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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적당한 교활함과 나태 또는 무능을 업보처럼 이어받은 이발사에게서 태어난 이 사내는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이 다른 아이보다 뒤쳐졌으나 그림은 곧잘 그렸고 13살 밖에 안 된 소년이 자기 아버지의 가계에 거친 솜씨의 스케치화를 전시하기도 했었다. 모든 것이 모자란 만큼 그림에는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왕립 아카데미에 목탄화 두 장을 제출하고 입학을 허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든 별로 배운 것이 없이 다른 사람들을 기피하고 혼자서만 꼼지락 거렸다. 그가 이성에 대한 사랑을 느낄 나이에는 친구의 누이동생과 약혼까지 하였으나 이내 일자리를 찾아 떠나게 되고, 약혼자에게 보내는 편지의 대부분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약혼자 어머니의 손에서 증발되어 그녀는 그의 소식을 몰라 하다가 시나브로 사랑이 식어 나이 많은 남자와 다시 약혼을 했다. 결혼식 전날 밤, 말이나 글로는 전혀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 그는 황급하게 돌아와 다시 사랑을 맹세했으나, 또 다시 명예를 훼손시킬 수 없는 처녀는 약간 아쉽지만 어쩌면 더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강행한다. 그 처녀의 결혼으로 상심하여 집에 돌아 온 그는 평생 혼자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림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26살에 이미 아카데미에서 전시를 가졌는데, 그 반응은 자신조차 어리둥절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의 비평을 보면 터너라는 이름의 새로운 화가가 나타났다. 전에도 시원찮은 소묘를 전시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유화, 풍경화를 내놓았다. 이 청년은 화가들을 무색하게 만든다. 내 친구 중에 보는 눈이 정확한 화가가 있는데 터너의 그림을 마술과 같다고 평했다. 모름지기 모든 화가들이 한 번쯤 가보고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적혀있다. 그 후 1년도 안되어 그는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제부터는 거의 그의 독무대가 된 것이다. 폭풍 치는 바다를 보기 위해서 실제로 그런 위험한 상황에 배를 띄우고 선창에 자기를 묶게 하여 그 엄청난 위력을 체감하고 천둥 번개 치는 하늘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가 하면 그가 끝까지 사랑한 시골 길을 걸으며 그 자연의 온갖 형태와 색, 갖가지 분위기를 꼼꼼하게 노트에 적었다가 집에 와서 그림으로 번역했다.
유리창은 시커멓게 때가 끼어 있고, 청승맞은 노인네의 배앓이 소리 같은 초인종 소리를 뒤로 하며 집안에 들어서면, 천장의 광선을 막느라 쳐놓은 기름종이에서는 기름이 뚝뚝 떨어져 캔버스를 더럽힌다. 실내는 춥고 축축해서 그림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습기로 망가지고, 술병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자빠져 있다. 꼬리가 잘린 고양이는 깨진 창문을 무상출입하며 캔버스에 배설하고 스크래치를 낸다. 젊을 적 창녀 시절에 그 집 주인과 놀아 본 일이 있는 얼굴이 부석부석한 곰보 노파와 마녀처럼 앉아 있는 그 집 주인의 모습 또한 범상치가 않다. 삶은 새우처럼 뻘건 얼굴에 쥐처럼 생긴 회색의 눈, 땅에 달라붙은 몽땅한 체구에 말더듬이, 둔한 머리, 고약한 목소리, 괴팍스런 버릇, 붙임성 없는 성질머리, 비천한 가문, 변변치 않은 교육에 걸맞은 무식 등 그는 참으로 철저하게 그림 그리는 재주를 제외한 모든 것을 외면당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인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라는 이름 하나와 거액의 유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많은 그림을 남겼다. 신은 그에게 그리는 재능 이외에는 거짓말처럼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 혹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무식하며 말주변이 없는데다 말더듬이인 그는 완벽한 기술로 많은 돈을 벌었으며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기술을 전달하는 기능 또한 완벽하지 않아서 그의 교실에서 배운 영국의 시인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에 의하면 터너의 시간에는 배운 것이 없었다는 후일담을 하고 있다. 자기가 이미 알고 있거나 심지어 자신이 제작한 그림의 아름다움조차 설명할 재주가 없으니 학생들은 선생의 이야기를 듣느니 차라리 선생의 그림 그리는 과정을 보며 스스로 느껴야 했다. 기적을 만드는 신의 손 이외에는 완전무결하게 불리한 조건을 갖춘 그가 야외에 나가 풍경 스케치를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가관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주 즉 조형감각으로 스케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 남들이 보면 중언부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글을 써가며 그 풍경을 노트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도 그 그림 밑에 자작시를 붙이기를 좋아했는데 그 역시 대부분 감이 잡히지 않는 기막히게 애매모호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쇼팽은 들라크루아의 칭찬을 받아들이며 감탄을 하고는 있지만 그의 그림을 볼 때만은 불쌍하기 짝이 없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쇼팽은 음악가이다. 음악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의 사상은 음악적인 형식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를 두려워하고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를 보고 소름 돋아 한다며 쇼팽과 들라크루아의 전인적 성격을 지적하였다. 자연은 하나의 사전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은 그 사전을 그냥 베끼는지 몰라도 나는 다만 인용할 따름이다 사람의 영혼에는 현실의 사물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내적 감상이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내적 감성에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화가와 시인의 상상력뿐이다. 이처럼 자신의 이론을 정연하게 전개하여 문학과 마술의 밀월여행을 하도록 했고, 오히려 시인으로 하여금 표현력의 왜소함을 한탄하게 만들었던 들라크루아. 이치에 맞는 그림보다는 자신의 격정이나 애정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미소, 모정의 눈길, 절망의 표정 등을 표현하려 했던 들라크루아. 