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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가야 찾기 어디까지 왔나] (하) 쟁점과 과제

전북 가야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작업은 진전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도내에서 가야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유적은 계속 발굴되고 있지만, 독자세력의 존재여부를 규명할 만한 검증이 더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북만의 특징을 보여주는 봉수와 제철유적의 시기규명, 문헌사료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해석문제가 관건이다. 가야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다소 이견이 큰 상황이다. 이에 철저한 학술연구와 고증을 바탕에 두고 전북 가야를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 쟁점-대가야 하위집단 vs 독자세력 학계에서는 남원 운봉고원과 장수 일대에 존재했던 세력을 대가야의 하위집단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익명을 요구한 고대사 박사는 4일 경북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가 섬진강까지 유역을 확장했고, 순천까지 대가야 묘제가 있다며 삼국유사 등 문헌사료를 통해 봤을 때도 통설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전북에서는 이 세력을 백제와 대가야 사이에 있었던 독자적 가야 세력으로 보고 있다. 봉수와 제철유적, 중국계 청자인 계수호(鷄首壺), 고분군을 근거로 들고 있으며, 존재했던 시기도 5세기 초부터 6세기까지 본다. 전북도 노기환 학예사는 특히 계수호는 중국과의 독자적인 외교 가능성을 시사한다며 대가야에 귀속되지 않은 느슨한 연맹체 상태로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연구와 고증, 발굴성과를 축적한 뒤, 통설과 비교분석하면서 입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역의 요구를 대변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기경량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가야사 같은 경우 자신이 속한 지역의 역사가 가장 가치있다는 사고에 사로잡혀 확대해석하는 경향도 있다며 전문가와 학계가 냉정한 시각을 바탕에 두고 철저한 검증과 논의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 제철유적과 봉수 시기 규명 제철유적에 대한 시기비정도 과제다. 현재 전북에서 발굴된 제철유적 전체가 가야가 존재했던 고대시기에 국한해서 볼 수 없다는 반론이 나온다. 조선시대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고대시기부터 존재했던 모든 제철 산지가 나오는 데, 전북과 관련된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고대사학계에서도 전북에 제철유적이 존재했던 시기를 고대로 한정하긴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제철 유적 전문가로 유명한 한신대학교 이남규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조선 후기 이 지역에 제철산지가 조성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봉수도 제철유적과 마찬가지로 고대시기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 제기된다. 봉수제의 운영 초기 단계 시대에 100여개나 되는 봉수를 운영했다고 보긴 어려운데다, 불을 일으키는 발화구의 성격도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고대사 박사는 봉수는 먼 곳의 소식을 중앙에 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아차산의 보루성에 백제가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봉수가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이어 남원 운봉고원 일부 등을 방어하기 위해 봉수를 100여 개나 세웠다는 설은 쉽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며 다시 고증작업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문헌사료 해석문제 양직공도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반파를 둘러싼 해석도 통설과 이견이 크다. 사료에는 백제의 주변 소국으로 반파, 탁, 다라, 전나, 신라, 상기문 등이 나오는데, 학계는 반파를 대가야를 설명하는 용어로 해석하고 있다. 고대사 박사는 봉수, 고분, 계수호를 비롯한 위신재 유물과 문헌기록을 맞춰 전북 지역에 존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삼국유사에 전북 가야의 존재가 기록이 안 된 이유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삼국유사에는 금관가야(경북 김해), 아라가야(경남 함안), 소가야(경남 고성), 고령가야(경북 상주), 대가야(경북 고령), 성산가야(경북 성주)가 나와있다. 전북 가야사를 설명할 때 일본서기를 활용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기경량 교수는 가야사와 관련된 사료 자체가 적기 때문에 일본서기를 활용할 수 밖에 없다면서도 사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굴곡과 왜곡이 있기 때문에 사료비판을 엄밀히 하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2.04 18:41

[전북 가야 찾기 어디까지 왔나] (상) 발굴·고증 현황

남원 유곡리두락리 가야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최종 절차를 밟고 있는 가운데 전북 가야사의 실체가 어느 정도 규명됐는지 관심이 모아진다. 현재까지 밝혀진 전북 가야사의 존재는 일부 문헌사료와 고분 및 부장품, 제철유적, 봉수 등을 통해 확인된다. 문헌사료에 있는 기록과 유물유적과의 비교 분석도 진전되면서 고증도 진전되고 있다. 특히 장수남원 등지에서 발굴되는 제철유적은 주목할 만하다. 흔히 가야를 철의 왕국이라 하지만, 가야의 중심지라고 일컬어지는 김해와 고령에서 발굴된 제철 유적은 없다. 다만 전북 가야 세력을 독자 세력이 아니라 영남권 대가야의 하위집단으로 보는 통설, 봉수제철유적의 연대기가 가지는 불확실성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 등이 남아있다. 전북의 가야사를 엿볼 수 있는 문헌사료와 유적 분포현황, 대표유적 그리고 이들이 갖는 의미와 추후 과제를 정리해본다. △ 전북 가야 유적 현황과 관련사료 1일 전북도에 따르면 도내 가야 유적은 남원완주무주장수진안임실순창지역에 모두 822개가 있다.(2020년 12월 현재) 종류는 고분, 제철유적, 봉수 산성으로 다양하다. 이 중 전북 가야의 존재를 방증해주는 유적인 제철, 봉수, 고분은 776개로 94%를 차지한다. 전북에 가야소국의 존재여부를 추정할 수 있는 문헌사료도 있다. 중국 양나라 때의 사료인 양직공도(梁職貢圖)와 720년대 완성된 일본서기(日本書紀)이다. 일본서기에는 반파는 백제와 3년 전쟁(514년~515년)을 치르면서 봉수를 쌓아올렸다고 나온다. 군산대학교 곽장근 역사철학부 교수는 반파는 가야계 소국으로 추정되며, 기록에 나온 봉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봉수가 발견된 곳은 전북 동부가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봉수 주변 가야계 산성과 석축, 수혈식 석곽묘, 축대시설이 분포한다며 가야의 봉수로 해석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양직공도에는 남원시 일대에 기문이라는 소국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곽 교수는 이들은 5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백제에 의탁하면서 연명했던 소국이라며 이 지역에서 발굴된 토기와 봉토분 양식을 문헌사료와 비교해보면 가야계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대표유적-남원 유곡리 두락리 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이 고분군은 기문국의 실체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고고학적 자료로 꼽힌다. 연비산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을 따라 40기의 봉토분(封土墳)으로 존재하며, 이 중 12기는 지름 20m가 넘는 대형고분이다. 조성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이다. 무덤양식은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구덩식 돌덧널무덤)와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며, 지난 1989년과 2013년에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확인됐다 축조세력이 지배층이었음을 방증하는 유물도 출토됐다. 금동신발편, 청동수대경, 갑주, 환두대도(環頭大刀-장식용 칼) 등을 비롯한 금속유물 160여점, 기꽂이, 마구류, 꺽쇠 등의 철기류 210점, 원통형 기대를 비롯한 대가야 양식의 토기류 110여점 이다. 이 중 금동신발과 청동수대경은 처음 출토된 것으로 백제와 왜, 중국 남조 등과의 대외관계를 살필 수 있는 유물로도 평가받고 있다. 전북도 노기환 학예사는 토기를 통해서도 인접 국가와의 대외교류를 유추할 수 있다고 봤다. 노 학예사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철을 가야나 백제에 주고 토기를 가져왔을 것이라며 고부가가치의 생산품을 주고 소모품적인 생산물을 가지고 오는 무역 형태라고 했다. 이어 기문국의 주 세력은 운봉고원에 존재했던 사람들로 보인다고 부연했다. △ 대표유적-단야구(鍛冶具) 지난해 9월 장수 백화산 고분군 발굴현장에서 공개된 단야구는 반파와 철제 유물의 실상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로 꼽힌다. 단야구는 철기를 제작할 때 사용되는 망치, 집게, 모루 등의 도구로 호남 가야고분에서 처음 확인됐다. 게다가 단야구에서는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타격흔이 발견됐다. 이를 통해 피장자는 장수지역 철기제작을 담당했을 수장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장수남원 등지에서 확인되는 제철유적과의 연관성까지 높여준다. 곽 교수는 운영의 주체는 고증이 되고 있다며 문헌사료와 비교해보면 반파국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지표조사를 통해 확실히 가야 철제유물이라는 점을 시기적으로 규명하는 과제가 남았다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2.02 19:02

