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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청소년에게 문화예술교육이란

청소년문화교육은 청소년이 문화예술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왔다. 지난 몇 년간, 일반적인 수용자교육과 취미창작 동아리를 위한 과정이 함께 부상했다. 하지만 이는 지금까지 학교교육에 숨가쁜 일정과 목표에 가리어져, 충분히 빛을 보지 못 했다. 입시위주의 학교교육에서는 문화향수라든지 문화체험이 충분히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주5일제가 시작되면 청소년의 문화적 여가기회가 많아진다기보다, 음악, 미술, 체육수업이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는 진단이 있다.어디를 가도 청소년이 수학과 어학만큼 예술의 수용자로서 인류의 지능적 창조행위를 즐기는 훈련을 받을 수 없다. 어느 곳을 가든 예술감상이나 문화창작의 습작을 통해 자신의 취미를 개발하고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색의 시간으로서의 문화교육 활동은 홀대된다.최근에 만들어진 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우리에게 문화예술교육이 하나의 권리이며, 자신을 개발할 기회라는 점, 그리고 문화예술교육이 문화창조나 감상행위 못지 않게 중요한 문화향유 과정이라는 점을 되새겨준다. 나아가 문화예술교육은 교육의 수행자나 수혜자 모두에게 세상을 더욱 인간적으로 만들기 위한 문화적 실천이다. 이는 세상을 더욱 예술적으로 만들기 위한 실천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예술교육만 해도 그렇다. 이는 사람들이 예술의 고강한 차원을 통해 사색하고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고양되고자 하는 목적만을 가질 수 없다. 시민을 대상으로 한 예술교육은, 우선적으로 시민들에게 실용적이어야 한다. 감상이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이 자신감을 얻거나 상처가 치유되는 예술치료 효과, 사회생활이나 공공성을 취득하는 문화교육 효과, 역사와 수학 같은 다른 교육활동이 좀더 원활해지는 교육예술 등, 교육을 통해 예술은 인간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문화예술교육은 예술사회를 창조하기 이전에, 인간적이라고 부르는 바,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청소년교육도, 청소년을 예술창조자로 기르거나 전문적인 기량을 배우는 수준에서 봐서는 안 된다. 텔레비전과 대입참고서에 휘감겨 있는 청소년에게 고급한 예술의 이해와 감상을 강요하는 현재의 모습도 탈피해야 한다. 청소년이 문화예술을 접하는 귀한 기회를 통해, 여유를 찾고 휴식을 취하면서 숨통을 트는 것만도 족하다. 이러한 위락과 함께, 즐거운 오락이 되기 위해서 청소년에게 친숙한 대중문화와 첨단미디어, 놀이문화를 예술행위로서 다룰 수 있는 표용력 있고 창의적인 교육과정이 준비되어야 한다.청소년이 삶 속에서 문화예술을 자연스럽게 즐기는 감상자로 만드는 계기에 다름 아니므로, 청소년이 좋아하거나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체험하는 시간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러다보면 즐거운 수용자들이 먼저 생기고, 조금씩 창조적인 수용자도 나올 것이다. 문화예술활동을 교과목이나 기능수업, 직업적 활동으로 인식하지 않고, 누구나 취미활동을 통해 문화창작 체험을 하려는 자유로운 향유자들의 세상이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의 모습이다. 이럴 때, 청소년에게 당연히 문화예술은 아픈 마음을 치유하고, 자기를 개발하고, 사회를 이해하고 공동체를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공부를 잘 하는 도구가 된다./안이영노(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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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2.16 23:02

