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의 인문학 에세이] 우정조차 뒤튼 물신숭배, 타락 조짐 보여주는 자본주의의 거울
# 1. 등장인물은 멀쩡하게 생긴 두 남자, 그리고 자동차 한 대."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얼마 전에 본 어떤 자동차 광고이다. 오랜만에 만난 모양인데 친구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자, 리모콘을 누른다. 그러자 그랜저 안개등이 깜박인다. 친구가 안부를 묻자 그랜저로 대답한다(?).보통 친구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별로 친하지 않는 사이에는 '그럭저럭' 이라고 한다. 또는, '요즘 다들 어렵지, 뭐!' 라거나, '그냥저냥 살만 해.' 라고 하기도 하며, 사는 데 바빠 연락은 못했지만 많이 보고 싶었던 사이라면, '이 사람, 왜 그리 연락이 없었어! 한 잔 하지!', 라고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 그랜저라고 답하면 못쓴다.광고의 목적이 그 상품을 사들이고자 하는 욕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동안 자동차 광고라면, '작은 차, 큰 기쁨'이라든가, '드라이빙 이모션'이라든가, '진화를 멈추지 않는다'라든가 하는 카피를 써왔다. 그런 식으로 자동차의 특징을 강조하면서 소비자의 관심과 욕구를 끌어왔다. 물론 고가 자동차일 경우 권위나 위신 같은 자동차 외적 요소가 광고에 개입하더라도, 은유적이거나 간접적인 어법을 사용하였고 자동차라는 상품과 광고카피는 내적 연계성을 놓지 않았다. 이런 전례에 비추어 보면 위의 그랜저 광고는 이례적이고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무능의 폭로그런데 그 도발이라는 게 무능 또는 파탄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광고는 광고제작팀이 더 이상 그랜저라는 상품 자체를 통해 소비 욕구를 자극할 능력이 없음을, 즉 소비자들이 그런 비용을 들여 그 물건을 사야 할 이유를 댈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말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여지없는 악수(惡手)였다.그러니까 이 광고는, 친구에게 자랑할 거리, 친구와 나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하여 그 위화감, 친구의 자괴감 내지 불안감을 즐길 수 있는 수단으로 그랜저를 등장시켰다. 그러나 광고가 개입하는 지점은 상품 간의 차이여야 하지, 사람들 사이의 위계가 아니다. 그랜저 광고에서 불편함을 느낀 분들이 계셨다면 그건 우선 이 광고의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다.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죽듯, 광고가 상품을 벗어나 위화감에 기댔으니 그 광고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국제상공회의소(ICC) 광고활동 기준에 따르면, '상품의 소유가 다른 아이에 비해 우월한 신체적·심리적·사회적 이익을 줄 거라고 아이들에게 암시해서는 안 된다'고 돼 있다고 한다. 이 규정에서 '어른'에 대한 언급이 빠진 이유는 물론 어른들은 알아서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 때문일 것이다.이러한 광고를 만드는 회사의 자동차를 사지는 않을 것이다. 자동차의 개발, 생산, 판매에 노심초사하는 노동자와 경영진의 수고를 고려하지 않는 '불매운동'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광고를 만드는 홍보팀의 실수라 하더라도 경영진의 눈에 그 실수가 걸러져야 하고, 직원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정신이 온전하다면 항의가 쏟아져 광고가 중단되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불길한 조짐사람이란 성찰이 짧다 보면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을 휘둘리기도 하고, 남보다 높은 지위, 많은 재물이 마치 자신의 존재의 척도인 양 알아서 본말이 전도되는 일도 있다. 그래서 공자도 '부자인데도 교만하지 않은(富而無驕)것만으로도 훌륭하다(可也)'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공자의 말에서 그 오랜 인간 욕망의 일단을 본다.그런데 공자는 나아가, '부자이면서 문화를 좋아하는 태도(富而好禮)'가 최선이라고 말하였다. 공자는 이러한 적극적, 낙관적 대안을 통해,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교만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태도조차도 이제 보편적인 어리석음에 대한 훈계가 아니라, 더 괜찮은 인생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하여, 필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허영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 허영이 통제의 범위를 넘어, 우리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감사하게 만드는 우정, 평화, 연대 등의 가치까지 왜곡하고, 나아가 그 가치를 소외시키는 양상까지 발견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고약한 광고에서 보듯이, 우리들 사이를 흘러 다니는 뭔가가 있다는 섬뜩함이 느껴지는 것이다.