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는 북향이 좋고 풍경은 등 뒤에 두어야 한다. 글을 쓰고 책을 보는 방은 반 폐쇄적이고 조금 어두워야 안정적이고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장소는 바람과 햇살이 풍부한 곳이어야 한다. 생각이 오고 머물면 생각을 풍경과 바람에게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세상을 다 담은 힘의 원천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과 잘못된 내 생각은 사심 없이 버리고 상대의 의견을 따라가는 허심탄회함은 맑은 선비들의 토론 문화는 사랑방과 정자문화의 꽃이었다. 해맑다는 말은 세상이 바로 보인다는 다른 말이다. 한국의 정자들이 다 그렇게 사방으로 널리 열려있다. 정자들이 생각을 바람에 날리고 자기를 비우는 곳이라면 서재는 책을 보다가 답답하면 뒷짐 지고 걸어가 어딘가를 내다보며 생각을 다듬어야 할 곳이다. 생각에 지치고 글에 지친 마음을 고를 그 곳에 자연을 두면 좋다. 넓은 정원이나 산이나 강이나 바다가 아니어도 좋다.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은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세상의 이치를 끌어내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싹틈을 눈치 챈다. 모두 본다고 모두 얻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주는 것들은 크기가 아니다. 맑고 깨끗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깨달음이 순간에 온다. 나뭇가지 하나에 찾아 든 바람을 보라! 햇살을 보라!가늘고 굵은 빗줄기를 보라! 그것들을 다 받아 든 나뭇가지의 사랑을 눈치 채는 일은 일상에서 시 몇 편을 얻는 일보다 크다.
자연은 나를 다스리고 가다듬게 하는 순간의 거울이다. 한 치의 거짓 없는 냉혹한 자기 거울을 갖고 살던 옛 선비들의 세상을 향한 애정이 그립다. 흘러오는 물과 잠시 머문 물과 흘러가버리는 물, 저기 마른 풀잎에 이는 한 줄기 소슬 바람 결 곁에 서 있는 그런 무심함이 그리운 시절이다.
아파트에 산지 오래 되었다. 높은 층에 살 때는 눈이나 비가 오는 게 아니라 눈비가 내려갔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애들아 눈 내려간다"고 하며 웃곤 했다. 낮은 2층에 산지도 2년 쯤 지났다. 어느 날 새벽에 나는 저절로 눈이 떠졌다. 생전 듣지 못한 소리들이 창가에 자고 있는 나를 깨웠던 것이다. 소란스러웠다. 그 소란스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였다. 마음이 조용한 새벽이라 나는 그 빗소리들을 따라 갈 수가 있었다. 그래, 저 빗소리는 아마 마로니에 넓은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다. 지금 저쪽에서 들리는 저 빗소리는 단풍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지. 가까이 들리는 저 빗소리는 풀잎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지. 그래, 저 빗소리를 물 고인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소리지. 저 소리는, 저 소리는, 하며 나는 세상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따라다니다가 귀를 기울여 그 빗소리들을 다 모아 함께 들었다.
빗소리는 내 마음 바다 위에 떨어졌다. 수도 없이 많은 동그라미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파문이었다. 내 마음에 이는 파문의 물무늬는 아름다웠다. 나는 파도를 타는 조각배처럼 바다 위에 떠돌아 다녔다. 몸은 가볍고 마음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빗소리들은 아름답고도 감미로운 음악이 되어 나는 행복의 바다 위에 띄웠던 것이다. 눈을 뚝 떴다. 음악이 따로 없다. 빗줄기들이 아파트 정원 나뭇잎 위에 수도 없이 떨어진다. 음악은 세상의 소리를 골라 곡을 붙이는 일 다름 아니다.
나는 내 책방 창가에 앉아 그렇게 빗소리를 듣거나 나뭇잎에 수도 없이 쏟아지는 햇살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의 속도를 따르고 그것들이 하는 일을 따르며 마음을 고른다. 순환과 순리를 따르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다. 농부들이 씨들이 너무 깊거나 얕게 묻히지 않고 적당하게 묻히게 하려고 밭을 고르는 것처럼, 이른 새벽 나를 찾아 온 시어들을 골라 평평한 종이 위에 한편의 시를 써 내려가듯 그렇게 말이다. 벌써 풀벌레가 운다.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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