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북이 울린다. 오전 진시(8시), 신라군이 먼저 움직여 황산벌로 나오고 있다. 앞장선 신라군 선봉군은 기마군 1만, 좌우 끝이 조금 앞으로 나온 반원형 진(陣), 그 중심에 대장군 김흠춘이 5천 기마군을 한 덩어리로 만든 채 거대한 산이 굴러오는 것처럼 다가온다. 넓게 펼쳐진 진(陣)의 폭은 2리(1km), 양 끝에 포진한 1천기씩의 기마군은 시위에 쟁여진 화살촉 같다. 선봉군 뒤로 1리(500m) 거리를 두고 김유신과 대장군 김품일이 따르고 있었는데 병력은 3만, 김유신의 중군(中軍) 2만을 김품일이 좌우로 둘러싸고 나가는 형국이다. 앞이 훤하게 보이는 터라 허점이 보이거나 필요할 때 김품일의 기마군 1만을 기동군으로 응용하려는 것이다. 그 뒤를 후위군 1만이 따른다. 거리는 1리, 5만이 철갑을 겹겹이 입은 것처럼 나아간다. 보기만 해도 압도적이다. 수십 개의 대고(大鼓)가 울리는 데다 기마군의 말굽소리, 그러나 하늘은 맑아서 구름 한 점 없다. 서늘한 날씨, 북소리에 맞춰 속보로 나아가는 신라군의 어깨에 힘이 실렸다. 아직 앞쪽에서 백제군의 반응은 없다. 멀리 15리쯤 앞쪽으로 검은 산맥이 둘러쳐져 있다. 그곳, 3개 산성에 백제군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백제군은 일시에 쳐들어올 것이다.”
김흠춘이 앞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앞에 첨병대를 보냈지만 시야가 탁 트여서 3개 산성이 보인다. 산성과는 이제 15리(7km) 정도, 아직 백제군은 기척이 없다. 이쯤 되면 첨병이나 유격군을 보내 진로를 방해하는 것이 정상이다. 김흠춘의 옆을 따르던 부장(副將) 성진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산성을 비우지 않았을까요?”
“그럴 리가 있느냐?”
김흠춘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지금 나란히 속보로 전진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40대 중반으로 백제군과 수십 년 전장에서 만난 성진이 대답했다.
“계백의 기마군은 모두 왜에서 데려온 왜군입니다. 계백의 영지에서 조련시켜 데려왔다지만 훈련이 덜 되었는데 모릅니다.”
“용장 밑에 약졸은 없는 법, 적을 가볍게 보지 말라.”
김흠춘이 나무랐지만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북은 더 힘차게 울렸고 말발굽 소리는 지진이 일어난 것 같다. 그때 성진이 소리쳤다.
“백제군입니다!”
고개를 든 김흠춘이 앞쪽 산성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기마군을 보았다. 3개 산성에서 동시에 쏟아져 내려왔기 때문에 햇살에 번득이는 창날이 위압적이다.
“온다! 북을!”
성진이 소리치자 옆쪽 고수들이 세차게 북을 쳤다. 전투개시의 북이다. 그때 앞쪽을 응시하던 김흠춘이 소리쳤다.
“저놈들이 옆으로 비껴간다!”
숨을 들이켠 성진이 말 위에서 엉덩이를 들고 섰다. 과연 그렇다. 백제 기마군은 정면으로 닥쳐오는 것 같다가 옆으로 비껴 달리는 것이다. 거리가 4리(2km) 이상 떨어져 있어서 이쪽은 바라만 볼 뿐이다.
“도망치는가요?”
옆으로 다가온 아들 반굴이 물었기 때문에 김흠춘이 고개부터 저었다.
“아니다. 저놈들이 무력시위를 한다.”
그때 옆쪽에서 낮은 탄성이 울렸다. 보라. 이제는 흙먼지가 걷히면서 백제 기마군의 모습이 드러났다. 모두 붉은색 갑옷을 걸쳤다. 그래서 불덩이가 움직이는 것 같다. 3개 산성에서 쏟아져 나온 기마군은 직선으로 달려오다가 제각기 말머리를 틀어 옆으로 비껴가고 있다.
정연한 움직임이다. 백제 기마군이 황산벌 앞쪽을 붉은 불길로 가로막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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