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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애향본부가 진정한 애향의 기수다

몇십 년 전이었으리라. 이른 새벽에 경남여객 버스를 타고 전주에서 고향인 남원으로 가고 있었는데, 승객이 고작 대여섯 명쯤 되었다. 그 버스의 행선지는 진주나 부산쯤으로 기억된다. 필자의 옆자리에는 70세가 넘어 보이는 노부부가 타고 있었다. 두 분 대화가 경상도 말씨라서, 아니, 이처럼 이른 새벽에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다고 일찍 서둘러 출동하는 것일가 하는 등의 호기심이 발동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전북을, 전북 사람을 어찌 생각하느냐’는 단도직입적 질문이었다. 그 노인은 서슴없이 금방 질문에 응답했다. 전북 사람들은 한반도 내에서 가장 으뜸 양반들이라고 했다. 자신은 광복 전 일제 시대부터 전국 남한 북한을 안 다녀본 데가 없이 여행했었고, 모든 고장 사람들 다 겪어 보았는데, 그중에 전북(전주) 사람들의 인간성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예절 바르고, 인심이 후하고, 남 배려심이 매우 극진하며 객지인 대접이 가장 융숭하다며 치하에 침이 마르지 않았다. 특히 못사는 사람들이 객지를 떠돌며 살 곳을 찾아 헤매다가 마지막 찾아든 전북에서는 결국 뿌리 내리고 터 잡아 살길 찾더란다. 전북 사람들은 배운데 있는 사람들이라고도 했다. 학문이 뛰어나다는 뜻은 아니고 조백이 남다르다는 의미였다. 자기는 금산사 밑 어느 작은 종교에 빠져 일제 때부터 연년세세 전북을 찾았다고 했다. 타향을 하나 골라라 한다면 자기는 전북을 제2 고향으로 여기고 싶다고 했다. 그는 탁월한 지식인답지는 않았지만 슬기로운 인생 경험은 출중나다 싶었다. 전북인들은 자연을 섬기기를 조상 섬기듯 한다고도 했다. 전북인들은 순정적이고 순종의 미덕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도 했다. 여리고 감성적이고 남의 일에 잘 울어주기도 하며....그는 또 전북 여성들 칭찬에는 웅변이 되고 있었다. 전북 여성들은 문자 그대로 양반집 규수들이란다. 얌전하고 다소곳하며 순종 그 자체이며, 옷 매무새는 또 어떻고, 음식 다루는 일 하며, 특히 김치 잘 담는 손맛은 조선에서 으뜸이란다. 그 노인은 우리네 일상을 거울 보듯이 잘 살펴 그려내고 있었다. 전라도 폄하의 발언은 자기 앞에서는 누구든 용납될 수 없었다고 했다. 우리가 찾고 있었던 전북의 정신이 열거되는 대화였다. 그런데 정작 전북인들은 자기 장점, 자기 정신을 모른단다. 정말이지 모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한 일을 찾아 나서는 중후한 단체가 있으니 이름하여 ‘전북애향본부’인 것이다. 전북 중흥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전북의 정신이며, ‘행동하는 애향’을 외치며 함성을 터뜨리는 애향의 기수들....바른 정신은 구현되어야 한다. 옳은 신념은 실천되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새만금 예산 삭감을 정부에 성토하기 위해 버스 100대에 5000 명 전북인을 분발시켜 서울을 점령하고 국회의사당을 함성으로 뒤덮었다. 전북애향본부가 해낸 것이었다. 해방 이래 전북인의 분발, 전북의 분노를 이렇게 폭발시킨 때가 있었던가? 또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모저모 모색하는 대토론회를 몇 차례나 벌렸다. 그래 순종이 미덕이라며 온순 이미지로만 치장하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마냥 낙후의 쓴맛을 보는 우리 자신에게 성찰과 자각의 대 전기를 마련하는 공동선이 아니고 무엇이랴? 애향, 이는 자신의 혁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애향은 우리가 찾아 나서는 행동 철학이며, 우리에게로 회귀하는 우리다움의 정려인 것이다. /소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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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4 18:21

수묵 정신의 고향, 전북

‘수묵’이란 단순히 재료의 측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수묵화는, 동양의 관점으로 우주의 기본색이라는 청.백.적.흑.황을 모두 합친 색인 ‘먹’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자연의 본질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성정을 표현한다. 수묵이 인간의 정신이나 사물의 내면을 표현하는데 매우 유용한 회화 양식이라는 사실은 동양회화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사람이 이상으로 삼는 상태는 무엇일까? 아마도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한 정신에서 노니는 풍류의 높은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자유정신이 문예의 진수에 해당한다. 모든 색을 흑과 백으로 단순화시켜 뜻을 증폭시키는 수묵화는 숙명적으로 고도의 정신세계를 추구한다. 수묵화에는 단순함과 균형 그리고 조화와 평화가 갖는 국제적 조형언어가 내재되어 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수묵의 영역이 확장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수묵은 인간과 세계를 인식하는 회화양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수묵은,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정신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정신을 그려서 뜻을 얻는다는 것은 속진(俗塵)을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정신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 뿐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 까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진리는 표현 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는 홍운탁월에 의해 스스로 드러내게 되는 무경계의 경지 그곳에 수묵화의 세계가 있다. 한국의 화단에서 수묵화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특히 전북과 전주로 좁히면 그 인물은 더 또렷해진다. 송수남 화백이다. 그는 평생 자기 혁신을 통해 변화를 추구해 온 화가이다. 그가 추구해온 창의성과 실험 정신은 미래를 여는 종자가 되고 희망이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수묵을 현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화가이다. 수묵이 더 이상 과거에 머무는 것을 경계하며 현대의 눈과 사고로 그가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1980년대 수묵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운동은 수묵이 시대의 언어임과 동시에 정신의 영역이 되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 놓은 중요한 미술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예술적 역량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전주로 낙향한다. 남천(그의 호)에게 있어 흑석골 작업실은 그이의 인생 중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낸 곳이다. 동시에 오직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투자한 예술 혼이 정점에 이른 공간이다. 그는 흑석골에 은거하면서 지금까지 그가 세상에서 얻은 영예를 반찬처럼 먹어 버리며 고뇌와 절체절명의 순간마저 스스로 작품이 되게 하는 경지에 다다른다. 화가로서 자신만의 형태를 구축하며 새로운 실험을 계속한다. 그리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11년 동안 가족 간의 송사로 시끄러워 잊혀 진 듯 했다. 최근 가족 간의 재산권 다툼 문제가 합의되어 재판이 종결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동시에 흑석골 작업실에는 개발 이익을 위한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벌써 들락거린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제는 남천의 미학적 기반이던 고향에서 남천의 예술적 결과물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미망인은 남천의 작가 정신이 지켜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상속분을 전체 기증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고, 유족 모두 공공성이 있는 미술관이 건립된다면 낙관과 아카이브 등 남천 송수남 화백의 기초 연구 자료를 기증하는데 합의했다고 한다. 송수남 화백이 평생을 추구하며 이룩한 예술 정신의 뿌리는 전북이지만, 그가 도달한 미감은 한국 고유의 미학임과 동시에 동양 사유의 고유성이다. 나아가 인류의 보편 세계다. 전주시는 문화 도시를 천명해 왔다. 진정 문화가 생명력이 있으려면 그 문화가 확산되어야 하고 새로운 변화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김호석 수묵화가·전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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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7 15:13

상설공연이 제맛이야

부산, 강릉, 안동, 목포 그리고 전주. 서울로 집중되는 외국인 관광객의 분산을 위해 문체부가 엄선한 관광거점도시이며, 세계적 수준의 관광도시를 목표로 국가가 지원하고 있는 다섯 도시 중 한 곳이 전주다. 고즈넉한 한옥마을의 풍경과 맛깔난 밥상, 푸짐한 저녁 술상까지 전주는 매력 있는 관광지임은 분명한데, 여기에 더불어 한옥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의 저녁 시간을 더욱 즐겁게 해주는 것, 상설공연이다. 여러 지자체와 공연단체에서 관광 활성화를 위해 상설공연을 추진하였는데, 전주도 나름의 감성을 바탕으로 수년째 상설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상설공연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상적 상설공연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태양의 서커스’다. 태양의 서커스는 캐나다 퀘벡에서 시작된 서커스인데, 1987년 라스베이거스 미라지 리조트 그룹의 회장 스티브 윈은 LA에서의 공연 관람 후, 이 새로운 방식의 서커스가 성공할 것을 확신 자신의 호텔에 ‘미스테르’라는 작품을 상설공연 상품으로 유치하게 된다. 예상대로 관객의 호응이 이어지고, ‘오쇼’, ‘카쇼’ 등 새로운 후속 작품이 등장하면서 태양의 서커스는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공연의 메카로 바꿔놓는 중요한 콘텐츠가 된다. 태양의 서커스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 공연장이 아닌 오리지널 작품을 위한 혁신적 무대장치가 갖추어진 라스베이거스의 전용 공연장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반 뮤지컬과는 달리 판권 판매가 불가하기에 태양의 서커스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상설공연이다. 매일 저녁 오리지널 공연의 특성에 맞게 설계된 라스베이거스의 전용 공연장에서 6개의 대형 작품이 올려지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찾아온 여행객들은 잊을 수 없는 감동과 마주하게 된다. 태양의 서커스를 접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순회공연인데, 해외 순회팀의 경우 배우와 스태프, 세트 구성까지 본국에서 이동해 임시 마을을 짓고 공연을 해야만 하기에, 현실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결과적으로 태양의 서커스를 보기 위해서는 사막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찾아야만 한다. 우리가 손쉽게 선택하는 중국 여행상품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상설공연이다. 북경의 ‘금면왕조’나 상해 패키지의 ‘송성가무쇼’는 물론 장예모 감독이 중국의 명산과 호수 등을 배경으로 만드는 ‘인상시리즈’ 또한 상설공연이다. 중국의 역사가 담긴 작품을 전 세계의 관광객이 매일 저녁 즐기고 있으며, 중국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관광 상품이 되고 있다. 반면 상설로 공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많은 인력과 예산이 필수적이며 지속적 관객 동원도 쉽지 않다. 지역의 대표 브랜드 공연을 찾기 힘든 이유이다. 다만 전주를 찾은 외지인이 전통적인 한옥 마당에서 평소 접해보지 못했던 국악 콘텐츠를 직접 관람한다는 것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독창적인 경험일 수 있다. 전주가 갖고 있는 문화자산을 발굴하여 새로운 이야기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전주의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며, 전주만의 상설공연을 통해 가족단위 관광객이 흥겹게 관람하고 즐겁게 체험할 수 있다면, 전주는 더욱 빛나는 관광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판소리 다섯 바탕이 시대를 이겨내고 살아남았듯이, 전라도의 질펀한 향기가 묻어나는 전주만의 새로운 브랜드 작품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홍현종 (JTV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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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0 17:49

