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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디자인이 각광받는 이유

김주은 도르 대표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성별, 연령, 국적, 문화적 배경, 장애의 유무에도 상관없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 및 사용 환경을 만드는 디자인이라 정의되어 있다. (출처. 두산백과) 우리는 이러한 유니버설 디자인을 일상생활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건물 입구에서 볼 수 있는 경사로와 비상구에서 볼 수 있는 눌러서 문을 여는 패닉바가 있다. 두 디자인 모두 힘이 약한 노약자부터 보행이나 신체 사용이 불편한 장애인, 짐을 들고 있어 일시적으로 몸의 사용이 불편한 성인들까지 모두가 손쉽게 쓸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왜 각광받고 있는가? 고영준 님의 사용자 중심의 유니버설 디자인 방법과 사례 책에서 살펴보면, 크게 3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고령화이다.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고, 이에 따라 우리는 사회에서 노인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은 연령에도 상관없이 사용하기 편안한 제품 및 환경디자인으로 고령화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노멀라이제이션(normalization)이다. 노멀라이제이션은 사회복지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로 고령자나 장애인 등을 격리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이념이라 말할 수 있다. 노멀라이제이션의 배경에는 오히려 건강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사회가 사실상 비정상적인 사회이며, 장애인과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대등한 인간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정상적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노멀라이제이션의 이념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확대가 필수적이다. 세 번째 이유는 세계화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국가에서도 외국인 거주자 및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늘어나는 외국인을 배려하는 방법으로서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다. 위와 같은 분명한 이유들로 유니버설 디자인은 앞으로 더욱 주목받게 될 것이다. 앞선 칼럼에서 여러 차례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장애의 범위를 더욱 폭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다름만으로 장애를 판별할 수 없으며, 개인의 특성을 사회가 수용하지 못했을 때 장애는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장애를 줄이는 방법이며, 그 안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때때로 유니버설 디자인 또는 무장애 환경디자인은 장애인과 노약자가 누리는 특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건강한 사람만이 모든 걸 누릴 수 있다는 차별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말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질병으로, 사고로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으며, 장애인이 되지 않더라도 노인이 되어 이러한 환경과 제품 디자인이 기필코 필요할 때가 다가온다.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변화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환경적인 변화와 함께 장애인과 노약자를 사회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배려와 노력이 있어야만 진정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최선을 다해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하려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분명 훗날의 우리에게 다시 돌아올 행동과 시선이 현재 우리의 노력만큼 따뜻할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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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8 15:44

마음의 방역이 필요해

정은실 사회활동가 지난 10월 10일은 정신질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정신건강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정한 세계 정신건강의 날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 되며 마음 속 거리 또한 멀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게 퍼지는 것은 바이러스뿐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정신건강에도 바이러스가 퍼지듯 코로나우울(코로나블루-코로나19로 인해 우울감을 느끼는 경우를 뜻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감염에 대한 불안이 증가하며 감염사망 가능성에 대한 강박적 생각이나 뉴스 보도에 과잉집착이 일어나고 현실적인 불편감과 고립감에 대한 걱정, 일상이 무너진 것에 대한 분노가 자리하게 됐다. 확진자의 경우, 주변인의 부정적인 시선, 사회의 부정적 인식에 대한 낙인감을 갖게 되며 심리적 압박감까지 받는다.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이 바이러스보다 더 무섭고 빠르게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특성상 정량적 측정이 쉽지 않은 관계로 심리적 어려움을 인지하고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방역이다. 마음방역의 첫 번째는 지금 드는 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나 세균 감염에 대해 많은 사람이 불안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내 안에 생겨나는 불안감이나 불편감, 분노 등의 감정을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받아주고 인정하는 것을 내가 먼저 해주어야 한다. 두 번째는 불안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다. 불안한 상황이 지속 되면 대처하기 위해 정보를 검색하게 된다. 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뉴스에 지나치게 노출될 우려가 있고, 오히려 불안감만 키울 수 있다. 비가 올 때 준비해야 할 것은 걱정이 아닌 우산이듯이, 코로나19에 필요한 것 역시 불안이 아닌 위생 및 면역력 관리와 방역수칙 지키기이다. 정부 지침에 집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매체를 선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규칙적인 생활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이전의 집은 긴장하고 피곤했던 몸을 이완시키는 쉬는 공간이었다면 이제 집은 휴식처이면서도 학교이고, 사무실이자 일터가 되었다. 재택근무, 온라인 수업 등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자가격리와 비슷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활패턴이 흐트러지기 쉽다. 다양한 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에 맞는 생활규칙과 루틴을 만들어야 하고, 이를 지켜가는 연습을 지속해야 한다. 일상을 단단하게 지키는 것이 몸과 마음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네 번째는 가벼운 운동하기이다. 최소 30분 가벼운 운동을 시작해보자. 스트레스 호르몬이 지속해서 과다 분비되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균형을 잃게 되는데, 이 호르몬은 운동을 통해서 소비시킬 수 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가벼운 산책을 하거나 집안에서 스트레칭 또는 요가와 같은 실내 운동을 하자. 집에 있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운동을 통한 신체 활동이 꼭 필요하다. 다섯 번째는 나만을 위한 평화로운 시간 만들기이다. 명상을 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일기를 쓰는 등 아무 일도 없는 듯 평화로운 순간을 만든다. 종일 집에서 누군가와 같이 있게 되더라도 나만을 위한 순간을 잠시 갖는다. 마음은 몸의 상태를 따라가기 쉽다. 천천히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안정을 찾듯이 편안할 때 하는 행동을 해보자. 코로나로 지친 마음을 위로하며 우리 모두에게 응원을 보낸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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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1 17:35

