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2-04 20:08 (수)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타향에서

나는 기다린다, 고향을 빛낼 또 다른 지도자를

1987년 12월, 뱃속에 7개월 된 첫째를 품은 여성의 손을 잡은 나는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로 향하였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후보로 나선 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1988년 2월 4일, 첫째는 군부 출신 대통령이 취임한 나라에서 태고의 울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참된 민주주의와 진보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1992년 12월 18일, 다섯 살이 된 첫째와 두 살이 된 둘째는 부모 손에 끌려 다시 그이의 유세장에서 민주주의와 진보, 통일의 외침을 자장가 대신 들어야 했다. 1997년 12월 18일 밤, 드디어 두 아이와 그들의 부모는 온갖 거짓과 비난, 오해와 무지의 파도를 이기고 한 나라의 지도자로 우뚝 선 이의 승리를 함께하였다. 광복된 지 80년이 되어가는 이 나라에 대통령은 여러 명이 존재했지만,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어쩌면 단 한 사람뿐이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그만을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지역감정의 소산이야.”라거나, “너의 편견일 뿐이야.”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니 “빨갱이”니 하는 비난이 지나고 보니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역사는 그가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킬 것이다. 그가 지도자가 된 후, 우리 사회에서는 비로소 민주, 진보, 통일 세력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전에 대한민국에서 민주진보통일 세력은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다수를 차지하는 취약한 처지였다. 그 역시 보수의 심장 세력과 손을 잡아야만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는 우리 사회를 한 걸음 진보시켰다. 그는 대한민국 사회를 민주와 진보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는 보다 앞선 사회로 개조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성과였으니, 나는 IMF 외환위기를 이른 시일 내에 극복시킨 그의 능력보다 이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무엇보다도 그이에게 위대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까닭은 올곧은 자세 때문이다. 그이는 곡절이 지배해온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단 한 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설사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조차 그이는 옆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이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유 역시 바로 그러한 인간적 자세 때문일 것이다. 시류에 영합하고, 죽음 앞에 타협하며, 자리를 위해 철학을 굽히는 이들이 난무하는 인류 역사에서 그이와 같은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하기에 역사는 그러한 인물을 위인(偉人)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이가 태어나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 분명한(이는 그이가 자신의 고향 마을 이름을 따 후광(後廣)이라는 호를 만든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고향과 같은 뿌리를 가진 땅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지금은 고향을 떠나 있지만, 그 땅의 말투와 그 땅의 음식과 그 땅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들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뒤를 이을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한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배지와 자리와 돈다발과 명성을 한없이 가벼이 여기는 반면, 민주주의와 약한 이웃과 정의로운 역사의 무게를 두 어깨에 짊어지고 쓰러질지언정 그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는 후배 지도자를 기다린다. 그 후배가 그이와 한강의 뒤를 이어 다시 한번 세계에 호남의 가치를 펼칠 것을 믿는다.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4.12.04 18:1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어디서 태어났을까?

서울시 중구에 있는 대한극장이 문을 닫았다. 1958년 개관하여 66년 동안 영화의 메카로 대한극장은 충무로의 상징이었다. 영화관 시작이 단성사라면 영화인들이 모이는 곳은 충무로였다. ‘영화의 날’ 기념행사도 대한극장에서 하였다. 서울역에서 숭례문 지나면 명동과 충무로 일대가 극장가로 필름 현상소와 인쇄소가 즐비했다.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 그리고 중앙극장과 국도극장 등이 있는 영화의 거리 충무로는 한국 영화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런데 목멱산 기슭 충무로와 충무로역이 있는 대한극장은 왜 ‘충무로(忠武路)’라 불렸을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세종대왕 이도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두 분 모두 경복궁 앞 광화문 광장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계신다. 세종대왕은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준수방 장의동에서 태어나셨다. 그렇다면 목멱산을 바라보고 계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디서 태어났을까? 우리나라에 이순신 장군의 흔적은 너무도 많다. 이순신 장군은 도성 안 무과시험을 치르는 훈련원 봉사직을 시작으로 최초로 정읍 현감과 태인 현감까지 겸하였다. 또한 해미읍성 군관으로 해안가에 머물며, 진도군수를 거쳐 통영에서 초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바다를 지켰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23번 싸워 23번 전승을 이룬 해군의 제왕이셨다. 하지만 무고로 인해 백의종군 후 남원에서 섬진강 따라 남해안까지 걷고 또 걸었다. 결국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고, 84일 후 아산 외가 선산에 묻혔다. 하지만 아산 현충사가 태어난 곳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과연 어디일까?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울시 중구에 있는 서애길 역시 충무로역 대한극장 가는 길 위에 있다. 500여 년 전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선조에게 천거한 인물이 있다. 임진왜란 3대첩을 이끈 도원수 권율 장군과 통제사 이순신 장군 사이에 도체찰사 서애 류성룡이 있었다. 류성룡이 자란 곳도 대한극장 근처 충무로역 1번 출구에서 50m 앞이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린 시절부터 목멱산 기슭 마른내골 건천동과 개천에서 함께 지낸 형과 동생 사이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서 징비는 ‘내 지나간 일을 경계하고, 뒤에 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豫其懲而毖後患)”라는 시경에서 따온 말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과 상황을 기록한 류성룡의 땀과 혼이 담긴 서적이다. <징비록>에서 위기 속 나라를 생각하는 ‘이순신과 선조, 권율과 원균, 이이와 이항복 이야기’도 나온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소중한 강토가 유린당한 7년의 현실을 그대로 담았다. 역사 속 위기는 언제나 있었다. 위기 속 또 다른 기회를 찾는 지혜가 다를 뿐이다. 어머니와 자식을 잃어도, 나라가 자신을 버려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국토와 백성을 지킨 인간 이순신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1598년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쌀쌀하지만 활기찬 겨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본 <노량 : 죽음의 바다> 그 장면이 더욱 애틋해진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11.27 18:45

액자 걸기

몇 년 전 어떤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사물에게 말 걸기’라는 코너가 있었다. 일상에서 늘 보는 물건을 관찰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액자’에게 말을 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아내와 나는 신혼 때 많은 부분에 차이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액자 걸기’였다. 아내는 눈높이에 걸자고 했고 나는 천장에 가깝게 걸어야 한다고 했다. 아내가 말하는 높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낮은 것 같았다. 벽에 붙어있는 액자라는 사물을 처음 인식한 것은 물론 어려서이다. 그때 액자란 고개를 뒤로 젖혀야 볼 수 있는 높이에 걸려 있었다. 그런 경험은 아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아내와의 견해차이는 그보다는 내가 살았던 부안의 옛집 천장이 낮아서 높게 걸렸다고 착각한 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당시 아버지가 벽에 붙은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을 때 의자 위에 올라섰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옛집에는 시계와 함께 돌아가신 조부모 사진도 천장과 벽의 모서리를 이용해 거의 45도 각도로 걸려 있었다. 어른을 우러러보라는 뜻이 있는 것 같고, 조상님들이 방안의 우리를 지켜보니 삼가라는 뜻도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대단히 권위적이지만, 시계나 유리 액자를 높이 다는 데는 위험한 물건이나 중요한 물건을 키 작은 어린아이가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까닭도 있었으리라. 액자란 무엇일까? 사람이 보기 위해 벽에 거는 사물이다. 그렇다면 서 있는 사람의 눈높이에 거는 것으로 충분하다. 액자 또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사진을 포함한 내용물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일 뿐, 주체가 될 수 없다. 위험한 물건은 경우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어른 키높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세월이 흐르면 사물의 쓸모가 잊혀져 도리어 주인 행세하는 경우가 있듯이 사회의 제도도 그 본질을 잃고 인간을 옭아매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 안존하려는 관성과 타성 탓도 있지만 그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본질을 애써 외면하려는 점도 있다. 한 지붕 안에 사는 부부도 의견이 다를진대 직장, 지역, 국가, 세계 등 크고 작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각이 어떻게 하나로 모여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각기 다양함을 인정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견 차이가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고 가부간 판단이 필요한 때가 있다. 정부, 국회, 법원에서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같은 호모사피엔스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좁혀지지 않는 골을 두고,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AI)에 판단을 맡기자는 의견이 나올 만도 한 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축구나 야구 경기에서 불완전한 인간 심판 대신 기계의 정확한 판단으로 인간의 판단을 번복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다. 그렇다고 숫자와 양으로 계량할 수 없는 가치 충돌의 세계에 인공지능을 내세워 그 판단에 순복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인공지능이 판단할 수 있도록 세상의 모든 가치를 숫자로 환원하면 되지 않은가 하는 주장도 나오지만, 이 단계에 오면 과연 “인공지능이 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본질과 쓸모를 보는 눈에도 주관이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을 일으키거나 수습해야 할 목적을 지닌 법과 제도의 본질을 보려는 노력 그 자체만으로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 없다. “액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처럼.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4.11.20 18:36