‘전북 PDF 웹 도서관’을 만들자

‘비매품 도서’ 중에도 좋은 책이 꽤 많다. 단체의 기관지와 회보, 사업 결과보고서, 연구용역 보고서, 전시 도록, 지자체의 홍보용 도서, 포럼·세미나 자료집 등이다. 이 책들은 특정한 사람이나 조건에서 무료로 나눠주기에 구하기 힘들다. 이 도서 중에도 공공기관이나 공익의 성격을 띤 단체는 도서관·연구단체·연구자 등에 책을 보내기도 하지만, 실상 그 자료들을 공공시설에서 만나기는 어렵다. 책을 발행한 단체마저 여러 이유로 그 책을 오래 보관하는 일도 드물다.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신청하지 않아 도서관 납본 의무가 없고, 한정판인 데다 출간 수량도 적어 어느 순간 몽땅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비매품 도서에 대한 안타까움은 2017년에 나온 <항일운동을 증언한 염재야록>(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을 읽으며 더 짙어졌다. 이 책은 임실 출신 유학자 조희제(1873~1937)가 쓴 뒤 우여곡절을 거쳐 후대에 전해진 <염재야록>의 한글 번역본이다. <염재야록>은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책을 쓰고 지키느라 갖은 고초를 겪은 관련 인물들의 일화만으로도 절절한 감동을 선사하지만, 정작 일반인들은 한문으로 된 책의 본문을 읽을 수 없어 아쉬움이 컸다. 다행히 한글로 번역된 책이 나오면서 한 말의 의병·독립 운동, 애국 투사들의 행적을 상세히 알게 됐고, 책의 가치는 더 높아졌다. 책 발간에 앞장선 광복회 전북지부는 당시 언론보도를 통해 번역본 270여 권을 전국 국립대학 도서관과 언론사, 전라북도 관계기관, 광복회 전국 지회 등에 무료로 배부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전북에서는 국립군산대·전북대 도서관과 전주시립 건지·금암도서관에서 번역된 책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온오프라인 서점은 물론 원작자의 고향인 임실의 도서관을 비롯해 전북의 도서관 대다수에서는 그 책을 찾을 수 없다. 비매품 도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써 지켜낸 <염재야록>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자 한다면 책을 출판해 판매·보급하거나 전자책으로 제작해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저작권자·번역자를 비롯한 많은 이의 결단이 필요하다. 비매품 도서의 활용과 보존의 대안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많은 비매품 도서가 웹 공간에서 PDF 형태로 다양한 독자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북연구원 홈페이지에는 전북의 각종 동향 자료와 연구보고서가 있고, 전북특별자치도 문화관광재단 홈페이지에는 전북 문화정책자료와 홍보 자료, 포럼·세미나 자료집이 있다. 전주문화재단 홈페이지에는 전주시민의 생활사를 시민의 구술로 기록한 <전주시 마을조사서>와 이 결과를 활용해 작가들이 쓴 동화집 <고을 전주의 10가지 숨은 옛이야기>가 있다. 이외에도 많은 기관과 단체의 홈페이지 자료실에 상당한 양의 쓸만한 자료가 있다. 하지만, 어느 단체의 홈페이지에 어떤 자료가 있는지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웹에서 그 단체가 낸 모든 오프라인 자료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년 전 자료는 거의 삭제됐다. 따라서 공적기금으로 제작하는 비매품 도서를 비롯해 각 단체의 홈페이지에 산재한 PDF 자료를 한곳에 모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는 ‘전북 PDF 웹 도서관’ 운영을 추진해 볼 일이다. 웹 공간을 활용하면 자료를 만든 취지를 한층 더 살릴 수 있고, 해당 자료들이 무참하게 사라질 일도 없을 것이다. /최기우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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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3 16:41

신록의 시간을 넘기며

국어사전을 펼치고 화(和)자 들어가는 낱말들을 찾아보면 참 많기도 하다. 대충만 열거하면, 화담(和談) 화해(和解) 화답(和答) 화음(和音) 화순(和順) 화열(和悅) 화의(和議) 화친(和親) 화충(和衷) 화화(和會) 등이다. 이 어휘들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 사회는 건강하고 화동이 충만할 터이다. 화친하고, 화합하고, 함께하고, 함께 어울린다는 뜻이니 이는 따라서 협동, 협치와 공동선을 창출하는 사회일 것이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고를 동반하므로 반목이나 갈등의 부정적 사고는 분쇄되고 추방되는 전제가 먼저 이뤄질 것이다. 어느 최근 일간지에 관심 끄는 통계가 수록되었는데, 지지하는 정당이 각각 다른 사람끼리 한 자리에 동석하는 것을 싫어하는 심리 상태가 90% 넘는다 하였으며, 보수와 진보, 전라도인과 경상도인, 일간지 구독 성향이 다른 상호, 종교가 다른 상호, 가난한 자와 부자, 사용자와 노동자, 학식이 높은 자와 낮은 자, 노인들과 젊은이들 등등도 비율이 모두 높게 나타난다고 했다. 분별하여 나눌 수 있는 한 모든 계층별 그룹간 대립과 대척 관계는 심리적 반목 상태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현상이다. 정치적 극한 대립이 다른 영역까지를 영향끼쳤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민족성의 먼 시원에서 더듬어보면 단합과 협동, 단결과 협치, 화합과 화융의 구현이 분명했던 역사적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수많은 국난을 극복하고 무수한 환란을 이겨낸 어귀찬 민족이었는데, 요새 몇 년 평화의 시기라 해서 복이 넘쳐 다량의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 이 같은 부끄러운 상황을 퇴치하고 대아적, 대승적 상태로 반전시켜야 할 것이다. 5월을 일컬어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 시인이 있었다. 5월은 꽃이 지고 나서 신록이 무성해지고 열매를 서두르는 시절이다. 꽃의 영락과 화려함의 쇠락 뒤에 따라 오는, 봄의 대척점에 초여름이 오는 게 아니라 꽃을 품어 열매 맺음으로 순행하는 선순환의 자연 섭리에 귀착하는 것이다. 5월은 진정으로 자연의 섭리가 가장 왕성하게 작동하는 맨 처음의 단계인 셈이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습하거나 건조하지도 않으며, 그저 알맞게 화풍난양(和風暖陽)의 계절이다. 산에 들에 많은 수목들이 꽃의 시절을 넘어 열매를 마련하기로 서로 경쟁하는게 아니라 함께 울력하고 공공선에 나아가는 것이다. ‘화’자로만 충만하고 ‘화’자의 의지로만 융성하는 계절, 신록의 신선한 너울거림으로 마냥 부푸는 인심, 인정이 무한한 환희로 전환, 충일하지 않는가? 조국 강토는 신록의 계절인데 왜 우리 사회는 각기 다른 색깔인가? 숲을 이룩하는 신록의 정신으로 5천만이 함께 공공선에 나아간다면 못 이룰 것이 없을 것이다. 신록을 그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낙목한천(落木寒天) 쓸쓸한 때의 수묵화를 그리는 바야흐로 우리들 실수가 참절할 뿐이다. 우리의,우리 민족의 영특하고 영명한 슬기를 한 데 모으자. 대륙과 대양을 꿰뚫고 관통하며 시대를 넘어 미래로 가는 터널을 뚫자. 지금 멈추면 안 된다. 지금 퇴보하는 상황으로 읽히는 모든 분야, 모든 막힘을 뚫고 나아가자. 백두에서 한라까지, 태백의 준령을 굽이치게 하는 신록의 정신으로 온 겨레가 한 노래를 부르자. 푸르름의 상생 정신으로 ‘화’자 돌림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소재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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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7 15:22