[문화마주보기] '중심'을 묻는다

‘마주보기 싫은’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할 때가 있다. 생명과 관련된 것들이 가차없이 버려지고 무시당하고 학대당할 때 그걸 두 눈뜨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 너무나 괴롭다.월셋방 장롱에서 빼빼 말라비틀어진 네 살짜리 아이가 숨져서 발견됐다. 그 아이의 체중은 5킬로그램. 기아사였다. 아버지는 막노동, 어머니는 정신지체 3급. 엄마는 아이가 죽자 이불에 싸서 장롱에 넣어두었다. 이웃이 방문하지 않았다면 그 아이는 언제까지고 장롱 속에 묻혀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정신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나 이웃에 대한 수치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치판단이 배제된 멍한 상태. 어떤 이는 그걸 일컬어 ‘현실감 제로’라고 표현했다. 현실감 제로. 사회적 규범이고 인간의 도리고 뭐고 극심한 고통과 한계상황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심부름센터 직원에게 돈을 주고 영아를 훔쳐오라고 시킨 여자도 있다. 아기의 엄마는 목졸라 죽이고 아이만 데려다가 제 자식처럼(!) 키웠단다. 제 자식을 배곯려 죽인 아비는 극심한 가난 때문에 현실감을 잃었다지만, 돈도 있고 가족도 있는 이 여자는 무엇 때문에 ‘현실감 제로’ 상태에 빠진 것일까? 따지고 보면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 돈을 움직이는 사람과 사회의 문제다. 돈에게 무슨 죄가 있을 것인가? 돈을 움직이는 사람에게 중심이 없기 때문에, 중심이 있어도 전도된 가치에 휘둘려 있기 때문에 이렇듯 ‘마주보기 괴로운’ 사건들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 지난 1월 초, 사회원로 165명이 경제?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사람 중심의 공동체 건설을 위한 사회협약’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일자리 창출과 사람 중심 사회를 위한 2005 희망포럼’이라는 이름의 이 모임에서는 ‘뉴 패러다임’ 운동을 역설하며 “지금의 양극화, 사회적 고통의 핵심은 고용에 있다”고 주장한다. 고용과 성장이 함께 가는 공동체, 사회적 일자리 창출, 상생의 사회협약 등을 뼈대로 삼고, 과로 해소를 통한 건강사회, 평생학습을 통한 지식사회, 새로운 여가문화 창출을 통한 문화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이들 주장의 핵심이다. 이제 운동 초창기라 다소 비현실적인 계몽운동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끝을 모르는 사회적 양극화에 지식인들과 사회원로들이 나섰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수출입국’이 아닌 ‘사람입국’을 만들자는 그들의 주장은 사람을 소외시키는 성장발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다. 행정중심도시네, 문화중심도시네, 온통 중심을 부르짖고 살면서도, 정작 우리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나라 정책의 중심이 사람이어야 한다면, 사람의 중심은 무엇이어야 할까? 사람의 중심을 찾는 철학적 패러다임 운동도 범사회적으로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김선경(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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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05.02.02 23:02

[문화마주보기] 여운이 없는 '지역음식'

내가 두고 쓰는 말 중에 전공이 무섭다라는 말이 있다. 사실 우리의 교육현실이 각자의 자질에 따라 전공을 선택하기보다 시대적 선호도에 따라 성적순으로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이 길이 아닌가봐 하면서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된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락기계 두더지처럼 감출 수 없나보다.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아내가 당신도 한다. 그것은 나의 버릇 중에 어떤 물건을 잘 주어오고, 못 버린다는 것이다. 고물(엿)장사 출신이라 어쩔 수 없나보다. 그래서일까? 음식점에 가서 밥상을 받으면 숨이 턱 막힌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수저를 놓으면서 여전히 다시 시작해도 좋을 음식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우리 전라북도를 두고 음식문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데 그게 가만히 들어보면 꼭 칭찬만은 아니다. 어떤 음식이 어떻게 맛있다가 아니라 음식의 가짓수가 허벌나게(?) 많다는 것이다. 이제는 아예 음식의 가짓수가 많은 것이 우리 전라북도 음식문화의 전통이 되어버린 거 같다. 조선심이 가장 오롯이 남아 있다는 우리 전라북도, 그리하여 전통문화를 매개로 하여 새로운 활력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우리 지역의 특성에 맞게 음식문화에 대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분명 가까운 전통사회인 조선시대에 이미 완성된 삶의 양식이 있었다. 음식문화만 보더라도 독상차림과 평면 전개의 공간형의 완성된 형태가 있었던 것이다. 그 형태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잔치집이나 상갓집 또는 시제 등에 분명하게 있었던 것이다. 독상차림을 통해 돈독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으며 평면 전개의 공간형을 통해 시공간을 함께 아우르며 완결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밥장사에 매우 서툴다. 특히나 우리 전라북도는 더하다. 본래 밥을 돈 주고 사고파는 게 아니라 이리 오너라! 해가지고 당당하게 받아먹었던 것을 불행한 시대(일제 강점기, 동존상잔)를 거치면서 배고픔을 바탕으로 하여 호구지책으로 민망하게 장사로 나서게 되다보니 막 내다주게 된 것이리라. 돈독한 차림으로는 주인도 섭섭하고 손님도 안내던 돈 내고 먹자니 뭔가 허전하다. 그러다보니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놓고 그 행위로 민망함을 해소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차려진 상차림을 보면 음식마다 서로의 값어치를 헐뜯고 떨어트린다. 그리고 마침내는 무엇을 잔뜩 먹기는 먹었는데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음식에 강약이 없으니 여운이 있을 리가 없다. 우리의 상차림이 그러해서 일까? 우리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보면 좋아 보이는 것은 죄다 모아두는 식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우리가 밥장사에 서툰 것은 전통의 와해가 그만큼 더디다는 것이라 본다. 그러니 이제는 제대로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전통을 소급하여 완성된 형태를 복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오늘에 맞게 갖추어 낸다면 우리의 농업까지도 그 의미를 드높이게 될 것이다./이현배(옹기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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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1.26 23:02

