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8) 익살꾼의 재치 드러낸 글의 마술사, 오찬식
오찬식 소설가 오찬식 소설가는 1938년 2월 15일, 전북 남원시 산동면 이곡마을에서 태어났다. 남원고등학교 1회 졸업생인 그는 1960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오찬식과 대학 동기인 이근배 시인협회장은 당시 서라벌예술대학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서울 미아리 고개 너머에 신라의 고도, 서라벌(徐羅伐) 천년의 영화로움을 따서 명명한 서라벌예술대학에 1953년에 문예창작과가 생겼는데, 전국의 내로라 하는 학생들이 다 모였다. 김동리, 서정주, 안수길, 박목월 등 당대 최고의 교수진에다가 학생들은 천승세, 서상옥, 유현종, 김문수, 김주영, 오찬식 등 걸출한 소설가를 비롯한 시, 평론, 희곡, 아동문학에 이르기까지 40여 명이 작가들이 한 반에서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오찬식은 대학 재학 중인 1959년 〔자유문학〕에 단편소설 <전야(轉夜)>로 등단함으로써 그는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의 소설들은 서민 생활의 진실성을 묘파하면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경향을 보였다. 오찬식은 처절한 민족사의 현장인 지리산 기슭을 배경으로 해방 전후의 민족 비극을 형상화한 장편 《마뜰》을 비롯하여 《지리산 빨치산》, 《지방주재기자》, 《창부타령》 등 토속적 색채가 강한 50여 편의 작품을 썼다. 그 외, <고전 논리 열두 마당> (청목사.1985), (시사출판사.1994) 등의 저서가 있고, 1986년에는 죤 스타인 벡의 <붉은 망아지>를 번역본으로 내기도 했다. 오찬식은 등단 이후 왕성하게 작품활동도 하였지만, 중앙의 문학 관련 단체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1979년부터 10년 이상 한국소설가협회에서 사무국장, 1979년부터 13년간 한국문인협회 이사,1984년부터 8년간 한국예술인총연합회 기획부장, 1984년부터 10년 동안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를 역임했고, 1989년부터는 문예학술저작권협회에서 이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 예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부안 출신의 소설가 신석상, <비인간시대>를 쓴 황원갑, 윤영근 전 남원예총회장 등과도 자주 어울린 것으로 보인다.
오찬식의 소설 중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마뜰>, <지리산 빨치산>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이 잘 드러나 있다. 지리산에서 펼쳐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단순한 전쟁의 활극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와 얽히면서 매우 가슴 아픈 비극으로 다가온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살육과 약탈, 만행의 대상이 되어야 했고, 낮과 밤에는 권력이 교체되면서 일어나는 잔혹함을 감당해야 했던 원주민들의 절박감을 그려냈다. 소설가 김주영은 오찬식의 소설에 대하여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그의 글은 장작을 뽀개듯이 투박한 언어와 직설적인 구어체 문제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질그릇 멋 같은 그의 작품은 문체의 핵심으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우회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달려든다. 오찬식 문학이 지닌 호소력은 바로 인간의 속임수 없는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아프게 느끼고 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분단 이후 지리산과 관련된 문학 작품들은 대체로 두 가지 측면을 다루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원주민들이 분단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픈 체험을 소재로 한 증언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분단극복을 위한 역사적 변혁 주체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지리산에 들어간 경우를 다룬 작품이라고 했다. 특히 오찬식의 <마뜰>과 <지리산 빨치산>, 그리고 김주영의 <천둥소리>는 몰 이념적 인간성을 내세워 민중의 수난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했다.
오찬식은 중앙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다. 특히 넉넉한 품성에다 술을 좋아했기에 많은 사람과 어울렸다. 언제나 활발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설사 잘못되어 일이 꼬인다 해도 목젖 짜릿한 소주 한 잔이면 훌훌 다 풀어버리는 대인다운 성격을 지녀, 주변 친구들은 그를 곰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의 오랜 친구 윤영근에 의하면 가슴 한쪽에는 눈물이 고일 법도 한데, 노상 웃음을 띠는 그의 모습이 때로는 바보스럽게 보일 때도 있었다고 했다.