충주박씨 기증유물 2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지정

원광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충주박씨 기증유물 2점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2일 익산시에 따르면 충주박씨 기증유물인 눌재 박상 초상화와 사암 박순 초상화가 지난해 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지정예고를 거쳐 최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5호제276호에 각각 지정됐다. 눌재 박상사암 박순 초상화는 충주박씨 문중이 유물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 지난 1970년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눌재 박상은 병조좌랑, 사간원헌납, 상주목사, 나주목사 등을 역임한 조선 전기 사림파 문신이다. 박상 초상화는 오사모에 담홍색 단령을 입은 전신교의좌상으로 15세기 문인 관료 초상화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19세기 이후 서화를 본떠서 그리는 이모(移模)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색과 음영기법이 추가됐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형적 양식과 시대적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회화사적과 지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눌재 박상의 조카인 사암 박순은 눌재 박상의 조카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조선 중기 문신이다. 박순 초상화는 오사모와 청색 단령을 입은 전신교의좌상으로서 16세기 공신 초상화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 18세기 이후 이모(移模)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색과 장식적 기법이 추가됐으며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형적 양식과 시대적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박상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회화사적, 지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박상박순 초상화는 원광대 박물관 4층 서화기증실에 보관 전시되고 있으며,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코로나19 방역수칙에 따라 사전예약 후 관람 가능하다.

  • 문화재·학술
  • 엄철호
  • 2021.02.02 16:15

전주 경원동서 조선시대 ‘전주부성 성벽’ 추가 발굴

전주 한국전통문화전당 인근 구도심에서 조선시대 쌓았던 전주부성의 성벽 일부가 추가 발굴됐다. 26일 전주시에 따르면 (재)전주문화유산연구원(원장 유철)이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지난해 11월부터 진행한 전주부성의 성벽(1구역)과 성벽 바깥 부분(2구역) 발굴조사 결과 전주부성 북동편 성벽의 윤곽을 확인했다. 앞서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지난 2018년 시굴조사를 통해 한국전통문화전당 북동쪽 주차장 부지에서 처음으로 전주부성 성벽 기초부분 흔적을 발견했다. 당시 발굴된 성곽은 기초부분 1단만 남겨져 있었다. 이번에 전주부성 북동편 성벽의 기초시설이 발견된 1구역은 완산구 경원동3가 28-5번지 일원이다. 발굴된 성벽은 부성 하단의 1~2단이 잔존하는 상태로 성벽의 폭은 5.2m이며, 현재까지 조사된 체성의 길이는 26m, 잔존높이는 40㎝ 내외인 것으로 알려졌다. 2구역에서는 전주부성과 관련된 조선시대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후백제 시대로 추정되는 층위에서 박석시설 등이 확인됐다. 시는 전주부성 북동편 성벽 일부가 확인됨에 따라 부지 4397㎡를 매입해 성곽을 복원할 예정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벽 일부의 구체적인 축조방식을 살펴보고, 복원 및 정비를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것이라며 향후 옥토주차장 부지에 대해서도 발굴조사를 추진해 전주부성 성곽의 잔존양상을 확인할 계획이다고 덧붙였다. 한편, 전주부성은 영조 10년(1734년) 전라감사 조현명이 허물어진 성을 둘레 2618보, 높이 20자, 여장 1307좌, 치성 11곳, 옹성 1곳 등으로 고쳐 쌓은 것으로 전주부성 축성록에 전해진다.

  • 문화재·학술
  • 이용수
  • 2021.01.26 18:33

전북 남원 가야문화 유산 ‘세계 속 유산으로 인정될까’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남원 가야 문화의 발자취가 그간의 베일을 벗고 바다 건너 유네스코로 향했다. 25일 남원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에 따르면 유네스코에 남원 유곡리두락리 등을 포함한 가야고분군 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최종 절차를 밟고 있다. 세계유산등재추진단은 지난 21일 유네스코에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했으며, 2월 중 유네스코 현지실사에 대비해 3회에 걸친 유적정비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유네스코 현지실사는 오는 8~9월 이뤄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세계유산등재추진단이 전북으로 이전하면서 남원 가야문화가 세계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이름을 올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세계유산등재추진단은 지난 17~19년 경남연구원(창원)에서 운영을 맡아오다 2019~2020년 경북문화재단(고령), 2021년 1월 15일부터 업무가 전북으로 이관됐다. 당초 세계유산등재추진단은 올해 중으로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준비해 왔지만 문화재청이 각 지역의 고분에 대한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 확인에 신중을 기하면서 준비기간이 길어졌다. 하지만 신중한 준비로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활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신청서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기준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에 대한 구체적 근거들이 담겨 있다. 가야문명 당시 중앙집권 체제로 운영됐던 주변 국가들과 달리 연맹체재로 운영됐던 가야 문명에 대한 보편성을 기술하고 또 지배계층들의 고분들이 갖는 특징 등이 강조됐다. 전북도는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록을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해 온 만큼 서류 통과에는 무리가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도는 추진단을 통해 8월에 예정된 유네스코 현지실사팀 방문을 대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할 계획이며, 유네스코가 유산에 대한 보편적 가치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민관이 어떻게 유산을 어떻게 이해하고 관리하는지 등에 대한 부분도 보는 만큼 주민활동도 지원할 계획이다. 전북도 관계자는 오랜 시간 준비해온 만큼 내년도에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서류 통과 이후 현장실사를 위한 준비에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가야고분군은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사적 제542호), 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제341호), 함안 말이산 고분군(사적 제515호), 합천 옥전 고분군(사적 제326호), 고령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 고성 송학동 고분군(사적 제119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의 7개 유산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 문화재·학술
  • 엄승현
  • 2021.01.25 18:28