모든 색은 보색의 그림자를 만든다는 논리로 뒤에 올 인상주의를 완벽하게 예견했던 사람, 정녕 그는 자신의 정념을 가장 뚜렷하게 보이도록 표현하는 방법을 냉정하게 찾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와 만나기 2년 전인 26살 되는 해 1824년 5월 11일 일기에는 시인이 되었으면이라고 적혀 있었다. 들라크루아 :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프랑스 회화 사상의 거장. 그의 화면은 강렬한 색채, 자유와 해방을 찾는 정신에 의한 저열과 상상력이 넘치는 감동적인 장면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발표될 때마다 분분한 세론을 일으켰고 특히 신고전주의자였던 앵그르와의 논쟁은 유명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림에 정진하여 막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또한 문학,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저서로는 <예술론>이 있다. 르네상스가 미술에서 현대화를 향한 제1의 혁명이고 인상주의가 제3의 혁명이라면 들라크루아에 의한 낭만주의는 제2의 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빠졌으나 원래의 의도는 그 암흑의 중세에도 문학적 표현은 있어 왔으나, 미술은 문학적 표현의 기술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지나면서부터는 미술과 문학이 동등한 입장에서 밀월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보카치오나 사케티의 소설에 화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니 즉 화가가 인문주의자로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보들레르는 그 당시 세계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시집 <악의 꽃> 등대 편에서 루벤스, 다빈치, 미켈란젤로, 퓌제, 고야, 들라크루아 등의 미적 이미지를 다시 시의 형식으로 번역했는데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에게는 당신의 영원한 강가에 와서 사라질 이 뜨거운 흐느낌은 진정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인간 존엄성의 최상의 표정이라고 하여 미술이 표현할 수 있는 영혼의 울림을 역설하고 있다. 들라크루아의 영원한 예찬자인 그는 또 다른 곳에서 들라크루와의 그 위대한 재능의 특징은 문학적이라는데 있다. 그것은 그의 그림이 항상 성공적으로 고도의 문학지대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며 아리스토텔레스, 단테, 셰익스피어 등을 그림으로 번역했을뿐만 아니라 고도의 세련된 사상으로 표현할 줄 아는 까닭이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현대미술을 예고한 낭만주의 미술의 거장인 들라크루아를 가리켜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한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들라크루아의 팔레트는 아직도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팔레트이다. 고요하고 비극적인 작품에서도 약동하는 작품에서도 들라크루아만큼 풍부한 색채를 구사한 화가는 아직 이 세상에는 없다. 우리는 모두 들라크루아를 통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찬탄을 하였다. 그는 또한 영국의 화가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의 그림을 제대로 보려고 영어 공부를 시작하여 끝내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의 작품들을 불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같은 낭만주의 사상을 가졌으며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얻은 쇼팽,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도 들라크루아는 음악을 이해한다. 그의 감상력은 확실하게 날카로우며 쇼팽의 곡에 싫증내는 일이 없다. 쇼팽을 칭찬하며 감상하고 있다고 했다.
화면 가득히 점들이, 그 속에도 다른 점들이 무수히 중첩돼 그려져 있다. 아는 사람 없는 뉴욕의 한 방에 앉아 고국에 두고 온 정다운 모습들을 떠올리며 한없는 외로움의 몸짓으로 그 많은 점들을 그렸다 한다. 그 점 내가 그린 점 하늘까지 갔을까?하던 그 점 하나하나는 그대로 사무치게 그리운 추억의 편린들이었을 것이다. 시인 김광섭(1905- 1977)의 시 저녁에는 저렇게 많은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밤이 깊을수록/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속에 사라진다//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의 이미지를 같은 마음으로 다시 한 번 화가 김환기(1913-1974)가 그림으로 번역했다. 작품명제는 바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이는 또 유심초라는 대중 가수에 의하여 가요로도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애창된 바 있다. 이는 문학이 미술이나 음악으로, 미술이나 음악이 문학으로 그 주관에 따라 다시 번역되는 사례이다. 시는 형태가 없는 그림이요 그림은 형태가 있는 시라는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미 오래 전부터 진지하게 있었던 말이다. 신학에 의하여 모든 학문이 제 구실을 못한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화가들이 제 몫을 찾을 때이다. 다빈치는 말 안하는 시(Muta Poesis)와 말 하는 그림(Pictura Loruens)라고 그림과 시를 구분한 뒤 소경과 벙어리 양자 간에 누가 더 결함이 많은가 하고 묻고 있다. 심지어는 그림과 조각에서조차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를 말하는 중에 조각가들이 조각이 3차원의 물체를 창조하는데 반하여 그림은 3차원의 환상을 부여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그 환상은 지적인 수단에 의해서 창조되는데 반하여 조각의 3차원은 오로지 소재에 의존하고 있다. 촉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을 지각할 수 있는 듯이 하고 평면의 물체를 부조처럼 보여 주며 가까이 있는 것을 멀리 있는 것처럼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그림이다 라고 완벽하게 반박하는 중에 회화의 인문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는 그가 그린 개를 보자. 1799년 53세의 나이로 고야는 궁정의 수석 화가가 되어 화가로서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그 이듬해에 자신을 신임하는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을 고전적인 방법으로 그렸다. 그런 그가 73세나 76세에 이르러 너무나 현대적이어서 당시로서는 충격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개그림을 그렸다. 