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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쪽같다는 꾸민 일이나 고친 물건이 조금도 흠집이 없다 는 말이다. 원래 곶감의 쪽을 먹는 것과 같이 날쌔게 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 한다. 곶감의 쪽은 달고 맛이 있기 때문에 누가 와서 빼앗아 먹거나 나누어 달라고 할까 봐 빨리 먹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흔적도 없이 다 먹어 치운다는 뜻이다. 이런 뜻이 번져서 현재의 뜻처럼 일을 빨리 하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처리할 때 감쪽같다는 말이 쓰이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얘기도 설일 뿐이다. 그런데 최근 모 일간신문에서 감쪽같다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 글에서는 대중에 널리 퍼져 있는 곶감 쪽과 같다에서 온 것이라는 설은 물론이고 조항범 교수가 주장한 감접(-?)과 같다에서 온 것이라는 설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떤 원로 국어학자가 주장한 것이라고 하며 여성의 은밀한 신체 부위 쪽(성기)과 같다에서 온 것이라는 좀 색다른 설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설은 여성의 성기가 부부관계를 한 후에도 별다른 흔적이 없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성기 모양을 빗대어 감씨라는 말은 있지만 현재 여성을 뜻하는 감이나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지시하는 쪽이라는 단어는 확인되지 않고, 또 일상어를 만드는 데 입에 올리기 민망한 여성의 주요 부위와 관련된 단어를 이용했다고 본 점에서 이런 설은 크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감쪽같다의 어원은 감나무 가지를 고욤나무에 접붙이고 끈으로 칭칭 감아두면 고욤나무와 감나무가 밀착되어 접을 붙인 표시가 나지 않으므로 감접을 붙인 것처럼 흔적이 없는 상태를 감접과 같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감접과 같다가 감쪽같다로 어휘화 되어 쓰인 말이 정설이 아닐까 생각된다. ※ 지난 2년 6개월간 매주 한 번씩 독자와 만났던 <안도의 알쏭달쏭 우리말 어원>이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습니다.
우리말에 참 불쌍하다는 말이 있다. 옛날 정이천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선비에게 세 가지불행이 있으니 첫째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부모의 세도를 업고 고관이 되어 세도를 누리는 것이며 셋째는 재주가 남달리 비상하여 문장을 함부로 써 갈기는 사람이라고 했다. 정이천 선생은 이 세 가지를 상서롭지 못한 일로 규정 지어 불상(不祥)이라 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이 말을 내 감정구조에 상대편이 측은하게 생각되면 불쌍하다고 말한다. 즉 불쌍하다는 처지나 형편이 안 되어 애처롭다는 뜻이며, 비슷한 말로 가련하다 또는 가엾다가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불쌍하다의 어원을 한자어 불쌍(不雙)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쌍(雙)이 되어야 하는데 쌍이 되지 못했으니 불쌍(不雙)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나 행실이 아주 고약하고 천박한 사람을 낮잡아 불쌍놈이라도 한다. 이 말은 너무 혐오스러워 아무에게나 쓰지 못할뿐더러 발설하기조차 거북하다. 흥미로운 점은 불쌍하다와 불쌍놈의 어원을 동원해 자기 논리를 편 것이다. 불쌍하다의 불쌍은 물론이고 불쌍놈의 불쌍까지 한자어 불상(不常)으로 보고, 불쌍하다를 정상이 아니다로, 불쌍놈을 쌍놈 수준에조차 미달하는 사람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불쌍놈의 불쌍까지 한자어 불상(不常)으로 본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왜냐하면 상놈은 예전에 상인(常人), 곧 평민을 낮잡아 이르던 말이다. 물론 지금은 본데없고 버릇없는 남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상놈의 센말이 바로 쌍놈이다. 상놈 가운데에서도 아주 심각한 수준의 상놈을 접두사 불-을 붙여 불상놈이라 강조한 것이고, 이를 더욱 강렬하게 표현해 불쌍놈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쌍놈이 쌍놈 수준에조차 미달하는 사람은 아니다. 불을 한자 불(不)로 보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몹시 인색한 사람을 구두쇠라고 한다. 