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인 100년의 삶] 어촌생활의 변화
고기는 언제 얼마나 잡힐지 전혀 예측할 수 없고 또한 바다에 언제 폭풍이 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이 운에 달려 있다거나 또는 이러한 운을 잘 돌보아달라고 각종 신들에게 비는 신앙이 어촌에서는 어느 곳보다 강하다. 그래서 어촌에서 당집이나 뱃고사가 그리고 굿이 크게 성행하여 왔다. 여자가 배를 탈 수 없는 것은 배를 보호해주는 서낭신이 여자라 여자가 타면 질투하기 때문에 배에 여자가 올라오는 것을 금기시하였었다. 바다는 언제 폭풍이 불어 배를 침몰시킬지 모르기 때문에 배에는 항시 서낭신을 모시고 다녔다. 지금도 서낭을 모시고 다니는 배들이 아주 많다. 지금도 부안이나 고창, 위도나 고군산군도에 이르기까지 정월 초사흩날에서 14일사이에 또는 출어시, 흉어시, 명절 때, 배고칠 때, 매달, 어장철에 거행한다. 뱃고사는 돼지머리, 떡, 삼색실과, 나물을 차리고 오색기를 달고 뱃머리, 중간, 후미(고물)의 세군데에서 작은 상을 차리고 제물을 진설하고 무사고와 풍어를 기원한다. 개인적으로 뱃고사를 지내지만 어촌전체가 재물을 모아 크게 별신제를 지내기도 한다. 선유도에서는 五龍廟를 중심으로 항구 전체에서 3년마다 아주 커다란 別神祭를 지냈다. 별신제는 이부근 섬들의 모든 배들이 모여서 이곳에 모신 신에게 배와 선원의 안녕을 빌던 것으로 무당이 와서 굿을 주제하였다. 각 배들도 깃발을 달고 항구를 가득 매워 장관이었다. 이때는 항시 큰 소를 통채로 잡았으며 8명정도 되는 무당과 광대가 와서 굿을 하고 이들이 삼현육각을 불러 육지에서도 이를 구경하러 왔었다고 한다. 이러한 별신제는 1960년대 사라졌다.현재는 각 섬마다 기독교가 크게 성행하고 있어 전라북도 섬이나 연안지역에서 당집과 당제도 사라지고 고창 동호 등 일부지역에서 축제형식으로 되살리고 있다.{동국여지승람} 옥구현조에는 군산진포에 魚箭이 있다는 기사가 있다. 어전은 해변가의 만입구의 간석지에 일정한 간격으로 지주를 세운 다음, 지주에 대, 싸리, 갈대 등으로 엮은 발을 치고 그 중앙부에 임통( 桶)을 설치한 것이다. 임통은 하루에 두 번씩 밀물을 따라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발에 빠져나가지 못하고 중앙의 통으로 들어가도록 한 장치이다. 이들 중에는 발 대신 돌담을 쌓아 만든 석전도 있는데 이는 '독살'이라고 한다. 이러한 어전이나 독살은 부안, 고군산군도에서도 1930년대까지도 널리 행해졌고 부안 곰소지역에서는 1960년대에도 행해졌다. 보통 어촌의 부자가 사람을 구해서 해변가에 돌을 쌓게 하거나 또는 발을 치도록 하고 해마다 이를 수선하여 계속적으로 고기를 잡아 왔다. 몰론 개인이 가족과 설치하고 고기를 잡는 경우도 있다. 길게는 수백m에서 짧게는 수십m에 이르기도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바다에 고기가 많아서 조기, 농어 등 바닷가에 오는 고기들이 많이 잡혔다.물론 1900년대 초 큰 배는 두 개의 돛을 단 중선망어선으로 10여m정도 된다. 작은 배는 고기를 실어나르는 商船이나 조그만 돛단배로 1-2명이 타고 나가 고기를 잡았다. 전북 서해안에서 큰 배에는 돛을 달아 보통 고군산군도, 위도, 어청도정도까지 나가 고기잡이를 한다. 배의 앞 뒤에 돛대를 두 개 달고 바람에 맞춰 이동하며, 바람이 약하면 노를 저어 항해한다. 보통 선장, 화장(밥하고 불을 밝혀 고기들이 모이게 하는 사람), 선원 합해 5명 이상이 탄다. 중선배는 닻으로 배를 고정시킨 후 양끝에서 그물을 내려 조류를 따라가는 고기들이 걸려들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조기, 갈치, 도미, 민어, 삼치, 준치, 가자미 등을 때에 맞추어 그때 그때 나오는 고기들을 잡는다. 고기를 잡으면 소금에 절였다가 항구에서 상인들에게 팔거나 또는 아낙네가 광주리에 이고 내륙지역으로 팔러 다닌다. 겨울에는 풍랑이 심해 바다에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3월에서 11월까지는 고기를 잡고 겨울에는 항구에서 어망이나 어구들을 손질하게 된다.1880년대 이미 일본사람들이 일본에서부터 안강망어선을 타고 어청도 및 고군산군도지역까지 고기잡이를 나왔다. 또한 어청도에는 1890년대 일본인 어민들이 와서 집을 짓고 거주하기도 하였다. 1900년대 이후 전라북도의 군산이나 부안 곰소에서는 일본식 안강망어선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촌에 가까운 연안어장이나 갯벌은 개인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마을공동체가 공동으로 점유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어촌계를 중심으로 같이 바닷가에 나가서 톳을 따거나 조개를 캐거나 또는 김을 양식하거나 한다. 