온화하지만 어쩐지 음울한 색채에 간단하지만 힘차게 사선으로 나뉜 구도 그리고 거친 질감을 보인 이 그림 속의 개는 과연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 것일까? 마치 모래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개의 시선과 화면을 둘로 나눈 선만으로 화면에 운동감과 긴장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꿈쩍도 못하는 상황에서의 긴급 신호를 듣거나 보지는 않을까. 애타게 부르는 S O S.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과 공보부 장관을 역임한 소설가이자 정치인이면서 프랑스의 지성이라 불리는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는 이 그림을 보면서 이것은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라 어떤 영매靈媒가 작용하여 그린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한다. 고야: 에스파니아(스페인)의 화가. 마드리드의 풍속을 그리는 로코코 풍의 화려함과 환락이 스쳐 지나간 후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나의 스승은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와 자연 이란 말을 할 만큼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궁정의 수석화가로 재임하였으나 1792년 귀머거리가 된 후에는 성찰적인 요소가 더욱 깊어지고 계몽사조의 영향도 있어서 세상을 풍자한 판화집 로스 카프리초스를 발간 한다. 그러는 사이에도 성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성당의 천정화와 같은 혁신적 대작뿐 아니라 마하와 같은 육체의 걸작도 남겼다. 그가 마음껏 그린 시대와 마찬가지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고야는 인생에 있어서나 예술에 있어서 탐욕스런 만큼 대 벽화에서 소묘에 이르기까지 2,000점 가까운 작품에서 언제나 사상과 기술의 발전을 성실히 추구했다. 불우한 말년에 작성한 판화집 로스 디스파라데스(Los Disparates)나 검은 그림은 그 주재와 기법에 있어서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까지도 앞지른다. 고야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과 타고 난 반항심은 그의 변하지 않는 스페인의 서민 혼과 중년 이후에 공감한 계몽서상과의 갈등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객사, 중요한 작품들은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천재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의 사후에 나온 말들이지만 그의 그림은 표현주의적인가 하면 초현실주의적이고 민중적 요소가 강한가 하면 일상의 매력 있는 초상화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더구나 공간 구성이나 질감에서도 현대의 화가들이 감탄할 만한 그 무엇이 보인다. 그의 유명한 두 장의 마하를 보고 있으면 그 여인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다시 농염한 눈길로 보는 까닭에 살아 있는 여인을 보는 듯하면서도 예술의 승화로만 말할 수 있는 미적 쾌감까지 가산되어, 보는 사람을 당혹하게 한다. 여인의 눈길과 온몸이 그러한 자세로 다시 말을 건네 오는 것이다. 우아한 두 다리의 발끝은 오른 편 위쪽에 있는 한 쌍의 눈과 묘한 대응을 이룬다. 나체의 마하의 배꼽에서 무릎까지의 당당한 포즈는 차라리 도발적이기도 하여 매력적이고 주술적이며 마술적이라는 표현이 걸 맞는다. 고야가 살던 당시에 에스파냐는 엄격한 가톨릭 국가여서 신성시 되지 않는 나체를 그린다는 것은 최악이었다. 그래서 나체의 마하 위에 옷을 입은 마하를 겹쳐 그려 걸어두었다 한다. 결국에는 이 그림 때문에 종교 재판에 출두하기도 했다. 누드라는 말은 옷을 벗었다는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예 옷을 입지 않았거나 옷을 벗었거나 그것이 그거 아니냐는 말도 할 수 있겠으나, 옷을 벗는다는 것은 부끄러움과 함께 도발적인데 반하여 아예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태초의 생명에 대한 건강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마하는 처음부터 옷을 입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도발적으로 옷을 벗었기에 그토록 요염한 에로티시즘을 풍기는 것이리라. 멋쟁이 남자를 마호라 하고 멋쟁이 여자를 마하라고 하는데 이 부인은 당시 왕비와 맞서는 기품과 아름다움으로 사교계의 꽃이었던 알바공작의 부인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나 신빙성이 조금 부족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시의 세도가였던 재상 고도이의 주문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이런 궁핍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 속에서도, 2남2녀 중 유일한 생존자로 이제 어른이 된 티투스와 실질적으로 두 번째 부인인 핸드리케의 협력으로 더욱 더 순수하게 그림만 그릴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파산과 인기의 저하 등 일련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시인 얀 포스는 그에게 암스테르담 최고의 화가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각박하기만 했다. 그가 죽기 6년 전에는 그토록 그를 섬기던 핸드리케가 세상을 버리고 아들 티투스도 그의 죽음 전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자기를 감싸고 있던 가족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가 63세 되던 3월 아버지 없는 티투스의 딸 티티아가 태어났으나 그 손녀도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지는 못하였나보다. 그 해 10월 그는 자기에겐 유난히 영욕의 세월이었던 이승의 끝을 맞이한다. 야경夜景이라는 그림의 블랙코미디 같은 에피소드를 보면 참 세상의 허무함이 느껴진다. 당시 암스테르담의 시민들은 유머 감각보다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 중의 한 무리가 렘브란트에게 멋지게 군복을 차려 입은 자기들의 모습을 그려줄 것을 주문했다. 사람이란 밖에 나가면 어쩔 수 없이 그 비중에 따라 우열이 가려지지만 스스로 자신을 비하시켜서 좋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렘브란트는 같은 돈을 받은 그 사람들을 공평한 크기와 명암으로 그리지 않고 어떤 사람은 크게 그리면서도 많은 빛을 주고, 또 어떤 사람은 절반은 햇빛 속에 절반은 어둠에 있게 하거나 아예 그늘 속에 눈만 그려 넣는 등으로 표현하였으니 같은 돈을 내고도 열등하게 그려진 사람들이 분노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의 증오는 분노로 바뀌고 급기야는 렘브란트가 그때까지 쌓아놓은 최고의 명예와 부를 헐뜯기 시작했다. 주문은 점점 없어지고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 길 끝이 파산 신고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백하였다. 나는 인구 조사원이 아니올시다.
