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JIFF] 전주음식에는 감동이 있다
찹쌀고추장에 쓱쓱 비벼 한 입, 고소함이 혀에 감긴다 , 전주비빔밥봄비는 수줍음도 많다. 누가 볼새라 새벽녘에 몰래 깨어나 후두둑 후두둑 젖은 옷깃을 털어낸다.봄비가 흔적만 남기고 조용히 물러간 아침, 창문을 열자 하늘거리는 흰 목련이며 연분홍 벚꽃이 괜스레 마음을 달뜨게 한다. 저렇듯 자연이 손짓하는데, 방안에서 풀풀 먼지만 날리고 있을 것이냐. 이런 날 약속 하나 잡지 못할 바에야 그것은 세상을 잘 못 살아 온 것이다.그러나 일요일의 평화를 깨뜨리면서까지 세월 좋은 상춘 놀음에 선뜻 동행해 줄 사람이 어디 쉬 얻어진단 말인가. 세상을 잘 못 살아온 것이라니, 그래서 옛말에 장담하며 사는 게 아니라 했다. 아버지의 전화가 풀 죽은 마음을 달랜다. 틀니를 하고 부터는 당신의 늙으심을 부쩍 더 한탄해 마음이 아리던 차였다. 봄날은 도장을 꾹꾹 눌러 찍듯 도심에도 푸릇푸릇 선명하게 돋아있다. 한옥마을을 한바퀴 돌아 한벽루와 천변을 끼고 우뚝 솟아있는 전통문화센터를 찾는다. 뒷짐 진 아버지가 가만히 벚꽃 아래 멈춰 서 꽃 모양을 살피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고도 눈물겹다. 모처럼 아버지께 윤기 나는 점심 한끼를 대접해 드리리라. 전통문화센터에 있는 한벽식당에 들어서자, 아버지는 비빔밥이나 한 그릇 하자시며 무심히 뜰 앞에 시선을 놓으신다. 입맛 돋우는 정겨운 놋그릇에 신선한 콩나물이며 고사리, 표고버섯, 황포묵, 숙주나물, 잣, 은행 등이 맛깔스레 담겨져 나온다. 순창 찹쌀고추장이며 달콤 고소한 참기름으로 쓱쓱 비벼 한 입 넣으시고 아버지는 "시원찮은 이라도 씹는 맛이며 혀에 감기는 게 제법 그럴 듯하다"며 웃음을 비치신다. 비 온 뒤라, 천변의 물소리가 높고도 청아하다. 이곳에 가면 조선 궁중음식의 수라에는 흰수라, 팥수라, 오곡수라, 비빔 등 4종류가 있는데, 비빔은 점심때나 혹은 종친이 입궐했을 때 가벼운 식사로 이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옛부터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던 전주는 질 좋은 농산물과 깊은 장맛, 그리고 음식에 들이는 정성이 어우러져 최고의 맛을 자랑해 왔다. 조선시대 3대 음식으로 꼽힌 전주비빔밥은 콩나물 미나리 숙주 은행 잣 호도, 거기에 매콤달콤한 고추장 등 30여가지의 반찬이 들어가 영양 만점의 음식. 주로 놋그릇이나 돌솥에 담겨져 나오는데, 놋그릇비빔밥이 야채의 싱싱함이나 각각의 재료의 맛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돌솥비빔밥은 뜨거운 돌솥에서 재료들이 갖는 고유의 맛이 서로 스며들어 고소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전주 어딜 가더라도 비빔밥 못하는 식당이 없지만, 전주 사람들이나 외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비빔밥 맛집을 몇 군데 꼽자면 △한벽식당(063-280-7007, 향교 부근 전통문화센터 내) △가족회관(063-284-0982, 전주우체국 맞은편) △고궁(전북도립국악원 앞) △한국관(063-272-9229, 8611. 종합경기장 사거리 전북일보 빌딩 맞은편) △갑기회관(063-211-5999, 전주대교 앞) △성미당(063-287-8800~1, 전주안과 맞은편) △호남각(063-278-8150, 송천동 농수산물시장 방향에서 동아아파트 방향)등이다. 한 그릇에 7천원~1만원 사이. 넉넉하고 후덕한 손맛, 화려하고 정갈한 성찬, 전주 한정식 발목을 덮던 보랏빛 자운영 무리가 선연한 멍울로 다가서던 날, 죄스런 마음에 울음조차 마음껏 토해내지 못했던 그런 날이 있었다. 