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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기업 성장해야 일자리 늘고 지역경제 활성화" 김광호 (주)흥건 회장

"기업을 유치하려면 사회간접자본시설 등의 기업 활동에 필요한 제반 여건 확충이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전북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외적으로 중앙정부의 예산 배려 등이 우선돼야 하고 대내적으로는 토착 기업 성장과 이를 위한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필수적입니다"제15·16대 전주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한 전북경제의 원로인 (주)흥건 김광호 회장(71)은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대외적인 요소 못지 않게 대내적인 노력도 중요함을 강조했다.김 회장은 "도내 국회의원들 중 초선이 많아 중앙과의 인맥 및 역량이 미흡해 국가예산 확보에 어려움이 있는 만큼 특정정당만 선호할 것이 아니라 전북발전을 위한 인물을 도민들이 뽑아야하며 기존 정치권도 지역균형발전이란 대승적 차원서 전북예산 확보에 한 목소리를 내도록 서로 긴밀한 협조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한 뒤 "토박이 자본 증대가 실질적인 전북경제의 근간을 튼튼히 하는 것인 만큼 토착기업 간 공동개발 및 협업 등의 상생 노력과 기능인력 양성, 특화산업 개발 등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토착기업이 성장해야 지역인재의 일자리 창출 및 지역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는데 자본력이 약한 실정이라 전북은 소비산업에 너무 치중돼 있음을 안타까워 하며 전북경제의 산증인으로서 전북 발전을 위해 지향해야 할 점 등을 제시했다.-전북경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생산원가 절감에 물류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과거는 무역이 일본과 미국에 의존해 있던 경제체제여서 동남권을 주축으로 산업화돼 있었으나, 현재는 교통의 발달과 IT산업의 발달로 내륙지역 및 서남권 지역도 산업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또한 전북의 미래도 거대한 시장 중국을 겨냥해 새만금을 지방사업이 아니라 국책사업으로 개발한다면 무척 밝을 것으로 생각합니다."-전북경제는 국가 경제의 1.3%에 머물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전북경제가 이처럼 열악한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그동안 경제가 정치논리에 의해 많이 좌우되면서 수도권과 동남권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되다보니 자연히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전북경제가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도내 정치권이나 자치단체들이 하나 같이 전북경제 활성화에 힘써 왔다고 하지만 도민들이 느끼는 체감도는 약합니다. 정치권과 자치단체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새만금개발이 20년이 지났어도 아직 갈길이 멀기만 합니다. 전북은 지역개발예산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적어 도로하나 개설하는데도 다른지역은 1~2년이면 끝나는 공사가 몇 년씩 걸립니다. 예를 들어 익산국토관리청에서 발주되는 1년 예산이 전남과 단순 비교해도 배 이상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한국경제정책이 정치논리로 해결되는 경향이 많은 현실에서 현재 전북경제지표가 전국 최하위권에 머물고 전북 경제가 한국경제의 1.3%에 그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모든 것에서 정치권과 지자체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도내 전체 기업 중 중소제조업체가 차지하는 비율이 90%를 넘고 대부분 2차 생산업체나 섬유업체 등이 많아 경제기반 구조가 매우 취약합니다. 이 때문에 경제구조 개편이 시급한데 어떤 방향으로 전북경제의 구조가 개편돼야 한다고 보시는지요."세계경제가 하나로 돼 1등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급변하는 경제체제하에서 1·2차산업으로는 전북의 미래가 어두운 만큼 IT산업, 관광산업 등 특화산업체제로 변화해가야 합니다"-중앙건설이 지난해 12월 상장폐지되면서 도내 건설업체 중 1군 업체가 단 한 곳도 없게 됐습니다. 이처럼 도내 건설업체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요."전북경제의 수준에 비해 건설업체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지역개발도 너무 취약하다보니 대형공사가 발주돼도 전북몫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실정입니다"-그렇다면 도내 건설경기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관발주공사는 발주 관서에서 과감하게 지역건설업체를 보호해 주어야 하며 민간공사도 외지업체에 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함께 도내 건설업체가 합병하는 등 대형회사로 변화해야 하고 외국에도 많이 진출해야 해야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최근 프로야구 10구단 무산과 관련 도민들의 실망감이 매우 큽니다. 도민의 한 사람으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매우 잘못된 결정입니다. 자본력과 물량공세에 의해 좌우된 것 같아 아쉽습니다. 스포츠산업은 경제논리로 풀어서는 안되며 전국민이 동참할 수 있는 전국민 프로야구시대로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10구단중 5개구단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새만금개발에서 도내 건설업체들이 제 몫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대응책은 무엇인가요."국가입찰제도상 도내 건설업체들이 소외돼 있고 업체들이 많다보니 경쟁이 심해 단합을 못하고 새만금개발의 외곽에 머무는 자충수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도내 업체들이 똘똘 뭉쳐 공동도급비율 상향을 요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전북의 미래로 주목받는 새만금이 어떻게 개발돼야 한다고 보십니까."세계경제가 거대한 중국의 결제발전과 더불어 동남아 개발도상국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서해안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이때, 새만금은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파급효과만 생각하지 말고 장기적인 면에서 설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북발전 차원이 아니라 국가발전 차원에서 국책사업으로 개발돼 새만금개발 성과를 극대화해야 합니다"-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경제대통령, 경제민주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대 정권의 전례를 보면 지역별 안배에서 호남몫은 대부분 광주·전남에 돌아가고 전북은 항상 소외돼 왔습니다. 전북경제의 원로로서 차기 정부에게 전북경제 활성화를 위해 바라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대통령 출마당시 전북에 공약한 사항들이 형식에 그치거나 중단되지 않고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반드시 이행될 수 있도록 배려하기 바랍니다"

  • 기획
  • 강현규
  • 2013.01.29 23:02

김광호 회장은 - 건설업 발전 견인…전북경제의 산증인

전주고, 고려대를 졸업했고 전북대 대학원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34세때 건설업에 뛰어들어 39세 되던 해인 1975년 (주)흥건사 대표이사로 취임하며 전북건설업계 혜성으로 부상한 뒤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80년대 서울 개포지구 개발 등 전국단위 건설공사를 휩쓸며 전북은 물론 전국적으로 도급순위 상위를 차지하며 전북건설업계에 돌풍을 일으켰다.또한 1994년 4월부터 2000년 4월까지 전주상공회의소 1516대 회장을 역임하며 전북경제의 수장으로서 지역산업단지 입주업체 유치를 위한 기반시설 확충에 힘써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등의 도내 유치에 기여했으며 2002년 월드컵 전주 유치위원장을 맡아 무산이 유력시 됐던 월드컵 경기 전주 유치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전주문화원장 재임시에는 사비를 들여 향토문화지인 격월간지 '노령'을 발행하며 전북의 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고 법무부 갱생보호회 전주지부 보호위원회협의회장 재임시에는 교도소 출소자에 대한 재정 지원 및 취업에 힘써 자활의 희망을 안겨줬다.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 사재를 털어 전주지역한마음장학재단을 설립, 현재까지 이사장직을 수행하며 10억원 기금조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열심히 노력하면 안되는 것이 없다'는 인생철학을 가진 김 회장은 경제계에 입문한 뒤 현재까지 경제인으로, 사회봉사자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 기획
  • 강현규
  • 2013.01.29 23:02

이강국 前 소장은 - 3대 법조 명가…헌재의 중흥 이룬 헌법재판 '산 증인'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은 우리나라 헌법재판 제도의 산 증인이요, 헌법재판소의 중흥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헌법학의 권위자로서, 한국 헌법재판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다. 이 소장은 1945년 임실군 오수면 용정리에서 태어나 전주고(40회)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67년 제8회 사법고시에 합격해 육군 법무관을 거쳐 대전지법, 서울민사지법, 대법원재판연구관, 법원도서관장을 역임했다. 이어 부산고법과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 대전지방법원장 등 각급 법원의 요직을 거쳐 대법관과 법원행정처장을 지냈다. 그리고 2007년부터 제4기 헌법재판소장으로 우리나라 헌법 수호에 헌신했다.1977년에는 독일 괴팅겐대학에 장기연수를 떠나 헌법재판 이론을 연구한 후 독일 연방재판소 판례를 종합분석한 '헌법합치적 법률해석'으로 1980년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88년 헌법재판소법 제정 당시 실무위원으로 참여해 오늘날 헌재의 초석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2011년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대법관 시절 새만금소송과 관련, 정부측 손을 들어주면서도 "정부가 향후 환경친화적인 개발방안을 지속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보충의견을 내 환경보전의 소중함을 강조한 바 있다.이 소장은 법조계 내에서 3대 법조 패밀리로 유명하다. 부친인 고(故) 이기찬 변호사는 전주공립보통고등학교(전주고 전신)를 졸업하고 해방 후 처음 치러진 제1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1949년 전주에서 변호사를 개업했으며 전주지방변호사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또 이 소장의 2남1녀 중 장남인 이훈재 사법연수원 교수는 서울 법대를 나와 사시39회에 합격해, 부산지법, 의정부지법, 서울서부지법 판사를 거쳤다. 둘째 아들의 장인은 대한변협 회장을 지낸 박재승 변호사며, 사위도 판사로 온 가족의 법조화를 이루고 있다.좌우명은 신독(愼獨. 혼자 있을 때도 몸가짐을 삼감).

  • 기획
  • 조상진
  • 2013.01.22 23:02

"헌법은 국민 행복 위한 최고법…헌재가 매개 역할해야" 21일 퇴임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6년 동안 우리나라 헌법 수호의 수장(首長)을 맡았던 이강국 헌법재판소장(68)은 21일 퇴임을 앞두고 눈코들새 없이 바쁜 모습이었다. 지난 연말 1000쪽에 이르는 기념논문집을 발간하고, 연초에는 태국 헌법재판소와 MOU를 체결하는 등 아시아 4개국 헌법재판기관을 방문했다. 귀국하자마자 새 정부가 국민대통합과 안정성, 행정능력을 높이 산 탓인지 첫 국무총리로 하마평이 무성하다. 인터뷰 시작 전, 총리 얘기를 꺼내자 "더 이상 공직을 맡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것을 정확히 써 주세요."라면서 웃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이 소장은 퇴임후 전북대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2007년 국회 인사청문회 때 약속했던 대로 법률구조공단에서 무료법률봉사활동을 하기로 했다. 서울의 유명대학이나 대형 로펌의 유혹을 뿌리치고, 고향과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인터뷰는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장실에서 가졌다. -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소장님께서는 40여 년의 현역 법조계 생활을 마감하시는데 소회가 남다를 듯합니다. 퇴임 소감부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저는 6년 동안 헌법재판소장으로 공직을 수행한 게 과분하고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를 세계적인 헌법재판소로 도약시켜 보겠다는 뜻을 갖고 있어서 행복했고, 또 그런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서 행복했고, 그런 꿈의 일부를 현실적으로 이루게 돼서 참으로 행복했어요. 나아가 대과없이 영광스럽게 퇴임을 하게 돼서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재임 중 보람된 일도 있었을 것이고, 또 아쉬운 일도 있었을 텐데요?"보람된 일이라면 우선 헌법재판연구원을 3년 동안의 노력 끝에 신설한 점입니다. 그래서 헌법재판소의 중장기 정책과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작년 5월에 아시아헌법재판소 연합체를 출범시켰어요.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기여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점이 자랑스럽고요. 그 다음에 2014년에는 전 세계 120여 개국의 헌법재판 관련 기관의 수장들이 모여서 헌법을 논의하는 세계헌법재판회의를 서울로 유치했어요.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한층 더 높아질 겁니다. 아쉬운 점은 국민들로부터 더욱 큰 사랑과 신뢰, 존경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점이 아직은 미진한 것 같아요."- 재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소송은 무엇입니까? "순전히 법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부분이겠지만, 작년 연말에 우리가 했던 한정위헌청구의 적법성에 관한 사건이 있어요. 20여 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판례를 번복한 건데 법리적으로 의미가 있죠. 그리고 저희가 내세울 수 있는 게 미디어법, 미네르바 사건, 야간옥외집회 금지사건 등이 있죠."- 헌법이란 무엇이며, 소장님께서 임기동안 세우고자 했던 헌법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저는 헌법이 국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국가의 최고법이라고 생각해요. 헌법에는 온갖 좋은 소리가 다 있잖아요. 민주주의, 법치주의, 법 앞의 평등,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인간답게 살 권리, 이런 온갖 좋은 소리가 다 있는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했잖아요. 헌법 따로, 현실 따로, 이렇게 된 이유가 헌법재판에 의한 매개역할이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창립되고 헌법재판소에 의한 중개매개 역할이 강화되면서 국민들은 헌법의 이념과 가치를 주목하고 존중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됨으로써 헌법은 단순히 장식적. 명목적 규범이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생활규범, 국가권력의 남용에 대한 강력한 통제규범이 되고 그런 것을 통해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사회적 통합규범으로 발전된 거죠. 헌법과 헌법재판소와의 관계가 그런 점에서 중요한 거죠."- 소장님은 지난 해 10월 마지막 국정감사를 마치며 "헌재가 세계적 기관으로 도약하기 위해 세계적 수준의 높은 법리로 무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제3의 법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는데요?"우리 헌법재판소는 1988년 출범할 당시 독일연방헌법재판소를 모델로 창립됐어요. 그런데 그 후에 연구관들이나 재판관들이 미국 유학을 다녀오면서 이제는 미국 대법원의 영향도 많이 받게 됐죠. 미국식의 헌법재판의 법리와 독일식의 헌법재판의 법리가 꼭 같은 건 아녜요. 그래서 저는 이제 미국식이나 독일식 좌고우면하면서 고생할 게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가치체계, 문화체계에 맞는 우리 나름대로의 길을 찾자, 특히 아시아적 가치와 규범에 맞는 아시아적인 기준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제가 주장하는 제3의 법리인 거죠."- 퇴임 후 계획은?"더는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인생 2모작으로 사회봉사와 새 세대를 위한 교육을 할 생각에요. 전북대학교 로스쿨 석좌교수로 가서 학생을 가르치기로 했어요. 전북이 조용한 곳이기 때문에 외부적인 자극도 받아야 하고, 특히 젊은 사람들은 세상이 넓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 부분에 제가 기여할 수 있는 일정한 몫이 있지 않을까 해요. 그리고 법률구조공단에서 자원봉사단으로 무료상담활동을 하기로 했어요. 이미 공단 승낙까지 받았어요. 사회적 약자와 소외자의 권익보호를 위한 법률서비스를 하는 거죠. 다만 통일이 온다면 통일헌법 제정에 참여하고 싶은 게 마지막 소망이자 희망입니다."- 이번 대선은 물론 오래 전부터 권력구조 등 개헌 논의가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개헌의 방향에 대해 소장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지금 개헌에 대한 논의가 너무나 권력구조에 집중돼 있잖아요. 권력구조에서 촉발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 부분에만 너무 집중되어선 안 되고 국민의 기본권이나 국제화, 세계화에 관한 문제들을공론화해서 전문가와 일반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하고, 문장도 아름답게 해서 생명력이 긴 그런 헌법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요. 다만 앞으로 통일에 대비한 헌법적인 근거도 만들어 놓았으면 좋겠어요. 서독은 이미 통일에 대비한 근거들을 헌법에 명문으로 다 규정을 했었어요. - 판사의 막말이나, 뇌물검사, 성(性)검사 등 모범이 되어야 할 법조인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법조인의 자세랄까, 몸가짐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죠."법관들이 행사하고 있는 재판권, 검사들이 행사하고 있는 검찰권, 이게 모두 법원이나 검찰에서 스스로 창출해서 만든 권력이 아니에요. 이건 국민의 권력인데, 국민이 법원이나 검찰에 위임한 것이죠. 그러니까 법원이나 검찰이 재판권과 검찰권을 행사하면서 항상 이건 국민의 권력인데 우리가 위임받아 행사할 뿐이라는 것, 따라서 재판권이나 검찰권은 국민을 위해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투철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끔 튀는 판결도 있는 것 같던데요?"'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고 할 때의 양심은 개인적인 양심을 의미하는 게 아녜요. 개인적인 양심에 관한 규정은 헌법에 다른 조항이 있어요. 법관의 양심이라는 것은 국가기관으로서의 법관으로서의 양심을 의미하는 것이고 국가나 정치권력으로 부터의 독립과 중립, 또 국민을 위한 헌신 그런 것들이죠. 또 구체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정확한 재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확한 사실인정과 정확한 법률의 적용, 그리고 정확한 판단, 이래야 정확한 재판이 되는 건데 말처럼 쉬운 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재판이 되기 위해서는 경험과 경륜도 많아야 하고, 근본적으로는 법관과 검사가 정확한 재판이나 수사를 하겠다는 열정이 필요하죠."- 법조계에 입문한 계기는 무엇입니까?"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로켓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모형로켓을 만들다가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손을 다치는 일도 있었어요. 로켓 전문가가 되려면 그 당시 서울 공대 조선항공과를 가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다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린 마음에도 조선항공과를 졸업하고 갈 길이 막막한 거예요. 또 아버님은 은근히 법조인으로 제가 나갔으면 하시고, 저도 효도도 하고 싶고, 그래서 고 2때 갑자기 문과로 돌았죠."-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우리는 법조 역사가 짧은데, 꼭 우리나라에서 찾는다면 김병로 대법원장과 조진만 대법원장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김병로 대법원장께서는 사법권의 독립을 강조하셨고 조진만 대법원장께서는 탁월한 법리적 능력을 발휘하셨죠. 조 대법원장은 판결문을 개선하고 한글 전용화를 이룩하신 분인데, 1960년대 초에 한글 전용화 한다니까 변호사 분들이 다 반대했죠. 이 분이 밀어 부쳐서 개선하셨죠"- 전북은 가인 김병로, 화강 최대교, 사도법관 김홍섭 등 법조 3성(聖)을 배출한 고장입니다. 소장님의 경우, 3대가 법조 가족으로 이러한 자랑스런 전통을 잇고 계십니다. 우선 선친이신 고(故) 이기찬 변호사님은 지역에서 엄격하신 법조인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소장님이 쉰이 넘어서도 안경을 벗고 뵈었다고 제가 들었은데요? "그럼요. 제가 명절 때 내려가서 뵙잖아요. 그러면 우선 안경을 벗어서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아버님 좌정하신 방문을 열고 마루에서 큰 절을 올리고 꿇어 앉아 있으면 선친이 '들어 오너라' 말씀을 하시면, 기다시피해서 방으로 들어가죠. 꿇어 앉아 있으면 '편히 앉거라' 하시면 비로소 편히 앉고 그렇게 지냈죠. 아주 엄격하시고 대쪽이셨죠." - 선친께서 어떤 점을 당부하셨습니까? "선친께서는 항상 언행을 신중하고 사려깊게 하도록 강조하셨어요. 특히 법관은 칼 날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잃거나 집중을 하지 않으면 그 칼에 자신의 발을 벨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항상 집중하고 신중하고 균형을 잡아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 이걸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셨죠."- 자녀들에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 노력하다 보면 수퍼맨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신 걸로 아는데요?"저희 집 애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한테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얘기하죠. 그 외에도 아버님한테 배운대로 신중함, 사려 깊은 처신을 하라고 하죠."- 법조계의 맥을 잇고자 하는 고향의 젊은이들에게 귀중한 말씀 들려주셨으면 합니다."제가 작년 9월에 전주고에 가서 '꿈을 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주제로 특강을 했어요. 전북은 외부적인 자극이 없다 보니까 제대로 꿈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꿈과 이상을 가져야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도 생각하고 노력도 하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전북의 젊은이들이 꿈과 이상을 높고 크게 가졌으면 싶고, 그걸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을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바로 철이 난다는 의미겠죠. 제가 제 분야에서 그걸 돕도록 하겠습니다."- 고향인 전주나 임실은 가끔 다녀오십니까?"매년 부모님 기일(한식)과 추석 때, 2차례는 정례적으로 조용히 성묘를 다녀오죠. 21일 퇴임하면 23일 성묘 가서 '헌법재판소장 잘 마쳤습니다'고 고유(告由)를 드릴 예정입니다." - 고향에서의 어렸을 적 추억, 가령 고등학교 때 에피소드라든지를 한 가지만 들려주시죠."전주고 1학년에 들어가니까 선배들이 클럽이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후배들 하나씩 뽑아서 팀을 만들었어요. 주특기가 다른 사람들을 모아 팀을 구성하듯 해서 단합 대회한다고 1학년 초에 우전면 다리 밑으로 일요일에 모여라고 해요. 갔더니 큰 다라이에다 동네에서 막걸리를 받아와 가지고 세수 대야에다 막걸리를 가득 부어서 다 마시라는 거예요. 저는 그때 술이라는 것을 처음 마셔봤어요. 술이 어떤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막걸리 한 대야를 다 마셨죠. 그리고 거기서 뻗었어요. 나중에 눈 떠보니까 병원이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서 링거주사 맞고 하루 반나절 고생을 했죠. 지금도 그때의 안 좋은 인연 때문에 그런지 술을 잘 못해요."- 대법원 및 헌법재판소 근무가 집에 자료를 싸가지고 가서 검토할 정도로 엄청난 격무인줄 아는데 건강관리 비결은 무엇입니까?"그렇죠. 그동안 등산도 하고 재판관들하고 주말에 골프도 해봤는데, 지내 보니까 역시 등산이 건강 증진 방법으로 가장 좋다 싶어요. 나이가 드니까 높고 험한 산은 아니더라도 둘레길이나 야트막한 산을 다니는 것이 건강 증진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 기획
  • 조상진
  • 2013.01.22 23:02