이 말은 그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IMF를 겪은 오늘의 현실에서는 그다지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내복을 선물하는 풍속이 다시 부활하는가 하면, 수십 년 된 살림살이를 대물려 사용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게까지 되었다. 이렇게 천대받다가 다시 각광을 받는 구두쇠라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떤 이들은 질긴 구두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구두쇠의 구두도 구두이기 때문이며, 질긴 가죽 구두처럼 한번 물건을 사면 버리지 않고 계속 쓰는 사람이 연상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정작 구두쇠는 가죽 구두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구두쇠는 19세기 중반까지의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1885년에 간행된 <국한회어(國漢會語)>라는 문헌에 나타나 <조선어사전>에 등장하고 이후로 모든 사전에 실려 있다. 구두쇠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 구두쇠에 대해서 써 놓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문헌인데,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우선 두 주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안옥규, 사원사전(詞源辭典, 1989) : 돈이나 재물을 인색하게 몹시 아끼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구두쇠는 굳(다)+우+쇠로 이루어졌는데 굳은 사람이란 뜻이다. 구두쇠의 쇠는 돌쇠억 쇠높쇠의 쇠와 같은 것으로서 사람을 의미하는 접미사이다. ② 김민수, 우리말 어원사전(1997) : 마음이 몹시 굳고 인색한 사람을 일컫는 말. 어원 : 굳-(固) + (으)쇠(접사) 변화 : 굳으쇠 > 구두쇠, 접사 쇠는 돌쇠, 마당쇠에서처럼 일부 명사에 붙어 사내의 이름을 나타낸다. 위의 논거 중에서 -쇠를 접미사로 처리한 것은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접미사 -쇠는 명사에만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사의 어간인 굳-에 연결되기 힘들고 더군다나 굳-에 연결되어 굳쇠도 가능한데, 거기에 모음인 으가 개입될 소지가 전혀 없다. 따라서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아양 떤다는 말은 정답고 살가운 말이다. 어떤 잘못을 용서받으려고 하는 행동이거나 또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온몸을 비틀며 머리를 흔들어대는 모습으로 일상생활의 새로운 활력이 되기도 한다. 즉 남에게 잘 보이거나 귀여움을 받으려고 일부러 하는 애교스러운 말이나 행동을 아양이라고 하며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아양을 떤다고 한다. 이 아양이란 말은 옛 아얌 에서 온 말이다. 아얌이란 겨울철에 부녀자들이 나들이들 할 때에 추위를 막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쓰개의 일종으로서 귀는 내놓고 이마만을 가리는 장신구 역할 겸 추위방지용이었다. 위쪽은 터져있고 밑쪽으로는 털이 달려 있으며 앞쪽에는 붉은 색깔의 수술들이 늘어져 있고 뒷 쪽에는 넓적하고 길다란 아얌드림을 늘어뜨렸다. 아얌드림은 댕기와 비슷하며 검정색이나 자주색의 댕기모양의 긴 끈이 늘어져 있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아얌을 쓰고 부녀자들이 걸어 갈 때에 붉은 술과 검은 비단 댕기가 흔들거리며 떨리게 되고 그 흔들리는 모양과 걸어가는 부녀자들의 모습에 주의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남의 시선이나 이목을 끌려고 하는 행동이나 말을 아얌을 떤다고 말하게 되었으며 이말이 전하여 오는 동안 변하여서 아양을 떤다고 하게 되었다. 특히 귀여움을 받으려 하는 행동이나 좀 더 잘 보이려고 간사스럽게 애교를 부리며 알랑거리는 것을 아양을 부린다고 한다. 상상해보자. 무언가 얻기 위한 수단으로 몸을 비꼬며 코맹맹이 소리를 하며 댕기머리가 흔들거리고 길게 늘어트린 아얌이 머리채와 함께 춤추는 듯한 그 모습에 어른들은 웃으며 아얌 떨지 말라면서도 다 받아주게 된다. 따라서 아양이 때로는 사방이 막힌 듯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세상에서는 삶의 모습이 아름다워지게 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뚱딴지는 돼지감자를 일컫는다. 돼지감자는 국화과의 다년초로써 땅속줄기의 끝이 굵어져 감자 모양의 덩이줄기가 된다. 줄기에는 잔털이 있으며 초가을에 노란 꽃이 피며 덩이줄기는 식용 및 가축의 사료나 알코올의 원료로 쓰인다. 