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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홍경태 전북분원장 "탄소산업은 전북발전 이끌어 갈 신성장동력이죠"

전라북도가 21세기 지역발전을 견인할 미래 신성장동력으로 탄소산업을 선정하고 지역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산업화과정에서 소외됨에 따라 항상 낙후와 침체라는 말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지만 꿈의 소재로 불리는 탄소산업 유치를 계기로 흑룡의 해를 맞아 전라북도가 미래로의 비상을 향해 용틀임하고 있다. 대한민국 탄소 소재산업을 선도하는 중추적 싱크탱크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전북분원 복합소재기술연구소가 올 10월 완주 봉동에 완공되면 본격적인 연구개발에 나서면서 전라북도가 명실공히 탄소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할 예정이다. 이에 홍경태(洪炅兌) KIST 전북분원장을 만나 우리 탄소산업의 현주소와 미래 성장 가능성 등을 들어보았다. 홍 분원장과의 인터뷰는 임시 연구소로 사용 중인 완주 과학산업단지내 전북테크노파크 연구개발지원센터 연구소에서 가졌다.-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바쁘셔서 그런지 인터뷰 날짜 잡기가 힘들던데…"대형 연구사업들이 주로 서울에서 발주가 되고 또한 연구관련 예산을 따내려면 부지런히 서울을 오가야 하기에 좀 분주한 편입니다. 특히 복합소재 탄소산업 분야의 경우 서울에 전문가들이 많이 있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만큼 힘들더라도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탄소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지만 아직 미개척분야라 연구개발에 있어서 어려움 점도 있겠지요."그렇습니다. 연구개발분야는 철저히 성과위주의 자유 경쟁시장이다보니 2등 3등은 의미가 없습니다. 누가 먼저 특허등록을 하느냐에 연구개발의 명운이 걸려 있죠. 탄소산업은 아직 기술적으로 해결이 안된 분야인 만큼 선점하게되면 그만큼 폭발적 성장이 가능합니다."-전라북도가 지역 신성장동력으로 탄소산업분야에 주력하고 있는데 방향 설정이 잘됐다고 보십니까."전라북도가 산업화 과정에서 좀 뒤쳐져 있었지만 탄소산업의 미래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만큼 지역발전을 이끌어갈 성장동력으로서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사실 탄소자원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탄소를 어떻게 줄이느냐에 초점이 맞춰졌었지만 요즘은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죠. 탄소복합체의 가격이 아직은 비싼 편입니다. 때문에 고가의 항공기나 경주용 자동차 등에 주로 쓰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격을 낮추어 경제성을 확보하면 기존 금속소재 못지않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탄소복합체인 탄소섬유, 나노 탄소라는 말들이 일반인들에게는 좀 생소한데요."석유에서 탄소를 실처럼 뽑아서 그 원사(Pen)로 모양이나 틀을 짜고 여기에 고분자 수지를 입힌 것을 탄소복합체라 합니다. 탄소는 결합력이 크기 때문에 그만큼 강도가 높습니다. 탄소섬유는 철보다 1/5 정도 가볍지만 강도는 10배나 강합니다. 또한 전도성 내열성 내충격성 치수안정성 내화학약품성 항미생물성 등이 뛰어난 소재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가격이 비싼 것이 흠입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철 1kg 가격이 12달러 선인데 비해 탄소섬유는 26달러로 배이상 높습니다. "-현재 탄소시장 규모는 얼마나 되며 앞으로 응용분야는 어떻습니까."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탄소소재는 현재 7~8만톤 정도 됩니다. 조만간 70~80만톤, 100만톤 규모로 급격히 커질 것으로 봅니다. 탄소복합체는 활용도가 무궁무진합니다. 현재 고급 자동차와 스포츠카, 보잉 에어버스 등 항공기 골프채 낚시대 등에 사용되고 있는데 앞으로 중장비나 조선업 해양산업 설비산업 등에도 유용한 소재입니다. 예컨대 해양구조물의 경우 탄소소재는 철처럼 부식이 안 되고 파도 등의 피로에도 강하기 때문에 활용도가 많고 전기자동차가 나오면 철보다 가볍고 단단하기에 수요가 많을 것입니다. 앞으로 탄소 소재가 산업 전 분야에 대한 미칠 영향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며 인류의 미래도 그만큼 밝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야말로 꿈의 소재라 할 수 있는데 탄소소재 연구개발의 핵심과제는 무엇인가요."탄소소재 연구개발에 있어서 최대 관건은 4가지 문제 해결에 있습니다. 먼저 탄소 원사(Pen)가격이 비싸고 탄소는 서로 붙이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성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재활용이 안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는게 연구개발의 핵심입니다. 이를 누가 선점하느냐에 세계적인 이목이 쏠려있습니다."-원사(Pen)가격이 왜 비싼가요. 이를 대체할 소재는 없습니까."아시다시피 원사의 원료가 되는 석유자원은 유한 자원이기에 갈수록 가격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현재 Pen가격이 kg당 10~12달러에 달합니다. 또 원사를 굽는데 2시간 정도로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때문에 자연계에서 나오는 탄소소재인 섬유나 잡초 목재 등을 섞어서 연구하고 있지만 불순물이 많은게 흠입니다. 그래서 굽는 공정을 싸고 빨리하기 위해 플라즈마를 이용한 연구개발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입니다."-일본이 탄소분야 연구개발에 있어서 상당히 앞서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그렇습니다. 일본은 이미 40년 전부터 꾸준히 연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세계 최고수준이죠. 미국 유니온 카바이트사에서 탄소섬유 개발에 나섰지만 적자가 계속나자 사업을 접고 말았습니다. 반면 일본 도레이사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투자한 결과 시장을 선점하고 있습니다. 도레이사는 T-1000(T는 탄소섬유의 강도를 나타냄)제품을 생산해 보잉사 항공기 소재 등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레이사의 경우 연간 2만톤을 생산하고 있으며 매출액의 10%가 순이익으로 탄소소재의 부가가치가 매우 높습니다."-다른 선진국들도 탄소산업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는데 어떻습니까."우리와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국가들도 발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유럽은 올해 그라핀 분야 연구개발에 1조7000억을 투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국가차원의 적극적인 투자 지원이 시급한 실정입니다."-우리 기업들의 연구개발과 생산 현황은 어떻습니까."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도 초반에 T-300정도까지 생산했었지만 일본 도레이사와의 경쟁이 어려워 1998년께 사업을 접고 말았죠. 현재 효성이 탄소분야에 특화가 되어 있어 T-700까지 생산하고 있으며 전주공장 착공으로 연간 2500톤 정도 양산할 계획입니다. 현재 국내 사용량과 맞먹는 규모죠. 최근들어 삼성과 제일모직 태광 등이 신수종사업분야로 탄소산업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한때 태양광산업이 각광을 받으면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뛰어들었다가 유럽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탄소산업 분야는 어떨까요."탄소산업이 지금은 시장이 크지 않지만 앞으로 급속히 커질 것으로 기대하면서 가고 있죠. 남들이 못하는 블루오션이지만 또한 미지의 시장입니다. 부가가치가 큰 만큼 위험부담도 크기 때문이죠. 또한 시장은 계속변하기 마련이죠. 효성도 충분한 검토한뒤 집중하고 있지만 새로운 성장동력으로서 만만치 않습니다. 고가인 탄소원료 개발과 원가를 낮추는 것과 빠른 성형기술 개발 등 기술적 문제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가격과 품질에 대한 경쟁력이 있다면 가능성이 있겠죠."-KIST 전북분원 얘기 좀 할까요. 전북분원에선 주로 어떤 분야의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가요."현재 탄소섬유의 경우 T-700급 상용화 기술과 T-700급 이상 탄소섬유 개발 및 용도 맞춤형 탄소섬유 개발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요, 또 나노탄소 튜브(파이프 형태)와 그라핀(판) 등에 대한 연구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라핀은 영국에서 올해 상업화의 원년으로 꼽았는데 지난 2010년 영국 학자가 그라핀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한국출신 필립 킴 미국컬럼비아대 교수가 불과 며칠차이로 연구논문발표가 늦어서 아쉽게 노벨상을 놓쳤죠. 현재 세계에서 가장 넓은 그라핀은 한국에서 처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휘어지는 투명디스플레이 컴퓨터는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앞서가고 있습니다."-지난 2008년 설립됐는데 그동안의 연구실적이나 성과는 어떻습니까."지난 2008년 인가를 받았지만 본격 연구개발에 나선 것은 2년 정도됐습니다. 그동안 연구논문만 60편 정도 발표됐고 이 가운데 세계적인 해외저널(SCI)에 게재된 논문만 50편에 달합니다. 특허 출원 등록은 29건 정도됩니다. 특히 본원 선임연구원인 김태욱 박사의 탄소유기전자소재 연구와 나인욱 박사의 그라핀 연구의 경우 가장 좋은 연구논문으로 인정돼 해외저널의 표지논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짧은 기간에 비하면 큰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전북분원에서 주로 중점을 두는 기획 연구개발은 어떤 분야입니까."연구소는 탄소산업에 대한 기초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업화 대량화가 이뤄져야합니다. 즉 학문적 가치를 넘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야만합니다. 그런 면에 중점을 두고 신축중인 연구소의 유보용지 30만여㎡를 확보하고 고강도 탄소섬유와 탄소나노튜브 개발, 나노탄소소재의 대량합성 등에 대한 연구개발과 대량 생산화를 통해 기업체에 넘겨주려고 하고 있습니다."-연구 활성화를 위해선 앞으로 연구인력 확충과 우수 인력 확보가 필요할텐데요."탄소산업분야는 승자독식의 시장이기에 우수한 인적자원과 시설 확보가 관건입니다. 작년에 연구원을 5명 선발해서 현재 연구인력을 15명 확보했습니다. 8월에 연구소가 신축되면 5000평의 연구공간이 생기는 만큼 올해 추가로 19명 정도 더 뽑을 계획이고, 앞으로 80명까지 연구인력을 확보할 계획입니다. 현재 우리 복합소재기술연구소 규모 정도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라 할 수 있지만 선진국들도 전폭적인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 만큼 우리도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전북분원차원에서 중장기 발전계획위원회를 구성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전북분원의 발전 전략에 대한 다양하고 실질적인 정책 제안과 자문을 구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와 다양한 계층의 오피니언 리더들 10명을 어렵게 초빙해서 지난 14일 첫 회의를 가졌습니다. 남들이 없는 것,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해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연구 아이템 발굴 등에 중점을 둘 방침입니다."-개인적인 얘기 좀 할까요. 지난해 우리나라 국새 제작단장을 맡으셨는데 어려움은 없었는가요."잘 아시다시피 4대 국새 제작에 문제가 있어 5대 국새를 새로 만들게 되었는데 KIST에서 응모해 수주했습니다. 문제는 국제 금값이 급등하면서 수주당시보다 제작비용이 25%정도 추가 되다보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또 국새에 금이 6kg 정도 들어갔는데 금값이 비싸서 연습해 볼 수 도 없고 한번에 금물을 부어서 글자모양이 뒤틀림 없이 만들어야 하기에 신경이 많이 쓰였니다. 더구나 봉황과 무궁화 문양 등을 조각하는데 많은 인력이 투입됐지만 제작비가 적어 업체에서 적지않은 손해보고 제작했습니다."-경기고 서울대를 나왔는데 공부는 어느 정도 했는가요, 동기들은 누가 있나요."공부는 필요한 만큼만 했습니다. 학계에서는 모교에 있는 노태원 교수가 국내 물리학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고 정계에선 고승덕 이종걸 노회찬 등이 활동하고 있습니다.-도민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전라북도가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삼은 탄소산업과 신재생에너지 인쇄전자산업이 뿌리를 내리면 전북 발전에 커다란 기회가 찾아 올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분야는 변화가 심해 유연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미래를 좀 더 빨리 보고 판단하고 시행해야 합니다. 중앙만 바라보고 의존하면 시간과 기회는 그냥 지나가고 맙니다. 미래를 선도하는 산업과 기업은 지역차원을 넘어 세계속에서 경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미래를 이끌어갈 고급 기술인력을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미래산업 분야는 지역 인력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우수인력유치에도 힘써야 합니다."●홍경태 전북분원장 프로필= 1957년 서울태생, 서울대 금속공학과 졸업, 한국과학기술원 재료학 석·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재료연구본부장,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제5대 국새 제작단장, 대한금속재료학회 부회장

  • 기획
  • 권순택
  • 2012.02.21 23:02

KIST 전북분원 복합소재기술연구소는

국내 탄소 소재산업의 핵심 싱크탱크인 KIST 전북분원 복합소재기술연구소는 지난 2008년 1월 설립됐다. 하지만 연구소 청사가 마련되지 않아 5년째 완주 과학산업단지에 있는 전북테크노파크 연구개발지원센터내 사무실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10년 6월에 착공, 오는 8월 완공 예정인 KIST 전북분원 연구소는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봉실산 일대 31만8873㎡ 부지에 598억원을 들여 연면적 2만7967㎡ 규모로 연구동과 행정동 주거동을 건축중이다. 올 10월 입주 예정인 KIST 전북분원은 80여명의 우수 연구인력을 확보해 세계 최대 규모, 세계 최고수준의 탄소소재 연구소로 발돋움하면서 21세기 연구개발 분야와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도하는 할 전망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T-300급과 T-700급 탄소섬유 상용화 기술 개발과 T-700급 이상의 고강도 탄소섬유 개발, 나노탄소 소재개발, 필러용 세라믹과 금속소재개발, 구조용 복합소재 개발 등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탄소섬유를 응용한 우주 항공 방위산업 뿐만 아니라 전기·전자 육·해상 수송 토목·건축 환경 에너지 등 산업 전반의 핵심소재로 적용·확대해 나가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탄소섬유 저가화를 위한 연구를 진행중이다.2차원 나노카본구조인 그라핀에 대한 연구개발에도 중점을 두고 있는데 그라핀은 탄소의 평면 육각형 구조체로 최근 가장 폭발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신소재다. 기존의 반도체 소재인 실리콘보다 전기 기계적 물성이 우수한 특성으로 차세대 디스플레이 태양전지 반도체 등의 전자산업과 에너지산업의 핵심 소재로 주목을 받고 있다. 전북분원에서는 그라핀의 대량 합성 방법 및 이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나노복합체 제조와 응용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여기에 선진국과의 복합소재 글로벌 콘소시움도 구축, 미국과 일본 독일 등의 외국연구소에서 일하는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하거나 공동 연구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다. 또한 외부 연구소나 기업연구소 유치에도 발벗고 나서 일진그룹의 재료중심 연구소 유치를 협의중에 있고 이외에도 국내 유수의 소재기업관련 연구소나 해외 기업 연구소 유치도 추진중이다. 지역사회 공헌차원에서 학연협동 과정도 개설하고 전북대 전주대와 각각 학사 석사 과정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원광대 군산대 등과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 기획
  • 권순택
  • 2012.02.21 23:02

유영대 교수는 - 우석대 교수 재직 때 전주의 명창·국악인들 영향으로 판소리 연구

유영대 교수는 남원 보절면 출신이다. 할아버지 대에는 '천석꾼'이었을 정도로 부유했지만 정치에 몸담았던 선친 대에, 그의 표현대로라면 '조금(?) 몰락'했다. 아버지 유운종씨는 전주 북중과 서울 법대를 나온 지식인이었는데, 일찌감치 중앙 정치에 입문한 덕분에 가족들은 서울로 이사를 해야 했다. 중학교까지 남원에서 나온 그는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 장터에서 만났던 약장수들의 굿판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래도 우리소리를 놓지 못하고 끝내는 이 길로 들어선 바탕에는 어릴적 정서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대학 시절(고려대 국문과) 탈춤운동을 했다. 당시에는 오히려 판소리를 멀리 했는데, 탈춤이 민중적인 장르인 반면에 판소리는 출발은 서민적인 것이었다해도 양반취향적인 속성 때문에 민중운동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소리는 어릴적부터 인연이 깊었다. 장터의 약장수 굿에 대한 기억 말고도 그의 동네에는 동편제의 소리꾼 강도근 명창이 살았는데 남원국악원에서 소리를 가르쳤던 강도근 명창의 소리는 그를 판소리로 이끈 또 하나의 힘이 되었다. 우리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외면했던 판소리를 다시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순전히 창작판소리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주목하고 또 기꺼이 판소리연구자로서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그는 스물아홉 살부터 서른아홉 살 되던 해까지 10년을 전주에서 보냈다. 우석대 국문과 교수로 근무한 덕분이었다. 그때 전주의 명창과 국악인들은 그의 스승이 됐다. 그래서 그는 판소리를 진짜 생생한 예술로 접할 수 있었던 계기는 전주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95년에 모교인 고려대로 직장을 옮겼지만, 그는 판소리 연구자로 이 지역과 특별한 교류를 해왔다. 특히 고향인 남원의 국악 발전에 여러 통로로 참여해온 유 교수는 남원 '국악의 성지' 조성 프로젝트와 남원시립국악단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제안했던 국악성지는 진행과정에서 방향을 달리해 당초 그림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버리고 말았다.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임기가 끝나 조금은 휴식기를 가질 계획이었지만 유교수은 여전히 창극 제작 현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원하는 '몽유도원도' 제작 때문이다. 10개월 프로젝트로 의뢰 받은 이 작품을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 한국적인 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볼 생각이다. 대학원 과정의 문화콘텐츠과를 전담하고 있는 그에게 '창극'은 우리시대의 가능성 있는 공연예술 콘텐츠로 안겨있다. 그래서 '몽유도원도' 말고도 몇 편의 작품을 꾸준히 기획하고 제작할 생각이다. 그의 바람대로라면 우리는 머지않아 더 새롭고 보편적인 음악극을 만날 수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2.02.14 23:02

