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서 순교한 시복 대상 24분은?
한국천주교 순교자 124위가 오는 16일 시복식을 통해 복자(福者)로 선포된다. 그중 전북에서 순교한 24위가 복자 품에 안긴다. 전라도 천주교회는 1801년 신유박해로 가장 많은 피해를 봤으며, 이번에 시복된 전북 순교자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노론 벽파는 정조 사망 후 정조의 개혁정치를 주도했던 천주교와 연결된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대대적으로 단행했으며, 전라도에서 20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4위가 순교한 곳은 숲정이가 가장 많고(김천애, 이순이, 유중성, 신태보, 이일언,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 홍재영, 최조이, 이조이, 오종례), 전주감옥(유중철, 유문석, 이경언, 김조이, 심조이, 이봉금), 전주남문 밖(윤지충, 권상연, 유항검, 윤지헌), 김제동헌(한지흠), 고창 개갑장터(최여겸) 등이다. 전북지역 24위 복자 중에는 한국천주교 역사에 큰 점을 찍은 분들이 상당수 이른다. 124위의 대표 순교자로 복자에 오른 신해박해 때 첫 순교자가 된 윤지충과 호남의 사도유항검, 동정부부 유중철이순이가 그 대표적이다. 시복식을 앞두고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주교특별위원회의 자료를 토대로 이들의 행적을 정리했다.△천주교 첫 순교자 윤지충이번 시복 대상에서 124위의 대표자로 이름을 올린 윤지충 바오르(1759~1791년)는 1791년 12월 8일 한국천주교회에서 첫 번째로 참수된 분이다. 전라도 진산 출신(1963년 전북에서 충남 금산으로 편입)으로, 1790년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렀다가 체포돼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의 이종사촌인 권상연(1751~1791년, 야고보)도 함께 참수돼 이번에 시복됐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783년 고종사촌 정약용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한 후 1787년 인척인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와 아우 지헌, 이종사촌 권상연에게도 교리를 가르치고 인척인 유항검과도 자주 왕래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1790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이듬해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천주교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다. 체포령을 피해 몸을 숨겼다가 숙부의 감금 소식을 듣고 자수했다. 윤지충은 진산 관아를 거쳐 전주 감영으로까지 이어진 설득과 회유, 문초에도 신앙을 굳게 지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결국 조정의 사형 명령으로 1791년 12월 전주 남문 밖에서 권상연과 함께 처형됐다.△호남의 사도 유항검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세례를 받아 전라도 최초의 신자가 됐다.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됐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고 처형됐다. 아들 중철문석(요한)도 순교했으며, 친척과 자신의 집에서 부리던 종들도 모두 전교 대상으로 삼았다.전주 초남(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전주 땅의 상당 부분이 유항검 집안의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경기도 양근(현 양평 일대)에 살던 인척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했다. 천주교 신자가 된 그에게는 빈부귀천이 없었다.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였고 종들과 가난한 이웃을 불쌍히 여겨 아낌없이 재물을 나눠줬다고 한다.1790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금지령을 내리자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종사촌 윤지충이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되자 피신했다가 자수한 뒤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됐다.유항검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가장 먼저 검거됐다. 한양으로 압송돼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며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전주 남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동정녀 부부 유중철-이순이유항검의 아들 부부인 유중철 요한(1779~1801년)이순이 루갈다(1782~1802년)는 주문모 신부에게 동정 생활의 뜻을 전하고 결혼 뒤에도 오누이처럼 지냈다. 유중철이 아내에게 보낸 서한 중에 누이여,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전주교구에서는 매년 가을 이들을 기리는 요안 루갈다제를 연다.유항검의 장남인 유중철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된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속에서 자라났다. 16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신부가 마을을 방문했을 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2년 뒤 한양에 살던 이순이에게서 동정을 지키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주 신부가 둘의 혼인을 주선했다.유중철과 이순이는 1798년 부모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일생을 오누이처럼 살겠다고 다짐했다. 유중철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순이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극복하면서 순교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순이는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순교한 이경도와 1804년 순교한 이경언은 그녀와 남매간이다. 여자가 혼인을 하지 않고 살기가 어려웠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그녀는 동정생활을 결심한 유중철과 배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