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읍성이 한 마디 하셨습니다!
오랜만에 김제평야를 달려 고창을 다녀왔다. 김제평야는 갈 때마다 속 좁은 내게 감탄을 안겨준다. 눈길 가는 끝까지 산이 안 보이고,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강일까, 들일까, 아니면 대부분 한반도에서 보듯 산일까? 상상의 날개를 펼치도록 만든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놀랍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소박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 지평선을 보여주고 싶다. 그렇게 실제로 끝없는 땅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드넓은 꿈과 의지를 키우도록 해주고 싶다. 또 하나! 토성의 고리를 보여주고 싶다. 그렇게 이 지구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고 싶다. 좁으면 좁은 대로, 귀하면 귀한 대로, 지구에서의 삶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도록 알려주고 싶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은 여전히 줄을 세우고, 돈다발과 수능 성적이 비례함을 귀에 못이 박히게 주입하고 있다. 토성의 고리는커녕 달의 분화구에 대한 관심도 지우고 오직 점수에 목매달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기쁨과 환희, 행복이 가득한 삶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런 삶은 없다. 공자님, 부처님, 예수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런 탐욕으로 마음의 평안과 희열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가끔 있겠지만 무시해도 될 정도일 것이다. 요즘 들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지만, 아직 다수는 아닐 것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노벨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그러나 노벨이 세계에서 가장 권위적인 상을 수여하기로 다짐한 것이, 바로 자신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 즉 사람의 삶과 생명, 문명을 파괴하는 물질에 대한 반성과 후회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되살리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맞다. 노벨의 뛰어난 점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반성의 삶을 새롭게 뒤집은 데 있다. 그는 자신이 획득한 부의 크기를 맞닥뜨리는 순간, 그 부를 낳은 원천이 인간의 삶에 어떤 존재였는지를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원천이 인류 문명에 해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에 진 빚을 갚기로 했다. 그 결과물이 노벨상이었다(노벨경제학상, 그러니까 인류에게 경제적 성과를 가져다준 이에게 수여하는 상을 그가 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따라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적으로는 하루라도 빨리 노벨경제학상은 폐지되는 것이 맞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발자취를 살펴본 적이 있던가? 한 번이라도 눈앞의 아파트 가격, 눈앞의 사치명품, 눈앞의 점수 대신 먼 곳의 지평선, 높은 곳의 토성 고리, 깊은 곳의 지성을 살펴본 적이 있었던가. 노벨문학상 소식에 수백만 명이 한강 작가의 책 한 권씩을 사서 흔들고는, 불과 몇 달 후에는 다시 사치명품 시계와 핸드백, 아파트 가격표와 수능 성적표에 목매다는 삶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는가. 김제만경 들판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달려간 고창 읍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 참 따스하고 조용하고 깊었다. 그 모습이 나를 향해 속삭이는 듯했다. “타향에서 고생이 많지. 그 시끌벅적한 곳에서 힘들었지.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잠시일지언정 내 품에서 쉬거라.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쉬거라. 그리고 수면제 없이 잠 푹 자고 올라가거라.”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