유영대 교수 前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창극, 보편적 음악극으로 서야 우리시대의 공연양식 된다"

콘텐츠의 시대. 우리 전통문화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되고 있다. 창극도 그중의 하나다.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창극은 적어도 우리음악분야의 '오래된 미래'라 할만하다. 창극의 뿌리는 물론 판소리다. 최초의 창극 '은세계'가 1908년 원각사에서 올려진 이후 창극은 1950년대 말까지 가장 인기 있었던 공연예술이었다. 우리 전통문화가 말살되었던 일제강점기, 창극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어찌됐든 당시 창극은 대중들의 삶을 위로하는 통로였다. 그러나 새로운 대중문화가 밀려들면서 창극은 더 이상 대중들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 설자리를 잃은 창극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국립창극단이 만들어진 것이 1962년. 그렇게 보면 창극은 100여년 역사동안 부침은 있었으나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적자의 자리를 그대로 지켜온 셈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의 무대에서 창극은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우리의 양식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신명은 있는데 왜 감동은 그 신명에 미치지 못할까. 비장함은 있는데 집중되게 하는 힘은 왜 약할까. 경지에 이른 소리꾼의 절창에 가슴 뜨거워지면서도 왜 무대는 끝내 낯설까. 그 답을 구하고 싶었다.  유영대 국립창극단 전 예술감독을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유영대 교수(57고려대)는 지난 연말,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에서 물러났다. 연임으로 6년이란 시간을 온전히 '우리시대의 창극'을 만들어내는 일에 바치고 난 후다. 그는 그동안 쏟아온 열정만큼이나 치열하고 단호하게 판소리와 창극의 미래를 진단하고 예견했다. 그로부터 얻은 우리 창극의 미래는 명쾌했다. "창극이 보편적인 음악극으로 서야만 우리시대의 공연양식이 된다."  인터뷰는 지난 6일, 그가 몸담았던 국립극장 창극단 예술감독실에서 있었다. 사무실 비좁은 공간은 아직 정리하지 않은 그의 살림살이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며 '창극'의 길을 모색해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온갖 자료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연임하셨으니 6년이군요. 장기집권인 셈인데, 시원함과 섭섭함 어느 쪽이 먼저인가요. "12월 말로 끝났으니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요. 새 예술감독이 정해지지 않은데다, 지난해 '한국의집'과 함께 제작했던 '몽유도원도'를 다시 제작하는 일정으로 여전히 창극제작 현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몽유도원도'는 지난해 관광 상품으로 호평을 받았었던 작품이죠. 그래서 그런지 볼거리는 있었으나 서사적 구조, 역사적 관점이나 텍스트로서의 의미 전달은 좀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그랬죠. 관광객들을 위한 무대여서 볼거리 중심으로 만들다 보니 내러티브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이번 다시 제작하는 작품은 완결된 구조의 예술성을 온전히 갖춘 창극으로 제작할 계획입니다."-한국콘텐츠 진흥원이 제작 주체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콘텐츠진흥원에서 이 작품을 보고 3D같은 첨단의 공연기법과 기술을 접목시켜 제작해보자는 제의를 받았어요. 대형극장에서 현대적인 IT 기술을 접목시켜서 만드는 창극무대는 꼭 해보고 싶었던 양식입니다. 콘텐츠는 우리 것이지만 새로운 영상기법을 도입해서 무대를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내는 이 작업을 통해 '법고창신'의 모델을 제시하고 싶습니다."-'몽유도원도'는 사실 창극 작품으로는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창극은 전통적으로 행복한 결말에 익숙해있죠. 판소리 다섯바탕이 배경이 되는 창극이 모두 그렇잖습니까. 인과응보와 권선징악, 파사현정 같은 주제들이죠. 그런데 이 작품은 안평대군과 궁녀, 무사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실체를 다룹니다. 그 결말은 매우 비극적이지요." -사실 그동안 공연되었던 창극의 주제도 한정되어 있지만 창극의 양식이 오늘의 관객들과 호흡하기에는 좀 생경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창극이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창극의 미래는 이 공연양식을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달려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극장으로 들어온 창극은 확실하게 보편적인 음악극 양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실험적인 양식들이 많이 시도되었지만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거든요."-그런 점에서 교수님께서 창극단 예술감독을 맡게 되면서 시도했던 일련의 양식들은 어떻습니까. "2006년에 예술감독을 맡았어요. 그 전에는 창극공연을 즐겨보았고, 그래서 창극 평론을 많이 했습니다. 전공자들과 창극을 주제로 세미나도 많이 했는데 결론은 늘 '창극의 미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창극은 죽어있는 장르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 대세였지요."-국립창극단만도 50주년 역사에서 그런 결론은 암울하군요.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창극단을 맡고 보니 많은 시도가 있었다고 해도, 오늘의 무대 양식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보다는 고정된 창극의 전통적 무대 양식은 그대로 고수하다보니 살아있는 장르, 관객과 호흡하는 장르로서가 아니고, 오히려 고리타분하다는 인식만 높여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애호가들은 향수가 있으니까, 의미있었겠지만요."-고민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창극단 예술감독 프러포즈가 왔었을 때 고민했던 것이 그것이죠. 이 장르를 과연 내가 새롭게 살려볼 수 있을까. 그래도 소명처럼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포기하자 했어요. 국악인이라면 몰라도 제 경우는 판소리 연구와 평론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에 좀 더 자유롭다는 생각을 했거든요."-처음에 내세우셨던 <우리시대의 창극>이라는 아젠더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맞아요. <우리시대의 창극>은 제 임기 동안 일관되게 내세웠던 아젠더입니다. 창극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 속에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가장 절실했거든요. 그동안의 창극 무대를 냉철하게 보자면, 대부분 1500석 극장에 한 몇 백 명 관중 모여서 보다가 '얼씨구나 절씨구나' 노래 나오면 다 흩어져 가버리는 공연을 2-3일정도 하면서 한해를 보내는 식이었거든요. 물론 어떤 해는 완판창극 같은 것을 기획해 관객을 끌어모은 적도 있었지만 그런 시도들이 근본적으로 창극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고는 못합니다. 동시대의 관객과 호흡하기에는 그런 양식들이 미흡했기 때문이예요."-그렇다면 그동안의 작업에서 '우리시대의 창극'의 길을 찾으셨습니까. "6년 동안 적지 않은 작품들을 올리면서 늘 보편적인 음악극으로서의 창극을 지향했습니다. 창극은 극장 안으로 들어온 이상,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정형화된 작품이어야해요. 그런데 극장이라는 것은 꽉 짜여진, 그래서 조명이나 이런 것들도 아주 긴밀하게, 또 무대도 밀도 있게 드나들고, 음향도 적절하게 쓰여져야합니다. 그런데 우리 작품의 대부분은 주먹구구식이었죠. 서양의 공연예술들이 가장 첨단을 달리고 있는 그 순간에도 우리 창극은 '적당히'와 '즉흥성'에 의존했어요. 극장을 선택했으면서도 우리 전통극 양식인 마당의 형식을 놓지 않았죠. 좋게 말하자면 '자유롭고 즉흥적'인 마당극의 요소가 마치 창극의 본령인 것처럼 인식되었지요. 저는 이것이야말로 창극이 우리시대와 호흡할 수 없는 아주 심각한 한계라고 봅니다."-좋고 나쁨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즉흥성과 현장성은 우리음악 양식의 독창적인 특성일 수도 있을텐데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창극은 극장의 공연양식이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당극은 무대와 객석이 구분 자체가 없는 열린 공간이지요. 그러나 극장은 무대와 객석 자체가 완전히 분리된 공간입니다. 공간이 달라졌으니 그에 맞는 양식을 만들어야하는 것이 당연하지요."-어떻게 그 과제를 실현했는지 궁금합니다. "극장 안으로 들어온 이상, 엄격한 규제, 양식화된 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취임하면서는 아예 그렇게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내세운 아젠더도 <우리시대의 창극>이었고요. 동시대 관객과 호흡해야 한다는 것, 특히 젊은 관객과 더 많이 호흡해야 한다는 것은 제가 생각하는 가장 절실한 과제였습니다. 일단 작품의 주제부터 생각했죠. 대본을 다시 쓰고 작품도 해체해서 복원했습니다. 음악도 그동안의 수성반주 위주에서 벗어나 국악관현악을 아주 적극적으로 결합하게 하는 음악극으로 재편했어요. 그동안의 창극에서 음악은 수성반주의 확대 재생산이었는데 그것은 오히려 소리를 방해하거든요. 그 다음은 춤을 유기적으로 도입했습니다. 춤이 장식적으로 존재하게 하지 않고 기능하게 했어요."-작년,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아힘이 국립창극단과 '수궁가'를 연출해 화제가 되었었는데, 그 작업 역시 이러한 양식의 지향과 관계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이런 작업, 보편적인 음악극으로 창극을 만들어가려했던 결정작이 아힘의 <수궁가>라고 할 수 있어요. 아힘과의 작업은 우리 창극의 세계화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해 국립극장 공연 이후 독일 부퍼탈에서 3회 공연을 했는데, 모두 매진된데다 호평을 받았습니다. 물론 제작 과정에서 한국적인 선율이 너무 배제되는 등의 문제점으로 약간의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보편적인 음악극으로서의 틀을 정착시켜 가는데 아주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6년 동안 많은 작품을 제작했는데, 그래도 가장 대중적인 성공작은 역시 '청'이 아닐까 싶습니다. "'청'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청'은 100회 공연. 10만 명이 보았어요. 뮤지컬 명성황후 경우, 100만 명이 보았다고 하니 그에 비하면 아주 미미하지만 창극으로서 100회 공연 10만 명 관객은 창극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였어요. 그 작품은 우리가 선택한 양식을 통해 자신감을 갖고 진행한 어떤 기준자이기도 합니다. 그 이듬해 똑같은 관점으로 제작한 것이 <춘향>인데, 주제의 관점을 새롭게 한 것이나 관현악과 춤을 작품 속에서 기능할 수 있게 한 좋은 무대로 평가 받았습니다. 창극을 현대의 공연예술에 합당한 공연예술로 만들어간 예로 꼽히기도 했습니다."그동안 진행해온 과정에서 창극의 가능성을 확인한 유 교수는 국립창극단에 또 하나의 선물을 남겨놓았다. 모든 작품의 제작과정을 기록으로 남겨놓은 제작일지다. 악보부터 무대치수, 소품, 공연사진, 제작예산, 관객 수와 배우들 출결 상황까지도 촘촘히 기록한 제작노트는 창극을 보편적 음악극으로 만들어가는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창극의 새로운 미래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졌다. 그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이제 이 시대를 사는 관객들의 몫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2.02.14 23:02

유종근 前 지사는 - DJ 경제고문 활약하며 외환위기 극복

교수, 도지사, 대통령 특보, 대기업 회장, 중소기업 CEO. 인생 3막을 살고 있는 유종근 회장의 이력이다. 예순 여덟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게 보였다. 제빵공장 일과 아이 교육, 신앙생활에 푹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1995년 초대 민선 전북도지사로 일할 당시엔 화려한 넥타이, 거리낌 없는 말투, 파격적인 인사 등으로 주목받았다. 과거 관선 도백의 이미지를 싹 벗겨낼 만큼 개혁적인 도정을 수행했다. 7년동안 두차례(95~2002) 전북지사를 역임했다. 유 회장이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 건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수배중이던 동생이 경찰에 연행되는 걸 보고 그 충격으로 부친이 돌아가신 것이 계기다. 미국 유학 당시, 서울대 4학년과 2학년에 재학중인 종성(미 샌디에이고 대학 교수)종일(KDI 교수민주통합당 경제민주화특위위원장) 두 동생이 모친 회갑을 맞아 정읍 집에 왔다가 잠복중인 형사들에게 연행됐고, 그 충격으로 부친이 돌아가셨다. 이후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미국에서는 인권문제연구소장을 맡았다. 몸담고 있던 뉴저지주 대학에서 워싱턴까지 4시간이나 소요되는 등 여건이 안 됐지만, "균형잡힌 시각을 가진 당신이 맡아야 한다"는 DJ의 요청에 따라 소장을 맡았다. 당시 "'DJ=좌파'라는 인식으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며 DJ에게 '대중경제론'을 저술하도록 요청했고 유 회장이 이 일을 도왔다. 유 회장은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경제고문으로 활약했다. 고교시절 경제학을 공부해 나라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가졌고 마침내 외환위기 때 그 기회를 실현했다. 한나라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던 인물이었지만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에 나섰다가 5년전의 세풍그룹 뇌물 사건으로 3년 넘게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1년3개월을 남기고 2007년 12월 31일 특면사면됐다.유 회장은 지난해 10월5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장로 장립식을 갖고 장로에 취임했다. 부인 김윤아 여사(49)는 이화여대 신학대학원을 나와 미국 이민교회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평택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고 논문만 남겨 놓고 있다. 유 회장 수감생활중 성령체험을 한 뒤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점심 때 자리를 같이 한 김 여사는 "목회 일과 아이 치료차 미국에 갔는데 바람 나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더라"며 "주변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악성 소문이 나도는 등 견디기 힘들었지만 하느님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허허롭게 웃었다. 유 회장은 교수와 도지사, CEO를 역임했지만 모아놓은 재산이 별로 없다고 했다. 나이 어린 아들 딸이 정신적, 재정적으로 자립할 때까지 지원해야 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경제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 은퇴 후엔 딸 예지양(중 2)과 같은 자폐아를 위한 교회와 학교를 설립해 봉사하는 것이 소망이다. '유종근의 신국가론', '한반도 통일의 철학적 원리', 'IMF-알아야 이긴다' 등 여러권의 책을 저술했다.

