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인 100년의 삶] 농촌 생산활동의 변화
⊙ 지난 100년은 전북농촌의 격동기새 밀레니엄시대를 맞았다. 지난 100년 동안 전북농촌은 많은 사건 사태를 경험하였다. 한일합방,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미군정, 농지개혁, 잉여농산물 도입, 6.25동란, 고리채정리, 종합농협의 발족, 이중곡가제의 실시, 새마을운동, 급격한 도시화의 진행, UR협상타결과 WTO출범, 농어촌발전대책 등등이다. 돌아보면 지난 100년동안 전북농촌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농업생산기술의 발달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크게 늘었으며 농민은 에어콘이 들어오는 트렉터를 타고 농사를 지으며 보다 많은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고 있다. 그러나 많은 농촌은 농업의 장래에 불안감을 느끼며 도시로 이농 탈농하는 농민이 속출하고 있어 농촌에는 노인과 부녀자들만 남게되었다.오늘날 전북농촌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일제강점기의 수탈, 공업화 위주의 경제발전전략이 지속된 결과이다.⊙ 전북 농촌은 식량공급기지 전북농촌은 100년 내내 공업화를 위한 식량공급기지였다. 일제 때는 일본제국주의 팽창을 위한 식량공급이었으며 60년대 이후는 이 땅의 공업화를 위해서 전북농촌은 값싼 식량을 공급하는 역사적 소임을 다해왔다. 일제식민지시대 일본은 자신들의 공업화를 위해 전북농촌에서 생산된 쌀의 반을 가져갔다. 군산항을 통해 일본에 수출되고 있는 상품 가운데 90%가 쌀이었다. 그 대신 들여온 수입품은 한신 지방에서 생산한 면제품이나 잡화 같은 공산물이었다. 주로 오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한신지방에서 일하는 하층노동자가 전북 쌀을 먹었기 때문에 전북농촌은 한신 공업지역과 구조적으로 연결된 식민지적 분업체제로 연결되었던 것이다.전북농촌의 역할은 이러한 식량공급이라는 일본제국주의의 요구와 일본인 지주의 수익증대를 위해서 이루어 졌다. 조선총독부의 강권적 농정과 일본인지주의 수익 추구가 합치된 셈이다.전북농촌에 일본인 지주가 갖고 있었던 토지는 조선 내에서도 가장 많았다. 이미 한일합방전에 전북경지의 20%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김제, 옥구, 익산같은 곳은 무려 3분의 2이상을 일본인 지주가 소유하고 있었다. 조선인 농가의 열 중에 세 농가, 김제 같은 곳은 다섯농가가 일본인 지주밑에서 소작인으로서 농산물을 생산하였다. 일본인 지주는 중세의 봉건영주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전북농촌에 하나의 왕국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미쓰비시계열의 총수인 이와자키는 원래 마을 이름인 반월리라는 명칭을 없애고 새로 동산촌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붙였다. 그 안에 장대한 저택, 개인 우체국, 사설학교까지 만들었다. 마치 동산촌은 일본인 한 사람에 의해 1700명의 소작인을 지배하는 왕국같았다.일본인지주는 새로운 농업생산기술을 도입하였다. 일본 품종을 가져와 파종하고 못자리를 만들고 화학비료를 사용하여 농사를 짓게 했다. 조선총독부의 자금지원을 받아 대규모 수리조합을 만들어 논에 물을 대어 농사를 편하게 하였다. 동진농지개량조합도 그 당시 만든 것이었다.소작인은 매년 2월이 되면 연대보증인 5명이 날인한 소작계약을 지주와 맺는다. 소작증서에는 품종의 지정부터 땅을 몇 센치까지 경작하라고 지정할 정도로 생산과정을 엄격히 규정해 놓았다. 소작료는 대개 생산량의 50%이상이었고, 내지 못할 때는 소작인은 연 20%의 연체료를 내야했다.식민지 시대 전북농촌의 농업생산기술은 이러한 일본인 지주의 농장경영방식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전북농촌의 생산기술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고 그 기술보급도 빨랐다.쌀 위주의 농업생산기술이 발달됨과 함께 전북농촌의 쌀 생산도 2배나 늘었다. 그러나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나른 쌀이 4배나 늘어났고 반면에 전북주민을 위한 쌀 소비량은 3분의 1이나 줄었다.그 결과 전북농촌주민은 잡곡으로도 배를 채우지 못했고 야산에서 나물, 풀뿌리, 나무껍질을 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1932년 3개월 동안 전북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56명이나 되었다. 부안군 동진면 한 마을의 경우 한해동안 180농가 가운데 13농가가 정든 고향을 떠났다.해방이 된지 4년이 되던 1949년에 농지개혁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일제하 소작농이었던 농민은 농지개혁으로 자작농이 되었다. 전북농촌의 5%인 자작농이 70%까지 늘어나 농업생산여건은 크게 개선되었다. 