더 낯설게, 전주국제영화제

외지인이었던 나에게 전주살이가 즐거운 이유는 맛있는 음식, 여유로운 생활환경 그리고 전주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국제 규모의 축제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것에 있다. 2000년부터 시작, 어느덧 20년 넘게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축제인데, 느닷없이 찾아오는 전국 각지의 지인들 덕분에 매년 봄, 설레는 밤을 함께 하였던 전주국제영화제 이야기를 해보자. 도대체 전주국제영화제는 어찌 알았으며, 전주에 내가 살고 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꾸준히 다양한 사람들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고 있음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영화제를 찾은 이유를 묻는 나의 질문에 ‘전주에 와야만 볼 수 있다’, ‘독특하다’, ‘새롭다’라는 대답이 돌아오고는 하는데, 내가 보아온 영화들도 하나같이 일반 영화관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난해’하고 ‘평범하지 않은’ 영화들이었다. 온종일 거리의 풍경을 고정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화, 수도자가 걷는 모습만 보여주는 영화, 남미와 아프리카와 중동의 낯설고도 어색한 영화. 어디서 이런 영화를 구해오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로 참으로 독특하다.반면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함께 '대한민국의 3대 영화제'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낯섦’에 있다. 비주류 작품이나 독립영화를 바탕으로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구성함으로써 평론가는 물론 영화팬들에게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그들이 영화제에게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일상과 다른 ‘일탈’이다. 영화는 분명 상업적 측면과 함께 우리네 삶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예술이어야 하며, 전주국제영화제가 그러한 대안적 역할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 반응은 어떨까? 영화제 종료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슈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상영이 지속되고 있다. 성공의 가장 큰 이유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직접 생산하는 콘텐츠에 있다. ‘디지털’ ‘독립’ ‘대안’을 내세우며 2000년 출발했던 전주국제영화제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영화용 ‘필름’ 카메라가 아닌 방송용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해 영화를 제작하는 “디지털 삼인삼색”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다. 필름을 사용한 제작 방식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이 디지털이었는데, 각기 다른 국가에서 선발된 3명의 감독이 하나의 주제를 목표로 만드는 3편의 단편영화는 영화제의 얼굴이 되었다. 이러한 전주국제영화제만의 독특한 제작 지원 사업을 통해 매년 독창적인 디지털 영화가 생산될 수 있었으며, 다양한 국적의 감독들이 전주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결국 문화라는 것의 특성은 각기 다른 개성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합종연횡. 그 속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가치일 수 있는데, 일탈을 꿈꾸는 다양한 인류가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공간에서 만나 영화를 넘어 전주만의 해방구를 만들고 새로운 대안을 창조하였다. 디지털이 주류가 된 지금은 “전주시네마프로젝트”로 규모를 키운 이 프로젝트는 최근 ‘노무현입니다’를 비롯한 특색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주류 영화계에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전주만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새로운 방식으로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25회를 맞이한 전주국제영화제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제로 더욱 발전하기를 응원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더 낯설게, 나의 일상과 다른 문화적 경험을 제공해, 새로운 즐거움과 뜻밖의 만남이 지속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홍현종 JTV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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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13 18:15

오일장을 기록하자

오일장은 마음을 나누는 곳이다. 장날이면 일부러 사고팔 물건을 만들어 나오거나 하다못해 사돈의 팔촌이라도 만날 요량으로 시끌벅적한 장터에 나섰다. 뜨끈한 국밥을 나누며 안부를 물었고, 막걸리 한 사발에 묵은 감정을 털어 냈다. 형편에 따라 살림을 들이거나 내놓았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솜씨 삼아 엮어 낸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것들에는 만든 사람의 체온이 스며 있었다. 그 온기는 지치고 상한 마음을 다독이는 힘이 있었다. 20년 전만 해도 60여 곳에 이르던 전북의 오일장이 40여 곳으로 줄었다. 교통이 발달하고, 대형할인점이 들어서고, 인구가 감소하면서 장터 역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흥성하던 옛 풍경은 사라졌지만, ‘오일장’이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를 설레게 한다. 오일장에는 그 지역의 특별한 먹을거리와 볼거리와 놀거리뿐 아니라, 스스럼없이 건네는 다정함이 흔전만전하기 때문이다. 수확의 기쁨과 수고로움에 대한 존중도 넘친다. 서툴거나 틀리게 적은 가격표시판마저 옅은 미소를 선사하고, 아무개 집과 상회라는 가게 이름들은 잠시 밀쳐두었던 아련한 추억을 되살린다. 그래서 장터는 먹먹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전북의 오일장들은 본래 명성이 자자했다. 20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고창 해리장, “1910년경 임피군 남삼면에서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위한 난장을 시초로 씨름·도박·농악이 횡행했다.”라는 기록이 남은 군산 대야장,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의 동학 지도자들이 참가한 금구·원평 집회가 열린 김제 원평장, 전국 3대 장터 중 하나로 우시장이 유명했던 남원장,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가 한데 섞여서 들리는 남원 인월장, 전라·경상·충청의 문화가 만나던 무주 무풍장, 영화 <행복>(2007)에서 주인공들이 짜장면 데이트를 즐긴 장수 번암장, 대를 이은 상인이 많은 장수 장계장, ‘용머리장’이라고도 불리는 정읍 산외장 등이다. 생강의 봉동장, 인삼의 진안장, 고추의 임실장 등과 같이 특산물 하나만으로도 금세 떠오르는 장터도 여럿이다.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가치를 찾아서 알리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 땅이 내어준 것들을 성실히 일궈낸 사람들이 꾸려온 오일장의 역사와 풍경은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오일장에는 땀내 나는 삶이 있고, 고단한 일상을 꾸려가는 상인들의 한숨과 비탄도 녹아 있다. 장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잊히기 전에 세심하게 기록돼야 한다. 대학의 관련 학과와 지역의 청소년·부녀회원 등을 기록자로 활용하면 효과는 더 클 것이다. 어물전의 칼과 도마, 오래된 국밥집의 주걱과 국자 등 상인들이 쓰던 도구를 전시하는 <장터 도구 전시회>와 까맣고 투박한 손의 주름마다 새겨 있을 상인들 삶의 굴곡을 살피는 <장터 상인들의 손 사진 전시회>, 특산물을 활용한 <장터 음식 맛 겨루기>, <장터 특산품 뽐내기>, <단골손님 자랑하기> 등은 재미뿐 아니라, 색다른 역사를 새기는 시작이다. 초·중·고교의 체험학습에 오일장을 포함해 물건 구매를 비롯한 <노포 운영자와의 대화>, <우리 동네 특산물 찾기>, <어르신들과 이야기> 등의 시간을 갖는다면 지역을 이해하고, 다양한 삶의 지층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오일장에서는 그저 마음껏 해찰하며 기웃거리기만 해도 사람 사는 정과 때묻지 않은 풍경을 만나리라. 그 고장의 생생한 사투리를 듣는 호사는 덤이다. /최기우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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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6 15:19

술과 노래와 춤과의 조합

아주 오래전 필자는 어느 중앙지 칼럼으로 읽은 내용이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어 이를 이 지면에 소개하려 한다. 매우 인상 깊었던 연유이리라. 미국 거주 어떤 우리 교포 2세 대학교수가 중국을 여행하면서 중국인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한인 집성촌 한 곳을 안내해 달라고 했었단다. 그 중국인이 말하기를 “그 민족은 이상합니다. 일과 후 저녁에 서로 모여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다가 싸움질하고는 흩어지는데, 다음 날도 또 다시 만나 그렇게 반복하곤 하는, 그런 좀 모자란 사람들입니다.”라고 하더란다. 중국인으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듣게 되었지만 이 교수는 오히려 충격적 감동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술 잘 마시는 것은 낭만을 누리면서 감성적 정리적 즐김에 다름 아니고, 노래하고 춤추는 일은 풍류를 아름답게 누리는 미풍이라고 생각했으며, 문제는 싸움하는 일인데, 이는 의견의 극단의 차별성으로 인한 변증법적으로 논하자면 정반합으로 건너가는 치열한 공방이 아니겠는가 하고 긍정적 단정을 하게 되었노라고 술회하였다. 지금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K-팝의 경우 그것이 바로 노래하고 춤추는 놀이의 연장선상에서 승화된 성과가 아닌가? 우리 민족은 잘 놀고, 일은 재빠르게 잘하는 민족이라고들 자타가 공인한다. 잘 노는 일이 바로 예술하는 일로 변환하는 현대 문화 흐름을 볼 때 우리 민족성은 특히 예술 지향적 성향을 띤다고 불 수 있을 것이다. 최치원 선생이 말하길, 우리 민족은 풍류를 누릴 줄 아는 민족이라 평했다고 한다. 풍류란 그 개념이 오늘날 연예 장르의 예술인 것이다. 최치원 선생이 말한 풍류는 현대 개념의 풍류에다가 학문의 즐김까지를 포함시킨 확대된 개념이었다. 한반도 고대 역사상의 제천의식도 집단 가무에 천지신명께 제사 지내는 일이었다. 술과 노래와 춤추는 행위 조합의 행사가 그대로 엄숙한 국가적 의례였으니 오늘에 전해오는 풍속은 당연한 필연성을 지닌다. K-팝은 물론 K-드라마, K-무비, K-클래식, K-뮤직 등 예술 문화 전반에 걸친 융성은 세계 인류를 감동케 한다. 국악 부문은 또 어떠한가? 판소리며, 민요며, 시조창이며, 농악 등등 온 민족이 이에 따라 흥에 젖어 흥얼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다. 농악은 일하면서 함께 공연하는 풍악이다. 일과 놀이가 상생으로 융합한 것이다. 예술에 우리네 고유 정서를, 예기에 우리네 당찬 낭만을 담아냄은 가히 높은 수준인 것이다. 이때에 우리네 정한도 풀어내고, 희로애락의 만 기지 정서를 표상한 것이다. 사실 놀이나 일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함께 함’에 방점을 두었다. 일할 때는 품앗이로 공동 작업을 했으며, 놀이나 예술 공연도 함께 굿을 쳤던 것이다. 이는 종합예술의 성격으로 그 예술성이 승화 확창 되었다. 예술만 그런 게 아니라 역사적 큰 행사도 함꼐 함으로써 그 위용을 높이 떨쳤던 것이다. 임진란 때의 민중 단합, 3.1운동 때의 집단 함성, 동학 동민 혁명 때의 단일 대오, 근래 축구 응원전 때의 붉는 악마 군집 등등 크게 이룬 것에서의 우리네 단합은 타민족 어디에서도 예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큰 용기를 일으키고 신명이 표출되며 소기의 목적 달성은 효과적이었다. 근래 서울 중앙 박물관 관람객 수가 1년 평균 460여 만명이란다. 이 수는 세계 여섯 번 째라니, 우리 민족 문화 지수, 우리나라 국격이 세계 여섯 번째가 아니겠는가? 지고한 예술 지향의 민족성에 무한 자부심을 느낀다. /소재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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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9 16:20