  • 기획
  • 이경재
  • 2012.02.07 23:02

"지방자치 제대로 하려면 입법·조세·인사권 독립 필수"

민선 첫 전북도지사를 역임했던 유종근 전 지사(68)가 중소기업 CEO로 변신했다.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도너츠 회사다. 미국에서의 교수생활과 귀국 후의 정치이력에 이어 기업 CEO로서 인생 3막을 살고 있다. 대통령 경제고문으로 외환위기 당시 해결사 역할 등 화려한 정치인이었지만 수감생활을 하는 등 굴곡진 삶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세월무상.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고 향후 인생은 어떻게 설계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흘러간 사람도 인터뷰 하느나"고 했다. 세월은 흘렀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호기심은 오히려 선명하게 돋아났다. 50여년 만에 가장 추었다는 지난 2일 서울 서초동 자택을 찾았다. 가족들 모두 밝은 표정이었다. 늦둥이 아들 주영군은 즐거운듯 인터뷰 내내 유 회장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유 회장은 회사 일로, 아들 일로, 교회 일로 바쁘게 지낸다고 했다.-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경기도 파주에서 도너츠를 생산하는 '온누리 F&D'라는 회사에 일주일에 두세번 나가고, 열살짜리 늦둥이 아들 뒷바라지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며 지냅니다." -도지사를 지내신 분이 제빵 공장 회장으로 변신한 게 이채롭습니다. 어떤 회사입니까."'리치스 도너츠'(Rich's DONUTS)라는 자체 브랜드로 판매하면서 대기업에 납품하는 회사예요."이 회사의 유종연 사장은 유종근 회장의 6촌 친척 동생이다. 던킨 도너츠 프랜차이즈를 국내에 선보인 도넛츠업계 선두주자였지만 던킨 본사를 인수한 배스킨라빈스가 계약 연장을 해주지 않자 'Rich's DONUTS'라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었다. 외환위기 때 거래처 부도 여파로 실패를 맛봤지만 이후 재기에 성공했다. 서울 공장을 파주로 확장, 이전하면서 유 회장이 합류했다. 유 회장은 큰 틀의 의사결정과 재무쪽을 맡는다고 했다. -대기업한테 납품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을 텐데 '갑'에서 '을'이 된 심정은 어떻던가요. "고개 숙이는 것 아무 문제 없어요. (감옥에서) 젊은 교도관들한테도 고개 숙이고 존대했는데 뭐, 아무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훈련시켰던 것 같아요."-공장 신설할 때 인허가도 받았을 터인데 도지사 하시다가 공무원 상대할 때 느낌이 각별할 것 같습니다만. "잘들 해주었어요. 공직자들 대하는 반응이나 방법을 알기 때문에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과거의 나를 버리고 국장급까지는 모두 찾아가 일을 했습니다."-대학에서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한 학기 정도 했는데 아이 가르치는 문제 때문에 그만 두었어요." -아들을 직접 가르치시나요."영어 수학 음악은 직접 가르쳤는데 수학은 이제 가르치기가 버거울 정도예요. 물리 화학 생물같은 과학과목은 미국 대학 교재를 혼자서 볼 정도가 됐어요."아들 주영군은 미국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다 들어왔는데 적응이 쉽자 않아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 유 회장이 직접 가르친다. 슈바이처 박사처럼 의료선교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한다. 지금 히브리어를 배우고 있다. 지인(知人)인 대학 교수가 직접 가르치겠다고 해서 대학이 있는 평택까지 유 회장이 아들을 데리고 다닌다. 수학에 재능이 뛰어나다는 소식을 들은 홍성대 상산학원 이사장이 '수학의 정석' 등 수학 관련 책 14권을 선물했다고 한다.-2008년에는 대주그룹(광주) 회장에 영입돼 '구원투수' 역할을 하셨는데 결국 법정관리되고 말았습니다."부동산 침체에다 세무사찰, 소송 등이 진행돼 어려웠지요. 협력업체들도 현금을 주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았고 금융지원은 올 스톱돼 곤경에 처했는데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법정관리됐습니다."-당시 호남기업 싹을 말린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부당하거나 억울한 면은 없었나요."억울했지요. 대주건설이 정부가 제시한 기준으로 보면 B등급, 최악이라 하더라도 C등급이어서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D등급으로 판정이 나 워크아웃됐어요. 당시 건설회사로서는 대주건설만 포함됐어요."-왜 그런 결정이 나왔을까요."광주일보를 인수한 게 화근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정권한테 밉보였고 손보지 않고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소문이 있었어요."-지난 얘기지만, F1 그랑프리 인허가 대가로 세풍에서 3억원을 받은 혐의로 5년 실형 받은 얘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지금 대법원 같았으면 무죄 판정을 받았을 겁니다. 세풍 쪽에서 '몇월 며칠 몇시에 공관에서 돈을 주고 갔다'고 진술했는데 그날은 다른 지역에서 개최된 행사에 참석한 날이었어요. 그래서 행사 단체 책임자의 진술과 사진을 첨부해 입증했는데 선고 일주일 남기고 공소장을 변경시켜 짜맞추더라고요. 그리고 처남이 전주 리베라호텔에서 밤 12시에 1억원을 받았다는 혐의도 마찬가지예요. 당시는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세일정 때문에 무주에서 숙박한 날인데 이게 잘 맞지 않자, 자다가 나와서 새벽 2∼3시경에 받아갔다고 공소장을 변경하더라고요. 이건 재판기록에 다 나와 있어요. 알리바이가 입증된 걸 다 무시하고 실형을 선고했는데 한명숙 총리처럼 힘이 있었다면 그렇지 못했을 겁니다. 내가 힘이 없었던 탓이지요."-옥중 생활은 할만 하던가요."성경에 요셉 이야기가 나와요. 유혹을 뿌리쳤다가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얘기인데 하느님 뜻이라고 봐요. 형기 5년 중 1년3개월을 남기고 특별사면돼 나왔어요. 감옥에서는 책도 두권이나 쓰고 운동도 열심히 했어요. 지금도 팔굽혀펴기는 1분에 60회씩 합니다."-2002년 대선 경선에 나섰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어요. 당시 청와대 쪽에서 출마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있었는데 정치적인 관련성은 없었나요."아, 뭐 그런 얘기는…. 제주 경선 때 꼴찌에서 두번째를 기록한 뒤 울산을 거쳐 광주에서 올라챌 계획을 갖고 경선준비를 하던 참이었는데 광주 경선 전에 소환당했으니까…. 김상현 전 의원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나를 배신하는 사람은 없다. 세(勢)가 약할 뿐이다' 참, 실감나는 말입니다."-과거 민주화 운동을 하셨고 그 계기로 정치에 입문한 지 어느덧 17년이 지났습니다. 교수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걸 후회하지는 않습니까."후회는 없어요.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고 앞만 보고 가려고 해요. 고통이 있었지만 젊을 때 경제를 살리기 위해 경제학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고, IMF위기 때 나라를 위해 불철주야 뛰어 궤도에 올려놓은 것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해요. 미국에 남아있었다면 그런 일 못했을 겁니다."-이야기를 바꿔, 경제가 어렵습니다. 경제학자로서 MB경제를 어떻게 보십니까."기업경영과 국가경영은 달라요. 기업 성공한 사람한테 그 기대를 갖고 나라 맡기면 안 돼요. 자신감 때문에 다른 사람 얘기를 안 들어요. 미국 지미 카터가 대표적인 사례지요. 땅콩농장 경영주로서 자수성가한 비즈니스맨이었던 카터가 대통령을 했지만 정치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반면 레이건은 성공한 대통령이었어요. 나를 따르라 한 게 아니고 국민을 설득해 가면서 리더십을 발휘했지요.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레이건의 예를 들며 설득해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많이 얘기해 드렸습니다."-일자리, 양극화, 소득불균형 등 경제문제가 최대 화두입니다. 어떤 처방이 필요할까요."아마 올해 대선 이슈가 될 겁니다. MB경제도 문제지만 세계 경제의 흐름에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시장경제가 위기를 맞자 케인즈 경제이론이 부상하면서 정부역할이 강조되고 이것이 정석이 돼서 툭 하면 정부가 개입하고 나섰지요. 그 반작용으로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시대적 조류로 득세하면서 무한경쟁만 있지 따뜻한 배려가 없어요. 대기업은 살찌는데 국민은 점점 궁핍해지는데 결국 규제와 따뜻한 재분배정책이 이뤄져야 합니다. 미국이나 독일 등 어느 한 국가한테만 기대할 수는 없어요. 세계 지도자들이 동시에 이런 정책을 펴야 가능합니다."-자영업자들이 전북에서도 하루 20곳씩 문을 닫습니다. 지방경제는 더 열악합니다. 지방경제를 활성화할 방책은 없을까요. "구조적으로 우리나라는 지방이 살기 참 어렵게 돼 있어요. 중앙집중이 일본보다 더 심해요. 중앙이 재원을 다 가져간 뒤 찔끔찔끔 나눠주고 있어요. 공항이나 신항만, 도로 등이 필요하면 자치단체 스스로 짓고 경영하도록 하면 되는데 모든 게 중앙정부 승인 사항 아닙니까. 경제도 마찬가지로 자율권이 없으니 어렵지요."-미국에 계실 때 뉴저지주 주지사 경제자문관으로 일하면서 10년 넘게 지방자치에 관여한 걸로 압니다. 미국과 우리의 환경이 다르긴 하지만 제대로 된 지방자치를 하려면 무엇이 과제라고 생각하십니까."입법권과 조세권, 인사권 독립이 이뤄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방의회가 조례를 제정할 수 있지만 상위법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까? 이런 건 실질적인 입법권이라고 할 수 없지요. 지역개발사업까지도 지역실정에 맞든, 맞지 않든 재원을 갖고 있는 중앙정부에 매달려야 하는데 이건 자치라고 할 수 없어요. 조세권과 인사권을 자치단체에 줘야 하고 경찰도 중앙이 장악해선 안됩니다."-민선 전북지사를 두차례 역임하셨는데 잘 했다고 생각하시는 일, 아쉬움이 남는 일을 꼽으신다면."공과(功過)는 도민들이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1995년 임기 시작하면서 열심히 하면 전북이 도약단계에 들어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 뒤 IMF위기가 와 얼어붙어 버렸어요. 아쉬움이 남는 건 28억달러 투자계획을 갖고 있던 다우코닝의 전북유치가 무산된 일입니다. 정권(김영삼) 말기가 되니까 정부 관료들이 움직이질 않아요. 자료도 주지 않고 전북에만 특혜를 줄 수는 없다는 투였습니다. 만약 부산에서 유치하려 했다면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한밤중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일산 자택까지 찾아가 다우코닝사와 전화연결을 시도해서 투자요청을 했지만 때가 늦었어요. 우리 정부가 한 일이라곤 발표 마지막날 반페이지 짜리 팩스 한장 달랑 보낸 것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차관 이름으로. 관료들한테 칼자루를 쥐어주어서는 안 돼요."-도지사로서 도정을 맡았을 때와, 밖에서 도정을 바라볼 때는 많은 차이가 있을 법 한데요."후임자의 일을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치 하실 생각은 없나요."없어요. 공천혁명이다, 중진 의원 물갈이다 해서 나이 먹은 분들이 눈총 받는 걸 보면 아, 이렇게 해서 한 세대가 지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꼽으신다면."미국에서 21년간 교수생활 했는데 제자들 가르친 것도 보람된 일이고, 주지사 경제자문관 하면서 배운 것을 활용한 것도 보람된 일이지요. 민주화운동 하면서 미국의 정계 인사들과 쌓은 인맥도 IMF 때에는 많은 도움이 됐어요. 김대중 대통령을 도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일조한 것이 가장 보람있었던 일이 아닌가 합니다."-앞으로 여생은 어떻게 구상하고 계십니까."삶의 마지막을 사회봉사로 마무리하고 싶어요. 선교활동과 사회복지 두 분야에 매진하려 합니다. 또 하나는 아이들 양육인데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자립할 때까지는 돌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경제활동도 필수입니다."-아주 오랜만인데 전북도민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과분하게 사랑을 받아 고마울 뿐입니다. 끝까지 비상했다면 좋았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 기획
  • 이경재
  • 2012.02.07 23:02

임정기 부총장은

임정기 서울대 부총장은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본류에 우뚝 선 인물이다. 서울대 의대 교수로 30년간 재직하며 수많은 의사와 의학자를 길러냈을 뿐 아니라 국제저널(SCI 등재 학술지)에 195편의 논문(H-index31)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연구활동을 펼쳤다.특히 의치학 교육제도 개선은 괄목할만 하다. 2번의 서울의대 학장과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장협회 이사장직을 맡아 정부가 의과대학에 전면도입하려던 의전원 체제를 각 대학이 자율 선택토록 방향을 돌려 놓는데 기여했다.1950년 김제시 성덕면 묘라리에서 5남2녀중 막내로 태어난 임 부총장은 김제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임 부총장 집은 김제역전에서 대동양조장(나중에 김제시내 3개 양조장이 통합돼 대성양조장으로 개칭)을 경영했다. 제헌의원과 457대 국회의원, 체신부장관을 역임한 조한백씨가 외숙이다.서울고를 거쳐 서울대 의대와 대학원를 졸업했으며 1983년부터 서울의대 교수로 재직해 왔다. 그 동안 대한의학회 학술진흥이사와 대한영상의학회지 초대 편집위원장, 서울대병원 진료부원장, 대한의학학술지 편집인협의회장, 제1회 아시아 흉부영상의학회 학술대회장, 대한민국한림원 집행이사, 한국의학교육협의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2013년 한국에서 개최될 제3차 세계흉부영상의학회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학술활동도 폭넓어 현재 Society of Body Computed Tomography/MR, Fellow Member, Fleischner's Society, Active Member,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및 의학한림원 정회원으로 있다. 유한학술상 본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스키, 테니스, 골프 등 스포츠에 만능이다. 1972년 서울대 스키부 주장으로 전국학생체전 선수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부인과 사이에 두 아들이 있다. 첫째는 치과의사로 미국에 유학중이며 둘째는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전공의 4년차다.

  • 기획
  • 조상진
  • 2012.01.31 23:02

임정기 서울대 부총장 "의사는 보편적 인류애와 책임감·탐구의식 가져야"

