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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가야, 본래 이름 찾았다

가야사 국정과제 추진을 위해 만든 신조어가 전북가야다. 전북 동부에서만 발견된 가야 봉화망에 그 근거를 두었다. 전북 남원시와 완주군·진안군·무주군·장수군·임실군·순창군, 충남 금산군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시 또 전북가야의 용어에는 국정과제에 국민들을 초대하기 위한 대중적이고 홍보적인 의미만 담겼음을 밝힌다. 우리나라 전통지리학의 지침서가 ‘산경표’이다. 순창군 순창읍 남산대에서 탄생한 신경준이 편찬했다. 이 책에 실린 백두대간은 전북가야의 보금자리였다. 한반도의 척추이자 자연생태계의 보고로 큰 사랑을 받았지만 전북가야의 품속이자 터전이었다. 백두대간 양쪽 운봉고원과 진안고원에 기반을 둔 가야세력이 가야 소국으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가야사 국정과제가 시작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운봉가야와 장수가야라는 임시 용어로 그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솔직히 전북가야의 가명(假名)들이다. 왜냐하면 워낙 발굴조사가 미진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전라북도의 예산 지원으로 그 실체가 명쾌하게 검증됐고, 가야 봉화 및 산성, 제철유적의 분포양상도 파악됐다. 모두 다 전북가야의 아이콘(icon)들이다. 백두대간 동쪽 운봉고원은 신선의 땅으로 회자된다. 그 의미에 걸맞게 가야 이야기도 차고 넘친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동북아를 아우르는 당대 최고급 위세품을 거의 다 모았다. 가야 고총에서 나온 금동신발, 철제초두는 모든 가야 영역에서 한 점씩만 출토됐다. 중국 양나라에서 바다를 건너온 계수호와 청동거울도 역시 운봉가야 고총에서만 나왔다. 금강 최상류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장수가야는 봉화 왕국이다. 주지하다시피 가야 봉화는 국가의 존재와 국가의 영역과 국가의 국력을 대변한다. 현재까지 복원된 가야 봉화로의 최종 종착지가 장수군 장계분지이다. 240여 기의 가야 고총이 장수군 일원에서 발견되어 고고학 자료로 장수가야의 존재를 확증했다. 엄밀히 말하면 장수가야는 ICT왕국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력의 원천은 철이다.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하던 제철유적은 포항제철과 그 의미가 똑같다. 전북 동부에 가야 봉화망을 구축하려면 반드시 국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전북가야의 영역에서 25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발견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직은 전북가야와의 연관성이 검증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철유적의 밀집도가 가장 높다. 가야 소국의 위치 비정은 역사고고학의 범주에 속한다. 문헌의 내용이 유적과 유물로 입증되면 학계의 논의가 시작되고, 이를 근거로 결론 도출도 가능하다. 전북 동부에서 축적된 고고학 자료를 문헌에 접목시켜 운봉가야를 기문국으로 장수가야를 반파국으로 비정했다. 당시 문헌에서 요구하는 대부분의 내용을 고고학 자료로 충족시켰다. 1500년 전 백제 무령왕은 가야로 본격 진출할 때 기문국의 복속을 선언했다. 반파국은 기문국을 지키기 위해 백제와 3년 전쟁을 불사했고, 신라와는 적대관계를 야기한 봉화 왕국이다. 중국, 일본 문헌에 한 묶음으로 기문국과 반파국이 등장한다. 전북가야를 탄생시킨 가야 소국들로 역동성과 다양성, 국제성으로 상징된다. 언제나 늘 국민들은 가야를 철의 왕국으로 복원해 달라고 열망한다. 모든 가야의 영역에서 가장 많은 제철유적이 전북 동부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지속적인 검증이 요망된다. 올해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등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 등재도 염원한다. 전북 동부에 350여 기의 가야 고총과 120여 개소의 가야 봉화를 남긴 전북가야가 백두대간을 무대로 대도약하길 소망한다.

  • 문화재·학술
  • 기고
  • 2022.01.28 14:00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호서 지역의 마한

