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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쌍릉 소왕릉에서 문자 없는 묘표석 2점 발견

백제 무왕(재위 600641)에 얽힌 고대 설화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는 익산 쌍릉(사적 제87호) 소왕릉에서 문자를 새기지 않은 길이 1m가 넘는 묘표석(墓表石) 2점이 발견됐다. 백제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짐작되는 두 유물은 각각 석실 앞과 봉분에서 나타났고, 모양새는 전혀 달랐으며 묘표석에는 명문(銘文금석에 새긴 글자)이 없었다. 하지만 무왕 무덤으로 알려진 대왕릉에서 인골이 담긴 상자가 나온 것과 달리 소왕릉에서는 피장자를 추정할 만한 단서가 확인되지 않았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과 익산시(시장 정헌율),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소장 최완규)는 20일 오후 2시 국내에 전례가 없는 이번 무자비(無字碑) 형태의 묘표석 두 점 발견과 관련해 발굴현장 공개 및 설명회를 가질 예정이다. 왕릉급 고분에서 국내 최초로 이번에 발견된 두 종류의 묘표석은 석비(石碑)형과 석주(石柱)형이다. 석비형은 일반적인 비석과 유사한 형태로 석실 입구에서 약 1미터 떨어진 지점에 약간 비스듬하게 세워진 채로 발견됐다. 크기는 길이 125㎝, 너비 77㎝, 두께 13㎝이며, 석실을 향하고 있는 전면에는 매우 정교하게 가공되었고, 그 뒷면은 약간 볼록한 형태다. 석주형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봉토 내에서 뉘어진 상태로 발견되어 원래 위치인지는 불분명하다. 길이 110㎝, 너비 56㎝의 기둥모양으로 상부는 둥글게 가공되었고, 몸체는 둥근 사각형 형태다. 이들 두 묘표석의 가장 큰 특징은 문자가 없는 무자비 형태다는 것이다. 참고로 석주형 묘표석과 비슷한 예는 중국 만주 집안(集安) 지역의 태왕릉 부근에 있는 고구려 봉토석실분인 우산하(禹山下) 1080호의 봉토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발굴조사단은 이번에 소왕릉 규모와 축조 기법도 파악했다. 봉분은 지름 12m높이 2.7m이며, 암갈색 점질토와 적갈색 사질점토를 시루떡처럼 번갈아 쌓아 올린 판축기법을 사용했다. 이같은 기법은 지난해 조사한 대왕릉에서도 확인됐다. 구조는 백제 사비도읍기(538660)의 전형적인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돌방무덤)으로, 석실 단면은 육각형이다. 석실 길이는 340㎝폭 128㎝높이 176㎝로, 대왕릉과 비교하면 길이너비높이가 모두 약 50㎝씩 짧다. 다만 측벽 2매, 바닥석 3매, 덮개돌 2매, 후벽 1매, 고임석 1매 구조 짜임새와 석재를 치밀하게 가공한 점은 대왕릉과 동일하며, 석실 중앙에 관대(棺臺관을 얹어놓는 넓은 받침)를 둔 점도 같다. 관대는 길이 242㎝폭 62㎝높이 18㎝로 대왕릉보다 작다. 석실 천장 고임석에서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만든 길이 68㎝높이 45㎝인 도굴 구덩이가 나왔다. 고분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에 이르는 연도(羨道)는 짧은 편이며, 폐쇄석은 대왕릉처럼 두 겹으로 설치했다. 남쪽으로 뻗은 무덤길인 묘도(墓道무덤의 입구에서부터 시체를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는 최대 너비 6m, 최대 깊이 3m로 조사됐다. 현재까지 드러난 묘도 길이는 약 10m다. 연구소 최 소장은 묘도는 흙을 쌓은 뒤 되파기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묘도부 끝부분에는 묘역을 표시하기 위해 다듬은 석재를 반원형으로 두른 듯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발굴조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큰 관심을 끈 피장자 추정 단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해 대왕릉 조사에서는 관대 위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발견됐고, 사망 시점이 620659년이고 60대 남성의 뼈라는 분석 결과가 알려지면서 641년 세상을 떠난 무왕 무덤이라는 견해에 힘이 실렸다. 최 소장은 소왕릉 주인이 선화공주인지,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영기에 등장하는 사택적덕 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한편, 익산 쌍릉은 거리 180m 사이에 두고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구성됐는데 대왕릉은 익산에 미륵사라는 거대한 사찰을 세운 무왕, 소왕릉은 무왕 비인 선화공주가 각각 묻혔다고 알려졌다.