전통한지 연구는 표류하고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이 그동안 한지에 대해 연구한 내용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에 대한 기본 연구조차 하지 않으면서 전통한지 제지 기술에 대한 연구에만 집중하고 있다. 연구 내용은 학문 발전과 관계가 멀고 심지어 연구 윤리까지 심대하게 훼손하고 있어 연구자들로부터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확인해보니 실상은 이러하다. 먼저 태지를 재현했다. 연구자들은 연구에 앞서 선행 연구자 J교수를 만났고 그를 통해 태지에 대한 연구 내용을 자문 받았다. 서지학자 J교수는 1991년 연구 논문을 통해 태지의 역사와 더불어 원료가 되는 해캄의 존재에 대해 규명했다. 그럼에도 산림과학원 연구 보고서에는 단 한 줄도 선행 연구자의 논문을 인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참고 문헌에서조차 누락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국 최초로 태지의 원료가 해캄이었음을 밝혔다고 하면서 100년 전에 사라진 태지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고 대대적으로 연구 업적을 부풀려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언론은 이들의 거짓 정보에 발을 맞추듯 자체 검증 없이 복사 보도했다. 100년만에 재현에 성공했다는 태지는 지금도 한지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인사동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다음 시지를 재현했다고 주장한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 답안지는 응시자가 준비한다. 이 종이는 크기와 품질이 규격에 맞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시지는 두껍고 질이 좋으며 표면이 매끄럽다. 조선시대에 시지는 과거 시험이 폐지된 1894년까지 생산되었다. 산림과학원은 이 종이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933년 다트헌터가 은평(지금의 신영동)에서 장판지 뜨는 광경의 사진을 유일한 근거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또 세검정 장판지 기술이 의령의 장판지 기술과 출발이 다름에도 억지로 연결시켜 마치 의령식 장판지 제지기술이 시지 기술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산림 과학원은 사진을 오독했고 사실을 심대하게 왜곡했다. 그들이 재현한 것은 1970년대 의령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장판지였을 뿐 시지는 아니었다. 시지와 장판지는 재료와 초지법이 다르고 제조 공정이 다르다. 특히 시지는 인쇄 적합성에서 매우 우수한 종이로 장판지와 완전히 다른 종이이다. 세 번째 감지를 재현했다. 감지는 쪽물을 들여 완성하는 종이이다. 이 감청색 염색지는 고려 조선시대에 주로 불교 경전을 사경하거나 변상도를 그리는데 사용해 왔다. 지금까지 짙은 청색의 감지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영역이고 연구의 대상이다. 감지는 완성된 한지에 염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선 종이의 섬유가 강한 잿물 성분을 감당하지 못하여 내절강도나 인장강도가 현저히 약화된다. 감지 재현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을 보면 재현 과정이나 절차 그리고 완성도에 문제가 많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감지를 재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 용역에 참여하여 자신이 이미 완성한 기술을 복수로 이용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학자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학문 연구는 자료와 사실을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접근해야한다. 연구 성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과 앞으로 해결해야 할 연구 과제 등에 이르기까지 서술해야 한다. 그럼에도 산림과학원 한지 연구자들은 연구 성과를 훔치고 왜곡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조차 곡해했고 기 발표한 연구조차 중복 수행했다. 거짓과 속임수에 국민을 속이고 있다. 국가기관의 연구자의 연구윤리가 이정도면 도려내야 하는 것 아닌가? /김호석 수묵화가·전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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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2 15:28

일고수이명창

아무리 뛰어난 판소리 명창이라 하더라도 노련한 고수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된 무대를 만들 수 없다는 의미를 뜻하는 말이 “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다. 판소리는 소리꾼의 역량과 성향, 관객의 반응과 분위기 등에 따라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느낌을 만들고는 하는데,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북장단과 추임새를 통해 바로잡는 이가 진정한 고수이다. 더욱이 고수는 무대에서 홀로 고독할 수 있는 소리꾼의 상대 역할을 담당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도 하고, 관객의 호응을 유도해 소리꾼의 사기를 올려주기도, 사설을 잊었을 경우 능청스럽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소년 명창은 있어도, 소년 명고는 없다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와 같이 판소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수이지만, 관객의 관심을 받지는 못한다. 객석을 바라보며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소리꾼과는 달리 고수는 소리꾼을 바라보며 명품 조연 역할을 할 뿐인데, 판소리 고수처럼 우리 지역 문화현장에서 명품 조연을 맡고 있는 숨은 일꾼 이야기를 해보자. 야외 녹화 현장이나 행사장에서 만나게 되는 기술진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빠른 현장 대처 능력과 정확한 기술적 이해가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변수들과 날로 새로워지는 장비와의 만남 앞에서 “내가 경력이 얼마인데”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조명감독 A는 그런 면에서 탁월하다. 언제 어떠한 질문을 하더라도 답변에 막힘이 없으며, 상황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이 느껴지는데, 오롯이 끊임없는 공부와 노력 덕분이다. 그는 항상 공부하며, 새로운 장비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연구한다. 절대 자신의 위치와 경력을 뽐내지 않으며, 최고의 작품을 위해서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누구나 그와 일하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새로운 공연,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기획자 B는 행복한 사람이다. 지금의 기획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언제나 공연의 준비 과정 자체를 즐기며, 현명한 판단으로 녹록하지 않은 지역의 현실을 넘어,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고는 한다. 변하지 않는 그의 열정과 전문적인 업무 역량 덕분에 관객들은 지역에서 접하기 어려운 작품을 만나는 행운을 맛볼 수 있다. 항상 진지한 고민과 가슴 뛰는 도전을 위해 열심이며,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의 미소에서 행복을 찾는 그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다양한 분야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 문화계의 대표 일꾼에서 이제는 예술경영을 고민하고 있는 관리자 C는 내일이 기대되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성실한 자세로 일해 왔으며, 지역의 동료 예술인들을 위하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다. 전통의 가치를 지키며, 새로운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지속적인 사업을 통해 지역의 인재를 발굴하고, 응원하며, 새로운 관객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회성이 아닌 지역 문화의 지속적인 가치를 가꾸어가는 중심에 그가 자리하고 있음은 너무도 다행이며, 그의 새로운 행보가 기대된다. 눈에 잘 보이는 명품 주인공 뒤에 진심을 다하는 조연들이 어디 이 세 사람뿐이겠는가? 끊임없는 탐구정신과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 그러한 그들의 열정이 있기에 지역 문화계가 더욱 풍성하게 발전할 수 있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홍현종 (JTV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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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5 18:24