마한의 공간적 범위는 대체로 경기충청전라지역에 해당되는데, 각 지역마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문화적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백제의 정치적인 성장에 따라서 마한 영역의 축소를 의미하며, 결국 점진적으로 마한 정치체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겠다.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정치적 변혁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유이민들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물질문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기 충청지역 즉 호서지역에서는 마한의 보편적인 분구묘와 계통이 다른 주구토광묘가 축조되고 있어 호남지역의 마한문화와 다른 문화적 양상을 띠고 있다. 호서지역의 보령 관창리에서 발견된 주구묘(분구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주구묘 유적으로서 학사적인 의미가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종류들이 송국리형 토기, 원형점토대토기, 두형토기, 흑색마연토기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의 송국리문화와 초기철기시대의 문화 간에 상호 관련성을 가지며, 그 시기를 기원전 3〜2세기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발견 당시 대부분 연구자들은 관창리유적의 주구에서 발견된 송국리 토기에 대해서 교란되었을 것이란 견해에서 그 시기를 3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최근 분구묘에서 점토대토기편들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어 그 시기를 청동기시대 송국리문화 단계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다. 이후 이러한 주구묘는 마한의 보편적 묘제로서 대형 분구묘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천안의 청당동유적에서는 주구묘와 같이 주구가 굴착된 토광묘가 조사되었는데, 역시 마한의 분묘로 이해되어 왔다. 이후 주구토광묘는 공주시와 연기군, 청주일대에서 그 발견 예가 증가하고 있다. 주구의 형태는 대부분 눈썹 형태로 경사의 위쪽에서 매장부 시설인 토광을 감싸고 있지만, 청주 송절동이나 공주 하봉리에서는 토광을 거의 두르듯이 감싼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한편 주구토광묘의 매장부인 토광은 주구에 비해 매우 깊게 굴착되어 있는데, 이는 주구묘의 매장부가 토광일지라도 분구 중에 위치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주구토광묘의 출토유물은 원저단경호와 심발형토기를 기본적인 셋트로 하지만, 장신구류인 청동제 곡봉형대구(曲棒形帶鉤)와 마형대구(馬形帶鉤), 그리고 유리제 구슬 등이 부장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 천안 청당동에서 출토된 두 종류의 청동대구(帶鉤)에 대한 분석결과 중국 북부지역에서 생산되는 청동임이 밝혀져 대외교섭의 근거로 보았다. 곡봉형대구는 중국 전국시대부터 서진시기까지 폭넓게 발견되고 있고, 한반도에서는 낙랑의 분묘에서 발견된다. 또한 호형(虎形)이나 마형대구는 청원 오창, 영천 어은동, 경주 사라리, 김해 양동리와 대성리 등의 목곽묘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 공간적 범위를 통해 중국 북부 ⤍ 낙랑 ⤍ 호서지역 ⤍ 영남지역으로 전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문화의 전파 루트나 유이민의 이동경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지」 위서 진한전의 기록을 보면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진(秦)의 고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동쪽의 땅을 할애해 주었다라는 내용과 더불어 언어 역시 마한인과 다르며 진인(秦人)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사기」와 「후한서」에서도 위만의 망명기사와 더불어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통제가 불가해지자 많은 유이민이 한으로 건너갔다라는 기사를 통해 진한대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많은 유이민의 이입은 물론 물질적 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전국시대의 진국(秦國)에도 주구토광묘와 유사한 속성을 가지는 위구묘(圍溝墓)가 축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호서지방의 주구토광묘 축조집단의 뿌리는 진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유이민과 깊은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의 마한세력은 재지전통이 강한 주구묘 축조집단과 유이민집단이 어우러져 형성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 문화재·학술
  • 기고
  • 2022.01.25 20:26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호서 지역의 마한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마한의 공간적 범위는 대체로 경기·충청·전라지역에 해당되는데, 각 지역마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문화적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백제의 정치적인 성장에 따라서 마한 영역의 축소를 의미하며, 결국 점진적으로 마한 정치체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겠다.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정치적 변혁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유이민들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물질문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기 충청지역 즉 호서지역에서는 마한의 보편적인 분구묘와 계통이 다른 주구토광묘가 축조되고 있어 호남지역의 마한문화와 다른 문화적 양상을 띠고 있다. 호서지역의 보령 관창리에서 발견된 주구묘(분구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주구묘 유적으로서 학사적인 의미가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종류들이 송국리형 토기, 원형점토대토기, 두형토기, 흑색마연토기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의 송국리문화와 초기철기시대의 문화 간에 상호 관련성을 가지며, 그 시기를 기원전 3〜2세기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발견 당시 대부분 연구자들은 관창리유적의 주구에서 발견된 송국리 토기에 대해서 교란되었을 것이란 견해에서 그 시기를 3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최근 분구묘에서 점토대토기편들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어 그 시기를 청동기시대 송국리문화 단계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다. 이후 이러한 주구묘는 마한의 보편적 묘제로서 대형 분구묘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천안의 청당동유적에서는 주구묘와 같이 주구가 굴착된 토광묘가 조사되었는데, 역시 마한의 분묘로 이해되어 왔다. 이후 주구토광묘는 공주시와 연기군, 청주일대에서 그 발견 예가 증가하고 있다. 주구의 형태는 대부분 눈썹 형태로 경사의 위쪽에서 매장부 시설인 토광을 감싸고 있지만, 청주 송절동이나 공주 하봉리에서는 토광을 거의 두르듯이 감싼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한편 주구토광묘의 매장부인 토광은 주구에 비해 매우 깊게 굴착되어 있는데, 이는 주구묘의 매장부가 토광일지라도 분구 중에 위치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주구토광묘의 출토유물은 원저단경호와 심발형토기를 기본적인 셋트로 하지만, 장신구류인 청동제 곡봉형대구(曲棒形帶鉤)와 마형대구(馬形帶鉤), 그리고 유리제 구슬 등이 부장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 천안 청당동에서 출토된 두 종류의 청동대구(帶鉤)에 대한 분석결과 중국 북부지역에서 생산되는 청동임이 밝혀져 대외교섭의 근거로 보았다. 곡봉형대구는 중국 전국시대부터 서진시기까지 폭넓게 발견되고 있고, 한반도에서는 낙랑의 분묘에서 발견된다. 또한 호형(虎形)이나 마형대구는 청원 오창, 영천 어은동, 경주 사라리, 김해 양동리와 대성리 등의 목곽묘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 공간적 범위를 통해 중국 북부 ⤍ 낙랑 ⤍ 호서지역 ⤍ 영남지역으로 전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문화의 전파 루트나 유이민의 이동경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지」 위서 진한전의 기록을 보면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진(秦)의 고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동쪽의 땅을 할애해 주었다”라는 내용과 더불어 언어 역시 마한인과 다르며 진인(秦人)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사기」와 「후한서」에서도 위만의 망명기사와 더불어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통제가 불가해지자 많은 유이민이 한으로 건너갔다”라는 기사를 통해 진·한대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많은 유이민의 이입은 물론 물질적 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전국시대의 진국(秦國)에도 주구토광묘와 유사한 속성을 가지는 위구묘(圍溝墓)가 축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호서지방의 주구토광묘 축조집단의 뿌리는 진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유이민과 깊은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의 마한세력은 재지전통이 강한 주구묘 축조집단과 유이민집단이 어우러져 형성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문화재·학술
  • 박현우
  • 2022.01.25 15:47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호서 지역의 마한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마한의 공간적 범위는 대체로 경기·충청·전라지역에 해당되는데, 각 지역마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문화적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백제의 정치적인 성장에 따라서 마한 영역의 축소를 의미하며, 결국 점진적으로 마한 정치체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겠다.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정치적 변혁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유이민들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물질문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기 충청지역 즉 호서지역에서는 마한의 보편적인 분구묘와 계통이 다른 주구토광묘가 축조되고 있어 호남지역의 마한문화와 다른 문화적 양상을 띠고 있다. 호서지역의 보령 관창리에서 발견된 주구묘(분구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주구묘 유적으로서 학사적인 의미가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종류들이 송국리형 토기, 원형점토대토기, 두형토기, 흑색마연토기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의 송국리문화와 초기철기시대의 문화 간에 상호 관련성을 가지며, 그 시기를 기원전 3〜2세기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발견 당시 대부분 연구자들은 관창리유적의 주구에서 발견된 송국리 토기에 대해서 교란되었을 것이란 견해에서 그 시기를 3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최근 분구묘에서 점토대토기편들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어 그 시기를 청동기시대 송국리문화 단계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다. 이후 이러한 주구묘는 마한의 보편적 묘제로서 대형 분구묘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천안의 청당동유적에서는 주구묘와 같이 주구가 굴착된 토광묘가 조사되었는데, 역시 마한의 분묘로 이해되어 왔다. 이후 주구토광묘는 공주시와 연기군, 청주일대에서 그 발견 예가 증가하고 있다. 주구의 형태는 대부분 눈썹 형태로 경사의 위쪽에서 매장부 시설인 토광을 감싸고 있지만, 청주 송절동이나 공주 하봉리에서는 토광을 거의 두르듯이 감싼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한편 주구토광묘의 매장부인 토광은 주구에 비해 매우 깊게 굴착되어 있는데, 이는 주구묘의 매장부가 토광일지라도 분구 중에 위치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주구토광묘의 출토유물은 원저단경호와 심발형토기를 기본적인 셋트로 하지만, 장신구류인 청동제 곡봉형대구(曲棒形帶鉤)와 마형대구(馬形帶鉤), 그리고 유리제 구슬 등이 부장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 천안 청당동에서 출토된 두 종류의 청동대구(帶鉤)에 대한 분석결과 중국 북부지역에서 생산되는 청동임이 밝혀져 대외교섭의 근거로 보았다. 곡봉형대구는 중국 전국시대부터 서진시기까지 폭넓게 발견되고 있고, 한반도에서는 낙랑의 분묘에서 발견된다. 또한 호형(虎形)이나 마형대구는 청원 오창, 영천 어은동, 경주 사라리, 김해 양동리와 대성리 등의 목곽묘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 공간적 범위를 통해 중국 북부 ⤍ 낙랑 ⤍ 호서지역 ⤍ 영남지역으로 전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문화의 전파 루트나 유이민의 이동경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지」 위서 진한전의 기록을 보면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진(秦)의 고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동쪽의 땅을 할애해 주었다”라는 내용과 더불어 언어 역시 마한인과 다르며 진인(秦人)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사기」와 「후한서」에서도 위만의 망명기사와 더불어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통제가 불가해지자 많은 유이민이 한으로 건너갔다”라는 기사를 통해 진·한대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많은 유이민의 이입은 물론 물질적 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전국시대의 진국(秦國)에도 주구토광묘와 유사한 속성을 가지는 위구묘(圍溝墓)가 축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호서지방의 주구토광묘 축조집단의 뿌리는 진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유이민과 깊은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의 마한세력은 재지전통이 강한 주구묘 축조집단과 유이민집단이 어우러져 형성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문화재·학술
  • 박현우
  • 2022.01.25 13:28