"'지역사회 공동체 운동'으로 내적 역량 키워야" 전봉호 전북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지역사회의 내적 역량을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전봉호 전북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59)은 침체돼 있는 지역발전을 위한 대안을 내부에서 찾았다. 그는 현재 전북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중앙정부를 비롯한 외부에서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지역 스스로 내재적 역량을 축적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역사회 공동체 운동'을 내적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운동은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그 속에서 도민들은 소외감과 패배감을 떨쳐내고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렇게 되면 지역사회의 역량은 제고되고, 높아진 지역역량 만큼 지역발전이 앞당겨진다는 설명이다. 1시간이 넘는 인터뷰 동안 그는 변호사로서 뿐만 아니라 오랜기간 시민사회단체를 꾸리면서 느끼고 고민해 왔던 그만의 전북 발전방안을 풀어놨다.-전북은 오래전부터 낙후탈피를 외쳐왔습니다. 하지만 항상 제자리인 것 같습니다. 물론 상대적 낙후일 수도 있지만, 전북도민들이 느끼는 상실감이나 패배감은 매우 큽니다."도민들은 오래전부터 개발에서 소외돼 변방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도 그랬고요. 그 만큼 도민들이 느끼는 소외감이나 상실감이 깊다는 이야기죠. 그렇다고 앉아있을 수만 없죠. 따라서 이제는 지역사회 곳곳에서 활력을 충전시킬 수 있는 내부 작업과 노력들이 요구되고 있습니다."-이전에도 다양한 노력들은 시도됐습니다. 그러나 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인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할까요."우리의 현실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주위 환경은 매우 척박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먼저 지역사회에서 우리가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는게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을 모으면 가능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힘을 결집시키기 위한 목표가 분명해야 되는데요."내적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환경 및 생태계 파괴 등으로 성장 잠재력이 크게 줄어들면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북지역도 마찬가지로, 성장 잠재력이 많이 파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나 지역에서는 새로운 내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의 활력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다소 추상적인 말 같은데, 구체적으로 내부 활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제 생각으론 '지역사회의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역내 공동체가 제대로 구축되면 지역사회가 활력을 찾게 됩니다. 지역사회에서 활력이 넘치게 되면 도민들은 상실감이나 패배감을 떨쳐낼 수 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아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역발전의 동력이 되는 것이죠.-공동체 구축이 어떻게 내적 역량 제고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사례를 통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성장 잠재력이 파괴된 상태에서, 그리고 돈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첫째가 두뇌이고, 둘째는 사회적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셋째는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각종 자원들을 융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이중 두번째인 사회적 잠재력의 경우, 공동체 운동을 통해 가능합니다.서울시 박원순 시장이 추진하고 있는 마을만들기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업은 마을단위의 역량을 키우는 사업입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동네 빵집의 경우, 현실적으로는 대기업에 대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이 공동체를 구성해 지역에서 생산된 원료로 빵을 만들어 판매한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소비자들은 믿을 수 있는 제품을 안심하고 구입할 수 있어 주민 공동체가 운영하는 빵집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민 공동체는 그 이익금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기 때문에 지역경제가 활기를 띠게 되는 순환경제가 이뤄지게 됩니다. 주민 공동체는 현재 제도상으로도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 등 형태는 다양합니다. 이와같은 작업들이 지역사회 곳곳에서 진행된다면 지역사회 내적 역량은 자연스레 키워지게 될 것입니다."-결국 지역 사회의 공동체 구축이 지역발전의 출발점이라는 것인데, 공동체가 구축된다고 해서 지역발전이 이뤄지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데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현실속에서 답을 찾자는 것입니다. '뜬 구름 잡기'식의 공허한 이야기 보다는 실천이 가능한 분야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분야별 여러가지 방안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랜기간 시민사회활동을 해온 제가 볼 때는 보면 공동체 구축을 통해 내적역량을 제고시키고, 이를 통해 지역발전을 도모하는게 가장 현시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도민들도 지역발전에 대한 생각, 즉 패러다임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북도민들의 성향은 여타 지역에 비해 소극적이라고 합니다. 이는 지역발전의 걸림돌이라는 지적도 있는데요.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동안에는 도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거창한 구호나 막연한 애향심에만 호소하기 보다는 도민들의 공동 관심사를 만들어주는 방식이죠. 참여할 수 있는 의미만 제대로 찾아준다면 그 어느지역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판을 벌일 수 있을 것입니다. 도민들에게는 낙후탈피를 위한 의지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끝으로 지역사회 발전과 관련해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이 어느때 보다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사실 시민사회단체의 역량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지난해 실시된 총선과 대선 등을 통해 시민사회단체의 적잖은 활동가들이 정치에 뛰어들면서 더욱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더불어 지나치게 정치색을 띠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지 전체의 모습은 아닙니다. 현재는 시민사회단체가 변화의 요구를 받고 있는 상황으로, 각 단체들은 정체성 확보 등의 내부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단체의 활동도 시대흐름에 맞게 더욱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 기획
  • 김준호
  • 2013.01.17 23:02

전봉호 의장은 - 의료·환경·여성인권 변호사로 '정평'

전주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했고, 지난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시절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법관 임용을 포기하고 1990년 변호사 개업했다. 민사는 물론이고 의료와 환경, 여성인권 등을 전문영역으로 삼고 있다.변호사로 활동하던 1994년 전북환경운동연합을 꾸리면서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90년대 초반'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을 통해 환경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됐다"며 환경운동에 참여한 배경을 설명했다.그는 앞서'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최열씨가 전국 단위의 환경운동연합을 결성하자 뜻을 같이해 전북환경운동연합으로 바꿨다. 현재 전북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과 전북지역사회단체연합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환경운동을 하면서 새만금 사업을 놓고 전북도와 반대입장에 서게 되면서 적잖게 충돌했고, 그로인해 '전북발전 저해세력'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여전히 새만금 사업에 대한 반대입장을 거두지 않고 있으며, 지역발전을 위해 새만금 사업 보다는 내륙지역에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더불어 그는 아파트 공동체운동도 활발히 펼쳤다. 열심히 꾸린 것에 비해 성과는 다소 미흡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지역사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체험하면서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공동체를 회복시켜 지역사회의 내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를 구축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 기획
  • 김준호
  • 2013.01.17 23:02

이석연 변호사는 - 헌재 연구관·법제처장·시민 변호사…'헌법 지킴이'

이석연 변호사는 정읍시 옹동면에서 1954년 태어났다. 태인중을 졸업하고 6개월만에 독학으로 대입검정고시와 예비고사에 합격했다. 검정고시는 전북 전체 수석이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미루고 김제 금산사 심원암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1년 8개월 동안 동서양의 고전과 역사, 문학서 등 3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이때 인생과 사회에 대한 안목과 자세를 깨우쳤다. 전북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79년 행정고시에 합격, 법제처에 첫 발을 디뎌 8년 동안 사무관과 법제관으로 일했다. 이 가운데 3년은 육군 정훈장교로 전방에서 근무했다.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서울대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15년 동안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1994년 변호사로 나섰다. 이때부터 헌법소송 등 주로 공익소송을 맡았다. 또 시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경실련 사무총장(1999-2001년), 헌법포럼 상임대표,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시변)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2001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 전역을 시찰했고, 2003년에는 일본 게이오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돼 각국의 법문화와 시민운동을 비교 연구하는 등 국제적 감각을 쌓았다. 2004년에는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신행정수도 이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 위헌결정을 받아냈다. 이어 새만금소송에서 승소, 방조제가 완공하는데 기여했다.2008년 이명박 정부의 첫 법제처장에 임명돼 2년 6개월 동안 소신껏 일했다. 이때 국무회의와 국회에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2011년 9월에는 범보수진영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다가 뜻을 접었다.현재는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와 21세기 비즈니스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5월에 출범한 책권하는사회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았으며 김을호, 김종훈, 소설가 김홍신, 영화배우 안성기, 올림픽축구 국가대표팀 홍명보 감독이 공동대표로 돕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이번에 발행한 〈책, 인생을 사로잡다〉 외에 〈헌법 등대지기〉 〈침묵하는 보수로는 나라 못지킨다〉 〈헌법의 길 통합의 길〉 〈헌법과 반(反)헌법〉 〈헌법소송의 이론과 실제〉 〈형법총론예해〉 등과 50여편의 논문이 있다.

  • 기획
  • 조상진
  • 2012.12.25 23:02

법무법인 '서울' 이석연 대표변호사 "독서는 성공의 지름길이자 국가 경쟁력이죠"