그러면 우리를 우정으로부터까지 소외시키는 상품의 힘, 아니 뒤틀린 방식으로 우정을 처박아 버리는 상품의 오만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현상에 대한 통찰의 일단을 우리는 150년 전의 현자(賢者), 마르크스(1818-1883)에게서 들어볼 수 있다. 그는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시작하는 시대, 돈에 대한 열망이 사회를 뒤덮었던 시대에 살았다. 마치 우리들처럼.▲ 흘러넘치는 물신(物神)그는 말한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만들어서 쓸 때는 그건 어디까지나 물건일 뿐이다. 책상을 만들어 쓰거나, 뜰에 고추 같은 푸성귀를 심어 먹으면, 책상은 그저 나무조각의 적절한 조합이고 고추는 내 입을 즐겁게 해줄 먹을거리이다. 생산단위와 소비단위의 일치이다. 조선시대 경제도 이와 같았다. 화폐는 주로 쌀(米)이나 포(布)가 대신하였는데, 일반 경제활동이 아닌 재정영역, 즉 세금을 내는 데 이용되었다.그런데 우리가 생산한 재화가 팔 물건, 즉 상품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처럼 거의 다 사서 써야 하는 세상에서는 그 재화는 상품이 되고, 반드시 화폐로 환산된다. 생산-교환-소비라는 단계별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진다. 상품은 이른바 교환가치를 갖는다. 화폐로 환산된 상품은 다른 상품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규정한다. 그래서 인간의 손으로 생산된 상품이 자립적인 '상품 세계'를 구성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바로 자본주의 시대이다. 화폐가 있어야만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는, 그러면서 차츰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상태를 우리는 물신주의(Fetischismus·물신숭배)라고 부른다. 상품과 화폐가 인간을 집어 삼키는 셈이다. 최근 금융위기란 이런 물신주의가 밑도 끝도 없는 양상으로 일상화됐음을 보여준다.그랜저를 세워놓고 자랑하는 친구는 더 비싼 차를 가진 친구에게 부러운 눈길을 보낼 것이다. 이 악순환은 제일 비싼 차를 가진 친구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에게 추월당할 테니까. 결국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셈이다. 물신성이 친구사이마저 농락하고 뒤트는 모습을 보여준 그랜저 광고는 기업 스스로 우리 사회의 타락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반자본주의적 선동이며, 타락의 조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거울이다.▲ 어디나 있는 희망배회하는 물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필요한 물건을 잘 따져보고 구매하려 노력하며 가끔은 만든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소비한다. 배추밭을 갈아엎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저건 농부의 마음이 아니라고 사리를 분별한다. 곳곳에서 물신주의에 균열을 내는 삶을, 물신주의를 넘어서는 삶을 우리는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균열을 통해 차츰 새로운 세상을 열든지, 아니면 적어도 더 이상의 타락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2.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는 동네. 다른 아이들이 자전거 타는 것을 부러운 듯 쳐다보는 두 형제. 그리고 얼마 후, 경매가 열린다. 소년은 주머니에서 그동안 애써 모은 동전을 꺼낸다. 경매 시작! 너도, 나도 경매가격을 부른다. 그때 큰소리로 '5달러'를 외치는 소년! 중년의 아저씨도 손을 내렸고, 눈치 없는 할아버지의 손은 옆에 섰던 할머니가 끌어내렸다. 결국 자전거는 소년에게 낙찰! 기뻐하는 소년! "하나하나 양보하는 마음이 모여 소년의 꿈을 이루어주었습니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포스코."그러고 보니 이 광고의 소재는 그랜저 광고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자동차와 자전거라는 상이한 문명 코드가 벌이는 대조다. 필자는 '양보하는 마음'에서 차라리 유쾌한 해체이자 전복을 읽었다. 경매라는 물신 시스템의 총아를 보기 좋게 전복시킨 쾌거! 여러 번 보아도 질리지 않는 광고이다. 광고가 곧 기업의 비전과 일치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전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이 광고는 보여주었다. 위의 광고가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삶 중에서 여전히 많은 영역이 그럴 수 있겠다 싶어서이다./오항녕(한국고전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