  • 문화재·학술
  • 엄철호
  • 2019.09.19 16:19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용비어천가

지금 방탄소년단이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사로잡는다면,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로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자 했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음악을 역할을 중요시했다. 노래가사에 반영된 백성들의 마음과 사회의 모습을 알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노래들을 수집하여 민심民心을 살폈고, 정치적 소문을 노래 가사로 지어 퍼트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애국가愛國歌를 들으며 마음을 굳게 다잡은 것, 현재 월드컵, 올림픽 등을 보며 응원가를 부르며 하나가 되고, 애국가를 들으며 숙연해지는 것도 노래가 가진 힘 덕분이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농업서인 농사직설農事直設, 우리나라의 하늘에 맞는 시간과 달력을 담은 역법서 칠정산七政算, 우리나라 약재 정보를 담은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을 만드는 등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업적은 남겼다. 세종대왕의 눈부신 업적 중에서도 가장 비밀리에 진행되고 조심스러웠던 프로젝트가 우리말, 훈민정음의 창제이다. 당시 세종대왕은 두 가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훈민정음을 반대한 신하들을 설득하는 것과 조선이 고려를 뒤엎고 세운 나라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훈민정음으로 조선 왕조의 창업을 칭송한 노래인 용비어천가의 가사를 쓰는 것을 선택했다. 왕이 되어 날아올라(龍飛) 하늘의 명에 따른다(御天)는 용비어천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대왕은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을 따른 것임을 분명하게 하면서 조선 건국이 정당하다는 내용은 노래 가사에 가득 담아두었다. 백성들은 한글가사로 용비어천가 음악을 들으면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학자들은 신성한 내용을 담아 백성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훈민정음의 반포를 끝까지 반대하지 못하였다. 6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육룡이 나르샤,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등의 용비어천가 속의 내용이 방송에도 사용되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세종대왕의 음악을 활용한 전략이 잘 맞아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덕분에 조선은 국가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고, 한글은 생명력을 얻어 우리의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국립전주박물관 상설전시실 역사실에서 훈민정음으로 지은 첫 번째 작품이자 세종대왕의 깊은 고민이 담긴 용비어천가를 만날 수 있다. /이기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9.09.16 18:35

‘왕의 고장 전북’, 지역문화재 도민 속으로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조선 태조어진과 익산 왕궁리유적 등이 문화콘텐츠로 활용된다. 문화재청은 2020년 지역문화재 활용 사업으로 문화재 야행, 생생문화재 등 총 386선을 선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이 사업은 지역에 있는 문화재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개발해 지역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늘리고 지역경제 활성화 및 고용 창출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됐다. 전북지역에선 생생문화재 분야로 조선 태조어진경기전(풍패지향 전주, 태조어진을 뫼시다), 익산 쌍릉미륵사지왕궁리유적(백제왕도 익산여행), 정읍 황토현 전적전봉준 유적(다시 피는 녹두꽃), 남원 황산대첩비지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운봉고원 왕조를 깨우다) 등 총 13개 사업이 선정됐다. 문화재야행에선 전주군산익산지역이 뽑혔다. 전통산사 부문에선 군산 동국사, 남원 실상사, 김제 금산사, 완주 송광사, 고창 선운사 등 5곳이 포함됐다. 향교서원으로는 전주향교와 정읍 무성서원, 고택종갓집 활용 부문에선 김명관 고택, 몽심재, 이웅재 고가가 선정됐다. 지역문화재 활용사업은 국민의 문화재 향유 기회 확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상당 부분 이바지해왔다. 2018년 사업별 점검 결과, 전국의 문화재야행 프로그램에 약 303만명의 관람객이 참여한 것으로 조사됐다. 생산 유발과 부가가치 등 경제적 파급 효과는 총 2061억원에 달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유산이 핵심 관광자원으로 지역의 문화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맞춤형 활용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하겠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최명국
  • 2019.09.15 17:38

‘전북의 선비’ 석정 이정직의 학문과 예술세계 엿보다

천문, 지리, 의학, 수학, 서화 등 다양한 분야에 두루 통달한 유학자, 석정 이정직. 그를 가리키는 여러 수식어 중 통유(通儒)는 다방면에 능통했던 그의 인재상을 집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매천 황현은 이정직을 두고 시, 문, 서화, 천문역법, 음악, 산수,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사농공상 및 언변까지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통달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니, 앞으로 이삼백년 사이에 없을 희귀한 인재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학문과 예술로 후학을 기르는 한편, 배려와 나눔을 몸소 실천했던 조선시대 선비 이정직의 면모를 조명하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전주박물관(관장 천진기, 이하 박물관)이 10일부터 오는 11월 24일까지 박물관 내 시민갤러리에서 선비, 전북 서화계를 이끌다라는 주제로 석정 이정직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전반을 살았던 전북지역의 선비 이정직의 예술 활동을 돌아보고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글씨와 회화, 그리고 후학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는 △첩학 연구의 대가 △조선의 마지막 시서화삼절 △지속되는 서화의 맥 등 3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조선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전통을 배우고 익혀 후학에게 전했던 법첩 연구의 1인자로서의 면모를 조명한다. 일찍이 이정직은 중국 서예의 맥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에 그는 중국과 조선의 명필가가 쓴 글씨를 수없이 임서하면서 골자를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2부는 조선의 마지막 시서화삼절로서 일구어간 회화작품을 살펴본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괴이한 바위를 주로 그린 이정직은 필력과 상징성이 담긴 깊은 내공의 문인화를 남겼다. 글씨를 쓰던 붓과 먹의 느낌이 그림으로 이어지니, 이러한 경지를 두고 서화일치라고 불렀다. 3부에서는 조선에서 근대로 지속되는 서화의 맥을 알아본다. 이정직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사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국적으로 성장했는데, 이들은 스승과 함께 호남 서단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학문과 예술의 근대를 이끌었다. 김제를 기반으로 서예와 회화의 맥을 잇고, 호남 유학을 계승했던 후학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을 기획한 민길홍 학예연구사는 이정직은 무척 가난했고 스승이 없었지만 홀로 다양한 학문과 예술을 익혀 자신만의 학문세계를 구축했다며 이정직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수많은 인재가 김제로 모였고, 후학들은 스승 이정직이 보여준 학문과 예술을 따라 전북에서 근대를 열었다고 설명했다. 10월 11일과 12일에는 이번 특별전과 연계한 학술강연회가 열린다. 11일 구사회 선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근대 계몽기 석정 이정직의 수학과정과 학예관을, 유순영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전북의 선비, 석정 이정직의 회화를 주제로 강연한다. 12일에는 진준현 전 서울대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석정 이정직의 서화론을 설명하고 이어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이 첩학의 대가로서의 이정직을 재조명한다.