그런데 이 돼지감자의 모양에서 뚱딴지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생김새나 성품이 돼지감자처럼 완고하고 우둔하며 무뚝뚝한 사람을 비웃어서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본뜻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거의 없어지고, 상황이나 이치에 맞지 않게 엉뚱한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 하나의 주장이 있다. 뚱딴지는 전선(電線)을 철탑(鐵塔) 또는 전봇대의 어깨쇠에 고정하고 전기를 통하지 않게 하기 위한 지지물을 붙이는데 이를 애자(礙子) 또는 뚱딴지라고 한다. 애자는 사기, 유리, 합성수지 등으로 되어있어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 이처럼 전기가 통하지 않듯이 우둔하고 완고하며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멍청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모양새가 꺼칠하고 볼품없는 사람이나 물건을 꺼벙이라 한다. 그리고 하고 그런 모양새를 꺼벙하다고 말한다. 그 말의 어감이 정말 꺼벙하게 느껴져서 재미있어 보인다. 꺼벙이의 원래 말은 꺼병이로 꿩의 새끼를 말한다. 꿩은 예로부터 인간의 사냥감 새로 대표적인 날짐승인데 그 수컷은 생김새와 깃털의 색깔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꼬리깃털은 한국의 옛 관료, 무관들의 관모에 장식으로 쓰이기도 하였고 서양에서는 펜대, 펜의 손잡이로 사용되기도 할 만큼 인간과 친숙한 새이다. 꿩은 빨리 날지만 멀리 날지는 못하고 땅위에서 달리기를 더 잘 한다. 주로 야산의 덤불 밑에 알을 품어 낳는데 한 번에 열 마리 정도씩 알을 깨는데 갓 깨인 꺼병이는 어미꿩 까투리를 따라다니기 위해서 가늘고 긴 다리가 먼저 발달하여 그 모습은 그야말로 꺼벙해 보인다. 그래서 모양이 거칠며 행동이 느리고 어리숙해 보인 사람을 가리켜 꺼병이에서 꺼벙이로 변한 것이다. 꼬붕은 일본말로써 꺼벙이와 아무 과계가 없는 말이며 부하라는 뜻으로 정확한 말은 꼬봉이 아니라 꼬붕이다.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수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과연 이야기의 의미와 어원은 무엇일까. 이야기의 18세기 고어는 <역어유해보>에는 古話 : 니야기, <한청문감>에는 古詞 : 니야기의 표기가 있다. 한국어 조상어인 세소토어를 보면 nyaka(니아가-뒤지고 찾는 것)을 뜻하고 있다. nyakalatsa(니아가랕사-즐겁게 하는 것)을 뜻하며, nyakallo(니아갈로-흥미)를 뜻한다. 결국 이야기는 과거의 일들을 재조명하여 듣는 이에게 흥미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이설을 보면 경상도에서는 이야기를 이바구라고 한다. 원래 형태는 입아구다. 입아구는 입 양쪽 귀퉁이의 아귀로 그곳을 놀리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루어진다는 말에서 유래 된다. 입아구가 연음이 되어 이바구 이것이 다시 이야기가 된 것이라고 한다. 이야기는 우리 삶 속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많이 하고 있다. 의사소통의 도구로써 사실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말할 수도, 또 사실처럼 꾸며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내뱉어 남에게 일러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주는 이로운 점을 살펴보면 정보의 수단으로써의 이야기, 의사소통으로써의 이야기 인격완성의 계기, 문화적인 면을 들 수 있다. 먼저 생활의 유익한 정보를 서로 공유하게 됨으로 개인에게는 생존의 수단으로써의 역할을 하고 학문적으로는 발전을 위한 발판으로 작용하게 된다. 예를 들면 생존의 수단으로써, 원시시대에 글이 없고 기록에 익숙지 않아 서로의 위험과 안전을 이야기를 통해 난관을 극복해나갔을 것이다. 또 현대는 이야기를 통해 무수히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고치고 버리는 작업을 통해 유익한 정보를 만들어 간다, 이 복잡한 시대에 이야기는 중요한 매체로 작용한다. 다음으로는 의사소통으로서 이야기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기다려 줄 때 사려성이 길러진다. 의사소통은 인간관계에서 없어서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야기는 인간관계에 긍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듯 이야기 없는 곳엔 정서가 매말라 보이고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없다. 이야기를 옛 선조들은 귀로 먹는 약, 약보다 이로운 것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이야기는 어떤 사람은 말을 잘못해서 욕을 먹는다. 