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강은 오늘도 흐른다
펄 벅, 헤르만 헤세,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그리고 한강! 얼마 전 꿈에 그리던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나라 문학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석하기 어렵고, 우리말의 맛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워 노벨문학상은 우리끼리만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사그라들기 일쑤였는데,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가 드디어 나온 것이다. 놀라고 감격스러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한강 작가의 소식을 듣고 생뚱맞게도 만경강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한강을 통해 만경강이 떠오르는 건 작금의 우리지역 문화의 힘이 못내 맘에 들지 않는 극성스러운 전북인이라서 그런가보다. 만경강은 남한에서 6번째로 긴 강이다. 장수 팔공산 자락에서 발원한 금강과 섬진강이 여러 지역을 지나 서해로 남해로 흐르고, 남원 봉화산에서 발원한 남천은 임천과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있지만, 만경강은 오롯이 전북에서 발원하여 전북의 소하천을 한데 모아 새만금을 통해 서해로 흘러가는 전북의 대동맥이다. 다행히 4대강 사업에서는 비껴나갔지만, 일제강점기 인공제방을 쌓고 구불구불 흐르던 강을 반듯하게 만들면서 수탈의 역사와 함께 그 모습이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다. 만경강이라는 이름도 일제강점기에 처음 생겨났으니, 이중환의 택지리에는 사탄(沙灘),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사수강(泗水江), 동국여지승람에는 고산천을 안천(雁川), 전주천을 남천(南川), 하류를 신창진(新倉津)으로 불렀다. 또한 대동여지도에는 삼천과 합류한 전주천을 횡탄(橫灘)으로 기록하고 있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물이 보다 빠르게 흘렀음을 알 수 있다. 만경강유역에 기록된 10여 개의 포구와 나루터는 강을 따라 얼마나 많은 물자가 오고갔는지를 짐작케 한다. 만경강의 역사를 굽어굽어 올라가면 4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만경강은 전북의 역사 뿐 아니라 한민족의 역사에서도 굵직한 획을 남기고 있다. 우리민족의 근간을 이룬 농업은 청동기시대 수전농경이 발달하면서 본격화되는데, 청동기시대 유적이 가장 많이 밀집된 곳이 바로 만경강유역이다. 농자천하지대본, 전북의 뿌리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왔음이 여러 유적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전북혁신도시 일대는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마한이 시작한 곳이며, 청동기 제작기술이 발전하고 신소재인 철(鐵)이 등장하여 초기철기문화를 화려하게 꽂피운 곳이다. 이후 마한세력은 전주 탄소산단부터 완주 수계리와 상운리 일원에 1,400여기 이상의 주거지와 수백여기의 고분군을 조성하면서 거대한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백제의 고도인 금마 역시 만경강을 기반으로 성장하였으며, 견훤은 만경강을 중국과 소통하는 관문으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 전주에 흐르는 강을 한(漢)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고향에 흘렀던 사수(泗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만경강처럼 고대역사가 지속적으로 중심권역을 형성하면서 발전한 곳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 만경강의 역사를 담아내는 노력을 우리는 얼마나 했던가? 목천포에 있는 만경강문화관에 만경강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지만, 대부분 수탈의 역사이다. 만경강 역사 4만년 가운데 수탈의 역사 40년은 0.001%이다. 우리는 99.999%의 찬란한 만경강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널리 알려야 한다. 더 늦기전에 만경강의 역사를 오롯이 담아 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기를 희망해 본다. 오늘도 흐르는 만경강처럼, 그 눈부신 역사처럼, 하나 되어 나가는 힘이 절실히 필요한 요즘이다. 한수영 고고문화유산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