전주 길 서울 길

나는 소년 시절 임실에서 전주로 이사를 온 다음 서울에 올라가서 직접 본 것은 20대 초반 한여름 때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성동구에 있는 어느 대학교에 간 게 처음이었다. 그 뒤로 3년이 지나서 서초동에 있던 연수원에 이르러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이따금 외출하여 본 서울의 광대한 규모, 엄청난 시람들 수에 놀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연수원 들어가기 1년 전에 시험을 마무리하려고 국민대학교건너편에 있는 하숙집에서 열흘 동안 하숙하며 지낼 때 전주와 같은 푸근한 인심과 풍광을 체험한 적도 있었다. 연수원 기숙사에 머무르면서 그 건너편 백화점과 주변 새 아파트 단지들, 근처 지하철역 부근에 있는 초대형 상가 건물을 보면서 우리나라 수도의 위용을 실감하였다. 연수원 1년 차 동안 그 위용과 풍광에 감탄은 했지만, 담담한 마음으로 응시하며 가슴 속에 미래에 대한 밝은 비젼을 가지고, 젊은 열정과 올곧은 의지로 법률가의 길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이 난다. 처음 근무한 곳과 다른 지역 근무를 3년 반 동안 마치고 그 후로 서울에서 수년간 지내게 되면서 전주와 임실에는 생신, 명절, 기일,여름 휴가, 다른 일이 있을 때 가게 되었지만, 늦은 밤과 새벽녘까지 일하는 게 일상이었던 일의 패턴 때문에 자주 가지는 못하였다. 어느 해인가 추석 명절 때 어머님께서 홀로 올라오셔서 내 야윈 얼굴을 보시고 염려하시던 모습에, 최소한 명절 때는 내가 전주에 내려가기 며칠 전부터 일을 줄이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여의찮았다. 내가 하는 업무적인 일들과 개인적인 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주 길 서울 길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내가 청년 시절, 한때는 힘드신 모습을 뵐 때마다 내가 종교인의 길을 걷게 되면 고생을 덜 하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생계를 위해서는 법률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판단하고 초지일관하였던 것 같다. 그랬다. 내가 항상 다니면서 생각해 온 전주 길 서울 길은 한결같으면서도 깊이가 있는, 넓으면서도 평안해지는 강과 바다에 이르게 한다는 깨달음이 온다. 그 강과 바다는 과연 무엇일까 사유해 보는데, 인간에 부여된 자연의 빛을 사용하여 “물 같이, 마르지 않는 강같이”추구하는 진리의 길에 다다르는 것이라고 묵상해 본다. 내가 스스로 깨달아진다고 사유하는 것은 내가 주인이 된 견지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베푸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부터 받는 은혜로움에 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사물과 사리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의 주체는 나 스스로가 되어야 하지만, 그 안에는 그 인식과 깨달음을 부여하는 부동의 원동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오로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오만의 늪에 빠져서는 안 되며, 그 늪의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묵상해 본다. 그래서, 동양의 현자들도 “타고난 자질은 하늘에서 얻은 것이고, 확충하여 기르는 것은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資品得於天, 充養存於己).”라고 설파하였다. 이제 공직을 벗어났지만 앞으로도 내가 전주 길과 서울 길을 오가면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말씀하신 물과 강 같은 진리의 길, 동·서양의 현자들이 제시한 선한 길을 제대로 찾고 실천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고 묵상해 볼 것이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4.11.13 17:53

고창 읍성이 한 마디 하셨습니다!

오랜만에 김제평야를 달려 고창을 다녀왔다. 김제평야는 갈 때마다 속 좁은 내게 감탄을 안겨준다. 눈길 가는 끝까지 산이 안 보이고,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강일까, 들일까, 아니면 대부분 한반도에서 보듯 산일까? 상상의 날개를 펼치도록 만든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놀랍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소박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 지평선을 보여주고 싶다. 그렇게 실제로 끝없는 땅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드넓은 꿈과 의지를 키우도록 해주고 싶다. 또 하나! 토성의 고리를 보여주고 싶다. 그렇게 이 지구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고 싶다. 좁으면 좁은 대로, 귀하면 귀한 대로, 지구에서의 삶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도록 알려주고 싶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은 여전히 줄을 세우고, 돈다발과 수능 성적이 비례함을 귀에 못이 박히게 주입하고 있다. 토성의 고리는커녕 달의 분화구에 대한 관심도 지우고 오직 점수에 목매달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기쁨과 환희, 행복이 가득한 삶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런 삶은 없다. 공자님, 부처님, 예수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런 탐욕으로 마음의 평안과 희열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가끔 있겠지만 무시해도 될 정도일 것이다. 요즘 들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지만, 아직 다수는 아닐 것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노벨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그러나 노벨이 세계에서 가장 권위적인 상을 수여하기로 다짐한 것이, 바로 자신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 즉 사람의 삶과 생명, 문명을 파괴하는 물질에 대한 반성과 후회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되살리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맞다. 노벨의 뛰어난 점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반성의 삶을 새롭게 뒤집은 데 있다. 그는 자신이 획득한 부의 크기를 맞닥뜨리는 순간, 그 부를 낳은 원천이 인간의 삶에 어떤 존재였는지를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원천이 인류 문명에 해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에 진 빚을 갚기로 했다. 그 결과물이 노벨상이었다(노벨경제학상, 그러니까 인류에게 경제적 성과를 가져다준 이에게 수여하는 상을 그가 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따라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적으로는 하루라도 빨리 노벨경제학상은 폐지되는 것이 맞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발자취를 살펴본 적이 있던가? 한 번이라도 눈앞의 아파트 가격, 눈앞의 사치명품, 눈앞의 점수 대신 먼 곳의 지평선, 높은 곳의 토성 고리, 깊은 곳의 지성을 살펴본 적이 있었던가. 노벨문학상 소식에 수백만 명이 한강 작가의 책 한 권씩을 사서 흔들고는, 불과 몇 달 후에는 다시 사치명품 시계와 핸드백, 아파트 가격표와 수능 성적표에 목매다는 삶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는가. 김제만경 들판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달려간 고창 읍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 참 따스하고 조용하고 깊었다. 그 모습이 나를 향해 속삭이는 듯했다. “타향에서 고생이 많지. 그 시끌벅적한 곳에서 힘들었지.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잠시일지언정 내 품에서 쉬거라.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쉬거라. 그리고 수면제 없이 잠 푹 자고 올라가거라.”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4.11.06 17:22

익산 미륵사지, 백제 융성기 최고의 걸작이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예로부터 도읍지는 큰 강을 따라 형성되었다. 대동강 변 고구려, 한강 변 백제, 낙동강 변 신라가 삼국시대를 이끌었다. 섬진강 변 가야국들은 남해와 지리산을 끼고 발전하였다. 예성강 변 고려와 한강 변 조선은 물길 따라 수운과 해운으로 물류 최적지인 개성과 한양에서 성장하였다. 하지만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한강 위 아차산에서 475년 죽임을 당한다. 한강을 떠나야 살 수 있었다. 한강 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뒤로하고, 금강 변 웅진성에서 웅진 백제로 새롭게 시작한다. 좁은 땅과 약한 권력은 웅진 호족들에 밀려 5대 63년 동안 백제 재건을 위한 시간이었다. 공주 웅진성(熊津城)은 무령왕에게 위기이자 기회의 땅이었다. 금강 따라 펼쳐지는 새로운 문물과 도전이 웅진 백제를 사비 백제로 일으켜 세웠다. 538년 성왕은 금강 변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국호도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꾸고, 금강의 이름도 백강으로 불렀다. 다시 가장 강한 나라가 되고자 사비성을 쌓고, 백제 중흥을 꾀하였다. 이때 불교를 통해 찬란한 백제로 나가려 했다. 해상 활동을 위해 부소산에 도성 쌓으니 사비성이다. 부여 사비성(泗沘城) 밖 정림사를 짓고, 불교의 힘으로 백제 중흥에 이른다. 부여 정림사지와 금당의 석가여래는 한성 백제기 이후 찬란한 백제로 전환하였다. 공주에서 부여로 온 백제는 땅을 넓히고, 문화를 확장하며 익산에 왕성도 새롭게 만든다. 익산은 절대권력 무왕의 고향으로 천도를 준비한 별도 도읍지 별도(別都)였다. 당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쏟았던 백제 최대 규모 사찰이 익산 미륵사다. 미륵산이 보여주는 끝없는 기운과 미륵산 기슭에 자리한 미륵사지 흔적은 연지의 규모가 대신 말해준다. 무왕은 사비에서 익산(益山) 천도로 귀족과 호족 세력을 제압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왕족인 부여씨와 8성 귀족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 마지막 의자왕과 왕자 부여융 및 백제부흥운동의 부여풍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온다. 계백장군 이야기도 백제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백제 성곽은 어디까지 있었을까? 금강 따라 백제 5방성 중 임존성과 금강지류인 해안가 부안에 있던 주류성은 백제의 화려한 옛 모습을 보여준다. 백제는 사찰과 탑이 많았다. 백제 탑은 온화하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준다. 불교의 융성한 모습은 마라난타에 의해 최초로 서해를 통해 전해졌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도가와 신선 사상까지 여유로운 모습을 담았다.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과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석탑 중 가장 아름답다.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지 연지에서 대형 치미(鴟尾)가 나왔다. 매의 머리처럼 불거지고, 깃 모양의 선과 점이 새겨진 건축물이다. 678년간 백제를 이끈 문화와 예술은 지금껏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정읍사·지리산가·무등산가·선운산가 등 찬란한 백제의 소리가 K-팝의 시작이다. 사비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에 연꽃무늬 ‘연화문’, 구름무늬 ‘운문’ 그리고 사신도를 그린 벽화가 곧 백제다. 미륵사지에서 용의 날개와 꼬리를 닮은 ‘용문’, 용마루 위 ‘치미’가 백제 문화를 K-컬처로 만들었다. 백제에서 시작한 역사와 문화가 대한민국을 넘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까지 탔다. 가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익산 미륵사지를 가야 할 이유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10.30 18:13