렘브란트는 세계적으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는 뒤러(Albrechht Duerer1471-1528), 세잔(Paul Cezanne 1839-1906),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보다 더 많은 100여점의 자화상을 자신에게 아부하거나 학대하는 일 없이 깊은 자기 응시와 성찰 속에서만 그리고 또 그렸다. 자화상이 많다는 것은 화가 자신을 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자기를 신뢰하고 또 반성하며 자신의 예술에 절망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며 인간을 증오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다. 인간 본래의 고독을 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자화상뿐만 아니라 주위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정겨운 풍경도 그렸고 성서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푸줏간의 고기 덩어리를 그리는가 하면 생명처럼 사랑했던 어머나 코르넬리아와 아네 시스키야, 아들 티투스를, 나중에 궁핍만을 나눠줘야 했던 하녀이자 두 번째 아내 핸드리케를, 심지어는 자기를 조롱했던 사람들까지도 똑같은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당시 풍속 화가들이 많았던 암스테르담에서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물 화가, 초상화가로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아내 사스키아와는 2남2녀를 두었으나 세 자녀는 어릴 적에 죽고 2남 티투스만 병약하게 장성했는데, 그마저 아버지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다, 역시 허약했던 아네 사스키아도 결혼 8년만인 1642년에 죽는데, 공교롭게도 이 해는 렘브란트에게는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그 때가 렘브란트 미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야경夜景이 그려진 해이기 때문이다. 17세기 네델란드에서 전개된 단체 초상화 분야에서 결정적 의미를 갖게 되는 이 야경이라는 그림은 렘렘브란트의 생활을 급변시키지는 않았으나, 이로 인해 세상이 그에게 주던 인기와 명성, 그리고 부에 대한 결별이 시작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수입이 줄어들면서 재정적으로 점차 곤란을 받게 되고 끝내는 파산신고서를 쓰고 유태인의 거리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미켈란젤로(1475-1564)가 의미 있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42년 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남서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레이던이라는 곳에선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1669)가그 천재와 허망의 일생을 알리는 첫 고고지성을 울렸다. 그는 신의 창작품 중에서도 결코 평범하지 못했던 까닭에 슬픈 죽음의 대명사가 되었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와 마찬가지로 지난 날 맛보았던 최상의 영광은 이미 추억이 되었을 뿐, 감당하지 못할 현실의 체중에 눌려 질식하고 말았다. 모차르트가 스스로 신의 재능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의 보복을 받은 것이라면 렘브란트는 신의 절대성을 인간들 사회로 옮겨 온 것에 불과할 따름으로 사람답게만 살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13플로딘(한화 약 4,160원)짜리 빈민 묘지에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버렸고, 그저 그림만 남아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우리의 비어있는 가슴을 응시하고 있다. 코끼리만한 몸매에 빈대만도 못한 영혼을 소유하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에게조차 분노는 커녕 애정을 느꼈던 사람, 돈보다는 명예를, 명예보다는 자유를 원했던 그는 당시 우주의 중심이라 여겼던 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 회화의 모든 것을 그리고 있었다. 신의 영광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거짓 영광에 따른 불완전함을 비추는 거울을 찾아내 살아있는 사람이 숨을 쉬듯 그냥 그렇게 아무런 꾸밈없이 비추어 냈다. 그는 방앗간 집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 높고 작은 창문을 통하여, 돌아가는 풍차의 날개를 따라 들어오고 나가는 빛, 마치 여명의 등대처럼 깜박이는 빛 속에서 그 빛과 어둠이 주는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조화를 바라보며 자랐다. 그래서 그는 어둠 속에서도 큰 빛을 보는 눈이 생겼을 것이고 그 어둠은 자신을 응시하는 습관을 익혔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많은 자화상을 그릴 수 있는 터전이 생겼나 보다. 자화상은 자기 내면에 초점을 맞춘 자신 내면의 촬영이다.
