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문화콘텐츠 50] ⑩5일장
계절이 사람 사는 동네로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 장터다. 할머니들이 부려놓은 보자기엔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차례로 나온다. 특히 햇것이 나오는 봄과 가을이면 활력이 넘친다. 봄볕에 한껏 부풀어 오른 냉이와 달래, 두릅, 참나물, 취나물 등 산나물은 풀풀 흙내를 풍긴다. 보는 것만으로도 텁텁했던 입맛이 개운해지고 몸도 한결 가볍다. 봄 장터엔 호미며 낫 등 농기구들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몸 푸는 대지를 돋우려 잘 벼려놓은 것들이다. 겨우내 갈무리하고 묵힌 장아찌들도 밑반찬거리로 한 몫을 한다. 가을걷이가 끝난 장터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곳이다. 손수 지은 메밀과 수수, 콩 등의 잡곡과 직접 딴 산초 열매로 짠 산초기름·들기름·참기름 등의 기름, 볕에 널어 말린 고추와 곤드레나물, 묵나물, 더덕, 황기, 인진쑥, 오미자, 당귀 등의 심산유곡에서 캐낸 약재까지 풍성하다. 말만 잘하면 한 주먹 가득 덤을 얻거나 단돈 100원이라도 에누리할 수 있어서 더 기분 좋은 장터. 교통이 발달하고, 대형마트들이 늘어서고, 인구가 감소하면서 장터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지만, '장터'라는 그 한마디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장터는 단지 물건이 오가고 생필품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터에는 그 지역의 특별한 먹을거리와 놀 거리가 있으며, 생명의 환희가 넘친다. 그곳에 머무노라면 잠시 밀쳐두었던 아련한 추억들까지 되살아난다. 그래서 장터는 먹먹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볕 따사로운 하루, 상큼한 나물과 사람 사는 정이 넘치는 5일장에 들러 계절을 맞는 것도 좋으리라. 시골 장터는 아침 일찍 시작해서 점심이 지나면 하나둘씩 파하기 때문에 장터의 활기를 제대로 느끼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 소박하고 살가운 장터여행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북의 5일장들은 명성이 꽤 높았다. 지금 전북 지역에서 차려지는 장터는 모두 57곳. 진안이 10곳으로 가장 많다. 꼼꼼히 살피면, 아직 때 묻지 않은 재래식 5일장도 여럿이다. 대개 학교 운동장만한 넓이. 슬쩍 눈길 주며 걸어도 다 둘러보는데 십 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장터에 가면 충분히 해찰을 해야 한다. 드럼통에 피운 불에 언 몸을 녹이는 장꾼들, 한가한 틈을 타 담배를 물고 있는 튀밥장수 할아버지, 큰 짐은 머리에 이고 작은 짐은 손에 들고 집으로 향하는 아주머니, 입을 한껏 벌린 채 두릅에 묶여 있는 노가리들, 팔려고 내놓은 강아지와 오리, 병아리들과 그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 시골장터에는 뜨거운 국밥이 있고 새벽같이 내온 곡물과 야채가 바닥에 펼쳐 있다. 어물전 비린내와 장사꾼들의 시끌벅적한 모습도 빼놓을 수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골목에 들어선 아이들이 어김없이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은 변함없다. 아무개 집과 상회라는 가게이름들이 묘한 향수를 일으키는 것처럼 장터에는 살아가는 정겨움이 있다. 막걸리 한 사발에 묵은 감정을 털어 내는 곳. 그래서 장터는 지친 이들에게 어머니 품 같은 고향이다. 소박하고 살가운 장터여행, 마음 한 구석부터 조금씩 따스해져 오다가 오감을 깨우는 전북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전북의 5일장△ 고창, 부안, 정읍전북에는 부안장이 두 곳에 있다. 부안군 부안읍에 서는 부안장과 고창군 부안면에 서는 부안장이다. 부안의 상설 어시장에서는 농어와 도미, 광어, 숭어, 민어, 백합, 대하 등의 싱싱한 생선과 어패류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장날이 되면 인근에서 온 상인들과 주민들이 어울려 푸짐하면서도 소박한 풍경을 자아낸다. 1965년 개장한 고창의 부안장은 한때 '알미장'이라고 불리며 번성했지만, 지금은 50여개소의 전형적인 시골장터다. 고창 해리장은 2백여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고창읍의 장날은 고창천을 사이에 두고 장터가 길게 펼쳐진다. 채소전을 시작으로 가축전과 어물전, 잡화전, 과일전 등으로 나뉘는데, 예전에는 전북 서북부의 대표 장터로 꼽힐 만큼 규모가 컸다. '용머리장'이라고도 불리는 정읍 산외장도 과거에 비해 규모가 작아졌다. 대개의 시골장이 그렇듯 고추와 오이, 마늘, 배추, 과일 등의 농산물이 앞에 선다. 신태인장은 일제 강점기부터 오일장으로 개장됐다. 부안 줄포장은 서해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과 곰소에서 담근 젓갈류 등이 자랑이다.