서울대로 가는 셔틀버스는 만원이었다. 1월 하순의 매서운 추위에다 겨울방학이 겹쳐 한가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학본부 앞에서 내린 학생들은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학생회관 식당이며 중앙도서관은 꽤 붐볐다. 잠시 들른 학생회관 벽면에'누가 조국의 길을 묻거든/ 머리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싯귀가 있었다.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에 부응하듯 한 겨울에도 서울대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관악산 정상에서 힘차게 달려온 용맥의 기가 뻗혀있는 대학본부. 그곳 4층 집무실에서 임정기 연구부총장(62)을 만났다. 당초 한달여 전, 의대가 있는 연건캠퍼스 학장실에서 만나기로 했었으나 부총장으로 발령나는 바람에 이곳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선 축하드립니다. 서울대의 연구분야를 총괄하는 자리로 옮기셨는데 눈코뜰새 없이 바쁘실 듯합니다. 어떠신가요?"의대는 40년 동안 재직해서 익숙한 곳인데, 이번에 새로 직무를 맡게돼 분주한 일정을 보내고 있습니다.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도 새로 출범했구요."(서울대는 2011년 12월 28일자로 국립대학법인으로 재출범했다.) - 연구부총장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가요?"2009년 이전까지는 단일 부총장 체제였습니다만, 동년 8월에 특임 부총장제를 신설하여 대학원장과 겸임하도록 했습니다. 2010년 8월 현 오연천 총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교육부총장과 연구부총장의 양축으로 개편했습니다. 연구부총장의 역할은 연구처(산학협력단 포함), 기획처, 사무국, 시설관리국 및 정보화본부의 업무를 총괄합니다." - 서울대는 2008년 국제학술지(SCI) 논문발표 건수에서 세계 20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06년 32위, 2007년 24위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직무상 더 채찍을 가해야 할텐데요?"창의적 연구의 결과로 얻어지는 논문 발표는 교수님들의 존재 이유이자 성취감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대학의 역할은 교수와 대학원생을 포함한 연구원들이 연구에 매진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학문분야간 소통을 통한 융합적 연구환경 조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이에 대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대학에서는 잘하는 연구팀에 더욱 지원을 하고 어려운 연구 여건에 있는 교수님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이룩한 업적을 대학구성원과 공유하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이제는 양적 성장을 접고 질적 성장에 주력할 때라는 목소리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서울대의 연구 업적을 양적 기준으로 보면 세계 어느 대학도 유래가 없는 가파른 성장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장 추세로 간다면 동양의 최고이자 세계 2위인 동경대학에 5년 이내에 접근하리라 예상합니다. 이미 의학분야는 2009년을 기점으로 동경대학을 추월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양적 기준이며, 피인용 횟수로 대변되는 질적 기준은 훨씬 못 미칩니다. 서울대에 아직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는 현실이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적 성장은 질적인 성장과 상충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학문의 발전이 가치있는 이정표적 논문을 중심으로 전개돼 온 역사를 볼 때 연구업적의 질적 향상이 향후 글로벌 중심대학을 목표로 하는 서울대의 가야할 길임은 분명합니다." - 그럼 이제 부총장님이 몸바쳐 온 의학교육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우선 서울대 의대는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인데 어떤 학생들이 오고, 어떤 교육을 시키는지 소개해 주시죠. "학업능력은 모두 뛰어난 학생들입니다만 성품이나 사회 적응력 등은 학생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뛰어난 적응력으로 잘 헤쳐 나가는가 하면, 어떤 학생은 세심하여 쉽게 상처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학생들은 순수하여 학교의 교육 목표에 잘 순응하고 있습니다. 의과대학생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지식과 술기(skill)는 실로 많습니다. 지식의 습득은 강의와 실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만 되도록 주입식이 아닌 자기 주도적 학습을 늘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의사나 의학자로서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하게 꼽는 것은 무엇입니까?"모든 학문분야에서 공통된 사항이겠습니다만, 특히 의학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므로 보편적 인류애를 갖춘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어서 책임감과 탐구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부총장님이 의대를 지망한 동기가 궁금합니다."제 둘째 형님이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고 계신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진로를 결정할 때 형님의 모습을 보고 '의사로서의 길이 보람이 있겠다'고 생각해 결정했습니다." - 영상의학을 전공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제가 전공과목을 정할 때는 영상의학(당시에는 방사선과학)이 그다지 인기있는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4학년 선택의학 실습기간 중 방사선과의 활기찬 학문적 분위기와 당시 미국 교환교수 연수를 갓 마치고 귀국해 조교수로서 종회무진하시던 한만청 교수님의 활동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한 교수님께서는 방사선과 의사는 '진료의 방향을 결정하여 주어야 하는 의사의 의사'이므로 광범위한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 부총장님은 교육은 물론 연구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보였습니다. 국제학술지(SCI)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셨고, 대한의학회 등 각종 학회의 연구분야를 앞장서 이끄셨습니다. "제가 국제학술지에 처음 논문을 게재한 것은 전임강사 시절인 1985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영문도 서툴기 짝이 없고 논문작성에 대한 공부를 따로 한 것도 아닌데 처음 보낸 원고가 채택되니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가슴이 뛰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게재된 논문이 증가하면서 국제학술대회에서 일면식도 없는 유명 학자들이 제 이름을 알아보는 데에 놀랐습니다. 그 이후로 교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기쁨은 귄위있는 학술지에 투고한 논문이 채택되었다는 편지를 받는 순간들이었습니다." - 부총장님은 의대학장 재직시 의학전문대학원 폐지에 앞장섰습니다. 왜 반대했습니까?"의학전문대학원 도입의 외형상 취지는 의학교육의 질적 향상이었으나, 실제적인 취지는 대학입시 경쟁 과열해소였습니다. 그러나 의학교육의 일선에 있는 깨어있는 교수들의 대다수는 의전원의 도입이 교육의 질적 향상은 물론 입시과열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대한 역기능이 올 것을 예측했기 때문에 반대한 것입니다. 실제로 대학입시 과열은 해소되지 않은 반면, 자연대 공대 등 대학재학생을 중심으로 새로운 입시 경쟁이 과열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이공계 교육의 황폐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현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각 대학의 자율적 판단에 따른 선택을 하도록 방침을 정한 것입니다." - 의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죠."의학이라는 학문은 인류가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향상된 삶의 질을 유지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에서 의사 혹은 의학자에게 거는 기대는 막중하며, 그에 부과되는 사회적 책임 또한 엄중합니다. 직업의 경제적 안정성이 주어지는 대신에, 전문직업인으로서 지식과 술기를 쌓고 유지하기 위해 평생 연마해야 하고, 양심과 인류애를 바탕으로 진료와 연구에 임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국제기구의 수장직을 맡아 열정적으로 세계의 질병퇴치를 위해 헌신하다 순직한, 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이 재임 중 의과대학생을 위한 특강에서 "의사는 먹고 살만한 수입이 주어진다. 돈 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 전국적으로 의대 열풍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성적 최상위급 학생의 의대 편중현상은 심화되어 가고 있으며, 이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학업능력이 있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학생이 의사가 돼야겠지만, 지금과 같이 최상위권 학생들이 전국의 의과대학/의전원에 입학하는 현실은 국가적으로 볼 때 균형있는 학문적 발전에 적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거나 완화하는데 고교, 대학, 학부형들이 주체적으로 실효적 역할을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근본적으로, 우수한 학생이 이공계로 진학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학업을 마친 후 학자로서, 기술자로서 전공을 살려 갈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의 제도적 지원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런 후에 고교에서 진학지도, 대학에서는 경쟁력있는 교육 및 역할모델 교수의 역할, 그리고 학부형의 의식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존경하는 의학자는 누구를 꼽을 수 있습니까?"1956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포르스만(Werner Forssman)박사입니다. 이 분은 독일 베를린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외과 전공의로 근무하던 1928년, 자신의 팔 정맥에 고무관을 삽입해 그 끝이 우심방에 이르게 한 후 조영제를 주입하여 심장과 대혈관의 모양을 영상화하는 당시에는 혁신적이고 매우 무모한 시술을 했습니다. 이를 뿌리로 오늘날의 심장 카테터술로 발전하여 많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Dr. Forssman이 이같은 무모한 실험을 지속하자, 소속된 외과학 교실에서 배척되어 외과의사로서의 길을 접고 스위스에서 일반의로 한가하게 지내던 중인 1956년, 28년 전의 업적으로 노벨수상자로 선정되었음을 통보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 배울 점은 창의적이고 자기희생적 연구가 인류의 질병 치료에 큰 공헌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업적은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지난 해 서울시장 선거때부터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우리 사회 리더십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런'안철수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이 얘기는 안하는 게 좋겠습니다.(웃음)"(안 원장과 부인 김미경 서울의대 교수는 각각 80, 81학번으로 임 부총장의 제자다. 임 부총장은 안 원장이 차분하면서도 모범적인 학생이어서 눈에 잘 안띠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2009년 의대 졸업식때 처음으로 안 교수를 초빙, 연설을 부탁했다. 그 때 안 교수는 학생들에게 T자형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넓히고(ㅡ), 그중 특정분야를 깊게(ㅣ) 하라는 내용이다.) - 이제 고향얘기 좀 해 보죠. 김제에는 자주 다녀오십니까?"선산이 금평 저수지 부근에 있어서 봄·가을에 형제들과 함께 찾아갑니다." - 고향에 대한 어릴 적 추억 한 두가지만 들려주시죠."성덕면 묘라리 농가인 우리집에서 성동초등학교까지 1.5 km 정도 되었습니다. 동네가 임(任)씨의 집성촌으로 당시 상급학년이던 친척 형의 집에서 7-8명이 모여 열을 지어 행진곡을 부르며 등교했습니다. 그러나 봄철이 되면 얼었던 대지가 녹으면서 아지랑이 너머 드넓은 논에 소들이 논갈이를 하던 아늑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등굣길의 추억이 있습니다. 또 태어난 집의 남쪽으로 부분적으로 지평선이 보이고 그 지평선을 가르는 연한 푸른색의 높지 않은 산이 보였는데, 나중에 가수 박재란의 노래로 듣게 된'산너머 남촌에는'이란 곡의 가사가 제가 당시 느낀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헌 국회의원으로 활동을 하셨던 외숙(조한백 의원)의 선거운동용 지프차를 타고 농촌을 따라 다닌 기억도 납니다." - 전북에서는 무조건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올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역의 의료와 의학교육에 조언을 주신다면?"최근에는 전국적으로 의과대학 학생의 학업 역량, 지역 거점병원의 의료 역량이 평준화돼 수도권과 전북지역 간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결과는 우수한 학생이 전북의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이어 모교에서 수련 및 교원으로서의 길을 걸으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래 의전원 체제가 도입되면서 수도권 대학졸업생이 지역 의전원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는 수도권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지역 의료인 양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탈 현상은 의전원을 통한 입학 체제가 종료되는 2014년 이후에는 완화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 고향의 자라나는 후학들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말씀을 부탁드립니다."김제중앙초등학교 6학년 같은 반 동급생 중에 저를 포함해 3명이 서울대에 진학했습니다. 언론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두 친구는 학창시절 주위의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꿈꾸고 있는 미래의 모습에 가까이 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정치가였던 앙드레 말로의'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말을 실현한 것입니다. 앞날에 대한 꿈과 희망이 강하고 구체적일수록 현실에서 다가오는 역경을 극복하기 위한 힘은 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 기획
  • 조상진
  • 2012.01.31 23:02

진기풍 전 사장은

진기풍 전 전북일보 사장은 1925년(호적은 1926년) 고창에서 태어났다. 1947년 전북일보에 입사해 편집국장 주필사장, 서해방송 부사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편집국장 시절인 제3공화국 때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지면을 통해 전북 푸대접에 대한 공개서한을 게재해 지역사회와 정치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강단 있고 올곧은 기자로 평가받았다. 반세기동안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지역 발전을 위한 정책과 대안을 제시해왔으며 전북애향운동본부 창립과 전북애향장학재단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백양전주공장 사장과 삼화공업 사장 전북생명 상임고문 등을 지냈으며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장, KBS전주방송총국 시청자위원회위원장 강암서예학술진흥재단 이사장 전북애향운동본부 부총재 등 사회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해왔던 그는 지금은 전북애향운동본부 고문으로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 시비건립과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추념탑 건립을 비롯해 평생을 모으고 아껴온 귀중한 서화작품 143점을 고향인 고창에 기증해 무초 회향미술관을 건립하는 등 문화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여기에 남북 당국간 대회추진 1천만 서명운동 전개, 조선왕조실록 보전 기념비 추진, 전북애향장학숙 건립 추진, 용담댐 건설촉구운동을 비롯 지역 현안사업 추진에도 앞장서왔다.고창군애향대상과 국민포장 적십자 금상 등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엔 KBS전주방송총국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공동 주최하는 전북의 어른상을 수상했었다. 부인 박수영 여사(81) 사이에 2남2녀를 두었다. 장남 진홍씨(54)는 행시 25회에 합격, 공직에 몸담다 차관보를 끝으로 퇴직한 뒤 현재 한국생산성본부 회장으로 재직중이다. 차남 진석씨(52)는 치과의사로 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1.17 23:02

"지금은 더디지만 새만금 완성되면 전북 비상할 날 올 것"

아흔이 다 된 미수(米壽)임에도 여전히 곧고 정갈한 풍모, 말끔한 정장에 온화함을 간직한 노신사의 자취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자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세상의 이치와 사회현상에 대한 직관, 삶의 궤적 등을 잔잔하고 부드러운 어법으로 풀어내는 원로 언론인 진기풍(陳錤豊88) 전 전북일보 사장. 진 전 사장은 전북일보 평기자로 시작, 편집국장과 사장을 역임하면서 반세기동안 현대사의 격변기에 지역 언론을 곧추세워 온 전북 언론계의 산 증인이다. 다가산 자락이 내려다보이는 전주 고사동 기린오피스텔의 개인 사무실에서 진 전 사장을 만났다.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규칙적인 생활을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남들이 건강해 보인다고 말하는데 춘한노건(春寒老健)이라는 말처럼 늙은 사람이 건강한들 젊은 사람 같겠어요. 매일 걷기를 한 20분정도 해요. 사무실에 나와서 책도 읽고 신문도 보고 그러면서 소일해요.  -신문을 빠짐없이 꼼꼼히 보신다고 들었습니다. 신문을 보시면서 걱정스럽다든가, 짜증나시는 일은 없으십니까. 사무실에 나오면 우리 지역신문과 중앙지를 샅샅이 훑어봅니다. 48년째 구독해온 신동아도 짬짬이 보고 모두 읽고 나면 전북일보 자료실로 보냅니다. 해방후 복간한 신동아(1964년9월)를 매월 꼬박꼬박 구독했는데 중간 중간에 20권이 없어져서 전국의 고서점과 소장가들을 수소문해서 모두 구입해 전북일보에 전달했습니다. 마지막 한 권은 꾀 비싼 가격을 주고 어렵게 구했습니다. 신문을 보다보면 학교폭력 문제라든지, 정치판에 돈봉투 문제 등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어 걱정스러운 대목이 있어요.  -학교폭력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신지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학교 당국에도 책임이 있지만 학부모들 역할도 중요해요. 가해학생이든 피해학생이든 학부모들이 관심을 가지면 좀 더 개선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자녀 교육이 학교에서도 중요하지만 가정에서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나라당 대표경선에서 돈봉투가 오갔다는 폭로에 이어 민주통합당 경선에서도 돈선거 얘기가 나와 정국이 시끌한데요. 과거에도 막걸리선거, 고무신선거 얘기가 많았는데 아직도 뿌리가 뽑히지 않고 있어요. 오히려 단위가 더 커졌잖아요. 당내 문제이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돈선거 돈봉투 얘기는 많이 없어질 것으로 보여집니다. 주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아야 선거풍토가 깨끗해질 것입니다.  -늘 정직을 강조해오셨습니다만 이 땅에 언제부터인가 정직이란 말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학교 교훈에 정직을 꼭 꼽았는데 요즘은 정직이란 말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정직하면 손해본다는 인식때문이겠죠. 하지만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편법이 판치고 부정과 부조리가 득세해서는 안됩니다. 정직한 사람이 성공하고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정직은 신뢰이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지름길이죠.   -올해는 국운을 좌우할 중차대한 선거가 있습니다. 4월 국회의원 선거와 12월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는데 어떤 인물을 뽑아야 할까요. 먼저 경륜과 경험이 있어야겠죠. 다음으로 열정과 열심, 즉 성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책임감도 필요하죠. 특히 대통령은 인사를 잘해야합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처럼 측근들과 소위 캠프출신들은 일체 배제해야합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링컨의 경우 자신을 줄 곧 반대만해온 스탠튼 변호사를 국방장관에 임명했었는데 우리의 경우는 대통령이 자기사람 심기에 급급합니다. 고루 인재를 등용해야합니다. 지역을 차별해서도 안되고...  -그동안 지역개발이나 인사 등에서 전북이 소외됐다는 얘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소외라는 말은 너무 자학적인 것 같아서 더 이상 쓰지 말자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치인들이 더욱 분발하고 각성해야합니다. 또 높은자리 올라가고 장관이 되면 전북인들은 너무 몸을 사리는데 과감해야합니다. 국회의원들도 지역 일을 힘써 챙겨야죠. 일본은 국회의원들이 금 토 일 3일간은 반드시 지역구에서 활동합니다.   -서슬퍼런 3공화국시절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북푸대접을 질타하는 공개서한을 보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는데... 아무리 군사정권이라지만 장관 차관하나 전북사람이 없다보니 도민들 불만이 컸죠. 그래서 박 대통령이 전북을 방문하는 날(1966년 4월 13일) 당시 신문에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서한을 전북일보에 실었습니다.   -공개서한에는 어떤 내용을 담았습니까. (63년 제5대 대통령선거)박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당시 전북도민의 압도적 지지 덕분이었죠. 그래서 박 대통령의 정확한 득표수(40만8556표))를 적시하고 경제부흥의 도약대에서 전북의 푸대접과 도민들의 실망감을 전달하고 지역 균형발전을 건의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공개서한을 게재한 효과는 있었는지요. 당시 공개서한이 게재된 신문을 장경순 국회부의장이 박 대통령에게 보여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 뒤 무임소 장관과 차관 4명을 전북출신으로 기용했는데 그 이후에는 역시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지역차별이 심화되다보니 그 전에는 추풍령을 경계로 표가 갈리는 남북현상이 있었는데 이후에는 영남과 호남으로 표가 갈리는 동서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아직도 지지부진한 새만금 사업을 보시면 답답하시다는 마음을 피력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황인성 농림장관시절 정부에 대체농지조성비가 많이 쌓여 있는 것을 착안해 새만금사업을 시작했습니다. 4대강 영향을 받아 주춤거리기는 하지만 국책사업인 만큼 언젠가는 되겠지요. 김제출신 탄허스님도 일본 지진 때문에 동해는 손해를 보지만 서해는 영토가 늘 것이다고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전북 발전을 위해 발벗고 뛰셨는데 몇 가지 소개해 주신다면. 자화자찬 같아서... 한 가지만 얘기한다면 전북도민의 젖줄인 용담댐건립이 치일피일 지연돼 당시 강현욱 지사와 함께 건교부 장관을 만나 사업 추진을 요청했는데 경상도출신 장관이 대선공약사업인 부안댐과 양자택일을 하라는 것이예요. 그러자 강지사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사표를 꺼내놓았고 나도 경상도사람 때문에 안됐다는 도민보고대회를 열겠다고 압박하자 용담댐 공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평생을 모아온 도자기와 글씨 한국화 등 근현대 거물급 작가들의 희귀 소장품을 고향에 기증하셨는데... 고향에서 나를 안아달라는 의미로 고창 무초회향미술관에 내놓았습니다. 지난해 개관 10주년 행사를 가졌습니다. 사실 이 작품들은 나보다 안사람이 거의 모은 것들입니다. 10주년 행사에 안사람이 몸이 많이 아파서 참석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오랫동안 한점 한점 모아 온 작품 가운데는 그 가치가 높아 국내 굴지의 재력가가 매입하겠다고 한 것도 있지만 고향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무초회향미술관에 기증한 작품들은 우리나라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서양화가 진환의 牛記8을 비롯 강암 송성용 김옥균 민영익 신익희 허백련 등 근현대사 인물들의 서예작품과 고려청자 도자기 고서 현판 등 모두 143점이다)  -수차례 고사하시다 8년전 받으신 전북의 어른상 시상금 2000만원도 전북애향운동본부와 강암서예학술재단에 내놓으신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그런 상을 탈 만한 자격이 있는지 고민이 많았어요. 어찌어찌하다 그만 받게되었는데... 지역사회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은하는 작은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갈수록 내 것을 움켜쥐려고만 하는데 그렇게 나누고 내놓고 하시는 삶이 후진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 같습니다. 사회는 혼자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가야지... 서로 나누고 베풀고 하는 나눔문화가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2년째 얼굴을 안 밝히고 선행을 실천하고 있는 전주 노송동의 얼굴없는 천사는 전주 뿐만 아니라 전북의 큰 자랑입니다. 이 같은 일은 널리 알리고 선양해야하는 미덕입니다. 지금도 큰 수입은 없지만 수중에 있으면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언론인으로서 전북의 산 증인이신데 지역 언론 풍토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씀은. 요즘 지역의 언론환경이 너무 열악해져서 어려움이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언론인은 명예로 알고 자부심을 갖고 뛰어야 합니다. 공인의식과 소명감이 필요합니다.   -후배 기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덕목을 꼽으신다면. 요즘 기자들이 영리하고 민첩한 면도 있지만 너무 출입처 위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요. 출입처 이외에는 관심을 안 두려는 경향이 보입니다. 기자들은 늘 생각이 깨어있고 사고가 열려 있어서 사물과 세상 일을 남다르게 관찰하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내가 기자시절 고기와 술을 먹지말자는 무주무육일에 착안해 기사를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작고 사소한 모든 것이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질 때 큰 기사를 발굴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신문 방송을 보면 우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뒤지고 있다는 자책감이 듭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전북이 좋아질 때가 분명히 옵니다. 지금은 더디지만 새만금이 완성되면 타 지역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전북이 비상할 날이 올 것입니다. 현 상황에 대한 불평과 불만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주어진 일에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면 좋은 날이 반드시 옵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1.17 23:02