노벨문학상과 주변국 언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함께 거명되는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번역 저작권을 연구하던 중 2017년 연세대학교 유영 번역상 세미나에서 수상자 스미스를 만났다. 한국말을 잘할 줄 알았는데 의사소통이 안 돼 영어로 몇 마디 나누었다. 그런데 그것이 흠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작년 초 한국문학번역원이 개최한 한국문학번역상 신인상 취소 관련 재심위원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모 일간지 기자가 일본인 수상자와 전화 인터뷰를 하다가 한국어 대화 능력이 부족한 데서 출발해 인공지능 번역기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보도했다. 확인 차원에서 일부 번역기를 사용했음이 밝혀져 해프닝으로 끝나고 수상은 유지됐다. 인공지능 번역 문제는 차치하고 두 사례는 한외번역, 즉 한국어 원전을 외국어(영어와 일본어)로 번역했다는 것과 번역자들의 한국말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한국어 말하기 능력과 번역 능력의 연관성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있다. 언어의 헤게모니로 생긴 일이다. 수많은 언어 가운데 중심국 언어와 주변국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편한 현실이다. 영어는 중심국 언어이고 한국어와 일본어는 주변국 언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심국인 서구 언어 간에는 어떨까? 체코 출신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에 망명해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 자신의 책이 영어, 독어 등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역은 물론 뉘앙스가 잘못 전달되는 것에 극도로 민감했던 그는, 이례적으로 번역과 저작권에 관한 책을 남겼다. 『배신당한 유언들』이라는 책에서 번역자가 따라야 할 최고 권위는 저자의 개인적 문체임에도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공동 문체를 최고의 권위로 여기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중심국 언어 간에 이런 치열함, 긴장감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 『Vegetarian』에 있는 적잖은 오역은 한국 번역문학계에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채식주의자』에 나온 ‘수간호사(首看護士)’를 ‘male nurse’로, ‘춘화(春畵)’를 ‘spring flower’로 번역한 것이 그 예이다. 만약 외한번역에 이런 오역이 있다면 같은 잣대로 관대했겠느냐는 지적이다. 타당한 말이나 어찌하겠는가? 언어 간 헤게모니가 있다는데.. 스미스의 오역을 들춰내 한강의 놀라운 업적을 깎아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한강 소설을 정말 좋아한다는 스미스와 함께 일한 한강이 너무나도 부러울 뿐이다. 소설가는 아니지만 내가 쓴 논문이나 책을 도착어권의 맥락에 맞게 정확한 문장으로 번역해줄 스미스 같은 파트너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한국어로 글쓰는 이는 쉽게 동의할 것이다. 스미스가 없었다면 한강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한강의 수상에 조금도 흠집을 내지 않는다. 맨부커상이 작가와 번역자에게 공동 시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라고 한 수상소감은 시상식장에 큰 울림을 주었다. 우리와 같은, 아니 우리보다 더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주변국에도 한강과 같은 보물이 있지 않을까? 중심을 지향하다 보면 자칫 주변을 놓치기 쉽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문화의 주변국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중심부에 있지 않은 보석이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4.10.23 18:28

도덕률에서 황금률로 머무를 때까지

전주에 있는 병원에 가려고 광주 사무실을 나서서 차를 운전하여 동광주 IC를 빠져나와 광주-대구 고속도로에 진입하였다. 주말과 주일에는 누님과 매형, 조카들까지 나서서 병문안과 돌봄을 해드리고, 나는 주중에 병원에 들러 살펴드리지만, 병원을 나설 때에는 간호사와 돌보는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오는 게 가슴이 많이 아팠다. 병원에 입원하실 때만 해도 막연하나마 좀 지나면 퇴원하실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어서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가는 일정이 힘들지 않았다. 병상에서 누워 계시다가 너무 늦으면 안되니 이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일어설 수가 없어 앉아 있다가 자정 넘어 일어나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날이 많아지던 중, 봄을 지나 한여름, 늦가을, 겨울로 접어들었다. 나는 인간적 힘겨움을 잠재우려고 동양 고전 서적, 성리학자들의 마음 학문에 관한 고전, 근대 서양철학자들의 이성과 정신론, 도덕신앙론, 신학론을 다시 펼쳐 들고 깊이 파고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을 있게 하신 분에 대한 마음의 원리인 효, 그 이치를 깨닫게 인도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에 대한 사유와 묵상을 할 틈이 없이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까지 다녔던 것 같다. 걱정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눈과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고 담대하게 말하고 행동하였지만 나 스스로는 사별을 예감한 혼돈의 시간이었다. 여러 병원을 알아보고 병원을 옮기는 데 애써준 누님 내외분과 아내, 병환의 치료를 위해 귀한 약재를 달인 물을 건네주고, 병원까지 차로 태워다 주며, 병원에 와서 휠체어를 밀어주기까지 한 친구들의 손길 가운데, 나는 다시 광주에서 서울로 떠나야 했다. 서울로 올라와 집에서 사무실을 오가다가 늦은 겨울 아침 출근 길에 1년 후배와 같이 지하철 안에서 아내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 그날 천국으로 보내드렸다. 다음 해 여름 청주로 다시 옮긴 후 사무실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숙소에서 신학 서적을 정독하며 지내던 어느 날 이른 아침 동편 하늘에 아침 빛과 구름이 맞물려 열린 구름사이로 빛이 내려오는 현상을 보고 감탄을 하였다. 그 현상을 보면서 광주와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갈 때 새벽녘 고속도로 굽은 구역에서 운전하는 차 앞으로 달려오는 게 고라니가 아니라 암벽이었던 장면을 보여준 날이 떠올라 기도를 드리며 긴 묵상을 하였다. 내가 보았다고 한 장면이나 현상이 하나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그 동안 지내왔던 고된 시간들에 대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의 응축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지득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잡고 있던 도덕률이 서적에 적혀있는 문자가 아니라 실천으로 현시되어야 하는 삶의 원리이자 정언명령이라는 사실을 되새겨보았다. 자신을 가해하는 부친과 아우들을 관용과 포용으로 아우르는 순 황제, 육신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수사제 태자, 갈대밭에 있는 배에 올라예상된 희생을 감수하는 공자 급과 수, 리디아 크로이소스와 결전을 앞둔 아브라다타스에게 맹세하는 판테아의 언행들, 이는 인간들이 이뤄낸 삶의 원리들이었다. 그러한 삶의 원리들을 실천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 들어있는 황금률이 자리잡게 되고, 사랑과 겸손이 뒤따른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수년 전 서울,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가는 고속도로와 길에서 나 보다 먼저 내미는 손길들을 감사하게 받았고, 어머님을 천국으로 보내드린 후 더 깊이 깨달으며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제 서울과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가던 그 길을 나 자신의 순례길이라고 내 마음과 영혼속에 새겨놓고, 그 새김을 하나하나 실천하리라 묵상해 본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4.10.16 18:35

수도권 집중 뉴스를 읽으며 불꽃놀이를 듣네!