의외였다. 그 동안 헌법과 형법 등 딱딱한 법만을 다루던 이석연 변호사(58)가 독서 예찬을 담은 책을 낸 것이다. 또 '독서가 국력'이라며 책권하는사회운동본부를 만들어 독서 전도사로 나선 것도 특이했다. 법제처장을 그만 둔 뒤 서울시장 출마 여부로 지난 해 가을, 뉴스의 한복판에 있다 사라져 궁금하던 차여서 더욱 그랬다. 책을 펼쳐보니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어렵다는 고시 양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스피치와 문장에 자신감이 붙어 있는지, 그 비결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책 읽기와 개헌, 새만금 등 헌법소송, 고향 발전 등에 대해 듣고 싶었다. 인터뷰는 그가 대표변호사로 있는 서울 서초동의 법무법인 '서울' 집무실에서 가졌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책권하는사회운동본부 일과 헌법과 관련된 공익소송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의 로스쿨이나 명사특강, 자치단체 특강 등에도 다녀옵니다. 그리고 생활 밀착형 시민운동 몇 군데, 가령 기부문화나 나눔, 청년창업 지원이나 양극화 해소 등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반면 대외적인 정치성을 띤 활동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책, 인생을 사로잡다〉를 내셨는데, 반응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를 쓰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제 모토는 '책과 더불어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독서로부터 얻은 지식지혜가 지금까지 삶의 자양분이랄까, 자신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저를 키운 건 8할, 아니 전체가 독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문맹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데 책 읽는 것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낮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끄러운 일이죠. 저는 '독서의 힘이 국력이요 국격이다'이런 생각을 해요. 그래서 국가적으로 책 읽는 풍토를 마련했으면 합니다. 저는 농촌출신으로 지방에서 크면서 내 삶이 항상 아웃사이더였지만 어디 뒤지지 않고 자신감을 가진 것이 젊은 시절 독서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들에게 비주류로서, 이런 사람도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책을 읽는 방법이 독특한 것 같습니다. 유목(Nomad) 독서법은 뭡니까?"제가 즐겨 인용하는 문구(文句)가 있습니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영원히 살아 남을 것이다.'이게 소위 유목정신이에요. 징기스칸에 앞서 몽골제국을 통일했던 돌궐제국의 명장 톤유쿠크(Tonyuquq)의 비문(碑文)에 새겨진 글입니다. 항상 개방적이고 이동적인 마인드, 또 창의적이고 열린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거죠. 책을 읽는데도 그게 필요합니다. 책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라, 또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책을 공부나 시험을 위해 읽는다면 지루하겠죠. 저는 그것을 탈피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의 정신으로 독서를 하라고 권합니다. 3가지 방법을 제시했는데 중요하지 않은 내용은 건너뛰라, 여러 권을 겹쳐 읽어라, 재독(再讀)의 묘를 살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책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 동안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을 꼽는다면?"젊은 시절부터 제 곁을 떠나지 않았던 10권의 책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가 가장 큰 영향을 줬고 괴테의 〈파우스트〉, 조지훈의 〈지조론〉 그리고 〈낭만적인 고고학산책〉 〈동방견문록〉 〈예언자〉 〈진리의 말씀 법구경〉 〈노자 도덕경〉 〈손자병법〉 〈징비록〉도 꾸준히 제 삶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난 5월에 '책권하는사회운동본부'를 출범시켰는데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까?"저는 책으로 인해 혜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독서는 성공하는 삶의 지름길이자 국가경쟁력이라는 신념을 내걸고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운동본부는 123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 대표단 6명이 3권의 책을 가져와 1권은 청소년에게, 나머지 2권은 지인들에게 덕담과 함께 전달합니다. 책을 받은 사람은 매월 13일에 또 다른 지인들에게 3권의 책을 권하면 됩니다. 대표단과 운영위원 106명이 전달을 시작하면 1년 후에는 65만1264권의 책이 전달됩니다. 더불어 전자책 선물과 SNS를 통한 '메리북스마스''밸런타인북스데이' 등의 이벤트와 콘테이너 이동도서관, 취약계층저개발국 청소년에게 책보내기 활동 등도 펼치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대통령이 바뀌었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권하고 싶은 책은?"〈권력의 조건〉과 〈징비록〉입니다. 권력의 조건은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의 포용의 리더십을 다룬 책입니다. 링컨이 라이벌까지 껴안고 등용해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난국을 극복해 냈습니다. 당선인도 통합과 소통의 리더십을 주장하고 있어 권하고 싶습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직전의 국내외 정세부터 임진왜란의 실상과 왜란 후의 상황을 아주 냉철하게 서술한 경세서이자 역사서입니다.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꼭 읽었으면 합니다."- 변호사님은 '헌법 지킴이''헌법 등대지기'라 불리는 등 유난히 '헌법정신'을 강조합니다. 헌법은 한마디로 뭔가요?"헌법은 우리 사회를 떠받쳐주는 기본적인 틀입니다. 공기나 물처럼 국가의 기본틀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중요한 거죠.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 정도의 번영을 누리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꿈을 이루어 왔고 특히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해 그들의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떠받쳐 준 것이죠. 제가 보는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한 축으로 하고, 또 그걸 달성하기 위해 법치주의, 적법절차, 그리고 기본권 존중을 한 축으로 해서 양축이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해야 합니다. 결국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 추구권을 최대한 확보하는 겁니다." - 헌법소송의 전문가로서 지금까지 관여한 소송은 얼마나 됩니까? 이 가운데 특기할만한 소송은?"저는 헌법소송을 공익소송의 일환으로 했습니다. 순수한 공익소송 목적으로 한 것이 150여 건 정도 됩니다. 그 중 30여 건이 위헌결정을 받았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인용률은 1-2%도 안 됩니다. 이러한 소송은 제가 무료로 한 것으로 사회의 기본 흐름을 바꿔 놓았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신행정수도 이전법을 비롯해 제대군인 가산점제도, 재외동포의 차별을 시정하는 헌법소원 등이 있습니다. 또 결혼식 때 혼주가 음식물을 접대하면 처벌받도록 한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과 민법 상속제도도 제가 위헌결정을 받아내 민법이 개정됐습니다.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 등 정치관계법 10건도 위헌결정을 받았습니다." - 이명박 정부의 첫 법제처장으로 들어가 각종 법령정비 등에 앞장섰는데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2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하나는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국민 불편법령개폐센터를 만들어 대대적인 법령 정비를 한 점입니다. 국민에게 불편을 주는 법령들을 많이 고쳤습니다. 운전면허도 간소화했습니다. 간소화해 놓으니까 오히려 사고가 줄어들었죠. 당시에는 경찰이 (사고가 늘어난다고) 반대하고, 운전면허학원 사람들이 정부종합청사에 몰려와서 '이석연이 물러나라'고 데모도 하고 그랬습니다. 또 하나는 법제처가 법령을 심사할 때 정부부처 등 다른 눈치를 보지 않도록 확립해 놓았습니다."- 국무회의나 국정감사에서 '쓴소리'를 많이 낸 정부내 유일한 '야당'이라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내각에 몸담고 있어 쉽지 않았을 텐데요?"사람들이 저에게 쓴소리 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당연한 얘기에요. 그게 쓴소리로 비춰지는 것은 그만큼 국정 운영이나 법치가 원칙과 정도로 안 가고 있다는 것이죠. 예컨대 용산참사와 관련해 법원에서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판결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공개해야 하는데 검찰은 공개를 안 하려고 해요. 국회에서 당연히 공개해야 한다고 답변했더니 정부 입장과 다르게 말을 한다고 그래요. 야당은 잘 한다고 하고 오히려 여당이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거예요. 언론관계법도 제가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MB한테 찍힌 거죠.(웃음)"- 몇 년 전부터 개헌에 관한 얘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개헌의 방향에 대해?"개헌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됩니다. 새 정부에서는 개헌 논의가 되어야 합니다. 권력구조는 많은 국민들이 동의하고 정치적으로 상당히 접근한대로, 대통령은 4년 중임으로 가고 부통령제를 신설해야 합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분권형 개헌은 한국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에 저는 반대합니다. 그렇지만 개헌을 한다면 권력구조 보다는 국민의 기본권 향상을 위한 개헌이 더 중요합니다. 예컨대 소비자 권리, 환경, 정보사회로 이행하면서 IT와 관련된 새로운 기본권을 신설하는 것, 선언적 의미에 머물러 있던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사회권적 기본권을 하나의 구체적 권리로 헌법에 명시하는 게 필요합니다."- 경실련 사무총장을 지낼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던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 등과 시민운동의 방법론을 놓고 논쟁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시민운동이 너무 권력화되고 무오류 환상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까?"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시민운동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해야 하고 초법화, 관료화, 권력화 돼서는 안 됩니다. 즉 무오류성의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법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법이나 제도는 고치는 절차적 과정이 필요합니다. 시민단체가 무조건 악법이다 하면 그 판단의 주체는 누구냐, 그게 문제란 말이죠. (16대)총선에서 낙선운동을 법이 금했지만 그 사람들이 했잖아요. 저는 낙선운동을 찬성한다, 그렇지만 법이 금하기 때문에 법부터 개정하자, 그래서 경실련에서는 정보공개운동을 했어요. 지금도 그게 시민운동의 정도라고 생각해요."- 이후 뉴라이트 운동 등 보수 또는 우파활동으로 돌아서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저는 진보나 보수, 좌우로 나누는데 대해 굉장히 거부감을 느껴요. 헌법적 가치에 의해서 저는 활동을 했다고 생각해요. 다만 제가 주장한 것은 DJ정부나 노무현 정부 때 헌법적 가치를 주장하면 굉장히 보수적으로 비쳤어요. 또 MB정부 와서는 그런 걸 주장하면 진보적인 걸로 비치는데, 제 소신은 변하지 않았고 사회 흐름이 그렇게 간 거죠. 굳이 저를 얘기한다면 헌법적 실용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싶어요."- 2011년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선언을 했다 접었는데요?"처음에는 뭔가 크게 변화시키려고 했는데 여러가지 시(時)와 운(運)이 안 맞았죠. 언젠가는 여기에 대해 따로 할 얘기가 있을 겁니다."- 새만금사업은 국책사업이자 전북의 숙원사업입니다. 새만금 소송에 참여해 승소하는데 크게 기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새만금 간척사업은 1심에서 진 걸 제가 2심부터 맡아서 뒤집어 놨어요. 대법원에도 나가서 헌법적 주장을 했고, 결국 확정시켜서 물막이 공사가 끝난 것 아닙니까. 새만금사업은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새만금 간척지를 막는다고 하면 저도 반대를 해요. 그렇지만 새만금 간척공사가 문제가 된 것은 이미 공사 시작 후 7-8년 뒤였어요. 그 상태로 놓아두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유명했던 변산해수욕장도 가보니까 이미 다 죽었더라고요. 순수하게, 그야말로 고향을 위해서 공익소송을 한 거죠. 돈도 안 받고 욕도 먹어가면서 했지만 저는 신념을 갖고 했어요. 격려도 많이 받았고요. 그러니까 강현욱 지사가 수임료는 못주지만 나중에 간척사업해서 조금 땅을 떼어주겠다고 했다고요.(웃음) 도민의 이름으로 감사패를 받았는데 지금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거기서 주장한 것은 환경이 만능은 아니다, 환경과 더불어 환경과 조화된 개발도 헌법적 가치라는 거죠. 새만금이 대표적입니다." - DJ와 노무현, 이명박 정부 등 누가 정권을 잡든 전북은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대개 호남 몫이다, 전북 몫이다 해서 호남출신을 요직에 앉혔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 이 사람들 마음은 호남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봐요. 그 사람들, 전북에 관심 없어요. 한때는 전북이나 호남 출신이라는 걸 감추고 다니던 사람도 있었어요. 한 둘이 아니에요. (내각 등 인사에서) 호남 대표처럼 지역안배라고 하는데 진짜 하려면 제대로 된 호남사람을 임명해야죠. 장차관 뿐 아니라 그 밑에 자리도 그래요. 저는 어디든 강연할 때 호남사람이고 전북대학교 나왔다고 얘기를 해요. 제가 지방에서 컸고 지방대학을 나왔는데도 이 정도까지 왔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애향심을 느끼는 거죠. 누가 정권 잡는 것과 관계없이 정말로 전북을, 호남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그게 제대로 안되니까 아쉽죠. 정부의 정책라인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했는가, 그런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 기획
  • 조상진
  • 2012.12.25 23:02

최승범 시인은 - 40년 대학 강단·집필에 몰두…생활시조 개척자

자상하고 다감하지만 지켜야 할 것에 대해선 깐깐하고 강직한 성품이다. 고향을 지키며 교편과 집필에 몰두했고 정갈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감칠맛 나는 문장이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현대시조의 개척자다. 예전 시조가 충효 등의 관념적 개념에 치중하고 있다면 고하는 일상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생활시조를 개척했다. 우리 고유의 멋과 맛, 예(禮)와 얼 등의 전통 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천착하면서 많은 시와 수필을 썼다. 1931년 남원 사매면 서도리에서 태어나 전북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토종시인이자 학자다. 최명희 시인과 동향이다. 1954년 전북대(국문과)를 졸업한 뒤 이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7년 전북대에서 가람 이병기 선생이 맡았던 '시조론'과 '수필론'을 물려받아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강단에 섰다. 1958년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6년 정년 퇴임 때까지 40년간 전북대에서 재직했다. 퇴직후엔 명예교수로 활동했다. 박사학위를 딴 수제자만 12명을 배출했다. 전북문인협회 회장과 전북예총 회장을 역임했고 2002년엔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신석정(辛夕汀) 시인의 장녀인 일림(一林)여사가 부인이다. 사이에 3남을 두었다. 큰 아들은 전문직종, 둘째는 금융기관에 종사하고 셋째는 사업을 하고 있다.저서로 '한국수필문학연구' '시조에 깃든 우리 얼' '조선도공을 생각한다' '시조에세이' '남원의 향기' '풍미기행' '한국을 대표하는 빛깔' '한국의 소리를 찾는다' '한국의 먹거리와 풍물' '후조의 노래' '몽골기행' 등 다수. '소리, 말할 수 없는 마음을 듣다'는 107가지 소리를 채집한 책이다. 수상실적이 화려하다. 전라북도 문화상, 정운시조문학상, 서울신문사 향토문화대상, 한국현대시인상, 학농시가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춘향문화대상, 한국시조대상, 목정문화대상, 한국문학상, 민족문학상, 한림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엔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 기획
  • 이경재
  • 2012.12.18 23:02

풍류시인 古河 최승범 선생 "풍류가 흐름이고 정신이지"