하지만 잘 사용하면 우리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사투리는 어느 한 지방에서만 쓰는 표준어가 아닌 말을 뜻한다. 어원을 보면 꽈돌려 (ㄲ의 ㅅ화) 쏴돌려 사투리가 되었다고 한다. 사투리는 19세기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그 어원이 서툴다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19세기 문헌에 사토리 등의 이형태가 있는데, 사토리>사투리의 변화 과정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이후에는 사투리 형태로 단일화가 되었다. 현재 문헌상으로 사투리의 기원을 밝히기는 어렵다. 서정범은 사투리가 어근 삳(谷)에 접미사 -울이 결합하여 사둘-이>사두리>사투리가 되었는데 곡(谷)의 말, 즉 시골말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곡(谷)이 삳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16세기에 곡(谷)의 훈은 한결같이 골이다.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나오는 자료를 볼 때 신라어에서 곡(谷)의 훈은 실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 지명 표기에 나타나는 자료들은 고구려어에서 곡(谷)의 새김이 단, 돈과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이렇듯 곡(谷)의 새김이 삳과 관련되는 예는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19세기 말 문헌에서는 방어, 방언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사투리란 어느 한 지방 -곡(谷)- 에서만 쓰는 표준어가 아닌 말이다. 사투리의 유래는 먼 옛날로 올라간다. 사투리는 현재 방언이라고도 불리는데 지역별로 사투리가 다르다. 사투리는 옛날에 지방끼리 거리가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서 언어가 제대로 통일 되지 않아서 만들어 졌다. 그런데 서울말을 표준어로 쓰면서부터 다른 지방 말이 모두 방언이 되었다. 그러므로 고려 말기부터 조선 후기까지에서 생긴 것이라고 보면 된다. 사투리는 특정 집단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대개 지역 방언을 의미하지만, 언어학에서는 사회 계층별, 연령대별로도 방언을 나누기도 한다. 극단적인 경우 개개인이 사용하는 개인어까지도 방언으로 볼 수 있다. 표준어가 아닌 지역 방언을 사투리라고도 한다.
옛 어른들 세대에서 이무럽다. 혹은 이무러운 사이라는 말을 쓰는데 무슨 뜻이며 어디에서 나온 말일까? 예를 들면 아무리 시어머니가 이무럽다고 친정엄니만 헐라더냐 라던가 이 사람은 나하고 가장 이무런 사어여라는 말이다. 이무럽다는 전라도 사투리로 친하다, 스스럼없다를 뜻한다. 그런데 그 어원을 찾아보면 원래 기계, 농기구 따위가 눈과 손에 익어 다루기에 불편함이 없이 다룰 만하다는 말로 임의(任意)롭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추측되어진다. 그런데 임의롭다에서 비표준어 이무럽다가 다시 파생되었다. 이물없다의 표준어는 임의롭다이다. 임의롭다는 서로 친하여 거북하지 아니하고 행동에 구애됨이 없다. 얽매이는 것이 없어 자유롭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또는 여럿이 서로 친하여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고 행동에 구애를 받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물(異物)없다는 주장도 하는데 이물(異物)은 ① 기이한 물건 ② 정상적이 아닌 다른 물질. ③ 특이한 문질 ④ 성질이 음험하여 측량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거리가 있다. 전라도에서는 이무럽다라는 사투리로 변형되어 불편하지 않다, 익숙하다, 친숙하다는 격의 없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혹자는 임의롭다라는 말도 있나요? 라고 묻는데 물론 있다. 뜻이 뭔지 어떨 때 사용하는지를 살펴보면 형용사로써 일정한 기준이나 원칙이 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그 친구와는 임의로운 사이라 못할 말이 없다. 나는 졸업을 한 뒤에도 친구를 만나거나 여행을 하는 것이 임의로웠다. 등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원을 이물((利物) 없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다. 즉 물질적으로 이해타산하지 않으면서 지내는 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이나 한자어에는 이물(利物)이란 단어가 없다. 다만 일본말에는 이물(利物)이 있는데 곡식 등을 빌려주고 얻은 이자, 이득, 성과와 빌려준 금액을 말하며 또한 일체의 중생을 뜻한다.