[문화마주보기] 지역영상문화 프론티어 찾아

예향과 문화예술 도시인 전주는 1950-6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메카로서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인 <선화공주>를 비롯하여, 이강천의 <아리랑>, <피아골> 등을 제작하였다. 또한 전주에서 제작된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김진규, 허장강 같은 단역배우들이 인기스타로 급부상한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서울에서 개최되는 「대종상 영화제」보다도 3년 앞서서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상인 「단기 4292년도 제1회 전북영화상」이 1959년에 전주에서 개최되었다. 이처럼 한국전쟁 피난지인 전주에서 한국영화산업의 중흥기를 일궈내지만, 이후 모든 문화예술행정이 중앙집권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로 아쉬움만 남은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이러한 영화사적 배경을 근거로 2003년도에 전라북도는 「전북영상산업 육성기본계획」을, 전주시는 「전주문화산업 클러스터조성사업」을 발표하며 의욕적인 출발을 다짐하나, 이미 문화예술은 광주에, 영상은 부산에 선점의 기회를 넘겨줌으로써 지역전략산업 추진에 차질을 빚고 있다. 하지만 영상문화 인프라 구축 측면에서는 어떤 지자체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힘을 가지고 지역민과 소통하고 교류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2000년 제 1회 전주국제영화제를 필두로 현재 8개의 다양한 소규모 영화제가 전주에서 자생하고 있으며, 영화관련단체도 전주정보영상진흥원, 전주영상위원회, 전주독립영화협회, 전주시민미디어센터(4월 개관예정), 문화의 집 등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전주독립영화협회는 2001년부터 전주시민영화제를 전국 최초로 개최하면서 전국적인 영화제의 위상과 입지를 공고히 다져가고 있다. 이러한 독립영화협회는 지역에서 제작된 독립영화를 시민과 함께 즐기며, 영화제작의 어려움을 함께 고민하고 토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청소년, 주부, 일반인 등등 누구나 생산적 경쟁을 통해 지역영상작가로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이러한 활동력을 기반으로 서울을 제외하고 최초의 지역미디어센터인 전주시민미디어센터를 유치함으로써 명실공히 지역영상문화의 선두주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영화로케이션 서비스를 통해 전북을 보다 더 많이 알리고 경제적 효과를 유발시키고 있는 전주영상위원회는 올해 부산보다도(20편) 더 많은 26편의 영화를 유치함으로써 전국적으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지역주민과 시민들이 다양한 문화정보를 손쉽게 접하고, 직접 문화를 체험향유할 수 있는 다채로운 공간으로 활용되는 문화의 집은 주민간의 교류와 만남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주민간의 공동체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 아중삼천진북인후 문화의 집은 다양한 영화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지역주민들간의 가교역할을 하며, 지역의 특색에 맞게 다양한 영화체험을 선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프론티어 정신은 타 지자체에서 추진하는 영상산업보다도 뿌리가 깊고 흔들리지 않은 거대 고목을 이룰 것이며, 또한 전통문화라는 우리의 우수자원을 영상시대의 실생활에 접목시키는 영상산업화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건(전주국제영화제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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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1.19 23:02