조건반사처럼 자운영 꽃 무리는 허망하게 떠나보낸 은사님을 어김없이 떠올려 놓곤 했다. 걸음걸이가 곱고 단아한 사모님을 모시고 성묘를 하면서, 동창들은 살아 생전 호랑이 은사님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조롱조롱 풀어낸다. 슬픔은 그렇게도 쉽게 가실 줄 몰랐다. 날은 화창해서 더 서러웠고, 추억은 꼬리를 물어 더 그립고 애잔했다. 은사님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땅 위의 마른풀들이 유난히도 서걱서걱 발에 밟혔다. 누군가 때맞춰 점심 타령을 늘어놓는다. "사모님 모시고 모처럼 거하게 한번 먹어보자!" 괜한 너스레가 아니었다. 은사님께는 못해 드렸지만, 정성을 다해 사모님께 후한 밥상 한번 제대로 차려드리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었다.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사모님을 모시고 들어선 한정식집. 두 장정이 밥상을 들고 들어서는데 그 화려함과 정갈함에 입이 벌어진다. 새콤쌉싸름한 김치와 물김치는 기본이고, 생선전과 조림, 생채, 젓갈, 구이 찜, 편육, 튀김 등등 병풍처럼 펼쳐진 맛의 향연, 거기에 달래무침이며 돋나물 냉이 쑥 등 봄 나물이 마치 봄 들판을 그대로 옮겨온 듯 싱그럽다. 정갈하고 후덕한 밥상 앞에 우리는 은사님께 진 빚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기분으로 슬픔을 접고 웃음을 날리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모님 앞으로 부지런히 반찬을 옮겨다 놓고 있었다. --- 이곳에 가면 서해의 풍부한 해산물과 기름진 평야의 오곡, 각종 산나물을 재료로 한 전주 한정식은 반찬 가짓수만 30여가지에 이른다. 전주 한정식은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고 갖은 양념으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전주 한정식을 구성하는 찬은 계절과 업소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찬만 27가지에 이른다. 생합과 죽순, 생선적반, 더덕, 버섯, 물고기조림, 낙지, 불고기, 민물새우, 찌개, 육회, 나물류, 사시미, 된장, 청국장, 김, 미나리, 고사리, 동치미, 녹두묵, 녹두전, 게장, 석화젓, 토하젓, 파전, 홍어찜, 갈비찜 등이다.여기에 사계절에 따라 나오는 찬이 추가된다. 봄의 경우 두릅나물과 냉이국, 취나물이 올라온다. 여름에는 삼계탕과 머우탕이, 가을에는 송이버섯구이와 싸리버섯, 꽃버섯이 미각을 돋운다. 겨울에는 참게장과 생굴, 토란탕, 달래나물 등 30여가지가 상에 올려진다.제대로 격식을 갖춰 나오는 음식인 만큼 중요한 모임이나 행사, 그리고 특별한 손님을 맞아야 할 경우, 한국 식탁의 격조와 품격을 나눠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전주에서 유명한 한정식 집은 △백번집(063-286-0100, 다가동우체국 부근) △전라회관(063-228-3033, 안행지구 불교대학 옆) △백만회관(063-272-0100, 고사동 피카디리극장 사거리 건너)등이며, 4인 기준으로 한 상에 8만원~14만원 사이. 정식 풀 코스의 음식이 모두 나오지는 않지만, 계절 음식과 기본적인 찌개, 나물, 전 등의 음식이 맛깔스레 나오는 전통찻집 다문(063-288-8607, 성심여고 뒷길)과 교동한식(063-288-4004, 한옥마을 태조로)에 가면 1인당 1만원으로 푸짐한 백반을 즐길 수 있다. 펄펄 끓는 뚝배기에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이 일품, 전주콩나물국밥그 날, 어찌나 눈발이 거세든지 온 도시가 점령당한 기분이었어. 