전북도 "전북가야사 공론화 미흡했다"

속보=남원시 가야역사 바로세우기 시민연대(이하 남원가야 시민연대)가 전북가야사 육성 과정에서 관련 학회 예산 지출, 역사 규명 방식,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타당성 등을 두고 문제를 제기한 가운데, 전북도가 이에 대한 공론화 과정이 미흡했다는 점을 인정했다.(2021년 12월 30일 5면) 그러면서 추후에 △공론화의 장 추가 마련 △문헌사료 검증‧보완 △정보공개 절차에 따른 학회 예산 공개 등을 약속했다. 도 문화유산과는 이달 중순 전북가야사 조사 성과와 미래전략 학술세미나 관련 민원회신을 통해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 추진의 현황과 쟁점토론회 등 관련 토론회를 3차례 열며 공론화를 추진했으나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며 향후 관련 기관 단체 등과 협의해 공론화의 장이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문헌사료 <일본서기>를 활용해서 전북 가야사를 규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행정에서 역사와 관련된 자료를 활용할 경우, 학계에서 나오는 보편적인 견해를 사용하고 있다면서도 향후 (남원가야 시민연대)의 의견을 바탕으로 학계 자문‧검토를 거쳐 역사가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 예산집행 현황 공개에 대해서는 지난해 12월 31일부터 대행사업기관에서 추진되고, 올 1월말까지 사업 완료 보고서가 제출될 예정이라며 이후 정보공개 요청 시 절차에 따라 공개하겠다고 명시했다. 지난해 12월 20일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열린 전북 가야사 조사 성과와 미래전략 학술발표회에서 한 시민이 질문을 시도할 때 폭언과 폭행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서는 본 건과 관련해 경찰에서 조사 중에 있다. 조사 결과에 따라 처리하겠다며 당일 불편했던 점에 대해서는 향후 학술대회 추진시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앞서 남원가야 시민연대는 지난달 29일 전북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뒤,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세계유산등재과정에 대해 공론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남원가야 시민연대는 이날 "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 신청과 관련한 공문 서류 한 장도 공개하지 않는 문재인 정부와 문화재청, 가야고분군 등재추진단과 7개 자치단체, 전북도‧경북도‧경남도 세 곳을 향해 엄중 경고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남원가야 시민연대는 "이미 올해 8월부터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남원가야고분군 국책사업의 문제점이 전국언론에 보도됐다"며 "그러나 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추진단에서는 관련 회의조차 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전북도가 주최하고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가 주관했던 학술대회에서는 행사장 출입을 제한했고, 시민의 자료집 요구도 여분이 없다고 거절했다"며 "추운 겨울 전주박물관 밖에서 6시간을 기다린 시민들이 학술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발제자 곽장근 교수에게 공개 질문하려는 상황도 제지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발표자이며 연구책임자인 당사자에게 질문하려는 시민의 권리를 가로막고, 당사자도 아닌 제3자들이 개입하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심각한 실정법 위반"이라고 꼬집었다. 또 "5000만원을 연 학술행사는 전북도민을 기망하는 학술대회로 추락했다"며 "전북도민의 혈세가 사용된 내역을 자세히 공개한 뒤, 모든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론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일본서기>에 나온 기문국 명칭을 삭제하지 않는 이유를 남원시민에게 해명한 뒤, 원점부터 재검토해서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해야 한다"며 "세계문화유산 신청은 매년 제출, 철회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2.01.23 18:5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0)범 내려온 자리에 남은 호랑이 기운

호랑이 기운이 깃든 ‘인검(寅劍)’은 의례용 칼이다. 12간지 중 호랑이를 뜻하는 ‘인(寅)’은 양기가 강하며 의(義)를 상징하는데, 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인년, 인월, 인일, 인시가 네 번 겹쳐지는 시간에 맞추어 제작한 사인검과 삼인에 맞추어 제작한 삼인검이 있다. 조선 시대 인년은 총 43회였다. 태조 7년(1398) 무인년에 처음 인검이 제작되었지만, 전란과 흉년이 심한 해에는 만들지 못하기도 했다. 제작의 준비부터 완성되기까지 여러 복잡한 절차와 금기를 지켜가며 시기를 맞추어 선정된 장인이 특정한 장소에서 엄선된 재료로 의미를 담아 제작하였다. ‘사악한 것을 베고 나라를 지키라는 뜻’을 담아 왕실이 만든 인검은 ‘나쁜 기운을 막고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이었다. 호랑이는 예로부터 재앙을 물리치며 잡귀를 막아주는 ‘영물(靈物)’로 여겼지만, ‘호환(虎患)’이라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가축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물어 죽여 호랑이가 먹고 남긴 시신 일부를 모아 장례를 치르는 것을 ‘호식장’이라 하였으며, 그 자리에 만든 무덤을 ‘호식총’이라 하였다. 호환과 맞서기 위해 호랑이를 사냥한 모습이 고구려 벽화와 조선의 화가 이인문의 그림 등에 남아 있으며, 고려 시기에는 호랑이 전문 사냥꾼이 존재했다. 조선 초부터는 농사를 위한 개간이 늘어 살 곳을 빼앗긴 호랑이가 인가에 출몰하면서 호환이 잦아지자 조정은 호랑이를 잡는 ‘포호정책’을 펼쳤다. 태조 1년 성안에 들어온 호랑이를 쏴 죽인 것을 비롯하여 궁에 호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고 태종이 “범에게 상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죄를 주겠다”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호환에 대응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포호정책에 따라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잡는 최정예 군사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선발 운영하였고 세종 시기에 이르러 체계화되었다. 지방에도 호랑이를 잡는 ‘착호인’과 함정을 관리하는 ‘감고’등을 설치해 호랑이 가죽을 진상하게 하고 더러는 큰상을 내렸다. 왜란을 거치며 훈련된 조총 포수들이 호랑이 사냥에 투입되었고 산포수라 불린 숫자가 늘어 감에 따라 호랑이의 수는 점차 줄었다. 조선총독부는 피해 입히는 맹수를 퇴치한다는 구실로 해수구제를 정책으로 삼아 호랑이를 마구 사냥했으며, 부호 야마모토가 조직한 호랑이 사냥단 정호군까지 원정와서 ‘조선 호랑이 사냥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후 1922년 경주 대덕산에 살던 호랑이가 사살되면서 조선의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호랑이 왕국이라 불리던 조선에 그 많던 호랑이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는데, 임실 덕치면 약담봉에는 포수바위 전설이 있다. 마을을 공포에 떨게 하는 호랑이를 쫓아 달라고 정성껏 제물을 바치며 산신제를 올리자 감동한 산신이 마을을 내려다보는 약담봉에 세워준 게 포수바위이다. 이후 마을에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약담봉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류에 자리한 임실 신평면 호암리에는 특별한 호석(虎石)이 있다. 호랑이를 닮은 범바위가 있어 호암리인데, 그 모습을 두려워해서인지 확실치 않지만 사람들이 범바위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 후 범바위를 없애는데 주도한 사람의 집에 불이 나고 우환이 잇따르자, 수호신인 범바위를 없앴기 때문이라고 여긴 마을 사람들이 호석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이후 마을에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는데 만든 호석의 모습이 특이하다. 이빨을 드러내고 익살스럽게 히히 웃는 호랑이는 오금 저리게 하는 두려운 존재이기보다는 민화 속 친근한 호랑이 같기도 하고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며 흥정하는 동화 속 호랑이 같다. 공포를 해학으로 풀어 낸 친근한 상징이다. 남원에도 두리뭉실한 귀여운 모습의 호석이 있다. 광한루원을 비롯한 몽심재 고택과 고평마을 세 곳에 자리한 호석인데, 비슷한 형상이 마치 한 사람의 석공 솜씨처럼 보인다. 그 호석이 전해진 데에는 견두산(犬頭山)과 관련 있다. 견두산의 본디 이름은 호랑이 머리를 뜻하는 호두산(虎頭山)이었고, 그 고장은 호랑이가 들끓어 지명과 마을 이름마저도 호곡리(虎谷里)와 호음실이었다. 남원에 호환이 끊이지 않자, 풍수에 능한 전라감사 이서구(1754~1825)가 산 이름을 견두산으로 바꾸면서 호환이 사라졌다. 하지만, 견두산이란 이름을 얻자 성난 개가 남원 땅을 노려보는 모양새가 되어버렸고 들개와 늑대가 떼를 지어 나타나 피해를 줬다. 이에 이서구가 세 곳에 호석을 세우도록 하여 견두산을 바라보게 하자 들개무리의 피해와 호환도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호석이 있어 호석거리로 불렸던 남원의 옛 시장은 광한루원에 편입되어 사라졌지만 오작교 가는 길옆에 호석은 세월에 닳은 모습으로 서 있다. 그리고 명당으로 알려진 몽심재에는 호석과 더불어 호랑이 기운을 받을 수 있는 나무가 200여 년을 함께하고 있다. 나무줄기의 밑동이 호랑이 발을 닮아 ‘호족시’란 이름을 얻은 감나무가 특별하고 귀하다. 임인년 호랑이해를 맞으며 두려움을 넘어 벽사의 상징이 된 호랑이의 힘찬 기운을 받아 보자. 조선 왕실의 인검과 호랑이 물상에 기대어 삿한 것을 물리치고,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란 노래로 한껏 흥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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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세종
  • 2022.01.19 13:48