오찬식과 가까웠던 윤영근(前 남원예총 회장, 소설가)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람의 인연이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는 1957년 7월 후텁지근하던 날, 서울 명동에 있는 돌체 다방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돌체 다방에는 공초 오상순 등 명망 있는 소설가들이 자주 모였는데, 그날 웬 풍채 좋은 사내 둘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 한 사람은 부안 출신의 신석상 소설가였고, 또 한 사람은 남원 출신의 오찬식이었던 것, 초면이었지만 동향(同鄕)이었던 셋은 충무로의 부뚜막 술집에서 밤새 이야기하고도 부족하여 고려대학에서도 40분 넘게 걸어가야 하는 석관동의 허름한 오찬식의 자취방에까지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오찬식의 가난을 마주하며 석관동 버스 종점에서 국수 한 그릇을 나눠 먹은 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함께 3년 동안 자취생활을 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부쳐준 윤영근의 넉넉한 하숙비로 궁기를 면했으니, 시골 출신의 가난한 대학생 오찬식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소설가 지망생의 오찬식과 의사 지망생의 윤영근은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조합은 아니었다. 그런데 윤영근이 훗날 소설가가 되고 남원 문인협회 및 예총회장 등을 한 것으로 보아 의대생이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문학적 취향이 강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윤영근은 오찬식이 대학 재학 중 문단에 등단한 것은 아주 대단한 일이라고 했다. 이들의 만남은 또 이어진다. 윤영근이 의대를 졸업하고 전방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그들은 부대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 후, 병(兵)으로 근무하던 오찬식은 윤영근의 숙소를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제대하여 서울에서 다시 만났을 때 오찬식은 동가식서가숙의 유랑 객이었다. 그는 윤영근의 병원 숙직실에서 함께 보냈다니 그들의 인연은 놀랍기만 했다. 이쯤 되면 훗날 윤영근이 소설가가 되고, 문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필연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윤영근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병원을 개업한 이후에도 인연은 계속되었다. 특히 오찬식이 지리산을 배경으로 하여 <마뜰>과 <지리산 빨치산>을 쓸 때는 함께 취재하기도 했다. 2008년 오찬식의 부음을 듣고 그가 쓴 회고의 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오찬식과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이제 그는 영원히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그가 평생에 눈물을 속으로 삭였듯이 나도 그의 영전에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승에서 또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뜨거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우연히 만나서 함께 자취하면서 대학 생활을 하고, 군대에서 다시 만나고, 그리고 직장생활을 할 때 다시 만나고, 고향에서 또 만나 문학을 화두 삼아 살아온 것은 참으로 특별한 인연이다. 윤영근의 말처럼 그들은 언젠가는 또 새로운 만남을 이어갈 것이라 믿는다.
오찬식은 소설가로서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 1959년부터 남원 최초의 문학 동인지 『南苑』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남원 문학의 디딤돌을 하나하나 놓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자리 잡은 그의 도반 윤영근과 남원 문인협회와 남원 예총을 창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으로 그는 자유중국문학상(1980), 한국소설문학상(1980), 문학평론가협회상(1985), 월탄문학상(1994) 수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찬식은 지병인 신부전증을 떨쳐내지 못했다. 사람이 좋은 데다가 두주불사였으니 오죽했을까.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평생 글만 알고 가난하게 살았던 그는 술 마시는 재미로 살았으니 낭만적인 사람이었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병이 악화하였고, 마침내는 복막투석을 해야 했고, 게다가 부인까지 먼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홀로 병고에 시달리다가 삶을 마감하였으며, 유족으로는 기력, 기춘 두 아들이 있다. /송일섭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