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만난 작가] 운동화 이야기 - 윤영근(소설가)
법무사 김달호가 오전 근무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명품임이 분명한 양복에, 다이아가 박힌 핀을 꽂은 넥타이를 매고, 번쩍이는 구두를 신은 말쑥한 신사 하나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정작 김달호의 눈길이 머문 곳은 신사의 양복 깃에서 반짝이고 있는 지방의원 빼찌였다. 금으로 만든 것이 분명한 그것은 외출 전에 닦기라도 했는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기름을 발라 잘 빗어 넘긴 머리며 번들거리는 얼굴이, 명품으로 치장한 매무새와는 달리 천박한 끼가 줄줄 흘러 어찌 오셨느냐고 묻지도 않고 빤히 바라보는데, 신사가 손을 내밀었다.“오랫만이네, 달호.”그러나 신사는 달호가 손을 덥석 잡기에는 낯이 설었다. 그 쪽에서 이 쪽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부르며 아는 체를 해오는데도 그랬다.김달호가 유난히 번들거리는 신사의 오똑한 콧날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허허, 날 모르는군. 나 도상식일세. 자네와는 새터초등학교를 함께 다녔지 않은가? 꾀복쟁이 친구이기도 하고. 하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내가 서울로 이사를 갔으니까, 40년 만인가? 몰라볼만도 하지.”“자네가 도상식이란 말인가?”그제서야 김달호가 도상식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도상식의 오똑한 콧날이 이상했다. 원래 도상식은 콧등이 팍 가라앉은 납작코였다. 친구들에게 납작 돼지코라고 놀림을 받을 만큼 쭈그러진 코가 구멍은 또 하늘을 향하고 있어 비가 오면 빗물이 코로 들어갈 지경이었다. 김달호의 눈길이 코에 머물러 있는 것을 눈치 챈 도상식이 손가락으로 날씬한 콧날을 쓱 훑어 내렸다.“고쳤네. 건축업으로 돈을 좀 벌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것이 코높이기 수술이었네.”“그런가? 잘 했네. 인물이 훨씬 살아나는군. 앉게 앉아.”김달호가 손님용 의자를 밀어주며 이번에는 도상식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파리가 앉다가 미끄러져 허리를 다칠만큼 번들거리는 구두를 보자 김달호의 뇌리로 도상식의 다른 별명 하나가 떠올랐다.도상식은 납작 돼지코라는 별명말고도 운동화 도둑이라는 별명이 또 하나 있었다. 요즘이야 유명한 메이커의 운동화가 지천이지만, 40년 전만해도 운동화를 신은 아이는 한 반에서 서너 명이 될까 말까 할 만큼 귀한 것이었다.그 무렵 김달호네 반에서는 운동화 분실 사건이 유난히 잦았다. 그래봐야 일년에 서너 번이었지만, 운동화를 신은 아이가 몇 명 안 되었기 때문에 그것도 많은 편에 속했다. 그런데 새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가면 일주일이나 열흘이 지나면 틀림없이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판인데 부잣집 아이도 아닌 도상식은 늘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새 것을 신은 적은 없지만, 적당히 낡은 운동화는 늘 신고 다녔다. 어디서 새 것도 아닌 헌 운동화가 났냐고 물으면 외갓집 형이나 친척 형이 신다 물려준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도상식이 운동화 도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친구의 운동화를 훔쳐다가 적당히 흙도 바르고, 바닥에 문대어 닳은 흔적을 만들고, 집안에서 낡은 티가 날만큼 신다가 어느 날 불쑥 학교에 신고 나타나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그러나 도상식은 반 친구들의 새 운동화를 훔친 일을 한 번도 들키지도 않았으며, 그 일로 담임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 추궁을 당하지도 않았다. 다만 납작돼지코에 운동화도둑이라는 별명만 하나 더 얻었을 뿐이었다. 도상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이사를 갔다. 그것도 야반도주였다. 