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는 산책하는 일이 무용하다고 생각했다. 뜻 없이 걸으며 기운과 시간을 낭비하고, 생각만을 늘어뜨리다 오는 투정같은 것이라고. 땀 흘려 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복잡한 생각들을 진득하게 정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이나 때우는 한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마도 무언가 대단하게 얻고자 했던 욕심 때문이었을 테다.
머지않아 산책에 관한 오해는 풀리게 되었는데, 우연히 미륵사지에 머문 덕이었다. 전후 사정은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홀린 듯 발을 옮겨 미륵사지에 다녀온 것은 강렬하고 시원한 경험으로 남았다. 터가 널리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연못에 고인 물을 바라보다가, 빈터를 구경하며 거대했을 미륵사를 상상해 보기도 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도 완전히 잊어버려서 집에 오는 발걸음이 제법 가벼웠다. 그 뒤로도 여러 번, 털어낼 것이 있으면 미륵사지를 찾았다. 그 이후로 나에게 산책은 그런 것이 되었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출 수 있는 시간. 하천의 흐르는 물에 집중하고, 떼 지어 시간을 보내는 오리 가족을 구경하며 그들을 응원하는 것으로 충분한 시간.
『산책의 곁』은 작가가 떠올린 생각의 편린들을 살뜰하게 모은 책이다. 산책하며 곁에 둔 감상과 심상, 혹은 상상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여준다. 망종부터 소한까지, 흐르는 시간을 염두에 두면 계절감도 흠뻑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작가와 함께 걷다 보면 종종 반가운 공간들을 만나게 된다.
“망종(芒種)에 가까워지면 나는 꼭 경기전에 가서 와룡매의 그림자를 쓰다듬는다. 누워서도 녹음을 반듯이 빗어 넘긴 고목의 지조. 그것을 흠앙하며 그 곁을 지킨다. 호젓한 즐거움으로 그 풍경의 가장자리를 지키다 보면, 단단한 녹빛으로 흐드러진 매실들이 나의 시선을 이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길 바라며 나는 계속해서 그 곁에서 느긋하게 자리한다. (26쪽)”
“산의 모서리에 있기도, 강기슭의 꼭대기에 있기도 한 요월대(邀月臺)는 한벽당(寒碧堂)에 가리어 있으나 내 속에서는 앞서 있는 곳이다. 나는 줄곧 한벽당을 지나쳐 요월대에 머물러 왔다. 요월대에서 나는 흩어져 있는 침묵의 피륙과 피륙 사이에 나를 자수한다. 암벽 끝에서 기개를 잃지 않는 요월대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숙연케 한다. (56쪽.)”
계절과 공간 이외에도 작가가 꺼내는 책과 그림을 잔뜩 만날 수 있다. 그의 산책에는 전주가 있고, 고건물이 있고, 카뮈가 있고, 혜원이 있다. 산책하는 이의 글을 두고 보는 기쁨은 이런 것이다. 함께 걸어본 적 없는 이와 공간을, 생각을, 그가 본 것을 공유하며 대화를 나누는 듯한 즐거움 말이다.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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