"소유가치 아닌 '존재가치' 토대로 삶의 가치 찾아내야"

"전에는 종교가 세상을 걱정했지만, 지금은 종교 때문에 국민이 근심하고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2010년 여름, 조계종 총무원 화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도법스님이'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초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했던 말이다.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다. 세파에 찌들린 사람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종교마저도 반목과 다툼으로 혼탁해진 시대에서 대중들은 더 혼란스럽다. 도법스님을 만났다. 삶을 뒤돌아보게 되는 연말이었다. 스님을 만나면 이 혼탁한 시대에 지혜롭게 사는 길이 보일 것 같았다. 전북일보 독자들을 위한 스님과의 본격적인 인터뷰는 두 번째다. 첫 번째 인터뷰는 2003년 겨울, 천일기도를 끝낸 후였다. 그때 스님은 1000일 동안 산문을 넘어서지 않고 하루 네 차례, 다섯 시간 이상 생명과 평화와 민족화해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스님이 기도를 하는 중에도 전쟁이 나고 생명이 파괴되고 갈등과 반목은 깊어갔다. 그 이듬해 3월, 스님은 절집 산문을 나섰다. 생명평화탁발순례로 길 위에서 5년을 났다. 많은 도반들이 함께 했지만, 고행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났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외레 종교간 갈등과 대립이 사회를 더 어지럽히고 있다. 위기에 처한 불교를 세우기 위해 스님이 다시 나섰다. 조계종이 스스로의 자성과 쇄신을 위해 화쟁위원회를 비롯한 4개의 위원회를 통합해 만든 결사추진본부장을 맡고서다. 인터뷰는 스님이 머무르는 실상사가 아닌 서울 안국동 조계종 총무원 결사추진본부장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스님은 종단 일을 위해 일주일에 이틀정도 시간을 내면 될 줄 알았는데 일이 일을 물고와 닷새나 실상사 밖에서 서성이게 된다고 했다. 인터뷰 중에도 집무실에는 끊임없이 손님이 찾아왔다. 스님이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자고?"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어디 한번 해봅시다." 활짝 웃는 스님의 얼굴이 불경스럽게도 장난기 많은 어린아이 같았다. 덕분인가. 조급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새해 초 지면에 모시려니 가장 바쁜 연말에 뵙게 되었습니다."자잘한 일들이 얽혀서 일정이 편안하지 않았어요. 실상사 가는 것이나 서울 오는 것이나 비슷하지 않나."(잠시 무슨 말씀인가 싶었다. 곧 스님의 웃음으로 먼 길 온 취재진에게 주시는 위로라는 것을 알게 됐다)-총무원 건물에 붙은 걸개에 유난히 '자성''쇄신''결사'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습니다. 조계종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더군요. "결사는 함께 한다는 말인데…그렇겠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화두니까." -저희가 새해 인터뷰로 스님을 찾아뵈었을 때가 벌써 8년 전입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건강은 괜찮은 편이에요. 견딜만하면 사는 게 인생이고, 세상이니까. 지금은 견딜 만 한 것이겠죠." -최근에 결사본부의 '종교평화선언'이 논란이 되고 있더군요. 선언 이름에 21세기 아쇼카 선언이란 부제가 붙어있던데요.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녜요. 선언문의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종교 갈등문제가 심화되어있습니다. 그동안은 이 문제를 갈등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에 하나하나 대응하는 방식으로 다루어왔어요. 그런데 그것이 효과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갈등을 양산하는 결과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선언은 불교는 불교다운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입니다. 평화적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불교 정체성에도 맞고 또 시대정신에도 합당하니까요."-선언문의 내용을 보면 '화쟁(和諍)'이 부각되던데요. 비단 종단 내부의 문제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실천적인 현장에서도 그런 '화쟁'의 논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화쟁의 개념에 이론체계를 세우고 제시한 분이 실천적 사상가인 원효스님입니다. 당시 불교자체 안에는 화엄종 법화종 선종 교종 열반종 천태종 등등 종파주의적 갈등과 대립이 첨예했어요. 이 갈등과 대립을 어떻게 화해시키고 평화롭게 함께 하도록 할 것인가 논리를 제공한 것이 화쟁론입니다. '화쟁'은 다툼을 화해시키고 평화롭게 함께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우리 사회에서 가장 절실하게 회복해야 자성과 쇄신의 대상과 내용은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에게, 인간에게, 또는 우리가 살고 있고 만들어가는 이 사회에서 정말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정직하고 진지하게 묻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올바른 가치관의 상실이예요."-언젠가 스님 스스로 회색분자라는 말씀을 하셨던데요. 좀 놀라웠습니다. "내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사람들은 나를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그래서인지 별로 개혁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은 조계종 총무원장의 임명을 받는 위원회 위원장이나 결사본부장을 맡는 나에게 '색깔이 뭐냐, 정치색이 뭐냐'고 묻기도 하죠. 그러면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회색분자고 갈지자 행보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나 같은 회색분자를 어떻게 조직화해내고 세력화할 것인가라구요."-기꺼이 회색분자가 되겠다는 말씀이군요. "(웃음)실제 나는 그렇게 살아왔어요. 나는 문제를 풀어 가는데 이것이 필요하고 바람직하다면 이쪽으로 가기도 하고, 저쪽으로 가기도 하고, 왔다 갔다 했어요. 제도권으로 가기도 하고 제도권 밖으로 가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제대로 안보는 것 같아요. 자기들의 입맛대로만 보는 것 같거든." -탁발순례하시는 동안 무엇을 얻으셨고, 대중들에게는 무엇을 주셨는지요. "생명평화운동은 21세기 대안 문명운동입니다. 생명평화를 담론화하고 문화화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탁발순례였죠.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 생명평화는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생명평화운동을 한 사람들과 탁발순례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노력을 통해서 생명평화라고 하는 개념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봅니다. 이제 생명평화라고 하는 가치가 삶이 되고 문화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제예요."-어떤 삶을 살아야 그것이 가능할까요. "단순 소박한 삶과 공동체적 삶입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21세기 대안적 삶으로서 가장 바람직해요. 서로 분열하고 불신하고 갈등하고 대립해 삶이 황폐화하는 이런 현실에서 문제를 극복해 공존과 평화로운 삶을 가능하도록 하려면 그런 마을 공동체 정신이 생활화되고 사회화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21세기 미래를 희망적으로 만들어가는 길이기도 하구요." -이런 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해오신 것 아닌가요. 그 결실은 어떻습니까. "아직은 많이 약해요.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완성도를 높여가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우리 역량과 여력이 약해서 효과적으로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그 여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는 추진하는 주체들의 역량과 여력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여력이 약하더라도 지자체나 지역주민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 깊은 이해나 인식, 관심과 열정이 있으면 훨씬 잘 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죠."-의외입니다. 이미 지리산 생명평화운동이나 공동체운동은 모범이 되어 사회적으로도 관심을 모으고 있지 않습니까."공유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치단체는 여전히 20세기식 가치 의식들과 방법론을 갖고 이런 환경을 다룬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생명평화의 조건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친환경적인 농업 먹을거리죠. 그런데 현실을 보면 친환경적인 형식이나 친환경적인 먹을거리 생활 소재를 중요하다고 다루면서도 궁극적인 답은 자본의 논리에 두고 있거든요.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소유 가치를 중심에 놓고 삶의 문제를 바라볼 것인가, 존재 가치를 놓고 볼 것인가의 문제예요."-물론 지금은 소유의 가치가 존재의 가치의 우위에 놓여있는 형국이지요. "소유 가치를 중심에 놓고 삶의 문제를 바라보고 다루어 온 것이 20세기까지의 가치 기준과 삶의 방식이었다면 그 한계와 위험이 지금 정점에 와있습니다. 21세기 새로운 대안은 소유의 가치가 아니라 존재 가치를 중심에 놓고 그 존재가치에 토대한 삶의 가치를 찾아내고 만들어내야해요. "-스님 말씀 들으면서도 그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세상에 쉬운 일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세계관이나 가치의식, 삶의 방식으로는 아무리 애써 성공적으로 간다 해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은 계속 문제가 확대 재생산되는 길이죠. 그러나 우리가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존재가치를 중심으로 놓은, 생명과 평화를 중심에 놓은 삶의 방식의 길은 애써 가기만하면 반드시 해답이 나오는 길입니다."-출판기념 기자회견에서 스티븐 잡스를 보현행(普賢行)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하셨던데요. 요즈음 주목받고 있는 안철수 교수는 어떻게 보십니까. 안교수의 정치진출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우리 삶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정치는 당연히 필요한 일이고 잘 해야 할 일이죠. 누구든지 정치를 정말 잘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치를 제대로 잘 하면 우리 사회가 정말 좋아지지 않겠어요. 역량 있고 뜻이 있는 분들은 정치에 관심을 갖고 훌륭한 역할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안교수가 정치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는 장점이 많은 사람인 것 같더군요. 사람이 선하다는 장점이 있고, 사심이 많지 않다는 것에 관심이 갑디다. 자기 성과를 사유화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죠. 정치를 잘할 수만 있다면 개인적으로 보다도 국가와 사회를 위해 당연히 하는 것이 맞는다고 봐요."-스님의 말씀에 공감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실상사에는 박원순서울시장도 자주 찾아왔었지요. 박시장의 진출은 어떻게 보십니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봅니다. 박시장의 선택은 개인의 정치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시민사회 진영을 포함한 대중적 필요성과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그것을 반영한 것이지요. 그래서 대단히 건강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잘했으면 좋겠고 그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삶을 강조해오셨고, 또 그것의 실천을 강조해오셨는데, 스님과 함께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세계관과 가치의식이 바로 서야 합니다. 소유 가치를 중심으로 놓은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이 아니고 존재가치를 중심에 놓는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으로 정리가 되어야만 이 새로운 길을 함께 가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예전에 새만금이야기가 나왔을 때, 전북은 민주주의가 실종되었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새만금을 놓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을 독재라고 하셨지요. "새만금은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한 한계가 낳은 결과입니다. 전라북도는 21세기적 중요한 가치를 너무 많이 잃었어요." -지금이라도 그런 가치를 찾는데 눈을 돌리면 아직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전북을 한번 보죠. 땅이 큰가요. 인구가 많은가요. 자원이 풍부한가요. 결코 아닙니다. 지정학적인 위치로도 유리한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니 정치적 영향력이나 경제적 힘 같은 현대사회에서 필요하고 중요한 조건들이 형성될 수가 없죠.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불리한 조건을 놓고 희망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면 이 조건에서 중요한 장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는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문명사적으로 생명가치를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생태적 가치, 생명가치가 시대정신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전북은 대단한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가치를 중심에 놓고 보면 지역, 변두리, 작은 것이 갖는 의미가 대단히 크죠. 전북은 '지역이고 변두리고 작은'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이 시대는 정신적 가치를 요구합니다. 전북은 종교성이 남다른 지역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21세기의 중요한 가치를 다 갖고 있는 곳이 전북이 아닐까요. 이런 것들을 잘 가꾸어내는 것이 전라북도 스스로를 위해서 바람직하고 한국사회에서도 그렇게 했을 때 전북의 존재가 빛나고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새해 덕담 한 말씀."내 인생도 고단해 죽겠는데 누구한테 덕담을 하나.(웃음) 희망은 어디 있지도 않고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희망적인 삶을 살고 싶다면 자기 성찰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해요. 성찰의 삶을 통해 거품은 걷어내고 환상은 깨고, 참된 가치들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희망이 길이 열리게 됩니다." -성찰의 시간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나요. "가장 좋은 방식은 걸음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묵묵히 걷는 시간을 온몸을 써서 걷게 되면 내 생명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되고 정상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자기 소리를 더 충실하게 많이 듣게 되고, 그 들음을 통해서 쓸데없는 거품이 걷히기도 하고, 환상이 깨지면서 삶의 참된 가치들이 현실로 작동하게 되지요."스님은 현대의 직장인들에게 출퇴근 시간을 걷기로 활용해보라고 강권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는 것이 첫째 이유고, 에너지 소비를 줄여 환경을 지킬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데다 무엇보다도 생명이 왕성하게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문제를 훨씬 잘 보고 길을 얻게 해주어 삶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걸음을 생활화하는 것이 곧 성찰의 삶을 가꾸는 것'이라는 스님의 가르침은 독자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 기획
  • 김은정
  • 2012.01.10 23:02

도법 스님은

도법스님은 1949년 제주에서 났다. 스님은 유복자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그는 10년 전 쯤 가족들을 만난 자리에서야 아버지가 제주 43항쟁 때 돌아가신 것을 듣게 됐다. 제주도 여성 특유의 강인한 성품을 가진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홀몸으로 꾸리다 종교에 귀의, 미륵신앙의 본거지가 있던 전북으로 이사를 왔다. 어린 시절 교육은 학교교육이 아닌 경전과 한문교육으로 대신했다. 열여덟 살 되던 해 겨울, 김제 금산사에서 출가했다. 출가하는 길에는 어머니가 동행했다. 출가한지 2년째 되던 해에 첫 번째 화두를 만났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지만 출가승은 속세가족과 인연을 끊고 살아야 한다고 믿어 그 사람을 그냥 돌려보냈다. 한 스님이 그를 질타했다. "너는 출가승이기 전에 한 인간이고 어머니의 아들이다." 그 충격으로 '죽음'과 '허무'를 화두로 붙잡고 수행 정진했다. 이후 강원과 선방으로 공부를 떠났다. 1992년 실상사에 들어와 젊은 스님들의 수행단체인 <선우도량>을 만들어 한국불교의 모순을 바로잡고 대안을 찾는 일에 나섰다. 95년부터는 실상사 주지를 맡아 귀농전문학교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를 창립해 대안교육과 생명평화운동을 주도해왔다. 1994년 종단 개혁과 98년 종단 분규 때마다 불려나가 총무원장 권한대행으로 개혁을 지휘하고 갈등을 봉합해 분쟁 해결의 상징이 되었다. 2004년 3월부터 만 4년 동안 전국 탁발순례에 나섰으며 그 덕분에 생명평화운동은 대중화 물꼬를 텄다. 부드러우면서도 막힘없는 논리 정연한 화법으로 대중들을 감화시키는 그는 여러 권의 책을 냈다. 그중에서도 탁발순례의 사유를 정리한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과 최근 펴낸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는 특히 대중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2.01.10 23:02

안도현 시인은, 짧고 쉬운 詩…'하찮은'것에 따스한 생명 불어넣어

우리나라 시인 중 최근 10년간 시집 판매량이 가장 많은 시인은 누굴까? 안도현 시인이다. 이는 인터넷 서점인 알라딘이 시집 판매량을 조사한 결과다. 그러면 우리나라 시인 중 가장 연애하고 싶은 시인은 누굴까? 안도현 시인이다. '접시꽃 당신'이란 시로 유명한 도종환 시인이 꼽은 것이다.이것은 무얼 말할까? 안도현 시인의 시가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짧고 쉽다. 그러면서도 따뜻하다. 특히 그는 우리 곁에 있는 작고 하찮은 것을 자주 다룬다. 그 동안 발표한 1000여 편의 시가 대개 그러하다.하지만 시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는 어느 강연에서 "난 시를 한번도 한꺼번에 다 써본 적이 없다. 시를 참 치사하게 쓴다. 평균 50번 정도의 수정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 하나, 그는 지역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각별하다. 전북의 산하와 전북사람들의 삶을 푸근하게 그린 작품이 많다.안 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대구 대건고 시절 학원문학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1981년 문학하기 좋다는 원광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며 대학 4학년 때인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돼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졸업과 함께 이리중 국어교사로 부임했으나 1989년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되었다. 1994년 복직돼 장수 산서고로 발령이 났다. 1997년 교사직을 그만 두고 8년 동안 전업작가로 생활했다. 2004년 우석대에 문예창작과가 생기면서 교수가 되어 '시 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점도 특이하다.그 동안 그대에게 가고 싶다 등 9권의 시집을 펴냈다. 동화와 에세이 등에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1996년 첫 출간 이후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또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8개국에서 번역돼 읽히고 있다. 짜장면 등 어른을 위한 동화 8권, 산문집 3권, 동화집 10여 권을 펴냈다. 2002년에는 서일본신문에 에세이 50회를 연재하기도 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모악문학상, 이수문학상 등의 상을 받았다. 가족으로는 전북대와 원광대에서 한국어강사를 하는 부인 박성란 씨(50)와 북경대와 고려대 중문과 대학원을 마친 딸 유경(28), 성균관대 사학과에 다니다 입대한 아들 민석(22)이 있다.