선친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일세 타향은 낯설어도 눈은 낯익어 고향을 떠나온 지 고향을 이별한 지 몇몇 해던가 (<고향설>, 조명암 작사) 어린 시절, 서발 장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고단한 삶을 겪으며 할머니와 단 두 분이 고향 담양에서 쫓겨나듯 떠나 순창에 닿았지만, 그곳에서도 땅 한 뙈기 없는 팍팍한 삶에 떠밀려 다시 군산으로 오셨단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았고, 결국 배우신 목수 일을 터전 삼아 그 무렵, 머나먼 경기도 수색으로 일거리를 찾아 가셨단다. 그 추운 겨울, 곱은 손으로 나무를 매만질 때 내리는 눈송이를 보며 늘 부르셨다는 노래가 <고향설>, 즉 <고향의 눈>이다. 그러니 어찌 그 노래를 평생 잊으실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노래를 부른 가수 이름마저 백년설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런데 ‘고향설’과 ‘고향의 눈’이 주는 음색은 많이 다르다. 우리에게 훨씬 정감을 불러일으킬 듯한 고유어 ‘고향의 눈’보다, 한자어 ‘고향설’이 막연하면서도 깊고 낯설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주는 까닭을 밝히는 것은 언어학자의 몫이리라. 우리는 그저 고향에서 머나먼 땅에 소리없이 내리는 눈송이의 촉감을 눈물로 녹이면 그뿐이다. 전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수도권으로 몰려든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50년 전 고향을 떠나 수도 서울로 옮겨온 나를 떠올린다. 다행히 열서너 살 소년은 고향이라는 – 결코 고유어로 표현할 수 없는 – 단어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수도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고향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아야 이웃 아파트뿐일 것이다. 층간소음과 주차 문제로 삭막하기 그지없는 바람이 부는 그곳 말이다. 수도권 집중 현상은 그래서 단순히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다. 아파트 숲에서 내리는 눈은 치우기 힘든 겨울의 불청객에 불과할지 모른다. 눈이 내린다는 예고에는 어김없이 빙판길 조심, 출근길 조심이라는 경계 신호가 뒤따른다. 도시의 삶에서 눈은 향수와 그리움, 어머니와 고향의 숨결이 아니라 귀찮고 치워야 하는 존재가 된 셈이다. 그뿐이랴. 가을 바람과 봄 바람, 겨울 바람의 표정 변화는 우리를 가슴 설레게도 하고, 깊은 우수에 잠기게도 하였다. 그러나 아파트 숲에서 부는 바람은 베르누이의 정리를 따르는 자연현상일 뿐이다. 아무 숨결도, 색상도 갖지 않은 기압 현상. 어제 저녁 서울 도심에서는 수백억 원을 단 한 시간 동안 터뜨리는 불꽃축제가 열렸다. 전혀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편의점에서는 한 시간에 천문학적 매상을 올렸다는 기사가 나오고, 가장 긴 기다림의 행렬은 이동식 화장실 앞에서 펼쳐졌다는 소식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다. 한 시간의 기쁨을 위해 열 시간의 수고도 마다하치 않는 도시인들의 곤핍한 삶이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속에 낭만 한 점 품지 못한 이웃들이 그 안타까움을 해원(解冤)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상이 그렇게 아플 수 없었다. 아무도 그렇게 연결하지 않겠지만, 나는 고향의 상실과 인위적 불꽃놀이를 동시에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머릿속에 고향이 떠오른 이 가을에, 전군가도에 퍼지는 저녁놀의 품 안으로 여행 한 번 가야겠다. 빠르디 빠른 KTX 대신 50년 전 준급행(완행보다는 빠르고 급행보다는 느린)보다 세 배는 빠른 군산행 서해금빛열차를 타고서. 김흥식(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4.10.09 19:07

정읍사 노래 속 서울을 걷는다

해마다 봄·가을이면 귀한 손님이 오신다. 꿈과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이 오신다. 정읍 신태인고와 왕신여고 학생들이다. 7년 전 학생들과 함께 한양도성 성곽길을 걸었다. 첫 번째 책이 나올 무렵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연한 기회였다. 출판기념회 제쳐두고 그들을 보러 갔다. 청년들과 함께 서울 속 정읍을 찾아 흥인지문에서 돈의문 터까지 순성하였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리’ 백악산 정상에 오르니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목이 마르고 지쳐갈 무렵 어디선가 들리는 노랫소리에 모두 웃는다. 학생들과 선생님도 백악산 정상 바위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경복궁과 목멱산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마치 정읍사 여인처럼 산 위에 올라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듯 한양도성 따라 걷는다. 천 년 동안 계속 불려진 노래가 정읍사다. 애달프지만 장단에 맞추어 박수로 호응한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도성 안 정읍의 흔적은 무엇일까? 낙타산 성벽에 井邑(정읍) 각자성석이 있다. 600여 년 전 한강 건너 한양도성을 만든 정읍 사람들 흔적이다. 그들도 정읍사 노래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갈 그날을 기다렸으리라. 발길을 옮긴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 광장 이순신 상이 있는 곳이 황토현이었다. 그 옛날 청계천으로 물이 흘러가는 언덕배기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순신 장군이 정읍 초대 현감이셨다. 정읍 성황산 기슭 충렬사에 기념비와 영정이 있다. 그곳은 일제강점기 신사 터다. 이제 충무공 이순신 상과 함께 정읍시청이 있는 충무공원이 되었다. 서울에는 충무로와 충무로역이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는 거리다. 보신각 가는 길 종각역 5번 출구 앞 황금색 상이 웃는다. 녹두장군 전봉준 상이다. 매서운 눈빛, 꼿꼿한 허리, 불끈 쥔 주먹, 다리를 걸치며 누군가 응시하는 눈빛 그리고 오른손을 바닥에 받치고 앉아 기다린다. 종각이 있는 이곳은 전옥서 옛 감옥 터다. 회문산에서 이곳으로 압송되었다. 1895년 전옥서에서 속전속결 첫 재판을 받고, 종로 한복판에서 손화중·최경선·성두환·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127년 전 41세 나이로 별이 되었다. 이곳은 서울 속 전봉준 거리다. 아니 정읍의 거리다. 보신각 건너 탑골공원 지나 수운회관까지 동학의 길이자, 녹두장군을 기리는 기억의 공간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꽃에 앉지 마라’ 파랑새 노랫소리와 함께 학생들과 걷는다. 뜨거운 태양 속에 덥지만 길 위에서 묻고 답하며 길을 찾는다. 길 위에서 정읍을 생각하고, 정읍에서 찾아온 청년을 보며 함께 미래도 그린다. 그들이 힘이요, 청춘이 곧 미래다. 올해 효창원을 함께 걸었다. 도성 밖 추모 공간이다. 이른 아침 새들이 반기는 고요한 공간이다. 초록색으로 바뀌는 계절 발걸음도 가볍다. 효창원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이었다. 해방 후 목멱산과 한강이 보이는 독립운동가 묘역이 되었다.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묘가 나란히 있다. 백정기의사기념관과 동상은 정읍에, 백정기 의사 묘는 효창원에 있다. 의열사와 삼의사 묘가 있는 이곳은 역사의 숨결이자, 기록의 공간이다. 몸과 맘을 바친 독립운동가 정신을 되찾는 곳이다. 정이 메말라가는 요즘, 부부간 사랑과 남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담긴 정읍사(井邑詞) 노래가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삭막한 서울에 정다운 정읍 청년들이 꿈과 희망을 심고 간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09.25 18:00

어른들의 대화, 상상의 보고(寶庫)

지금은 불쑥 남의 집에 가면 실례이지만, 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초대와 무관한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친가, 외가, 진외가 등 부모님을 중심으로 이어진 친인척들과 촌수를 따지기도 뭣한 먼 일가들이 명절이나 집안 제사, 하다못해 장날 특별한 용건 없이 드나들었다. 그들이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린 나로서는 대부분 이해할 수 없어 생각나지 않지만, 그 광경은 생생하다. 울 정도로 배꼽 잡고 웃다가 허기지면 자주 돌아오는 생일 떡이나 국수를 끓여 먹기도 했다. 버스 시간에 누군가는 떠나고 다른 이가 그 자리를 채워도 대화는 탈 없이 이어졌으니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땐 왜 그렇게 심심했던지, 학교를 파하고 놀다가 집에 왔어도 저녁 식사 때까지 하루가 참 길었다. 일없이 곤충을 잡아 빈 병에 넣어 관찰하기도 했으니 손님으로 집안이 북적이면 싫지 않았다. 구석에 엎드려 숙제하는 것처럼 뭔가를 끄적거렸지만, 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TV가 없던 시절 그들의 만담은 내게 연속극 재방송 같았는데, 왜 어른들은 비슷한 이야기에도 매번 재미있어할까 의아했다. 평교, 주산, 동진, 성내, 소성, 이평 등지에서 온 착하디착한 사람들, 그들의 자손은 지금 전주나 서울, 그리고 그 주변 어딘가 아파트에 살고 있을 것이다. 하도 많이 들어 귀에 못 박힌 군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훈련은 고된데 부식이 형편없던 시절, 중대장이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 한 마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끝내 범인이 나타나지 않자, 중대원들 전부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토끼가 왜 죽었나”라는 구호로 토끼뜀을 시켰다는 이야기다. 기억이 부실한 탓도 있지만 옮겨 쓰고 보니 별 시답지도 않다. 누군가의 뱃속에서 이미 소화가 돼버렸을 토끼로 화난 사람은 중대장 한 사람이었을 뿐, 부대원들 모두 전우애로 똘똘 뭉쳐 그 기상천외한 구호를 외치며 뛰었을 상황은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된다. 화자도 어쩌면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군대 이야기에 으레 들어가는 과장은 당연하고, 앞뒤로 높으신 중대장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장치가 들어가면 한 편의 완벽한 소극이 된다. 다음번 장날에 새로운 청중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이야기는 재현됐을 것이니 볕이 잘든 우리 집 마루는 일종의 소극장이었던 셈이다. 나는 논문이나 책을 저술할 때 비유를 즐겨 쓴다. 내용보다는 저술 중에 나온 비유가 좋다는 말을 간혹 듣는다. 그리고 대화나 강연 중에 ‘예를 들어’나 ‘비유컨대’로 새로 시작할 때가 많다. 그 말투는 단언컨대 장날 우리 집 손님들의 대화에서 익힌 것이리라. 그들은 자기 말에 집중케 하려고 월남전, 농사, 하다못해 소, 돼지, 닭까지 소품으로 썼다. 그 과정에서 비유와 우화, 메타포가 등장했고, 어린 나는 이런 문화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사회과 부도에서 본 나라와 광주, 부산 등 대도시, 어른이 되어야 가는 군대를 그려볼 수 있었다. 상상력이란 근육이 있다면 그때 부쩍 자랐을 것이다. 주교황청 한국대사를 지냈던 성염 교수가 번역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비록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소싯적부터 조그만 잔에 담긴 물을 보고도 나는 바다를 상상할 수 있었다.” 감히 이에 견줄 바 못 되지만, 장날과 명절 어른들의 대화는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책이자 상상의 세계였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4.09.18 17:07

