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진궁이 머리를 들었다. 오후 해시(10시) 무렵, 저녁을 마친 진궁이 기름 등불 아래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참이었다.
“나리.”
다시 부르는 소리는 낮지만 절실했다. 절박감이 느껴지는 소리다. 무장(武將)으로 반평생을 보낸 진궁이다. 눈빛에서 살기(殺氣)를 느끼듯이 목소리에서도 위기(危氣)를 감지할 수가 있다. 진궁이 방문으로 다가가 반쯤 열었을 때 마루 끝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집안 종은 아니다. 진궁이 낮게 물었다.
“누구냐?”
“예, 서문 옆에서 그릇가게를 하는 가섭입니다.”
“응, 내가 너를 알지.”
진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런데 밤늦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왔느냐?”
연금 상태라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 가섭이 마루 앞으로 바짝 다가와 섰다.
“담을 넘었지요.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응? 누구 편지?”
“읽어 보시지요.”
가섭이 품에서 헝겊에 싼 편지를 꺼내 진궁에게 건네주었다.
“소인이 성 밖에 나갔다가 백제군에게 잡혔습니다.”
주위를 둘러 본 가섭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장모께 약을 갖다드리려는 길이었지요. 그 편지는 백제군 장수가 나리께 보낸다고 직접 썼습니다.”
“네 장모가 인질로 잡혀 있느냐?”
“심부름을 안 하면 제 처갓집은 도륙을 당하겠지요.”
“그렇구나.”
머리를 끄덕인 진궁이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방으로 들어오너라.”
기름등 밑으로 다가가 앉은 진궁이 편지를 펼쳤고 가섭은 방으로 들어와 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진궁이 편지를 읽었다.
“나는 대백제국 나솔 계백이다. 삼현성 성주 진궁에게 인연이 닿아서 이렇게 편지를 전하게 되었다. 그대의 딸 고화와 우덕은 내가 종으로 사서 데리고 있다. 이곳을 지나다가 그대가 딸 때문에 성주직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상인 하나를 잡아 서신을 보낸다. 딸과 성을 바꾸지 않겠는가? 성문을 열어주면 딸과 함께 백제땅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벼슬도 할 수가 있겠지. 가부(可否)를 상인 편에 적어 보내라.”
이렇게 끊긴 줄 알았는데 그 밑에 다시 글이 이어져 있다. 작은 글씨다. 진궁이 편지를 눈에 가깝게 대고 읽는다.
“그대 딸은 백제땅에서 여생을 마치게 될 것이니 출가한 것쯤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성을 내놓지 않으면 딸을 죽인다는 억지를 써서 넘어가는 무장이 있겠는가? 상인한테 딸에게 보내는 편지나 써주면 전해주겠다. 대백제국 나솔 계백이 전한다.”
이윽고 머리를 든 진궁이 가섭을 보았다. 차분해진 표정이다.
“너, 글을 아느냐?”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건 새가 똥을 싼 것 같구요.”
“내가 편지를 써 줄테니 가져가거라.”
“예. 오늘밤 다시 성을 넘어갈 겁니다.”
가섭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진궁을 본다.
“그, 백제 장군이 무섭게 생겼지만 위엄이 대단했습니다. 물론 성주 나리보다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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