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달솔, 여쭤볼 말씀이 있소.”
청을 나갔던 화청이 다가와 계백에게 물었을 때는 사시(10시) 무렵이다. 화청의 뒤에는 윤진이 따르고 있다. 앞에 선 화청이 주춤거리는 것 같더니 계백을 보았다.
“달솔, 대답해 주시오.”
“이 사람아. 뭘 물어야 대답을 할 것 아닌가?”
계백이 웃지도 않고 되물었더니 화청이 멋쩍은 듯 수염을 손바닥으로 훑어 내렸다. 뒤에 선 윤진은 아까부터 딴전을 부리고 있다. 화청이 다시 계백을 보았다.
“달솔,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날 밤에 토성에 다녀오셨지 않소?”
“그렇지.”
“토성이 불에 타 재가 되었다고 들었소.”
“맞네.”
“달솔.”
“뭔가?”
화청이 눈을 부릅떴다.
“처자를 베어 죽이셨소?”
계백이 시선만 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윤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벌써 윤진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윤진이 부른다.
“달솔.”
“너는 또 무슨 일이냐?”
“소문이 다 퍼져 나가서 모두 울었지만 사기가 떨어졌소.”
“저런.”
윤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달솔, 왜 그러셨소?”
어깨를 부풀린 윤진이 계백을 쏘아보았다.
“장수들도 이곳저곳에 처자식이 있소. 군사들이야 격해져서 죽음을 잊겠지만 장수들은 앞뒤를 재어야 될 것 아닙니까? 처자식도 다 죽였으니 내 차례다 하고 덤비는 장수에게 승산이 있겠습니까?”
“과연.”
계백이 남의 일처럼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옆에 서 있던 화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난 처자식을 하도리의 부장 혼다를 시켜 왜국으로 옮겼어. 지금쯤 구례 포구에서 왜국행 배를 탔을 것이네.”
“아아.”
화청의 얼굴에 금방 웃음이 떠올랐다.
“달솔, 잘하셨소.”
“그래야지요.”
윤진도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수들에게는 그렇게 말해주겠소.”
윤진과 화청이 서둘러 청을 나갔을 때 계백이 길게 숨을 뱉었다. 그렇다. 처자를 베어 죽이고 배수진을 친 것처럼 싸우다 죽을 생각이었지만 마음을 바꿨다. 그래서 하도리의 부장 혼다를 시켜 그날 밤으로 구례 포구로 떠나보낸 후에 토성에 불을 지른 것이다. 잠시 후에 청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다께다가 뛰어 들어왔다.
“주군, 신라군이 왔습니다.”
다께다가 소리쳐 말했지만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고 숨결도 고르다.
“먼저 기마군이 남쪽 언덕 위에 포진했고 뒤를 선봉군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는 25리(12km)가량 됩니다.”
“오늘 저녁에야 진을 칠 것이다.”
계백이 청을 나서면서 말했다.
“내일 아침부터 전쟁이 시작되겠지.”
“주군, 마님과 공주님을 구례 포구로 보내셨다는 말을 듣고 장수들이 모두 기운을 냈습니다.”
옆을 따르던 다께다가 말했다. 다께다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계백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처자를 죽여 명예를 지키는 장수가 아니다. 그런 명예는 필요 없다.”
발을 떼며 계백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명예도 지켜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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