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만난 작가] 문신 시인이 만난 박남준 시인
애기똥풀꽃이 싯누렇게 핀 날이었으니 아마도 이맘때였을 것이다. 1998년 봄, 모악산 기슭에 자리한 모악산방에서 박남준 시인을 처음 만났다. 그날 나는 뜻하지 않게 시인에게서 술잔을 건네받았고 또 친필 서명본까지 얻는 행운을 누렸다. 내가 갖고 있는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의 표지를 넘겨보면 ‘술 잘 마시는 날이 많기를’이라는 시인의 당부 말이 남아 있다. 그 밑에 전화번호까지 친절하게 남겨주었으니 수시로 혹은 때때로 전화를 걸어도 좋다는 허락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후 그것들을 영영 잊고 지냈다. 술 잘 마시는 날이 아주 드물었음은 물론 전화 한 번 걸지 못했다.모악산방에서 나는 시인의 켜켜를 훔쳐보았다고 생각했다. 한때 무당이 살았다던 집에서 한 무더기의 책들과 가지런히 층을 이룬 음반들을 보며 나는 시인의 삶을 오롯하게 읽어냈다고 치기어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그건 땅 위로 솟아난 풀잎의 모습일 뿐이었다. 내내 그렇게 생각해왔으니 땅 속에 감추어진 그 속내의 무늬는 아연 망연하기만 했다.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박남준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만남에서 전화번호를 얻은 이후 구 년만이었다. 내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시인은 선선히 약속을 잡아주었다. 광주의 어느 갤러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곳은 시인의 전시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여서 혹여 소란스러울지 모르겠다는 우려도 덧붙여주었다.예상대로 갤러리 안에는 많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시인을 만나는데 커피숍이나 경양식집이었으면 얼마나 멋없는 일인가. 시인이 그린 그림이 전시되고 있는 갤러리는 시인을 만나기에 참으로 마땅한 장소였다.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부터 풀어나가게 되었다.노래면 노래, 조각이면 조각, 그림이면 그림“장작 하나를 아궁이에 밀어 넣다가 문득 나무의 무늬를 보고 말았지. 순간 어떤 스침이 있었는지 몰라. 서둘러 그 장작을 꺼내놓고 오래 그 무늬를 바라보았어.”시인은 나무의 무늬에서 어떤 생명을 읽었다고 했다. 그래서 무턱대고 무늬의 결을 칼로 터주었더니 그게 어떤 형상으로 살아났다고 했다. 아마도 오래 혼자 지내다보니 외로움은 아니고 다만 외로움 비슷한 것들이 모여 서로의 호흡을 느껴보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 후로,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심심해서’ 그림도 그리게 되었다고 했다. 시인은 심심함이라고 말했지만 어쩐지 그 말에는 외로움 비슷한 감정이 슬쩍 엿보였다. 아무렴 홀로 헤쳐 가는 세월의 강줄기에 외로움 비슷한 길동무라도 함께 해야 운치가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시를 쓰게 된 것도 외로움 비슷한 생활 탓이었을까? 거기에도 어떤 무늬의 스밈 같은 사연이 있다. 그 얘기를 꺼내는 순간만큼 시인의 눈우물이 깊어 보인 적은 없었다.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던 날이었다. 훈련 동기 가운데 한 친구가 슬그머니 다가와 ‘너에게 시 한 편을 써서 주고 싶었는데 다 쓰지는 못했다.’면서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때 시인의 손에는 마침 빵 봉투 하나가 들려있었는데 시인은 그것의 절반을 뚝 떼어 그 친구에게 건넸다고 한다.“바람으로 시작한 봄은 건조했다/실로 건조한 흔들림이/유난히 까치집이 많은 미루나무 숲에/비어 있다.”그때 쪽지에 적혀있던 시구를 시인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시인은 속으로 ‘나중에 만나게 되면 내가 이 시를 완성해서 너에게 주마.’라고 다짐했단다.스밈, 그 서러움이처럼 사소한 인연일지라도 스미게 만들 줄 아는 시인은 독자에게 서명을 해줄 때에도 꽃잎 하나, 들풀 한 잎을 그려 넣어줄 줄 안다. 시인이 그렇게 하는 데에는 다소 서러운 에피소드 한 자락이 깔려 있다.“언젠가 서울에서 팬 사인회를 했어. 당시 도종환 시인, 김용택 시인, 안도현 시인 등과 같이 팬 사인회를 하는데, 뭐 나는 별로 유명하지 못했는지 내 앞에는 팬들이 거의 없었어.”이 얼마나 서러운 이야기인가. 하지만 시인은 장난끼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 때를 회상했다. 줄 선 사람은 적고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넉넉해서 가급적이면 한 사람이라도 붙잡고 시간을 오래 끌어볼 요량으로 정성스럽게 꽃잎을 그려주었단다. 한명 두명 그렇게 하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서 어느 순간에는 시인의 줄에만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팬 사인회가 끝나서 슬금슬금 자리를 뜨는데 책도 아니고 연습장을 찢어서 온 사람, 광고 전단지의 뒷면을 내미는 사람, 어떤 이는 팔뚝을 내밀기도 하여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꽃잎, 풀잎을 그려주었단다.