고하((古河) 최승범(81) 선생에겐 '풍류'와 '선비'가 따라붙는다. 두가지를 소재로 시를 많이 썼고 유유자적하면서도 자신한테 엄격한 생활태도 때문일 것이다. 이 시대의 선비를 꼽으라면 강암 송성용 선생과 함께 고하 최승범 선생을 꼽는 이들이 많다. 양병오 전북대 교수(54)는 스승인 고하에 대해 "문학정신은 여유롭고 낙낙한 풍류에 뿌리하고 있지만 세상을 살면서는 '줏대'를 강조하시는 외유내강형 성품"이라며 "이 시대 선비정신을 실천하고 계시는 몇 안되는 분"이라고 했다. 선비정신은 그의 예술과 학문을 지탱해 온 힘이다. 혹한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11일 고하문학관을 찾았다. 전주 성심여중고 남쪽 향교길에 있다. 최승범 선생은 고하문학관 관장이다. 집필실이기도 하고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장서가 가득하다. 원로시인이지만 꾸준히 작품을 구상하고 시작(詩作)활동을 하고 있다. 얼마전엔 시조풍류를 엮은 '시조로 본 풍류 24경'이란 책을 펴냈다. 풍류란 '속기가 섞이지 않은 맑은 바람, 맑은 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풍류와 선비의 대명사인 고하 선생을 만나 여러 얘기를 들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집과 고하문학관(향교길)을 왔다 갔다 해. 운동 삼아 동문 네거리까지 1200보쯤 걸은 뒤 차를 타고 인후동 집까지 가요. 지인들 만나는 게 일이지."-고하문학관이 사랑방 역할을 하겠군요."문학관에서 수필 시 이야기 등을 하며 지내. 오늘(11일)도 문인 다섯분과 만나 격주에 한번씩 회동하자는 얘기를 나누었어."1996년 정년퇴임한 뒤 장서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중 신용금고를 경영하던 중학교 동창이 공간을 마련해 줘 1997년 문예관의 둥지를 틀었다. 그뒤 전주시가 성심여고 남쪽 향교길의 2층짜리 동사무소를 리모델링한 건물을 제공해 2010년 현재의 공간으로 이전했다. 고하(古河)는 최승범 선생의 호다. 호를 따 고하문학관으로 명명됐다. 3만여 권을 웃도는 장서가 있다. '고하문학관'이라는 한글 현판은 송하진 전주시장이 썼다.-얼마전 '시조로 본 풍류 24경'을 펴내셨습니다.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데 근간의 집필활동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주로 밤에 옛 생각이나 현실의 느낌을 쓰는데 다음날 아침에 문학관으로 가져와 다시 보고 하는 거지. 산문은 원고 청탁이 들어와도 잘 써지지 않아. (나이 때문에) 긴 글은 이제 못 쓰겠어."-어떤 분은 이 책을 '빼어난 시조들을 아우른 백과사전 같은 작품'이라고 소개했던데 어떤 작품입니까."'시와 문학'이라는 잡지를 펴내는 김재홍 교수가 황진이 시조를 소재로 원고지 50매씩 써달라는 청탁이 와 여러차례 썼는데 나중엔 황진이 이후의 시에 대해서도 계속 써달라는 거야. 이 때 쓴 작품들을 엮은 책이야. 가람선생이 '내 시조의 스승은 황진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났어. 가람 선생한테 배운 내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지. 황진이는 명기(明妓)이면서 예기(禮妓)였고 시기(詩妓)였어."-평소 '풍류(風流)'를 소중히 여기고 천착해 오셨는데 풍류란 무엇이라고 설명하시겠습니까."글자 그대로 맑은 바람, 유유히 흐르는 물과 같은 것 아닌가. 최치원 선생이 맨 처음 이 말을 썼는데 인간의 교화도 풍류에서 찾아야 돼. 화랑도들이 산천을 유람하며 몸과 마음을 닦았던 호연지기도 바로 풍류에서 발원하는 것이라고 봐야지." -선생님 문학의 바탕도 풍류정신이랄 수 있겠군요. "대학 (교수)시절부터 문학정신을 풍류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恨)을 갖고 많이 이야기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야. 찌들어지고 슬픈 한만 이야기 해서 뭐해. 풍류가 흐름이고 정신이야."-많은 사람들이 풍류에 묻혀 살고 싶어하긴 하는데 현실이 용인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신경 쓸 일이 많으니까 그렇겠지. 안타까워."-선비와 선비정신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쓰셨는데 선비정신이란 어떤 것일까요."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렵지.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재물을 멀리 해야 해. 또 예(禮)를 알아야 하고 마땅히 지켜야 할 도(道)를 지켜야 하는 게 선비정신이지."-선비정신은 억지로 실천하려 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지 않습니까."나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선비집안 자식은 이래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어. '양식이 없어 굶을 망정 기생해서는 안된다'는 것 같은 말을 들으면서 자랐지. 중학교 때 흉년이 들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집에 먹을 게 없는 사람 손을 들어라고 한 뒤 손을 들면 편지봉투에 서숙(조)을 담아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형편이 어려웠지만 손을 들지 않았어. 집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할머니는 '장하다 우리 손주. 그래야 한다. 없는 것 군색 떨면 안된다'고 등을 두드려 주며 기특하게 생각하셨지. 이런 게 몸에 밴 게 아닐까. 그런데 요즘엔 이런 가르침이나 문화가 없어."-오늘날에는 선비정신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정신적 가치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내가 강조하고 잘 쓰는 말이 '줏대 없이 살지 말라'는 말이거든. 속 되게 살면 안돼. 회똥거린다는 말이 있는데 좌고우면 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말이지."-선생님을 두고 이 시대의 자상한 어른, 고고한 선비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좌우명이랄까 삶의 철학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 "자식들이 어렸을 때 우리 집의 가훈이 있느냐고 물어. 그래서 '눈은 아래를 봐야 한다'고 가르쳤어. 사람을 보거나, 길을 가거나 눈을 치켜뜨고 보면 안돼. 그리고 봄이 왔다고 해서 봄을 그냥 믿어서는 안돼. 섣불리 옷을 벗어 제치고 했다가는 봄에 속아 넘어가는 수가 있어."-선생님은 우리 시문학의 큰 기둥인 가람 이병기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현대시조의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인연이 맺어졌나요."서울대에 재직했던 가람 선생이 625전쟁이 끝나자 전북대로 옮겨 오셨어. 그래서 스승으로 모시게 됐지. 당시 가람 선생의 제자들이 월북했어. 전쟁이 끝나자 이를 두고 학생들이 가람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치면서 반대했지. 그러자 학장으로 있던 이병도 박사가 잠깐 내려가 있으라고 해서 전북대학교로 옮겨온거지. 당시 이병도 박사는 '가람이 다른 뜻이 있었다면 월북했을 것이다, 떳떳했기 때문에 서울대에 남아 학교를 지켰다'며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학생들을 타일렀지만 소용이 없었어. 나한테는 묘한 인연이 됐지."-가람 선생은 어떤 분이셨습니까."일제시대에 개명도 하지 않았어. 친일 내용은 한 줄도 쓰지 않았지. 누군가 어느 글에서 친일했다고 썼는데 알아보니까 가람 선생이 징용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아들을 생각하며 글을 썼는데 이걸 두고 친일했다고 쓴 거야. 그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어. 가람선생에 대해서는 책도 쓰고 글도 여러번 썼는데 그때마다 나는 가람선생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갈 만큼 모자란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시험 보고 나면 잘못한다고 혼나기도 많이 했어. 당시 학적부를 보니까 C학점(국문학사 과목)이 하나 있었는데 가람선생 과목이었어. 학문은 정확하게 가르쳤지."-난(蘭)에 얽힌 일화도 있던데요."가람선생은 평생 난을 가꾸며 사신 분이야.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난초가 담배연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거지. 난초는 술의 향기는 좋아하지만 담배 냄새는 싫어해. 정종을 마시고 난 뒤에 남아 있는 정종을 붓에 묻혀 난을 닦아주곤 했지."-또 한분의 스승이 신석정 선생인데 석정선생은 장인이기도 합니다. 어떤 인연이 있었나요."석정 선생한테는 시론을 공부했지. 면전에서는 칭찬을 하지 않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사위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술자리에서 자주 얘기하셨다고 해. 내가 문단에 등단한 것도 석정 선생 추천을 받은 게 아니야. 김동리 선생 추천으로 1958년 현대문학에 글이 나오면서 등단했지. 석정선생은 자신이 심사위원인데 사위를 추천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어. 요즘으로 치면 상피원칙이지."-김동리 선생이 추천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있었나요."전주에 문학강연 왔다가 일번지다방에서 대학신문에 게재된 내 시를 보셨던 모양이야. 서울로 올라간 뒤 얼마 있다가 작품을 보내라는 엽서를 보내셨어. 그래서 '등고' '소낙비' '설경' 세 편의 시를 보냈는데 현대문학에 실려 등단했어."-석정 선생 큰 따님하고 결혼하신 얘기 좀 들려주세요."당시 김준영 선생이라고 계셨는데 석정 선생의 부안 집에 놀러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함께 갔는데 석정 선생이 아이들을 불러 인사를 시켰어. 정원에서 술 한잔씩 하고 놀다 다음날 떠나면서 뒤돌아보니 큰 딸이 정원에 서 있었고 시선이 마주쳤지. 마주치자 마자 둘 다 시선을 돌렸지만 묘한 감정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 뒤 김 선생이 사귀어 보라고 했고 가람 선생도 좋다고 하셔서 사귀었지. 아버지께서는 바닷가 쪽(부안)이라 내키지 않으셨지만 시인 집안의 딸이니 괜찮겠다며 승락하셔서 결혼했어." -맨 처음 문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아버지께서는 고등고시를 (준비)했으면 했어. 그런데 할아버지는 공부를 할려면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며 소학을 읽게 했지. 나는 어깃장을 내기도 하곤 했는데 책을 많이 읽었던 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 할아버지는 60년대에 돌아가실 때까지 상투 틀고 평생 갓을 벗은 일이 없어."-지금까지 펴내신 저술이 상당량에 이를 텐데요. 몇권이나 됩니까."나도 잘 몰라" 그러면서 저술, 시집, 수필집 목록을 건네주었다. 세어 보니 58권이었다. -좋은 시란 어떤 시일까요."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좋은 시를 얘기하겠어. 나는 정지용의 '고향' 같은 시가 좋아, 순수시."-특히 사라져 가는 옛것들에 대한 애착이 강하신 것 같아요. 소리, 맛, 빛깔 등이 그러한 소재들인데 특별한 동기라도 있는 겁니까."평소에 우리 것, 우리적인 것인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지. 전통계승이나 선비정신에 대해 원고청탁도 많이 받았고. 그럴 때마다 애착을 갖고 우리 것이 뭐 있겠는가 챙겨본 거지. 그런 중에 우리 고유의 소리나 맛, 빛깔 등이 사라져 가고 있더란 말이야. 안타깝고 그리워서 소재로 삼았던 거지."-선생님은 '풍미산책'을 쓰시고 미식가로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 요즘 음식들은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콩나물 하나를 쓰더라도 맛이 다 달라. 안타까워. 이 근방에 손칼국수집이 있는데 바지락 같은 재료를 새벽에 일찍 장보기 하고, 또 밀가루를 두드리고 밀고 하는 것도 주인 혼자 다해. 정성이 들어가니까 맛도 좋을 수 밖에 없어. 내가 자랑하고 싶은 음식점이야. 근방에 등갈비집이 하나 있는데 엉터리야. 하도 맛이 없어서 노동부 근처 잘하는 곳을 알려주면서 배워오라고 했더니 처음엔 그 맛을 못내. 여러번 채근했더니 자체 개발을 해서 이젠 아주 맛있게 잘 해. 갈비도 손대기 좋게 다루고 쌀도 장수에서 가져온 좋은 쌀로 밥을 짓고. 음식은 결국엔 정성과 노력에 달려 있어."-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 있다면 어떤 걸 들 수 있겠습니까."범우사에서 '남원의 향기'라는 책을 낼 때인데 작품을 30여편 골라달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못 고르겠어. 그래서 조교선생이 알아서 골라 주도록 했지. 지금도 마찬가지야."-시를 쓰면 밥 먹고 살기 힘들다고들 하던데요."책을 사지 않는다고 하던데 문제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해야 하는 세상인데 시를 읽을 틈이 어디 있겠어. 안타까워."-요즘의 후학이나 후배 시인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충고 한토막 해 주신다면. "내가 어떻게 충고를 해. 큰 일 나. 일본 작가가 한 말이 있어. '은근하고 점잖은 고답적인 문장에 짜증나는 전후세대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다'고. 안타까운 현상이지." 이 작가는 하야시 마리코(58)로, 베스트셀러 작가다-학자로서, 문인으로서 외길 인생을 사셨는데 후회나 미련은 없으시나요. "정년퇴임 때 이런 말을 했지. 가정이 남원이고 대학도 전북이고 문인의 길을 걸어왔는데 다시 태어나도 이 고장, 이 길을 걸어가겠다고. 지금도 후회는 없어."-나이 들어 세가지 즐거움을 갖고 사신다고 들었습니다."첫째가 문을 닫고 책을 읽는 즐거움, 둘째가 문을 열고 밖에 나가 자연을 소요하는 즐거움, 셋째는 찾아온 친구들과 술 한잔 하며 담소하는 즐거움인데 이제 그럴 친구들이 없어."-사회에 대해, 세상에 대해 하실 말씀은 없나요."세상에 말할 게 뭐 있나. 이 상태로 살아가게 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가당치 않아."-대통령 선거철입니다. 선거 때마다 문인들이 보수-진보로 나뉘어 특정후보 지지선언을 하는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다 자기 길을 가는 거지."

  • 기획
  • 이경재
  • 2012.12.18 23:02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작권은 문화산업을 보호·진작시키는 요체"

2000년대 초반부터 불기 시작한 '한류'는 올해 절정을 맞았다. 물론 그 정점에는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있다. 빌보드 차트에 오르고, 유튜브 최다 추천기록을 깨고, 미국 캐나다 등의 메이저 리그 경기장에서 그것도 경기 클라이맥스의 단골 응원가가 되더니 드디어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깜짝 스타' 1위에까지 오른 것을 보면 '싸이가 지구를 점령했다'는 말이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한류 역사를 새로 쓰고 대한민국의 국가브랜드를 높인 '강남스타일'의 가치가 얼마쯤 되는지는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문화산업의 시대, 문화로 돈을 만드는 시대다. 캐릭터 하나로 기업이 살고, 뮤지컬을 팔아 도시가 먹고 산다. 문화가 경제로 치환되는 시대에서 산업적 가치는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지키느냐에 달려있다. 세계의 나라들이 자국의 산업을 위해 지적재산권 보호에 나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근래 들어 저작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퍼블리시티권 분쟁이 늘어나는 것도 문화 산업화의 새로운 질서가 가져온 결과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문화산업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저작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남용, 혹은 무의식적 관행이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다.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남형두 교수(48)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저작권 분야의 권위자다. 그것도 한류와 직결된 엔터테인먼트와 스포츠법 분야가 전문이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한류 열풍의 파고가 높아지던 시기, 그 중심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6년 변호사 생활을 접고 교수가 된 이후에도 저작권이란 기둥을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글쓰기로, 강연으로, 법제화 운동을 통해 분투하고 있다. 한류의 정점이 전북에 있다고 생각하는 남교수는 고향인 전북이야말로 문화산업의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지역이라고 확신한다.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연세대 남교수의 연구실에서 있었다. 3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는 재미있는 강의와도 같았다. -변호사 시절 인사 드려서인지 '교수' 호칭이 좀 낯섭니다. 학교로 옮긴지 얼마나 됐습니까."2005년 9월이니까 햇수로는 벌써 8년째군요. 제가 교수가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꾼 적이 없는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길이 있기 마련인가봐요."-대학교수로 전업한 결정적 계기가 있었습니까. "광장에 근무할 때인데, 영국의 한 텔레콤 회사와 국내 회사의 소송을 맡았었어요. 우리나라 회사가 영국 회사의 기술을 베껴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저는 영국 쪽 대리인이 되었는데, 완벽한 승소를 이끌어냈어요. 결과로만 보면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정도였지요. 그 이야기를 저녁 식사하면서 가족들에게 했는데 초등학생인 아들이 '아빠, 근데 아빠한테 진 한국회사 불쌍하다' 하는 거예요. 방망이로 뒷퉁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내가 평생을 이렇게 이기고 지는 승부사로만 지내야 하는가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즈음 연세대에서 제안이 온 거예요. 뒤도 안돌아보고 왔지요. 그런데 정작 아들 녀석은 '아버지가 변호사 계속 했으면 더 좋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실패와 시련이 많았다고 하셨는데, 뜻밖입니다. 그런데 결과로 보자면 그런 과정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끼시는 오늘의 길을 만난 것 아닐까요. "물론입니다. 법대는 독특한 환경이 있어요. 1학기 때 사법시험 1차 발표나면 한차례 초상집이 됩니다. 2학기 때 2차 발표나면 또 그렇죠. 그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 경험인데요. 사법연수원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체육대회를 하죠. 제가 달리기를 좀 하는 편인데, 4백미터 계주에서 6팀 중 4등을 했던 저희 팀이 마지막 주자였던 저의 스퍼트로 역전을 해 1등을 했어요. 헹가래를 치고 난리가 났죠. 그런데 하루는 교수님이 판결문을 강의하면서 제 판결문을 사례로 들었어요. '내가 잘 썼나' 했는데 교수님이 저를 부르더니 '이렇게 써서는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오시범의 사례로 뽑힌 것이었어요. 수모였죠. 그러시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체육 특기자로 들어왔냐'고 하셨어요. 그 뒤로 제 별명은 특기생이 되었죠."-상처를 많이 받으셨겠군요. 학생들은 그런 실패담을 들으면서 위안을 받았을테구요."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여기 들어온 학생들 대부분이 사실 다른 사람한테 등만 보여주고 살아온 애들이잖아요. 우수하니까요. 그런데 등만 보여주고 사는 사람은 진짜 불행합니다. 다른 사람의 등을 못 보니까 어려움을 모르게 되죠. 나보다 앞에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살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니 패닉 상태가 되는 겁니다. 공항에 가보세요. 휙휙 이륙하는 비행기들의 대부분은 근거리행입니다. 기껏 일본 정도 가는. 그러나 미주나 유럽으로 가는 보잉 747같은 경우는 '못뜨는 것 아냐' 할 정도로 활주로를 다 가서야 뜹니다. 그러니 아직 날지 못한다면 큰 인물이 될 장거리행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너무 조급증에 시달리지 말라는 것이지요."-저작권을 전공해야겠다는 특별한 인식이 있었습니까. "우연한 계기였어요. 변호사가 되고 2년쯤 되었을 때인데, 개그맨 주병진씨가 운영했던 '좋은 사람들'이 제임스 딘 유가족에게 소송을 당했어요. 이름을 쓰고 초상을 썼기 때문인데요. 제가 주병진씨 쪽 대리인을 맡았어요. 그때 그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퍼블리시티권 사건이었습니다. 상표 사건이 아니었거든요. 일반적으로 상표는 속지주의라 해서 해당 국가에 등록을 해야 합니다. '제임스 딘'이 미국에서는 유명한 상표지만 한국에서도 못쓰게 하려면 한국 특허청에 상표 등록을 해야 하죠. 그런데 '제임스 딘' 재단이 상표 등록하기 전에 주병진씨가 먼저 등록한 것입니다."-퍼블리시티권은 이제 시사용어가 되었지만 일상에서는 아직도 인식이 낮지 않나요."당시에는 더 생소했죠. 미국에서는 이미 퍼블리시티권이 권리로 자리 잡았었지만, 한국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을 정도였어요. 학계도 그렇고 법원 판례도 없었죠. 우리나라의 초유의 사건이 생긴 것인데, 그래서 과연 그 퍼블리시티권을 법원이 인정할 것인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이겼어요. 법원의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배우나 가수 운동선수들의 이름과 초상을 상업적으로 쓸 수 있는 권리가 인정이 된다. 법률로 제정하지 않았어도 관습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한테는 인정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퍼블리시티권을 인정하되 상속성이 없다고 판결한 겁니다."-저작권의 기본적인 취지는 이해가 되는데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복잡한 내용이 많던데요."제가 이해하는 저작권은 두 개의 기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문화의 산업화죠.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문화를 내세우는데, 문화를 산업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부족합니다. 예컨대 문화인들에게 연금을 주거나 창작금을 지원하는 것은 일시적인 지원책이예요. 그러나 문화예술인들의 창작물을 권리로 보호해주면 그것은 지속적인 수익원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작권법을 문화의 기본법이라거나 문화산업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작권은 문화산업을 진작시키는 요체입니다. 저작권을 제대로 이해하면 문화산업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는 정직한 글쓰기입니다. 표절문제지요"-근래 들어 저작권과 표절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것을 보면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산업화는 저작권 기본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저작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디즈니사의 곰 인형 '푸우'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미국의 저작권 보호기간은 75년이었습니다. 그래서 '푸우'는 2006년에 저작권 보호가 끝날 운명이었죠. 그런데 2000년도에 미국의회에서 저작권 보호기간을 20년 연장했습니다. 2026년까지 '푸우'의 수명이 연장된거예요. 물론 미국에서도 위헌소송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국 산업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합헌판결을 냈어요. 곰 하나를 위해 미국 법이 바뀌고, 헌법재판까지 간 것이죠. 그 '푸우'가 경제적 가치를 환산하면 200억불, 우리 돈으로 20조예요. 저작권의 가치죠."-한류 파고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요. 이런 열기가 지속적으로 갈 수 있을까요. "지금 한류는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국내에서는 한류 콘텐츠의 공급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급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때로는 수요를 단속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수돗물의 수량을 조절할 때 열어서 조절하기도 하지만 입구를 막아서 더 멀리 나가게 하기도 하잖아요. 제2의 '욘사마' '뵨사마'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멀리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조절하는 역할을 저작권이 합니다. 결국 저작권 권리를 통해 가치를 팔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저작권으로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 가치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자칫 그것이 지나치게 엄격히 제한되면 오히려 창작을 위축시키는 결과가 되고, 문화 산업화에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은데요. 산업화는 수요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저작권 문제는 이용자들이 저작권을 지키지 않는 것도 있지만, 지나치게 저작권자들이 탐욕을 부리는데서 오는 문제도 심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모범적인 사례라고 봅니다. 강남스타일 유튜브 조회수가 기록을 갱신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유튜브에 올리는 것 자체가 저작권 위반입니다. 그런데 원작자 싸이가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저작권에 위배되지만 권리자가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자기의 노래를 유포시킬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정보공유연대 운동은 활발한가요. 우리나라의 카피레프트(copyleft) 수준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저작권법이 개정되어서 미국의 공정 이용(fair use) 조항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어요.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피해가 크지 않고 사용하는 목적이 비영리적이라든지 등등의 몇 가지 이유에 해당되면 저작권 침해라 할지라도 침해가 아닌 것으로 보는 그런 법조항입니다."-그것과 반대되는 사건이 있었죠. 손담비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찍어 블로그에 올린 아이 아빠가 소송을 당했던. "손담비의 '미쳤어'라는 노래였죠. 손담비의 노래를 신탁 받은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문제를 삼은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이었어요. 따져보면 저작권 침해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된다한들 무슨 손해를 보았습니까. 그런 경우는 그야말로 저작권법을 형식적으로만 이해한 결과예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니까 협회에서 없던 것으로 하려고 법적 소송을 진행하지 않고 포기 했죠. 그런데 아이 아빠가 정보공유연대측의 지원을 받아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이라해서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았음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역으로 제기했습니다. 결국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는 판결을 받았어요."-저작권의 또 한 기둥이 정직한 글쓰기라고 하셨는데요. 표절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되었죠. "제 개인적으로도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집중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가 문화선진국이 되려면 표절에 대해서 더 이상 관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표절을 바라보는 관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판결이나 정치인들이 쓰는 글이나 회고록은 주로 다른 사람 대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령작가'라고 하죠. 그것은 사실 용인된 것들입니다. 표절의 대상이 아니예요. 그러나 학자로서 다른 사람의 글을 밝히지 않고 사용했다면 그것은 표절이죠. 표절은 그것의 메커니즘과 기본 철학, 저작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봐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녀사냥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렇다보면 정작 악의적인 표절을 거르는 일은 놓치게 됩니다."-표절은 학교교육이 잘되면 바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표절과 인용 교육은 어려서부터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하는데 '서울로 못가도 반듯하게 가야 한다고 교육 하는 것'이 바로 정직한 글쓰기입니다. 요즈음은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온갖 글을 다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학계의 관행은 결과만 좋고 논문 편수만 많으면 된다는 식이지요. 결국 학문 발전도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습니다."-교수님은 전라북도 문화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시던데요. 정작 자치단체들은 말과 생각으로는 문화가 도시를 살릴 수 있다고 하면서도 실천에 옮기는 일에는 소극적입니다. "그것이 좀 답답합니다. 문화는 새로운 시대의 중요한 경제 가치입니다. 이미 많은 나라와 도시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요. 저는 전주와 전북의 문화파워가 한국의 중심이 되고 세계로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문화에는 유니버설리티(universality)와 로컬리티(locality)가 있잖아요. 보편성과 지역성. 그러나 지역성을 가지면서 그것이 보편성을 띠려면 지역성이 아주 뛰어나야 합니다. 전주와 전북은 그런 자원과 역량이 충분합니다. 전북이 우리나라 문화산업화를 이끄는 저작권 중심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는 문화산업화의 중심 역할이 되겠지요. 대단한 예산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문화산업의 시대에 전북의 경우, 자원은 많으나 산업화의 길은 찾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어왔습니다. "지금은 OSMU(one source multi uses) 시대입니다. OSMU를 순수한 우리말로 하면 '우려먹기'예요. 나쁜 뜻이 아닙니다. 좋은 원작으로 2차 3차 창작물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성공이 뮤지컬 '맘마미아'잖아요. 하나의 좋은 원작은 뮤지컬 발레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창작물을 만들어내고 가치를 높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저작권입니다. 저작권법의 목적은 저작권자를 보호하는 것이지만 단순히 창작자를 보호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좀 더 분명하게는 '창작자를 보호하고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 및 관련산업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이 목적입니다. 저작권법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는 문화발전, 문화산업의 발전에 있습니다. 전북이 문화산업에 진정한 눈을 뜨게 되면 가장 가능성 있는 지역이 될 수 있습니다."