민본을 지켜온 땅의 기운

이 땅을 딛고 선 사람들은 일찍부터 군주가 백성으로부터 존재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이 그릇된 정치를 할 때마다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고, 군주의 하늘’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반상의 귀천과 남녀 차별이 없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왕조 세습을 부인했던 정여립(1546∼1589)의 꿈과 토지는 백성이 균등하게 나눠야 한다며 낮은 곳에서 민본을 실천한 유형원(1622∼1673)의 바람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사람이 하늘이다.” 외치며 일어선 동학농민혁명군은 곳곳에 집강소를 설치하며 풀뿌리민주주의의 주춧돌을 놓았다. 부안 우동리에 터 잡고 칠산바다 위도를 율도국 삼아 「홍길동전」을 쓴 허균(1569∼1618)은 <호민론>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에 반발하는 백성이 있음을 알렸다. 일제강점기에도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1923년 정우상(1911∼1950)이 13세의 나이로 매일신보 신춘현상공모에 당선된 동화 「무도(舞蹈)하는 어(魚)」의 핵심은 임금이 갖춰야 할 으뜸은 백성의 소리를 고루 들어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이다. 1930년 김완동(1905∼1963)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화 「구원의 나팔소리」에는 정사에 무관심한 채 악착같이 자신의 이익만 좇던 임금이 백성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추방당하는 내용이다. 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임금은 몰아내야 한다는 두 작가의 신념은 1926년 공립전주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과 일본인 교장 추방 사건으로 이어졌다. 김제소년회에서 활동한 곽복산(1911∼1971)의 동화 「새파란 안경」(1928)은 물욕에 눈이 먼 부자가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는 내용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1929년 전국의 소작쟁의 389건 중 전북에서 일어난 것이 314건이라는 기록은 이 작품들의 가치를 더 확고하게 한다. 글에는 작가가 속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와 사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민주화 과정에서 청년과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운 것도 바른 정치를 일깨우기 위해서다. 1960년 4·19혁명에 앞서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학생들의 첫 시위가 전주에서 있었다. 전북대 학생 7백여 명이 독재 정치 타도와 3·15 부정선거의 재선거를 요구한 ‘전북대 4·4운동’이다. 1965년 3월 한·일 외교 회담 반대 데모가 전국적으로 벌어졌을 때도 전북대와 전주고 학생 수백 명이 ‘매국적인 한·일 회담 절대 반대’를 쓴 현수막을 들고 시내를 누볐다. 유신 치하에서 처음 구속된 성직자는 1972년 12월 13일 전주남문교회에서 강제 연행된 은명기(1921∼1996) 목사다. 원광대·전북대·전주대 학생들이 앞장선 1980년 5월 4일 시위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운동이며, 전주신흥고 학생들이 주축인 5·27시위는 고교생이 스스로 무리를 이뤄 분연히 일어선 전국 최초이자 유일한 시위다. 1980년 5월 17일·18일 전주의 처절한 밤과 5·18민주화운동의 첫 희생자인 이세종(1959∼1980) 열사, 1987년 14개 시·군의 거리를 가득 메운 6월항쟁, 2000년대의 촛불집회 등은 얼마나 애절하고 당당한가. ‘부정’이 ‘정의’를 압도하는 시대에 ‘민주’와 ‘민본’은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할 가치가 되고 있다. 난세 속 4·10 총선, 외침과 저항과 혁신이 가득한 이 땅의 기운을 거스르지 말자. /최기우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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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8 16:23

지방 소멸과 고향 붕괴를 보며

지방 붕괴니 지역 소멸이니 하는 말 뜻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모두 소중한 고향도 잃어간다. 말하자면 거주민 감소를 넘어 아예 시골 동네가 텅텅 비어간다. 사람들이 도시로 떠났거나 사망에 의한 자연 감소일 터이다. 보충되거나 채워짐은 전혀 보여지지 않는다. 동네마다 아기 울음 들린 지가 몇십 년이 넘었다고들 말해진다. 사람 사는 데 따른 모든 부차적 문화나 기구 또는 제도도 소멸된다. 삭막하고 휑한 분위기가 농촌마다 다르지 않다. 아직 빈집들은 몇몇 남아 있어서 겉으로는 가옥 수가 유지되는 듯하나 마을을 들어가 보면 사람의 기척이 없다. 인간의 아름다운 정서를 누리던 소중한 고향 산천이 인정 떠난 낯설고 물설은 타향으로 변모해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서러운 일인가? 부모님 자애로운 눈길이 서려 있던 고샅길 하나하나가 폐허가 되고 정겹던 그 옛 추억마저 소멸되는 게 아니겠는가? 요샛말로 귀촌 귀농이란 말이 있어 ‘고향 되돌림’에 대한 시책이 제시되고 있으나 그 실효는 미미할 뿐이다. 그래서인데, 필자는 감히 의견 하나를 내고 싶다. 막연한 낭만풍의 귀촌은 실효가 없을 터이고, 돌아가서 무슨 할 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일은 즐거움이 되는 것이어야 하고 경제적 생산성도 담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잠깐 중국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인용해 본다. 장차 전답이 잡초로 무성할 것이니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에 묻혀 살리라 하는 소위 선언문이다. 살벌하고 번다한 도시 생활과 벼슬길을 청산하고 인간 성정이 부활하는 자연 귀의의 주장인 셈이다. “돌아가리.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이미 스스로 마음이 몸의 부림을 당했으니 어찌 한탄하고 슬퍼하지 않으리. 지난 날이야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앞날은 좇을 수 있음을 안다네. 실로 길은 잃었어도 멀리 가지는 않았으니 지금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안다오.” 긴 명문이었다. 도연명은 고향에 돌아가 글을 읽었다. 문학과 학문을 달성시켰다. 필자는 그 의견 하나가 예술인들을 농촌에 영접하자는 것이다. 빈집들을 수리하여 저렴하게 임대해 주어 맹렬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게 터전을 마련해 주자는 제언이다. 농촌이 느닷없이 예술촌이 되는 것이다. 별장의 개념이 아니다. 주민등록도 마쳐서 주민 인구수도 늘리고 농촌 생산물 소비 통로도 마련하는 상부상조의 실현을 해보자는 것이다. 도시와 농촌은 자연 빈번히 교류할 것이다. 호강스러운 말이지만 무슨 힐링의 계기도 되며 약간은 지역 경제도 살아나지 않겠는가? 그림 그리는 사람, 글 쓰는 사람, 여타 골고루 재주 있는 예술인들이 농촌을 드나든다면 사람 사는 정경이 살아날 것이다. 옛날에 조정에서 고급 벼슬아치를 벽지에 귀양 보냈는데, 그 배소에서 학문과 문학을 일으키는 긍정적인 부수 효과가 있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사람 하나, 문명한 사람 하나 이주는 그 지역의 명소화를 이끄는 법이다. 강진에 머물던 정약용 선생의 경우가 그 본보기이다. 유명 소설가, 유명 시인들을 지자체에서 크게 환대하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필자의 생각은 그런 화려한 귀촌을 말함이 아니라 잠재력 있는 예비 예술인, 아주 유명치는 않아도 성실한 예술인을 영접하자는 것이다. 루소도 그랬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소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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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1 15:55

전통한지 복원보다 세계유산 지정이 우선인 나라

한국의 전통한지는 무엇이며 어떤 제작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는가. 이 물음에 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문화재청에서 한국 전통 한지 기술의 근거로 제시하는 자료는 류행영의 제지기술이다. 그의 전승 이력을 살펴보자. “자신의 부친에게 배워 한지를 제작하던 김갑종 씨로부터 전통한지 제조법을 전수 받아 55여 년 동안 전통한지 제작에 몰두해 왔다. 김갑종 선생은 ‘일제 강점기 군용지’를 제조하여 납품하던 장인이었으며 그 제조 기술은 유일하게 류행영 선생에게만 전수하였다” 무형문화재는 계보 중심에 의한 전승을 기준으로 한다. 류행영은 그의 부친과 부친의 제자 그리고 보유자에게 이어졌다는 계보가 인정되어 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유일하게 전승받은 제지술이 일본 군용지 기술이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대한민국은 한지장인을 지정하면서 일제 강점기 전쟁물자인 군용지를 만들던 기술자를 대한민국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한지장으로 지정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전통한지에 대한 첫 단추부터 어긋나게 만든 파행의 단초다. 지금 우리는 한국 고유의 한지에 대해 용어와 개념에 대한 정리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유산 등재를 부르짖는 황당무계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전통 한지기술은 정립되어 있는가? 한지를 뜨는데 사용하는 발과 발틀은 전통성을 가지고 있는가? 연구 성과는 물론이고 연구를 시도한 기록조차 없다. 도구뿐 아니다. 소위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조차 종이를 뜨는 전통 초지법이 무엇인지, 어떤 기법이 있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하나의 줄이 발틀의 뒤에 매달린 채 물을 흘리며 뜨는 기법만이 유일한 한국식 초지법이라 주장하지만 조선시대 유물에는 가둠뜨기 종이도 다수 존재한다. 더욱이 줄을 이용한 흘림뜨기는 1953년경 일본식 가둠 뜨기 도구를 새롭게 개량한 초지법으로 조선시대 제지법과 다르다. 이 초지법은 많은 양을 뜰 수 있다는 경제성 면에서 선호했지만 앞과 뒤의 종이 두께가 다른 관계로 홑지 두 장을 엇갈리게 놓아 두 장을 하나로 합해야만 만들어지는 불완전 방식이다. 제지법의 관점에서 보면 단점이다. 결국 한지의 특성은 완성품인 종이가 말한다. 현대 한지장이 만든 한지는 조선시대 종이 수준의 반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수준이다. 특히 밀도가 크게 낮으며 새롭게 종이 표면에 남겨진 발 지지대 자국으로 표면이 균질하지 못하다. 백색도는 낮고 크기도 작다. 이것은 많은 이야기를 시사하고 있지만 특히 원료처리와 도구 그리고 초지법이 달랐음을 반증한다. 조선시대의 종이 한 장조차 재현하는 기술력이 없는 현실에서 도대체 무엇을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한다는 말인가. 지금은 문화유산의 실체만 있을 뿐 과거의 도구와 제지술은 사라졌다. 그래서 전통한지는 긴급 보호가 필요한 종목이다. 시급히 원형 기술을 찾아 복원하지 않으면 사라질 위험에 놓여있다. 세계유산 지정에 앞서 전통한지 기술부터 복원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등재운동단체와 이에 편승하는 중앙부처, 지자체는 유네스코 지정을 위해 온갖 술수와 편법 그리고 세몰이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필자는 지정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 정부와 관계부처는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 전통한지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신용장도 없으면서 세계저명 미술관 미술품 수리와 복원에 한지가 쓰인다는 거짓 정보 등을 언제까지 언론이 받아쓰게 할 것인가? 거짓은 아무리 덮어도 거짓이고, 따라서 영원히 거짓이다. /김호석 수묵화가·전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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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5 16:43