[문화마주보기] 전통 도시냐 창조적 도시냐

전주를 전통문화 중심도시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전주가 우선적으로 되어야 할 것은, 창조적인(creative) 도시 그 자체다. 전통문화를 억지로 찾아 세워 포장하는 성급함 역시 피해야 할 일이다. 전통의 한 소재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왜 전통의 향기를 맡기 위해 전주를 찾아야 하는지를 아무에게도 설득하지 못 한다.우선, 많고 많은 우리 옛것 중에서도 전주만의 독창적인 것(originality)을 찾는 차분한 작업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왜 우리 도시가 그것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삼척동자도 당연하게 느낄 수 있도록 사람들 사이에서 설명해내야 한다.전통 속의 대상을 찾기 전에 왜 우리만의 것, 남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이런 것은 전통의 범주를 넘어선 초현대적인 것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먼저 찾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통이란 소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도시가 크리에이티브하게 살 수 있는지 확인하는 단서는 바로, 눈에 잘 안 보이는 그것을 찾아내는 데 있다.전통을 오늘날에 맞게 재활용, 재창조하는 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다름아닌 오리지널리티다. 오늘날에도 먹는 김치와 한껏 개량된 한복 뿐 아니라, 한국형의 버스, 한국에만 존재하는 카페풍습 같은 게 다 전통이다. 차(茶) 문화나 한여름의 패션 아이템이 된 부채처럼 현대의 삶 속에 잘 편입했기에 창의적인 동시에 남다른 전통이 된 것도 많다. 역설적으로, 옛것이 꼭 우리것은 아니다.전주에 대한 기대가 큰 지금, 전통자산을 박물관에 갇힌 것이나 단순한 과거 유산 정도로 제시했다가는 마음의 초라함을 겪을 수 있다. 전통이 그렇지 않듯, 오리지널리티는 옛것만이 아니다. 그것이 단순한 복원이 아니듯, 크리에이티브하다는 것은 또한 새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새로움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급히 모색하려는 들뜬 모습을 한번쯤 되돌아보자.그럼에도 전통에서 출발하는 것은 좋다. 창의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있던 것을 조합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발견이다. 그것은 신기한 것이나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과정상, 과거의 것을 모자이크하고 수정하고, 또 있는 그대로를 관점을 바꾸어 소개하는 것이다. 독창적인 것은 결과적으로 차별성을 갖게 되지만, 과정상은 관습의 힘을 통해 누적되어 만들어진다.결국 창조적인 문화도시는 전통의 영역이나 대상을 잘 선정하는 것보다, 전통의 요소를 발견하여 주민들이 이를 키우도록 합의하는 과정이 독창적이고도 현명해야 한다. 전통문화를 중심에 두는 도시는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대의 소산 중에서 아름답고 기분좋고 선한 것을 계속 키우는 발상전환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흔히 전통이라고 부르기 쉬운)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옛것을 붙이기도 하고, 새것을 접목하기도 한다.전주는 지금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안이영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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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1.12 23:02

[문화마주보기] 이제는 '현장'이다

지난 12월 29일, 마침내 문예진흥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마침내라고 하는 이유는 개정안이 상정되고 통과되기까지 수많은 갈등의 고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공약사업이기도 했던 문예진흥법 개정안이 16대 국회에서 좌절되자, 문화예술인들은 기초예술연대를 꾸리고 문화 IMF를 선언했다. 당시 출범식에 참석한 중견 연출가 김철리(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씨는 연출가 생활 18년 만에 2년 동안 월급 받아보고 최근 3개월 째 실업상태라고 호소했고, 소설가 전성태 씨는 문인들은 영화판으로 돈 되는 곳으로 몰려가고 정부는 시민들을 찾아 나서는 행사를 할 때만 지원을 해준다고하고 평론가는 잘 나가는 문학인만 집중 조명하는 것이 문학판의 현실이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이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니들이 좋아서 하는 것 아니냐는 냉소와 무관심을 넘어서지 못했다. 문예진흥법 개정안이 16대 국회에서 좌절된 이유도 다급한 민생현안이 아니다.고 생각하는 일부 국회의원들 때문이었다. 그 과정을 일컬어 황석영은 길고 지루한 구걸행각이라 표현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한 조각의 빵이 아니라 이 사회가 진정으로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고 선언한 이유도 더 이상 자존심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2004년을 이틀 남겨놓고 문예진흥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현행 문예진흥원을 민간자율기구인 문예진흥위원회로 개편하고, 문광부 장관이 위촉하는 11명의 위원을 두도록 한 것이다. 분야별 사업별 소위원회를 합하면 150여명의 위원이 참여하게 된다. 예전의 문예진흥원이 문예진흥기금을 관리하고 배분하는 역할을 했다면, 민간주도의 위원회는 문화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며 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막강한 예산과 권한을 가진 위원을 어떻게 선임하고 운용하느냐가 다시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지만, 기초예술을 살릴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다. 문화예술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정책을 입안한다는 것은 마치 노조원이 회사의 경영원칙을 세우는 것만큼 혁신적인 발상이다. 이 발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특히 지역 단위에서 문화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진다. 이미 광주에서는 민간재단 최초로 지역문화사업의 법적 권한을 부여받은 광주문화예술진흥위원회를 출범시키고 24억 원 규모의 사업을 맡아서 추진할 예정이라고 한다. 전주에서도 문화재단 출범을 놓고 찬반 의견이 맞서고 있다. 어떻게 결론이 나든 지역문화예술인들의 높은 정책적 식견과 역량이 요구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현장 중심의 문화정책이 실시된 마당에 현장이 처한 현실과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모쪼록 문예진흥원 조직개편을 기점으로 예술인들의 삶이 좀더 윤택해지기를, 현기영 원장의 말대로 예술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상상력의 높이가 삶의 높이로 되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선경(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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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1.05 23:02