  • 문화재·학술
  • 김태경
  • 2019.09.09 17:54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기명절지도

서양에 정물화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기명절지화가 있었다. 학식 있는 문인의 품격을 나타내는 고동기古銅器와 부귀, 장수, 다남 등 길상적인 의미를 가지는 꽃과 과일, 괴석怪石 등을 함께 그려서 궁중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수요층을 가지고 활발히 제작되었다. 김용준金瑢俊(1904~1967)은 「오원일사吾園軼事」에서 그때까지 기명과 절지는 별로 그리는 화가가 없었던 것인데, 조선 화계에 절지, 기완 등 유類를 전문으로 보급시켜 놓은 것도 장승업張承業(18431897년)이 비롯하였다.라고 하였다. 장승업은 중국의 여러 그림을 소화하여 기명절지를 하나의 유형으로 창안하여 그리기 시작한 것인데, 붓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호방하고 대담한 필치, 지그재그로 기물이 가득 찬 구도 등은 장승업만의 특징이다. 이렇게 시작한 기명절지화는 안중식과 조석진을 거치며 20세기 초 한국 화단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이 그림은 2폭 가리개 형태의 병풍으로 그보다 10살 아래인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의 작품으로, 오른쪽에는 국화를 소재로 한 시詩가 적혀 있고, 위에서부터 국화, 향로, 아래에 무, 호박, 배추가 그려져 있다. 왼쪽에는 고색이 만연하다는 뜻의 고색임리古色淋漓라는 제목이 적혀 있고 소나무 분재, 벼루, 모란 꽃가지 등을 그렸으며, 정미년(1907년) 가평절嘉平節(12월 말)에 조석진이 그렸다는 제작시기와 그의 도장이 찍혀 있다. 각 소재의 용도와 의미가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지 않은 채 자연스럽고 보기 좋게 화면에 배열되는 것은 기명절지화 화면 구성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 그림 역시 지나치게 많은 물건들을 늘어놓지 않아 답답하지 않고, 필력이 뛰어난 화가의 손을 통해 단정한 먹선과 은은한 채색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매우 우아한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9.09.09 17:51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채용신이 그린 ‘무이구곡도’

중국에서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했던 복건성 무이산武夷山의 아홉굽이를 그린 그림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주자朱子라 불리었던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1130~1200)가 이곳에 머물면서 강론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한다. 무이구곡도는 직접 가보지 못한 조선시대 문인들이 경치를 간접적으로나마 감상하기 위해 그려졌으며 또한, 주희의 학문적 공간을 볼 수 있고 그를 숭상하는 의미를 담아 그려졌던 그림이기도 하다. 조선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6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도 세상에 전하는 무이도武夷圖는 꽤 많다고 기록에 남긴 바 있다. 그 후 다양한 변모를 보이며 조선말기까지 꾸준하게 그려졌다. 고종대 어진御眞 화사畵師 채용신도 여러 점의 무이구곡도를 남겼다. 그는 고종의 어진[초상]을 그렸던 인물로, 1905년 전북으로 내려와 우국지사를 포함하여 지역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 외에도 산수, 꽃과 새 등도 관심을 가지고 그렸다. 현재 기록과 작품으로 전하는 채용신의 무이구곡도는 총7점 정도 알려져 있어, 무이구곡 주제를 가장 많이 그린 화가로 손꼽힌다.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실에 현재 전시된 1915년의 제작연대가 있는 채용신필 <무이구곡도>는 총 10폭에 연속해서 펼쳐진 무이산의 경치와, 매 폭 상단에 적힌 무이도가武夷圖歌가 서로 어우러지며, 각 봉우리마다, 건물마다 친절하게 지명을 적어놓은 것도 특징이다. 제5폭에는 주희가 머물렀던 무이정사武夷精舍가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상단의 무이도가는 글자를 좌우 거꾸로 적어 매우 흥미롭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글자를 좌우 반전시켜 쓰기 위해 그는 왼손을 사용했을까? 글자를 좌우 거꾸로 쓰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왜 무이구곡도에만 저렇게 썼을까? 여러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우리나라 그림에서 유례가 없으며 왜 이렇게 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9.09.02 18:17