"후삼국 시대 선도한 후백제 재평가 시급"

후백제의 역사적 위상을 재정립하고 문화권 정비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토론회가 개최됐다. 더불어민주당 김성주(전주병)‧안호영(완주진안무주장수)‧김종민(논산)의원과 국민의힘 임이자(상주 문경) 의원이 주최하고, 후백제학회(회장 송화섭)가 주관하는 '역사문화권 지정을 위한 후백제 국회 토론회'가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지역 학자들은 후백제의 위상을 조명했다. 이어 후백제 역사문화권이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역사문화권 정비법)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문화재청은 이를 두고 적극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는 토론을 주최한 의원들을 비롯, 송하진 전북도지사, 후백제문화권 지방정부협의회 소속 김승수 전주시장, 박성일 완주군수, 전춘성 진안군수, 고윤환 문경시장, 강영석 상주시장 등이 참석했다. △후백제 위상=이날 주제발표에 나섰던 학자들은 한국 고대사에서 후백제가 차지하는 위상을 조명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지역주의를 뛰어넘고 기회와 참여의 폭을 넓힌 사회로 넘어가는 사회가 후삼국시대라며 이 시대를 선도한 국가가 후백제라고 주장했다. 이어 진훤(견훤)은 농민 출신이었으며 지도층은 신라에서 정치 참여에 한계가 있었던 6두품과 지역 토호 세력들이었다면서 백성들의 생활향상에도 힘썼는데 둔전이나 관개를 통해 농업경제 증진에 힘을 쏟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라 말보다 진전된 국가로 평가했다. 정상기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실장은 고고‧미술사적 자료를 통해 후백제문화권의 범주를 살폈다. 정 실장은 산성과 청자 가마터, 청자, 사찰유적 등을 통해 살펴볼 때 후백제의 범주는 광주, 전남‧전북, 경남 서부, 경북 북부, 충남 홍성 등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실장은 역사문화권정비법에서 정의하는 역사문화권은 문헌기록과 유적‧유물을 통해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발전시켜 온 권역이라며 후백제는 법에서 정의한 역사문화권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새롭게 발굴된 후백제 유물‧유적=이날 발표에서는 완주군이 후백제 문화유적 15곳을 확인하고 발굴 조사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박성일 완주군수는 이날 토론회에서 후백제 문화유산 현황 파악을 위한 전수조사 결과 봉림사지와 용계산성을 포함한 15개소의 유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봉림사지는 후백제 시대 절터, 용계산성은 운주면 용계천을 따라 남쪽으로 4㎞가량 뻗은 석성이다. 특히 3차례 발굴 조사를 통해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봉림사지의 실체를 최초로 실증했다며 올해는 용계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를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후백제 문화권 역사문화권정비법에 포함 여건 충분=문화재청 이재필 고도보존정책과장과 군산대 곽장근 교수, 문경시청 엄원식 문화예술과장, (사)채미옥 미래세상 이사가 참여한 토론에서는 후백제 역사권이 역사문화권 정비법에 추가 포함될 여건이 충분한 것으로 논의됐다. 이재필 과장은 역사문화권 정비법 개정안과 관련한 지역의 요구를 문화재청은 최대한 수용하는 정책방향"이라며 "이런 방향성에 의해 후백제 역사문화권이 개정안 에 포함되는 방향을 적극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번에 예맥과 중원 등이 들어오면서 너무 많은 문화권이 난립할 우려가 있다"며 "태봉과 진안, 변한문화권에 대한 요구도 들어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이로 인해 "문화재청은 올해 전국적으로 역사문화권 기초 현황조사를 실시한다"며 "전반적인 조사를 통해 원삼국부터 후백제까지 아우르는 역사적 개념을 정립한 뒤, 법안 포함여뷰를 적극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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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22.01.18 18:3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역사 기록관 '나주 복암리 3호분'(하)

나주 복암리 3호분이 영산강유역의 분구묘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이유는 하나의 분구 내에 400여년 정도 지속적으로 매장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매장부의 유형 변화를 통해 마한의 정치와 사회문화를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대형분구 축조 이전의 3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에 이르는 선행기에는 난형(卵形) 몸통의 목이 좁은 형태에서 U자형 대형옹관으로 변화된 옹관이 주요 매장부로 채용되고 있다. 이 시기는 영산강유역의 연맹체 세력들이 백제의 영향력에 압박을 받으면서 새롭게 결집성장하는 단계로 파악할 수 있다. Ⅰ기는 5세기 후엽에서 6세기 전엽에 해당하는데, 선행기의 분구를 조정확대하여 방대형 분구를 축조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새로이 출현하는 96석실은 공주지역의 백제 석실분과는 입지, 평면형태, 축조방법과 구조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일본 구주지역과 교섭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소위 영산강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석실 내에 시기차를 두고 안치된 4기의 옹관의 존재는 전통적인 옹관과 외래의 석실이 결합된 양상으로서, 이는 옹관을 주요 매장시설로 이용하던 마한세력이 석실분을 자발적으로 수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 정세를 보면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인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틈타 영산강유역의 마한 세력이 대외교섭을 통한 독자적 발전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석실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96석실 내의 2호 옹관에서 출토된 금은장삼엽환두도(金銀裝三葉環頭刀)를 통해 피장자의 신분이 지배자 계층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4호 옹관은 영산강유역의 대형 옹관과 달리 생활용기로 사용되던 회청색 경질의 호형토기이며, 4기의 옹관 가운데 가장 늦게 안치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 옹관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통하고 있어 Ⅰ기의 마지막 단계로서 백제의 지방통치와 관련된 단서가 되고 있다. Ⅱ기에는 본격적으로 백제계의 횡혈식석실분을 매장부로 채용하는 단계인데,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초에 해당한다. 이 단계에는 석실이 정형화소형화되는 사비유형이 주를 이루지만, 긴 묘도와 연도의 시설에서 전형적인 사비유형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미 채택하고 있었던 영산강식 석실의 속성이 가미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복암리 3호분 축조집단이 사비유형의 석실분을 자발적으로 수용한 증거가 된다. 이 단계의 사비유형 5호 석실에서는 관모틀과 은제관식이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유물은 백제 고지에서 폭넓게 발견되고 있다. 은제관식은 중국 역사서인 「周書」에 보면 백제의 16관등 가운데 6품인 나솔(奈率) 이상의 관인이 착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은제관식을 착장하고 있었던 피장자는 복암리 3호분 축조집단에서 배출되었던 중앙관리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백제가 이 지역을 완전하게 편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영산강유역의 마한계 집단도 백제 중앙관리로 진출하여 지속적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나주 복암리 3호분은 3세기부터 7세기 초까지 영산강 유역의 마한 연맹체세력들이 변화에 어떻게 적응해갔는지 보여주는 기록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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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8 17:37

