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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유산 창조협력위 구성…초대 위원장에 이기웅씨

전주에 개원한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직무대리 이길배)의 주요 정책의 자문 등을 위해 ‘무형유산 창조협력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는 무형문화재 전승자, 학계, 문화·예술계, 언론·출판계, 정계 인사 등 34명으로 구성된다. 초대 위원장에는 이기웅씨(출판사 열화당 대표)가 위촉됐다. 유산원은 지난 9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위촉식을 가졌다. 위원들의 임기는 2016년 4월까지 2년이다.창조협력위원회는 지난해 10월에 출범한 국립무형유산원의 정책 방향과 발전 방안에 대한 자문 역할을 맡는다. 또 일상생활에서 무형유산의 활용과, 각 전문 영역과 무형유산을 결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위원회는 앞으로 분야별 분과위원회를 추가 설치하여, 실질적으로 국립무형유산원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체계적인 자문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국립무형유산원은 창조협력위원회가 무형유산의 가치를 계승·확산하고, 본원을 무형유산의 중심으로 발돋움시킬 원동력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위원 명단 △전승자=김흥종(탈춤연합회장, 통영오광대 보유자) 안숙선(가야금 산조와 병창 보유자) 이근복(번와장 보유자) 한복려(조선궁중음식 보유자) △학계=김광억(서울대 명예교수) 김인희(연세대 명예교수) 안휘준(국외소재문화재단 이사장) 이배용(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임돈희(문화재위원회 무형분과 위원장) △문화예술계=김종규(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김혜정(경희대 혜정박물관장) 조태권(광주요 대표이사) 주혜란(남사당놀이 보존회 이사장) 이장호(영화감독) 우찬규(학고재 대표) 표미선(화랑협회 회장) 최태지(국립발레단 명예감독) 최불압(배우) 조희숙(요리연구가) 김중만(사진작가) 승효상(건축가) 안상수(시각디자이너) 임채진(한국문화공간 건축학회장) △정계=김광림(국회의원·안동) 김윤덕(국회의원·전주) 신학용(국회의원·인천) △정책=이승규(문화재청 전 차장) △언론=노재현(중앙북스 대표) 최성자(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출판=김언호(한길사 대표) 이기웅(열화당 대표) △공공기관=이삼열(아태무형유산센터 사무총장) 홍상표(한국콘텐츠진흥원장)

  • 문화일반
  • 김원용
  • 2014.04.11 23:02

미륵사지 사리장엄 '전북 보관' 관심

지난 2009년 1월 13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굴된 사리장엄이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을 비롯한 전북에 영구 보관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은 현재 익산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서 특별전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 애초 특별전은 지난달까지로 예정됐지만 전북도가 문화재청에 요구, 오는 11월 23일까지로 연장됐다. 전북도 관계자는 9일 사리장엄을 최대한 오래 간직하면서 전북에 영구 보관할 수 있도록 문화재청과 접촉하고 있다며 전시기간 연장 이유를 밝혔다. 현재대로라면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은 전시기간 종료 후 문화재청에 반납해야 한다.이 관계자는 유물 보관지는 한 번 지정되면 거의 바뀌지 않는다며 국보 지정이 확실시되는 의미 있는 유물인 만큼 국가에서 직접 관리, 서울 국립 중앙박물관에 전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고 전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부산시립박물관이나 경기도 박물관에서도 보물을 관리하고 있다며 출토지에 유물을 전시해야 한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견해이기도 하고, 연장 전시를 허락한 만큼 분위기도 나쁘지 않아 전북 보관의 당위성을 계속 피력 중이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과거와는 달리 유물이 보물이 된 후에야 국보가 될 수 있다.한편, 출토된 유물은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국가가 소유권을 가지므로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이 국립 전주박물관에 전시될 가능성도 있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의 전북 보관이 확정되고 국보 지정이 이뤄지면, 익산 지역은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6호) 등 가시적 유적유물이 많아져 국립 익산박물관 건립 추진에도 더 힘이 실릴 전망이다.국립 익산박물관 건립에는 기획재정부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반해 문화체육관광부는 긍정적 입장이다. 전북도는 현재 3억원을 들여 국립 익산박물관 건립 연구 용역을 발주한 상태로, 결과는 올해 하반기에 나온다.