  • 기획
  • 조상진
  • 2012.01.03 23:02

"시인은 어깃장 놓는 사람…작은 것 속 의미 잘 집어내야"

설레었다. 30년 전 사모했던 연인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안도현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84년이었다. 물론 시로 였다. 그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통해서였다. 그 시를 읽는 순간 심장이 딱 멎는 듯했다. 서정(抒情)과 서경(敍景), 서사(敍事)가 적절히 어우러진 절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바로 이거야. 시는 이 정도는 돼야지!" 그러면서 내심 "한국시단에 뭔가 큰 기념비를 남기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 기대를 허물지 않았다. 이후 발표한 시와 동화, 산문들은 늘상 잔잔하며서도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발전해 온 것이다. 그 시인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에 어찌 설렘이 없겠는가. 인터뷰는 안 시인이 재직하고 있는 우석대 예술관 4층 교수연구실에서 진행되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휴대폰이 없어 연락하기기 쉽지 않던데요."한 5~6년 전에 잃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성적처리 등으로 계속 학교에 나왔습니다."- 휴대폰이 없으면 불편하지 않습니까?"휴대폰을 쓰지 않는 편리함이 99라면, 불편함은 1정도 되는 것 같아요."- 방학 때 특별한 계획이라도?"보름 정도 어디 숨어있을 예정입니다. 전화도 안 되고, 인터넷 없고, 그런 데 있잖습니까. 학교 있으면 왠지 자잘한 것이 많더라고요. 글 쓸 것은 방학 때 몰아가지고"- 보름 전쯤, 우석대 문창과 학생들과 함께 '사랑의 연탄나누기운동'에 동참해 연탄 나르는 모습이 신문에 났던데요. 「연탄시인」으로 불리는 등 겨울만 되면 연탄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연탄이 한 20년 전만 해도 겨울에는 정말 없어선 안될 것이었잖아요. 지금은 어린 친구들은 거의 기억도 하지 못하는 잘 모르는 존재가 됐죠. 「연탄시인」이란 이름이 붙어 다니는 게 지금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안 시인은 고등학교 때 자취하면서 연탄을 자주 갈았다고 한다. 이 때부터 연탄에 관한 여러 편의 시를 썼다. 널리 애송되고 있는 '너에게 묻는다'는'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가 전부다. 이 석줄짜리 시로 그는 국민시인 반열에 올랐다.)- 시인은 곳곳에서 '내 시의 사부(師父)는 백석(白石)이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매력 때문에 끌린 것입니까?"제가 습작시절부터 많은 시집을 읽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반쪽만 읽었더라는 거죠. 나라가 분단된 이후에 문학도 반쪽으로 나눠지고, 그 반쪽 속에 없는 정서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백석의 북방정서죠. 또 하나는 우리 시를 이야기할 때 아직도 좀 이해가 짧은 사람들은 시를 순수와 참여로만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거든요. 백석의 시는 일제 강점기 때 저항의 몸짓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중도 내지는 중용 그런 것을 보여준 시인, 세상이라는 시적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보편적 정서를 끄집어 낼 줄 아는 시인이어서, 지금도 배울 게 많은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들한테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 물어봐도 백석이 늘 첫번째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1980년대라는 암울한 시대상황과 맞아 떨어지기도 했고, 이 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설명해 주시죠. "제가 원래 경상도 출신입니다. 20살 때 전라도지역에 와서 대학(원광대)을 다니면서, 그 때만 해도 똑같은 대한민국이지만 경상도의 현실과 전라도의 현실은 제 눈으로 봐도 차이가 많이 있었거든요. 그 불균형을 눈으로 보면서 전봉준으로 상징되는 저항의 목소리를 체감하게 된 거죠. 또 그게 80년대라는 전두환 군부독재 시기에 문학이 어떻게 하면 사회와 만날 수 있는지를 고민할 때였거든요. 또 하나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광주항쟁의 좌절과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의 좌절을 좀 겹치게 해 보자, 그런 의도가 있었죠."('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로 시작하며 역사를 성공적으로 시화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이쪽에 와서 지역감정 문제를 피부로 느낄 기회가 많았겠어요?"저는 어릴 때 외할머니가 '전라도 사람'이란 말을 쓰지 않고'전라지기'라는 말을 썼었거든요. 산지기, 문지기할 때처럼. 그러니까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까 불이익 당하고 피해를 입은 것은 호남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동서화합에 기여하고 계신거군요?"모르겠습니다. 경상도 가서, 케케묵은 생각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그러면 사석에서, 술자리에서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하면 저한테 죽죠.(웃음)"- 동시집 '냠냠'을 내는 등 음식에 많은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시 창작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욕망이죠. 그런데 음식이라는 게 단순히 허기를 채우고 미각을 즐겁게 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시 쓰기가 종이 위에 펜을 꺼내서 쓱싹쓱싹 쓰는 게 아니고, 그게 최명희 선생 같은 분은 '바위 위에 새기듯이'한 것처럼, 철저한 장인정신을 투여해야 되는데, 음식도 그냥 뚝딱뚝딱 차려서 먹는 게 아니고, 그런 면에서 음식 만들기와 시 쓰기는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종환 시인은'안도현론'에서 안 시인을 '상상력의 기관차'라고 했습니다. 시 창작에서 상상력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상이라고 하는 건 공상이나 몽상하고는 좀 다른 영역이죠. 시라는 게 있어야 하는 큰 이유가 지금하고는 다른 어떤 생각을 찾아내고 그것을 언어로 말하는 게 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존의 어떤 질서나 방법하고는 다른 무엇을 찾아내는 것인데 그런'시적 순간'은 창의성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끊임없는 창의성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개입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소고."- 신경림 시인은 일찍이 안 시인을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의 시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작고 평범한 것에 대한 관찰력이 남다른데 비결이 뭔가요?"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80년대 시하고 사회하고를 만나게 하는 데 골몰하다 보니까 작은 것보다는 큰 것, 그러니까 거대담론 쪽에 시가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민주화나 통일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계속 시를 그 방향으로 가져가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작은 것 속에도 큰 게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작은 것을 유심히 관찰하고 거기서 새로운 발견의 눈을 찾아내야 한다, 이런 쪽으로 바뀌게 됐죠."- 시인이란 어떤 존재입니까?"시인이라는 게 대단한 존재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시인이 대단한 존재이기 위해서는 작고 하찮은 것들 속에 있는 의미를 잘 집어내야만 그 땐 대단해질 수 있다, 생각하는데요. 우리는, 누구나 다 좋은 걸 취하려고 하죠. 더 좋은 것, 더 많은 돈,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을 꿈꿀 때 약간 어깃장이라고 할까, 시인은 그런 어깃장을 놓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니다, 작은 것, 하찮은 것, 느린 것, 적게 가지는 것, 시인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시인께서는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되었다 복직되어 장수 산서고등학교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 산서생활이 어떤 전환의 계기가 된 것 같은데요."1994년에 복직해서 3년간 산서에 있는데 시적인 전환을 꾀했다고나 할까, 그렇게 한 게 딱 그 무렵이었죠. 나라가 부분적인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고, 한때 별(어떤 이상)인 줄 알았던 현실사회주의가 동구(東歐)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고, 남북간에 약간의 신뢰가 싹트기 시작하고, 하여튼 바꾸자, 세상을 보는 눈과 말하는 방식을 바꾸자."- 교사 생활을 접고 전업작가로 8년을 보내다 2004년 대학에 몸 담았습니다. 창작하는 데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실제로 8년간 글쓰기에 종사하다 보니까 바닥이 보이는 거예요. 글을 써서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마감에 쫓기고,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다 써 먹고, 힘이 들었죠. 힘들었지만 자유스러웠습니다."- 안 시인은 대학 1학년들에게 무조건 시를 필사하도록 한다면서요?"재수없는 친구들은 필사, 1학기에 한 200편 정도를 빼껴쓰기 하도록 하죠."- 어른을 위한 동화들 가운데'연어'가 가장 감동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연어'는 밀리언셀러로 '어린왕자'를 쓴 생떽쥐페리와 비교하는 평론가도 있습니다."「어린왕자」에 비하면 「연어」는 밑이죠. 제가 연어를 쓸 때 어린왕자를 롤 모델로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고요. 그런 형식의 글, 소설도 아니고 동화도 아닌, 소설이면서도 동화인 그런 양식이 그 동안 없었기 때문에 많이 읽혔던 것 같고. 내용이 요즘 아이들은 귀하게 키워 놓으니까 오직 자기 자신만 알게 되는데'나'라는 존재라는 게'나'만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누군가에게 배경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런 메시지를 독자들이 잘 읽어 준 것 같아요."- 갈수록 어렵고 난해한 시가 많은 듯합니다. 막연하지만, 좋은 시란 어떤 시를 말합니까?"단순하게 말하면 좋은 시는 맛이 있으면서도 몸에도 좋은, 음식으로 치면 그런 게 좋은 시죠. 저도 좋은 시가 뭔가를 모르니까,(웃음) 시라는 게 시인이 쓰는 거지만 시인의 개인적인 고백 양식이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보편적인 공감이 필요하고, 독자들에게 새로운 눈을 틔워 줄수 있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습니까?"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많이 읽어야 한다. 읽어야 되는 것은 책뿐만 아니라 세상을 많이 읽어야 한다. 세상에 대해서 연애감정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혼자 술 먹지 말고, 여러 사람하고 술을 먹어 봐야 한다. 시라는 게 세상읽기의 결과물이거든요."-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서거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영결식 노제에서 추도시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를 낭송해 많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줬습니다. 어떻게 쓰게 됐습니까? "평소에 원칙과 상식을 지키는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제가 좋아했고요.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죽음을 애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시 한편으로 애도를 해보자 한 거죠. 돌아가신 게 5월인데 3월 말에 봉하마을에 가서 직접 뵌 적이 있어요."- '혁신과 통합 전북지역위' 공동대표와 노무현재단 전북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았는데. 시인의 정치참여에 대해 어떤 입장입니까? "그걸 어떻게 보면 정치참여라고 볼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활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냥 시인으로서 또 이명박 정부 이후의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서 발언할 때는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뭐 직접 정치를 하지는 않을 거고요. 저는 최소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 또 과거로 돌아가는 퇴행과 미래 희망을 보여주는 것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를 물을 때는 제 소신대로 발언하고 시도 쓰고 참여할 것은 참여하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민주주의는 거꾸로 가고, 남북관계는 거의 파행 수준이고, 4대강은 파헤쳐져서 돈을 쏟아 붓고 있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침묵하면 그건 정말 비겁한 것이죠."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밝혀 주시죠."나이는 아직 몇 살 안 되지만 너무 많은 일을 하면서 살아온 것 같아요.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인데 빈둥거리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시라는 것도 좀 빈둥거리는 시간이 있어야 쓰여지는거든요. 그리고 제가 하는 일 중에 북한에 사과나무 심는 일이 있습니다. 한겨레 통일문화재단하고, 제가 만든 북녘에 나무보내기운동본부하고 2008년부터 평양 근교에 있는 사과나무 농장 3만 평에 사과묘목 1만2000 주를 심었거든요. 원래 3개년 계획으로 10만 평 하기로 했는데 딱 끊겨있는 거죠."- 전북의 문학 수준과 조언해 주고 싶은 말은?"근대 이후에 전라북도 문학판이 한국문학에서 큰 역할을 한 분들이 굉장히 많이 나왔죠. 미당 채만식 신석정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최근에 신경숙 은희경까지. 경제적인 도세(道勢)에 비해서는 문학적인 전통은 대단한 지역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현 단계는 정체국면인 것 같아요. 특히 시인들이 지나치게 많이 양산되는 풍토는. 저도 전북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어서 이 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운데, 문협 얘기는 안하는 게 좋겠습니다.(웃음)"