바다 물고기 가운데 넙치라는 이름이 있다. 넙치는 몸통이 다른 물고기에 비해 아주 넓게 생겼다. 그래서 넓은 물고기라는 뜻으로 넓-치>넙치라는 조어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넙치를 한자어로 광어(廣魚)라고 한다. 글자 그대로 몸이 넓게 생긴 물고기라는 뜻으로 조어가 된 이름이란 점에서 우리말 넙치와 그 조어 발상이 일치하고 있는 좋은 보기의 하나다. 넙치는 모래 바닥과 뻘밭에서 납작한 상태로 헤엄을 치면서 주로 사는데 헤엄 속도가 느려 마치 기어 다닌다. 납작하게 놓인 상태에서 위는 회색이나 황갈색의 보호색을 띠고 부정형의 반점이 산재해 있으며, 바닥은 흰색을 띤다. 도다리와 넙치, 또는 도다리와 가자미는 모양이 비슷해서 혼동하는 이들이 꽤 많다. 그러다 보니 상인들 가운데는 값싼 가자미를 도다리로 속여 팔거나, 양식한 넙치를 자연산 도다리로 속여 파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 값이 싼 도다리와 비싼 광어를 구별하기 위해 좌광우도 삼삼둘둘 등의 공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좌광우도란 머리 쪽에서 봤을 때 눈이 왼쪽에 있으면 광어, 오른쪽에 있으면 도다리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삼삼둘둘은 도다리와 오른눈이 세 글자, 광어와 왼눈이 두 글자인 점에 착안한 구별법이다.
허풍선은 본래 숯불을 피우기 위해 풀무질을 하던 손풀무의 일종인데, 아코디언처럼 생긴 풀무의 손잡이를 잡고, 폈다 오므렸다 하여 바람을 내는 기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옆에 달린 바람 주머니가 크게 부풀어 오르는데, 크게 부풀어 올랐던 바람주머니가 곧 가라앉아 홀쭉해진다. 떠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의 말도 허풍선이라는 풀무처럼 금방 홀쭉해져서 처음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허풍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허풍선이는 허풍선이라는 기존 명사에 사람을 가리키는 접미사 이가 붙어서 과장이 심하고 허풍을 떠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말도 되지 않은 소리로 과장을 하고 모든 일을 부풀려서 이야기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필 때 바람을 일으켜서 불을 잘 타게 하는 것처럼 바람주머니가 부풀어 올랐다가 바람이 빠지면 형편없이 쪼그라드는데 이같이 허황된 말이나 거짓 정보를 한껏 부풀려서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데서 허풍쟁이(허풍선이)가 된 것이다. 요즈음은 실속 없이 지키지도 못할 허풍만 떨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다. 흔히 허풍쟁이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바늘방석은 말 그대로 바늘이 자리 잡고 앉는 방석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본래의 뜻은 없어지고 바늘의 뾰족한 부분이 위로 꽂혀 있는 무시무시한 방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어떤 자리에 있기가 몹시 거북하고 불안할 때를 가리켜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을 쓰는데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은 흔히 바늘꽃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명칭은 바늘방석이다. 바늘방석은 바늘을 꽂아두는 물건으로써 속에 솜이나 머리카락을 넣어 만든다. 바늘이란 물건은 워낙 조그맣고 가늘어서 자칫 간수를 잘못하다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분실을 방지하느라 바늘을 따로 꽂아 두는 작은 물건을 만들었다. 즉 부녀자들이 바늘을 꽂아 둘 목적으로 헝겊 속에 솜이나 머리카락을 넣어 만든 수 공예품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가시방석이라는 말이 있는데 가시가 찌르는 방석이라는 뜻으로 이 말의 뜻도 앉아있기 거북하거나 괴로운 자리를 비겨 이르는 말이다. 정리하면 바늘방석은 바늘을 녹슬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서 꽂아둘 수 있게 만든 것이라는 뜻과 앉아 있기에 아주 불안스러운 자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미주알고주알은 남의 일이나 사정에 대해 더럽고 은밀한 곳까지 까발리고 되뇌는 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은 아주 사소한 일까지 하나하나 따지면서 속속들이 캐고 드는 모양이나 얘기하는 모양을 가리키는 비슷한 말로 시시콜콜이 있다. 미주알고주알은 미주알과 고주알의 합성어다. 여기서 미주알은 항문에 닿아 있는 창자의 끝부분으로 구린내가 나고 항상 지저분하다. 요즘처럼 휴지나 물로 닦아내는 게 아니라 지푸라기 등으로 대충 처리하던 시절엔 항상 불쾌하고 냄새가 나던 곳이기다. 고주알은 별 뜻 없이 운율을 맞추기 위해 덧붙인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사람 속의 처음부터 맨 끝 지저분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훑어본다는 뜻이다. 꼬치꼬치 캐는 것에 대하여 미주알고주알 캔다고 한다. 이 말 속에는 조금 끈질기고 치밀한 느낌이 곁들여 있다. 하여간 뿌리를 캐도, 잔뿌리까지 깡그리 캐 버린다는 생각이다.