  • 문화일반
  • 이영준
  • 2014.04.10 23:02

익산 모현도서관 복합문화시설로 각광

익산시립모현도서관이 서부권역 복합문화시설로 자리매김하면서 지역민들로부터 높은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다. 익산시에 따르면 개관 4주년을 맞고 있는 시립모현도서관 하루 평균 방문객이 2,000여 명에 달한다. 지난 3년간 도서회원이 136% 증가하는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면서 부속시설인 체육관의 연간 운영 수익이 9,400만원에 이르며, 각종 정책토론회 및 세미나 등을 위한 시청각실, 세미나실의 대관 또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 익산을 대표하는 복합문화시설으로 자리매김을 해가고 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특히 유아에서부터 어린이, 청소년, 성인, 어르신들까지 지역 주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고 도서관만의 특색을 살린 다양한 문화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지역주민의 문화향유와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 있는 가운데 모현도서관 운영을 본보기로 삼기 위한 전주· 완주·순창 등 타 지자체들의 견학 방문도 잇따르고 있다.모현도서관의 비결은 다름 아닌 모현동 지역 택지개발에 따른 인구수 증가로 문화기반시설에 대한 수요가 나날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임대형 민자사업(BTL) 방식으로 관련 시설을 조기에 제공한 점이 주효했다는 평가다.시립도서관 김병재 관장은 “모현도서관은 민간과 공공부문간의 전통적인 역할 분담과 고정관념을 깬 대표적인 사례로 품격 있는 익산 조성과 시민들의 정서 함양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복합문화시설로서 앞으로 더욱 성장해 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2011년 5월 개관한 모현도서관은 연면적 7,492㎡ 규모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종합자료실과 어린이자료실, 전자자료실, 자유열람실, 시청각실 등을 갖추고 있고 부대시설로 체력단련실과 탁구장 등이 들어서 있다.

  • 문화일반
  • 엄철호
  • 2014.04.10 23:02

문화계 젊은 피가 마르다 (하) 대안은

문화예술계의 신진 인력을 육성해야 한다는 데는 대다수가 공감한다. 신규 유입을 통해 기관단체의 유지발전의 자양분을 공급하는 한편 인력 보충으로 질을 높여야 한다는 차원에서다. 이를 위해 도내 예술계 인사들은 후진 양성을 위해 인식 개선과 투자가 이뤄져야 하며 관립단체의 부족한 인력 충원 등을 제시했다. 미술작가 A씨는 청년을 위한 전북은 없다며 경기문화재단의 레지던시, 부산문화예술창작공간, 광주문화재단의 미디어아트, 서울시의 문래예술공장 등 다른 지역은 자치단체 차원에서 창작거주 공간을 마련하며 젊은 작가를 양성하고 있지만 등 도내에는 미약한 만큼 적극적인 레지던시 운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견 미술작가 B씨는 현재 각 기관단체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며 일정 부분 세대교체도 필요하다고 비판했다. 연극인 C씨는 일부 신진 배우들은 실력에 관계 없이 처음부터 무대에 서기를 바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한다며 일부 민간 극단에서는 배우를 키워 놓으면 나가는 일이 반복되는 만큼 경영의 투명성 제고와 소통 강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인력의 보충순환을 위해서는 관립단체가 신규 예술인의 양성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연극인 D씨는 젊은 피 수혈이 도내 예술계의 지속적인 과제인 만큼 공공성을 띠는 시립극단의 경우 겹업으로 자리를 잡은 선배들은 후진 양성 차원에서 순환이 이뤄져야 한다며 좀더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인력으로 부족 인원을 보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악인 E씨는 전북이 전통문화도시를 내세운다면 지역의 관립단체만이라도 필요한 인원을 채우고 전공자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연극인 C씨는 연수단원 또는 준단원처럼 일정기간 실력을 키우는 제도로 검증된 인력을 공급할 수 있다고 보탰다. 준단원 또는 연수단원 제도의 장점에도 또다른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우려는 상존한다. 차선책은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규 단원을 뽑아야 한다는 것.도립국악원 고양곤 노조지부장은 준단원제가 여러 장점을 지녀 국립기관에서 이를 실시하고 있지만 비정규직으로 악용할 소지가 많은 점은 우려스러운 만큼 최종적으로는 정식 단원을 뽑아야 한다며 도립국악원의 경우 지난 2007년 이후 신규 충원이 이뤄지지 않아 실제 작품 제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재 노사간 운영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으며, 인력 충원도 그에 따라 결론이 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끝>