보건의료 철의 삼각에서 적정비용 찾기

박지원 변호사 의사 집단휴진이 한 달 이상 소요 끝에 마무리되었지만 여전히 국시 거부 의대생 문제로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아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의료진에 대한 긍정적 여론과 더불어 공공의료 강화 요구도 높아졌기에, 의료계에 발전적인 정책 추동력을 얻을 수 있는 호기였음에도, 생산적 토론이 아닌 비방과 곡해 끝에 여론마저 싸늘히 식어버린 안타까운 상황이다. 경제학에서는 삼원불가능성의 정리(Impossible Trinity)라 하여 개방경제가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세 가지로 환율 안정, 통화정책의 독립성, 자본이동의 자유화를 꼽는다. 이런 트릴레마(Trilemma)는 보건의료계에도철의 삼각(Iron Triangle of Healthcare)이라는 개념으로 존재한다. 한정된 자원의 제약 때문에 동시 달성될 수 없는 철의 삼각이란 의료의 질, 의료 비용, 의료 접근성 세 가지다. 연구와 토론을 거쳐 위 세 점을 이은 삼각형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즉, 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적정 비용과, 그 귀결로 어디까지 의료 접근성이나 질을 희생할지 논해야 한다. 말은 쉬우나 현실에서 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모양이다. 괜히 이름부터 불가능성 정리가 아니었음이 이번에 여실히 드러났다. 포문은 정부에서 열었다. 의대 정원 확대를 통한 지역의사제 실행과 공공의대 설립 계획을 발표하면서 제시된 명분은 종별, 지역별 의료 격차 및 의사 수 부족 문제였다. 이에 대한 의협 측 반대 논리도 수긍할 만한 것이었다. 현행 의료전달체계와 수가 구조 하에서는 결코 의도한 정책 효과를 달성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비극은 논의가 그 수준에서 멈춰버린 데 있다. 정책 취지는 삼각형의 한 꼭지점인 비용을 일부 희생하여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통한 지역의사제를 실시함으로써 나머지 두 꼭지점인 의료 접근성과 의료 질 향상을 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용을 지출할 만큼 접근성과 질에 문제가 있는지, 또 같은 비용을 공공병원 투자나 기피과에 대한 수가 현실화 등 대안책에 투입하면 접근성과 질 향상에 더 좋은 효과를 낳을 수 있는지 등이 논의되어야 했다. 정부 의도만큼 기피과 현상과 도농 격차 문제 완화하려면 수가를 어떻게 얼마나 개선해야 하는지, 의료전달체계 개선이나 공공의료 투자에 정부재정은 얼마나 필요하며, 이 때문에 인상되어야 하는 건강보험료는 어느 수준인지 등을 논의의 장에 끌어왔다면 단순한 이익단체의 밥그릇 싸움 수준으로 매도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 없이 쓸 데 없는 일 한다 정도 주장으로 집단 휴진을 강행해서는 코로나 상황에 우호적 여론을 기대하기 어려움은 당연치 않나. 정작 정부는 지역가산수가나 공공병원 확충 등 보완책을 의료계와 협의해 추진하겠다는 태도를 밝힌 반면, 의협은 전교 1등 의사, 의대 입시 특혜 등 본질과 거리가 먼 프레임으로 여론전에 화력을 소진하며 입지를 약화시키더니, 이후 합의에 반하여 휴진을 계속한 전공의협의회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 반수를 의료인으로 요구했던 사정, 의대생이 국시 응시 의사를 표명하면서도 끝내 국민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은 정황 등이 잇따르며 여론의 추는 기울어버렸다. 현장 경험과 전문성을 지닌 의사 집단의 선의와 정책능력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금번 정책의 추진이나 철회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다. 앞으로는 더 대국적인 관점에 기반을 둔 건설적인 대화와 협상을 기대해본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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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04 16:16