제발 지방방송 좀 꺼

“지방방송 좀 꺼!” 교실 한쪽 집중하지 못하고 떠드는 아이에게 주는 선생님의 핀잔이자. 술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내세울 때 사용하는 독기 어린 표현이다. 오늘은 그 지방방송 이야기를 해보자. 내 어린 시절에는 1대의 텔레비전 앞에 수많은 동네사람들이 모였지만, 내 아이의 어린 시절인 지금은 1명의 시청자 앞에 수많은 텔레비전이 존재한다. 누구나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으니, 지방방송의 경쟁력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참고로 서울을 중심으로 지역에 대한 차별을 의미하는 ‘지방(地方)’과 달리 ‘지역(地域)’은 사회 전체를 동등하게 나눈 일정한 공간의 의미이니, 지역에 사는 우리는 ‘지역방송’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옳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지역방송이다. 흔히 “지역방송은 재미가 없어요”, “왜 서울의 재미있는 방송을 못 보게 하는 거예요”라고 말을 한다. 지역방송 피디인 나로서도 부정하기 어려운 지점이 충분히 존재함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정말 전주MBC와 JTV 같은 지역방송이 없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루 종일 서울 중심의 이슈와 사건만 보도되는 뉴스, 인기 연예인이 출연하는 예능프로그램, 세계를 오가며 제작한 걸작 다큐멘터리의 세상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훌륭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을 수 있으나, 그 어디에도 지역에 사는 우리의 모습과 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다. 지역에는 누가 사는지, 지역에는 어떤 문화가 있는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루 이틀이 아닌, 매일 매일이 이렇다면 지역에 사는 우리들은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물론 지역방송도 당연히 볼만하여야 하며,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더 나아가서는 타지에 살고 있는 출향민이 “이게 우리 동네 이야기야”라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방송이어야 할 것이다. 내 나름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장수 프로그램을 뽑아보았는데, 전주MBC의 ‘얼쑤 우리가락’과 JTV의 ‘와글와글 시장가요제’이다. ‘얼쑤 우리가락’은 1995년 첫 방송을 시작으로 2021년까지 26년을 이어온 국악전문 프로그램으로, 대한민국 지역방송을 대표하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국악 꿈나무를 발굴하는 것은 물론 고품격 콘서트의 기회를 제공해 국악의 저변을 확대하였으며, ‘광대전’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예향 전주의 자긍심을 높인 프로그램이다. 또한 2008년 5월, 첫 방송을 시작으로 17년간 지역 전통시장을 탐방하며 제작하는 ‘와글와글 시장가요제’는 매주 수많은 지역민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더욱이 이 프로그램은 ‘방송’이기 이전에 누군가에게는 ‘복지’이고 ‘문화활동’이기도 하다. 특히 전주와 같은 도시를 떠나 시골의 작은 전통시장을 찾을 때 더욱 그러한데, 작은 면(面)에서 녹화가 있는 날이면 수백의 관중이 모이고, 도시의 대형 공연장 못지않은 흥겨움이 넘쳐난다. 지친 농촌생활을 벗어나 시골 장터에서 만나는 해방구 같은 역할을 지역방송이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시장의 논리로만 결정된다면, 사회는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강자만이 살아남고 모두가 서울만을 바라보며 지역의 가치가 무시되는 사회, 과연 우리의 미래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역 소멸이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시대에, 지역을 보다 살기 좋고 즐거운 공간으로 만드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역에도 사람은 살고, 문화가 필요하며, 그러한 곳에 지역의 방송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홍현종 JTV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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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18 17:07

‘미술로창’ 10년이 남긴 선물

㈔문화연구창의 ‘미술로창 잡담클럽’은 매주 수요일마다 미술관을 찾아 그림 보고 점심 먹고 수다 떠는 모임이다. 2014년 2월 26일 첫 모임을 한 미술로창은 2024년 2월 28일 531회를 끝으로 10년의 여정을 마쳤다. 531주의 수요일마다 단 한 번도 빠짐 없이 미술관을 찾은 것이다. 미술로창의 진행 과정은 항상 같았다. 매주 월요일 그 주에 찾아갈 전시장을 SNS로 알린다. 수요일 정오에 만나서 그림을 보고, 작가와 만나거나 참가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갹출해 점심을 먹고, 헤어진다. 참가자는 대중없고,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오면 좋고, 안 와도 그만. 왜 빨리 안 오냐고, 왜 안 왔냐고 묻지 않는다. 사실 처음부터 몇 회를 하겠다거나 몇 명을 모으겠다는 계획이나 기대도 없었다. 그저 설·추석·크리스마스 등과 날짜가 겹쳐도 꿋꿋하게 전시장을 가자는 다짐뿐이었다. 10년 동안 회당 평균 참가자는 5∼9명. 적을 때는 2∼3명, 많을 때는 30명에 이르기도 했다. 초기에는 각 영역의 예술인과 문화시설·단체 근무자가 주를 이뤘다가 학생, 종교인, 교사, 주부, 퇴직자, 자영업자, 직장인들로 연령과 직업이 다양해졌다. 매주 전시를 고르고, 작가를 섭외하고, 기록을 남기며 미술로창을 이끈 사람은 한국화를 전공한 고형숙 화가다. “미술관에 가고 싶지만, 낯설고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친구가 돼주고 싶었다. 작품에 대한 이해보다 화가와 작품을 가깝게 느끼기만을 바랐다.”라는 그의 소망처럼 모임이 계속되면서 미술관은 편하고 익숙한 공간이 되어갔고, 화가와도 스스럼없이 말을 나누는 사람이 늘었다. 참가자들끼리 마음을 맞춰 전주시·완주군을 벗어나 군산시·남원시·담양군·서울시·순창군 등으로 꽃놀이를 겸한 미술기행을 떠났고, 화가들의 작업실을 찾아가 작품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비문과 오기, 현학적 수사가 지나치게 많은 전시 소개 글을 원망하다가 문화시설과 연계해 글쓰기 강좌인 ‘문화예술인을 위한 문장강화’를 열기도 했다. 고형숙 화가는 마지막 모임에서 “많은 분을 만나 나이와 직업과 상관없이 그림과 삶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된 시간이었다. 그동안 재밌게 잘 놀았다.”라면서 해산을 알렸다. 그의 말처럼 미술관을 향한 걸음은 때론 해찰하며 느슨하게 때론 유쾌하고 발랄한 나들이가 돼야 한다. <2023 문예연감>에는 2022년 1,612건의 전라북도 문화 활동 중 시각예술이 697건으로 43.2%였다. 경북(621건), 전남(417건), 강원(404건), 충북(401건), 충남(351건), 제주(316건) 등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그러나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 국민 문화예술활동조사’에 따르면 문화예술행사 관람률은 영화 52.4%, 대중음악·연예 11%, 미술 7.3%, 뮤지컬 5.5%, 연극 5.4%, 전통예술 2.4%, 문학 행사 1.9%, 서양음악 1.9%, 무용 0.55% 순이며, 미술 분야는 2019년 13.5%, 2020년 8.7%, 2021년 5%, 2022년 6.7%로 코로나19의 회복세가 더디다. 미술로창과 같은 활동이 지속돼야 할 명확한 이유다. 미술로창은 끝났다. 하지만, 미술로창이 10년 동안 다져 놓은 길은 수천수만의 갈래로 이어질 것이다. 누구든 가까운 사람들과 숱한 미술로창을 만들어 예술작품 감상이 일상다반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생활 속 미술로, 헤쳐모여!” /최기우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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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11 16:35