전북서 반출된 해외 소재 문화재 ‘현황 파악 시급’

해방 이후 소재가 불분명한 '완주 보광사 석탑' 전북 부안군 개암사(開巖寺)의 5층 석탑은 총독부 조사계에서 조사해 고적급유물로 등재해 보존하려던 중에 종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1932년 4월에 군산 일본 요리점 하나쓰기(花月)의 정원에서 발견됐다. 최학수 옥구군수가 하나쓰기 요리집의 정원에 있는 석탑이 개암사의 탑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은 최 군수가 옥구군수로 부임해오기 전에는 부안군수로 있었기 때문에 이 탑을 알아본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신문 기사에는 탑을 매수해 개암사로 보내기로 했다는데, 이후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 수 없다. 현재 개암사에는 1932년 4월에 찾았다는 탑은 보이지 않는다. 해외로 반출된 전북지역 문화재의 환수 활동을 지원하는 전북 국외소재문화재 환수 활동 지원에 관한 조례가 지난해 12월 31일자로 공포된 가운데 도내 현황 파악을 위한 실태 조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확한 현황 파악을 통해 실질적 환수뿐만 아니라 학술적 환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해외로 반출된 도내 문화재의 현황과 반출 경위 등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일부 연구자와 단체가 부분적으로 자료를 조사했을 뿐이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 국외문화재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등에 8만1889점(42.40%),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에 5만3141점(27.52%), 중국 베이징고궁박물관 등에 1만2984점(6.72%), 독일 쾰른동아시아박물관 등에 1만2113점(6.27%) 등 21개국 19만3136점에 달한다. 다만 지역별 출처를 따로 조사하지 않아, 지역 현황은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다. 문화유산회복재단 전북본부에 따르면 도내 대표적인 피해 사례는 임진왜란 당시 반출돼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금산사 향로를 비롯해 현재 일본 도쿄대에 소장된 남원 출토 도자와 기와, 소재가 파악되지 않은 완주 보광사 석탑과 사리함 등이 있다. 이외에도 전주 회암사 불상, 순창 구암사 불상, 부안 개암사 석탑, 정읍 망제리 석탑 등도 소재가 불명하다. 재단 전북본부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문화재가 소실됐는지 유출됐는지 하나도 정리가 안 된 상태이다. 대략적인 추정치로만 파악하고 있을 뿐이라며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자치단체 중심으로 향토사학자, 관련학과 교수 등과 연계해 정확한 현황 파악이 이뤄져야 한다. 이는 지역적 자존의 문제라고 말했다. 특히 최근 관련 조례가 제정된 만큼 도내에서 반출된 문화재의 환수 활동이 속도를 낼지 주목된다. 조례는 국외소재문화재 환수 활동 지원에 관한 계획 수립과 실태 조사를 위한 조사단 구성, 환수된 문화재의 관리 등의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지난 2016년 문화재보호법이 개정된 이후 광역 자치단체 7곳, 기초 자치단체 1곳이 국외소재문화재 환수 관련 조례를 제정했다. 충남도의 경우 도 차원의 환수추진단을 조직하고 예산을 확보하는 등 자치단체 최초로 국외소재문화재 보호, 환수 활동에 직접 나섰다.

  • 문화재·학술
  • 문민주
  • 2021.01.25 16:56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는 국보 제62호 ‘금산사 미륵전’

국보 제62호 김제 금산사 미륵전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 제작됐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는 국보 제62호 금산사 미륵전 홍보영상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보리의 약속을 유튜브 채널에 공개했다.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애니메이션 보리의 약속은 7분41초 분량으로 금산사의 역사와 3층 미륵전에 대한 소개가 담겨 있다.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화낸 보리가 개구리를 따라 미륵전 벽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벌 받는 소를 만나고, 동자승의 안내를 받아 미륵전을 구경한다는 줄거리다. 사라진 보리를 찾는 엄마에게 스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미륵전은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곳, 비추어서 자신을 맑게 만드는 곳이다. 맑게 만든 마음은 헛생각에 더 이상 속지 않게 되고, 욕심과 분노, 걱정이 침범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면 점점 세상이 맑아질 것이고, 우리를 진정 평화로운 세계로 도와주는 분이 미륵부처님이다. 금산사 강만곤 홍보팀장은 미륵부처가 항간의 인식처럼 먼 미래에서 와 인간을 구원해주는 메시아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먼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자비심으로 살아갔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대상임을 애니메이션에 풀어냈다고 설명했다. 김제시 백덕규 학예사는 문화재 조성 당시의 상징성과 현대적 가치를 스토리로 입혀 영상을 제작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며 앞으로 문화재 홍보영상 제작에 좋은 기준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문민주
  • 2021.01.18 16:56