그러나 모나리자보다도 더 신비한 다빈치는 67년 간의 세월을 살면서 미술가로서만 아니라 과학자, 군사 고문, 저술가 등 만능의 천재로서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현대미술에서 로버트 라우젠버그(Robert Rauschnberg)에게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을 탄생시킨 인물, 그가 발명(?)한 모나리자는 앞으로도 더 많은 세월을 살며 끝없는 스캔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제 모나리자의 스캔들 속에 있는 또 다른 스캔들 아뽈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스캔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자. 이탈리아 출신으로 당시 프랑스의 최고 전위 시인, 미술평론가였던 아뽈리네르는 이 사건으로 피카소와 함께 수사를 받았다. 아폴리네르의 비서가 가끔 박물관의 작품을 훔쳐낸 일이 있기 때문이다. 수사망이 좁혀 오자 피카소는 가지고 있던 장물들을 세느 강에 버리려 했다. 아폴리네르는 그런 피카소에게 세느 강에 버리면 국기의 보물이 수장되지 않느냐며 신문지에 싸서 버리고 신문사에 연락하도록 조언도 하였다. 이 때 아뽈리네르를 수사하던 검사가 위압적인 말로 조롱하듯이 아뽈리네르를 대하자 먼저 수사를 망친 피카소가 그 검사에게 말했다. 당신은 20세기 최대의 천재를 모욕하였다는 죄목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요. 어찌됐던 아뽈리네르는 기소되고 감옥을 가야 했다. 그가 박물관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잃게 만든다는 발언으로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27개월 후 진범 빈센조가 체포되자 그는 풀려났는데 자신의 여자 친구였던 시인이자 화가이고 샤넬의 초상화로 유명한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을 찾아 갔다. 그녀의 집에 가서야 그녀는 독일인 삼류화가와 눈이 맞아 떠났음을 알게 되고 할 일 없이 터벅터벅 집에 돌아오는 길에 미라보다리에서 허탈감에 쉬고 있는데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그 때 그 유명한 미라보 다리라는 즉흥시를 지었다 한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 우리의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밤이 와도 종아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하략-
현재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모사하려면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비로소 차례를 기다리는 자격이 주어지고 모사를 할 경우에도 관리인의 감시 아래 반드시 원화보다 5cm이상 크거나 작게 그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소장한 모나리자가 원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모사한 훌륭한 모조품이 12장이 있다. 이 중 여러 점은 다빈치의 문하생이 그린 것이다. 이 때문에 모사품을 지니고 있는 여러 사람들은 시대에 걸쳐 저마다 원화를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955년 프랑스에서 개최된 미술을 위한 사례 국제전에서도 똑같은 모조품이 12장이나 등장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저마다 자기 그림이 원작이라고 주장하고 이에 맞서는 주장 또한 촌보의 양보도 없어 쉽사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소란스럽기만했다. 이러한 그림 중의 하나가 1797년 월리엄 헨리 버넌이라는 사람이 사들여 와서 뉴저지 주의 은행 금고에 보관시킨 속칭 버넌의 모나리자인데 모든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검사를 해봐도 긍정적인 반응이 나타났고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왼손잡이가 그린 것이며 배경에 두 개의 기둥이 서 있다는 것이다. 라파엘이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릴 때의 모습을 그린 스케치에도 분명하게 그 기둥들이 묘사되어 있으나 루브르의 모나리자는 가려서 이 기둥이 안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이 버넌의 모나리자가 루브르의 모나리자보다 한결 나이도 젊고 우아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믿을만한 증거들이 나오자 타임 라이프에서는 이 그림이 진짜 원화라고 특집으로 다루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모나리자의 스케치 원본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에 착안하여 다빈치가 캔버스에 처음 그리고 나서 다시 나무판에 옮겼거나 여러 장을 그렸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래도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것이 그림의 격이나 보존되어 온 경로의 기록으로 보아 가장 확실한 원화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로이 맥밀런(Roy Mcmillan. 1929-1997)이라는 미국 평론가는 모나리자의 화판에는 화가의 서명, 제작년도도 적혀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려 달라고 의뢰한 흔적도, 그림 값을 지불한 기록도 없고 또한 150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빈번하게 주고받던 수많은 편지 속에서도 이 작품을 뚜렷이 언급한 것이라고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다시 조르조 바사리의 말을 생각하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발견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인하여 미완성이라고 하나 눈썹을 제외한 나머지 많은 부분은 모두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모나리자의 나이 또한 24세의 부인이라 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은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죠콘다의 아내인 리자라는 설부터 프랑스의 함대를 격퇴한 콘스탄차 디나로스의 아내 또는 계모 밑에서 자란 다빈치가 생모를 그렸을 것이라고도 하며 한 여인이 아니고 여러 여인의 얼굴을 같이 연구하여 인상적인 모습을 그렸다는 추측에, 동성애자였던 그가 남성을 모델로 했다는 설까지 난무한다. 어디 그 뿐인가? 피렌체의 고급 매춘부였을 것이다, 임신한 여자가 아니냐하는 것들에서부터 심지어는 모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빈치가 발명한 얼굴이라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눈썹의 유무 또한 정설이 없다. 프랑스 소설가 스탕탈의 이상한 일이다.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누가 보든지 사실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다. 미완성이라서 눈썹을 그리지 못했는지 아니면 바사리의 말처럼 이마가 넓은 것이 미인이라는 당시의 유행에 따라 눈썹을 뽑은 모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오랜 세월을 거쳐 온 그림의 바니시를 제거할 때 함께 지워진 것인지 이 모두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의혹에도 불구하고 어느 화가는 모나리자를 모사하기 위해 18년 동안이나 차례를 기다렸다고도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탈리아 작가는 77세가 될 때까지 무려 203장의 모나리자를 모사하였다하니 대단한 여인에 대단한 화가였음은 분명하다.