봄볕과 가을비를 같이 한 친구와 아우들

고향 마을 어귀에서 들리는 여름 새소리를 추억하던 소년이 청년으로 커서 전북대학교 법정대학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봄볕이 따사롭지만 아직은 쌀쌀한 무렵 신입생이라서 설레는 마음으로 대학 건물을 오가며 1층 도서관에 둥지를 만들어 놓습니다. 대학에 들어왔지만 앞으로 어떤 길을 선택해서 가야 할 지를 생각하며 1학년 초반을 지나던 중, 청년은 1층 도서관에 놓아둔 검정색 책가방과 책들을 모두 도둑맞습니다. 청년이 망연자실하여 의자에 힘들게 기대어 있다가 도서관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한 친구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합니다. . 하루, 이틀 지나서 몇 권의 다른 책을 들고 오가는 길에 그 친구가 청년에게 힘내라고 말하면서 검정색 가방을 건넵니다. 그 안에는 도둑맞은 책들을 새로 사서 넣어 둔 채로. 청년은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겸연쩍게 그 가방을 받아 들었습니다. 전공 서적 1권 사고 나면 시내버스 회수권(시내버스 승차권)을 사는 게 주저되어 걸어 다닌 일이 생생한 터라 너무 감사했습니다. 덩치 큰 익산 친구, 하얀 고무신 신은 춘포 친구, 중키에 점잖은 부안 친구, 작은 키에 체격좋은 부안 친구와 같이 어머님이 끓여주신 김치찌개를 단칸 셋방에서 나눠 먹으며 감사의 마음도 나누고 순전한 우정도 채웁니다. 청년이 미래 방향을 정하여 2층 도서관과 중앙도서관을 오가며 그 친구들과 같이 대학생활을 하며 꿈을 키웁니다. 덩치 큰 익산 친구와 하얀 고무신 신은 춘포 친구는 새벽 열차를 타고 걸어 다니고, 작은 키에 체격 좋은 부안 친구는 대학 근처에서 자취 하며 같이 어울려 소망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즈음 청년은 완산고등학교 1학년 때 헤어진 임실 친구를 대학에서 다시 만나 그 기쁨을 간직한 채 평생 법률 직역에서 같이 지내게 됩니다. 대학 근처에서 자취하는 중키에 안경 낀 김제 친구, 안경 낀 까무잡잡한 정읍 친구의 자췻방에서, 청년과 비슷한 키에 논리적 말솜씨가 좋은 남원 친구와 더불어 우정의 공간을 채워 갑니다. 한 친구는 시험 보러 다니는 청년의 단칸 셋방에 들러 어머님 몰래 청년이 서울이나 대전으로 시험을 보러 가는 데 들어가는 차비를 이불 속에 넣어 두고 갑니다. 그 어느 날 6월 항쟁 한 가운데 한 친구가 붙잡혀 갔는데도 법률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청년과 친구들은 분노를 삼키며 굵은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어머님께서 자주 끓여주시는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던 친구들과 1, 2살 아래 아우들이 어느 늦은 가을날 저녁 비를 흠뻑 맞고 눈물이 범벅되어 청년을 끌어안고 축하의 탄성을 지릅니다. 그들은 전북대학교에서 청년의 단칸 셋방까지 시오리가 넘는 거리를 차가운 비를 마다하지 않은 채 맞고 걸어와 밤새 많은 얘기를 나누다 아침에서야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 청년이 전주지방검찰청에 근무하면서 많은 친구와 아우들과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오래전부터 친구와 아우들과의 소중한 만남을 열어 주신 감사함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께 드립니다. 청년이 장년이 되어서도 늘 선함과 배려, 의로움과 자애로움을 피어나게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청년은 작고 빈한했지만 장년이 되어서까지 평생 같이 하는 친구들과 아우들이 많은 우정의 부자가 되어 있음을 마음에 심어두고 감사 기도를 붙잡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아나니아, 키루스 옆에는 고브리아스와 가다타스, 크리산타스가 있었고, 관중에게는 포숙, 백사에게는 한음, 청년을 지나 장년이 된 제게는 각 분야의 리더나 전문가가 되어 있는 친구들과 아우들이 있음을 깊이 사유해 봅니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4.09.11 15:32

기차를 탔다! 그리고 놀랐다!

지방 강연을 다녀오는 길에 기차를 탔다. 과거에 기차를 떠올리면 달걀, 가락국수, 구멍 뚫린 차표 같은 것이 떠오르는 반면, 오늘날 기차를 타면 보이는 건 99% 스마트폰(나야 수중자판기(手中自販機라는 표현을 고집하지만, 다른 분들이 모르실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상품을 개발한 자가 팔기 위해 붙인, 장사용 명칭을 그대로 쓴다)이다. 오늘날 기차를 타면서 느끼는 또 다른 하나는 시간 관념이다. 초등학교 때 서울 유학 중 고향 군산에 가기 위해 탄 장항선은, 기억이 맞다면 적어도 6시간 이상을 달렸다. 오늘날 KTX는 전주까지 2시간이면 족하다. 그런데 왜 오늘날 기차가 훨씬 지루한지 모르겠다. 더 빨리 다가오는 풍경과 더 빨리 사라지는 풍경은 파노라마적인 경험을 주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한 듯하다. 경험이 카이로스로 승화되지 못한 채 죽은 크로노스의 시간에 멈추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잘 모르겠다. 여하튼 호두과자 상인도 없고, 이동식 매장을 끌고 다니는 종사원도 없는 요즘 기차는 참 지루하다. 그래서 모두 수중자판기, 아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차! 이런 꼰대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앞자리에 붙은 주머니에 잡지가 한 권 꽂혀 있다. 서둘러 꺼내 본다. 그러자 몇 가지가 나를 놀라게 한다. 우선 정말 잘 만든 잡지인데 보관 상태가 너무 깨끗하다. 공중이 사용하는 물건이 이토록 깨끗한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시민 모두의 공중도덕 관념이 향상되어서라면 참으로 좋을 텐데....... 그런 건 아닐 것이다. 2년 전인가?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나선 한 사람이 기차 앞좌석에 구두를 신은 채 발을 턱 걸쳐 놓은 모습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을 통틀어,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 다른 사람이 앉을 게 분명한 좌석에 구두를 신은 채 발을 올려 놓을 사람은 내 다섯 손가락으로 꼽기에도 부족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문제삼는 이는 국민의 절반이 안 되는 듯하다. 그러니 시민 의식 덕에 책이 깨끗이 보관되는 것은 아니리라. 그렇다면 승객 대부분이 수중자판기에 관심을 집중하고 책은 멀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안타깝다. 이렇게 잘 만든 책이 이렇게 도외시되다니! 한 5분에 걸쳐 펼쳐만 보더라도 삶에 도움이 될 텐데. 특히 승객이 젊은이라면 더더욱 그럴 텐데. 왜? 우선 디자인이 워낙 뛰어나다. 그러니 넘겨만 보더라도 디자인적 감각을 키울 수 있다. 국내 여행지 순례부터 맛집 탐구, 나아가 전국의 행사 정보까지 신나는 것 투성이다. 그런 정보 구하려면 열심히 검색해야 하지 않나? 반면에, 책 한 권 다 넘기는 데 고작 5분이면 족하니,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이른바 크로노스 시간의 카이로스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더욱 감동시킨 것은 따로 있었다. <‘책 향기 따라’-전북 전주에서 특별한 테마로 꾸민 작은도서관에 들렀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기사다. 사진은 또 왜 이리 멋진가! 학산숲속시집도서관, 서학예술마을도서관을 가진 주민들은 선택받은 시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도서관 여행 프로그램을 매주 토요일 운영한단다. 이런 문화적인 일이! 그래! 이번 토요일에는 시간을 내는 거야. 그래서 학산숲속시집도서관에 가서 백석 시 한 편 필사하고 와야지.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4.09.04 16:41