정읍 고사부리성, ‘상부상항’명 온전히 새겨진 첫 목제 유물 발견

정읍시 고부면 소재 사적 제494호 정읍 고사부리성(井邑 古沙夫里城)에서 상부상항명이 온전하게 새겨진 첫 목제 유물이 발견됐다. 정읍시는 (재)전라문화유산연구원(원장 천선행)과 진행한 정읍 고사부리성 성벽에 대한 8차 정밀발굴조사를 지난달 완료했다고 12일 밝혔다. 사적 제494호 정읍 고사부리성(井邑 古沙夫里城)은 행정구역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성황산(해발 133m) 정상부에 자리한다. 고사부리성은 백제 오방성(五方城) 중의 하나인 중방(中方) 성으로, 조선시대 영조 41년(1765년)까지 읍성으로 이용됐던 곳이다. 고사부리성은 성황산의 두 봉우리를 감싸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둘레 1050m, 장축 길이 418m, 단축 길이는 200m 내외다. 이번 발굴조사는 남성벽 내측 평탄지를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두 봉우리 사이의 계곡부에 해당한다. 조사 결과 삼국시대, 통일 신라시대, 조선시대의 다양한 유구와 공간 이용의 변화상이 확인됐다. 특히 조사구역이 두 봉우리 사이 계곡부에 위치해 유수 퇴적층과 물을 이용하기 위한 저수시설 및 우물, 배수 시설(목제 배수로), 지반 보강 시설 등이 다수 확인됐다. 그 가운데 백제시대 층에 조성된 직사각형 모양의 구덩이(길이 640㎝, 잔존 너비 192㎝)는 내부가 오랜 기간 침수돼 얇은 점토층과 실트층이 반복적으로 쌓여있었다. 바닥에는 삿자리를 깔고, 양 가장자리에 구덩이의 길이 방향으로 한쪽에 결구를 위한 구멍을 뚫은 막대형 목재(길이 144148㎝, 두께 3.33.6㎝)를 한 쌍씩 나란히 붙여 설치한 것이 확인됐다. 막대형 목제 유물의 하나에서 상하 방향으로 새긴 상부상항명이 확인됐다. 상부와 상항은 백제의 수도를 편제한 오부(五部)오항(五巷) 중의 하나로, 기존 북문지 발굴조사(2005)에서도 상부상항 기와편이 출토된 바 있다. 이 자료들은 부여, 익산 등 백제의 고도에서 주로 출토되는 것으로, 정읍 고사부리성에서도 확인됐다는 사실은 백제 중방 성으로서 위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오부명이 새겨진 유물은 대부분 기와이고, 오부명과 오항명이 함께 기술된 것은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西(서부) 후항(後巷) 명 목간(木簡)이 유일하다. 이번 고사부리성에서 나온 상부상항 명 유물은 나무에 새겨진 목제 유물로 최초이자, 온전한 형태로 확인된 첫 사례로, 백제 사비기의 것이 확실한 오부와 오항 명이 함께 새겨져 학술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시는 앞으로 오부와 오항의 관계, 상부상항 명의 의미를 파악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 출토된 목제 유물들은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원형 유지를 위한 보존처리 중이며, 문화재위원 등 전문가의 유물 선별 과정을 통해 국립박물관 등에 소장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임장훈
  • 2021.01.12 16:07

전북 서원·사우 255곳 중 25곳 국립문화재 지정 가능

전북지역에 서원과 사우가 255 곳에 달하고 90여 곳은 시도, 국가 문화재로 등록가능한, 문화적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조사됐다. 11일 전북도가 지난해 도내 14시군에 존재하는 서원 및 사우를 전수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총 255곳의 서원사우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중 서원은 전체 비중의 38%인 85곳 이었으며, 사우는 전체 62%를 차지하는 140곳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도는 국가문화재로 등록가능한 서원 및 사우는 약 25곳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고, 70여 곳은 시도 문화재 등록이 가능할 것으로 봤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문화재청이 전국 20여곳의 서원향교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했는데, 전북지역에서는 단 한곳도 지정되지 않으면서 향후 도내지역 서원 등의 보물지정을 추진을 위한 기초자료 확보 차원에서 이뤄졌다. 서원은 조선시대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기관이다. 성리학을 널리 알린 인물들을 기리고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도 담당했다. 사우는 조선 시대에 선현(先賢)을 제사하기 위해 건립된 제향처(祭享處)이다. 사우는 유현이나 충절인의 가향(家鄕), 거주지, 근무지, 유배지, 순절지(전승지), 타계지 등에 세워졌다. 사우의 건물 구조는 대개 제사를 지내는 사묘(祠廟)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서원과 사우의 차이는 교육기관(건물 강당)의 유무다. 지역별로는 고창이 32곳으로 가장 많은 서원사우가 존재했다. 이어 김제 28곳, 정읍 24곳, 남원 23곳, 진안 16곳, 무주장수익산이 각각 14곳, 완주 13곳, 전주임실 각각 11곳, 군산 10곳, 순창 9곳, 부안 6곳 순이었다. 서원사우의 건물배치는 학문의 공간이 앞쪽에 배치되고 제향공간이 뒤쪽에 위치하는 전학후묘형과 그 반대인 전묘후학형, 두 공간이 나란이 위차한 좌묘우학형, 좌학우묘형 등 다양한 건물배치를 보였다. 사당의 평면규모는 정면3칸, 측면 2칸 형태가 235건 중 140건(60%)이었고, 강당의 평면규모는 정면4칸, 측면 3칸 형태가 53건으로 나타났다. 사당의 지붕형식은 맞배지붕(건물 앞뒤에서만 지붕면이 보이고 추녀가 없으며 용마루와 내림마루만으로 구성된 지붕) 196건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강당의 지붕형식은 팔작지붕(우진각지붕과 같이 사방으로 지붕면이 있으나 양측 지붕면 위에 삼각형의 합각(合閣)이 있어서, 우진각지붕 상부를 수평으로 잘라 그 위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것 같은 복합형 지붕형식)이 138건으로 약80%를 차지했다. 도 관계자는 전체적으로 수리가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역사와 건축양식등을 볼 때 95곳에 달하는 서원사우가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서원관리에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1.01.11 16:45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일제강점기 농촌수탈의 기억 화호리’ 보고서 발간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농업 이민정책을 폈다. 조선을 영구적으로 식민지화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를 이주지로 선정하고 대규모 농장을 개설했다. 개간된 농지와 대지의 소유권은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 다우에 타로(田植太郞), 오사와 신조(大澤新藏) 등 일본인들에게 넘어갔다. 자영농이었던 토착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해방 전까지 궁핍한 삶을 살았다. 이 중 구마모토 리헤이는 46세대 92명이 거주하는 용서마을을 거점으로 신태인 지역의 드넓은 평야를 착취했다. 현재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화호병원과 화호우체국, 일본인 대농장주(구마모토) 사택 등 일본 근대식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농민들을 착취한 구마모토 리헤이는 전북도 옥구군 박면 내사리와 신태인읍 화호리 두 지역에 농장을 개설했다. 그 범위는 3500정보(町步1050만평)에 달했다. 국책회사인 동양척식회사를 제외하고 개인으로는 전북 최대 지주였다. 그는 소작농을 부려먹어 생산한 쌀을 일본에 보냈다. 소작농들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보고서가 발간됐다.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는 일제강점기 농촌수탈의 기억 화호리Ⅰ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보고서는 일제강점기 농촌수탈과 해방 후 농촌 보건의 역사가 남아있는 정읍시 화호리에서 실시한 학술조사 결과를 담았다. 해방 후 정읍시는 구마모토 리헤이 농장 소속 의사였던 쌍천 이영춘 박사가 열악한 농촌 보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지 않고 농장 시설물을 활용해 입원실과 내과 등 5과 진료과목을 갖춘 화호중앙병원을 설립했으며 현재도 이 흔적이 남아있다. 쌍천 이영춘(1903~1980)은 일제의 수탈로 고통당하는 한국 소작농의 치료에 일생을 바친 농촌 보건위생의 선구자로 전해진다. 보고서는 △ 식민지 화호리의 일본인 지주들, 정읍 화호리의 식민지 기억과 경관 △ 신문기사와 지도, 사진, 공문서 등을 통해 당시 화호리 역사와 인문지리 △ 건축물 현황과 부재 수종조사, 식생조사, 석재 산지조사, 디지털 기록을 수록했다. 연구소는 화호리에 남아있는 적산가옥 6동과 해방 이후 공간변화 등을 디지털 영상자료로도 제작했다. 이 영상을 보고서내 QR코드로 삽입해 스마트폰 등 휴대기기로 재생해 볼 수 있게 했다. 이번에 발간한 보고서는 국공립 도서관과 지방자치단체 등에 배포된다. 문화재청과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공개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1.01.07 17:49

