 포상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회장 재임 중인 2001년 전북여성창업보육센터도 문을 열었는데 센터에서는 어떠한 일들을 하는가요."여성 예비창업기업인이나 창업 초기 여성기업인에 대한 지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재단법인인 여성기업종합지원센터로 편입돼서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기업경영에 어려움이 많을 텐데요, 정부나 자치단체 지원은 어떠한지요."여성경제인협회 출범 초기에는 지원이 미미했지만 지금은 여성기업인에 대한 보조금 지원과 은행 대출, 판매 마케팅에 대한 지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 여성기업인들에 대한 교육과 정보제공 혜택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여성기업인에 대한 제도적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면."우선 일거리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요즘 경기가 어렵다 보니까 일감이 거의 끊겼어요. 정부나 자치단체의 경기부양 효과도 미미하고. 또한 여성기업 제품의 판로확보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팔리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여기에 리베이트 등 부조리 관행도 사라져야하고 행정과 업체간 유착도 없어져야 공정한 경쟁과 함께 여성기업인도 참여할 수 있겠죠."- 여성경제인협회장을 맡아 활동하시면서 느낀 보람이라면."당시에는 여성기업에 대한 지원이나 혜택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 황무지 같은 척박한 여건에서 사비를 들여가며 협회를 설립하고 여성기업인들이 기업하기 좋은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는 초석을 닦아 놓아 나름대로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여성기업인들이 사회 참여와 함께 국가와 지역경제발전에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뿌듯하고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처럼 어머니의 힘으로, 또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열정과 용기와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연말에 송년모임인가요, 여성경제인 회원들이 모두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행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던데요."여성기업인들이 회사 일 뿐만 아니라 가정과 자녀양육 등도 챙겨야 하기에 분주한 일상에 묻혀서 살다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들도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찾아보자 이런 의미에서 송년모임때 한복도 입고 어느 해는 드레스도 입고 송년 행사를 가져요. 지난해에는 경기가 어려워 쉬었습니다."- 여성기업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시간을 내서 책을 많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책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입니다. 또 책 속에 지혜가 있고 길이 있거든요. 특히 자기 스스로 부끄럽지 않도록 언행과 처신에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말가짐이나 몸가짐 행동가짐을 잘 해야합니다. 비즈니스 때문에 사람을 만날 때는 혼자서 만나지 말고 부득이 술자리를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여럿이 함께 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엄마, 직원들로부터 존경받는 CEO가 돼야합니다. 또한 선물공세를 펴는 사람들도 경계해야합니다. 그리고 적을지라도 여유를 내서 베풀고 나누면 삶이 더 풍요롭게 됩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8.14 23:02

노군자 대표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은 노군자 장등석재 대표(70)를 지칭하는 표현인 듯 싶다. 단아하면서도 가녀린 외모이지만 여성기업인으로서 전국 도로 경계석재 업종 가운데 최대 기업으로 키운데다 전북 여성기업인협회 산파역을 맡아 도내 여성기업인 활동의 초석을 마련한 여장부다.하지만 노 대표가 걸어 온 삶의 궤적은 결코 장밋빛 탄탄대로가 아니었다. 세 아이의 엄마로서, 가정주부로서, 초등학교 교사로서 30년 가까이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1990년 10월 갑작스런 암 선고와 함께 투병생활로 천직으로 여겼던 교직을 떠나야만 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94년 1월 부부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남편을 잃었고 중상을 당한 자신도 평생 장애를 안고서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남편이 운영하던 석재업체를 떠맡아 회사를 추스려야만 했다. 회사가 안정될 무렵인 1997년 IMF 한파가 몰아친데다 철석같이 믿었던 지인으로보터 수십 억원에 달하는 사기피해를 당하면서 회사는 회생불능상태로 빠졌다. 빚 독촉에 시달리자 결국 유서를 쓰고 2차례나 극단적인 결심을 했지만 자녀들 때문에 포기하고 다시금 '어머니의 힘'으로 일어섰다. 수차례 읍소와 설득을 통해 은행의 배려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회사를 정상화시키는 한편 품질 고급화와 안정적인 판로 확보에 주력했다. 석재품에 대한 Q마크와 ISO 인증을 획득하는 한편 야광경계석으로 특허와 신용신안 등록도 완료하고 관급 납품에 유리한 여건을 마련하면서 장등석재를 전국 최대 석재기업으로 키웠다. 지난해 3월 뇌종양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해 현업에 복귀했다. 국내 석재산업 전반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지금은 회사 규모를 대폭 줄이고 내실경영을 도모하고 있다.1943년 익산 태생으로 이리여중과 전주사범을 졸업하고 군산 금광초등학교에서 교직에 첫 발을 대디뎠다. 이리초등학교와 함열초등학교 황등초등학교 등지에서 29년간 교직에 몸담았다가 1990년 퇴직, 1994년 장등석재 대표로 취임했다. 1999년 7월 여성기업인협회 전북지부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명예회장을 거쳐 지금은 협회 고문으로 활동중이다. 교사시절부터 어려운 학생들을 남몰래 도와 준 공적이 알려져 전주지방검사장 표창을 받았고 기업경영과 여성기업인협회에 기여한 공로로 산업자원부장관과 건설부장관 표창도 받았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정직과 성실을 가훈과 사훈(社訓)으로 삼아 자녀와 직원들에게 직접 본을 보이며 특히 언행을 중시해 몸가짐 마음가짐 행동가짐을 항상 일깨우고 있다. 장남(41세)은 대전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고 큰딸(45세) 부부는 익산에서 재활의학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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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순택
  • 2012.08.1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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