만복사저포기, 천년 남원을 품다

가을이 오면 그곳에 가고 싶다. 산들바람 따라 상큼한 솔향과 감 익어가는 그곳은 어머니 품과 같다. 무더위 지나니 들판이 제법 누렇다. '남원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 수진이 날 진이 해동청 보라매...' 노랫가락에 발걸음도 가볍다. 누구는 남한산성 아니냐고 말한다. 남원성 너머 교룡산에 천년을 머금은 천혜의 요새 교룡산성이 남원산성이다. 그 옛날 남원에 용이 승천하기 전 교룡(蛟龍)이 살았다. 백제시대 518m 높이의 교룡산에 성곽을 3.12km 쌓았다. 성 안에 우물이 99개와 계곡마다 수문이 3개나 있던 철옹성이다. 교룡산성 동쪽 홍예문에 옹성이 있어 지금 보아도 튼실하다. 과연 누가 성을 쌓았을까? 홍예문 지나 비석들도 오랜 흔적을 보여준다. 별장과 장군의 이름이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즐비하다. 계곡 따라 오르면 선국사 대웅전 아래 보제루가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다. 동학농민혁명군 김개남 장군이 머물던 곳이다. 그는 전봉준 장군과 뜻을 같이했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철학이 약간 달랐다. 누구의 영향이었을까. 동학의 시작을 알린 수운 최제우가 머물며 '동경대전'을 쓰고, '칼노래'를 부르며, 검무를 추었다고 한다. 남원은 그냥 남원이 아니다. 춘향이가 살던 광한루, 이도령과 만난 오작교, 여뀌꽃 피는 요천(蓼川)이 흐르는 남원은 사랑을 간직한 도시이자 천년 역사를 품은 도시다. 남원은 천년 전에도 남원(南原)으로 불리었다. 통일신라 5소경 중 남원경처럼 옛 이름을 간직한 곳은 남원이 유일하다. 백제의 문화도시, 신라의 역사도시에 남원성과 교룡산성 옆에 선원사와 만복사가 있다. 고려 사찰과 탑들이 지리산과 섬진강변에 많다. 고려 말 왜구 침입에 이성계 장군과 포은 정몽주 그리고 만육 최양 종사관이 황산대첩을 이룬 곳도 남원이다. 남원 운봉과 인월에 가면 역사 속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피바위와 인풍리에서 황산대첩 후 남원성 옆 만복사가 있는 왕정동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남원성 안 용성관에서 미래를 기획한다. 그 후 황희 정승이 남원에 귀양 와 광한루를 짓고, 정인지가 오작교와 삼신산에 정자도 꾸민다. 또한 매월당 김시습은 최초의 한문소설 '만복사 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남원성 서문 옆 만복사에서 구상한다. 삶과 죽음에 얽힌 사랑 이야기가 음악과 함께 내려온다. 남원은 춘향가와 흥보가 판소리가 있지만, 더 깊은 역사 속 정유재란 만인의총 이야기가 남아 있다. 가을에 꼭 한번 가야할 도시가 남원이다. 지리산 오르기 전 섬진강 따라 뱃놀이 하기 전 남원성 옆 만복사지에 꼭 가보자. 만복사지에 가면 눈에 보이는 보물이 많다. 만복사 규모를 알려주는 만복사지 당간지주, 오층석탑과 석조대좌 그리고 석조여래입상이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다. 만복사 석인상 얼굴에 미소가 머문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양생처럼 살포시 웃는다. 남원역에서 5분 거리에 만복사지가 있다. 광한루까지 걸어서 10분이면 족하다. 남원성 북쪽 만인의총도 걸어가보자. 427년 전 정유재란 때 스러져간 우리의 조상도 만날 수 있다. 그날의 함성을 들었다면 술 한잔 올린 후 교룡산성으로 가자. 성안 보제루에 앉으면 지리산과 요천이 보인다. 가을에 남원은 언제나 엄니 품과 같다. 남원에 가면 따뜻한 온기를 꼭 담아 오자. 가을이 주는 힐링 도시, 남원~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08.28 15:15

조상현 국창과 사철가

1987년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직후 성남에 있는 새마을연수원에 일주일 입소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공무원 소양 교육을 받은 것 같은데,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때 평생 함께할 친구를 얻었다. 판소리.. 당시 40대 말 한창 소리에 힘이 붙었을 조상현 명창은 강당에 모인 300 명의 연수생들에게 춘향가의 한 대목을 부르고 그에 덧붙여 강의하는, 요샛말로 ‘렉처 콘서트’를 했다. 그날의 체험은 2년의 연수 기간 중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판결문 쓸 때 ‘...고’와 ‘...며’를 번갈아 쓰라는 이른바 ‘고며 체’라든지, 불기소장 작성 때 상급자 도장보다 작은 것을 쓰되 인영이 칸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도제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사상에 올려진 맨들맨들한 밤처럼 이리 깎이고 저리 깎여 2년이 지나고 나니 크게 다를 것 없는 사람이 됐던 그 시절, 거칠되 거칠 것 없는 우리의 소리를 처음 들었으니 다듬어지기를 거부하는 성정에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나는 판소리 애호가가 됐다. 물론 그때 소리를 처음 접한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우리 집 대청마루 한쪽에는 늘 북이 놓여 있었다. 간혹 집안 어른들이 북채를 잡았던 기억이 난다. 연초가 되면 마을 농악대가 집마다 꽹과리, 장구, 징을 치며 놀다가는 장면을 보고 자랐는데, 꽹과리의 날카로운 소리가 그때는 소음으로 들렸다. 그런 문화적 경험이 쟁여졌기 때문일까 조상현 명창의 공연 겸 강연을 들은 후 나는 ‘귀명창’의 길로 들어섰다. 아예 판소리 CD를 차에 넣고 먼 길 갈 때마다 듣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둘째 녀석 입에서 갑자기 “이산 저산 꽃이 피니..”가 나오는 게 아닌가? 사철가에 나오는 많은 한자어의 뜻을 알 턱이 없는 어린아이가 읊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학예회 때 부르고야 말았다. 가사 한번 본 적 없이 귀로 듣고 입으로 뱉어낸 것이다. 아내 말에 따르면 행사 후 몇몇 학부모로부터 아이가 어디서 국악을 배웠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 브리태니커에서 낸 조상현 소리 / 김명환 북의 춘향가 완창 CD(6장)를 사서 듣기도 했다. 공연 경험 중에는 20여 년 전 국립극장 야외극장에서 있었던 안숙선 명창의 심청가 완창을 나의 인생 공연으로 꼽는다. 한때는 오정숙 명창의 수궁가(북 김청만)를 차 안에서 즐겨 듣곤 했는데, 그 CD 앞부분에 식전음식처럼 사철가가 나온다. 인생을 사계절로 비유해 계절을 한 바퀴 돌고 난 백발노인이 삶을 회고하며 부모효도, 형제우애, 우정을 노래한 불과 5분 남짓 단가를 나는 그 어떤 사계(四季)보다 좋아한다. 비발디와 차이콥스키의 사계도 계절의 아름다움이 잘 들어 있지만, 정작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사철가를 인생가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사철가가 판소리처럼 오래된 줄 알았는데, 최근에야 조상현 국창이 20대 만든 것을 알게 됐다. 설익었던 나의 20대를 생각하니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지난 18일 전주세계소리축제 폐막을 장식한 조상현과 신영희 국창의 공연에 가지 못해 아쉽다. 조 국창은 제자를 많이 길러낸 국악인으로 유명하다. 나는 비록 그의 수하에서 소리를 배운 적이 없지만, 40여 년 전 그의 짧은 렉처 콘서트로 ‘듣는 제자’가 되었다. 부디 건강하셔서 귀명창을 많이 키워내시기를 부탁드린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4.08.21 18:35