전주전통술박물관 사실상 박물관 기능 상실

5일 오전 한옥마을내 전주시 완산구 한지길(풍남동 3가) 전주전통술박물관. 한옥마을 공영주차장 인근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기와를 얹은 한옥풍의 박물관이다. 입구를 지나 전시실을 둘러봤다. 술의 역사부터 술을 담그는 기구가 몇 개 전시되어 있었다. 술을 만드는 재료인 누룩모형도 전시돼 있었다. 이뿐 이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단 5분도 소요되지 않았다. 이 전시장 면적은 44㎡. 박물관이라 하기엔 협소하기 그지없었다. 전시장을 나와 또 다른 입구로 들어가보니 비슷한 크기의 공간에서는 전통술을 판매하고 있었다. 개관 20년이 다 되가는 전주시 설립 전주전통술박물관이 사실상 박물관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주전통술박물관은 전통가양주(집에서 빚어내던 술)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전주시가 2002년 현재의 자리에 개관했다. 개관 당시 전통술을 내세운 박물관으로는 전국 최초였다. 개관 초기부터 10여 년까지는 맷돌, 소줏돌, 용수, 체 등 전통술을 빚는 기구를 포함해 212점의 유물을 소장했지만 이후 10년 가까이 추가 유물을 확보하지 못했다. 상설전시 된 유물수도 48점으로 소장 유물의 4분의 1 정도만 공개하고 있는 수준이다. 기획전시할 공간도 부족한 실정이다. 전주전통술박물관 측은 전시공간이 부족해 많은 유물을 전시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박물관에는 전문학예사도 없다. 박물관장을 포함한 2명의 직원이 전부로 전문학예사가 없다보니 유물관리와 전시유물 교체와 신규유물확보가 안되고 새로운 연구를 통한 기획전시도 이뤄지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그나마 전통술 빚기부터 시음행사 등 다양한 교육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마저도 농림수산식품부에서 국비를 따와 근근이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문제로 술 박물관은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공립박물관 평가인증에서 낙제점을 받아, 평가인증을 받지 못했다. 전주전통술박물관은 2017년부터 전라슬로푸드문화원이 전주시로부터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전라슬로푸드문화원은 시의 지원금을 박물관 유지 비용의 약 80%를 차지하는 운영비와 인건비로 쓰고 있다. 그리고 20%는 자체 수익을 통해 메꾸고 있는 실정이다. 박물관 측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어떻게든 박물관은 운영해보고자 직원들이 학예공부를 하고, 관장이 퇴직금 등 사비를 투입해 버티고 있지만 힘든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시는 해당 박물관이 사실상 박물관 기능을 상실한 점에 대해서 인정하면서, 술 박물관에 대한 변화를 고심하고 있다. 지난해 박물관의 기능보다 교육, 전시를 극대화할 수 있는 문화관 전환을 검토했지만, 전국 최초의 술 박물관이란 이유로 철회했다. 올해 전시공간 확대를 위한 리모델링 예산을 책정하고, 개편에 나설 예정이다. 전문학예사도 추후 배치해 추가 유물구입 및 연구도 진행 할 방침이다. 시 관계자는 전주전통술박물관에 대한 지적에 충분히 공감한다면서 여러 방면으로 활성화를 위해서 많은 고심을 하고 있다. 거점관광도시에 걸맞게 술박물관을 변화시킬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1.01.05 18:20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제동유적 시굴조사서 제동로와 제련폐기장 추가 발견

동광석을 1차 제련해 구리를 추출하는 제동로(구리 생산에 사용되는 노시설의 통칭)와 구리 제련 불순물 폐기장이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제동유적(구리 생산 관련 유적의 통칭) 시굴조사에서 추가 확인됐다고 5일 진안군이 밝혔다. 이번 시굴조사는 전북도와 진안군,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가 함께했으며 전북 가야사 발굴조사 및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됐다. 신라 말 고려 초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량리 제동유적은 동향면 대량리 창촌마을 내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문헌에 기록된 동향소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조사에 앞서 지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창촌마을에서 진행된 시발굴조사에서는 동 생산에 활용된 제동로 2기와 대형 폐기장(구리 생산 폐기물 버리는 곳) 1개소가 발견된 바 있다. 군에 따르면 이번 시굴조사는 기존 시발굴 조사된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유적의 존재범위와 제동로 등 유구의 추가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실시됐다. 시굴 결과 기존조사와 비슷한 형태의 제동로와 폐기장을 추가로 확인하는 수확을 얻었다. 이번에 발견된 것 중 제동로는 석재와 점토로 축조돼 있으며 강한 화기 탓에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주변엔 슬래그와 노벽편이 다수 산재하고 있다. 해당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기 전에는 정확한 구조와 성격을 아직 알 수 없지만, 기존의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제련로의 현황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띨 것으로 군은 추정하고 있다. 또 이번에 발견된 폐기장은 그 부근이 오랜 경작활동으로 대부분 훼손된 상태며 높이 0.4m 가량만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숯, 슬래그, 노벽편 등이 발견됐다. 이들 제동로와 폐기장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진다면 유적의 가치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 당시 국내 구리 생산체계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동로 구조 복원을 위한 핵심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1980년대까지 동광석을 채광하기 위해 운영됐던 동향광산과 연계시켜 보존활용 방안이 모색된다면 유적의 가치는 매우 높아질 수 있다는 게 군 관계자의 판단이다.