  • 문화일반
  • 이세명
  • 2014.04.09 23:02

문화계 젊은 피가 마르다 (상) 도내 예술단체·협회 실태

도내 문화계가 늙어가고 있다. 각 단체협회 등이 젊은 피를 수혈하지 못한 채 그 나물에 그 밥으로 지속하고 있다는 목소리다. 문화예술의 성장과 발전의 원천이라는 신진 작가와 지역 문화계의 괴리가 커지는 지점이다. 이에 본보는 2차례에 걸쳐 그 실태를 살펴보고 문화예술의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도내 중견작가 A씨(48)는 우리 지역에서는 한번 막내면 20년간 막내다고 푸념한다. 각종 지원금과 보조 사업을 펼치는 협회에 젊은 작가가 늘지 않는다는 토로다. 미술협회 전북도지회에도 회원 1280여명 가운데 20대~30대 초반 회원은 손에 꼽는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협회 산하 청년분과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중반이 주류다.미술전공자 B씨(32)는 작품활동은 하지 않으면서 권의주의 태도로 훈계만 하려는 일부 선배들을 보면서 협회에 가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특정 계파에 줄서기를 강요하는 문화도 젊은 작가들이 협회에 나서지 않는 이유 중 하다고 귀띔했다.인력난을 겪는 연극계도 젊은층의 유입이 드문 상황이다. 연극협회 전주시지부의 경우 지난해 말 기준 회원 174명 가운데 나이가 확인 가능한 167명 중 30살 이하인 1984년 이후 출생자는 38명에 그쳤다. 더욱이 20대 회원은 1991년생 1명 뿐이었다. 관립단체인 시립극단도 30대가 3명에 불과해 다년간 인적 순환이 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내 대표적인 관립단체인 전북도립국악원의 인력 미충원 문제는 고질적이다. 지난해 기준 도립국악원 인원은 121명으로 정원 144명의 23명이 결원이다. 예술단 가운데 무용단은 정원 28명 중 7명, 창극단과 관현악단도 각 6명씩 부족했다. 이는 지난 2007년 이후 단 1명도 신규 인력을 영입하지 않고 객원으로 충원했기 때문이다.국악인 C씨(46)는 관립단체에서 결원이 생기면 전공 인력을 뽑지 않고 그대로 운영한다며 도내 관련 대학에서도 매해 100여명 이상 졸업생이 나오지만 갈 곳이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어 후배들은 선배들이 자리를 안 내줘서 갈데가 없다고 했지만 비켜준다고 해서 들어갈 수 없는 상태다며 전공자의 꿈이 국악 강사가 되는 실정이다고 덧붙였다. 도내 문화예술계에 젊은 피가 마르고 있다. 각 협회나 기관단체에 젊은 인력이 채워지지 않으면서 정체된 문화계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도내 대표적인 문학단체인 전북작가회의 관계자는 몇년 전 전북문인협회의 평균 나이가 61세였으며, 전북작가회의도 180여명의 가운데 50대 전후가 다수이고 35살이 막내다면서 최근 등단한 젊은층은 개인주의로 점점 협회에 가입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강해 각 협회가 늙고 있다고 말했다.전북미협 관계자는 원래부터 협회에 젊은 작가가 드문데다 개인전 개최 경험과 가입비 부담 등 가입 절차가 까다로운 점도 부담으로 작용한다면서도 협회 내부에서도 젊은 작가를 양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회원전 외에 아트페어나 전시 등에서는 비회원의 젊은 작가를 참여시켜 관심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 문화일반
  • 이세명
  • 2014.04.08 23:02

다문화 가족들 '찰칵'