지역 학자들 후백제 역사문화권 지정 위해 머리 맞댄다

전북 지역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후백제 역사문화권 지정 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린다.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국회의원은(전주병)은 18일 국회 의원회관 2층 제1세미나실에서 후백제 역사문화권 지정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한다. 이번 토론회는 후백제가 한국사에서 가지는 위상을 확인하고 역사문화권 지정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토론회는 송화섭 후백제학회장(중앙대 교수)이 좌장을 맡아 진행한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한국고대사에서 후백제사의 의미', 정상기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고고 미술사적 자료로 보는 후백제 문화권의 범주',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후백제 문화권 정립과 추진 방향' 에 대해 주제발표를 한다. 자유토론에는 이재필 문화재청 고도보존정책과장, 채미옥 (사)연구그룹 미래세상 이사, 곽장근 군산대 교수, 엄원식 문경시청 문화예술과장이 참여한다. 김성주 의원은 후백제는 고유의 통치이념과 체제, 문화를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후삼국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국가로 인식돼 역사적 가치규명과 보존 등에 소홀했다며 '후백제 역사문화권 지정과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후백제를 추가하는 것은 후삼국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복원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는 유튜브(후백제학회 검색)로 생중계된다. 한편 토론회는 후백제 관련 지역의 김성주 의원(전주병), 안호영 의원(완주진안무주장수), 김종민 의원(충남 논산), 임이자 의원(경북 상주문경)이 공동 주최했고, 전국시도지사협의회장인 송하진 전북도지사와 후백제문화권 지방정부협의회 소속 김승수 전주시장, 박성일 완주군수, 전춘성 진안군수, 고윤환 문경시장, 강영석 상주시장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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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22.01.17 19:21

[최완규 교수의 '마한 이야기'] 마한역사 기록관 '나주 복암리 3호분' (상)

나주 복암리 3호분은 몇 년전에 KBS의 역사관련 다큐프로그램에서 아파트형 고분으로 소개되어 많은 관심을 끈 바 있다. 그것은 하나의 분구(墳丘) 내에 41기의 매장(埋葬)시설들이 마치 아파트처럼 중층 구조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특징을 잘 묘사한 제목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복암리 3호분은 마한 분구묘의 속성 가운데 가장 마한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곧 혈연을 기반으로 하나의 분구 내에 무려 300〜400년의 시간 폭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매장이 추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특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장부의 구조가 변하고 있는 점이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마한의 정치 사회문화를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서 가히 마한역사 기록관 또는 마한 박물관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이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은 주변의 경지정리가 되기 이전에는 7기가 자리잡고 있어서 七造山이라 불렸으나 경지정리 과정에서 3기는 훼손되고 현재는 4기만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이 대형 분구묘가 저평한 구릉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어서 마치 산으로 보였던 것으로 이를 인위적으로 조성된 산이라는 의미에서 조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3호분은 1996년에서 1998년에 걸쳐 전남대학교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서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는데, 조사가 한창 이루어지던 시점인 1998년 2월에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사적 404호로 지정되었다. 이 고분의 분구 규모는 동서 36m〜38m, 남북 37m〜42m, 높이는 6m 정도이며, 평면 형태는 방대형을 이루고 있다. 분구의 하단 주위에는 주구가 돌려져 있는데, 경작으로 인하여 일부가 훼손된 상태였다. 이와 같이 거대한 분구를 갖추게 된 것은 오랜 기간 매장이 이루어지면서 평면적으로 확장되고 상하로 중첩이 이루어진 결과로 판단된다. 곧 조사 결과에서 확인된 분구 조성이전의 선행기와 분구 조성은 2차에 걸쳐 이루어진 3단계를 거친 것으로 층서관계를 통해 파악되었다. 또한 각 단계마다 매장부의 구조에 따라 다시 2〜3단계로 세부적인 분기 설정이 가능하였다. 선행기는 방대형 분구 조성 이전에 사다리 모양의 분구묘가 주구를 통해 확인되는데, 매장 시설로는 옹관과 목관이 사용되었다. 방대형 분구 조성 1기는 선행기의 분구를 조정 확대하여 축조한 것으로 기존의 분구형태를 유지하면서 주구 및 옹관의 사이의 공백을 메웠다. 1기 분구 조성과 함께 안치된 매장시설은 96석실, 수혈식석곽, 옹관 등이다. 분구 조성 2기에는 방대형 분구 완성이후, 성토층을 되파기하여 묘광을 설치한 후 옹관, 횡혈식석실, 횡구식석실, 석곽옹관 등 다양한 매장시설이 보이고 있다. 나주 복암리 3호분은 분구 축조과정 및 매장시설에서 마한 분구묘의 속성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성격을 규명함으로서 마한의 정치와 사회문화의 변화를 추적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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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1 16:49