‘임실필봉농악’·‘이리농악’ 이어 ‘남원농악’,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남원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2일 문화재청은 남원농악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남원농악보존회를 보유단체로 인정하기로 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8호 남원농악은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일원에서 전승되는 농악으로 호남 좌도농악의 성격과 특징을 지녔다. 남원농악은 들당산굿, 마당밟이, 판굿으로 구성된 마을굿 특징과 더불어 걸립(乞粒)굿의 성격이 반영돼 있으며 특히 판굿의 후반부인 뒷굿 구성이 도둑잽이와 재능기(개인놀이)로 구성돼 특이성을 보인다. 더불어 호남 좌도농악에서만 사용하는 부들상모(상모 끝에 매다는 털 장식이 부들부들하다고 붙은 이름)는 전승자들이 현재에도 직접 제작해 연행하고 있다. 또한 남원농악보존회(대표 류명철)는 전승 기량, 전승 기반, 전승 의지 등이 탁월하다고 평가받아 남원농악의 보유단체로 인정됐다. 이번 신규종목 지정으로 농악 분야의 국가무형문화재는 총 8개가 됐으며, 이로써 전북은 남원농악과 임실필봉농악, 이리농악 등 국가무형문화재 3건을 보유하게 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앞으로도 국가무형문화재의 신규종목 지정을 통해 보호 대상을 확대하여 우리의 전통문화가 후세에 전승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천경석
  • 2019.09.02 18:10

진안 성수면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요지, 국가사적 지정

진안군은 지난 2016년 12월 전라북도 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됐던 성수면 도통리 청자요지(鎭安 聖壽面 道通里 靑瓷窯址)가 2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51호로 지정, 고시됐다고 밝혔다. 도통리 청자요지는 중평(中坪)마을에 자리하며 성수면과 백운면을 가르는 내동산 서북쪽의 산줄기 끝자락에 위치한다. 중평마을은 곳곳에서 청자가 발굴되고 있다. 마을 일부에는 대규모의 요도구(窯道具:도자기를 구울 때 사용되는 도구) 퇴적층이 아직 남아 있으며 청자와 갑발(匣鉢:도자기를 구울 때 청자를 덮는 큰 그릇) 조각 등이 넓게 분포, 발굴되고 있다. 도통리 청자요지는 지난 2013년 최초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2017년까지 총 5차례의 시발굴 조사 끝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다만, 요지의 존재는 지표조사 등을 통해 시발굴 조사 전 이미 알려져 있던 상태다. 발굴조사팀에 따르면 도통리 청자 가마터는 10~11세기를 아우르는 초기청자 생산지다. 한반도에서 초기 청자를 제작했던 벽돌가마(전축요塼築窯)와 그 다음 시기의 청자를 만들었던 진흙가마(토축요土築窯)가 모두 확인됐다. 가마 축조 양식의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희귀한 사적이며 벽돌가마에서 진흙가마로 변천하는 초기청자 가마의 전환기적 양상이 잘 나타나고 있다. 군 관계자에 따르면 조사된 벽돌진흙 가마는 총 길이 43m로 호남지역 최대 규모다. 처음엔 가마의 벽체를 벽돌로 축조하였다가 나중엔 내벽을 진흙갑발로 개보수하고 도자기 제작을 이어간 것으로 조사됐다. 또 다른 형태인 진흙가마는 총 길이 13.4m이며 벽돌 없이 진흙과 갑발로만 구축돼 있다. 가마 내부와 대규모 폐기장으로 추정되는 곳에선 다양한 초기청자(해무리굽완잔잔받침주전자꽃무늬 접시 등)와 요도구(벽돌갑발 등)가 발견됐다. 또 △큰대(大)자 등의 명문이 새겨진 청자 △고누놀이(옛 오락게임의 하나)가 새겨진 갑발 △청자가마의 배연공(排煙孔:가마 내부의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으로 추정되는 벽체 조각 등도 출토됐다. 도통리 청자요지는 초기청자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군은 문화재청 및 전라북도와 협력해 도통리 청자 가마터를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고 활용할 방침이다.