시인은 이렇듯 사람들에게 스며들 줄 안다. 그래서 박남준 시인은 천상 시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시인이 원고 없이 시 낭송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그것은 내 콤플렉스 탓이지. 나는 남들 앞에 나서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차마 원고를 볼 수가 없어. 그러니 외울 수밖에.”꽃씨들이 퍼져나가다시인이 낭송해주는 시를 유심히 들어보면 나무와 풀에 관한 이야기들이 유독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건 시인의 생활이 고스란히 스며든 흔적들이다. 지난 2003년 시인은 모악산 자락에서 경상남도 하동 악양 땅으로 거처를 옮겼다. 평생을 식물처럼 한 곳에 뿌리 내리고 살 줄 알았는데 홀연한 이사였다. 악양은 지인들이 시인 모르게 마련해놓은 거처였다.“처음으로 내 소유물을 가졌다. 그랬더니 의료보험료도 몇 천 원 올랐고, 평생 처음으로 재산세라는 세금도 내보았다.”시인은 악양 이사를 한동안 망설였다고 한다. 그 심정이 ‘이사, 악양’이라는 시에 고스란히 스며있다.“결국 남쪽 악양 방면으로 길을 꺾었다/하루 종일 해가 들었다/밥을 짓고 국 끓이며/어쩌다 생선 한 토막의 비린내를 구웠으나/밥상머리 맞은편/내 뼈를 발라 살점을 얹어줄 사람의/늘 비어 있던 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모악산방에서나 악양에서나 시인의 맞은편은 비어 있다. 그 자리를 꽃이며 나무며 풀들이며 새소리며 별자리들이 채워주었다. 그렇지만 악양은 해가 들이치는 곳이었다. 사실 모악산방은 늘 그늘이 드리워 습습했다. 그러다보니 악양에서 쓴 시에서는 마른 풀냄새가 난다고 시인은 말했다.그 말을 듣는 찰나 시인이 전시해놓은 그림 한 점이 떠올랐다. ‘꽃씨’라는 제목이 붙은 그 아래 이런 글귀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꽃씨들이 퍼져나가 세상을 환히 물들이듯이.”아무렴, 시인의 악양행은 세상을 환히 물들이기 위함이리라. 한그루 나무 같은 시인이 모악산에 뿌리를 두고 꽃씨를 먼 남쪽 악양에까지 퍼뜨렸으니 그 행보가 범상치만은 않을 것 같다.시인과 헤어져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내내 훈훈했다. 많은 말들이 서로에게 스몄으나 이쯤에서 갈무리하고 나머지는 마음에만 담아두고자 한다. 그 말들이 언젠가는 꽃씨들처럼 퍼져나가 세상을 환히 물들이는 날이 분명 있을 터이다.박남준 시인은전시회가 끝난 뒤풀이자리에서 함께 소주를 마셨다. 시인은 소주 한 잔을 비운 뒤 살아온 내력을 주섬주섬 이야기해주었다.1957년 전남 법성포에서 태어난 시인의 본적은 강원도라고 했다. 시인의 아버지는 가난한 의료 노동자였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덕분으로 어린 나이에 병원 사환으로 들어가 주사 놓는 일 등을 배웠다. 돌팔이였음에도 솜씨가 제법 비상했던지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았고 병원 원장도 그런 아버지를 전적으로 믿고 병원을 맡길 정도였다.그러던 어느 날, 놀다가 저물녘에 집으로 돌아갔더니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사위의 집을 방문했던 외할아버지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아버지가 끌려간 것이었다. 사위가 장인을 신고하지 않았다고, 딸이 아버지를, 아내가 남편을 신고하지 않았다고 한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그런 시절이었다.아버지를 면회했던 기억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날 어머니와 서대문 형무소로 면회를 갔더니 어떤 메마른 손이 창살 너머로 시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머니는 그 사람이 아버지라고 말해주었지만 시인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메마른 손이 아득해서 싫었다고 한다.이러한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가 시인이 사십대에 내는 마지막 시집 『적막』에 더러 나타나고 있다. 이제야 가족사를 쓰게 된 건 스스로 늙어가는 탓이라고 시인은 씁쓸하게 말한다. 그렇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어쩔 수 없었던 우리 민족사의 비극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아쉬움이 더 크단다.시인은 유소년 시절은 서울에서 보냈고 청장년 시절의 대부분을 전주에서 났다. 그리고 지금은 이십여 년의 전주생활을 접고 경상남도 하동 악양 땅에 정착했다. 하지만 지나온 행보가 그러했듯이 어느 날 불쑥 북쪽이나 동쪽으로 길을 꺾어들 지도 모른다.1984년 『시인』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은 시집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풀여치의 노래』,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적막』, 산문집 『나비가 날아간 자리』, 『별의 안부를 묻는다』,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 『꽃이 진다 꽃이 핀다』, 판화에세이 『생명, 그 나무에 새긴 이름』, 여행에세이 『깊고 푸른 바다를 보았다』, 시와 에세이 『바다가 푸른 이유』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