멍텅구리는 판단력이 없어서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대한 어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한자어 朦聽骨(몽청골, 듣는 데 어두운 골격)이 변한 것으로 보는 견해다. 멍을 의태어, 텅과 구리를 접미사로 보는 어원설도 있다. 하지만 멍텅구리에 쓰인 멍텅은 흐리멍텅하다의 멍텅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흐리멍텅하다의 표준어는 흐리멍덩하다인데, 이는 17세기에 맑지 못하고 똑똑하지 못한 것을 지시하는 데 쓰였다. 구리의 정체는 아리송하지만 몽구리(중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라는 단어에 쓰인 접미사 구리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놀림을 받을 만한 대상을 지시할 때 쓰이는 말로 여겨진다. 또 바닷고기 가운데 멍텅구리라는 고기가 있는데 원래는 뚝지라고 불렸다. 뚝지는 몸이 통통하고 못생긴 데다 동작마저 굼뜨고 느리다. 이 물고기의 속성이 인간에 투영돼 멍텅구리의 의미가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귀고리는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발전이 두드러지는데, 왕족과 귀족 같은 높은 신분의 남녀 모두가 착용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상류층 여인들이 사용하는 장식품으로 착용 범위가 줄어들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를 보면 히브리인들이 노예가 되는 사례는 빚이나 절도 등으로 타인에게 입힌 재산상의 손해를 보상할 능력이 없는 경우다. 이때에는 6년의 종살이 후, 7년째 빚을 탕감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의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자유를 포기하고 계속 노예로 남아 있기를 원할 경우에는 주인과 함께 재판관에게 가 송곳으로 귀를 뚫고 평생 종이 되는 노예의 표식을 하는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귀고리를 했다. 지금은 이런 풍습들은 다 사라지고, 귀고리는 단지 여인들의 장식용 액세서리로 남아 있어 많은 여성이 귀에 고리를 걸고 다니는 것을 본다. 그래서 귀고리를 곧잘 귀에 거는 것으로 인식을 해서 귀거리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귀고리는 원래 귀에 거는 고리이다. 귀에 거는 골희여서 귀옛골희였다가, 20세기에 들어서 귀고리 또는 귀골희가 되었으며 요즈음은 귀고리, 귀걸이로 변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법이 퍼지는 때를 세 가지로 나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과 깨달음이 골고루 이루어지는 시기를 정법시(政法時), 가르침과 수행은 있으나 깨달음이 없는 시기를 상법시(像法時), 수행도 깨달음도 없고 교만만 있는 말법시(末法時)가 그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말세란 수행의 장애가 많은 시기라고 지칭하고 있다. 정법과 상법의 시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연스럽게 순응해 깨달은 자가 탄생할 수 있는 좋은 시기다. 그러나 말법의 시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기도 그 뜻을 실천하기도 어렵다. 이를 말세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한번 들은 다음에는 다시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고 설법하신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정치나 도덕, 풍속 따위가 매우 쇠퇴해 끝판에 이른 세상, 즉 망해가는 세상을 일컫는 말이다. 절도, 살인, 사기, 폭력 등 사회범죄가 증가하고 이혼, 가출, 자살, 가정 폭력 등으로 많은 가정이 해체되고 있다. 개인적인 현상도 있지만, 말세의 징조가 아닌가 하여 가슴 아프다.