모나리자는 다빈치에 의해 프랑수와 1세의 손에 들어갔다가, 1800년에는 튈르리 팔라스에 있었던 나폴레옹의 침실에 걸려 있었으며, 이는 다시 루브르박물관에 들어 간 이래 3번의 해외여행을 했다. 위에서 말한 본의 아닌 이탈리아 여행과 1963년 미국에서의 전시, 1974년 일본 전시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모나리자의 모델은 누구일까? 왜 눈썹이 없는가? 과연 미완성 작품인가? 포플러 나무판에 그려진 이 작은 그림은 끝없는 의혹을 남긴다. 이 그림은 나를 유혹하고 손짓하며 부르고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는다, 나는 새가 뱀에게 다가가듯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그림에 빨려들어 갔다는 말과 모나리자,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여자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들고, 이윽고 4세기나 지났다는 말 등은 모두 모나리자의 마술적인 매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게 만드는 이 그림은 다빈치가 51세인 1503년부터 1506년에 걸쳐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모나라는 말은 그 당시 부인에 대한 존경으로서 마돈나를 줄여서 쓰던 말이다. 그러면 이처럼 4년씩이나 두고 그리고자 했던 리자라는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1559년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 화가 건축가)는 다빈치의 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빈치는 죠콘다의 부탁으로 그의 3번째 아내인 리자 댈 죠콘다의 초상을 그려 주기로 약속했다. 다빈치는 4년간 이 그림에 매달렸으나 결국 미완성인 채로 남겼는데 현재는 프랑스의 왕이 퐁텐블로에 소장하고 있다. 모나리자를 프랑스에서는 라 죠콩드, 이탈리아에서는 라 죠콘다라고 부르는 이유는 리자의 남편인 죠콘다의 성을 썼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 그림을 그릴 때는 부인이 항상 유쾌한 기분이 되도록 음악가와 희극 배우를 화실에 불렀다 한다.
빈센조는 모나리자에게 반할만 한 인물도 못되었다. 다만 그는 희대의 사기꾼인 에드와르도의 머리카락 한 올의 오차도 없는 계획의 가련한 희생물이었을 따름이다. 루브르박물관의 내부를 너무 잘 알고 있던 그는 란제로티 가의 형제인 또 하나의 빈센조와 미케레 등과 함께 자신들이 시뇨레라 부르는 에드와르도에게 약간의 착수금을 받고 토요일 오후 박물관 관람객으로 들어갔다. 빈센조와 일행은 일요일에는 관람객이 너무 많아 화가들의 작업이 허용되지 않고 월요일에는 모든 보수 작업이나 청소를 위한 정기 휴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이 점을 이용해 화가들이 화구를 맡겨두는 창고에 잠입했다. 결국 이들은 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청소부로 가장하여 마침내 모나리자를 빼내는 데 성공한다. 이를 소재로 우리나라에서는 백만 불의 사랑이라 번역된 오드리 헵번, 피터 오를 주연의 영화도 생겨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연락한다던 시뇨레 에드와르도가 빈센조 자신에게는 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그림을 가지고 이탈리아에 가면 나는 영웅이 될 것이다 나폴레옹이 약탈품의 일부를 조국에 다시 반환하면 나는 기필코 명사가 되리라 끝없이 환상에 빠지면서 이탈리아에 잠입, 화랑에 접근하여 50만 리라까지 흥정을 하였으나 체포되고 끝내 영웅이 되기 위해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철저한 희생양 빈센조 페루치아는 결국 무라테 감옥으로 가고, 모나리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양국 간의 영원한 우호와 단결의 징표로서 1913년 12월 31일 본래의 소장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이듬해 1월 4일 감격어린 의식 속에서 다시 루브르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지금의 모나리자는 특별히 설계된 살롱 대제타의 오래 된 벽에 습도 조절장치를 설치한 두꺼운 유리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한편 에드와르도는 빈센조가 온갖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미 6점의 모사품 모나리자를 현재(2010년) 시세로 1,600만~1,800만 달러로 추정되는 거금을 챙겨 북 아프리카와 중동을 돌며 호사스런 생활을 하다가 1931년 사망했다. 빈센조가 계속 단독 범행임을 주장하니 추적을 당할 필요도 없었다.