△ 남원, 임실, 순창남원은 조선시대부터 1970년까지 지금의 광한루원인 천거동 187번지 부지에 5일장이 있었다. 모든 농·수산물과 생활용품을 남원과 지리산 인근 7개 군까지 공급 했으며, 특히 우시장은 당시 서부천거리에 일명 '곡마당'이 형성돼 수백 마리의 가축이 매매되는 전국 3대 장터 중 하나였다. 1970년 12월 광한루원이 확장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5일장 또는 상설시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금도 지리산약초, 남원칼, 목기류 등 서남권의 중추시장이다. 남원에서 가장 유명한 장터는 인월장이다. 순대국밥에 곁들인 인월막걸리 한 잔은 인생이 즐겁다. 채 씻기지 않은 그릇 속 고춧가루를 별일도 아니라는 듯 쓰윽, 닦아 다시 내주는 주인의 당당함이 살아 있는 곳.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면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한데 섞여 들린다.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한데 어울려 물건을 사고팔며 인정을 나누는 호영남 화합의 장터이기 때문이다. 구수한 사투리로 물건을 자랑하고 후한 인심으로 덤까지 얹어준다.남원과 순창, 장수 3개 시·군과 7개 면의 교통 요충지인 오수는 지금도 장날이면 각 지역에서 몰려드는 장사꾼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투박한 시골사람과 깍쟁이 장사꾼이 흥정하는 풍경이 살아 있는 시골시장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장터다. 임실 운암시장은 운암면소재지에 있다. 1965년 옥정호에 물이 차서 이곳으로 이전해 지금껏 명맥을 잇고 있다. 9∼10월에는 고추장이 크게 열린다. 순창 구림장은 산지의 산나물과 감, 꿀 등이 유명하며, 쌍치는 고랭지 채소와 오갈피, 고사리 등이 유명하다. 동계장은 봄에는 매실, 가을은 밤과 자연산 송이버섯의 거래가 많다. 복흥장은 표고버섯과 고랭지채소를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다. 탈과 장승을 찾는 수요도 많으며, 메주를 판매하는 곳도 있다. 시장의 규모는 작지만, 자연산 산나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익산, 군산, 완주, 김제익산 황등은 조선후기부터 근대화 이전까지 발달한 곳이다. 황등의 옛 영화는 임방울 명창의 '호남가'에서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라'고 이름 올릴 정도였다. 나포와 곰개(현 웅포) 등에서 생선류, 젓갈류, 소금 등이 유입돼 시골장으로서는 규모가 상당했으며, 1940년부터 약 20여 년 동안 우시장과 망건시장도 번창했다. 여산장은 강경에서 유입된 생선류와 건어물류, 포목상, 일상잡화류 등과 연료용 화목장작 등 나무시장이 열렸다고 전해진다.완주 봉동장은 도시근교를 이용한 상업영농이 발달해 전국적으로 유명한 특산물인 생강을 비롯해 왕포도, 양배추, 딸기의 판매가 이뤄진다. 각종 나물과 야채를 생산 농가들이 직접 판매하기 때문에 인정도 가득한 재래시장이다. 대야장은 군산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5일장이다. '1910년경 임피군 남삼면에서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위한 난장을 시초로 씨름, 도박, 농악이 횡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선조 때부터 열린 김제 원평장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지방 동학지도자들이 중심이 된 금구·원평집회가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무주, 진안, 장수오지의 대명사격으로 '무진장'이라 불리는, 무주, 진안, 장수. 이곳은 지금도 거래가 있는 편이다. 지금은 현대적인 시설로 바뀌어 재미가 덜하지만, 장수의 장계장은 20년 전만해도 장계장날이면 경남 함양과 전북 무주·안성·진안·남원·금산·전주 등 각지에서 모여들어 분주한 곳이었다. 지금도 우시장이 성시를 이룬다. 산서장에 갈 때면 안도현 시인의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을 들고 가는 것이 좋다. 이 시집은 시인이 산서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1990년대 중반에 이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담겨 있다. 장수 번암장은 영화 '행복'에서 영화 속 영수와 은희가 자장면 데이트를 즐긴 곳이다. 고요하고 아련한 밀애의 공간. 영화에도 등장한 '번암막걸리'는 걸쭉하고 달달한 맛으로 인기가 높다. 무주 무풍장은 1백년 이상 된 유래가 깊은 장이다. 고추, 마늘 등 무공해 농산물과 약초, 산나물 등을 구할 수 있다. 현대식 철근콘크리트로 1986년에 신축한 진안시장은 전국 인삼생산량의 15%를 생산하고 있으며, 전북수삼센터가 있어 인삼거래가 활발하다. 표고, 약초와 햇볕에 바짝 말린 고추의 거래량도 많다. /최기우 문화전문객원기자(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