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문화콘텐츠 50] (37)전주 한옥마을의 선비들
전주향교를 마주보고 왼편에 난 골목길을 따라 오목대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허름한 모정(茅亭)이 하나 보인다. 네댓 명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이 작은 정자에는 '봉상천인 용세구연(鳳翔千 龍勢九淵)'이라 적힌 현판이 달려있다. "봉황은 천 리 길을 날고 용은 구연(九淵)에 자리하고 있다"란 뜻이다. 유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유학에서 말하는 '도(道)의 궁극'을 설명한 글이라고 한다. 간재는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활동하며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었다고 평가를 받는 대학자이다. 학문의 깊이가 매우 깊고 심지가 굳어 많은 제자가 따랐다. 그 간재의 글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전주 한옥마을이 간재의 제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간재의 제자 중에서도 중요한 세 제자를 특별히 '호남 삼재(三齋)'라고 말하는데,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과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그리고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을 의미한다. 한옥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다보면 '최학자' 또는 '이학자'에 대한 얘기를 종종 듣게 된다. 여기서 최학자는 금재를, 이학자는 고재를 일컫는다. 때때로 최학자나 이학자를 그들의 자손이나 다른 학자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한옥마을 토박이들은 이 두 분을 인품이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학자로 기억한다. 진동규 시인이 쓴 「내 친구 최학자 손자」라는 시에서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최학자가 창암 이삼만과 비견되는 전설적인 서예가로 묘사되고 있다. 최학자나 이학자의 이야기가 한옥마을에서 변용되면서 전승돼 왔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전주 교동에서 태어난 금재는 600년 된 그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월당공 최담의 후예이다. 스승인 간재는 "금재는 나에 못지않은 학자이며, 그의 학문을 조선에서도 따를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당시 옥류동(교동)에 '염수당(念修堂)'이라는 서당을 열고 후학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또한 '옥류정사(玉流精舍)'를 지어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을 모았다. 이때부터 한옥마을에 전주 인근에 살던 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성당 박인규다. 정읍에 살던 박인규는 아예 살던 집인 '구강재(龜岡齋)'를 통째로 이축하여 정착했다. 금재가 작고한 후에도 성당은 최규만 등과 함께 서당을 운영했다. 그러나 염수당은 1966년에 폐교하게 된다.간재가 금재 못지않게 학문을 격찬했던 고재 이병은도 또한, 구이에서 '남안재(南安齋)'라는 서당을 열고 강학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염재야록(念齋野錄) 사건' 이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남안재를 옮겨 짓고 한옥마을로 들어왔다. 「염재야록」은 조희제(趙熙濟)가 야사로 엮은 독립운동사인데, 이 서책의 서문을 금재가, 발문은 고재가 썼다. 두 학자는 이 일 때문에 나란히 옥고를 치렀다. 고재의 최대 업적은 전주향교를 지킨 일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향교가 피폐해져 가는 것을 보다 못해, 원래 선비는 향교 출입을 자제해야 한다는 원칙을 깨고 향교재건에 직접 나섰다. 계를 통해 자금을 마련하여, 향교에 모셔진 성현들의 위패를 지키고 장서를 보존하는 데 힘을 썼다. 그의 아들인 면와 이도형이 그 일의 선봉을 섰으며, 지금은 그의 손자인 이남안이 향교 일을 돌보고 있다. 삼대에 걸쳐 향교를 지킨 것이다. 향교 정문에 있는 비문 중 하나는 그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다.유재는 고향인 김제에서 '요교정사(蓼橋精舍)'를 통해 후진양성에 전념하였고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대신 그의 아들인 강암 송성용이 한옥마을에 정착하여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필명을 떨쳤다. 강암이 살던 집이 강암서예관 뒤에 있는 '아석재(我石齋)'다. 강암의 부인이 고재의 딸인데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상투와 갓을 쓰고 살았던 강암이 국전 상을 받기 위해 상투를 자르자, 부인 이씨가 대성통곡을 하며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강암이 머리를 다시 길러 상투를 틀고 나서야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선비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그밖에도 수많은 학자들이 한옥마을에 자리 잡거나 드나들었고, 한옥마을에는 그들의 삶을 담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김경안, 이종림, 이주필, 조기주, 박종익, 윤제술, 엄명섭, 박종호, 송준호, 나진선, 송열, 엄명섭, 김상기 등이 그들이다.그러나 이들의 이야기와 자취는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이들과 관련된 상당히 중요한 유적들이 훼손되고 있다. 명필 이삼만이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 글씨와 함께, 금재 최병심의 서당터와 묘역이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이 방치되어 있다. 금재의 사우인 옥류정사는 폐허가 되어가고, 단아한 일자형 한옥이었던 성당의 구강재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훼손이 심한 상태다. 고재의 남안재는 80년대에 시멘트집으로 개축되어서, 지금은 강암이 쓴 당호(堂號)만이 그 흔적을 증언할 뿐이다.혹자는 낡은 체제의 유산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가 없고, 한옥마을 학자들의 삶은 시대를 뛰어넘는 충분한 가치를 보여준다. 증자(曾子)는 선비의 중요한 덕목을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선비는 "인(仁)으로써 자기 짐을 삼아 죽은 뒤에서야 끝나니 삶이 무겁고", 그래서 "선비는 넓고 굳세야" 한다고 했다. 양반이 계급을 보이는 개념이라면 선비는 정신적, 도덕적 수준을 표상하는 개념인데, 한옥마을 학자들은 그 선비의 실체가 무엇인지 '가까운 과거'에서 평생의 실천을 통해 보여줬다. 무엇보다도 한옥마을 선비들의 삶은 무궁무진한 스토리텔링의 원천이다. 장소마케팅을 위해 없는 이야기도 만들어내고 근거가 미약한 전통도 재창조되는 마당이다. 그런데도 사회문화적 가치가 크고 유·무형의 유산도 확실한 한옥마을 선비들을 주목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합당한 정책과 방안을 세워야 한다. /이경진 문화전문객원기자(익산주얼리엑스포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