서재를 배경으로 한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셔터 소리와 함께 카메라 렌즈에 담겼다. 촬영 작가는 연신 자세 수정과 시선 처리를 주문했다. “엄마 턱과 아기 머리가 일자가 되면 그림자가 져서 안 돼요. 고개를 조그만 옆으로 해주세요.” 지난 5일 오후 1시께 전북은행 본점에서 다문화 가족의 사진 찍기가 진행됐다. 도내 14개 시·군에서 선정된 14가족이 삼삼오오 줄을 서며 촬영을 기다렸다. 이날 사진 촬영은 JB전북은행과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가 추진하는 ‘2014년 다문화 가정 온 가족 친정 나들이’사업과 함께 전북장애인복지관의 협력으로 이뤄졌다. 14가족이 오는 26일 각자의 친정으로 출발할 때 선물로 가져갈 가족사진을 찍은 것.김제에서 베트남 출신 아내, 6살 아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이모 씨(49)는 “아내의 어머니와 처형이 있는 친정에 가져갈 선물이다”며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어서 신청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아내는 “사진이 언제 나오냐”는 물음을 되풀이하며, 가족사진에 설레는 마음을 나타냈다.한 가족당 10여분간 이뤄지는 촬영시간 내내 아이들이 조명 전선을 건드리는 아찔한 순간도, 장난감으로 아이들의 시선을 유도해야 하는 수고가 뒤따랐다. 사진을 촬영하는 전북장애인복지관의 오준규 사회복지사는 “부모보다는 아이들의 표정에 초점을 맞춘다”며 “아이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담았다”고 말했다.

  • 문화일반
  • 이세명
  • 2014.04.07 23:02

[전문가 제언] "대중국특구, 삼례교육특구부터 시작"

1929년, 오래 된 어느 일간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성난 한국인들이 삼례역 앞으로 모여들었다. 만주로 떠나간 한인들을 중국인들이 차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삼례로 모여들어 삼례역 주변의 중국인 상가 앞에서 시위가 있었다. 삼례에서 이 같은 시위가 있었다는 보도로 보아 당시에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삼례에는 꽤 많은 중국인들이 거주한다. 이들은 주로 우석대 학생들로 1000여 명에 이른다. 특히 삼례지역 성인 인구 구성으로 보면 10%가 넘는 숫자다. 대부분의 광역단체들은 새로운 지역개발 방법의 하나로 대중국특구를 추진하고 있다. 전북도 마찬가지로 새만금권을 대중국 관문으로 내세우며 대중국특구를 조성하기 위한 방안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구호만 거창할 뿐 관계된 지역 중 어느 한 곳도 실제 표본이 될 만한 모델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특구에 관한 과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접근 방법을 달리하거나 방향을 틀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중국인들을 부르려면 중국인들에게 익숙하고 편리하도록 사회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1차적인 조건이자 시작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삼례는 중국특구로 만들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우석대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중국교육문화특구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래의 사항들이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첫째, 교육제도의 특화이다. 초중학교에서는 중국어 교육시간을 지정하고, 중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보충한다. 그리고 삼례읍에서는 전국 초등학생 중국어 경연대회와 같은 대회를 개최하고, 중국유학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지역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중국유학생이 많은 지역이므로 군과 교육당국의 관심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해결될 문제라고 본다. 중국어를 제일 잘하는 학생들이 사는 곳, 나아가서는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와 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 삼례의 중국에 대한 발화점은 학생들이 될 것이다.둘째, 중국인을 배려한 사회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 보건의료에서부터 치안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공공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전국 최초로 중국인을 위한 조례를 만들어서 중국인이 도움을 청했을 때, 어느 지역보다도 빨리 문제를 해결해주는 제도가 있는 지역이 바로 삼례여야 한다.셋째, 중국문화 상징공간을 조성해야 한다. 일명리틀차이나타운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중국학생들에게는 식품점, 음식점 등 서비스시설이 필요하고, 중국풍의 숙박시설도 있으면 좋겠다. 또한 중국을 상징할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든다거나 중국위인을 기릴 수 있는 시설물을 세우는 등 문화적으로 특화해야 한다. 특히 CHINESE ZONE이라 명명하여 중국어만으로 소통하는 공간이 생긴다면 실지로 중국어학원 등 유관 교육시설의 설립과 활성화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시설이 들어찬 거리는 단순히 중국무늬의 옷을 입고 있는 상업시설만 즐비한 그런 피상적인 차이나타운과는 차원이 다른 공간과 거리가 될 것이다. 생활 속의 문화가 살아있어야만 비로소 실질적인 차이나타운의 형태를 갖출 수 있다.넷째, 지역산업과의 결합이다. 중국과 관련된 특화산업을 찾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예를 들면 농업특화 같은 것이 있다. 지역농가에서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청경채 등 중국인 수요가 많은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이다. 양국의 식문화교류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올 수 있는 농업특화산업은 단순한 중국농산물특화기지가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다양한 가치를 존중받는 중국음식 및 식품산업을 한국 내에서 선점할 수 있는 중요한 식품산업기반이 될 수 있다. 다섯째, 중국축제문화를 도입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날에 행사를 개최하면 자연적으로 중국인들이 모여들 것이다. 대부분의 전북 지자체는 중국 도시들과 자매결연 하고 있어서 자매도시 축제만 연결해도 한 달에 한번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이런 공간과 축제가 만들어지면 삼례에는 한국 최초의 중국관광테마파크가 만들어지게 된다. 전북은 중국문화를 간직한 독특한 관광자원을 하나 더 얻게 되는 것이다. 특히 중국관광객들에게는 한국여행 중에도 중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 인식되어 꼭 찾아 가고픈 이색적인 관광지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런 특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 초중학교의 어학프로그램이나 리틀 차이나타운의 경영 및 축제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구가 완성되면 유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질도 높아지고, 생활만족도도 높아질 것이며, 그것은 다시 중국학생들을 한국으로 유인하는 데 순작용을 할 것이다. 또한 양국의 학생들이 문화와 사업을 공유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비즈니스가 개발될 수 있다. 삼례는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이 되어 자연스럽게 대중국특구로서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생활하기에 가장 편리한 도시라야 투자하고 싶어지는 도시가 될 것이다. 중국은 이제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개념조차 모호한 투자유치형 대중국특구를 외치며 무한정 기다리는 시기가 이제는 아니다. 먼저 배려하고 함께 나누고자 터전을 마련하는 일, 이것이 손님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중국인들 스스로가 찾아오고 싶어지는 특별한 구역을 만드는 삼례, 삼례는 그 한 가지 플랜만으로도 전북을 현실적인 대중국특구사업의 무대 위에 올려놓는 일이 될 것이다.