  • 기획
  • 김은정
  • 2012.12.11 23:02

김을생 명인은 - 전통목기 가업 대물림…옻칠분야 1인자

1935년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부로부터 목기를 가업으로 해 왔다. 1951년 전라목기기술학교에 들어가 자연산 옻칠법과 목기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전주공고 졸업 후 군에 입대하면서 목기와 떨어졌다. 그의 아버지도 플래스틱 그릇과 스텐리스 그릇에 밀려 식탁에서 사라지는 목기업보다는 농사에 충실하려 했다. 전통목기를 가업으로 이어가겠다고 나선 것은 1969년 전역 후 일이다. 목기는 우리의 전통이고, 대대로 전승해 나가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15년간의 타향살이가 가업으로 전승돼 온 목기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것이다. 불교미술대전 장려상, 대한민국공예전 장려상, 전북민예품공예전 금상 등 다양한 수상 경력을 쌓으며 발우와 제기 등 목기 전통을 이어왔다. 옻칠 분야의 최고 명인인 김을생 선생은 1995년 공예인의 꽃인 '무형문화재 제13호(옻칠장)'로 지정됐다. 일찌감치 외아들 김연수에게 목기 가업을 전수했다. 7세 때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배우고, 중학교 때 한학자 이상필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평소 논어와 맹자를 수백독하며 내면을 수련해 온 그는 현인들의 명언을 정리한 징심록(澄心錄)을 펴냈다.

  • 기획
  • 김재호
  • 2012.12.04 23:02

무형문화재 13호 옻칠장 김을생 명인 "남원에 목기박물관 만들어 관광자원 활용해야"

지난해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이 유네스코 각국 대사 등을 대상으로 사찰음식체험행사를 개최했다. 그리고 행사에 사용된 발우(鉢盂바리)를 모두 선물했는데, 여기에 사용된 발우 110세트는 남원시 산내면에 있는 금호공예 김을생 명인이 납품했다.남원은 목기의 고장이다. 특히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는 한국 목기의 발생지라고 할 만큼 유명하다. 실상사라는 큰 절이 목기를 필요로 했고, 목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다양한 수종의 나무와 옻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실에 진상됐고, 당시 궁궐 목기는 모두 남원산이었다. 남원목기는 지금도 전통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몇몇 장인들 덕분이다. 남원에는 목기와 옻칠 부문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인이 5명이나 된다. 그 중 옻칠장인 김을생 명인(78)을 지난 24일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금호공예에서 만났다. -남원지역에서 목기업이 성하게 된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는지요."목기가 발달한 것은 간단히 말해서 목기 수요가 많은 실상사가 있어서 팔기가 좋았다고 봐야지. 실상사는 한 때 스님이 3,000여명에 달했다고 해. 당연히 제기, 바리때, 소반 등 목기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었어. 또 지리산이라는 큰 산이 있으니까 나무와 옻을 구하기 좋았어. -조부와 부친께서 가업으로 하던 목기 사업을 3대 째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목기업에 종사하지 않습니까."2남2녀 중 내가 장남인데, 동생은 해방 후 전주에 나가서 살고 있어. 나는 선대로부터 목기 일을 해 온데다 전라목기기술중학교에서 목기 만드는 일을 배웠기 때문에 목기에 눈을 떴지만, 당시는 목기업이 너무 어려워 가업 잇기가 힘들었어. 나도 처음엔 목기를 쳐다보지 않았어. 상품 가치가 없었거든. 그래서 전주공고에 진학하고, 군대도 공병소위로 임관해 1969년 공병대위로 예편했어.전라목기기술중학교는 전통 목기를 전승할 목적으로 1951년에 세워졌는데 1968년까지 18회 동안 480여명이 졸업했다. 김을생 명인은 1회 졸업생이다. 목기기술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중학교 정규 교육과정도 병행했기 때문에 졸업 후 전주공고에 진학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목기를 만들게 됐습니까."전방 GOP에서 군대 생활하는데 적막강산이더라고. 그래서 틈틈이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일본인들이 전통 가업을 중시하고, 가업을 대대로 이어간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러면서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게 사는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지. 그래 자연스럽게 고향의 목기를 생각했고, 전역 후 전통 목기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거야. 학교에서 목기 기술을 배웠지만 그 때는 확고한 신념이 없었지. -군대 제대하고 곧바로 목기업에 뛰어들었나요?"1969년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목기를 만들겠다고 나섰어. 하지만 농사 짓던 부모님 반대가 아주 심했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아시니까. 나는 선조들이 준 전통을 묻어두기 보다는 잘 살려야겠다는 신념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결국 목기를 시작했지. 처음 '원백일리 부업단지'라는 상호로 시작했는데, 그 후 금호공예라고 바꿨어. 당시 시골사람들은 밥먹고 살기가 힘들었잖아. 우리 공장이 일자리를 주었고, 동네사람들은 공장에서 돈 벌어 아이들을 가르쳤어. -힘든 상황이었는데, 처음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당시에 목기공장은 없었고, 몇몇 집에서 농사지으며 부업으로 조금씩 만들었어. 전업으로 할 만큼 소득이 안되니까. 그 때문에 내가 공장을 세워 전통 가업을 잇겠다고 하자 주위에서 말리는 거야. 부모님이 크게 말렸어. 그 때 1천만 원은 컸어.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생각처럼 안되더라고. 논도 (저당)잡히고 해서 나중엔 재산이 다 넘어갈 지경이었어. 한때 '부모님이 말릴 때 들을 걸'하는 후회도 했지."-왜 그렇게 어렵게 된 겁니까."그때는 보부상이 있었어. 열심히 만들어서 그들에게 물건을 주었더니 돈을 떼어먹기 일쑤야. 원금의 절반도 안줘. 1년에 보리벼 나올 때 두 번에 걸쳐 주거나 아예 떼어 먹어."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하셨습니까."공장이니까 사람을 써야 물건을 만들 수 있어. 그런데 목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하고, 초갈이하고, 건조하고, 재갈이 하고, 사포질하고, 몇 차례에 걸쳐 옻칠을 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돼. 인건비와 재료비 등 돈이 많이 든다고. 그런데 보부상들이 제품 대금을 떼어먹기 일쑤다보니, 아버님 재산까지 파산 직전이 되고 말았어. 뒤돌아보면 공장 만들고 4~5년은 참 힘들었다고. 애들은 커가고, 부모님 뵐 면목도 없고. 욕심 없이 바르고 가치 있게 살고자 했지만 갈수록 일이 풀리지 않아 참 힘들었어. 그러던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일곱 식구가 냉방에서 자고 있더라고. 그걸 보고 악심이 생겼지. 그래 보따리에 물건 싸가지고 내가 직접 팔러 다니기로 했지.-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를 찾아 갔군요."당시 제기 1벌에 3000원을 남기고 보부상에 넘겼어. 15벌 1짐이 3만 6000원이었지. 그런데 내가 어떤 주문이 있어서 구례에 갔을 때 그곳 사람에게 가격을 물었더니, 제기 1벌 가격이 20,000원 가까이 되더라고. 큰돈이야. 중간상을 통하지 않고 소비자에게 직접 팔아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지. 제기는 1벌이 37개로 구성된다. 또 15벌이 1짐이다. 그런데 중간상들은 1짐을 생산자로부터 3만 6000원에 받아 소비자에 판매하면서 엄청난 이문을 남긴 셈이다. 비록 당시 운송 수단이 좋지 않아 1짐(제기 555개)은 커녕 한 벌도 배달하기가 힘든 여건이었지만, 생산자 입장에서는 중간상을 거치는 게 큰 손해였다. 김을생 명인은 목기업을 시작하면서 제기와 함께 쟁반, 소반도 만들었다. 대중적인 제품을 만들어야 자금을 회전하며 공장을 가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기나 소반은 부피가 커 배달이 힘들었지만, 발우는 부피가 작고 돈도 됐다. 게다가 사찰(스님)은 보부상처럼 떼일 위험이 없었다. 김 명인의 판단은 적중했다. -그래서 발우를 만들었습니까."제기는 많이 만들기가 어려워. 그래 바리때를 주로 만들기로 했지. 바리때를 만들어서 스님들을 찾아갔어. 그런데 스님들이 바리때를 이리 저리 살펴보고선 '지금 이 세상에 옻이 어디에 있냐. 밥그릇인데 진짜 옻으로 만들어야지 화학재료를 쓰면 못써'하며 바리때 품질을 믿지 못하는 거야."금호공예에서 발우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75년 무렵이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 옻은 귀했고 화학도료를 사용한 물건이 많았다. 스님들 공양에 사용하는 발우는 위생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스님들의 신중한 반응은 당연했다. -어떻게 설득했습니까."'돈 안 받을 테니까 일단 써 보시라' 하고 바리때를 놓고 나왔지. 4~6개월 후에 믿음이 가면 대금을 치르라고. 몇 개월 후 물건을 준 스님을 찾아갔더니 좋은 바리때라며 사주더라고. 진짜 옻칠을 한 발우는 처음에는 새까만데, 한참 쓰다보면 붉어지면서 반짝 반짝 광택이 나거든. 스님들이 식사하면서 어느 곳의 누가 만든 바리때가 좋더라는 말이 있으면 그 정보가 빠르게 퍼지지. 그렇게 시작된 바리때 사업은 적중했어. 얼마 후부터 내가 만든 바리때가 전국 사찰에 들어가게 됐지. 그렇게 바리때를 짊어지고 전국 사찰을 찾아다니는 보부상을 5~6년 했는데, 처음에는 자동차가 없어 고생도 많이 했어." 전국에 사찰이 3,000여개 된다. 절에서는 발우 외에도 불전이나 생활에서 사용하는 목기와 소반이 많다. 전통의 가치를 녹여 만든 그의 제품은 스님들의 마음을 끌었고,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그러면서 느낀 것도 많았을 것 같아요."사람은 어려움을 겪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 어려움을 어떻게 대처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거든.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어려움을 너무 모르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까워." -평생 목기를 만들어 왔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좌우명은?"신용이 최고야. 나는 평생 신용을 지켜왔지. 전통 가치를 이어가려는 집안의 물건과 얼렁뚱땅 만들어 돈을 벌려는 집안의 물건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어. 나무는 잘 말리지 않으면 나중에 비틀어져. 예를 들어 바리때는 4개 이상의 그릇 중 가장 큰 그릇 안에 작은 그릇들을 차례로 포개어 하나처럼 만드는데, 포개어진 그릇끼리 부딪치지 않고 빙글빙글 잘 돌아야 해. 근데 돈이 급하다고 대충 만들면 돌지 않아. 불량품이야. 나는 처음부터 품질과 신용을 중시했어. 처음에는 어려워도 한번 신용을 얻으면 만사가 풀리게 돼 있어. -발우는 수작업으로 만듭니까? "가끔 스님들이 은사로부터 받은 금강산 바리때가 낡았다며 옻칠을 해달려고 가져오는데, 살펴보니까 세 사람이 수작업 한 것 같아. 추정해 보면, 원목을 긴 줄로 한차례 감은 뒤 양편에서 두 사람이 당기는 작업을 서로 반복하고, 기술자가 작업 칼을 이용해 빙글 빙글 도는 원목을 깎았어. 지금은 원동기를 이용해서 깎아. -목기 제품은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됩니까. "제기, 바리때, 소반, 쟁반 등 만들 물건을 정한 후 그에 맞는 목재를 구해. 그리고 제품 크기에 맞게 절단하지. 바리때용으로 잘랐다면 먼저 초갈이를 하고, 음지에서 1년 정도 건조 과정을 거쳐. 1년 후 초갈이한 것 중에서 갈라지거나 뒤틀리지 않은 좋은 백기만 골라 재갈이를 해. -목기 종류별로 쓰는 나무가 다릅니까."발우는 은행나무 은사시나무, 제기는 물푸레나무 자작나무 오리목나무, 소반은 은행나무를 쓰지"-제기, 발우 모두 옻칠을 하는데, 옻은 어떻게 구합니까."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경남 마천은 우리나라 3대 옻나무 주산지 중 하나야. 산내에서 목기가 발달한 것도 나무와 옻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야. 옻나무에서 칠을 내려면 세 사람이 필요해. 나무에 흠집내고, 칠을 긁어내고, 그릇에 담는 사람이 필요하지. 옻 내는 사람은 꼭 문둥병자처럼 피부가 좋지 않아. 그만큼 작업이 힘들기 때문에 누가 일하려고 하지 않아.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옻 50그램이 12만원씩 해. 게다가 인건비도 비싸서 이윤은 많지 않아."-옻칠하는 작업장 조건은."화학칠은 햇빛만 좋으면 잘 말라. 그러나 천연 옻은 날씨가 좋다고 마르는 것이 아니야. 조건이 맞아야 돼. 습도 85%, 온도 섭씨 30도 조건이 모두 맞아야 옻이 말라붙는단 말이야. 그래서 별도의 칠장을 만들어서 습도와 온도를 인위적으로 맞추는데, 그런 상태면 하루 만에 말라. 단, 여름에는 밖에서도 잘 말라."-옻칠은 1,000년을 간다고 들었습니다. 특성은."옻은 나무에 대한 침투력이 강해. 화학 칠은 석유를 묻히면 닦이지만, 옻칠은 절대 벗겨지지 않아. 그리고 방수가 잘되기 때문에 나무가 절대 썩지 않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보물선이 썩지 않은 것도 옻칠 때문이라고. 또 살균 살충효과가 있고, 처음 새까맣던 색이 갈수록 붉은 빛을 띠면서 윤기가 나는 것도 옻칠의 장점이지."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작업에 남다른 열정을 쏟는 이유가 있습니까."내가 이 인터뷰를 하는 이유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전통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전통의 가치를 계승 발전시켰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지. 목기든 뭐든 전통으로 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그런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게 문제야. 예를 들어 남원에 목기박물관을 만들면 좋을 텐데 관심이 없어. 남원목기와 칠을 전승하는 전국 유일한 시설이 들어서면, 목기 만드는 체험도 하는 등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고, 일자리도 늘어나니 좋지. 남원목기의 1,500년 역사를 (스토리텔링해서)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야 돼. 대한민국 목기의 전통은 남원 목기야. 이곳에 목기박물관을 세우면 외국인들도 많이 방문하고 제품도 사갈 거야."-발우를 만들고,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스님들과 인연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은사 스님들은 제자에게 세 가지를 물려주는데 가사와 장삼, 그리고 바리때라고 해. 스님이라면 반드시 이 세 가지는 지니고 있는 거지. 그래서 일을 하면서 항상 스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어. 일타스님, 서암스님 등은 이곳을 지나면서 꼭 들러주시고, 이런 저런 조언도 해 주시고, 바리때도 팔아주었지. -금호공예 전시장 앞 화강석에 '복 짓는 법'을 새겼던데요. "사람들은 복을 받고 싶어하는데, 복을 받기 전에 복을 지어야 해. 복을 지으려면 씨를 뿌려야지. 복전(福田)의 첫째는 남에게 베푸는 거야. 보시(普施)야. 내가 도움을 준 그 사람이 잘 되면 그 복이 내게 돌아오게 돼 있어. 둘째, 경전(敬田)이야. 어른한테 공경할 줄 알아야 해. 셋째, 은전(恩田)이야. 부모 은혜를 잘 알라는 것이지. 그리고 비전(悲田남을 불쌍히 여김)과 시전(施田가난한 자를 돕고 병자를 구제)도 있어. 끝으로 낙전(樂田이)은 극락세계를 안다는 뜻이야. 우리가 좋은 마음을 갖고 좋은 일을 하면 극락세계로 간다는 마음을 가져야 복을 짓고 세상살이가 즐거운 것이야. 그 중 가난한 자와 병자를 구제하는 것이 복을 짓는 으뜸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칠시(七施)는요."일곱가지 보시야. 부족한 사람 돕고, 항상 웃는 눈빛과 얼굴, 상냥한 말씨로 응대하면 복 받는 거지. -동네 입구에 제심서원(濟心書院)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던데, 직접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1980년에 만들었어. 사람이 자기 마음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야. 이 일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문, 한학을 가르쳤어. 지금 우리가 한문, 한학을 하지 않으면 안돼. 우리말 어원의 80%가 한자에서 나왔다고. 그걸 배우지 않으면 조상 근원도 몰라. 읽을 수도 없고 어떤 뜻인지도 모르잖아. 공자는 파당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했어. 학자들이 한글과 한문 파당을 만들고, 한문을 못하게 하는 것은 큰 문제야.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다운 가치를 가져라, 전통을 이어가면서 선조 혼을 잊지 말라고 말해 왔어. 한 때 세계를 호령한 칭기즈칸의 나라를 봐라. 전통이 보잘 것 없잖아. 우리는 좋은 전통을 많이 갖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전통을 세워야 일등국민이 돼. 그러기 위해서는 국방이 중요해. 나라는 한 번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고 말아. 그런 가치, 근본을 잊어선 안돼.

