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문신> 완간한 윤흥길 작가를 만나다
완주군 소양면 원대흥마을. 종남산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 주변에는 송광사와 위봉사가 있다. 가까운 곳에 BTS 화보 촬영지인 아원고택과 오성 한옥마을 등이 있어 최근에는 관광객들에게 핫플레이스가 됐다. 이 마을에 한국문단의 대작가인 윤흥길 선생이 살고 있다. 정년퇴직 후 고향 근처로 귀향처를 물색하다가 만난 곳이다. 11년 전이다. `완장` `장마` `아홉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소라단 가는 길` 등 주옥 같은 작품으로 한국문단을 빛낸 그가 지난 3월 대하소설 <문신>을 펴냈다. 작품이 태어난 그의 서재에서 작가를 만났다. 난산 끝에 옥동자를 낳은 엄마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 고향이 정읍인데, 어떻게 완주군에 둥지를 틀게 됐습니까. “정읍이 출생지이지만, 내가 성장한 익산을 처음 생각했어요. 13대조부터 400년간 뿌리를 둔 곳이 익산 삼기면이고, 그곳에 선영도 있습니다. 배산과 미륵산 근처를 둘러봤으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다가 이곳을 만나게 됐어요. 전주가 가깝고, 집사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교회가 바로 옆에 있는 곳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동네 분들과도 잘 어울리며 아주 만족하게 여깁니다.” - 이번 완간한 <문신>도 그렇지만, 선생님 작품 대부분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독재시절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제 작품의 출발점은 6∙25전쟁입니다. 사회적 자아가 눈뜬 시기인 초등학교 2학년 때 겪은 충격은 엄청났어요. 학급 물 당번으로 우물로 가다가 본 폭격기가 북으로 가는 걸 보고 좋아서 손을 흔들었는데, 이 폭격기가 다시 돌아와 이리역에 융단 폭격을 한 거예요. 인민군이 차지한 수원역을 잘못 알고 오폭을 한 것이죠. 난생처음 시체를 본 충격적인 경험도 그때 했어요. 이리역 오폭과 같이 한국전쟁 자체가 세계 역사의 오폭이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지금도 분단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한반도가 목표가 된 것 아닙니까. 씻겨지지 않은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어른이 돼서 문학으로 풀게 된 것이죠.” - 선생님에게 영향을 준 대표적 작가와 작품을 꼽는다면. “한 두 작품과 작가를 말하기 어렵지만, 외국 작가로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있습니다. `내 시간이 다 되어간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 데 네거리에 나가서 5분씩만 달라고 시간을 구걸하고 싶다. 그 시간으로 작품을 쓰고 싶다`고 죽기 전 자서전에 남긴 글을 요즘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작가로는 최고 존경하고 많은 영향을 준 분이 박경리 선생님입니다. 무명시절 썼던 `황혼의 집`이 <현대문학>에 실렸을 때 이를 높이 평가하고 현대문학상 작품으로 추천했는데, 당시 다른 심사위원들이 무명의 작가에 상을 줄 수 없다고 우겨 결국 상을 받지 못했으며, 박 선생님은 그때부터 문학상 심사를 하지 않았답니다. 이 작품을 책으로 묶은 후 서울 정릉에 살던 그를 찾아봤더니 6~7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려줬어요. 이후 자주 찾아뵈면서 정신 자세부터 생활 습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 작품마다 토속어와 사투리가 많아 `언어의 보고`라는 평가를 받는데요. “고교 시절부터 한글대사전을 옆에 두고 낱말 공부를 했어요. 아무 페이지나 열어 틈나는 대로 외웠습니다. 전라도 사투리로 생각하는 단어 중 사실은 90% 이상이 표준말입니다. 고어에서 살아남은 단어를 사투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독특한 맛을 뜻하는 고어 `게미`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얼마 전 국문학자 출신도 <문신> 1권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있다고 전화 왔어요. 어느 가톨릭신부는 국어대사전 놓고 국어공부를 한다고 해요.” - 중∙고교 교과서에 선생님 작품이 많이 실리고, 수능 문제에도 자주 출제될 만큼 문학적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중∙고교 국어 교과서뿐 아니라 문법 작문 논술 한문 등 38종 교과서에 작품이 실렸습니다. 과거 대학생들이 독자였는데, 지금은 중∙고생들이 이름을 기억해주고 있어요. 감사한 일이죠.” -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문인들을 기리기 위해 작가 이름을 딴 문학관이 전국에 많이 있고, 지역의 문화관광 자산으로 활용되는데요. “제 작품 중 익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아 국토교통부에서 만경강변에 `춘포문학마당`을 조성했어요. 