위험 부담이 많은 진짜 모나리자를 간직할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1911년 8월 21일, 루브르박물관에 그림을 그리러 들어갔던 젊은 화가 루이베르에 의하여 모나리자의 실종이 처음 이뤄진 후 프랑스 경찰에 의하여 국경과 항만이 봉쇄되었고 전 세계의 신문은 이 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하였다. 도저히 분실될 수 없는 장소에서 없어진 이 그림은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 농간이라는 추측이 높아만 갔다. 그 당시 다른 미술품 도난 사건으로 구속되어져 있던 세기의 시인 아폴리네르를 진범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는 어느 기자가 특종을 터뜨리기 위하여 그림을 훔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르 마탱이라는 신문은 초능력을 써서라도 모나리자를 찾는데 도움을 주는 심리학자에게 5000프랑(당시 시가)을 지불하겠다고 밝혀, 모나리자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무당이나 점쟁이 혹은 점성술가들 까지도 수사에 동원되는 촌극을 빚었다. 온갖 조롱과 빈정거림 속에서 루브르박물관의 학예실장이 해임되고 일부 직원들도 징계를 당했다. 그로부터 2년 4개월 후인 1913년 12월, 전에 루브르박물관에서 액자 수리공으로 일한 적이 있는 이탈리아인 빈센조 페루치아를 피렌체에서 체포함으로서 사건은 일단락 지어졌다. 철저하게 에두와르도의 하수인이었던 빈센조는 체포된 후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허영심이나 공명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끝내 에드와르도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이탈리아 사람의 명작이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껴 나폴레옹이 약탈한 모나리자를 되돌아오게 한 것뿐이다 또는 모나리자와 사랑에 빠져 그녀의 미소로부터 떨어지면 미칠 것 같았다고 말하여 이를 주제로 많은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졌는가 하면 모나리자가 하룻밤 묵었던 여관의 이름이 라 조콘다라고 고쳐졌으며 빈센조가 모나리자를 가져 온 것이 아니라 모나리자가 조국의 산하를 보고 싶어 빈센조를 데리고 왔다라는 등의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고 에드와르도는 그럴만한 사람을 제대로 골랐던 것이다. 원래 모나리자의 작가인 다 빈치에 의하여 프랑수아 1세에게 팔려진 것이다.
이 제품을 그대로 모사할 수 있겠소? 예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은은한 윤곽과 부드럽게 명암을 조성하는 다빈치의 스푸마토(윤곽을 엷게 하는 기법)입니다. 매우 정교하기 때문에 포착해서 재생하기엔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할 수는 있습니다. 루부르박물관 살롱 카페의 모나리자 그림 앞에서는 어마어마하고도 엉뚱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자칭 후작이라는 에두아르도 드 발피에르노(Eduardo de Valfiermo)의 질문에 대한 미술품 위조 전문가 쇼드롱의 대답이 바로 그것이었다. 1910년 가을 드디어 쇼드롱은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배율이 높은 확대경으로 며칠 동안 그림을 살피고 오래된 이탈리아의 침대를 구하여 그 나무판을 원화와 같은 77cm 53cm로 잘랐다. 원화를 촬영한 선명한 사진으로 정확한 구도를 잡고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사용하였던 물감으로 빛의 양감을 자아내기 위해 물감을 층층이 겹쳐 바르고 다시 엷은 색의 유약을 발랐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생긴 균열선을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천천히 마르는 기름을 사용하고 그 위에 빨리 마르는 기름을 사용한 다음 바람결에 말렸다. 국내 작가의 작품에서도 선 보여진 바 있는 이 방법은 마르는 속도가 각기 다른 두 종류의 기름이 각기 다른 작용을 일으키면서 감쪽같이 균열을 만들어 냈다. 쇼드롱은 그림이 오래 되었다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주기 위하여 흑연가루를 여기 저기 묻혀 두었다. 모두 6점을 그리는 것으로 쇼드롱의 임무는 끝나고 이제는 에두아르도의ㅤ활약만 남았다. 1911년 6월 에드와르도는 이 6장의 모나리자 모사품들을 모두 뉴욕의 안전한 곳에 보관시키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명의 미술품 전문가까지 동원하여 제물이 될 고객을 찾아 나섰다. 몇 주일 동안의 집요한 활동 끝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걸작을 손에 넣겠다는 6명의 고객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들 6명은 하나같이 자신만이 흥정의 대상인 줄 알았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모나리자를 훔쳐내어 그 6명 모두가 자기가 살 모나리자가 진짜인 것으로 알면 되었다. 애초부터 에두와르도는 위조된 모사품을 비싸게 파는 것이 목적이었다.