낮음으로 머무는 공간에서

제가 법조인의 길에 들어선 이후 현직에서 일한 때로부터 12년이 지나서야 전주지방검찰청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사법연수원을 다니는 동안 실무 수습 과정 1년도 전주에서 지내기도 하였지만, 그 이후 12년 지난 즈음에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법조삼성상이 있는 공간을 찾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북대학교 법과대학을 다닐 때 도서관에서 법률 서적을 보다가 지칠 때 였는지 아니면 법조인이 되기 위해 연수를 받던 시점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작고하신 사도 법관님에 대한 글을 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분에 대한 평전을 여러 번 읽었기 때문에 이따끔 발길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법조의 현직에 계실 때 직위를 개의치 않으시고 도시락을 직접 싸서 들고 다니시며 일하셨던 청빈한 법조인이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곳인 교도소를 찾아 그 분이 유죄판결을 선고한 사람을 면회하여 신앙으로 인도하시는 성자와 같으신 삶을 사셨습니다. 제가 순전한 청년 시절 사도 법관님에 대한 글을 읽고 아주 깊은 감명을 받으며, 감동의 눈물까지 지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살아가신 인간으로서의 행로, 법조인으로 걸어가신 크고 깊은 걸음은 제 마음과 영혼의 깊은 곳에 자리잡았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물이 밤낮으로 흘러 그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은 채 사람이 거처하려 하지 않는 곳에 머무는 것처럼, 사도 법관님은 인간과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겸허함을 간직한 수도자처럼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에 대한 경외심을 늘 품고 낮은 곳을 찾아다니신 분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 가운데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을 잘 낮추었기 때문이라는 현자의 경구가 있는 것처럼,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진리의 말씀에 다다르게 됩니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두 분께서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본체에 관하여 긴 시간 동안 담론을 나누다가 헤어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율곡 이이에게 퇴계 이황께서 고갯마루까지 걸어나와 배웅하며 작별 인사를 건네 드립니다. “거경궁리(居敬窮理)”, 마음을 전일하고 바르게 삼감으로 근본 이치를 깨달아 실천하라는 마음의 인사였습니다. 이러한 현자들과 성자 같으신 분의 낮음으로 가는 걸음걸이는 그 곳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진리의 빛과 영광의 길이 있다는 견성과 활연관통의 경지를 넘어선 참된 신앙의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유해 봅니다. 이러한 사유의 지향성은 바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을 향한 자유의지가 발현된 것이자 그분의 뜻에 따르려는 경외심에 기반을 두는 것일 것입니다. 제가 법조인으로 사는 동안 이러한 현자들의 깨달은 경구를 이정표로 삼고, 제 마음 안에서 우러나오는 가언명령이 아닌 정언명령을 꼭 붙잡고, 늘 마음과 영혼 안에 계시는 영원한 존재자에 대한 경외의 믿음으로 살아가리라 소망하고, 끊임없이 추구하리라 다짐하고 기도해 봅니다. 제가 가끔 전주에 다녀오는 길에는 덕진공원에 가보려고 합니다. 존경하는 사도 법관님에 대한 흠모가 낮은 곳으로 내려온 물처럼 머물러 있고, 청년 시절의 열정과 의지가 호수에 피어 있는 꽃으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되며, 믿음의 싹이 튼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4.08.07 18:01

전북에 출판학교 프로그램 하나쯤 어떨까?

오늘날 세상에는 독자보다 저자가 넘쳐난다. 그래서일까? 서점에는 손님이 없는데, 오늘도 출판사는 새롭게 문을 연다. 그래서 그런지 독립출판, 1인출판 전성시대다. 먼저 출판의 길을 걸어온 선배로서 참으로 걱정이 앞서는 까닭이다. 스물 셋에 뜻을 세우고 서른 셋에 설립한 출판사는 쉰 살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자립의 기틀을 닦았다. 도서관 한 귀퉁이에 내가 세운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 꽂혀 있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은 상상하기 힘든 희열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어렵고 힘든 시절을 거쳐왔다. 그 고난의 파도를 넘은 힘은 오직 출판!에 삶을 걸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독백으로, 방백으로, 연설로 말한다. “저는 정말 세상에, 독자에, 하늘에 감사합니다. 내가 뜻을 세운 일을 하며 굶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삶을 건 후 출판으로 평생을 걷다 보니 또 다른 뜻이 눈에 들어왔다. “출판을 하겠다고 나서는 후배들을 위해 할 일은 없을까? 더군다나 내 고향 전북에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라는 대표적인 정부기관까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터무니도 없는 꿈을 꾸다 보니 몽상도 하게 된다. “고향에 출판학교 하나 운영하면 어떨까? 지역에서 오랜 기간 뿌리를 내리며 인문학, 문학, 문화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대학과 정부 기관, 그리고 몸은 고향을 떠났지만 마음은 늘 그곳에 씨를 뿌리는 출판인들이 삼위일체를 이룬 후, 삶을 사랑하고 문명을 아끼는 젊은이들에게 출판하는 힘, 출판의 현실을 전하는 프로그램 하나쯤 운영하면 어떨까? 명칭은 고향 출신 이병기 선생님을 기려 가람학교로 할까? 아니면 채만식을 기리는 백릉학교나 시인 신석정을 기리는 석정학교도 좋겠다. 아, 혼불학교도 있구나.” 사실 출판은 돈의 양으로 무게를 잴 수 없는 고귀한 작업이다. 한 시대를 기록한 후 세상에 전파하고, 후대에 전승하는 이 놀라운 작업을 어찌 자본의 잣대로 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세상 모든 상품을 구입하는 이들은 소비자(消費者), 즉 ‘상품을 사서 써 버리는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오직 단 한 가지, 책을 구입하는 이들만은 독자(讀者), 즉 ‘읽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하기에 출판에 뜻을 세운 젊은이들이 걷게 될 험난한 길을 떠올린다고 해도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한마디 거들 뿐이다. “첫 삽을 뜨십시오. 다만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자기 결정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물론 그 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실력를 탄탄히 쌓으면서. 겸손하게, 지치지 말고, 앞선 선배들의 무릎 아래서 배우면서 함께 나아갑시다.” 기회가 닿으면 그런 일에 일조를 하고 싶다. 졸업 후 서울로 향하는 길 외에는 오리무중인 시대에, 문화의 고장, 문학의 고장, 문명의 고장에서 젊은이들과 부대끼며 새로운 출판의 꿈을 꾸고 싶다. 계절학교도 좋고, 주말학교도 좋고, 정기강좌면 또 어떠랴! 교실을 떠나 출판도시 견학도 해 보고, 저자도 만나 보며, 인쇄 현장, 제본 현장, 유통 현장, 나아가 서점 담당자도 만나보면서 실무적 힘도 배양하다 보면 더 큰 뜻을 세우는 후학들이 왜 성장하지 않겠는가. 이미 고향 곳곳에서 출판운동, 문화운동에 여념이 없는 선학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과 힘을 합한다면 세상이 눈여겨 볼 만한 성과를 거둘지 누가 알겠는가.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4.07.31 15:21

서울과 전주 역사와 문화를 함께 보자

몇 해 전 이맘때 비긴어게인 경기전 버스킹이 있었다. 역사의 도시이자 전통 문화를 간직한 전주에서 여름날 밤 음악이 울려 퍼졌다. 한옥마을인가 했더니 궁궐같은 전각에 궁담길 옆 오래된 나무가 세월의 깊이를 보여준다. 하마비와 외삼문 그리고 홍살문이 보이는 전형적인 서울의 고궁과 같은 운치있는 풍경이다. ‘경사스러운 터에 지어진 보물 같은 공간’이 경기전(慶基殿)이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 어진과 조선왕조실록 보전기적비가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전주가 지켜온 조선의 자긍심이 바로 경기전이다. 경복궁은 알아도 경기전은 잘 모른다. 더구나 한양도성 관문인 숭례문은 가 보았어도 전주성 정문인 풍남문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1907년 성문과 성벽이 헐린 후 전라감영 전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이 풍남문이다. 서울 숭례문 및 흥인지문과 규모 및 옹성이 비슷하다. 풍패지향(豐沛之鄕)은 조선왕조의 발원지 전주 이씨 본향인 전주다. 그리고 호남제일성 전주성 남문이 경기전 옆 풍남문이다. 600여 년 전 이성계가 남원 황산대첩에서 승리 후 전주 오목대에 올라 조선 창업을 구상하며 풍년가로 종친과 하늘에 고했다. 전주와 서울은 다른 듯 같은 계획적 역사·문화 도시다. 오래된 역사가 있어 동네마다 도성과 읍성에 얽힌 이야기가 풍성하다. 한양도성에 한강이 있다면, 전주성에 전주천이 있다. 한양도성 안 왕이 사는 경복궁과 창덕궁이 있듯, 전주성 안 왕의 어진이 있는 경기전과 풍패지관 전주 객사가 성안에 있다. 또한 숭례문 옆 남대문시장이 있듯, 풍남문 밖 남부시장이 시민과 관광객의 먹거리를 보장하고 있다. 도성 안 서촌 한옥마을과 북촌 한옥마을처럼, 읍성 밖 한옥마을이 전통과 문화를 지키며 멋스러움과 여유로움까지 선사한다. 서울과 전주는 가톨릭 역사도 비슷하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본당이자 상징은 김범우 토마스 집터인 명례방에 지은 명동성당이다. 1898년 대한제국 시대 우여곡절 끝에 네오고딕 양식의 건물이 도성 안 명동대성당이다. 1791년 신유박해 때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등 호남 지역 많은 가톨릭 신자의 순교 터에 전동성당(殿洞聖堂)을 지었다. 풍남문 밖 전동성당은 호남 지역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건물이다. 전동성당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은 풍남문 성벽이 헐린 후 화강암과 성돌이 주춧돌로 사용되었다. 전주 없이는 서울도 없다. 전주가 본관인 조선왕조 시작이 태조 이성계이듯, 조선왕조실록의 대기록을 지킨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조선의 명맥을 이었다. 서울 한양도성은 600년 역사를 간직하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한다. 한양도성에 있었던 사대문(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광희문·소의문·창의문)에 훼철된 성문을 복원하고, 소실된 성벽을 이으려고 한다. 600년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풍패지향 전주성도 복원되기를 바란다. 전국 팔도 중 가장 크고 웅장했던 전라감영 건물들과 전주성 사대문(풍남문·패서문·완동문·공북문)도 복원되기를 희망한다. 전주와 서울은 사실 비슷하다. 두 도시는 공간적으로 멀지만 시간적으로 공통점이 많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울과 대한민국 전통을 간직한 전주는 해외 관광객과 국내 관광객들이 가장 가고 싶은 도시다. 가서 머물고 보고 배우는 역사·문화·생태도시로 접점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최철호 소장은 한양도성 전문가로 양천문화재단 비상임 이사·(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4.07.24 15:08