  • 기획
  • 조상진
  • 2012.01.03 23:02

"산천을 걷는다는 건,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아요"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모임' 신정일(57) 대표. 마이너리티,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인생. 스승이 없이 따로 살아온 그는 '길'과 '책'에서 세상의 이치를 배웠다. 그의 표현대로 그의 진정한 스승은 자연이고 책이었다. 유홍준이 문화유산 답사의 개척자라면 신정일 대표는 도보답사의 선구자다. 그는 길을 '찾고, 걷고, 잇고'의 '쓰리 고' 인생을 살고 있다.지난 5월 '신 택리지' 9권을 완간했다. 발품을 팔아 쓴 역작이다. 지금까지 그가 쓴 책이 59권에 이른다. 차도 없이 버스를 타거나 발길 닿는 대로 걸어다니면서 천착한 성과물이다. 그는 왜 산천을 떠도는 걸까. 그 많은 책을 저술한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전주시 진북동 그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말은 달변이고 내용은 현란했다.-날씨가 추워졌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강연, 행사도 있고 우리땅 걷기 모임 답사 등이 있어 여전히 바빠요."-문화사학자, 도보여행가, 우리땅걷기 전도사, 길 전문가 등 여러 표현이 따라 붙습니다. 어떤 게 마음에 드나요."김지하 시인은 '삼남 일대를 걸어다니는 민족민중 사상가'로,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는 '강, 길의 철학자'로 부르더군요. 저는 문화사학자라는 말이 가장 좋아요. "-왜 걷는 겁니까. '걷기 철학' 같은 게 있다면."사르트르가 말하기를 '인간은 걸을 수 있을 만큼만 존재한다' 했는데 걷는다는 것은 삶의 근간이죠.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걷기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나를 만나기 때문에 걷는 거죠. 산천을 걷는다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아요."-맨 처음 걷기를 시작한 동기가 궁금합니다."화엄사에서 두달간 머물 때 처음 걷기를 시작했지요.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고 가출 끝에 출가했는데 스님이 '너는 절에서 지낼 놈이 아니다'며 내보냈습니다. 본격적으로 걷기를 시작한 것은 1985년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 역사문화 현장을 답사할 때부터였고요."-지금까지 걸으신 걸 다 합산하면 얼마나 될까요."아마 수십만 km는 될 겁니다. 낙동강 답사 때 하루 64km를 걸은 적이 있는데 하루에 걸은 거리로는 최장 거리지요."-자가용은 없나요. 운전하실 줄은."차는 없어요. 운전면허증은 1991년에 취득했는데 한번도 써먹지 못 했어요."-불편하지 않나요."강연이나 답사 때 여러권의 책을 갖고 버스에 오릅니다. 산책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산천도 구경할 수 있어 좋아요. 불편하지 않습니다."-'길 만들기' 사업을 맨 처음 전북도에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른 지역에서 시작한 걸로 아는데요."변산 마실길을 제안해서 김완주 도지사랑 같이 걸었는데 그 때뿐이에요. 내변산을 한바퀴 도는 마실길(100km)은 1년이면 되는데 지금까지 안 돼 있어요. 제가 제안해서 2008년 만들어진 소백산자락 마실길(200km)은 문체부가 생태탐방로 1위로 선정했습니다."-걷기 열풍이 불면서 길을 만들고 새로난 길에 연중 사람이 몰립니다. 환경 훼손을 우려하는 지적도 있습니다만."능선이 아니기 때문에 훼손이 심각한 건 아닙니다. 다만 쓰레기 처리 같은 것은 자치단체에서 관심을 가져야겠죠. 외지인들이 찾아오면 소득과 관광효과도 있기 때문에 공익요원이나 별도 인력을 운영할 필요는 있습니다.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고요." -지난 5월 '신 택리지' 9권을 펴냈고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라는 책도 쓰셨습니다. 산하를 주유하면서 이중환, 김정호 선생과 교감했을 법 한데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김정호는 후원자가 있었지만 이중환은 역모죄로 몰려 국문을 다섯 차례나 받았고 유배당해 떠돌았습니다. 고난과 절망을 딛고 큰 일을 해낸 뛰어난 분들입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지요. 그 분들을 생각하면서 국토를 답사했고 새롭게 글로 남기기 위한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대한민국에서 살기좋은 곳 33' '꿈 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등 발품을 팔아 쓴 글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추천하신다면"봄에는 무주 부남에서 읍내 용포리까지의 금강길, 그리고 섬진강 길도 좋습니다. 전주에서는 건지산에서 전주천까지 이어지는 건지산길이 좋아요. 4시간 정도 걸리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편백숲만 얘기하던데 단풍나무 숲이 너무 좋아요." -다작(多作)을 하시는데 지금까지 저술한 책은 몇권이나 됩니까."김지하 시인은 '글 쓰는 것도 때가 있다. 잘 써질 때가 있고, 아무리 쓰고 싶어도 쓰여지지 않을 때가 있다. 글이 써질 때 막 써라'고 하셨는데 맞는 말 같아요. 쓰다 보니 쉰 아홉권이나 됐어요. "-가장 최근에 쓴 것은 어떤 책입니까."'가치 있게 나이 드는 연습'이란 책인데 이달에 나왔습니다. 독서, 걷기, 사색이 나에게 주는 즐거움이라는 부제가 붙은 에세이입니다. '허균과 형제들'이란 책은 이달 20일까지 원고를 넘기기로 했는데 잘 써지지 않아 애를 먹고 있어요." -'한(恨)이 많은 사람이 글을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한이 쌓여 있길래 이렇게 많은 글을 쓰시는 겁니까."자기 전공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권 정도 책을 쓸 수 있고 출판기념회도 할 수 있어요. 두권째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지요. 하지만 세권 이상은 한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봐요. 나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취직 한 번 못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호기심이 많았고 시대정신을 잘 읽어낸 것도 글 쓰는 데 도움이 됐어요."-책이나 대화에서 세계적인 문호, 철학자, 사상가, 정치인들의 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인용하시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머리가 좋은 겁니까 아니면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겁니까. "외톨이였던 어릴 적 책 읽는 게 유일한 행복이었어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 설레는 마음으로 연애하듯 책을 읽었습니다. 아마 2~3만권은 읽었을 겁니다. 저자는 책에서 주안점을 두기 마련인데 그것을 꿰뚫는 능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를 천재라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IQ 검사를 한 적도 없고 우등상 한 번 탄 적이 없어요."-매번 길을 떠나고 책을 내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산다는 것은 떠도는 것이고 쉰다는 것은 죽는 것이라고 해요. 머무르면 안되지요. 초등학교 2학년 때 '광풍'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주인공인 매월당 김시습이 떠돌아다니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매료됐어요. 지금 산천을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는 걸 보면 어린 날 처음으로 접한 책의 영향이 크다는 걸 느껴요."-답사나 글쓰기 말고 다른 취미는 없나요."가난했지만 취미는 고상했어요. 고전음악 듣기를 좋아합니다."-산천을 답사하는 전문가로서 우리나라 산천에 대한 관(觀)이나 느낌을 말한다면 어떤 것입니까. "정신이란 모습 속에 있는데 모습을 갖추지 않으면 어떻게 정신이 나오겠습니까. 산천을 답사하다 보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껴요." -어려운 가정환경, 일천한 정규 학력, 가출과 출가, 자살유혹 등 불운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지금의 신정일을 있게 한 건 무엇일까요."고시를 준비했다면 잘 됐을 것이라고 농을 던지기도 하지만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돈이나 명예, 권력이 아니라 오로지 글 쓰는 것만 고민해 왔지요. 흐트러지지 말자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사랑하며 살자고 끊임없이 다짐해 왔어요."-그동안 취직한 적이 없고 월급 타 본 적이 없는데 생활은 어떻게 해오신 겁니까. "강연이나 글쓰기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됐고 집사람이 교직에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지금은 명퇴했지만."-많은 책을 저술하셨는데 인세(印稅)도 상당하겠군요."많지는 않고 먹고 살 정도입니다. 직장인 수입 정도예요." -1981년 안기부(지금의 국정원)에 끌려간 적도 있던데 무슨 일 때문이었나요."전북대 앞에서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카페를 운영했을 때인데 운동권 학생들이 드나들었고 불온서적을 탐독했다는 이유를 들어 간첩단 사건으로 엮였어요. '김대중이 한테 돈을 얼마 받았느냐', '북한을 몇 번 갔다 왔느냐' 대라며 발가벗겨진 채 고문을 당했습니다."-이름이 당초 춘석(春錫)이었는데 '맵고 바르게 한 길을 가라'는 뜻으로 이름을 스스로 신정일(辛正一)로 바꾸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느 스님이 '그 이름 걸머지고 사느라 힘들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열여섯살 때 지어 후에 호적에 올렸는데 이름 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달리 살 방법도 없고. "-성공한 인생으로 평가해도 괜찮겠습니까. "내 인생은 아웃사이더예요."-과거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인생으로 평가되길 원하십니까."그러나요? 열심히 산 인생으로 기억되도록 노력하렵니다. '길의 날'을 제안해 성사됐고 길 축제도 만들었습니다. 길을 좋아했기 때문에 객사(客死)하면 더 없는 행복이지요."-작년 6월에 펴낸 '느리게 걷는 사람'은 열아홉살까지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후의 인생이야기가 또 재미있을 것 같은데 연작 계획은 없나요."그런 요청을 많이 듣습니다. 준비하고 있어요."-구상하고 있는 답사나 저술 계획이 있다면."내가 좋아했던 '김시습 평전'을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급적 감성을 일깨우는 책을 쓰고 싶어요. 부산 해운대에서 동해바닷길 1400km를 걸어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해파랑길'을 만들었는데 북한으로 이어지는 이 길을 생전에 밟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 벅차 오르겠습니까."신정일 대표는 이 길을 조성해 줄 것을 문체부에 제안했고 문체부는 2010년 9월 이 길을 '해파랑길'로 선정해 발표했다. 신씨는 나아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을 지나 러시아 해변을 돈 뒤 스웨덴, 스페인, 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까지 이어지는 세계 최장거리 도보 답사코스를 문체부에 제안했다. -산천 주유, 길 답사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생의 길은 어떻게 전개될 것 같습니까."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것인데 공동체 마을을 만들 계획입니다. 살아 숨쉬는 새로운 문화, 민속촌이나 마을만들기와는 전혀 다른 새 패러다임의 공동체 문화를 구상하고 있어요. 제주도와 육지에 한 곳씩을 선정해 모든 문화체험을 원스톱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곧 발기인을 모집해 재단법인 형태로 운영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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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2.27 23:02

이홍훈 전 대법관은

이홍훈 전 대법관은 1946년 고창군 흥덕면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학교(전주북중) 때 전주로 옮긴 뒤 경기고, 서울대 법대와 사법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사법고시(14회)에 합격하고 법무관 3년 과정을 거쳐 1977년 서울지법 남부지원(당시 영등포지원)에서 법관인생의 첫발을 내딛었다.이후 서울민사지법서울형사지법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수원인천지법 부장판사, 광주서울고법 부장판사, 법원도서관 관장, 제주지법수원지법서울중앙지법 법원장을 역임했다. 지난 2006년 60세의 나이로 대법관에 임명돼 5년만에 정년퇴임을 맞았다. 대법관 정년퇴임은 1985년 이일규 전 대법원장의 대법원 판사 정년퇴임 뒤 처음으로 기록된다. 이 전 대법관은 환경법 분야의 권위자이다. 서울지법 남부지원 부장판사 재직시절 일조권에 대해 당시 대법원이 사법상 권리로만 인정하던 것을 헌법상 권리로 보아 파문을 일으켰다. 건설회사의 일조권 침해를 두고 위자료는 물론 최초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수의견들을 내면서 다양한 법해석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한 평생 법관직을 수행해 오면서 국민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면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민본과 위민사상, 청백과 절검사상, 덕치사상을 공직자의 근본덕목으로 삼고 올곧고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했으나 능력이 부족한 탓으로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도 많은 것 같다"고 낮은 자세로 소회(所懷)를 털어놓았다.법관으로서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을 방치했다는 회한(悔恨)도 있다. 법관 생활을 하면서 적은 월급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냈다. 쌀은 고향집에서 가져오고, 옷은 시장 좌판에서 사다 입었다. 그런 판국에 2남2녀의 자녀를 기르면서 과외란 엄두도 못 냈다. 정년퇴임 즈음에 동료와 후배 법관들이 '이제는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농 섞인 강권을 한 것도 많은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그의 처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걸어온 진실된 행보에 놀라고, 감동하면서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고교대학 동창인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그를 두고 "워낙 집안이 어려워 부인께서 대법관하는 걸 원치 않았던 사람"이라며 "정말 깨끗하고 올곧게 살았던 친구, 정의로운 법관이었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친구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도 그의 인간됨과 판사됨을 존경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5월 한국행정판례학회 회장직을 맡아 이론과 실무연구를 연결하고 있고, 9월부터는 한양대와 전북대에서 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대법관 퇴임 직후인 지난 6월 청조근정훈장을 받아 노모 앞에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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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2.13 23:02

"중도 지키면 외톨박이…법관은 외로움 감수해야"

이홍훈(65) 전 대법관이 고향을 찾았다. 이른바 '전관예우 금지법'의 첫 적용 대상자로서 고뇌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34년간 지켜왔던 판사의 외길을 벗어나면서다. 변호사 등 재야출신을 제외하면 27년 만에 보게 된 정년퇴임 대법관이다. 사명감과 소명의식이 없으면 감당하기 어려워 성직(聖職)으로 불리기 때문에 정년 채우기가 쉽지 않다. 그는 지난 5월말 퇴임식에서 퇴임사 말미를 '대법관 이홍훈' 대신 '법관 이홍훈'으로 매듭을 지었다. '법관으로 시작해 법관으로 끝 낸, 법관의 길을 가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법부를 이끌어온 최고의 법관 출신으로 그만큼의 자긍심과 아쉬움을 담아냈다. 6일 오전 키 큰 소나무 숲길을 지나 외딴 집에서 이 전 대법관을 만났다. 고창군 흥덕면 신송마을, 그가 태어난 고향집이다. 인터뷰는 앉아서도 대문과 마당이 보이는 작은 창이 있는 골방에서 진행됐다. 벽면에 액자로 걸린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란 고려말 나옹선사의 선시(禪詩)가 시골 전원으로 돌아온 법조계 원로를 새롭게 맞고 있었다.-퇴임해보니 어떴습니까."법복이 무거웠어요. 시비를 가려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던 거죠. 생각이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판단이 힘들 때도 적지 않았고요. 짧은 인생을 생각하면 조금 일찍 퇴임해서 자유롭게 살아봤어야 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법원을 떠났다는 실감이 안 나네요."-낙향한 건가요."그건 아닙니다. 고향집에서 1년 정도 쉴 생각입니다. 텃밭도 가꾸고 참선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보겠어요. 우선 85세 어머니를 봉양하겠습니다. 척추를 다쳐 거동이 불편하시거든요. 밥숟갈도 떠드리면서 병 수발을 도맡아 온 아내의 수고를 좀 덜어주고 싶어요." -변호사 개업을 당분간 않는다는 거죠."공포 즉시 시행해버린 '전관예우 금지법' 때문입니다. 몇 개월 쉬고 경제활동을 하려 했는데 운신에 제약이 생긴 거예요. 노모를 모셔야 하고 가정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하다고 해서 (대법관 출신이) 1, 2심 사건을 맡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변호사 업무를) 쉬게 되더라도 '전관 특혜'에 대한 국민적 염려가 담긴 법인만큼 나부터 감수하겠다고 결심했던 겁니다. 이 법을 계기로 국민의 그런 우려가 불식되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로 연결됐으면 합니다." 지난 3월25일 공개된 이 전 대법관의 재산은 대법관 14명의 평균 재산(22억6655만원)에 훨씬 못 미치는 13억2446만원이다. 개정 변호사법에 따르면 그는 대법원과 대검찰청 사건만 빼고 나머지 법원과 검찰청 사건은 맡을 수 있다. 대법관 출신은 변호사 생활 2~3년이면 수십억원씩 벌 수 있다는 게 공공연하다. 그래서 법은 물론 체면도 지키겠다는 것이다.-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아내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살았기 때문?┗?부분이 많이 가슴 아팠습니다. 가족에게 미안하죠. 그러나 재테크 등 여러 유혹을 근본부터 차단해 그간 자유로웠다는 판단으로 이번에도 이해해 줬거든요. 고마울 따름입니다."-법관의 길을 왜 택했나요."경기고를 다닐 때는 이과를 선택했어요. 우주물리학이나 원자력공학에 관심이 많았고 수학도 꽤 잘 했기 때문입니다.(웃음) 지금도 스티븐 호킹 박사의 책들을 옆에 두고 읽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공계로 진학해 학문적인 욕심을 부리면 외국유학을 가야 하는데, 집안사정이 여의치 않아 꿈을 접었어요. 대신 새로운 꿈을 품었죠. 법대에 입학한 뒤엔 경기고·서울대 동기(65학번)인 고 조영래 변호사,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와 김근태 상임고문 등과 거의 매일 학생 시위를 하다시피 했어요. 이 때문에 검찰조사를 받고 벌금형도 받았습니다. 이처럼 어두운 시대를 겪으면서 수사 권력과 행정 권력에 희생되는 억울한 사람들이 제대로 법의 판결을 받도록 도와주고 싶었어요."-대학 동기들이 쟁쟁합니다."법대 동기로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 강만수 산은금융그룹 회장,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등이 있어요. 황 원내대표가 정치인으로 들어선 건 의외라고 봐요. 평생 판사 할 사람으로 보였거든요. 정치에도 그런 성실함이 통하나 봅니다. 손 대표는 학생시절부터 친화력이 매우 뛰어났어요. 김 상임고문은 우직해서 정치자금으로 고민해 올 때 '네가 살아온 대로 하라'고 말해 준 적이 있네요." -법관으로서 후회는 없습니까."없습니다. 판사로서 보람과 긍지가 있었는데요. 열심히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까 판단이 옳았어요. 법관이 천직이더라고요.(웃음) 죽고 나서도 내 마음은 사법부에 묻고 싶습니다."-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지요."1977년 우리나라가 고통스런 시기를 거칠 때 법관생활을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힘들었던 거죠. 형사 단독 판사시절에는 몇 번이나 사표를 내려고 했어요. 1974년 시행된 대통령 긴급조치1호에 따라 유죄 판결하는 건 너무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양심 때문에 한 평생 가슴에 안고 살고 있습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유신시절 긴급조치 위반사건에 유죄판결을 한 판사 명단을 공개했을 때 대법관직을 그만두려고 한 달 동안 고민했어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긴급조치1호를 전원 일치로 위헌결정할 때 나 역시 위헌 주장을 펼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습니다." -사법부 내에선 진보계로 불리던데요."내가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법관이 특정 성향에 치우치게 되면 법 해석을 잘못할 수 있죠. 상당히 경계해야 할 대목입니다. 어느 쪽에 편향된 판결이 아니라 다 같이 인간답게 사는, 헌법정신에 부합되도록 판단을 하려고 노력했던 겁니다. 사법부가 도와주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어요. 가톨릭 신자지만 법관으로서 편협하지 않기 위해 불교 경전도 많이 읽고 참선을 20년 넘게 매일 아침·저녁 30분씩 해오고 있습니다. 참선을 하다 보면 좌우와 동서남북이란 게 없지요. 양쪽을 같이 봐야 합니다. 내 철학은 중도와 중용입니다."이 전 대법관은 지난 5월 퇴임을 앞두고 가진 광주고법 강의에서 "다수 의견에 부합되더라도 개인에게 인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하고 그 고통이 소수의 개인을 비참한 존재로 전락시킨다면 그런 행위는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대법관 시절인 2009년11월 전주지법 정읍지원을 찾아 개원 100주년 특강을 통해 "사법부는 (신자유주의의 확장으로 소홀해지고 있는) 경제적 약자 배려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후배법관들에게 주문했다. -중도 지키기는 어떠했습니까."우리나라는 미국 등에 비해 한쪽으로 쏠림 현상이 있어요. 그건 사회가 아직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법관은 삶의 철학을 떠나, 마땅히 중도와 중용을 지켜야 합니다. 한 쪽으로 치우치면 법 해석이 자칫 균형을 잃을 수 있어요. 그러나 중도를 해보면 내 편이 아무도 없어요. 외톨박이가 되는 겁니다. 외로울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법관은 외로운 생활을 감수하고 이겨내야 해요. 수행하듯이. 양극화와 각종 대립이 심한 우리 사회에서 중용은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그러면 법을 통한 사회통합도 가능하겠어요."그렇습니다. 우리 내부의 사회 통합은 중요해요. 소외계층과 약자에 대한 관심이 특히 필요합니다. 존 롤스의 '정의론'에서 나오지만 능력 있는 사람의 능력은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본이죠. 능력 있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큰 돈을 기부하는 것 또한 그 때문입니다. 그게 정의에 합당합니다." -판결에선 그런 정신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나요."기본적으로 헌법정신을 찾는 겁니다. 우리 헌법상 최고 이념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심혈을 기울였어요. 정의를 찾아 정의에 맞게 판결해야 했던 거죠. 형식적으로 법리만 적용하는 판결보다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법리뿐 아니라 정의에 맞는 판결을 내놓아야 합니다." -사형제 존폐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요."그건 입법정책의 문제입니다. 국민들의 다수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쪽으로 가는 게 맞아요. 난 사형제 폐지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가요. 용서하고 포용하는 세상이 필요합니다. 재판에는 오판도 배제할 수 없어요. 사회복귀를 늦추거나 사회와 격리하는 방법을 추진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도 폐지 쪽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종신형이 보기에 따라서는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인간의 생명이라는 걸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형제를 존치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최근 사법부의 FTA 갈등 양상을 어떻게 보십니까."판사들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표현의 자유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한쪽에 치우쳐선 안 돼요. 판사로서 정책중립성과 충돌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기회에 국민의 인식에 맞춰 공론을 벌일 수 있길 바랍니다. 모든 건 주인인 국민에게 물어봐야죠. 정책결정도 마찬가지여서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다음 추진해야 합니다."-정치할 생각은 없나요."법관은 법관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 쪽엔 본래 생각이 없어요. 정치보다 평화적 남북통일 문제 등에서 국가에 도움이 될 만할 걸 찾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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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동성
  • 2011.12.13 23:02