나쁜 놈의 어원을 아는가? 우리 민족은 수천 년 전부터 잘못된 짓을 하거나 사회에 해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나쁜 놈이라고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나쁜 생각, 나쁜 행동, 나쁜 일 등도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나쁜 놈의 어원과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쁜 놈의 어원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즉 나뿐만을 생각하는 나뿐인 놈을 말한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간 부족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살았고, 대가족 체계에서 항상 내가 아닌 우리를 생각하면서 살았다. 따라서 우리 집안, 우리 마을,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면서 희생하는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며 오늘날 그 후손인 우리가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서양의 개인주의가 유입하면서 나쁜 놈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으며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우리 사회를 공멸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나쁜 놈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뿐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를 말한다. 그런데 가장 나쁜 놈은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고 하지 못한 놈이라고 한다.
서울은 한 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그런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유래는 많은 설이 있다. 첫째는 서울은 본래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등으로 부른 데에서 비롯한 말이다. 서울의 서는 수리, 솔, 솟의 음과 통하는 말로 높다 또는 신령스럽다는 뜻이다. 울은 벌, 부리가 변음된 것으로 벌판, 큰 마을, 큰 도시라는 뜻을 가졌다. 이 말이 정설이다. 둘째는 서울은 설(雪)울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새로운 궁궐(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쌓으려 할 때 어디서 어디까지 쌓아야 할지 난감했다. 어느 날 큰 눈이 내려 살펴보니 선 밖에는 눈이 쌓여 있고, 선 안에는 눈이 없었다. 이 태조는 이러한 현상은 우연이 아니고 필시 하늘에서 내린 뜻이라 생각하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도록 했다. 도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연결하는 것으로 둘레가 40리(약 17㎞)에 이른다. 사람들은 눈이 한양의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해 도성을 눈설(雪) 자를 써서 설(雪)울이라고 불렀고, 설울이 서울로 발음되면서 오늘날 서울이 됐다는 것이다. 셋째는 1884년 갑신정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나타난 설이다. 서러워 울고 있는 도시니까 서울로 부른다. 이 설은 백성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한때 회자했던 말이다. 또 넷째는 1899년 경인선 개통과 더불어 문을 연 서울역의 명칭에서 그 유래를 찾기도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약의 역사는 약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은 주위에 있는 초근목피를 통해 통증을 경감시키는 경험을 하면서 구전돼 내려왔다. 그 후 유기화학이 발달하면서 그 식물에 함유된 화학물질을 분리해 내기 시작했고, 이러한 화학구조를 밝혀내면서 실험실에서의 합성법도 발견하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한 종류의 화학물질은 그것이 비록 천연식물에서 얻었다 할지라도 인체에 반복 투여되면 원하는 작용 이외에 부작용을 일으키기 쉽다. 약의 역사가 이렇게 5000여 년이 되었지만, 부작용의 역사는 겨우 50여 년 밖에 안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50여 년 전까지는 주로 약의 작용을 정적(正的) 방향만 믿고 무조건 사용하고, 부적(負的) 반응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약물은 생체가 지니고 있는 자연치유 기능의 보조물일 뿐 이러한 단일 구조를 가진 성분이 근본적으로 질병을 치료해 주고 병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약이란 말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나? <설문(說文)>에 약치병초야 종초낙성(藥治病艸也艸樂聲)이라고 해 병을 고치는 풀을 약이라고 한다는 것으로 보아 약의 시초가 식물성인 초목으로 시작돼 풀 초(艸) 자 밑에 사람을 즐겁게 한다는 뜻의 즐길 락(樂) 자를 붙여서 약 약(藥) 자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글의 약은 약(藥)에서 보듯이 한자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래 약의 뜻은 식물이 지니고 있는 자극성(맵거나 쓴맛)을 말한다. 