  • 문화재·학술
  • 국승호
  • 2021.01.05 17:04

군산 최초의 성당 둔율동 성당 신축기록 국가문화재 지정

군산 최초의 성당인 둔율동 성당의 건립당시 기록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군산 둔율동 성당신축기 및 건축허가신청서를 국가등록문화재 제677-2호로 지정했다고 3일 밝혔다. 군산 둔율동 성당이 국가문화재(제677호)로 지정 된지 3년 만이다. 이번에 등록된 성당신축기 및 건축허가신청서는 기존 국가등록문화재 군산 둔율동 성당의 건축공사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다. 성당신축기는 성당의 계획 수립착공완공건축기금 등 건축 전반의 과정을, 건축허가신청서는 당시의 허가신청서청사진 도면시방서 등이 적혀 있다. 군산 둔율동 성당이 지난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도 성당신축기와 건축허가신청서가 잘 보존돼, 성당 신축과 관련한 성도들의 헌물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사례가 건설지 등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문 사례덕이었다. 군산 둔율동 성당은 일제강점기 공소(본당보다 작은 교회)로 시작해 1955년~1957년에 신축됐다. 이번에 등록된 유물은 한국전쟁 직후 신축한 성당의 건축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당과 상호 연계된 통합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문화재청은 판단했다. 군산 둔율동 성당은 1929년 5월 나바위 본당에서 분리되어 군산 본당으로 설립됐다. 1961년 11월 둔율동 본당으로 개명됐다. 초대 신부로 김영구 베드로 신부가 부임했다. 1925년 김 마리아 사택에 공소를 개설하고 나바위 본당 신부들이 들러 판공 성사를 봤다. 군산 본당으로 설정된 후 옥구 군청 관사 대성원을 임시성당으로 사용하고 부속 건물을 사제관으로 개수해 사용했다. 이후 50년 간 만주에서의 사목을 마치고 군산 본당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임인교 신부는 일제강점기 시대였던 1938년에 본당 주보를 설정하고 목조 성당을 신축했다. 하지만 이후 소실되고 1955년에 현재의 건물로 신축됐다. 신축 후에는 한국 전쟁 후에는 성심 유치원과 보육원을 설립해 전쟁고아와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주력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1.01.03 17:53

[2020 전북문화계 결산] ③ 학술, 문화재

올해 전북문화계 중 학술문화재 분야는 반가운 소식들이 많았다. 한국전쟁이후 소실됐던 전라감영이 70여 년 만에 재창조 복원됐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무성서원의 중수기 편액이 발견됐다. 웅치전적지 국가사적 지정노력 등 전북의 문화재 지정을 위한 움직임도 활발한 반면, 전주시역사박물관과 어진박물관에 대한 직영전환에 따른 논란도 불거졌다. △ 70여 년 만에 시민 곁으로 돌아온 전라감영 지난 7일 전라감영은 준공식을 갖고 시민의 품에 안겼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라도를 관할했던 전라감영은 1951년 한국전쟁 중 폭발사고로 완전히 사라졌다. 전주시와 전북도는 2017년부터 총사업비 104억 원을 투입해 구도청사를 철거하고, 동쪽 부지에 선화당 및 관풍각, 연신당, 내아, 내아행랑, 외행랑 등 7개 핵심건물을 복원했다. 먼저 전라감영 내부 세 번째 출입문인 내삼문(內三門)은 이번 재창조 공사과정에서 전라감영의 정문으로 새롭게 자리했다. 임금의 덕을 베풂으로써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을 품고 전라감사 집무실이었던 선화당은 조선시대 관찰사 집무실이자 전라감영의 핵심 건물로 높이 10.9m 팔작지붕 아래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웅장한 옛 모습 그대로 재현됐다. 전라감영이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재탄생될 때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96년 전북도청사 이전이 확정된 후 전라감영 복원 문제가 본격 거론됐다. 복원이 논의되자 구 도청사에 입주했던 시민단체의 반발이 거셌다. 구 도청사가 가진 역사적인 시간도 무시할 수 없고, 현대사의 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의 이유로 전라감영복원에 부정적인 시각들이 존재했다. 여러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면서 20년 넘는 시간이 허비됐다. 그렇게 2016년 전라감영지 발굴조사를 통해 관풍각, 내삼문, 비장청 등의 연관 시설을 확인하고,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추정되는 건물터 등이 확인되면서 전라감영 복원이 진행될 수 있었다. △ 사라진 무성서원 편액, 다시 주인의 품으로 임실군은 흥선대원군(1820~1898)의 서원철폐정책 당시 정읍 무성서원의 역할을 짐작해볼 수 있는 편액이 발견했다. 이 편액은 임실출신의 한 인물이 이 작은 것이 무성서원의 발전에, 전북 문화풍토에 작은 울림이라도 일으켰으면 한다면서 임실군에 기증했다. 기증된 편액은 1907년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92㎝, 세로 25㎝, 두께 2㎝ 정도의 송판에 흰색 글씨로 전 만경군수 정인희가 쓴 것이다. 해당 편액은 시간이 지나 일부 지워진 부분을 제외하곤 대체로 온전한 상태다. 현재 무성서원의 편액은 서원철폐정책 이후의 편액이 존재하지 않아 그 가치가 더 크다. 현판은 초반부 최치원을 칭송하는 내용, 중반부 글을 작성하게 된 이유, 후반부 당시 무성서원의 역할 등이 담겼다. 임실군은 해당 편액을 연구분석 한 후 내년 정읍시와 협의를 통해 기증할 방침이다. △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위한 움직임 활발 올해 전북은 임진왜란(1592~1598선조 25~31년)당시 전주부성을 향해 침략해오는 왜군에 맞서 조선 관군과 완주 소양진안 부귀 주민을 포함한 의병연합군 3000여 명이 사투를 벌인 전투현장인 웅치전적지에 대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했다. 지난 6월에는 완주군이 전라문화연구원에 의뢰해 발굴조사한 결과 옛 웅치길(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진안 부귀면 세동리) 일원에서 성황당 터봉화 터 진지 터 등의 유적들을 확인했다. 또 유적 토양을 채취, 조선군 시신 매장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총 인, 총 칼슘의 함량을 분석해 조선군 무덤을 최초로 확인했다. 전북일보는 지난9월 27일 창간 70주년을 맞아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승격 위한 재조명 학술대회를 개최했고, 전북도를 중심으로 정치권과 학계가 뭉쳐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위한 테스크포스(TF)를 구성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 전주역사박물관, 어진박물관 직접운영전환 논란 올 연말은 전주시의 전주역사박물관과 어진박물관에 대한 직영운영전환이 큰 화두였다. 지난달 27일 전주시의회 문화경제위원회가 시가 제출한 전주역사박물관과 어진박물관의 민간위탁 동의안을 부결하면서 직영전환에 돌입했다. 그런 과정 중 직원들의 고용승계 문제가 터져 나왔다. 갑작스런 직영 전환에 시는 고용승계를 깊이 고민했으나, 공개채용을 실시하며 직원들을 거리에 내몰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민간위탁 동의안을 부결시킨 시의회도 직영전환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0.12.29 18:59