  • 문화재·학술
  • 국승호
  • 2019.09.02 16:32

전주시, 후백제 역사문화 복원 위한 학회 창립

전주시가 1100여 년 전 후백제 역사와 문화를 더욱 체계적으로 복원하기 위한 학회를 만들었다. 1일 전주시에 따르면 전주에 도읍했던 후백제(892~936)의 역사와 문화를 밝힐 학술연구단체인 후백제학회가 지난달 30일 시청 회의실에서 김승수 전주시장과 천진기 국립전주박물관장, 학회 창립발기인, 후백제연구회 회원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가졌다. 교수와 문화유산전문가, 박물관장, 학예사 등으로 구성된 후백제학회는 이날 송화섭 교수(중앙대학교)를 초대회장으로 선출하고 향후 후백제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학술대회와 시민강좌 등 다양한 학술활동 펼치기로 했다. 특히 국립전주박물관은 개관 30주년을 맞는 내년 전주시와 상주시, 후백제학회와 함께 특별전을 개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는 후백제학회를 통해 학술적으로 후백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구축하고, 올바른 역사 가치관 공유를 통해 전주시민의 자존감도 높일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때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후백제는 고려에 멸망당한 뒤 잊히고 왜곡되면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고, 학술적 성과 역시 많지 않았다. 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후백제 역사문화 재조명 사업을 전개했으며, 국립전주박물관과 전북대학교 박물관, 전주문화유산연구원 등 여러 기관에서는 후백제 관련 도성절터산성 등 다양한 유적을 발굴했다. 전북지역에서 활동하는 뜻있는 시민들과 학자들도 지난 2015년부터 후백제학회 전신이었던된 후백제연구회를 결성, 후백제유적 답사와 강연회 개최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송화섭 중앙대학교 교수는 후백제학회는 후백제 관련 문헌자료와 문화유산을 종합적으로 살펴, 후백제 역사와 문화의 본 모습을 밝히고 후백제학을 정립하는 것이 목표라며 후백제 역사문화와 학회 활동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린다고 초대회장 선출 소감을 밝혔다.

  • 문화재·학술
  • 백세종
  • 2019.09.01 18:20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완주 은하리 돌방무덤

고고학적 연구자료 중에서 무덤은 과거 사회의 매장 양상과 장례 절차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체계나 사회구조와 식문화 등 세밀한 생활양상의 전반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완주 봉동읍 은하리에서는 백제시대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2004년 2월 지역 주민이 선산에서 모친의 묘소를 조성하던 중 무덤의 천장돌과 토기 뚜껑 1점을 발견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굴식돌방무덤 1기와 2기의 기와널무덤이 확인되었는데, 뚜껑이 있는 완과 금동제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굴식돌방무덤에서 4개체의 인골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수습된 인골은 머리와 다리 등 뼈의 일부만이 수습되었는데, 1차적으로 다른 곳에서 장례를 지낸 후 일부를 추려서 2차적으로 묻은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 체질인류학, 생물학, 생물정보학 등의 분야에서 각각 분석해 본 결과 4개의 인골은 각각 2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로 밝혀졌다. 남녀 한 쌍은 모계를 통한 혈연관계에 있고, 나머지 둘은 모계로는 어느 인골과도 친연관계가 없음이 드러났다. 아마 남매 관계에 있는 인물들과 그 배우자들이 시차를 두고 차례로 매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충남의 당진 우두리 유적에서는 이와 유사한 시기로 추정되는 인골이 조사되었다. 이 인골들과 비교해 본 결과 은하리 무덤주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더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성 단백질은 거의 섭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반면, 당진 우두리 유적에 묻힌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양의 동물성 단백질을 해양성 어패류를 중심으로 섭취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많은 양의 단백질을 섭취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러 사회적 규범이나 관습에 의해 달랐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는 6세기 백제 사회 고위층 내에 깊숙이 퍼져있던 살생을 금하는 불교적 규범에 의한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완주 은하리 굴식돌방무덤은 웅진기 백제 사회의 가족제도와 장례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보여주고 있으며, 국립전주박물관 특별전 오로지 오롯한 고을, 완주(2019.6.17.~9.15.)에서 자세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김왕국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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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6 16:15

전북 무형문화재 ‘총출동’…풍류로 물든 전주 한옥마을

전북지역 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자들이 전주한옥마을에 총출동했다. 지난 20일부터 24일까지 전주 경기전 옆 광장과 어진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는 新(신)바람을 주제로 제2회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한마당 축제가 펼쳐졌다. 이번 축제는 전북무형문화재연합회와 전북경제통상진흥원이 주최주관했으며 전라북도가 후원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북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의 공연과 전시를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도록 꾸며졌다. 예능분야에는 22개 종목(단체 4팀, 개인 18명)의 공연이 열렸으며 기능분야에는 23개 종목(30명 55개 작품)의 전시를 진행했다. 20일부터 24일까지 어진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5일간 진행한 무형문화재 기능전시에서는 우리 전통공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소목, 악기, 옻칠, 목가구, 침선, 단청, 탱화, 사기, 종이 등 전북 무형문화재 보유자 30명이 출품한 55개 작품을 선보였다. 23일과 24일 양일간 전주 경기전 앞 광장에서 펼쳐진 무형문화재 예능공연에서는 전주기접놀이, 고창농악, 임실필봉농악 등 신명나는 굿마당이 펼쳐졌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23일 저녁, 외국인 관광객들은 공연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오랫동안 자리에 머물렀고, 시민들도 경기전 광장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과 함께 전주로 여행을 왔다는 한 관광객은 한옥마을 구경을 왔다가 우연히 농악공연까지 보게 돼 기분이 좋다면서 앞으로도 무형문화재가 잘 보존돼서 어린 아이들도 우리의 전통을 많이 보고 자랐으면 한다고 이야기했다. 또 판소리 심청가춘향가적벽가수궁가흥보가, 시조창, 가야금병창 등 구성진 소리 공연도 이어졌다. 전라삼현승무, 전라삼현육각, 호남넋풀이굿, 호남살풀이춤, 예기무, 수건춤 무대에서는 유려한 춤사위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번 축제를 주최주관한 전북무형문화재연합회 양진성 회장은 옛 선조들이 남겨주신 우리 전통문화의 정신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지향점을 일깨워주는 자산이라면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자들이 축제를 통해 건강한 전통문화 가치를 발전시키고 문화재의 계승이라는 사회적 책임에 공감할 수 있는 자리가 됐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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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경
  • 2019.08.25 16:41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청자상감동채연화당초문잔