[전북 마한역사문화권 포함…과제는](하) 관련분야 연구자 육성, 발굴 활성화

각종 문헌사료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전북에 여러 마한 소국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만 소국의 규모와 위치, 전북 마한 중심지설을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각 문헌사료에 나온 기록이 적은데다 유물유적 역시 발굴단계이기 때문이다. 근거가 적은 이유로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관련법 통과로 전북 마한사를 복원하는 데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 만큼 여러 선행과제가 제시되고 있다. 유물유적의 발굴과 지표로 확인된 유적의 보존관리, 학술연구, 관련분야 연구자 육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마한 54개 소국가운데 전북에 분포했다는 20개 소국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마한소국을 연구했던 역사학자 정인보(전 연희전문대 교수)‧이병도(전 서울대 교수)‧천관우(전 동아일보 주필)‧박순발(충남대 교수)도 논문에서 전북 내 소국의 위치에 대해 다른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고창에 존재했던 모로비리국과 김제 벽비리국, 익산 함라 일대의 감해국 등 9곳은 어느 정도 의견 접근이 이뤄졌다면서도 나머지 11곳은 학자마다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문헌자료 분석의 한계를 실감하게 한다고 부연했다. 전북에 마한 세력만 존재했을 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20개 소국의 존재를 전부 마한세력으로 지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는 연구 논문을 통해 마한을 구성한 여러 정치체가 전라도 지역에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며 다만 이 지역에 마한이라는 이름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종족도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권 교수가 <삼국지>, <삼국사기>, <송서>, <진서> 등 문헌사료를 비교연구하면서 분석한 내용이다. 그는 특히 <송서>에 모한(慕韓)이 있는데 <삼국지>, <삼국사기>, <진서>에 나온 마한(馬韓)과는 다른 존재라며 백제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한 5세기~6세기 전반까지 존재했던 별개의 정치세력이라고 설명했다. 김승옥 전북대 교수는 출토된 유물만으로 마한 소국의 존재를 단정지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마한 등 여러 고대문화의 정체성이 주거지나 무덤에서 발견된 한두 가지 유물로 규정될 수 없다며 주거지와 무덤, 성곽, 수혈, 패총 등 모든 유구의 특질과 출토된 유물에 대한 과학적 해부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헌사료 <제왕운기>와 <고려사>는 고조선 준왕이 위만에 패한 뒤 내려온 남쪽 지역을 익산으로 지목하고 있지만, 이를 두고 역사적 사실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박대재 고려대 교수는 관련 연구를 통해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기록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윤색된 기록으로 분석하고 있다. 박 교수는 중국 문헌 <삼국지>에 앞서 쓰인 사서에도 준왕이 정착된 지역이 다르게 나오고 있다면서 게다가 위만조선 멸망 이후 남쪽으로 내려온 유민들은 자신들의 계보를 준왕과 결부시키는 동종 의식을 갖고 있던 것으로 분석된다고 했다. 이에 따라 마한이 강성해지기 시작한 2세기 후반 남하한 조선계 유민집단이 준왕과 가계를 연결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마한사 관련 유물유적 발굴을 활발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마한사를 정확하게 규명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표조사로 확인된 유물유적을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최 이사장은 혁신도시와 만경강 일대에서 지표조사로 확인된 유물유적의 경우 표식조차 없이 방치되는 경우가 있다며 이들을 보관할 수 있는 박물관이나 별도의 시설을 만드는 등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마한소국과 관련에서는 익산에 3~4세기 이후 존재한 것으로 보이는 건마국의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고 했다. 건마국이 익산이라는 전제로 다른 지역과 뚜렷이 구분되는 자료를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련분야 연구자 육성이 필요하다고도 조언했다. 마한과 관련된 문헌사료를 분석하고 고고학적 유물을 검증하는 학자들이다. 최 이사장은 현재 마한사를 전공하는 학자가 적다며 지역 대학에서 관련분야 연구자를 육성하기 위한 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2.01.06 19:15

[전북 마한역사문화권 포함…과제는] (상) 마한사 기록과 발굴 현황

지난달 31일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역사문화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 인해 전북은 전남에 이어 마한역사문화권의 범주에 포함됐고, 전북 마한사를 보존‧관리‧발굴‧복원하는 데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마한사를 검증하는 역사연구도 활발히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전북 마한역사문화권에 대한 이론과 쟁점, 과제를 살펴본다. △문헌 기록과 유물‧유적=마한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동사강목>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문헌사료인 <삼국지>와 <후한서>, 일본 사료인 <일본서기>에도 등장한다. 이들 사료에는 (고)조선왕 준(準)이 위만에 패한 뒤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을 정복하고, 스스로 한왕에 올랐다고 나와 있다. 특히 <제왕운기>와 <고려사>는 준왕이 내려온 지역을 금마군(익산)으로 지목하고 있다. 마한의 정치‧사회적 규모도 엿볼 수 있다. <삼국지>에 나온 만여가(萬餘家)로 구성됐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상당히 큰 규모의 소국이 존재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관련 연구를 통해 문헌사료와 군집된 유적군과 비교해보면 백제로 영역화 되기 이전, 강력한 세력을 가진 정치‧사회적 집단이 존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관련 유물‧유적의 발굴도 지속되고 있다. 최근 만경강 이남과 황방산 일대에는 대형 군집묘 구상유구(U자 모양 수로)가 발견됐다. 익산 영등동과 율촌리에서는 마한 초기 문화권을 보여주는 점토대토기들이 다량으로 묻힌 주구묘와 분구묘가 잇달아 발굴됐다. 김승옥 전북대 교수는 관련 연구를 통해 국읍을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인구가 밀집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전북 지역 마한소국 규모와 존속 시기=마한소국을 연구한 역사학자 정인보(전 연희전문대 교수)‧이병도(전 서울대 교수)‧천관우(전 동아일보 주필)‧박순발(충남대 교수)의 견해를 종합하면, 마한에 속한 소국 54곳 중 20곳이 전북에 위치한다. 이들은 군산과 익산, 김제, 부안, 정읍, 고창, 저주, 완주, 진안, 순창, 임실, 남원 등에 분포돼 있다. 문헌사료와 고분, 토기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도출한 견해다. 이들 소국은 기원전 3세기 말기원 후 4세기 중엽까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최 이사장은 "각종 문헌사료를 보면 백제 근초고왕 24년(369년)에 침미다례(忱彌多禮)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읍(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을 복속했다고 나온다"며 "침미다례는 해남과 강진, 고흥,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읍은 전주, 부안, 김제, 정읍, 태인에 존재한 소국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전북에 있는 마한소국들은 4세기 중엽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2.01.04 19:02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봉화터에서 가야산성 확인

장수군은 장계면에 위치한 삼봉리 봉화터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산성을 확인했다고 30일 밝혔다. 장수군은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의 허가를 받아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소장 곽장근)와 함께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장수 삼봉리 산성이 그 당시 장수가야에 의해 축조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30일 밝혔다. 이번 발굴조사는 현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된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전북도와 장수군의 지원을 통해 이뤄졌으며, 지난 21일에는 장수 삼봉리 산성의 발굴조사 성과를 논의하기 위해 자문위원회의도 열렸다. 회의에서 관련 전문가들은 장수 삼봉리 산성의 입지와 형태성벽의 축조방법이 최근 영남지역에서 발견된 가야산성과 유사하고, 산성에서 적지 않은 가야토기가 출토돼 6세기 전반 이전에 장수지역 가야세력에 의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가야 멸망 이후의 6세기 후반에는 신라가 산성을 장악했으며, 그 과정에서 집수시설이 운영된 것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군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장수 삼봉리 산성과 장수에 존재했던 가야와의 관련성이 보다 명확하게 확인돼 향후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가야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이번 장수가야 발굴 조사를 통해 장수가야가 어떻게 성장하고 소멸했는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많은 분들이 장수가야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문화재 발굴조사를 적극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이재진
  • 2021.12.30 19:16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유통의 거점 '부안 백산성' 1