의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이길여 박사

1932년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부농’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한학에 밝았던 할아버지는 동학에 관여했으며, 부지런하고 알뜰했던 할머니는 억척스러움으로 재산을 일구어‘10리 안에서는 내 자손들이 남의 땅을 밟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를 실현했다. 손이 귀한 집으로 시집 와 첫 딸을 안긴 어머니는 3년 만에 가진 둘째도 딸을 낳는 바람에 산후 조리는 커녕 미역국 한 그릇도 편히 받지 못했다. 마뜩치 않아하는 할아버지 대신 아버지??嚥?吉女)’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섯 살이 넘어서야 말문이 트였지만 학교에 들어가서는 줄곧 1등을 놓쳐본 적 없는 딸에게 날개를 달아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평등사상이 강했던 그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덕행’의 의미를 가르쳤다. 이리공립여자고등학교에서 제일 공부 잘했던 그는 전쟁 와중인 51년, 서울대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의사의 꿈을 심어준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 결핵퇴치운동을 하면서 교의(校醫)로 활동했던 이영춘 박사다. 의사가 되겠다는 신념은 급성폐렴으로 서른다섯에 세상을 뜬 아버지 때문에 더 확고해졌다. 의대 시절엔 고향에 갈 때 가방 안에 ‘인골’을 가져가서까지 인체 구조를 공부했다. 기름기 묻은 뼈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난리를 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를 감싸 ‘의사 공부’를 하게 해주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인천??靡봉퓻阪??개업했다. 병원 운영한지 8년 만에 미국 유학을 떠나 선진의료 현장에서 원 없이 경험하고 공부했다. 독신인 그는 생애 딱 한번 청혼을 받았다. 미국 유학 시절이었다. 자상하고 낭만적이었던 교포청년과는 여러 번 데이트를 하기도 했는데 그가 ‘청혼’을 하자 그 순간 마음이 닫혀버렸다. 결혼보다 의사로서의 삶이 우선이었던 그로서는 여지 없는 선택이었다. 귀국해 병원 이름을 ‘이길여 산부인과’로 바꾸었다. 신식 병원건물을 짓고 의료시설도 가장 최신기자재를 들였다. 당시 관행이었던 병원 보증금 규정도 없앴다.‘보증금 없는 병원’은 주위의 염려처럼 진료비를 떼이지도 않고 오히려 번성했다. 앞만 보고 달리던 그는 문득 현실에 너무 안주하고 있다는 회의에 빠졌다. 마흔 세살에 일본 유학을 다시 떠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유학 중 그는 세가지 결심을 했다. 종합병원을 만들고, 의료취약지에 병원을 설립하고 의사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에 힘쓰겠다는 것이었다. 1977년 전 재산을 출연해 의료법인을 세웠다. 오늘의 ‘의료법인 길 의료재단’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결심은 모두 실현되었다. 양평 백령도 철원 등 무의촌 지역에 병원을 열었으며 ‘의료, 교육, 연구’를 하나로 묶는 의과대학을 설립했다. 그의 팔십 생애 걸어온 길에는 수많은 활동이 교직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빛나는 절정은 역시 의사로서의 삶이다. 환자를 고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그의 철학과 사랑은 ‘따뜻한 청진기’ 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는 청진기를 늘 품속에 넣어두고 진료했다. 긴장한 환자들이 갑자기 들이대는 청진기 금속의 차가움으로 다시 놀라는 것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가슴에 품는 청진기’를 그는 해마다 그가 사랑하는 가천의대 졸업생들에게 선물로 준다. ‘가슴으로 환자를 대하라’. 그가 지켜온 철학이 거기 담겨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1.12.06 23:02

“꿈꾸는 일은 존재의 의미…쓰러질 때까지 꿈꿀 것”

일생을 꿈꾸고 도전 하는 삶.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가슴에 품었던 꿈이 실현되는 그 지점에서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다시 도전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꿈을 실현하고 도전하는 과정에는 역경과 고난이 더 큰 무게로 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생을 걸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온 사람’이 있다면 그의 ‘역사’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이길여 가천대 총장을 만났다.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사업가로서 그가 걸어온 길은 장강(長江)과도 같이 깊고 넓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그야말로 높은 장벽이었던 시대, 그것도 농촌에서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의사의 꿈을 실현한 그는 전 재산을 털어 만든 의료법인을 통해 종합병원과 여러 개의 전문병원을 만들어 선진 의료를 일구었다. 90년대 초반에는 재단법인 가천문화재단을 만들어 사회공헌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해왔으며 의과대학을 만들고 종합대(경원대)를 인수해 인재양성의 꿈을 실현해왔다. 그가 다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그동안 추진해온 가천의대와 경원대 통합이 지난 7월, 교육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불가능한 일로만 여겨졌던 두 대학의 통합은 중단 없는 그의 도전정신이 이어낸 또 하나의 결실이다. 이 총장은 이 대학을 10년 안에 국내 10대 대학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경기도 성남의 가천대 경원캠퍼스 총장실에서 있었다. 빨간 재킷에 검정 바지를 차려입은 그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젊어 보였다. 그러나 우리를 압도한 것은 외모보다도 시종일관 샘솟는 열정이었다.-기대보다도 훨씬 더 젊으십니다. 늘 이렇게 넘치는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만 젊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죠. 우선 어떤 일이든 육체적으로 빨리 빨리 대응할 수 있어야 해요.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 천천히 일어나고 걸음걸이도 그렇고. 그런데 나는 아직 젊은이들하고 뛰어도 자신 있어요.”-비결이 운동인가요.“운동 많이 하죠. 하루도 빠짐없이 걷고, 밖에서 걸을 수 없으면 집에서 머신을 이용합니다. 저녁 시간을 많이 투자하죠. 주말은 어김없이 골프를 칩니다.”-열정적으로 살아오신 총장님의 성공스토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입니다. 성공의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도전정신과 열정, 그리고 추진력이 아닐까요. 제게는 혼신의 힘을 다하면 꼭 이루어진다는 신념이 있습니다.”-‘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하라’는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하더군요. 꿈을 꾸는 일은 총장님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요. “꿈꾸는 일은 존재의 의미예요. 나에게 꿈은 항상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넘치게 하는 일, 병든 사람을 돌보고 나라를 떠받칠 젊은 인재를 길러내는 길을 찾는 것이지요.”-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가장 강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까.“제가 말문이 늦게 터졌어요. 아들 대신 딸로 태어난 것도 그렇고 ‘미운 오리새끼’였죠. 어머니의 사랑으로 그 외로움을 극복했습니다. 학교에서는 ‘공부는 잘하는 아이였어요. 줄곧 1등을 했으니까요.”-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기억이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어머니는 나의 전부였어요. 여자가 배워서 뭐하느냐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나를 가르치셨지요.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내가 의사인데도. 그렇고 보면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맹점이 많은 겁니까.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의지가 그만큼 컸던 것 같아요. 돌아가신 순간,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허전함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어요.”(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이 총장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이 총장은 집의 침실과 집무실 화장실에 어머니 사진을 걸어두고 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대화한다고 들려주었다.)-시골 여학교에서 서울대 의대 진학이 쉽지 않았을텐데요. 특히 당시는 여성의 사회진출 벽이 높았지 않았습니까. 그 장벽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남보다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다행히 직업이 의사이고 교육자여서 다른 분야보다 차별을 덜 느꼈던 것 같아요. 물론 나도 태어날 때부터 딸이라고 구박 많이 받았지요. 내 마음대로 여자가 된 것도 아닌데.(웃음) 여성의 사회진출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요. 그래도 남성들보다 노력해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노력만이 길입니다.” -그래도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을 텐데요. “1960년대 의사 초년병 시절입니다. 환자 진료에 진력을 다했지만 약품 부족으로 환자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어요. 의사가 없는 섬에 사는 주민들이 병원에 늦게 도착해 고귀한 생명을 잃었을 때도 참담했습니다. 그런 시기가 저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산부인과는 왜 택하셨나요.“60년대에는 여성들의 질병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여성들이 정말 많았죠. 여성으로서 여성들을 더 잘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히 했어요.” -총장님 자서전에 바람개비 철학이 나오더군요. “바람개비는 바람이 거셀수록 잘 돌아갑니다. 시련과 역경은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이를 통해 발전하게 되지요. 도전과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항상 필요합니다.” -그 도전정신이 일구어낸 결실이 참 많습니다. 최근에 통합을 이룬 가천대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던 두 개 대학 통합으로 많은 대학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통합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었는데 통합을 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이제 학령인구가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대학들은 학령인구 100만 명 때에 생긴 학교들이에요. 그런데 이제 50만 명 40만 명으로 떨어지면 학교도 구조조정을 해야죠. 좋은 인재양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이미 통합의 경험이 있어요. 경원전문대와 경원대 통합, 가천전문대와 가천의대 통합이 그것이죠.”-그러니까 4개 대학을 합한 셈이군요.“그런 셈입니다. 사실 이들 대학 통합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감이 와 닿지 않을 겁니다.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드는 일이 의미 있는 일이지 가능한 일은 누구나 한다고. 저는 평생을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자료를 보니까 규모로는 수도권 3위던데요.“그것은 별로 내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규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얼마나 좋은 인재를 많이 키워내느냐가 중요하죠. 교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학교인프라는 다 구축해 줄 터이니 좋은 교육으로 인재만 만들어달라구요.”-10년 안에 국내 10위권 명문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자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총장은 총장대로 교수들은 교수대로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해내면 당연히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두 대학이 합쳤으니 시너지는 극대화 될 겁니다. 의생명 약학 보건 분야의 특성화대학과 인문.사회과학, 공학, 예술 분야가 강한 대학의 통합이니까요. 저는 이번 통합으로 우리 대학이 글로벌 대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자부합니다. 성남 경원캠퍼스는 글로벌캠퍼스로, 인천과 강화는 메디컬 특화 캠퍼스로 육성할 계획입니다.”-교수 채용에 매우 적극적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인재를 등용할 때 무엇을 우선 보십니까. “능력이죠. 그리고 지식과 인품이에요. 교수의 경우는 첫째 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학식이 많아야 해요. 학생들을 사랑하고 학생을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가를 봅니다. 학벌이 우선 조건은 아녜요. 아! 우리 대학이 여자교수가 가장 많다고 하던데요.”-총장님께서 의도하신 결과입니까.“아녜요. 능력으로 유능한 사람 뽑다보니까 그렇게 많아진 겁니다. 성별을 안 보았거든요.(웃음) 그런 점에서 보면 여성들이 뛰어난 것 같아요.”-늘 궁금했던 것이 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일에 앞장서 오시면서 정계 입문을 권유받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 권유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정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은 환자를 돌보는 일이고,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에요. 나에게 이것보다 더 행복하고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무슨 큰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앞으로도 실현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까.“그럼요. 나는 쓰러질 때까지 꿈을 꿉니다. 우리 재단이 어떻게 하면 잘 발전하고 최고의 인재를 키워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병원에서 환자들이 행복하게 진료 받고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 답은 곧 꿈이 됩니다. 사실 꿈을 꾸는 것은 산을 오르는 일과 같아요. 나는 한없이 산을 오르고 있지요. 산을 오르다 보면 돌멩이에 걸려 넘어질 수 있고, 나뭇가지에 걸려 할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올라가죠. 그 끝은 어디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합니다. 그 끝은 없다고. 내가 가다가 내가 끊어지면 그 다음 사람이 올라갈 것이라고요.”-혹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오신 것에 후회는 없습니까. “후회는 없어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결혼도 안할 것이고, 또 이 길을 택할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걸어온 바로 이 길을요.” -6개의 병원, 언론사, 대학, 박물관 등 의료 교육 문화재단을 통한 사회에 공헌 활동이 경이롭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적인 실천이 아닐까 싶습니다. 후대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회장이니 총장, 이사장 등 세속적인 타이틀보다 ‘사랑의 메신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봉사자’ 혹은 ‘젊은이들의 멘토’로 기억되고 싶습니다.”인터뷰 도중 안철수 교수의 기부가 화두에 올랐다. 그는 “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 양반이 먼저 했더라’며 참 좋은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미 전 재산을 법인화해 놓았으니 사실상 사회에 환원한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사회에 환원할 것이 많이 남았다고 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1.12.06 23:02

김병종 화백은

김병종 화백의 그림을 보면 우선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이 떠오른다.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가 그러하고 천재성이 그러하다. 여기에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까지 닮았다. 다만 시대가 달라, 채색이 훨씬 자유롭고 시야가 세계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김 화백은 동(東)을 축으로 하고 서(西)를 외연으로 전통과 현대를 넘나든다. 또 절제와 자유, 세속과 탈속, 추상성과 구상성이 교묘히 교직한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화선지에 먹이 스며들듯 문자향(文字香)이 배어난다.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과 여행 덕분이다. 더불어 그가 자란 뼈대 굵은 지리산과 첫날밤 새색시의 풀어진 치마끈같이 흐르는 섬진강의 감수성이 녹아있다.김 화백은 그림과 글을 융합한 제3의 장르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우뚝 선 존재다. 천경자 이우환 최종태 등도 있으나 질과 양적인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그의 글솜씨는 일찍부터 주머니 속 송곳(囊中之錐)이었다. 중학교 때 벌써 까뮈 보들레르 사르트르의 책을 읽고 시집을 낼 정도였다. 대학시절 서울대 대학문학상 등을 시와 산문, 소설로 석권했다. 또 제대 후에는 연극판에서 살며 희곡 10여편을 기성극단을 통해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1980년과 81년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과 희곡으로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문학상, 삼성문화재단 저작상을 받았다.글로는 부인 정미경(51) 소설가도 부창부수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이상문학상과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글발부부인 셈이다. 1953년 남원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용성중을 나와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성균관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과 파리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2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500여 회의 국내외 기획전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대영박물관 등 국내외 저명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미술기자상, 선미술상, 한국미술작가상, 기독문화대상 등을 받았다. 서울대 미술대학장과 미술관장, 조형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와 작품집으로 중국회화연구, 화혼을 불사르고, 김병종의 화첩기행 1-4권, 바보예수, 생명의 노래, 라틴화첩기행, 여행-on the road 등이 있다.두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울대 미대 대학원과 학부에 재학 중이다.

  • 기획
  • 조상진
  • 2011.11.29 23:02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