소담한 느낌의 청자 잔이다. 이 잔은 살짝 내만한 구연에 측면은 곡선으로 아름답게 떨어진다. 청자의 바닥에는 마치 참깨 같은 규석을 받쳐 정성스럽게 구웠다. 이러한 잔은 차 또는 술을 담아 마셨을 것이다. 고려는 차를 마시고 즐겼던 차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에서는 왕실 중심의 행사에서 차를 준비하고 의례적인 일을 맡는 다방(茶房)을 운영하였다. 다방에서는 각종 다레(茶禮)를 주관하였다. 또한 고려는 차의 생산을 전담하는 다소(多所)를 운영하였다. 수도 개경에는 차를 마시는 다점(茶店)이 있었다. 이 곳은 차도 마시고 쉬어가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1124년에 쓴 <宣和奉使高麗圖經>에도 차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권32 다조(茶俎)에서 근래에 와서는 고려인들도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더욱 차 끓이는 용기를 만든다. 금화오잔(金花烏盞), 비색소구(翡色小甌), 은로탕정(銀爐湯鼎) 등은 모두 중국의 모양과 규격을 흉내 낸 것들이다.라고 하여 고려 중기, 고려인들도 차를 보편적으로 마셨으며, 찻그릇으로 금화오잔과 비색소구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비색소구는 비색의 작은 차를 마시는 청자 잔으로 추정되며 아마 이러한 형태의 잔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이 청자 잔은 푸른색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안쪽에 표현된 무늬가 주목된다. 연꽃과 당초무늬가 잘 어우러졌는데, 연꽃잎을 보면 보기 드문 붉은 칠이 되어 있다. 이처럼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청자를 동화(銅畫)청자 또는 동채(銅彩)청자라고 한다. 동화청자는 산화동(酸化銅)의 안료로 그리고자 하는 부분에 칠하고 유약을 입힌 다음 환원소성을 한다. 이때 번조 조건이 알맞으면 이와 같은 붉은색으로 발색이 된다. 구리 안료는 높은 온도에서 쉽게 증발해 버리기 때문에 높은 온도에서 굽는 자기에 붉은 구리 안료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화청자는 중국에도 예가 없어 고려인들이 청자에 창안한 창의성이 돋보이는 기법이다. 푸른색의 유약과 대비되는 강렬한 붉은색 때문에 무늬 중 강조하고 싶은 곳에 부분적으로 쓰이며 이는 무한한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전라북도 부안군 유천리 청자 가마터에서 동화 또는 동채기법으로 붉게 발색된 청자편들이 발견되어 그 생산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잔에 맑은 술이나 차를 담았을 때 그 안으로 붉은 연꽃이 띄워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고려인들의 미감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잔에 붉은색을 넣어 음료의 맛과 그릇이 주는 멋을 조화롭게 구사한 것이다. 작은 잔에 담긴 그들의 애정과 미감에 감탄할 따름이다. /서유리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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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19 17:15

'양수생 홍패' 고려시대 과거 합격증…가문의 영예

순창 동계면 구미마을에는 600년이 넘도록 한 곳을 지킨 남원 양씨의 종갓집이 있다. 1960년 구미초등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학생 모두가 남원 양씨였을 정도로, 남원 양씨는 전라북도에서 중요한 가문의 하나이다.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실에는 남원 양씨의 보물이자 우리나라의 보물인 양수생 홍패(楊首生 紅牌)(보물 제725호)가 전시되어 있다. 600년의 세월을 간직한 양수생의 과거합격증인 양수생 홍패는 우리를 고려시대의 역사 현장으로 이끌고 간다. 양수생(楊首生)의 아버지 양이시(楊以時, 미상~1377년)는 1353년(공민왕 2)에 생원시에 장원, 1355년(공민왕 4)에 문과에 합격하며 가문을 번창시켰다. 그는 국자감, 집현전 등에서 활동하고 당시 석학인 이색(李穡, 1328~1396년)과 교유하는 등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관리였다. 양수생도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1376년(우왕 2)에 문과에 합격하여 집현전 제학으로 활동했다.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남원 양씨의 보물이 언제, 어떻게 고향이 전라북도로 내려오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양수생의 처 이씨 부인의 굳은 결심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양수생이 과거에 합격한 지 3년 뒤인 1379년, 집안은 큰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 아버지 양이시, 아들 양수생이 한 해에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이씨 부인은 아들 양사보(楊思輔, 1377년~미상)를 임신하고 있었다. 친정 부모님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혼자된 딸이 안쓰러워 다른 집안에 시집갈 것을 권유했지만, 이씨 부인은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며 시아버지와 남편의 과거 합격증인 홍패 2점과 족보를 가지고 남편의 고향 남원으로 내려왔다. 얼마 후 왜구 아지발도가 쳐들어와 이씨 부인은 아들 양사보를 데리고 순창으로 피난하여 터를 잡았고, 현재까지도 그 후손들이 머물고 있다. 남원 양씨는 고려의 수도에서 순창으로 터전을 옮겼지만 조선시대에 과거 합격자 30여 명을 배출하는 등 명문가로서의 면모를 유지했다. 이번 여름과 가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전라북도의 보물 양수생 홍패를 만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한 순창 구미마을을 둘러보길 권한다. /이기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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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12 15:42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마한과 백제의 교류 말해주는 ‘흑색마연토기’