  • 기획
  • 김재호
  • 2012.12.04 23:02

정남식 병원장은 - DJ 주치의 12년…국내'VIP 전담 의사'로 명성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남식 심장내과 교수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인공호흡기를 뗐다.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오열했고, 김 대통령의 3남은 '아버지'를 부르짖었다. 한국정치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정 병원장은 1998년 2월 김 대통령의 심장 주치의로 선정된 후 12년 동안 건강을 돌봤다. 가족이나 측근보다 더 자주 DJ의 얼굴을 볼 기회를 가졌다. 서거 당시에는 37일 동안 병원에서 숙식을 함께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였던 DJ였지만 이를 지켜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린 사람은 정 병원장이었다. 정 병원장은 DJ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가르침도 받았다. 하지만 건강에 관해서는 의사를 절대 신임하고 따라준 고마운 환자였다. DJ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했다. 고관절이 불편해 걷기를 잘 못해 수영을 권했으나 끝내 하지 못했다. 자신이 수영장에 가면 경호원이 힘들고 손님들도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찬가지로 어디를 갈 때 예우 차원에서 신호등을 조작하는 것도 싫어했다.정 병원장은 DJ 말고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김원기 국회의장, 정대철, 박지원, 개그맨 이용식 씨 등 유명인사의 진료를 도맡았다.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우리나라 최고의 심장전문가다. 정 병원장은 1952년 전주에서 장수군수를 지낸 정성봉씨의 8남1녀 중 6남으로 태어났다. 전주 중앙초등학교와 북중, 전주고를 거쳐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다. 고려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학계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1999년부터 '심장과 혈관'편집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심초음파학회 이사장, 한국항공우주의학협회 회장, 대한내과학회 내과분과 고시위원장, 연세의대 심혈관연구소장, 연세대 의과대학장, 의학전문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현재 연세의료원 발전기금 기획위원과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감사, 연세대 총동문회 운영부회장, 보건복지부 국민고혈압사업단 부단장, 중앙약사심의위원, 대한심장학회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전주 북중 시절에는 전국연식정구선수권대회에 나가 준우승을 하는 등 스포츠에 만능이며 서예도 수준급이다. 수많은 논문과 함께 '최고의 고혈압 식사가이드''심장병 완치설명서'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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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27 23:02

전주 출신 정남식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장 "환자 진료할 때 항상 내 가족이라 생각"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우리나라 서양식 병원의 효시다. 1885년 광혜원 창립 이래 127년 동안 의료계의 가장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며 민족적 고난과 호흡을 같이했다. 더불어 기독교 정신을 전파하면서 '임상하면 세브란스병원'이라는 자긍심으로 가득하다. 의료진 등 직원수만 6000명이 넘고 외래환자 9000여 명 등 하루 3만5000여 명이 북적인다. 거대한 함정과도 같은 이 병원을 이끄는 정남식 병원장(60)은 우리나라 최고의 심장전문가로 꼽히는 인물.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 등 'VIP 전담의사'로 이름이 높다. 그런 만큼 그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3개월 전부터 인터뷰를 요청, 가까스로 시간을 잡았다. 병원장실에서 가진 1시간 30분의 인터뷰 동안 4-5차례 긴급한 용무로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인터뷰가 중단됐다 이어지곤 했다.-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지난 8월 병원장 취임 후 벌써 4개월이 되어 갑니다. 세브란스 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서, 한국 의료계의 선구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27년 동안 정상의 교육기관이자 국민을 치료하는 의료기관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은 구성원들의 주인의식에서 나왔다고 생각해요. 주인이 갖는 생각과 주인 아닌 사람이 갖는 생각은 백이면 백 가지가 다르거든요. 생각이 다르니 행동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니 미래가 달라지는 거죠. 이것이 곧 세브란스 병원의 자부심입니다."- 세브란스병원의 수장으로서, 환자들에 대해 남 다른 진료철학을 갖고 계시는 것으로 아는데요?"환자들이 왜 세브란스에 올까를 생각해 보면 분명해져요. 환자들은 어떤 절실함을 가지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병원을 찾는거죠. 환자들이 갖는 그 마음을 저희 병원이 얼마나 알아주고 있는지, 어떻게 환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것이냐가 과제에요. 내 가족처럼, 환자가 나의 아버지 어머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문진, 검사, 치료 등 전 과정에서 환자를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최선의 치료가 나온다고 생각해요.'내 몸을 맡길 수 있는 병원하면 세브란스'를 떠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병원장을 맡으시면서 역점을 두고 계시는 사업은?"새로운 의료기술과 신약을 개발하는 연구 중심 병원의 역할, 난치병을 치료하는 4차 병원으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어요. 4차 병원으로 도약하기 위한 새로운 터닝포인트는 내년 초 문을 여는 에비슨의생명연구센터에서부터 시작될 겁니다. 또 2014년 문을 여는 암병원은 환자 중심의 다학제 진료시스템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통합진료를 선보일 계획이에요. 난치병 치료모델을 개발하고 새로운 항암제를 개발하는 데 집중해, 암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겁니다."- 원장님은 의료계에서 'VIP 전담의사'라 불릴 만큼 정계 재계 문화계 거물인사들의 진료를 도맡아온 것으로 유명합니다."나이가 들게 되면 대부분 심혈관에 문제가 생기다 보니, 심혈관 전문의인 제가 유명 환자들을 많이 보게 된 것 같아요."- 특히 원장님은 김대중(DJ) 대통령 심장 주치의를 오랫동안 맡으셨습니다. 서거 당시에도 함께하며 돌보셨는데 힘들지 않았습니까?"김 대통령께서는 100점짜리 환자였어요. 주치의를 100% 신뢰하고 지시사항을 철저히 따랐거든요. 80대 이상의 고령환자가 심장투석을 받을 경우 5년간 생존율이 20%가 안 되는데 김 대통령께서는 6년 반 동안 투석을 받았어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서거가 있은 후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어요. 휠체어를 탄 채 뙤약볕이 내려쬐는 서울역광장 분향소에서 2-3시간 동안 차례를 기다려 조문을 하고 연설을 한 후부터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오랫동안 DJ를 돌보면서 에피소드가 많았을 텐데요?"김 대통령께서는 의료진에게 한 번도 반말을 하지 않았어요. 겸손과 친절이 몸에 밴 환자였죠. 항상 '감사합니다, 수고하십니다'는 말을 잊지 않았거든요. 또 김 대통령께서는 책을 정말 좋아하셨어요. 14-15시간 걸리는 비행기 안에서도 의자를 뒤로 젖히는 법이 없이 꼿꼿하게 앉아 책을 보시거나 글을 쓰셨어요. 책 보는 습관 때문에 엉덩이에 물집이 많이 생기셨죠. 또 폭 넓고 깊은 독서와 해박한 지식, 열려있는 사고에 놀란 적이 많았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육군교도소에서 사형선고 받기 전 타협하지 않은 이유를 들었을 때에요. 김 대통령께서는'사람이 물에 빠져서도 죽고 아파서도 죽는데, 내가 불의와 타협해서 목숨을 연장하는 것은 두 번 죽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우중 회장 등 다른 분들 얘기도 꽤 있을 텐데요?"김 회장님은 2005년 수술을 한 이후 요즘도 한두 달에 한 번씩 병원에 직접 나오셔서 진료 받고 있어요. 얘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지만 예전 대우 얘기는 잘 안 꺼내세요. 지금도 항상 세계 경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많은 구상을 하는 것을 보면서 '영원한 기업인'이란 느낌을 받았어요. DJ 대통령께서도 김 회장을 굉장히 훌륭한 기업인이라고 높이 평가했어요."- 감수해야 할 어려움도 많을 것 같은데요?"주말여행 중 병원으로 급히 불려 들어간 경우가 수차례고, 한밤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응급 전화' 벨 소리에 깨는 일이 부지기수였어요. 그것은 일반 환자도 마찬가지에요. 심장병의 특성상 그런 것이죠." - 심장질환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심장은 몸의 엔진이에요. 모든 에너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기관이죠. 중년을 지나면 정기적으로 심장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많이 웃고 원만하게 사는 게 심장에 이롭고요. 심장질환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식생활 개선이 중요해요. 동맥경화를 유발하는 협심증과 심근경색이 특히 젊은 층이나 중년층에서 많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분명 식습관에 문제가 있는 거죠. 또한 여가를 제대로 즐겨야 해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은 여가활동 등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지만 풀 곳이 마땅치 않아요. 정부와 기업체가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회체육시설을 많이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해결방법입니다." - 그러면 원장님은 평소 건강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 궁급합니다. "식습관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육류를 적게 먹고 채소를 많이 먹는 식으로, 가능하면 선조들이 먹던 방식대로 소박하게 먹으려고 해요. 또 게을러서 꾸준히 못하지만 운동하려고 노력해요. 운동은 아령팔굽혀펴기 등 근력운동과 빨리 걷기등산 등 심폐기능을 좋게 하는 운동을 1주일에 3번 이상 합니다." - 전국적으로 의대 열풍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의학교육에 몸담으셨는데 이에 대해?"이것은 사회적 현상으로 봐야 할 것 같아요. 저희가 학교 다닐 때 최고학과는 공대 화공학과, 전자공학과였거든요. 요즘 좋은 인재들이 의대로 들어오지만 의사는 그 목적이 직업인으로, 생활인으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의사는 성실하게 봉사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생명을 보장할 수 있는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거지, 천재가 필요한 게 아녜요. 정말 우리가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국가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이공계통의 인재와 이걸 이끌어 갈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해요. 이런 산업이 뒷받침되지 않는 나라는 결코 오래 존치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것은 국가정책이 먼저 바뀌어야 해요.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의대 열풍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의학전문대학원 폐지에 앞장섰는데 이유는 뭡니까?"국가가 정책적으로 의전원을 만들어 훌륭한 의학자를 키우겠다는 게 근간이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이공계 학문이 의전원 들어가는 하나의 코스로 활용되는 면이 너무 많았어요. 훌륭한 의학자가 만들어지는 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그 이후에 자기 연구분야를 평생 연구해 가는 트랙이 중요한 거다, 그러려면 국가에서 먼 장래를 보고 기간산업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거죠. 영국과 독일 일본 모두 6년제다, 그런데 가장 고비용 저효과인 미국이 8년제다. 미국은 의생명과학이 발전한 나라지만 전 세계에서 두뇌를 수입하는 나라다. 결국 연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지 의전원을 만들어서 6년을 8년으로 늘렸다고 해서 의생명과학이 발전하는 것 아니다. 그런 논리였죠."- 의학을 전공하게 된 동기는 뭐였습니까?"저는 사실 인문계통이 더 맞는 분위기에서 자랐어요. 그런데 그 당시 우리 환경이 너무 열악했잖아요. 첫 번째는 세계로 나가서 일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이 좋겠다고 생각을 했죠. 두 번째는 전주 예수병원을 가면 분위기가 매우 좋았어요. 흰 가운 입고 외국에서 온 의사들이 환자를 고쳐주는 분위기가 꿈을 갖게 해줬어요. 저도 의사가 돼서, 외국에 나가 선교사 의사들처럼 환자를 고쳐주면서 살 수 있는 직업이 좋겠다, 그게 맞아 떨어진 거죠."- 그러면 그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습니까?"처음에 교회에 간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간 게 아니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선교사가 하는 크리스천 바이블 세션에 들어갔어요."- 고등학교 때 얘기인가요?"그래요. 영어를 배우기 위한 욕심에서 교회를 다녔는데 (당시) 마음속에 하나님을 담고 그러지는 못했어요. 그게 교회와의 첫 인연이죠. 제가 해외에 나가기 위해서는 영어를 잘 해야겠다, 직업은 의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꿈이었는데 대학 졸업하면서 확 바뀌었죠."- 존경하는 의학자는?"저는 우리 세브란스를 일으킨 에비슨(O.R.A vison 1860-1956)박사를 존경합니다. 사람들이 에비슨 박사를 잘 모를 거예요. 슈바이처보다 훨씬 훌륭한 분이에요. 슈바이처는 독일 사람으로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환자를 치료했지만 의사를 키우진 않았죠. 당시 아프리카 가는 거나 한국에 오는 거나 똑 같아요. 그런데 에비슨은 오셔서 왕도 봤고(진료) 백정도 봤어요. 백정이라는 제도를 없애도록 건의문도 올렸고요. 또 백정의 아들을 1대 의사로 만든 게 에비슨에요. 그래서 하류 클래스 사람들을 치료해 주면서 그 사람들을 교육시켜 의사를 만들고, 의사를 양성하는 의학교를 처음 만들었죠. 37년을 봉사하고 가셨어요. 그 다음에 연희전문학교를 언더우드가 설립하셨잖아요. 이 분은 몸이 아파서 2년 있다가 도로 돌아가셨어요. 그 이후로 17년을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양쪽 교장을 하셨어요."- 세브란스 병원을 짓는데 돈을 기탁받은 것도 그 분이 아닌가요?"그게 키워드에요. 그 분이 1893년에 오셔서 근무하다가 1900년도에 세브란스를 만드셨어요. 미국의 카네기 홀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서 에비슨이 강연을 했어요. 그 때 자선사업가인 세브란스(L.H. Severance 1838-1913)가 듣고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4만5000달러를 기부했어요. 나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인데 한국에 현대식 병원이 필요하다며 두 가지 말을 했어요. 배려와 일치화합(Comity and Unity)이에요. 배려가 뭐에요? 남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는 거예요. 남을 존중하지 않으면 배려할 수 없어요. 또 남을 배려하고 존중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이 분은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의 교수이자 시장의 주치의로 잘 나가는 사람이었죠. 또 만삭의 부인과 아이들이 있어서 여행하다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심장의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1970년대 말 전공하게 됐는데요. 당시 심장의학은 개업도 할 수 없고, 그 당시 심장병 환자는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선천성 심장병이나 심장판막증 등 다 가난한 사람이 생기는 거니까요. 외국에 나가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는 거고. 그런데 잘 진단하고 치료하면 드라마틱하게 좋아지는 환자를 많이 봤어요. 이건 정말 너무 보람 있는 거예요. 지금은 병 패턴이 바뀌었어요. 못살 때 생기는 심장병은 거의 다 없어지고 이제는 잘 살아서 생기는 심장병이 생겼어요."- 끝으로 고향의 자라나는 후학들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말씀을 부탁드립니다."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청소년기의 꿈이 중요하다.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그 꿈을 위해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제가 그동안 여러 분을 만났지만 정말 남다른 노력을 했더라고요. DJ, 김우중씨 등, 다 꿈을 갖고 있었어요. 꿈이 중요한 건데 하다 보니까 꿈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꿈만을 위해서 전심을 다한 게 아니고. 꿈이라는 게 비전인데, 허황된 꿈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 꿈을 꿀 때 혼자 꾸는 것보다 부모 선배 친구와의 대화가 중요해요. 그리고 요즘 젊은 학도들은 IQ(지능지수)는 높은데 EQ(감성지수) NQ(공존지수) WQ(지혜지수)는 부족한 것 같아요.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나 고전읽기 등 인문학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 기획
  • 조상진
  • 2012.11.27 23:02