전라감영 선화당 주련문 담긴 <풍패집록>, 전주역박 확보

전라감영 선화당 주련문(柱聯文)의 내용이 담긴 <풍패집록>을 전주역사박물관이 확보했다. 전주역사박물관은 지금까지 찾아지지 않은 전주지역의 기록물 <풍패집록>을 발굴했다고 29일 밝혔다. <풍패집록>은 전주지역의 관아, 성문, 학교, 군진, 누정 등의 상량문ㆍ중수기ㆍ시문 등을 비롯해사가(私家)의 재실과 정려기 등을 일일이 필사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조선말전주사람 채경묵이 편찬한 필사본으로, 1책이며 유일본이다. 편찬시기는 조선말 1890년께로 추정된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보면 늦게는 간재 전우선생이 1891년에 지은 <발김효자행실>이 실려 있다. 전라감사 서호수가 찬한 <희현당중수기> 말미에는 개국 505년 병신(1896)에 훼철되었다고 세필로 표기해 놓았다. 이 세주는 추기한 것으로 보인다. 책에는 전주지역 총 108개의 상량문ㆍ기문류와 69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중에 상량문기문류 84개, 시 63편 정도가 <완산지>에 실려 있지 않은 내용들로 그 가치가 더욱 중요하다. 이 책은 조선말 전주의 풍경을 일상 속에서 저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생생하게 보여주는 1차적 기록물로 전주의 역사문화를 풍부하게 해주고 이를 복원해 가는데 획기적인 자료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관아건물들의 상량문, 기문, 시 등이다. 전라감영 선화당과 작청의 주련문을 비롯해 관풍각, 연신당, 재가청 등에 걸려 있던 편액들이 필사되어 있다. 전라감영 선화당을 복원하고 주련문을 붙이지 못했는데 이제 이 문제도 해결될 수 있게 됐다. 전주 동헌에 걸려 있던 많은 편액들도 책에 필사돼 있다. 동헌의 편액들은 통치행정을 담고 있는 것들로 조선시대 전주지역의 지방통치를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동헌에는 아전들의 세금포탈을 금하는 일, 환곡, 향임 택임을 비롯해 지방통치에 필요한 자료 등이 담긴 편액이 이 책에 담겼다. 관방시설인 남고산성, 위봉산성, 만마관 등의 기문들도 필사되어 있다. 공북루, 진남루, 승금정, 비비정, 한벽당 등 전주지역 누정과 다가정, 천양정, 읍양정, 군자정 등의 활터의 기문과 시 등이 필사되어 있다. 향교와 희현당, 양사고 등의 교육 관련 건물, 풍남문, 패서문 등 전주성의 문루에 대해서도 알려진 기록물과 다른 기문들이 필사되어 있다. 채경묵은 평강채씨로 전주에 세거한 가문의 후예다. 그는 조선말 전주지역의 이런 기문들을 일일이 답사하고 모아서, 필사했다. 채경묵은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명사들조차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풍패집록>의 가치가 확인됨에 따라 전주역사박물관은 이 책을 매입해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은 <풍패집록>의 영인본 출판에 들어갔으며, 1월 중순경에 마무리 작업을 마치고 출간될 방침이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은 전주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출간하는 것으로 박물관 일을 마무리하게 되어 뜻깊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0.12.29 18:59

익산 미륵사지 ‘2020 한국관광의 별’ 선정… 전북도 2020년 그랜드슬램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2020년 한국 관광의 별에 익산 미륵사지가 선정됐다. 익산 미륵사지가 대한민국 제1 관광명소로 인정받은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는 그 자체의 매력을 유지하면서 모범적 K-방역 사례로 발전한 관광지 부문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한국 관광의 별은 국내 관광에 대한 관심 제고 및 우수관광 자원 홍보, 한국 관광 발전에 기여한 개인과 단체를 발굴하고 알리기 위해 2010년 처음 제정돼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했다. 이번 2020년 한국 관광의 별 선정에는 전국 17개 시도에서 총 85개소(본상 65개소, 특별상 20개소)가 신청했으며, 본상(4개소), 특별상(2개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치렀다. 그동안 전북도는 2010년부터 한국 관광의 별 선정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그 결과 전주 한옥마을(2010년), 전주비빔밥(2011년), 전북투어패스군산 근대역사문화거리남원 예촌(2017년)에 이어 익산 미륵사지가 여섯 번째로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됐다. 1차 서류접수 단계부터 2차 현장 심사에 이르기까지 전문가 의견수렴과 사전현장답사 및 컨설팅을 통해 최종 선정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후문이다. 익산 미륵사지는 지난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매년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20년에 걸친 미륵사지 석탑 보수 공사가 마무리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 1월에는 보이지 않는 박물관 형태의 국립익산박물관을 개관하면서 무려 24만여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큰 호응을 얻었으며, 지난 6월 야간 경관조명 설치와 8월 미륵사지 달빛 향연을 주제로 한 야간 열린음악회 개최 등 관광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왔다. 아울러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사전 예약제 해설 서비스 제공 등을 통해 미륵사지 자체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는 모범적인 K-방역 관광지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윤여일 전북도 문화체육관광국장은 4대 고도(古都)인 백제의 왕도 익산이 이번 한국관광의 별 수상으로 대한민국 대표 여행체험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며 왕궁리 유적지, 보석테마파크, 익산교도소 촬영지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한 다양한 콘텐츠 제공으로 한곳 더 둘러보고, 하루 더 머물고, 한 번 더 찾을 수 있는 여행체험 1번지 전라북도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헌율 익산시장은 이번 수상은 익산 미륵사지가 한국인이라면 한 번은 꼭 만나야 할 여행지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손길을 통해 꾸준히 변신해 온 결과라며 앞으로도 매력적인 관광지로서 모두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열린 관광지 조성과 주변 관광지 연계 프로그램 발굴 등 지속해서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전북도는 올해 전주시 지역관광거점도시 국비 500억 원, 남원시 계획공모형 지역관광 개발사업 국비 100억 원, 임실, 군산, 익산, 순창 열린 관광지 국비 20억 등 3개 공모사업에 국비 620억 원을 확보한 바 있다. 전북도는 이번 미륵사지 한국 관광의 별 선정으로 2020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하는 주요 사업 4개가 선정되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며 대한민국 여행체험 1번지로서의 위상을 떨쳤다는 평가다. /천경석 기자엄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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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경석·엄철호
  • 2020.12.21 17:57