그때 얼마나 신이 났는지 기억 나? 애들처럼 강아지처럼 펄쩍펄쩍 뛰면서 도로를 뒹굴고 미끄럼을 탔잖아. 우린 그때 이 도시의 점령군이었어. 술도 한잔 거나하게 걸쳤는지라 뺨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기막히게 시원했던 게 아직도 잊혀지질 않아. 술 마시고 이야기하고 울고 웃다보니까 금새 배가 고파졌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콩나물국밥을 떠올렸지. 무슨 행군하듯 줄줄이 늘어서 도로 한 복판을 보무도 당당하게, 아니, 길이 미끄러워 다들 엉거주춤한 폼이 볼만했었지? 보무가 당당하지는 못했을거야, 아마. 콩나물국밥집까지 가는 길이 꽤 멀었는데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어. 불평은커녕 통통한 콩나물, 시원한 국물 생각에 더 신이 올랐지. 머리에 하얗게 쌓인 눈을 탈탈 털고, 뚝배기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는 콩나물국밥을 보며 다들 얼마나 행복해했어. 마음과 미각이 한껏 고양된 우리, 전주에 산다는 건 더없는 행운이라고 떠들어댔잖아. 난 그때 우리가 얼마나 거침없는 순백의 청춘들이었는지 새삼 떠올리고는 한다. 자, 얼른 먹자. 툽툽한 뚝배기에 물오른 콩나물, 다시마 멸치 북어를 넣고 몇날이고 우려낸 시원한 국물. 아스파라긴산으로 어제 먹은 술 속 풀이도 하고 그때의 추억도 훌훌 함께 먹어보자.---이곳에 가면 전주의 콩나물은 전주지역의 토질과 수질이 다른 지방의 그것과 달라 콩나물의 줄기가 통통한 데다 곧게 뻗었으며 적당량의 잔뿌리가 특징인데, 그 때문인지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전주의 콩나물국밥은 값도 3,000~4,000원 정도로 저렴한 데다 술꾼들의 속풀이용으로, 샐러리맨들의 점심 식사로 각광받고 있다. 콩나물국밥집은 전주 어디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특히 남문시장과 중앙시장 등 재래시장과 고사동과 중앙동, 경원동 등에 콩나물국밥집이 몰려 있다.고사동의 삼백집이나 한일관, 삼일관 등은 전주콩나물국밥집 중에서도 유서 깊은 곳으로 국밥은 보글보글 끓는 국에 양념류와 계란, 매콤한 고추를 넣어 얼큰한 맛이 속풀이로 제격이다. 깨소금, 고춧가루, 마늘, 파, 후춧가루, 새우젓(육젓), 쇠고기 자장, 잘게 썬 신김치 등을 적당히 넣어 간을 맞춘다. 한일관(063-284-1921)은 당초 남부시장 통에서 해방 전부터 시작한 콩나물국밥의 원조인데, 한일관의 콩나물국밥 국물은 북어와 멸치 등으로 고아낸 것이 특징이다. 지금은 고사동 한성여관 뒷골목에 위치해 있다. 한일관과 쌍벽을 이룬 집은 전주관광호텔 뒤쪽 고사동 먹거리 골목에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던 삼백집(063-284-2227). 주인은 바뀌었지만 상호는 그대로다. 이 골목에는 콩나물국밥 집이 4~5개소 들어서 있다.남부시장내에도 현대옥()이나 그때 그집(063-231-6387) 등 6~7개소가 산재해 있고, 동문 사거리 근처에는 풍전 콩나물(063-231-0730), 왱이집(063-287-6980), 다래집(063-283-0773), 두레박 콩나물(063-288-4853) 등 4~5개소가 있다. 삼백집이나 한일관 등은 펄펄끓는 뚝배기에 계란이 풀어져 나와 얼큰한 맛이 특징이라면, 최근에 들어선 왱이집이나 다래집 등은 매콤한 다진 고추와 다시마 멸치 등으로 우려낸 국물이 뜨겁지 않은 상태에서도 시원한 맛을 전한다. /김회경(전북 문화저널 기자)- 위 글은 전북일보에서 제작한 '2003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