흑색마연기법은 백제 한성기 토기 제작기술 중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이 기법은 토기를 소성할 때 흑연을 이용하여 검은 색을 입히고 표면을 매끄럽게 하여 광택이 나게 한다. 일종의 위세품(威勢品)으로서 특정 계층만이 사용하면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 주는 토기로 알려져 있다. 이 토기는 고대 삼국 중 백제 지역에서 발달하였는데,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처음 발굴되면서 주목되었으며, 백제의 국가 성립 시점과 과정을 밝히는 열쇠로서 많이 연구되었다. 지금까지 경기 화성 석우리 먹실, 용인 신갈동, 강원도 화천 원천리, 충남 천안 용원리, 서산 해미 기지리, 공주 수촌리 등 백제 중앙의 입장에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호남 지역의 경우에는 완주 상운리 무덤 유적과 용흥리 집자리 유적을 비롯하여 고창 만동, 함평 예덕리 만가촌 유적에서 확인된 사례가 있다. 완주 상운리와 용흥리에서는 흑색마연기법을 모방한 토기들이 일부 발견되었는데, 그 기종은 한성백제 중앙의 양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마연기법의 수준도 다소 미흡한 편이다. 한편 상운리 유적 나지구 3호 분구 1호 나무널무덤에서 출토된 곧은 입 항아리는 어깨부분에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볼 때 백제 중앙에서 보이는 토기와 형태와 기법이 매우 유사하다. 아마 상운리의 마한 사람들이 백제 중앙 지역에서 이와 같은 토기 제작 기술을 배우고 와서 만들었거나 직접 가지고 들여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이 토기의 존재는 당시 상운리 마한 사람들과 백제 사람들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완주 지역의 흑색마연토기들은 국립전주박물관 특별전 오로지 오롯한 고을, 완주(6.18.~ 9.15.)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위세품: 소유한 사람의 권력과 경제력을 대변해주는 물건으로서, 삼국시대에는 금관, 금동제 신발, 장식된 둥근 고리 칼 등과 함께 중국제 청자, 흑색마연토기 등이 있다. /김왕국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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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05 17:58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노인들의 모임 ‘십로계첩(十老契帖)’

문화재 지정 제도는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재를 엄격한 규제를 통하여 항구적으로 보존하고자 하는 제도다. 또한 국립박물관은 문화재 기탁 제도를 통해, 박물관 전시 및 연구에 활용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개인 소장 지정문화재 혹은 지정문화재급 유물을 보관 관리하고 있다. 고령(高靈) 신씨(申氏) 종중(宗中)에서 전주박물관에 기탁한 십로계첩(十老契帖)(전북유형문화재 제142호)은 신말주(申末舟)(1429~1503)가 70세가 넘은 나이에 가까운 벗들과의 만남을 기록한 그림이다. 신말주는 역사 속에서 지조 높은 선비이자 은사(恩師)의 모습으로 부각된다. 26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456년(세조2년)에 수양대군이 조카였던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불만을 품고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두 임금을 섬김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면서 은거생활을 했다. 1476년, 47세때 전주 부윤으로 일정 기간 관직에 몸담았으나, 말년에는 다시 은거를 하였으니, 대부분의 생애를 관직과 상관없는 처사處士로 보냈다. 말년에 은거하던 중 신말주가 70이 넘은 나이에 이윤철(李允哲), 안정(安正) 등 가까운 벗들과 계(契)를 맺고 십로계(十老契)라 이름하고, 10개의 첩(帖)을 만들어 각각 1개씩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십로계첩이다. 10명은 생년월일 순으로 서열을 메기고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주관하였다. 모임을 여는 순서가 한 바퀴 돌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계첩에는 10명의 인물을 각각 채색을 곁들이지 않고 선묘(線描)만으로 묘사하여 그린 후, 각 개인의 생활과 인격, 사상 등을 함께 기록하였다. 이후 18세기에 김홍도가 모사한 십로도상첩(十老圖像帖)(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이 전하여 흥미로운 비교가 된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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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29 17:27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청자철화철백화국화문합