사적 409호 백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의 백산은 표고 47.4m의 높지 않은 구릉이지만, 주변에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먼 거리까지 조망하는데 매우 좋은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동쪽으로는 인접해서 직강화가 이루어진 동진강이 서해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직선거리 1.6km 정도 떨어져 고부천이 서해로 흘러들고 있다. 또한 이 유적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고부, 동쪽으로는 신태인, 북쪽으로는 김제로 통하는 육로 교통의 요지라 할 수 있고, 서쪽으로 동진강과 고부천을 통해 서해로 통하기 때문에 해로와 육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 전개과정에서 지원군으로 바다를 건너온 왜군을 의자왕의 아들인 풍장왕(豊璋王)이 직접 백촌(白村)에 나아가 맞으리라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보이는데, 백촌이 바로 백산성에 해당한다. 또한 백산성의 정상부 평탄지대에는 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1984년 갑오동학 농민전쟁 당시에 동학군이 혁명의 기치를 들었던 이른바 백산기포(白山起包)의 역사적 현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죽창을 들고 이곳 백산으로 모여들었던 흰옷 입은 농민들의 당시 상황을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농민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는지 짐작된다. 이와 같이 백산성이 백제 부흥운동이나 동학농민전쟁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의 요충지라는 지리적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백산성은 백산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064m에 달하며 평면 장축 길이는 358m, 폭 230m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 산성에 대해서는 3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당초 예상되었던 백제시대의 성벽은 확인되지 않았다. 1차 조사에서는 정상부에서 원삼국시대 집자리 1기와 구석기시대 문화층과 청동기시대의 유물포함층과 방어시설로 판단되는 3중의 다중환호가 경사면을 따라 굴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2차 조사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지 17기, 시대미상의 석관묘 1기, 구상유구와 주혈군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완, 발, 장란형토기, 시루, 주구토기 등 자비용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도 방추차, 철도자, 옥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자연유물로는 쌀, 밀, 보리, 조, 콩, 팥 등의 탄화작물종자와 다양한 잡초종자, 동물의 뼈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곡물류는 이곳이 바로 농산물의 집산지로서 유통의 거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적극적인 자료라고 볼 수 있다. 한편 2차 조사의 주거지 4기에서 나온 탄화작물과 1차 조사에서 출토된 탄화 목제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 북서쪽 주거지들은 2세기 전반에서 3세기 전반에 해당하고, 남동쪽에 밀집된 주거지의 연대는 3세기 전반에서 4세기 중반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인근에 위치하는 벽골제의 초축연대나 영원면 일대의 분구묘 연대와 대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특히 3차 조사에서는 해발 39-43m에서 4중의 환호가 확인되었고, 그 가운데 2호와 3호의 환호 사이 해발 약 42m에서 2기의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사적 제409호 백산성의 성격은 백제시대의 태뫼식 산성이 아니라 환호로 둘러싸인 유통의 거점과 같은 특수목적의 유적으로 재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최 완 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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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2021.12.28 19:31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나주 신촌리 출토 금동관

왕과 왕비가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관은 삼국시대의 고고유물 가운데 최고의 위세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지역에서는 이러한 금동관이 당시 왕도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지역에서, 그것도 왕릉이 아닌 분묘에서 그 출토예가 증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화성 요리 목곽묘, 천안 용원리 석곽묘, 공주 수촌리 목곽묘, 서산 부장리 분구묘, 익산 입점리 석실분, 고흥 길두리 석실분, 나주 신촌리 분구묘 등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백제지역에서 금동관이 출토되는 분묘 양상은 익산 입점리를 제외하면 중앙 지배세력의 묘제와 다른 다양한 유형의 분묘라는 점에서 각 지역별로 분묘 전통이 다른 토착세력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 또한 금동관이 출토된 분묘들은 한성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이어서 당시의 백제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17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은 한 변이 3530m, 높이 5.5m의 방대형 분구묘로서 분구 내에 상하 이중으로 12기의 대형옹관을 매장주체부로 안치하고 있다. 그 중 을관(乙棺)에서는 한국 최초로 고대국가의 금동관이 부식되지 않고 거의 완형으로 출토되었다. 한편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한 전면 재발굴을 통해 분구의 축조기법을 살필 수 있었고, 분구 중에 열을 지어 돌려 세워놓았던 원통형 토기가 확인되었다. 신촌리 9호 을관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높이 25.5㎝로서 관모와 대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동관모의 전체적인 형태는 2장의 금동판을 겹쳐 둥글게 감싸 덮은 후, 각각 4개의 원형머리를 가진 못으로 고정한 고깔 형태이다. 좌우 측판에는 연꽃과 넝쿨무늬, 그리고 파상문을 타출(打出)기법으로 전체적인 문양을 표현하였다. 금동대관은 둥근 테에 앞쪽과 양 측면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장식을 세운 형태이며, 영락과 유리구슬을 달았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 금동관의 山자 모양이 아닌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나주 일대를 지배하던 세력의 최고 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 금동관이 현지의 토착 세력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양론이 분분한 편이다. 다만 이러한 금동관이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만 출토되고 있다는 점과 공반되는 유물이 장식대도나 중국제 청자 등 위세품이란 점에서 백제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사여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특히 넓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점에 비해서 금동관의 기본 형태나 문양수법에서 공통점이 많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신촌리 금동관을 중앙에서 하사한 것으로 본다면 백제의 4〜5세기의 지방통치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곧 담로제나 왕후제(王侯制)에서 작위를 받은 지방세력들이 금동관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영산강유역의 마한 유적에서는 가야나 왜 등 대외교섭이 활발한 증거들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금동관이 출토된 다른 지역에 비해 백제 중앙과 관계 속에서 좀 더 독자적인 세력집단으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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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21 19:47

제철유적, 봉화 관련유물 검증 두고 격돌 “반파·기문 검증” vs “검증 다시 해라”

20일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열린 전북 가야사 조사 성과와 미래전략 학술발표회에서는 소위 전북가야사를 규명하기 위해 발굴한 유물‧유적과 문헌사료 해석문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동부지역에서 발굴된 제철‧봉수(봉화)유적터가 전북 가야 의 실체를 완벽히 규명해줄 수 있는지가 논의의 골자다. 이와 함께 문헌자료인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나온 기문과 반파를 각각 남원과 장수로 볼 수 있는 지를 두고도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문헌‧고고학적 연구 결과 반파국의 소재지는 장수, 기문국은 남원으로 드러났다며 고고학적 발굴성과와도 잘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일본서기>뿐만 아니라 실학의 비조인 성호 이익도 가야의 범위를 전북 동부로 봤다고 설명했다. 봉화와 관련해서는 거대 봉화망의 발견은 문헌사료에서 누락된 정치체의 발견으로 볼 수 있다며 <일본서기>등에 따르면, 백제-왜-신라-반파국은 3년 간 전쟁을 벌였고, 당시 봉화가 국가(가야국) 운영에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제철유적과 관련해서는 운봉‧진안고원, 장계분지에 발견된 제철산지를 4국 전쟁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 있다며 제철을 확보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체계적인 발굴이 이뤄지면 이 같은 상정을 뒷받침해줄 것이라고 부연했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발굴된 봉화를 토대로 전북 동부지역에 형성된 봉화망을 주장했다. 곽 교수는 운봉‧무주‧금산‧완주‧진안‧관촌‧임실‧순창 봉화로는 장수군 장계리 삼봉리 산성에서 하나로 합쳐진다며 이들 전체망은 제철유적의 밀집도가 높은 지역과 국경선을 따라 배치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봉화시설에서 장수군 가야계 분묘유적 출토품과 동일한 가야토기가 출토됐다며 운영주체를 장수가야로 고증됐다고 주장했다. 이남규 한신대 명예교수는 발굴된 제철유적을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가야시대 제철로 보기엔 시기상조라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이 교수는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 등에서도 무주, 순창, 완주에 일찍부터 철산지가 있었다고 나와 있지만, 장수, 진안, 남원지역의 철산은 고문헌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향후 개별 유적들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와 굴토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료를 충분히 선별해 분석전략을 세우고 고고학‧금속공학 연구자들과 작업을 같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인선 순천대 교수는 학계 일부에서 가야 봉화로 볼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며 약속된 규칙과 노선에 따른 신호전달 체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규영 진안향토사연구소 소장은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최 소장은 전북 가야론자들이 주장하는 진안 지역 25개 봉수가 흔적도 없는 이름만의 봉수들이라며 이 봉수들이 완주나 금산의 봉수로의 중계지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 도무지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27곳이나 되는 제철지 역시 금시초문으로 흔적조차 잡을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문헌사료와 관련해서는 전북 가야의 존재는 <일본서기>의 간략한 기록 뿐이라며 그런데 장수(장계)처럼 해안에서 멀고 내륙 깊숙한 지점에 있는 곳이 봉화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대가야 지역인 고령은 낙동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다"고 부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12.20 19:24