루돌프 아른하임 예술가가 사회의 존경받는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술가가 사회 모두의 사상과 감정을 대변하는 우리의 대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 표현은 새로운 사회 질서를 발견하고 시각적 형태로 제시하는 것을 예술가의 사명으로 보고 있다. 비평가는 이러한 예술가의 새로운 질서 발견을 돕는 협력자이기 때문에 작가의 예술 표현이 개인의 정서 표현을 초월하여 그 사회의 새로운 진로나 질서를 찾았는지, 그것은 왜 가치가 있는 새로운 질서인지를 제시해야 하며 이 때 비평가의 언어적 진술은 예술가의 시각적 한계를 보완해 준다는 것이다. 아른하임(Rudolf Arnheim 1904~2007) 또한 미술이 눈에서 눈으로 전달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보았고 시각적 구조는 언어적 방법에 의하여 보완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미술 표현의 언어적 설명은 시視감각이 전할 수 없는 부분까지 보완해줌으로써 논리적 뼈대를 구축하며 좀더 효과적으로 체계있게 의사를 전달해 주는 미술 비평을 필수 불가결의 조건으로 보고 있다. 이제 비평의 태도에 관하여 말해보자. 비평이 필요한 것이란 것은 알았다. 그렇다면 비평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비평가의 유형에는 귄위자 형, 법관 형, 번역가 형, 인상주의 형 등이 있다. 권위자 형은 자신이 생각한 이사에 따라 작가의 의도르 난도질하는 지극히 자기 만족형의 부류이고, 법관 형은 자신이 습득한 지식에 따라 몇 가지 법률을 만들고 거기에 작가의 의도를 맞추어 비평을 하는 부류이다. 반대로 번역가 형은 나는 감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단지 작가의 성격, 시대와 환경을 작품의 이미에 반영하고 분석해서 감상자로 하여금 분명하게 보는데 일익을 담당할 뿐이다라는 식의 부류이며 인상주의자 형은 비평 자체를 자신의 기호를 표준으로 하는 사람들로 번역가 식의 비평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이어서 싫고 법관 형의 비평은 너무 보편적이어서 싫은, 다시 말하면 자신의 비평이 반드시 예술적 예술적이고 주관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유형이다.
비평이란 사물의 선악, 시비, 미추, 가치 등을 평가하여 논하는 일종의 바판적 의사 전달, 또는 비판적 사고를 통하여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각종의 미적 가치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심화시켜 나가는 일이다. 비평의 어원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비批는 손으로 친다(手擊)거나 일반적으로 친다(擊也)는 의미이고 평은 평론하다(品論)거나 헤아린다(量也), 또는 고친다(訂)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바평한다는 의미는 칠만큼 비난할 만한 대상에 대한 공격적 의미와 함께 결점을 시정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고친다는 선도적인 의미도 있다. 또한 영어의 criticism이라는 용어에도 5가지 의미가 있다. 1. 전통적인 의미로 비평가란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으로 결점만 찾고 책망만 일삼는 존재이다. 2. 호의적인 기능으로 별로 비난하지 않으며 창찬한다. 3. 무엇인가에 대해서 판단을 내린다. 4. 비교한다. 5. 대상을 보는 그대로 감상한다. 이를 종합하여 다시 말하자면 결점은 책망한다는 공격적 의미와 장점을 발견하고 이를 격려한다는 선도적 의미가 같이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정의 아래 비평이라는 학문이 계속 연구되면서 학자들 간에 다른 의견 또한 분분하다.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미적 표현을 직관으로 직관을 다시 감정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예술을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느끼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인간 개체를 하나의 고립된 완성품으로 보는 견해로써 미의 본질도 개별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콜링우드(Robin George Collingwood 1889~1943) 역시 미적 표현을 개개인의 순간적인 고유한 정서로 보고 좀더 개별화된 작업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의해서 독창성 또는 개성을 존중하는 미학이 성립되었고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는 것도 타당성이 있으나 고립된 개인으로서는 인간의 본질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이에 대하여 미적 표현이란 개인의 기분을 표출하는데 있지 않고 사회적 질서를 발견하는데 있다고 역설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직까지도 나에게는 최고의 스승으로 남아있는 고 이남규 선생님의 말씀이었던 것 같다. 정식 강의 시간이었는지 밤에 이루어지는 특강이었는지도 기억에 없다. 어느 일본인 철학자의 이아기다. 오래 된데다 메모를 해놓지 않아서 기억에만 의존할 때 가장 답답하다. 아무튼 그철학자의 과제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 그래서 객관적 비교 연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다. 우선 직업별로 분류를 해나가는데 그 당시에 2만개의 직업을 분류했었다니 치밀한 연구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물론 정치가, 군인 순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야 예술가들을,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음악가부터 시작하여 그에게 내심 혐오 집단인 화가까지 연구하다가 무릎을 치며 희열에 몸을 떨었다. 화가들이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뭔가를 창조하는 작은 신(small god)들 이었다. 이제는 화가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 당시에 피카소는 거의 신격화 되어 있었다. 입체파 운동의 발명자였는데, 당시의 거의 모든 화가들에게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고 그리게 했던 사람, 친구인 모딜리아니에게 마저도 모든 사물을 입체적으로 봐야한단 말이지? 라며 인정하게 했던 피카소, 생애에 일곱 번의 결혼을 해낸 사내, 그림이 일곱 번이나 변하는 것이 가능했던 종합 예술가 피카소를 제치고 동시대에 입체파 그림을 그렸던 조르쥬 브락크를 선정했다. 드디어 16년만에 이루어지는 연구의 완성을 위하여 프랑스로 건너 가 브락크를 만나야 했다. 그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그의 부인이 나왔고 찾아 온 이유를 말하자 부인은 브락크에게 전달했으며 그에게서 30분을 약속받아 왔다. 조금 있다가 조그만 노인이 수건에 손을 닦으며 나와선 일본에는 선禪이라는 것이 있다죠? 그럼 괜히 오셨네요 라면서 단 몇 초 만에 다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브라크는 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길에 관한 두 사람의 어록을 살펴보자. 먼저 피카소는 나는 길을 가되 있는 길을 다 가보고 싶다 이었고, 브락크는 나는 길을 가되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 봐야겠다 이었으니 어떤 길을 갈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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