조현종 셜리천 부부는- 온라인 공간서 고향 선·후배로 만나'백년가약'

모디스트 셜리천(modiste shirly chun)씨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더 공부하기 위해 파리까지 날아갔다. 그러나 우연히 접한 모자 만들기에 급속히 빠져들었다. 결국 불문학의 길을 포기하고 모자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했다. 셜리(shirly)라는 이름은 모자전문학교에서 공부할 때 영어 이름 하나 있는 것이 좋겠다 싶어 지었다. 셜리천이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국내 유수의 모자기업 디자인실장으로 스카우트 된 그는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멋있고 아름답고 효용성 높은 모자를 디자인해 시장에 내놓았지만 회사도, 고객도 외면했다.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문 패션모자 디자이너가 만든 고급 모자'라는 그의 전략은 결국 맞아 떨어졌다. 조현종-셜리천 부부는 전주가 고향이다. (주)샤뽀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조현종 대표는 전북대 심리학과, 디자인 실장을 맡고 있는 셜리천 디자이너는 건국대 불문학과를 나왔다. 각자의 길을 가던 그들이 만난 건 요즘처럼 인터넷이 활성화하기 전 유행하던 유니텔통신 회원 활동이 계기가 됐다. 조씨가 밀란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패러디한 글을 써 유니텔통신에 올렸는데, 이 글을 읽은 천씨가 "파리 유학시절 처음 원문으로 읽었던 책이다. 이 책을 알고 있는 분이 있어서 반가웠다"라며 답글을 올렸다. 그 후 서울 강남에서 자리가 마련된 점심 번개 때 인사를 나누었고, 사이좋은 고향 선후배(천씨가 한 살 위)로 시작하여 1년 후인 1998년 결혼했다. 조 대표는 전주에 루이엘햇컬처센터(luielle hat culture center)를 설립한 후 매주 경향을 오간다. 그는 전주에 진출한 후 두 가지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첫째 지역신문을 챙겨 읽고, 둘째 서울로 향할 때 자동차 주유는 꼭 전주에서 한다는 것.셜리천에게 모자를 고를 때 가장 신경써야 할 부분에 대해 묻자 "얼굴형도 중요하지만 헤어스타일이 더 중요합니다. 짧은 커트머리의 경우 볼 쪽으로 머리카락이 보이도록 쓰고, 긴 생머리는 그 자체로 여성성이 강하게 드러나므로 장식이 없는 깔끔한 모자로 연출하면 긴 생머리와 멋지게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모자가 두루 잘 어울리는 가장 이상적인 헤어스타일은 어깨선을 넘지 않는 길이의 웨이브 섞인 단발머리예요. 어떤 스타일이든 소화가 가능해 모자를 즐겨쓰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헤어스타일입니다. 연말에 행사나 실내용 모자를 쓸 때는 비즈와 크리스탈 등이 섞여 있는 모자를 쓰면 더욱 생기있어 보입니다. 연말 파티복에도 손색없는 연출이 가능하죠"

  • 기획
  • 구대식
  • 2012.11.13 23:02

(주)샤뽀 조현종 ·셜리천 부부 "전주모자박물관, 패션문화콘텐츠 메카로 만들 터"

패션 소품인 모자는 참 친근한 물건이다. 비가 올 때 머리를 받쳐주니 우산과 같고, 따가운 햇빛을 차단해 줄 때는 양산 같은 존재다. 모자를 쓴 사람은 멋과 품위가 있어 보이고, 더하여 자존감까지 풍겨나니 단순한 장식용품 이상의 물건, 그러니까 모자는 패션 소품이 아니라 패션의 완결자인 셈이다.동서양을 막론하고 모자는 소중한 위치에 있었다. 영국 여왕은 지금도 멋지고 우아해 보이는 패션 모자를 쓰고 나타나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왕과 문무백관들이 금관, 제관 등 모자를 썼고, 조선시대 양반들은 말총갓을 쓰고 외출했다. 서민들도 패랭이를 쓰는 등 우리 조상들은 계절과 장소, 신분, 남녀 등에 따라 다양한 모자를 썼다. 조선 말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의 기록에도 모자에 대한 언급이 있다.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르 바라는 "조선은 모자 왕국이다. 너무도 다양하고 여러 용도를 가진 조선의 모자 패션은 파리인들도 꼭 알아둘 필요가 있다"며 관심을 보였다. 모자 전문기업 (주)샤뽀가 2년 전 전주 한옥마을에 세운 모자박물관 루이엘햇컬처센터(luielle hat culture center)는 인류의 모자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뜻 깊은 문화공간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아시아에서 유일한 모자박물관이라니, 더욱 소중해 보인다.루이엘햇컬쳐센터를 설립, 고향의 문화공간을 살찌우고 있는 모자 전문 디자이너 천순임(48셜리천, shirly chun)-조현종 부부를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루이엘 삼청점에서 만나 모자와 문화, 그리고 한옥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날 매장에서는 일본에서 온 여성 바이어 2명이 상담하고 있었다.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날씨와 모자는 어떤 관련성이 있습니까."겨울이 되면 건강을 위해서 모자를 많이 씁니다. 모자를 쓰면 몸의 체온이 36도 가량 올라간다는 걸 아시죠? 그런데 아무 모자나 아무렇게 쓰면 계절을 선도하는 멋쟁이가 되지 못합니다. 이왕 쓰시는 거 멋지게 연출해 보세요. 보온성과 패션성을 높일 수 있는 겨울철 최고의 아이템입니다. 어두운 코트에 모자를 산뜻하게 매치해 주신다면 패션리더로서 자리잡을 수 있죠. 모자는 패션의 포인트 아이템으로, 특히 겨울에 활용하기 적합합니다."-모자 디자이너가 되기 전에도 모자를 애용하는 편이었나요."자주 애용하지 않았어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관한 영화 '파비안느'를 본 뒤 베레를 좋아하게 돼 파리에서는 줄곧 베레만 썼죠. 제 디자인 중 기본 베레 이름이 파비안느입니다."-불문학을 더 배우기 위해 파리 소르본느대학에 들어갔는데, 문학적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불문학과를 졸업하고 3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다가 1989년 불문학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향했습니다. 어릴적부터 문학책이나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그 영향으로 불문학 전공을 결정했던 것 같습니다."-외국에서 공부하던 중 일생의 진로를 바꾸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서 모자를 접하고, 모자의 어떤 부분 때문에 매력을 느껴 한번 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나요."불문학을 공부하면서 한 번에 30권 이상의 원서를 받아 읽어내야 했습니다. 불문학은 퍼내도 퍼내도 또 퍼내야 하는 우물 같았죠. 아무리 노력해도 그곳 학생들을 따라가기에 벅차 답답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재봉틀을 배우게 됐는데, 불문학과는 달리 바로 눈앞에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는 작업이어서 희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모자학교를 알게 됐고, 나아가 청강을 하게 됐고요. 불문학과을 공부하면서 모자를 병행했는데, 모자를 알면 알수록 이건 내 길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자를 안지 8개월 만에 진로를 완전히 바꿨습니다." -처음 모자 전문 디자인과 제작 기술을 배운 CMT는 어떤 곳인가요."프랑스 유일의 모자전문학교였습니다."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CMT를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내의 모자 업체들도 관심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그 당시는 지금처럼 유학이나 연수 기회가 흔치 않았고, 한국에서 모자에 대한 인식도 낮았던 것 같습니다. 모자를 패션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시기도 사실 몇 년 되지 않거든요. 모자를 전문적 영역으로 생각조차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모자 디자인, 제작 기술을 배우면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다행히 불어를 할 줄 아니까 모자학교 선생님들과 의사소통 하는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작 기술이나 디자인을 배우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1998년 귀국해 모자 기업에 취직하고 얼마 후 독립했습니다.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공부를 마치고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국내 유명 모자기업에 디자인 실장으로 스카우트되었습니다. 하지만 패션모자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했던 때여서 패션모자를 디자인해서 내놓으면 고객들의 낯선 반응이 돌아왔어요. 대중이 사랑하지 않는 디자인은 자기 만족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후 경험이 쌓이고 제 디자인이 단단해지면서 아름다우면서도 쓰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스타일의 모자를 만들었는데 비로소 고객들의 반응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확신이 생겼죠. 내가 하고 싶은 모자를 자유롭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모자는 분명 한국에는 아직 없는 스타일이라 생각했고, 자신이 있었습니다. 회사를 그만 두고 1999년에 1호점인 화동점 문을 열며 '루이엘Luielle, 그와 그녀'라는 브랜드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서울 종로구 화동은 총리 공관이 있는 삼청동 큰 길에서 동쪽으로 약간 언덕진 곳에 위치한 동네다. 화동점 골목은 개점 당시 썰렁했지만 이제 번화가 못지 않다.) -화동점은 (주)샤뽀의 출발점인데, 처음 어떻게 출발했습니까. "화동점은 6평 정도의 작은 매장입니다. 개점하면서 첫달 매출액이 1,000만 원 정도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개점 당일에 이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물론 친구 등 지인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반응이 너무 좋았고, 다소 여유를 갖고 일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화동점에서 기획제작판매가 모두 이뤄졌지만 지금은 루이엘 삼청점에서 기획하고 만듭니다."-고가의 모자를 전시해 판매했는데, 반응이 어땠습니까."처음 시작할 때 모자 가격이 816만 원대 정도 였는데, 물론 한 번도 그렇게 비싼 가격으로 구입해 본 경험이 없는 고객들의 저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써보고 간 손님은 다시 찾아왔고, 다른 모자는 못쓰겠다는 호평도 들었습니다. 단골 손님이 하나 둘 생기고, 매니아층이 두꺼워지면서 패션모자에 대한 인식이 점점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패션모자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고 루이엘 모자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나중에는 매장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도 생겼고,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에 입점하게 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통망이 넓혀지게 된 것 같아요."-천 실장님의 모자를 보고 있으면 참 상상력이 풍부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어떻게 얻고 있습니까."작업 아이디어는 소설이나 영화, 원단, 부자재, 여행지의 느낌들, 식물, 보석 등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영감의 원천이 됩니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고, 불문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상상력이나 감성적인 면이 좀 풍부한 편인 것 같아요. 불문학 전공이 마치 모자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밑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업을 하는데 감성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객 특히 여성들이 원하는 부분을 콕 집어서 채워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고객층은."연령대로 보면 30대60대까지 폭넓은 고객층이 찾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분, 사회적 활동이 많은 분, 그리고 유명 연예인들도 많이 찾아주십니다.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에 큰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이 찾는 것은 모자가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고, 또 멋있고 아름답게 메이킹 하는데 굉장히 좋은 아이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성적 코드가 맞는 사람들에게는 제 모자가 꿈을 실현하는 매개체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아함이나 로맨틱한 감성을 추구하는 여성들에게도 많은 어필을 하는 것 같고요." -모자 공장은 어디에 있고, 월 몇 개 정도 생산하는지요."서울에 있는 직영 공장에서 월 1,500개 이상 생산하고 있습니다. -조현종 대표는 언제 어떤 계기로 합류했습니까. 또 부부가 역할 분담을 해서 일을 하고 있는데, 불편한 점은 뭐고 편리한 점은 뭔가요."루이엘 화동점 개점 당시에는 옆에서 조언하며 돕는 정도였지만 점차 규모가 커지자 관리와 경영에 경험이 풍부한 남편의 본격적인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 후 남편이 (주)샤뽀 대표이사(2002년)로서 마케팅 전반 등 경영을 총괄하고, 저는 디자인 실장으로서 모자 디자인에 전력할 수 있었습니다. 루이엘의 디자이너 수공 모자 브랜드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유통라인을 넓혀갔고, 회사의 체계적인 구조를 만들어 나갔습니다.부부가 함께 일하는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업무 영역 내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최상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한 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또 같은 곳을 보고 함께 달려가니 늘 서로 응원할 수 있고, 대화가 끊김 없는 것도 좋은 점인 것 같습니다.-주요 백화점, 일본 제국호텔 매장 등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주요 국내외 매장을 소개해 주시죠."신세계백화점 강남점과 본점,대구 대백프라자 명품관 등에 입점해 있습니다. 루이엘 화동 본점과 삼청동, 인사동,일산, 의정부, 전주 등 로드숍과 국내 유수의 골프장 프로숍, 일본 제국호텔 등 4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중국과 미국 진출을 목표로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샤뽀가 고향 전북에 알려진 것은 전주에 모자박물관이 있는 루이엘햇컬쳐센터를 세우겠다고 밝힌 2010년 초순으로 기억합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남편과 제 고향이 전주예요.(^-^) 고향이란 게 전주 진출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지만, 제2의 도약을 위해 전주에 갔습니다. 전주의 역사, 문화, 관광 등 자원과 모자를 결합시키면 충분히 많은 시너지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전주는 제가 생각하는 예(禮)와 예(藝)의 도시입니다. 예의와 예술이 살아 있습니다. 모자의 속성이 바로 예의(Attitude)와 예술(Style)입니다. 또한 전통의 멋과 현대의 감각이 어우러진 예술적 도시이지 않나 싶습니다."-루이엘햇컬쳐센터는 모자 박물관과 판매점, 갤러리, 카페, 아카데미, 게스트하우스 등을 갖춘 복합문화센터인데, 개관 2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운영해 본 소감은. 시민들의 반응, 성과 등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1층에는 패션모자를 만날 수 있는 모자숍을 비롯해 갤러리, 모자카페 등 방문객들이 자연스럽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2층에 오르면 전통모자부터 현대모자까지 볼 수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시관을 만날 수 있죠. 가족이나 젊은 연인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포토존과 이벤트존도 운영하고 있고요. 방문객들은 3층에서 모자를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동반한 관광객, 가족들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4층에는 하늘공원과 공연장, 게스트하우스가 있죠. 그동안 저희 모자박물관은 전주의 5대 명소로 선정될 만큼 고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와 대전을 비롯, 타지역에서 방문하는 고객이 갈수록 늘고 있어 고무적입니다. 전주에 들르는 관광객이 꼭 방문하는 명소로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콘텐츠를 개발해 패션문화콘텐츠의 메카로 발전시키겠습니다."-모자 공장을 전주에 세울 계획은 없습니까? "현재 직영공장은 루이엘 삼청점 등 서울에 있습니다. 전주에는 모자디자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물론 차후 전주에 공장을 설립할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세계시장 진출 등 앞으로 계획은?"일본의 고급 호텔인 동경 제국호텔 아케이드숍에 입점, 판매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저희 모자가 베스트 상품으로 선정되기도 했어요. 일본의 매니아 고객들은 한국에 들어오면 꼭 루이엘 매장을 방문할 만큼 관심을 아끼지 않으세요. 그리고 2013년 SS시즌부터 시작하기 위해 미국 진출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 이 시기에 중국 진출을 위해 현지 바이어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2013년은 루이엘 모자가 해외 시장에서 많은 성과를 내는 해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모자 수요층에게 한 말씀."모자가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그 이면에는 '나도 정말 모자를 쓰고 싶어요'라는 뜻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모자를 쓰고 어딜 가나요?'라고 거부하지 마세요. 그러면 평생 야구모자밖에 쓰지 못하고, 모자의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기회조차 없애버립니다. 모자를 써볼 수 있는 장소나 기회가 된다면 마음껏, 최대한 자주 써보세요. 자주 쓸수록 모자가 자신에게 어울리게 되고 몸에 붙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 나에게 어울리는 모자 하나쯤은 꼭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주)샤뽀, 루이엘햇컬처센터는 수도권에서 온 이전기업입니다. 그리고 전주한옥마을의 소중한 문화 아이콘이 됐습니다. 도민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앞으로도 애정어린 눈으로 끊임없이 관심과 격려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 기획
  • 김재호
  • 2012.11.13 23:02