전북 가야 조사 성과 검증의 장 열린다

전북 동부지역에 존재했다는 가야세력의 실체를 조사한 성과를 살피고 재정립하는 학술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특히 독자가야세력설의 근거인 제철 유적과 봉수의 조성 시기 문제, 문헌사료인 일본서기의 해석문제가 주요 화두가 될 전망이다. 전북도와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는 20일 국립전주박물관 강당에서 전북 가야사 조사 성과와 미래전략 학술대회를 열고, 전북 가야의 역사적 실체 등에 대해 토론을 한다. 주제는 전북 가야를 둘러싼 여러 가지 쟁점사항과 당시 고대국가의 움직임으로 압축된다. 제1세션에는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장이 마한과 백제, 그리고 전북가야,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가 고고학으로 본 신라의 전북지방 진출과정,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전북가야의 역사적 실체 검증을 발표한다. 제2세션에는 이남규 한신대 명예교수가 전북 제철유적의 현황과 조사방법, 곽장근 군산대 교수가 전북가야 봉화망과 그 의미를 발제한다. 주제별 발표가 끝난 뒤에는 이재운 전주대 명예교수를 좌장으로 지정토론 및 종합토론이 열린다. 토론자로는 조상진 전북일보 객원논설위원, 김재홍 국민대 교수, 송화섭 중앙대 교수, 홍진근 국립전주박물관장, 최인선 순천대 교수, 이춘구 전 KBS국장, 최규영 진안향토사연구소장이 참석한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전북 가야 유물, 유적의 조사 성과 검토 외에 가야 정치체의 실체, 관련 유물인 봉수봉화제철유적의 조성시기, 반파국의 장수지역 존재여부, 문헌사료인 일본서기 해독 문제 등을 두고 갑론을박도 벌어질 전망이다. 전북 가야가 발표된 뒤, 학계에서 그 동안 논쟁을 벌여왔던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반파국의 장수지역 존재와 일본서기 사용 및 해석여부를 두고는 최근에도 언론과 학계, 시민사회단체에서 치밀한 검증을 요구하고 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12.19 19:2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의 국제성

고창 봉덕리 일대에는 대형 분구묘 5기 외에도 많은 수의 마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어서 이곳을 중심으로 마한 「모로비리국」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2001년 아산-고창간 지방도 확·포장 공사구간에서 발견된 봉덕유적은 추정 방형분 1기와 주구 6기, 인근 구릉의 사면에서 52기의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2002년에 조사된 만동유적에서는 봉덕유적보다 이른 단계에 해당하는 분구묘 13기, 단독묘 4기 등에서 환두도와 철부 철모, 그리고 다양한 옥으로 만든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봉덕리 1호분은 발굴조사 결과 파괴된 석실 내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자편과 금동신발편과 특히 4호 석실에 부장되었던 금동신발을 비롯한 화려한 위세품을 통해 모로비리국의 중심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분구 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5기의 석실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은 4호 석실에 부장되었던 중국제 청자와 소호장식광구호(小壺裝飾廣口壺)는 모로비리국의 국제적인 교류관계를 살필 수 있는 단서로 주목된다. 4호 석실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자는 석실의 남동 모서리에 뒤집어져 있던 토기 항아리와 같이 세워져 놓여 있었다. 이 청자는 높이 36.8cm 로서 아가리가 작은 쟁반과 같은 반구호(盤口壺)로서 최대 너비를 이루는 어깨에는 6개의 고리가 부착되었다. 각을 세워 만든 고리는 횡으로 2개를 한조로 반대편에 대칭으로 부착하고 그 사이에는 동일한 형태의 1개씩의 고리를 역시 대칭으로 부착하였다. 시유된 유약은 녹황색의 탁한 색조를 띠면서 거친 편인데, 동체부 하단에서 바닥까지는 시유되지 않았다. 이러한 고리 모양을 특징으로 하는 반구호는 중국에서는 동진 말기에서 남조 초기에 해당하는 5세기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호장식유공광구소호는 석실 내의 남벽 중앙에서 호와 받침이 한 세트를 이루고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출토된 예이다. 아가리가 넓은 호의 어깨에는 형태가 동일한 4개의 작은 광구호를 부착하고 하나의 구멍을 뚫고 있으며 둥근 바닥을 가지고 있는데, 높이는 17.4cm 이다. 받침으로 사용된 고배는 높이가 15.0cm로서 배신의 아가리는 넓고 그 아래에 2조의 돌대를 돌리고 그 밑에는 파상문이 시문되어 있다. 대각은 그리 높지 않으며 세장방형의 투창을 4곳에 뚫고 각 투창 사이의 하단에는 원형 구멍을 뚫었다. 한편 대각의 바닥은 일반적인 고배와 달리 막음 처리를 했는데, 그 안에는 2개의 토제 구슬이 담겨져 있어 흔들면 방울처럼 소리가 난다. 이러한 형태의 소호장식광구호는 중국에서는 우리엔콴(五聯罐)이라 불리며 청자로 제작된 것이지만, 후지엔성(福建省)민허우 통꺼우산(桐口山) 출토의 동진시대 것과 통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발견된 예를 보면 장식호와 받침인 기대가 부착된 상태로 제작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특히 6세기 중엽이후의 것들은 매우 높은 기대가 부착되어 있다.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에서 발견된 중국 동진대의 청자는 현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한반도에서 다수 발견 예가 있다. 한편 소호장식유공광구호는 일본의 고분시대의 스에끼(須惠器)와 토기제작수법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고창에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유물자료를 볼 때, 봉덕리 주변의 마한 분구묘와 집자리를 축조했던 모로비리국의 중심세력은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폭넓은 국제적 교류를 통해 백제 영역화 이후까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 문화재·학술
  • 기고
  • 2021.12.14 17:21

전주국립박물관 디지털 굿즈로 문화유물 알린다.

국립전주박물관(관장 홍진근)이 태블릿PC와 모바일폰 환경에서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굿즈 굿노트 템플릿서비스를 6일부터 제공한다고 밝혔다. 노트 필기 앱에서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 서식 문서인 굿노트 템플릿은 월간 다이어리와 자유로운 기록이 가능한 무지 다이어리, 자신만의 전시 후기를 담을 수 있는 전시 다이어리 속지가 담겨있다. 월간 다이어리 속지와 전시 다이어리 속지는 전주의 옛 한지 느낌을 살려 제작됐다. 국립전주박물관의 대표 유물인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 청자 모란 구름 학무늬 매병등의 스티커로 실제 다이어리처럼 꾸밀 수 있다. 무지 다이어리 속지는 국립전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선비 서화가 이정직(1841~1910)의 묵죽도 6폭 병풍 를 주제로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선현들의 작품을 디지털 플랫폼으로 만날 수 있다. 함께 제공되는 모바일 배경화면은 매월 박물관의 대표 유물들로 주제를 바꿀 수 있도록 제작됐다. 전 낙수정 범종을 필두로 내년 1월부터 선보인다. 오는 25일까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벤트도 진행한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내려 받은 굿노트 템플릿 혹은 모바일 배경화면을 사용하는 모습을 찍어 개인 SNS에 올리고 댓글로 링크를 달면 추첨을 통해 선물을 증정할 예정이다. 박물관 홍보 담당자는 이번 디지털 굿즈 드림을 통해 박물관의 전시 및 문화행사에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디지털에 특화된 젊은 세대에게 지역 문화유물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12.0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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