[문화마주보기] 예술은 짧고 인생이 길다고?

나이 탓(?)인가? 원가를 자꾸 잃고, 또 잊는다. 그런 가운데 그래도 거뜬 한것은 구호다. 이를 간파했는지 현대 소비사회는 광고 속에 기막힌 구호들을 만들어 낸다. 이미지가 또 하나의 소통도구가 된 가운데 가히 예술이다. 이를 역전이라 해야 할까? 뒤바꼈다 해야 할까? 고전적인 구호 중에하나인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 또한 적용이 어렵다.내 하는 일이 예술이다, 아니다를 떠나 그 비슷한 곳에서 살다보니 가끔 예술뮨화에 대한 의견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보면 결코 예술이 길지않다. 오히려 인생이 길다. 어렵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차라리 산다는 게(인생) 어렵지 예술이 무어 어렵냐'고 막말도 하곤한다.우리 사는 삶에서 가장 고도의 정신 행위이며 전위적이랄 수 있는 예술문화가 과연 진장성을 담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오늘, 사는 삶의 하나의 행위인 예술과 우리 삶과의 괴리감은 과연 무엇일까? 이게 당장 사는 삶을 무시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 탓은 아닐까? 예술이라는 행위가 고도의 정신행위이며 전위적인 활동이다하여 행세하는 걸 당연시 여기다가 우리 사는 삶과는 상관없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이는 단순하게 소비사회의 첨병인 광고만 탓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술문화가 스스로 역할을 잃으면서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대체한 것으로 보여지니 말이다.'예술을 위한 예술'은 '인생을 위한 예술'이 아닌 '예술을 위한 인생'이다. 좋은 시절에는 그럴 수도 있었겠다. 예술을 위한 인생 말이다.그렇지만 사는 게 서툰 사람으로, 어려운 사람으로 인생을 위한 예술을 기대한다. 우리 사는 삶의 질을 생각 할 때 문화적 환경 가운데 예술문화는 그 역할이 매우중요하니 말이다. 오늘 갈 길 몰라하는 예술문화의 방향성은 분명 우리 사는 삶의 키를 잡아 흔들고 있다. 대중문화가 경계를 넘나들며,아니 이미 점령군이 되었음을 본다. 대중문화의범람과 득세는 분명 우리 삶의 한 방편일 뿐일 것이다. 그 점령군의 병폐는 우리 사는 삶을 향유자로 착각케 하며 결국 강제한다는 것이다. 강박한다는 것이다.잠깐, 우리 사는 게 쉽던가? 만만하던가? 과연 이 어려움을 비견 할만한 게 무어 있던가? 이에 분명 예술문화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예술문화의 당사자는 물론 향유자와 함께 새로운 노력이 이루어 져야겠다. 그래 꼭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다./이현배(옹기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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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12.29 23:02