  • 문화일반
  • 기고
  • 2014.04.03 23:02

농민군 대둔산 최후 항전지 동학혁명 문화재로 지정을

동학농민혁명 발생 2주갑(120년)을 맞아 완주군 운주면 대둔산 7-8부 능선에 자리잡은 대둔산 최후 항전지를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15-1번지 해발 715m의 거대한 암반의 상단에 자리한 최후 항전지는 동학농민군이 1894년 11월 중순부터 다음해 2월 18일까지 3개월여 동안 관군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곳이다.1999년 이곳을 지표조사한 신순철 원광학원 이사장(당시 원광대 사학과 교수)과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당시 사학과 박사과정)은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티에서 패하고, 주력부대가 논산을 거쳐 김제 원평으로 물러나면서 다시 패한 후, 태인의 마지막 전투를 거치며 소멸의 길을 걸었다며 하지만 일부 동학농민군은 동부 산간지역으로 숨어들어 끝까지 항전했는데, 이들 지역 중 한곳이 대둔산 최후 항전지라고 설명했다.대둔산 최후 항전지는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대부분 사라진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 동학혁명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50여명의 동학농민군은 최후 항전지에서 자연동굴과 절벽 위에 3채의 집을 짓고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관군과 민보군의 대포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항전을 이어갔다.1895년 2월 18일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함락되었을 때도 항전의 의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동학농민군은 대부분 사살 되거나 절벽에서 뛰어 내리며 저항했고, 소년 1명만이 살아 남았다.최후 항전지는 암벽등반가들이 아니면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자리잡아, 당시 원형이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더하다.이곳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대둔산 마천대 정상에 올랐다 다시 내려오는 방법과 계곡에서 접근하는 방법이 있지만, 등산로가 따로 없어 일반인에겐 무척 까다롭고 힘든 루트이다. 한 덩어리의 바위로 이뤄진 항전지는 높은 곳은 120m이고, 가장 낮은 서쪽도 4m 정도의 절벽 형태이다.완주군은 사학계의 문화재 지정 주장에 대해 최후 항전지에 대한 현장조사와 사학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한 후 전라북도와 함께 문화재 지정 등 절차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대둔산 항전지는 등록문화재로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며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타지역 유적지와 함께 문화재 등록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문화일반
  • 김경모
  • 2014.04.02 23:02