베이컨의 4대 우상과 우리네 현실 사이

우리는 우리 사회생활 중에 허다히 많은 선입견으로 생기는 편견 때문에 갈등이 증폭되고 협치가 결렬되며, 증오가 유발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하다못해 세상 돌아가는 시국을 화제로 올렸을 때에도 상대편이 무슨 종류의 신문을 보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대화를 풀어가야 하는 웃지 못할 경우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ㅈ’신문을 구독하는 사람과 ‘ㅎ’신문을 구독하는 사람 사이는 극보수와 극진보 견해의 시국관으로 각각 상대를 용납 못 할 정도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오랜 우정도 이런 견해 차이로 결별을 맞는 경우도 필자는 가끔 보았던 것이다. 그 서로 다른 견해 차이의 서로 다른 정보만 받아들여서 상호의 경계를 도저히 허물 상태가 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정치 붕당을 서로 다르게 지지하며 지역 감정으로까지 발전하는 우리네 현실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한 보수 진영 논리와 영원한 진보 진영 논리는 중도의 회색 지대를 용납하지 않고 오로지 흑백 논리로만 일관한다. 역사적 과거 사실에까지 더듬어 역류하여 자기 편협의 논리 프레임에 오류의 역사관을 가둔다. 종교 문제도 그렇다. 서로 다른 프레임에 갇혀서 다른 종교는 철저히 봉쇄한다. 종교 문제를 담론으로 삼는 좌담회는 절대로 상존할 수 없는 어리석음의 극치인 것이다. 이미 한국 사람들은 종교 문제로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 슬기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민족들 종교 전쟁을 우리는 비웃듯이 말이다. 이처럼 선입견에 의한 편견의 오류를 규명하고 경계하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4대 우상이란 명제로 우상의 갈래를 화두로 띄웠다. 첫째로, 집단의 공통된 성질에서 생기는 문제의 우상을 종족 우상이라 하였고, 둘째로, 환경, 습관, 교육, 취미 등의 영향으로 생기는 문제의 우상을 동굴 우상이라 하였으며, 셋째로, 사람들의 교제나 특히 언어가 사고를 제한하는 것에서 생기는 문제의 우상을 시장 우상이라 하였으며, 넷째로, 역사, 종교, 전통, 전설 등의 신봉에서 생기는 문제의 우상을 극장 우상이라고 정리했다. 그런데 우리네 현실 속에서는 다른 많은 우상들이 너무나 많이 생겨났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맨 먼저 학벌에 대한 편견의 우상이다. ‘S’대를 나온 사람과 삼류 대학을 나온 사람 사이는 편견이 바다처럼 깊고 넓다. 그 “S’대 법대 출신들 검사들은 우상의 꼭지점에 놓여 있디. 인격 인품의 변별성은 학벌로 좌우된다. 동창의 인연 끄나풀은 우리나라 사회의 병폐 중의 병폐이다. 명문고 동창의 연대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으로 지연에 따른 우상이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어휘는 내내 우리들 인식 속에 지연의 고리 병폐로 굳어진 상징어가 되어 버렸다. 다음으로는 씨족 관념의 우상이 대두된다. 일가친척 간의 연대 맺음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부부 자녀 간의 편견은 정의와 보편적 상식으로는 제어될 수가 없다. 이 외에도 우상으로 자리매김된 분야가 허다하다. 직업 우상, 직위 우상, 예술 우상, 양반 우상, 사법 기관 및 검찰 경찰 우상, 대학교수 우상, 재벌 우상, 건달 우상, 연예인 우상, 체육 선수 우상, 자동차 우상, 주택 우상 등등 모두 나열할 수가 없다. 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품으로 <오만과 편견>이란 명저가 있다. 내가 오만하면 남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편견에 사로잡히면 내가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명언이다. /소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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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04 15:33

전통 기술력 없이 한지 산업화 불가하다.

전주한지산업지원센터는 한지문화와 산업을 연구, 개발, 교육하는 전국 최초의 한지관련 전문기관으로 2010년 건립되었고, 2013년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국제공인 시험기관으로서 자격을 획득했다. 센터는 연구 개발 분야에서 신소재. 신상품 개발, 응용제품 연구 수행과 품질인증을 연구하고 국가 공모과제와 연구 용역과제를 수행하고 한지 품질 향상을 위한 연구 업무를 수행한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현실은 한지 산업화에 집중했다. 한지가 좋고 세계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은 알고 있지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는 파고 들지 못했다. 연구실에서 파악한 수치는 실제 한지 현장에서 완성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전통한지의 특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없는 현실에서 “한지 산업의 기반을 구축하고 핵심 생산 기술을 개발해 이를 기업에 이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전통기법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기술력도 턱없이 부족한데 전통한지의 무엇을 산업화시키겠다는 것인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한지 산업화에 눈독을 들여 눈먼 돈을 받아갔지만 단 하나도 의미 있게 산업화에 성공한 예가없다. 실체 없는 예산 남용은 도돌이표처럼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전주시는 뼈아픈 반성을 하기 보다 오히려 과장 홍보에 열을 올린다. 이제부터는 한지 산업화를 주장하기보다 한지의 전통 기술을 찾아 규명하는데 집중할 때이다. 이런 점에서 한지산업지원센터가 행자부 전통문화 원형 사업에서 이룩한 성과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2015년 이후 독립유공자에게 수여하는 훈장 증서 등에는 전통한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지센터가 최고 수준의 품질기준을 제시하자 계약제도 운영 부문에서 과잉제한에 해당된다고 하여 입찰조건에 제동이 걸렸다. 입찰 과정에서 통로가 막혀 확대되지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지산업지원센터는 조달청 문화 상품 등록을 통해 돌파구를 열었다. 최상의 한지를 사용하게 하겠다는 소명으로 새로운 방안을 찾아낸 것이다. 적극 행정이 이룬 성과이다. 이제 전주한지지원센터는 정부에서 사용할 훈. 포장용지를 독점 납품하게 된 것이다. 최근 한국국제자원봉사회(KIVA)에서도 행안부 훈장증서와 동일한 한지를 인증증서에 사용하기로 했다. 전통한지 수요처 확장을 위한 연구센터의 숨은 노력이 이제 막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한지산업지원센터의 위상을 재고해 봐야 한다. 현재 한지장의 기술력은 통일신라시대의 종이조차 재현하지 못한다. 조선시대에 만든 서화용은 물론이고 인쇄용 종이까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초지기술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부끄럽지만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다. 전통한지 기술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한지가 세계 속에 자리매김 되려면 역사 속에서 검증된 우수한 종이를 표본으로 이를 복원하려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복원 과정은 유물 속에만 숨 쉬고 있었던 한지의 모든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만들 것이다. 한지지원센터는 처음 전주시 소속으로 정부부문에서 대한민국 유일한 한지전담기관으로 출발했다. 그러한 전담기관이 전주시 전통문화기관의 일개 부서로 편입되었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한지원형을 탐구하는 연구 수행과 한지 제조기법을 규명하고, 한지 정책을 연구하는 기능 등이 주어지지 않았다. 독립성을 가지고 독자적 연구 영역을 개척할 명분과 권한을 주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하루에 몇 명의 가족 체험 학습을 위해 고급 인력이 동원될 것이다. 전주시의 근시안적 행정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폭싱(Foxing) 기관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하다. /김호석 수묵화가·전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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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6 18:31

이야기로 전하는 행복의 맛

남도의 맛을 자랑하는 고장에 살고 있는 나에게도 외지에서 찾아오는 지인들이 있으며, 주저 없이 그들에게 추천해 줄 수 있는 맛집은 어디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 나름대로 추천하는 곳은 객사 근처 ‘동창갈비’와 전북대병원 앞 ‘이연국수’, 전주남부시장내 ‘조점례남문피순대’ 그리고 익산역 앞 ‘엘베강’과 전주남부시장 ‘현대옥’이다. 복잡하지 않고 부담스럽지도 않은 곳들이다. 맛은 기본이요,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연륜을 넘어서는 나름의 역사 덕분에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이 배가 될 수 있는 곳으로, 잘 차려진 프랜차이즈 식당과는 다른 그 무엇이 존재하는 우리만의 노포(老鋪)이다. 이 맛집 중 엘베강은 ‘역전할머니맥주’로 현대옥은 ‘현대옥프랜차이즈’를 통해 전국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대기업의 물량 공세는 물론 유명 프랜차이즈와의 경쟁을 이겨내며 선전하고 있다. 잘 짜인 메뉴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음식 맛이 한몫을 했을 터이다. 반면 엘베강과 현대옥의 시작은 그다지 거창하지는 않다. 군산에 살던 김칠선 여사는 제주도에 다녀오는 길에 기차 안에서 어린 딸을 잃게 되고, 1982년 익산역 앞에 작은 호프집 엘베강을 개업한다. 애당초 돈보다는 잃어버린 딸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던 그녀는 3일간 냉장고에서 숙성한 생맥주와 저렴하지만 식사 대용까지 가능한 안주들을 푸짐하게 내어놓게 된다. 사람들은 살얼음생맥주의 신기함과 오징어입이라는 생소한 안주에 열광하게 되며, 국민 반찬 소시지가 저렴한 안주로 등장할 수 있음에 행복을 느끼게 된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어린 네 자녀를 홀로 키워야만 했던 양옥련 여사. 평소 남편이 좋아하던 음식인 콩나물국밥으로 1979년 전주남부시장속 작은 국밥집 현대옥을 시작한다. 오롯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함이며, 비장한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놀라운 신공이 시작된다. 토렴을 통해 국밥 최적의 온도를 맞춰내는 것은 물론, 속풀이 손님이 보는 즉석에서 마늘을 찧고, 오징어를 데치며, 대파와 고추를 썰어서 국밥에 넣어준다. 음식을 맛보기 이전 그녀의 손놀림에 모두가 반해버린다. 대한민국 골목상권을 점령하고,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대기업과 유명인들을 앞세운 프랜차이즈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음식 본연의 맛과 품질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음식 속에 담겨,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이다. 엘베강과 현대옥이 갖고 있던 공간의 의미를 이야기로 살려보는 것은 어떨까? 6대의 냉장고에서 숙성되는 생맥주와 맥주잔. 고작 8천 원인 오징어입과 2천 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에 제공되는 소시지 안주. 엘베강이 남들과 다르게 운영될 수 있는 것은 딸을 기리는 김철선 할머니의 마음이 여전히 그곳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주문과 동시에 토렴하고 즉석에서 찧은 마늘과 시장에서 바로바로 구입한 대파와 고추로 맛을 내는 콩나물국밥에는 양옥련 할머니의 정성이 담겨있다. 자본과 아이디어로 이겨낼 수 없는 그 집만의 오랜 ‘이야기’야말로 신세대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는 개성 강한 아이템일 수 있다. 김칠선과 양옥련. 두 할머니의 처음을 기억하며, 지금이라도 이러한 이야기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안내해 보자. 부족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맛을 넘어, 진정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음식 속에 담겨있는 아름다운 이야기일 수 있을 것이다. /홍현종 JTV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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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19 16:41