약이 오른 고추, 담뱃잎에 약이 올랐다 등의 용례로 보아 약이 오른 풀이 인체에 대한 약리작용이 있는 것을 알고, 사람의 병을 고치는 물질을 약이라고 하게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약은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담배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쿠바에서 토인들이 피우는 것을 발견한 데서부터 유럽으로 전래했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전에 유럽에서 피웠다는 이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인류학자 중에는 아시아에서 미국 쪽으로 전파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영어로 담배를 tobacco(토바코)라 하는데, 가까운 일본에서도 다바코(タバコ)라고 한다. 그 어원에 대해 서인도 제도의 트리니다드(Trinidad)도 북동부의 섬 타바고(Tabago)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산토도밍고 토인이 흡연에 사용하는 담뱃대를 토바코라 한 데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편으로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토박이말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인 나라에서의 호칭이다. 프랑스에서는 여왕초, 일본에서는 남만초, 중국에서는 반혼초 또는 상사초로 불렸다. 우리나라의 기록에는 남령초(南靈草), 남초(南草), 요초(妖草), 왜초(倭草) 따위로 불렸다. 담배의 우리나라 최초 기록은 <인조실록>에 나는데 1616~1617년에 바다를 건너 들어와 이를 복용하는 자가 간혹 있었으나 그다지 성행하진 않더니, 1621~1622년에 이르러서는 복용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쓰여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오늘날 쓰이고 있는 담배와 비슷한 말이 나온다. “담바고는 남령초라 하는데 근년에 일본에서 온 것이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 이후 민요에서 담바구 같은 표기도 보이니, 토바코가 일본의 다바코를 거치고 그것이 우리나라로 건너오는 사이 담바구 같은 것으로 와전돼 담배로 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민간 어원론 설로는 단방구 즉 달콤한 방구 같다는 데서 왔다는 말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민간 어원일 뿐, 담바구의 음절이 줄어들면서 담배로 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최또, 똘끼, 똘추라는 유행어를 알고 있는가? 모른다고? 그러면 당신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우최또’는 우주 최강 또라이, ‘똘끼’는 또라이 끼가 있는 사람, ‘똘추’는 또라이 추한 놈이란 뜻이다. ‘또라이’라는 뜻도 잘 모르는데 무슨 말이냐고? 우선 실마리부터 찾아보자. 위의 말들은 인터넷 국어사전에까지 올라 있는 또라이의 변종 유행어로 요즘 우리 사회에 정신 나간 또라이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준다. 또라이는 국어사전에 ‘생각이 모자라고 행동이 어리석은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또라이는 그렇게 오래전부터 쓰인 말이 아니며 또 지금과 같이 심각한 정도나 상태를 반영한 말도 아니었다. 또라이라는 말은 1978년 11월 24일 자 경향신문 기사에서 처음 보이는데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또라이라는 말이 권투 경기의 후유증이 심해서 가벼운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키거나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권투인을 권투인 스스로가 붙인 슬픈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라이의 어원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고려해 동사 ‘돌다-정신에 이상이 생기다’와 관련해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또라이는 다름 아닌 ‘돌아이’에서 변한 말이며 이는 ‘아이’에 접두사 ‘돌-’이 결합한 어형이다. 접두사 ‘돌-’은 돌계집, 돌무당, 돌중 등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수준 이하의’, ‘질이 떨어지는’ 정도의 의미를 띤다. 이에 따른다면 돌아이는 보통 아이와는 달리 수준이 떨어져 이상하고 모자란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아이를 가리킨다. 이런 돌아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부각하면서 ‘똘아이’로 되게 발음했을 것이고, 똘아이의 어원이 불분명해지자 ‘또라이’로 표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상식 밖의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런 ‘아이’들에게도 일반인 전체 의미 적용 범위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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