[문화마주보기] 한국영화 과연 전성기인가

꿈의 숫자였던 관객 천만시대를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 3개월만에 가볍게 돌파해 버린 지금, 말 그대로 한국영화의 황금기 혹은 르네상스라는 말이 자주 거론된다. 또한 이 두 영화 덕택에 부가적인 경제적 효과가 5,000억에 이를 것이라는 경제연구소의 연구결과는 우리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 세계 3대 영화제를 우리의 김기덕과 박찬욱이 감독상을 휩쓴 마당에, 이제 우리 영화도 세계 영화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이러한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최근에(10.27)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표한 연구자료 속에서 영화 편당 투자수익률을 살펴보면 2001년 18% 수익률을 올렸던 한국 영화는 2002년(-15%)과 2003년(-7%)에 연속해서 적자에 허덕였으며, 앞으로 "한국영화 점유율도 낮아질" 것이며, "비디오시장까지 포함한 영화산업 규모는 오히려 감소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 주는가?1980년 중후반부터 전 세계에 불기 시작한 홍콩 느와르는 홍콩영화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일약 세계영화산업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했다. 주윤발이 나오는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영화들을 보고 환호하고 열광했는가.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나고 홍콩영화는 관객들의 외면으로 급속도로 추락하며 모래 위에 쌓아올린 성은 허물어져 버렸다. 이러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 우리 영화산업도 기형적인 외적 성장에만 만족하고 있지 않는지 자문해 본다. 즉 외형적 성장에 걸맞게 내부적인 안정적 기반이 구축되고 있는지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2003년 전국 스크린 수는 1,132개로 50%인 555개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스크린당 인구수는 전국 평균 42,745명이다. 하지만 전주의 경우, 현재 앞으로 개관될 영화관을 포함하여 61개관이 전주시민들을 찾아갈 것이다. 이는 인구 만명당 1개관이 넘는 기형적 수치이다. 이처럼 관객을 배려하는 인프라 구축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하드적인 사고방식은 결코 우리의 전북영상산업에 도움을 줄 수 없다. 일전에 일본이 영화산업에 투자하기 위해서 미국의 콜롬비아 영화사를 사고나서 거의 망해버린 경우를 보더라도 단순히 하드적인 비즈니스 마인드 가지고는 영화산업을 부흥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영화산업은 인문학적 사고(기획), 공학적 테크놀러지(기술), 비즈니스 마인드(마케팅), 이 세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만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산업이다. 그 중에서도 인문학적 사고가 가장 중요하다. 내가 왜 카메라를 잡는지, 어떤 쇼트로 찍을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있어야만 진정한 영화작가로서 거듭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창구효과(Windowing Effect)의 부재이다. 극장수입에만 80%을 의존하는 수익구조로는 영화산업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극장수입이외에도 다양한 창구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비디오, DVD, 캐릭터, 테마파크, 관광 등등 연관사업과 연계되어져야만 한다. 오늘날 스크린쿼터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우리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 영화마인드 저변확대를 위해 또한 영화제작의 내적 문제(스탭의 처우문제 등)에 귀기울여 왔는지 자문할 시기이다./김건(전주국제영화제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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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12.22 23:02

[문화마주보기] 대중문화와 소수문화

대중문화는 상업성과 획일성 때문에 비판받는다. 하지만 상업성은 오히려 문화적 소통을 활성화하고 대중성을 고민함으로써 예술과 전통이 심각하고 어려운 지식에 머물지 않도록 만드는 보급을 촉진한다. 오히려 대중매체가 가진 독특한 특징 때문에 문화의 의미를 퇴색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오늘날은 대중에서 문화적 정보의 대량으로 보급하는 시대가 아니라, 다양한 정보를 여기저기서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시대다. 다양한 문화적 소양을 접하게 하는 데 있어서 일부 매스미디어는 오히려 획일적인 제한을 두고, 표준화된 정보를 주는 기능을 한다. 모바일, 인터넷 같은 매체의 발달로 다양한 섭취를 함으로써 순응적인 문화소비자를 벗어날 수 있게 될 수도 있다.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맞춤형으로 받을 수 있고, 스스로 캠코더와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문화 정보를 발신하고, 예술의 수용자에서 창조자가 되는 습작을 하게 됨으로써 생산소비자도 늘어나고 있다.따라서 대중매체의 문화는 지나친 표준화를 촉진하지 않도록 보완될 필요가 있는 문화이지, 상업주의 때문에 제거해야 할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대량문화(MASS CULTURE)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대중문화는 살아있는 민속문화(FOLK CULTURE), 즉 대중속의 문화(POPULAR CULTURE)라는 점에서 현대사회에 꼭 필요하다. 전통 적인 민족문화나 고급 예술문화 외에도 사람들 속에서 생성된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 시대에 따라 점점 더 다양해지고 개성이 강해지며 변화하는 문화예술이 드러나고 이런 것들이 다시 전통문화와 혼성을 이루기도 하는데, 이러한 대중문화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방송연예의 오락문화 외에도 우리가 열광하는 다양한 인터넷의 문화들은 모두 현재의 사람들의 욕구를 반영하는 건강한 측면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감상하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며, 여가시간의 취미개발이나 정서안정 때문에 이들이 필요하기도 하다.이러한 다양하고 건강한 대중문화 속에는 언더문화와 인디문화도 포함된다. 따라서 대중문화와 인디문화는 반대개념이 아니다. 언더문화만이 자신들만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디문화는 상대적으로 비상업적이고 대량문화에서 표현 못하는 비주류 실험예술, 대중매체가 받아들이지 않는 다양한 소수문화 등을 드러내기 쉽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개방적인 것 뿐이다.인디문화의 구성원 역시 방송연예 문화나 제도권 방송으로 발탁되기를 원할 수 있다. 언더문화가 청년들의 문화운동이기는 하지만 미래의 주류의 기성문화가 되기 위한 충원구조로 기능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 안에도 반상업주의와 저항운동을 주장하면서 또하나의 폭력을 낳거나 또다른 획일성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다.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새로운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이질적 문화의 개성을 존중하고 방송연예 문화나 전통예술까지 존중할 수 있는 문화상대주의, 문화다원주의를 갖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인디문화나 언더문화 지상주의자들 역시 답답한 시대의 유물이 될 날이 온다./안이영노(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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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12.15 23:02