전북연극박물관을 세우자

연극박물관은 어디에 있을까? 한국에 800여 개가 넘는 국립·공립·사립·대학 박물관이 있지만, 연극박물관은 국어사전에만 있을 뿐 실체가 없다. 공연예술을 앞세운 곳도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하나다. 대표적인 예술 장르인 연극을 상징화한 박물관은 왜 없을까? 이유를 불문하고 소중한 예술 자산이 무참히 사라지기 전에 유·무형의 연극 유산을 수집·연구·보존하고, 전시실·자료실·체험실·수장고를 갖춘 공간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어느 지역보다 연극의 역사가 깊고 탄탄한 전북특별자치도가 먼저 관심을 보인다면 이는 무척 탁월한 선택일 것이다. 1910년대 이후, 전북의 연극판은 꾸준히 역량을 쌓으며 큰 성과를 올렸다. 1921년 전국 최초의 군(郡) 단위 소인극(전문 배우가 아닌 사람들이 하는 연극) 운동이 고창에서 시작한 후 익산·김제·전주·군산·정읍·남원·진안·옥구·임실·무주 지역으로 확산하며 근대연극의 공고한 뿌리를 만들었다. 작품은 문맹 퇴치와 풍속개량뿐 아니라, 불합리한 시대를 깨닫게 하는 항일과 민족자존을 담기도 했다. 1921년 군산에서 창단한 동광단은 여성으로만 구성된 최초의 극단으로, 평양·서울 공연에서 잇달아 흥행했다. 익산에서는 1926년 전북 최초로 연구극(硏究劇) 성격의 동인극단인 계명극단이 창단했다. 1932년에는 극단 연양사가 단원들의 역할을 연출·연기·무대·운영으로 나눠 전문극단의 출발을 알렸다. 이는 지역 연극계의 높은 자생력을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지만, 전북의 연극은 1940·50년대 전주문화동우회와 전북극예술협회, 전문연극인과 순수예술, 이봉섭과 정구하, 학생극, 인형극 운동, 1960·70년대 박동화와 창작극회, 살롱극과 행동무대, 문치상과 비사벌극회, 대학극, 1980·90년대 황토의 부상과 창작극회의 부활, 소극장 연극, 관립극단(전주시립극단) 태동, 2000년대 전북연극제와 소극장연극제, 청소년연극제 등 촘촘하게 성과를 일구며 성장했고, 수준 높은 무대는 전국 규모 연극제에서 잇따른 수상으로 이어졌다. 척박한 환경에서 뚝심 있게 생명을 지켜온 전북 연극의 힘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창작 희곡 시대를 연 극작의 역사에서도 찾아진다. 전북과 연관된 국내 극작가의 숫자가 이를 증명하고, 작품의 우수성 또한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연극의 갈래를 가면극, 인형극, 판소리, 창극, 신파극, 신극으로 크게 나눠도 전북 연극은 울울창창하다. 일인다역인 판소리의 발상지가 전북이며, 춤·음악·연극이 어우러진 농악의 신명과 멋이 살아 있는 곳이 전북이다. 판소리가 발전해 우리 고유의 음악극이 된 창극의 연희자들도 대개 전북 출신이며, 세계 유명 인형극축제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극단도 전북에 있다. 전북 연극이 한국 연극사의 굵직한 축으로 인정받는 것은 연극 정신의 맥을 이으며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부침의 세월, 극단들의 탄생과 소멸이 악순환처럼 이어졌지만, 이것이 가져온 양적 질적 변화가 지금의 전북 연극을 있게 한 바탕인 것처럼 전북의 연극은 스스로 살아나고 다시 살아나며 억척스럽게 자신을 지켜왔다. 그 분명하고 무한한 생명력은 전북특별자치도가 한국연극박물관을 유치하려 할 때 경쟁력을 한껏 높이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전북 연극의 역사와 현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알려 도민의 자긍심과 자존감을 높이는 ‘전북연극박물관’ 건립이 먼저다. /최기우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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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12 17:59

교집합과 개성공단

문학에서 수사법을 논하면서 원관념에서 보조관념으로 이미지를 의탁하며 건너갈 때 은유법을 활용한다. 가령 ‘그 여인은 한 송이 장미다’라고 했을 때 여인과 장미의 공통 특성인 ‘아름다움’이 양자를 연계시켜 ‘A는 B이다’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이런 문장 기교를 은유법이라 한다. 또한 ‘여인’이란 단어는 숨고 ‘아름다운 장미여! 그대 영혼의 향기 그윽하여....’어쩌고 했을 때 원관념은 감추고 보조관념으로만 구성되어 ‘여인’의 이미지를 이끌어내는 문장 수사법을 상징법이라고 한다. 그 여인이 100퍼센트 장미다운 것은 아니다. 극히 일부만 장미스러울 뿐이다. 그래도 ‘그 여인은 장미다’라는 문장은 성립된다. 이렇듯 작은 일부가 전체를 대표하면 이도 또한 일컬어 상징이라 할 것이다. ‘태극기가 대한민국을 상징한다’ 할 때와 같은 논법이다. 그 매우 일부분의 양자 공통 특성(공유 특징)으로 서로 접속되어 엇물린 것을 수학용어로 교집합이라 일컫는다. 필자는 감히 한국 문학계에서 은유와 상징 개념을 교집합으로 설명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 공유됨으로 양자 사물은 서로 물들어 상생의 전기를 만들기도 한다. 한 가정에서 부부가 성립하는 경유도 서로 물들기에서 비롯된다. 서로 달랐던 가문의 문화나, 서로 다른 성격이 조금씩 닮아가서 서로 물들고 상생의 단계로 옮아가는 것이다. 가정의 완결성은 서로 물들어 교집합의 영역이 넓어감에서 담보된다. 파랑과 노랑이 상호 일부가 물들어 초록이 생겨나고 이 교집합이 생성의 색깔이 되는 것이다. 지구가 온통 초록으로 덮힌다면 인류는 번창과 번영을 누릴 것이다. 교집합을 정치적으로 운위하자면 협치니 협동이니 하는 용어에 접근할 것이다. 우리가 한때 개성공단을 창설하여 절묘한 교집합을 누릴 때가 있었다. 개성공단의 초록 색깔 창달은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하나의 전기였었다. 재봉틀 돌리며 이념 논쟁을 할 리 없었고,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하면서 체제 논쟁을 벌일 일이 없었다. 저렴한 생산 비용으로 생산된 생산물은 해외에 판로를 넓혀 순이익을 높여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이유로 개성공단은 파멸을 맞았다. 박근혜 정부였던가? 아예 개성공단 철수를 선언하고야 말았다. 국정 농단 이모저모보다 더 큰 만행이요 죄악이었다. 양쪽 민족의 공동선 추구가 약간씩 도모되고 있을 때 저리 어리석은 결단을 내렸으니....조금 과장해 말한다면 민족에 대한 반역이었다. 개성공단을 창의한 정치인을 일컬어 필자는 민족 최고의 예술가라 칭하기도 했었다. 북한은 오늘날 남쪽을 향해 주적이란 말도 서슴없이 사용한다. 한반도에 전운이 감도는 듯 트라우마가 울컥 솟는다. 양쪽이 자제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오히려 중국에서 ‘자제’란 용어를 사용하는 아이러니가 보인다. 교집합은 공영 공존의 미학이다. 러시아와 우크라니이와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또는 지구상 분쟁 지역에서 저러한 교집합 수준의 중립 지대나, 중화 경역을 만들지 못한 데서 비롯된 화근이리라.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이나 이슬람교도인 모두에게 성지이다. 함께 같은 신에게 경배드리면서 거기서 평화니 공존 공영의 단초를 못 만든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민족들인가? 개성공단을 불지른 우리네 누구의 어리석음의 극치여! 민족의 귀중한 슬기를 차단해버린 우리네 커다란 아쉬움이여! /소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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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05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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