서울에서 오래 살아 문학관을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완주 귀향 후 자치단체장 중에서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 10일 <문신> 5권 완간 출판기념회가 예정됐는데, 선생님 성격에 마뜩잖았을 것 같은데요. “작가로 데뷔한 지 56년간 40종 47권의 책을 냈으나 지금까지 출간기념회를 한 적이 없어요. 이번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후배들이 찾아와 <문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문단에서 주목하는 작품인지 아느냐며 장소까지 예약했다고 해서 억지 춘향이로 응하게 됐어요.” - <문신> 출간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가난한 소설가가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큰맘 먹고 시작한 작품입니다. 1989년 문예지에 ‘밟아도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기 시작한 후 문예지 폐간으로 중단됐고, 다른 문예지에 이름을 바꿔 연재했지만 전철을 밟았어요. 나와 안 맞는 작품이 아닌가 절망도 했죠. 대학교수가 된 후 시간이 없어 정년 퇴임을 기다렸습니다. 칩거하고 오로지 이 작품에만 매달렸는데, 3권 낼 무렵에 건강이 나빠졌어요. 5권을 마무리하면서는 불면증에 공황장애까지 겪으며 소설 쓰다가 끝내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단어 하나를 생각하다가 밤새 몇 줄 쓰기로 끝낸 적도 많았어요.” - 작품 주무대로 `산서면`이 나오는데, 혹시 장수 산서를 배경으로 한 것인지요. “한국 소설가들에게 소설 속 가상공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문학에 대한 이해 부족한 상태에서 소설과 현실을 많이 혼동해요. 특정 성씨, 직업, 장소를 비하하는 내용이 있으면 들고 일어납니다. 창작에 대한 간섭이 심한 편이죠. 마피아가 그런 면에서 오히려 관대한 것 같습니다. `완장` 에 등장하는 저수지가 백산면에 있는데 명칭은 다르게 붙였어요. `산서`도 전국에 여러 곳 있는데, 실제 모델은 구례군 산동입니다. 작은 마을인데, 맘에 들었어요. 5만분의 1 지도를 놓고 산이름 마을이름을 짜깁기 했습니다.” - <문신> 작품을 통해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요. “민족 정체성을 이루는 귀소본능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예부터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이 있었는데, 몸에 바늘로 글자를 새겨 전쟁터에서 죽더라도 시신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었죠. 문신으로 아내의 피묻은 치마를 묻어 만든 치마무덤이 모티브가 됐어요.” - 향후 집필 계획이 있다면. “완주로 와서 여러 가지로 지역에 고마움과 함께 빚을 진 느낌입니다. 그 보답으로 완주에 뭔가를 남겨야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위봉산성을 주목했어요. 동학농민혁명 당시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죠. 도대체 지금의 한국의 현실을 만든 것이 무엇인지 역사소설로 쓸 계획입니다. 현재 구상은 거의 끝났으며, 자료를 보완하는 중입니다. 나로서는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윤흥길 작가는 1942년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사범과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한 윤흥길 작가는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회색면류관의 계절’로 등단했다. 초∙중등 교사와 대학교수(한서대학교)를 지냈다. 박경리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대산문학상, 21세기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창작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등 굵직한 수상 경력이 한국문단에서 그의 빛나는 발자취를 말해준다. 그의 서재는 대작가에 어울리지 않게 소박했다. 이사를 하면서 소장했던 책들을 거의 버리면서 단출해졌단다. 그런데도 서재 한쪽의 외국어로 된 책들이 눈에 띄었다. 일본, 영국, 스페인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한 그의 저서였다. “내 작품에 토속어와 사투리, 판소리 조가 많아 번역으로 그 맛을 살리는 데 한계가 있어요.” 그는 번역자가 오역해서 당혹스러운 적도 많았단다. 한때 전주와 완주지역 도서관 등에서 문학강연도 했으나 건강과 집필 등의 이유로 오랫동안 칩거를 했다. 예술원 회원으로서 품위 유지 의무가 있어 제한도 따랐다. 대신 마을 이웃들과 친하게 지낸다. 텃밭을 만들어 틈틈이 채소를 짓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