[6.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따순밥] "자식 입에 '따순밥' 들어가는 건 보기만 해도 다 '따순' 일이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게 으뜸이라고 했다. 다들 춥고 배고팠던 시절 얘기다. 배고픔만 면해도 행복하다고 믿었다. 바로 엊그제 일 같기만 하다. 물론 요즘에도 우리 사회 도처에는 그 옛날처럼 춥고 배고픈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런 말을 직설화법으로 쓰는 일은 드물어졌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밥심으로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바로 그 시절 이 땅의 어머니들이 그 고된 일상 속에서도 끝끝내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게 하나 있다. 지아비와 자식들을 위해 당신 손으로 직접 따순밥(뜨신밥)을 짓는 일이었다. 무쇠 솥에 쌀을 씻어 안치고 장작불을 때야 하는 고된 과정을 거쳐야 했으면서도 따순밥 짓는 일을 번거롭게 생각하는 어머니는 없었다. 어린 자식 입에 따순밥 들어가는 건 보기만 해도 속까지 다 따순 일이었다. 이러저런 이유로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마다 어머니들은 걸레질을 멈추고 한숨을 쉬면서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야가, 밥은 제때 챙겨먹고 다니는지. 그래서였을까. 어쩌다 전화연락이라도 닿으면 맨 먼저 안부를 묻는다는 게 고작 이랬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지? 전화세 많이 나온다면서 통화를 서둘러 마치다가도 이렇게 당부하는 것 또한 결코 잊는 법이 없었다. 끼니 거르지 말고, 밥 잘 챙겨먹어라.명절을 쇠고 떠나는 자식들의 자동차 트렁크에 그 어머니들이 직접 농사를 지은 온갖 곡식이나 고추장, 된장 등속을 바리바리 챙겨서 실어 보내는 것 또한 끼니 거르지 않고 따순밥 잘 챙겨먹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니겠는가. 따뜻한 밥은 어머니의 정성이었다. 간절한 소망이었다. 자식에게는 또 그게 보약이었다. 비탄민이 따로 없었다. 돌이켜보면 추억 자체였다. 아련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귀하고 풍족한 삶의 상징이기도 했다. 찬밥은 당연히 그 반대였다.오죽하면 남에게 괄시받고 소외된 사람이나 하찮게 취급받는 물건을 싸잡아서 찬밥 신세라고 했겠는가. 옛날에 걸인들이 자신을 한껏 낮춰서 얻어간 것도 찬밥 한 덩이였다. 월매도 거지 행색으로 나타난 사위에게는 찬밥을 먹였다. 그나마 향단이를 시켜서.소설가 이외수는 젊었을 적 한때 백열전구로 이불 속을 덥혀서 겨울 추위를 견뎠다고 회고한 바 있다. 밥도 한꺼번에 몽땅 지어서 꽁꽁 얼렸다가 그걸 조금씩 녹여서 먹었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그라고 어찌 따뜻한 밥이 그립지 않았으랴.누가 뭐래도 밥은 따뜻한 게 으뜸이다. 무쇠솥에 쌀을 안치고 장작불을 때든, 돌솥에 가스불을 피우든, 잡곡의 종류에 따라 전기밥솥의 버튼을 눌러서든 방금 지어서 하얀 김이 피어나는 바로 그런 밥 말이다. 김밥이나 주먹밥, 초밥 등의 경우는 좀 다를 것 같지만 이 또한 새로 지은 따순밥을 알맞게 식혀서 써야 제맛이다. 일본제 코끼리밥통 사건으로 온 나라가 한바탕 어수선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모 회사에서 만든 전기밥솥을 사들고 공항 출국장을 나서는 중국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런 풍경도 근원으로 들어가 보면 따순밥 때문이다. 동북아 3개국의 윤택한 식생활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따순밥인 것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겨울철에는 교실에서 조개탄이나 톱밥 난로에 벤또를 층층으로 쌓아서 밥을 데워 먹었다. 요즘에는 인스턴트 밥을 사서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막 지은 것 같은 따순밥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길거리를 오가면서 사먹는 노량진 고시촌의 컵밥에도 온기는 있다. 그림처럼 따순밥을 파는 식당들도 어딜 가나 즐비하다. 그 어떤 따뜻한 밥인들 집밥만할까. 그 시절 어느날 저녁 끼니때도 한참 지나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집에 돌아오면 무쇠 솥에 지은 밥을 그릇에 따로 담아서 아랫목 이불속 깊이 묻어두었다가 꺼내주시던 어머니의 그 따순밥에 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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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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