[문화마주보기] 돈과 예술

문예진흥원에서 발행하는 온라인 뉴스레터 31호는 이렇게 시작한다. 예술이 처한 가장 슬픈 현실 중 하나는 어쩔 수 없게도 자본의 기능에 의탁해 생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술과 돈의 관계. 참 어려운 문제다. 예술이 돈이 될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고, 예술이 돈이 되어서는 안 되는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예술이 돈도 될 수 있는 시대, 혹은 예술도 돈이 되어야 하는 시대?올해 문화예술계가 탄생시킨 최대의 유행어는 기초예술이라고 한다. 다분히 현실과 유리된 개념으로 인식됐던 순수예술을, 예술의 기초성에 대한 자각을 장려하는 의미에서 기초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개념의 변화는 수십 년 간 축적돼온 사고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형식상의 변화보다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문화예술계를 이끌어 가는 자리에 민족문학 계열의 예술인들이 대거 포진해 들어갔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다고 나는 믿는다.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나랏돈을 받아먹는 작가가 될 수 없다며 문예진흥기금 수혜를 놓고 설전을 벌이던 선배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설전의 당사자들이 수십 억의 돈을 주무르는(?) 시혜자의 입장이 돼 있다. 현기영 한국문예진흥원장, 송기숙 대통령직속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장, 최원식 인천문화재단 대표,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 등이 다 민족문학 진영에 속한다. 예전에는 관에서 주는 돈은 받기도 어려웠고 받아도 찜찜했는데, 지금은 당연히 받아야 할 돈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다가 오히려 지나치게 체제 순응적인 작가로 변질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우려될 정도다. 물론 약간의 초조함도 있다. 과거에는 민족문학 진영이 정책을 맡으면 일체의 모순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문화정책의 핵으로 들어가 있는데도 외관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니 조금은 허탈한 것도 사실이다. 마치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 비정규직 문제가 금방 해결되고 보육정책이 완벽해지고 못 사는 사람들이 잘 살게 되는 그런 세상이 올 걸로 믿었는데 그렇지 못한 데서 오는 실망감 비슷한 것이다.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라 문예진흥원에서 실시한 2004 올해의 예술상을 관심 갖고 지켜보았다. 기초예술 분야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처음 신설된 올해의 예술상은 한 해 동안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예술작품 중 창의성과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을 선정,시상하는 제도다. 뜻밖에도 30대의 신예소설가 천운영씨가 문학부문 최우수상을, 황석영씨가 우수상을 수상했다. 최고를 가리되 가능성과 실험정신을 더 높이 산 것이다. 항간에서는 나눠먹기 식이라고 비판도 있는 모양이지만(상은 나눠먹으라고 있는 것 아닌가?) 조금씩 드러나는 이 변화를 나는 즐겁게 지켜볼 생각이다. 이창동 전 문화부 장관의 말처럼 어쨌든 권력에 대한 생각까지도 바뀐 사람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가 변화해 가는 중요한 징표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선경(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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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12.0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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