조국 교수는 - 군사정권시대 법관의 꿈 접고 사회참여 대열 '앞장'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남들보다 두 살 일찍 학교에 들어갔지만 공부를 잘해 만 열여섯 살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맞벌이 부부교사였던 부모님 덕분에 '지식친화적' '문화친화적'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입시공부에 매달려 지내면서도 삼중당 문고를 꼭 끼고 살았다. 딱딱한 교과서를 보다가 지루해졌을 때 문고판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크고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읽기에 빠져 삼중당 문고의 대부분을 읽었던 그는 그때 만났던 문학이 자신의 절반을 키웠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그의 독특한 독서법은 그때부터 길러온 습관이다. 예를 들면 딱딱한 법학전공책과 사회과학·인문과학 책, 그리고 시나 소설류 같은 말랑말랑한 책을 동시에 번갈아가며 읽는 식인데, 제법 괜찮은 방식인 것 같아 제자들에게도 권하고 있다. 고등학교시절 부마사태로 시대를 조금 알게 되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운동권 성향을 갖고 있던 법과대학 편집실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정치의식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때만 해도 남들처럼 공부해 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시대상황을 목도하며 군부독재자들의 법무참모역할이나 하는 '육법당' 멤버는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울산 대학 재직 시절,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이 활동과 별도로, 주체사상 비판 작업에 참여해 〈주체사상 비판〉 책을 펴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종북좌파'로 분류되는 코미디를 겪기도 한다. 고등학교 시절 팝송에 심취한 덕분에 음악 분야는 물론,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갖고 있으며 그 폭과 깊이가 남달라 그의 페이스북은 정치의 영역 뿐 아니라 장르를 불문한 지식과 교양이 넘쳐난다. 미국 버클리 로스쿨 유학기간을 포함해 20대 후반부터 30대까지의 10여년은 오롯이 전공분야 공부에만 쏟았으며, 이후 세상에 다시 나와, 사회참여의 대열에 섰다. 24시간이 부족해보일 정도로 많은 일들, 특히 사회를 바꾸려는 활동에 전력하고 있는 그는 자신만의 많은 룰을 만들어 지키며 그 일들을 해나간다. 40대에는 소설보다는 시집에 더 마음이 가는데, 압축적인 전달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울산대와 동국대 교수를 거쳐 모교인 서울대 교수로 왔으며, 전공 관련 책 외에도 〈성찰하는 진보〉 〈보노보 찬가〉 〈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 등의 시론집을 냈다. 2010년, 〈진보집권플랜〉을 내면서 정권교체를 위한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기 시작했으며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해 모든 것 내던지고 가장 열심히 뛰고 있다. 정치에는 뜻이 전혀 없으며, 우리 사회의 기본이 서게 되면 언제라도 학문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2.11.06 23:02

야권 대선 후보 단일화 조율사 조국 서울대 교수 "文·安, 서로 동의하고 승복하는 단일화 과정 필요"

또 매스컴을 탔다. 이번에는 '90도 절'이 문제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만나 악수 하면서 몸을 90도 가까이 숙여 인사하고, 후보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면서 왼손은 배 위에 얹은 '아주 공손한 자세'를 보인 것이 화근(?)이었다. 새누리당에서는 이 기사를 바탕으로 '그의 90도 인사에 사회적 지탄이 이어지고 있다'고 비난했다.'90도 인사법'으로도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된' 사람.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47)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면서 문득 예전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그의 인사법이 떠올랐다. 그를 처음 본 것은 2010년 겨울, 전북일보와 전북환경운동연합이 공동으로 주최한 '초록시민강좌'에서 였다. 그때 그는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90도보다 훨씬 더 깊숙이 고개 숙이고 인사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눈에 띄게 출중한 외모에 정중하기까지 하니 인사를 나눈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했다. 그런데 그 '인사법'이 이번에는 그를 '폴리페서'로 모는 또 하나의 단초가 됐다. 그를 비판하는 언론매체의 표현대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치 발언'을 하면서' 정권교체를 위한 모든 짐을 진 듯 결연히 나선 사람, 보수진영의 온갖 모욕적인 비판과 지탄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대응하고 더 명징한 태도로 진보진영의 연대를 강조하는 사람, 늘 언젠가는 정치에 뛰어들 것이란 혐의를 받으면서도 사회참여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열정적이고 충실하게 실천해가는 사람. 그를 만났다. 왜 그는 편안한 개인적 삶을 놓아두고 굳이 이 진흙탕 정치판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며, 정말 그리고 끝내 정치에 입성하지 않을 것인가 알고 싶었다. 묻고 대답하는 일에 단련된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명쾌한 논리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인터뷰는 두 차례, 지난달 25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그의 연구실과 다음날 강연차 내려온 전북대의 카페에서 진행됐다. 전북대 강연은 야권 단일화를 위해 그가 중심이 되어 진행하고 있는 '시민정치콘서트' 전국순회로 이루어진 자리였다. 강연장소인 전북대 인문대 최명희홀 300여석은 차고도 넘쳤다. -정말 바쁜 일정을 보내시더군요. 시간 내주시어 감사합니다. 전북대 강연 시간에 맞추어 인터뷰 할 계획이었는데, 수업 때문에 도착시간이 늦어지는 일정에서는 시간이 너무 빠듯했습니다. 수업을 늘 그렇게 철저하게 하십니까."수업을 빼먹는 일은 없도록 노력합니다. 불가피하게 휴강하는 경우는 학회와 일정이 겹칠 때인데, 그렇게 되면 보강을 하고 수업진도를 반드시 나갑니다. 학교 일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원칙을 정해놓고, 가능한 지킵니다."-그럼에도 워낙 열심히 정치활동을 하시니까 오해를 받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새누리당에서 '연구활동은 언제하냐" 비판하는 성명을 냈을 때, 페이스북에 '새누리당, 날 꼭 찍어 "연구활동은 언제 하냐"고 비판하는 대변인 성명 발표. 풉, 내가 많이 신경쓰이제? 그런데 내 연구실적이라도 확인하고 이래라'고 즉각 올리셨더군요. 당당하고 자신 있어 보였습니다.(웃음)"민주화 운동을 했던 윗세대 선배들은 훌륭한 활동을 많이 했지만, 학문을 병행하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죠. 저는 20대에 운동권 활동을 하면서 진보를 지향하면서 공부도 잘해야겠다고 생각 했었습니다. 정치활동과 사회참여를 하지만 전공 공부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 생각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비난은 좀 가소롭습니다."-그래도 신경은 쓰이시죠? '프로페서'의 뜻을 명확하게 짚어 올리셨던데요. ''교수'로 번역된 professor의 원의는 자신의 신조를 '공언'(profess)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해놓으셨던데. '왕왕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만, 직업윤리와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을 주더군요. "자꾸 반복하니 말장난 같지만 프로페서의 정의는 '공언 하는 것'이고 종교적으로는 고백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직분을 다 안하는 것이죠. 대중들은 프로페서가 아닙니다. 살기 위해 돈을 버는데,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면 위험할 수 있고, 자신을 드러내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하며 살아갑니다. 나쁘다 좋다로 판단하기 이전에 삶의 조건 자체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프로페스를 해줘야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유권자나 대중들은 프로페서의 말을 들어보고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해 판단하게 됩니다. 교수는 지식을 가르치는, 지식 전달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더 나아가 지식을 전달함과 동시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세계관을 공언해야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그 직분을 아주 충실하게 다하고 있는 셈이군요. 그 직분 이야기를 좀 해보죠. 교수님께서 대선을 앞두고 정권 교체를 위해 줄곧 절박하게 강조해온 것이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작업인데 최근 단일화 물꼬가 좀 트이는 것 같지요."안철수 후보 쪽에서 단일화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보면 안 후보 쪽에서 11월 25일 전까지는 최종합의를 늦출 가능성이 큽니다. 시간을 벌어야하는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전략이겠죠. 그러나 민주당에서는 빨리 입당할 것을 권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평행선이 됩니다. 그럼 이 상태로 벼랑 끝 전술을 끝까지 갖고 갈 것이냐는 문제가 남죠."-단일화의 절차와 방법이 매우 중요한 일일 것 같습니다. 일전에 두 후보 간 단일화를 위해 공동으로 정치혁신위원회를 구성해 공동 정강정책을 확립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제안을 하셨는데요. 문 후보 쪽에서는 받아들였고, 안 후보 쪽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나요.(웃음) "안 후보 캠프에서 안 받았다고 해서 섭섭한 것은 없습니다. 안 후보 쪽은 독자영역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충분히 이해가 되죠. 그러나 계속 그렇게만 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분들이 가는 쪽으로 따라가 주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고 봐요. 그래서 끊임없이 연결 고리를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느 캠프에도 속하지 않은 지식인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봅니다. 어쨌든 제 주장의 핵심은 11월에는 양쪽 후보가 무조건 만나야한다는 것입니다.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단일화를 촉구하는 문인들의 성명서나 원로들의 원탁회의 성명서, 그리고 곧 나오게 될 대학교수들의 성명서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절박함을 담은 것입니다."-교수님의 단일화를 위한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겠지만, 그동안 문 후보 친성향 인사로 분류되어왔기 때문에 안 후보 쪽으로서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럴 수 있죠. 그러나 저는 문 후보 쪽의 영입 제안을 계속 거절해왔습니다. 어떤 캠프에도 합류하지 않고 제 역할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두 후보가 합리적으로 투명한 절차를 통해서 단일화 되면 그 후보를 지지할 것입니다. 물론 문후보든 안후보든, 민주당이든 아니든, 잘못된 정책과 지향에 대해 비판할 것은 해야죠. 우리 쪽 정책을 비판하면 상대편이어서 그렇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캠프의 논리가 작동하게 되면 자기 캠프가 하는 것은 모두 선이고, 다른 캠프가 하는 것은 모두가 악이라는 그런 구도로 갈 수 밖에 없게 되죠. 사실 맘편하기로는 어느 쪽으로 확실하게 서는 것이지만 누군가는 단일화를 위한 연결 고리를 꾸준히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수님이 온갖 공격을 무릅쓰고 비평하면서 제안했던 안들이 늦어지거나 여전히 선명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두 후보가 무조건 만나야 한다는 부분은 아직도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안 만날 수도 있겠죠. 저도 현실 자체를 낙관적으로만 보진 않습니다. 논리가 작동하면 안 만날 수도 있다고 보는데, 그것을 알기 때문에 더 강한 압박, 강한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10월 중순까지만 해도 안 후보 캠프에서 단일화는 금기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단일화를 언급하기 시작했거든요. 물론 복잡한 조건이 붙어 있긴 하지만 분명한 진전이고 변화죠."-그럼에도 최근 움직임을 보면 두 캠프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대선에서 이기려면 후보와 캠프가 경쟁하면서도 연대한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지지층에 메시지를 분명하게 계속 보내야 한다고 하지만 신뢰 없이는 어려운 일이겠죠. "물론입니다. 제 철학 중의 하나가 진리는 아무도 독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와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부분적 진리를 갖고 있습니다. 후보와 캠프가 자기쪽 주장은 백프로 진리고, 한쪽은 백프로 허위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죠.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정치공세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일정한 진리를 갖고 있고, 각각 합당한 존재 근거와 합당한 이유가 있는데 자기 쪽만 온전한 진리라고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절차에 따라서 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단일화하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사실 그동안 교수님이 걸어온 정치영역에서의 활동을 보면, 이번 대선을 앞둔 정치 활동이 낯설진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권교체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그래서 어떤 '결기'까지 보이게 하는 적극적인 활동의 이면에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12기 민주정부때에는 정치활동를 하지 않았습니다. 참여연대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활동을 했지만, 직접적인 정치적 발언은 의도적으로 안했습니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불만이 있었고, 그래서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지만 정치의 기본은 굴러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면서 기본정도는 유지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무너지더군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억해보면 지금은 MB정부의 실정을 모두 비판하지만, 집권 초기에는 지지율이 아주 높았습니다. 그때 MB정부 출범 1주년을 맞아 생방송 토론이 있었어요. 그때 패널로 나갔었는데, 요즘 표현으로 '돌직구'를 던졌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틀렸다고 비판하고 경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가 없었어요. 국가인권위원을 사퇴하고, 나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와 함께 진행한 '진보집권플랜'은 그래서 나온 것이지요."-'진보집권플랜'은 반향이 대단했었죠. 한국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화두로 많은 사람들에게 낙관과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평가는 의례적인 찬사가 아니었습니다. "오대표와 진보의 불을 지펴보자고 의지를 모았는데 반응이 괜찮았어요. 그때부터 '스노우볼 효과'처럼 제 발언권이 세져버린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진보집권플랜 낼 때만해도 문제제기를 하고 들어올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더 앞으로 나가게 되어 버렸죠. 제 목표는 정권교체하고 5년간 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의 저 개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예요." -기대가 그렇게 크진 않군요.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거든요. 바깥에서는 아무 관심이 없지만, 논문을 쓰고, 책을 낼 일이 있는데 아무래도 시간 투여가 적어지기 때문에 계획이 조금씩 구멍이 나게 되죠. 물론 좀 더 크게 보아 3~4기 연속 민주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합니다. 지금 경제민주화가 화두인데, 사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이루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스웨덴 같은 경우는 사민당이 40년 집권해서 지금 체제를 만들었죠. 미국 같은 경우도 뉴딜정책을 민주당이 30년 집권해서 체제를 바꾸어놓았습니다. 경제민주화에 모두 공감한다면 3~4기(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민주진보정부를 수립해 적어도 10년 정도는 집권해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잘될 것이고, 저는 여기(연구실) 있어야겠다는 것이죠. 공적 목표의 대의와 사적 이익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점입니다.(웃음)"-농담처럼 이야기하셨지만, 집중적으로 활동해서 정권을 바꾸고, 장기간 개인 공부에 몰두하고 싶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정치에는 전혀 뜻이 없으십니까. 끊임없이 영입제안을 받고 있는데요. "아마 제가 정치인으로서 '상품성'이 있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고마운 일이긴 한데, 정치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오래전에 했을 겁니다. 40대 후반인 지금까지 학자로서 움직여왔다는 것은 정치가 제 몸에 맞지 않아서이지 않겠어요.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제 직분에 맞는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서 정리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각종 선거 때마다 많은 제안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명시적으로 거절했어요. 그런데도 그것을 안 믿어줍니다.(웃음)" -왜 그럴까요. "자신의 희망이 섞이면 믿지 않게 되죠."-그렇다면 교수님께 거는 희망이 그렇게 크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이런 것 같습니다. 학교나 학계에서 저에게 요구하는 사항이 있죠. 그러나 학교 밖의 대중은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무슨 논문을 쓰는지도 알 필요 없죠. 그런데 저는 바로 여기 학교에서 출발했습니다. 학자로서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저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은 비상상황이어서 밖으로 나왔고, 학자로서가 아닌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인데, 기본이 갖추어진 사회가 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제 소신이기도 합니다."-진보의 승리를 위해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는데, 그 역할의 성과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하실 일들이 궁금합니다. "단일화가 되면 단일 후보를 위해 끝까지 열심히 뛰어야겠지요. 필요하다면 어떤 역할이라도 할 생각입니다. 물론 결과가 좋아야지요. 바람대로 정권이 바뀌어 3기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제가 사회적 발언에서 잠수하는 기간이 아주 길어질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잠수 기간이 훨씬 짧아질 수도 있겠죠. 사적인 이익과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정권 교체를 해야 합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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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정
  • 2012.11.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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