도상식의 아버지가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이 이웃에 몇 만원씩 빌려 쓴 기십만원의 빚을 남겨놓고 밤에 몸만 살그머니 빠져나간 것이었다. 논 몇 마지기와 밭 몇 뙈기, 그리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초가 한 칸은 마을 사람들이 모르게 이웃 동네 사람한테 팔아먹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돈을 빌려주었던 마을 사람들이 도상식의 집에 혹시 건질만한 것이 없는가하고 뒤늦게 찾아갔을 때에 마루 밑에 도상식이 신다 버린 낡은 운동화만 스무켤레 남짓 남아있었다.“이 운동화들도 다 훔친 것일 것이구만. 피는 못 속이는 것이라고, 그 애비에 그 자식이지 뭔가. 동냥치한테 떡 사주었다고 쳐야겠구먼. 생각하면 화병만 도질 것이니.”그렇게 도상식은 마을 사람들이나 김달호한테 까맣게 잊혀져 갔다. 아니, 어쩌다 가끔 비가 내리는 날이면 도상식의 납작돼지코가 떠올랐고, 새 운동화를 사 신을 때면 운동화 도둑 도상식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두어 해가 지나고 나자 그만이었다.그렇게 잊고 있었는데, 납작돼지코 운동화 도둑 도상식이 뾰족한 콧날에 명품 옷과 명품 구두로 치장하고 그 위에 지방의원 뺏지까지 달고 나타난 것이었다.“의원나리가 되셨군, 그래.”“공을 좀 들였지. 건설업으로 돈을 벌고 나서 한 십년간 푼돈을 들여 양로원이며 보육원이며 노인당같은 곳을 찾아다니며 텔레비전도 사주고, 라면도 차떼기로 떼다주고, 관광차를 대절하여 효도여행도 시켜주고 그랬지. 다들 내가 시의원에 출마하려고 그런다고 수군거렸네만, 임기가 두 번 지날 때까지 출마를 하지 않았지. 그러자 노인회장이며 보육원장이며 하는 사람들이 나를 어거지로 떠밀더군. 내 인기가 가장 높은 것을 안 당에서도 공천을 주겠다고 찾아오고. 그래서 못 이긴 체하고 출마를 했더니, 그냥 당선되더군. 덕분에 지방감은 장만을 했지 뭔가?”“지방감?”“아, 죽어 제사지낼 때 그냥 학생부군신위라고 쓰는 것 보다, 시의원신위라고 쓰는 것이 얼마나 품위가 있고 좋은가? 순전히 지방감을 장만하느라 공을 들였다니까. 십년이면 강산이 한번 변하는 세월이네만, 좋은 일을 한다고 칭찬도 듣고, 그 덕분에 시의원도 되고 했으니까, 손해 본 장사를 한 것은 아니지 뭔가, 허허허.”혼자 껄껄껄 웃던 도상식이 김달호의 구두를 내려다보다가 쇼핑백을 불쑥 내밀었다.“뭔가?”“구두일세. 아까 자네가 내 구두를 내려다 볼 때에 난 알았었네. 자네가 운동화 도둑이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나를 떠올린 걸. 이건 그때 내가 훔쳤던 자네 운동화 대신일세. 아마, 이 구두 한 켤레면 자네 운동화 오십켤레 값은 될 걸세. 이자까지 다 쳐서 받았다고 치게. 참, 자네 신발 사이즈가 어찌되는가?”“백육십오센치네만.”“그런가? 이건 자네한테 크겠군. 잠시만 기다리게 내 자네 발에 딱 맞는 걸로 바꾸어 줌세.”쇼핑백을 한 쪽으로 치운 도상식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여 백육십오센치짜리 구두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러자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운전기사가 다른 쇼핑백을 들고 왔다.“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헌데, 무슨 구두를 여러 켤레 가져왔는가?”김달호의 말에 도상식이 대답했다.“스무 켤레 쯤 가져왔네. 도둑맞은 사람은 잊었을지 모르네만, 정작 도둑질을 한 나는 잊을 수가 없었네. 제삿상 지방에 시의원이라고 써야할 사람이 운동화 도둑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가져갈 수는 없지 않은가? 다 돌려줄 걸세. 이제 난 자네 앞에서 운동화 도둑이 아닐세.”“알겠네. 자네가 성형수술로 납작돼지코를 면했듯이 운동화 도둑도 아닐세.”“고맙네. 이제야 마음이 홀가분하군.”도상식이 김달호의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그런데 어쩐지 도상식이 더 큰 도둑으로 보여 김달호의 기분은 소태를 씹은 것처럼 쓰디썼다. 윤 영 근 (소설가·한의사)전북 남원 출생경희대학교 한의대 졸원광대학교 대학원 졸문예지 월간문학 소설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국예총 남원지부장저서 - 남원항일운동사소설집 상쇠장편소설 동편제 상하장편소설 의열 윤봉길 상하장편소설 각설이의 노래 상하장편소설 평설 흥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