전주 여행

맞벌이로 바쁜 아들 부부가 여름휴가를 전주로 간다고 해서 귀를 의심했다. 내 고향이긴 해도 요즘 비행기 타고 가는 흔하디흔한 일본이나 제주가 아닌 전주라니.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기 위해 간혹 고창에 간 적은 있어도 뜻밖이라 생각했다. 나는 부안에 언제 가보았나 생각하니 아득하다. 간혹 격포에 있는 콘도에 하루 이틀 묵었던 적은 있으나, 정작 내가 태어난 부안읍에 간 지는 꽤 된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까 싶은 우리 집,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있는 신작로. 신작로(新作路)라니⋯. 50년 가까이 지났어도 여전히 내게는 근사한 ‘새로 만든 길’이다. 한여름 더위에 오래 서 있으면 신발 바닥이 뜨거워지고 도로 군데군데가 물컹해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였다. 그 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 아무도 나를 알아볼 리 없고 내가 아는 가게나 사람도 없어 마치 외국 어느 도시를 걷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지만, 느릿느릿⋯. 성묘 때나 변산에 갈 때,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줄포나 선운산 IC로 나가기 전 오른쪽으로 부안이 보인다.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김제를 거쳐 부안읍을 왼편에 두고 지나간다. 내가 처음 서울에 유학할 때는 전주나 김제에서 고속버스를 이용했다. 모두 합치면 5시간 넘게 걸렸다. 5시간이 4시간∙3시간으로, 이제는 2시간 반으로 줄었다. 신기록을 세우기라도 하는 양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말 그대로 주파한다. 세 시간에 갈 길을 두 시간 반으로 당겼다고 해서 경제성, 효율성이 얼마나 더 올라갔을까? 이 좁은 땅에서 하루 생활권이면 족하지, 반나절 생활권으로까지 만들 필요가 있을까? 선거철 유세하듯 말이다. 부안에서 김제나 전주로 가는 길은 오랜 세월을 두고 신작로가 많이 생겼다. 어떤 곡선도 직선보다 짧을 수는 없다는 법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신작로는 그렇게 생겨났고 옛 도로는 마을 길로 바뀌었다. 그 길은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다니고, 가을이면 고추를 널어 말리는 건조장으로 쓰인다. 그런데 길이 직선으로 나면 마음도 곡선에 머물지 않는 것 같다. 오래전 모 정치인이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라고 말했다가 지역 주민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사과한 적이 있다. 이제 그 도시는 사천시로 편입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다. 본래 도로의 기능이 시점과 종점을 연결하는 데만 있지 않은데도 서울, 부산, 광주 같은 큰 도시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니 삼천포에 빠진다는 말이 논란이 된 것이다. 지금은 전주에, 부안에 빠져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전주가 여수 가는 길목에 있거나 부안읍이 격포 가는 우회로의 배경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유럽 큰 도시의 중앙역은 대부분 열차가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도심을 관통하지 않는 것은 전통적 도시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것이겠지만, 그 도시에 머물게 하려는 뜻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전북에는 머물러야 할 매력적인 곳과 맛이 즐비하다. 멀리서 휙 지나가며 보거나 휴게소에서 맛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가수 장기하의 “느리게 걷자”라는 노래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 죽을 만큼 뛰다가는 /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 아들 내외가 전주에 흠뻑 빠지기를 기대한다. 추신: 17년 만에 ‘타향에서’에 다시 글을 쓰게 됐다. 독자 여러분께 첫 글로 인사를 드린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남형두 교수는 부안 태생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를 거쳐 2005년 이후 연세대 로스쿨에서 저작권법을 가르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4.07.17 14:59

재 넘어가는 길에서

늦은 오후 고향 마을을 나서서 읍내를 향하여 재를 넘어가는 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름 새소리가 소년의 귓가에 맴돌듯이 들렸습니다. 고향 마을 입구에 있는 삼거리에 서서 어머님의 흔드시는 손이 먼 발치에서도 또렷이 보였습니다. 한여름 무더운 들판에서, 오일장 열리는 추운 읍내 장터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렸습니다.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녘, 병원에 다니시느라 어느 때부터인가 이따끔 씩 들리지 않자, 소년은 집문 밖을 서성이고 서성이다 눈물을 훔치고 작은 손에 책을 들어 글을 읽기 시작하고, 알고 싶어하는 길을 찾아갑니다. 무엇을 알고 싶어서인지, 어떤 것을 찾고 싶어서인지 모르지만 근원적 존재자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나 마음을 찾는 궁리의 노정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몇 해 지나서 전주에 있는 셋방으로 소년을 데리고 이사온 어머님이 고향 읍내 오일장에 가시면, 소년은 학교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책을 찾으러 3층 도서관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소년은 돈 계산을 놓쳐 매점 아저씨께 손해를 끼치기도 하였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소중한 체험으로 도덕률의 첫 걸음을 하게 됩니다. 청년이 되면서 걷기도 하고, 버스를 타기도 하고, 나중에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니며 도서관에 몇 년 머무르다 꽃 재배단지가 남아 있는 서초동에 이른 후 십년이 3번을 흘러갑니다. 그 세월 동안 무덥고 추운 날의 새벽이슬, 거친 폭풍우 한 가운데서도 오롯이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의 합심 덕택인 것을 마음에 새겨둡니다. 여름 새소리를 잊지 못하던 소년은 청년을 지나 장년을 넘어설 즈음 수년간 병상에 계시다 떠나시려는 어머님을 부여잡다가 거부할 수 없는 떠남을 모시려고 삼생지양을 하지 못한 통한을 가슴 깊이 움켜쥐고 피눈물도 흘리지 못한 채 장례 버스로 그 재를 넘어갑니다. 아내와 아이들, 형제와 친척들, 빈천지교이자 평생 친구들의 위로와 부축을 받으며 고향의 산에 이릅니다. 이제는 장년이 된 소년은 그 재에서 들리던 새소리, 책과 더불어 궁구의 길을 좇아갑니다. 그 길은 학교 매점에서 일하던 소년의 응시, 사유, 깨달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길 가운데 황금률을 마음 깊이 심어두었습니다. 그 길에서는 셋이자 하나인 빛나는 진리가 있으므로 그 길을 따르게 되고, 한없는 그리움과 더불어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삼가함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움으로 바깥을 바로한다) 라는 현자들의 깊은 글로 선한 마음을 나누며, 평생친구들의 따뜻한 미소가 손짓하므로 정겹게 화답하게 될 것입니다. 고향을 오가는 길가에, 그 재 너머에 있는 산까지 마음을 가로막는 띠풀이 자라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늦은 저녁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에서 도심의 휘황한 불빛만큼이나 그리운 고향 길과 평생친구들의 정담과 웃음소리가 역력하게 보입니다. 옛 시인의 시를 입으로 읊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손바닥을 앞뒤로 젖힘에 따라 구름이 일고 비가 오듯이 분분한 경박함을 어찌 일일이 헤아릴 수 있으랴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관중과 포숙의 가난했을 때의 사귐을 이 길을 지금 사람들은 먼지 털 듯 버리더라”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김석우 변호사는 전주완산고와 전북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광주지검 목포지청장·서울중앙지검 외사부장검사·서울남부지검 형사5부장검사 등을 역임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4.07.10 15:43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