전주시, 전주대사습놀이 국가무형문화재 등록 추진

전주시가 전국적인 판소리 등용문인 전주대사습놀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팔을 걷어 붙였다. 대사습청 설치를 시작으로 국가무형문화재 등록에 나선다는 것이 시의 주요 계획이다. 시는 전주대사습놀이를 국가무형문화재 등록을 중장기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20일 밝혔다. 주요 내용으로 시는 전주대사습놀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9월 전주대사습청 설치 및 운영 조례 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조례안에 따라 전주소리문화관을 전주대사습청으로 명칭을 변경할 예정이다. 이후 각종 자료를 수집한 뒤 많은 학술대회를 개최해 최종적으로 국가무형문화재 등록을 추진할 방침이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 후기 성행했다가 중단된 후, 1975년도에 복원돼 현재까지 전주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는 판소리 중심의 전국 규모 국악 경연대회다. 사습(私習)이란 활쏘기에서 정식으로 쏘기 전에 연습으로 쏘는 일을 일컫는 말로, 전주의 전라감영과 전주부의 통인청(通引廳)이 주관했던 사습놀이가 전주대사습놀이의 전신이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 숙종(1661~172) 당시 마상 궁술대회와 영조(1694~1776)대의 물놀이와 판소리, 백일장 등 민속무예놀이를 종합해 대사습이라 불렀다. 영조8년에는 지방재인청과 가무 대사습청의 설치에 따라 전주에 4군자정을 신축하고, 최초로 전주에서 대사습놀이가 펼쳐진 뒤 매년 연례행사가 실시됐다. 그 후 대사습에서 선발된 권삼득, 신재효 등 많은 이들에게 의관, 통정, 감찰, 오위장 등의 벼슬을 직접 제수하고 명창 칭호를 하사했다. 조선 후기에 전주대사습놀이는 해마다 동짓달에 전주의 다가정(多佳亭)과 같은 정자에서 주로 열렸다. 당시 경연은 지금의 도청에 해당하는 영문(營門)의 전속 판소리 창자들과, 지금의 시청에 해당하는 본부(本府)의 전속 판소리 창자들의 두 패로 갈려 진행됐다. 당시 본부 전속으로 장자백(?-1907), 정창업(1847-1889), 김세종, 송만갑(1865-1939), 염덕준 등이 참여했으며. 영문 전속으로 이날치(1820-1892), 박만순, 주덕기, 장수철 등이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어 그 명성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1910년 전후로 중단됐고, 1974년 전통예쑬에 뜻을 가진 전주지역 인사들이 모여 이듬해인 1975년부터 판소리와 농악, 무용, 시조, 궁도 등 5개 부문으로 전주대사습놀이를 개최하면서 부활했다. 시 관계자는 전주대사습놀이는 역사가 깊은 대회 중 하나라면서 국가무형문화재로 반드시 등록을 시켜야한다. 대사습청 설치를 시작으로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이 더 멀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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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정규
  • 2020.12.20 18:00

서원철폐정책 당시 무성서원의 역할 가늠할만한 편액 발견

흥선대원군(1820~1898)의 서원철폐정책 당시 정읍 무성서원의 역할을 짐작해볼 수 있는 편액이 발견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임실군은 무성서원 중수기 편액으로 추정되는 편액 1점을 확보했다고 17일 밝혔다. 이 편액은 임실출신의 한 인물이 이 작은 것이 무성서원의 발전에, 전북 문화풍토에 작은 울림이라도 일으켰으면 한다면서 임실군에 기증했다. 기증자는 1988년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근무 중 서울 황학동의 한 수집상으로부터 구입해 보관하던 중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임실군 학예사의 권유에 따라 기증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증된 편액은 1907년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92, 세로 25, 두께 2㎝ 정도의 송판에 흰색 글씨로 전 만경군수 정인희가 쓴 것이다. 해당 편액은 일부 세월의 흔적으로 지워진 것을 제외하곤 대체로 온전한 상태다. 현재 무성서원의 편액은 서원철폐정책 이후의 편액이 존재하지 않아 그 가치는 더욱 큰 것으로 보인다. 현판의 내용은 크게 3가지 틀에서 요약해볼 수 있는데, 초반부는 최치원을 칭송하는 내용, 중반부 글을 작성하게 된 이유, 후반부 당시 무성서원의 역할 등이다. 정인희는 우리동방의 빛나는 문헌들의 근원이 모두 문창공(최치원)으로부터 발원한 것이며, 선생은 천하를 다스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중국을 주유했고,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어찌 때를 만나지 못해 펼치지 못했는가. 마침내 이를 시행하고 남았지만 이 땅에 거문고를 타면서 읊었던 음율이 천년을 이어 지금까지 우거져 있는 것이 가이 알수 있도다라고 최치원을 칭송했다. 해당 내용은 신라의 골품제로 인해 제 뜻을 펼치지 못했던 최치원을 안타까워하고, 그의 능력과 학문이 무성서원을 통해 계속해서 전승됐다는 내용이다. 중반부에서는 1904년 원임 유종규, 김선술이 자신에게 글을 부탁해 작성됐고, 성재공 후손 정위 김병욱이 힘을 다해 마치 집사처럼 중수하는 일에 앞장섰다고 써져있다. 후반부에는 세상의 변고가 심하고 이단이 횡류하는 때에 능히 안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하물며 선현을 존경하고 도를 지키려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서원의 첨원들이 분파가 달려 물결치는 것을 사사로운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칠현의 학문과 의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당시 세상의 변고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과 동학농민혁명, 외세들의 침입 등이 발생하던 시기를 뜻하고, 이단이 횡류하는 때는 천주교, 동학 등 다양한 종교가 유입되고 발생하면서 유림이 밀려나가는 때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철배 임실군청 학예사는 이번 기증받은 편액은 당시 혼란한 정세 속에서도 무성서원은 전통을 지키고, 유학을 이어가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해왔을 것으로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며 이번 편액의 가치는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한편, 임실군은 해당 편액을 연구분석 한 후 내년 정읍시와 협의를 통해 기증할 방침이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0.12.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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