이 어촌계는 각 집안에서 성인이 한명씩 나와서 공동으로 일을 한다. 아니면 공동어장을 개인들에게 임대를 주어 돈을 받고 이들 돈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분배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유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조기를 따라 서해안을 올라다니면 고기잡이를 하는 배들로 장관이었다. 이들 배는 전국에서 모여들기 때문에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사리나 바람이 센 겨울에는 이곳으로 물품을 공급받고 바람을 피해오거나 쉬러오는 배들로 어청도나 선유도의 항구가 가득하다. 고기철에는 이렇게 파시가 형성되어 항구에 돈이 넘쳐나게 된다.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100개에 가까운 술집과 여관 그리고 다방들이 항구에 줄지어 서있고 술집이 많다 보니 색씨들도 또한 많다. 배에만 갖혀살다 오랫만에 회포를 풀기 위해 내려온 선원들로 섬이 갑자기 들썩거린다. 선유도나 어청도의 파시가 유명해 과거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도시보다 번창하여 섬 서울이라 부르기도 했다.1980년대초까지만 해도 어촌에서는 여자들은 부정탄다고 하여 절대 배에 탈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고기손질, 조개나 톷 등의 수확, 농사일에 집중하였었다. 1960년대 이후 인구가 급격히 유출되어 남자만으로 고기잡이를 나가기가 어려워지자 부부가 함께 고기잡이를 나가는 일이 1980년대부터 크게 늘어 지금은 일반화되고 있다. 해방 이후 이후 배들이 점차 동력선으로 대체되어 왔다. 따라서 돛을 단 배는 1950년대 이미 사라졌으며 작은 배들도 노를 저어 움직이던 것이 점차 동력으로 대체되어 1970년대부터는 거의 동력선으로 고기잡이를 나서고 있다. 또한 작은 배들의 재질도 전에는 나무였지만 이제 각종 수지 등을 사용하여 찍어낸다. 각 섬마다 있던 나무로 배를 만들던 것도 없어졌다. 배를 고치는 곳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그 동안 동력선이 크게 확대되었고, 그물도 나일론 줄을 사용하여 튼튼해지고 커졌으며, 이를 통해 고기를 훑어 잡는 방법, 그리고 각종 낚시들도 수백미터에서 수킬로미터에 수많은 낚시를 달아 고기를 잡는 방법이 발달하여 그 동안 고기가 너무 남획되었다. 그리고 서해바다가 금강, 동진강, 만경강을 통해 크게 오염되어, 영광 원자력 발전소로 수온변화가 심해져, 이제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다. 레이다를 달고 중국쪽 남지나해까지 진출해보지만 고기잡이가 신통치 않다. 오히려 일본은 뛰어난 장비로 그리고 중국은 한국연안에 까지 와서 고기를 잡아가니 갈수록 고기잡이 환경이 불리해지고 있다. 전라북도 연안지역에서는 고기를 키원 잡는 양식어업이 발달하지 못해 새로운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김양식이나 조개잡이도 그 생산령이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도시사람들을 대상으로 낚시 관광을 하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다. 위도, 선유도 등지에서도 도시인들에게 배를 빌려주거나 또는 배를 타도록 해 돈을 받고 있다. 아니면 직접 횟감을 잡아 판다. 어청도는 마을어촌계에서 주변어장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데 이곳에서는 모든 고기를 낚시로만 잡도록 하고 있다. 생으로 잡아 횟감으로 군산에 팔면 훨씬 이익이기 때문이다. 어청도에서는 전복이나 낚시로 낚아올린 여러 횟감(놀래미, 우럭, 농어, 도다리 등)이 유명하다. 특히 우럭 등은 비싼 값으로 팔 수 있기 때문에 고기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고기집을 하나 발견하면 몇일 사이에 5-6천만원 어치의 고기도 잡는 경우도 있다. /이정덕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