동그랗고 앙증맞은 청자 합이다. 합은 뚜껑과 몸체가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기종을 말하는 것으로 무언가를 담아 보관했던 용도로 쓰였다. 손바닥 보다 작은 이 합은 고려시대 여인들이 화장용품을 담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단연 뚜껑에 피어있는 검고 하얀 꽃이다. 언뜻 흑백의 향연을 대표하는 상감象嵌청자 같지만 자세히 보면 상감기법과는 전혀 다르다. 기면을 파서 흙을 넣고 깎아 무늬를 나타내는 상감과는 달리 이 청자는 기면 위에 그저 검토 흰 안료를 붓에 찍어 그렸을 뿐이다. 그래서 자유롭고 경쾌하다. 이러한 종류의 청자를 철화청자, 또 이처럼 흰색 안료까지 베풀어진 청자를 철백화청자라고 한다. 철화청자는 산화철(Fe2O3)이 포함된 흙을 물에 풀어 만든 안료로 문양을 그린 뒤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를 말한다. 즉 유약 아래 안료가 있는 유하채釉下彩 자기이다. 철화안료로 도자기 표면에 무늬를 그린 경우는 철로 그렸다고 해서 철화鐵畫라고 하며 일부 또는 전체에 칠해버린 경우는 철채鐵彩라고 한다. 반면 흰 백토를 발라 유약을 입힌 후 굽게 되면 하얗게 무늬가 형성되는데 이는 하얗게 그렸다고 하여 백화白畫청자라고 한다. 백화기법은 철화기법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철백화청자라고 한다. 백화기법은 음각양각상감 기법으로 표현한 청자의 보조 무늬로 선이나 점을 나타내는 데 이용하거나, 철화기법과 함께 중심이 되는 무늬 전체를 표현하는 데 쓰인다. 이러한 철화청자 또는 철백화청자는 맑고 푸른빛을 띠는 비색청자나 푸르지만 회색빛이 도는 상감청자에 비해서 짙은 색을 띤 녹갈색, 녹청색, 황갈색 계열이 주를 이룬다. 철화청자 무늬는 사물의 특징을 간결하게 묘사한 예가 많아 섬세한 곡선과 비취색 등을 특징으로 꼽는 상형청자나 상감청자와는 다른 미감을 보인다. 이 작품 역시 간결하면서도 활기찬 국화꽃을 표현하였다. 국화의 특징인 여러장의 꽃잎은 백토로 도톰하게 올렸고 세 개로 갈라진 잎은 철화안료로 검게 그렸다. 또한 측면에는 자유분방한 필치가 느껴지는 초화문을 넣었다. 철은 구하기 쉽고 전국 어디서든 채취가 가능한 안료였다. 따라서 고려청자의 꾸미는 방법으로 자주 애용되었다. 동시에 흑백이 대조되는 색이 드러나기에 어두운 조질粗質의 바탕흙에도 표현력이 좋아 상대적으로 A급의 왕실, 귀족 수요의 비색청자와는 달리 더욱 보편적으로 생산되었다. 전라북도 부안 유천리, 진서리 가마터 등에서도 이러한 철화청자 또는 철백화청자를 제작하였으며 12-13세기 청자를 생산한 가마터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상감청자처럼 정교한 맛은 떨어지지만 특유의 자유분방한 필치가 돋보여 고려청자의 새로운 미감을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철화로 피운 검은 꽃을 느껴보기 바란다. /서유리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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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22 17:41

초기 철기문화 조사,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23일 출범

전북지역의 초기 철기문화 유적을 주로 다루는 국립연구기관이 완주에 문을 연다. 문화재청과 행정안전부는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가 오는 23일 출범한다고 16일 밝혔다. 완주 삼례문화예술촌에 마련된 임시사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하는 완주문화재연구소는 초기 철기문화 대표 연구기관으로 운영된다. 전북은 전북혁신도시 건설 당시 전주익산 일원의 만경강 유역과 완주 일대에서 70여곳 이상의 초기 철기유적이 발굴되는 등 한반도 고대 철기문화가 꽃핀 지역이다. 특히 전북에는 가야사 연구 대상 유적(1672건) 중 23%가 분포하는 등 만경강 유역의 초기 철기문화 세력은 동부지역 가야문화권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영남권 위주로 가야 유적 조사가 진행되면서 도내 유적 조사는 상대적으로 미흡해 초기 철기문화와 가야유적 조사를 전담할 연구기관 설치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다. 문화재청은 완주문화재연구소 설립을 계기로 한반도 철기문화권 유입 경로인 만경강 유역의 초기 철기유적 조사에 매진한다는 계획이다. 또 후삼국 시대를 처음 연 후백제 왕도 유적, 불교유적 등 지역 고유의 문화유산 학술조사를 통해 역사문화 콘텐츠의 원천 자원을 제공할 방침이다. 앞서 전북도는 도민의 자긍심 회복을 위한 전북 몫 찾기의 일환으로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설립을 추진했다. 송하진 전북도지사는 최근 현안으로 떠오른 전북 동부권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도 한층 속도를 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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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명국
  • 2019.07.16 19:14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