농지개혁은 일제시대의 지주소작관계를 없애고 반봉건과 반공이라는 두 가지 이념을 실현하는 획기적인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보릿고개에 시달리며 생산이 별로 늘지 않았다. ⊙ 70년대는 전북농촌의 일대 전환기60년대 중반까지 비료나 농약이 부족하였고, 농업기술과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농업생산은 침체되었다. 대부분의 농가가 쌀 농사, 보리농사위주의 경종농가 이었으며 요즈음 흔하게 볼 수 있는 원예전업농가나 기업형 축산농가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소, 돼지, 닭 등은 경종농가의 부업축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농업생산 또한 생계유지농업이었다. 농민들은 식량과 기타 잡곡등 자신이 먹는 모든 것을 생산했고 상품이 되는 것은 먹고 남은 것이었다. 60년대 후반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공업화로 도시민 수가 늘어나서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확대되자 전북농촌에서도 축산과 비닐 하우스가 늘어나서 원예가 붐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70년대 통일벼의 보급으로 전북농촌의 쌀 생산은 우리나라 쌀 자급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마을 운동의 전개로 농가의 80%나 되는 초가집이 완전히 바뀌었고 농가의 20%가 전기의 혜택을 보았던 것이 70년대 후반에 가서는 거의 모든 농가에 전기가 들어가게 되었다.조상대대로 중노동의 원천으로 여겨왔던 농작업이 농기계로 대체되어 훨씬 용이해졌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논갈이에 삽과 쟁기, 이앙작업은 모내기 공동작업, 벼수확에는 낫, 탈곡에는 족답탈곡기를 이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70년대이후 농촌노동력의 감소에 따른 농촌노임의 상승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농작업은 쟁기에서 경운기나 트랙터로, 못줄에서 이앙기로, 탈곡기에서 콤바인으로 바꿔졌다. 이제 이러한 과거의 농기구는 농업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농약이나 비료도 정부의 적극적인 권장시책에 따라 농약은 100배, 비료는 2배나 늘었다.그 결과 전북의 농업생산은 기술이 발전하여 쌀 생산수준은 60년대에 비해 오늘날의 2배내지 3배가 증가되었다. 농가부업에 불과하였던 축산은 돼지, 닭 등 중소가축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전업내지 기업축산이 일반화하게 되었고 축산물생산도 크게 증가하였다.그러나 공업화, 도시화 속에서 전북농업의 생산비중은 상대적으로 점차 낮아지게 되었다. 60년대는 지역생산 가운데 60%가 농산물이었으나 이제는 그 비중이 20%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낮아졌다.60년대 후반을 피크로 매년 10만명이 서울 등 도시로 빠져나갔다. 청장년의 남성노동력이 도시로 많이 빠져나가 농촌에는 여자들과 나이 많은 노인들만 남게 되었다. 지난 20년간 무주, 진안, 장수, 임실등은 인구의 반이상이 감소하였다. 농업생산의 기본적 요소인 농지도 70년 이후 현재까지 매년 1,000ha정도씩 비농업부문으로 전용되고 있다.⊙ 농산물 개방에 맞서고 , 환경문제를 고려해야 하는 전북 농업생산지난 100년간 전북농업생산은 일제때는 일본의 수탈기지, 광복후에는 국민식량공급의 기지로 충실한 역사적 소임을 다해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북농업은 우리나라 농업발전의 하나의 중심축도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 동안 농업생산수준도 많이 발전했지만 앞으로 농업생산을 둘러싼 상황은 더욱 급박하다. 그 하나는 우선 80년대 후반부터 밀려오기 시작한 농산물 시장개방화이다. 1994년의 농산물 협상타결,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더불어 수입 전면자유화시대에 전북의 농산물이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는 가하는 절실한 상황을 맞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대기오염, 산림파괴등 환경파괴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전북농촌이 어떻게 환경친화적 농업을 모색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새로운 100년을 맞는 지금, 전북농업생산은 농업내외여건이 어렵게 작용하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 새로운 발전의 길을 모색할 것인가 아니면 침체의 길을 걸을 것인가라는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순열 (전북대 농업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