누구를 위한 표현의 자유인가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올해 초 폭력적, 선정적 장면을 그대로 무대에서 재현한 것으로 논란이 되었던 서울연극제 출품작의 연출과 n번방 사건과 유사한 소재를 담아내면서도 주인공 남성을 미화해 문제가 된 넷플릭스 작품 감독은 모두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예술을 그저 예술로 봐달라며 표현의 자유를 항변했다. 또한 최근 자신의 작품 복학왕 304화에 인턴이었던 여성이 성상납 이 후 정직원이 됐다는 장면을 그려 넣어 논란이 된 기안84가 지난 주 프로그램과 방송국 측의 공식 사과나 별다른 조치 없이 슬그머니 방송에 복귀했고 이를 옹호하는 유명 동료 웹툰작가는 만화를 만화로 보라며 시민독재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술가 혹은 창작자로서 가져야 할 직업윤리는 망각한 채 너무도 당당하게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만을 주장하는 그들의 태도를 동료예술인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여성예술인으로서 묻고 싶다. 여성의 삶을 희화화하고 축소하며, 대상화하고 폄훼, 혐오하는 방식의 창작물에게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를 왜 존중해야 하는가? 도대체 예술의 가치는 얼마나 숭고한 것이기에 타인의 인권을 빼앗고 짓누르는 것조차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해야 하는가?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이다. 즉흥극과 페이크다큐, 비평극과 다원예술 그 중간 어디쯤에서 작품의 형태를 정의 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메시지는 명확하다. 고전이라는 미명하에 존엄성과 주체성을 빼앗긴 수많은 여성캐릭터의 이름을 다시 호명하고 동시대적 관점으로 그들의 삶을 재해석하고자 한다는 것. 시놉시스를 작성하고 지원 서류를 꾸린 뒤 연극, 성악, 전통, 무용, 문학 총 다섯 개 예술장르에서 활동하는 여성예술가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활동장르와 범위가 넓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섭외는 첫 시도부터 난항을 겪었다. 작품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자신이 배우고 익힌 고전을 비평할 자격이 없다.는 말로 거절을 당한 것이다. 나의 설명이 부족한 것일까, 작품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일까 고민에 빠져 있던 나에게 두 번째 거절의사를 밝힌 예술인의 대답은 고민에 확실한 해답을 찾게 했다. 선생님들께서 해 오신 작업에 누가 될 것 같다.는 것. 그 뒤로도 네 번의 시도를 해봤지만 같은 맥락의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녀들은 모두 작품의 메시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고전을 신성시하도록 교육 받았던 예술교육의 폐해, 좁은 지역사회의 창작 활동영역, 단 한편의 작품을 출연하더라도 그 작품의 내용과 예술가의 신념을 동일하게 인식할 것을 우려하는 마음, 추후 논란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에 자신에게도 꼬리표처럼 따라 붙을 페미니스트라는 평판, 이로 인해 다음 프로젝트를 이어줄 인맥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여하튼 다양한 이유들이 복잡하게 얽혀 출연을 주저하게 만든 것 이었다. 이것은 그저 수많은 작품 중 단 한편의 연극일 뿐인데도... 나는 이번 섭외과정에서 알게 된 여성 예술인들의 학습된 두려움을 보며 예술을 예술로 봐달라는 워딩이 가진 의미와 가치는 결코 모든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를 담보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미 주류가 되어버린, 그래서 대중을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경험과 평판이 충분히 축척된, 때문에 다양한 측면에서 고려하고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소위 가진 자의 편한 작업방식을 지키기 위한 문구였음을 분명하게 느낀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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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7 16:10

미디어가 말하는 장애인

김주은 도르 대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분리되어 있는 현재의 사회에서 우리는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 즉 미디어를 통하여 장애인을 처음으로 알게 될 확률이 높다. 때문에 미디어에서 장애인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대중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뀔 수 있다. [드라마 속에서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복수 응답)에는 항상 도움받는 대상(49.1%) 가족의 애물단지(30.2%) 등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여성 장애인에 대해서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청순가련형 이미지라는 답이 39.0%로 가장 높았고, 비운의 여주인공이라는 답도 28.9%나 돼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가 정형화돼 있음을 나타냈다.] 2005년 경향신문에 TV 드라마 속 장애인 연약한 애물단지?라는 기사의 한 부분이다. 이와 같이 2000년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의존적이며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는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이 되어, 장애인들은 항상 그 선입견과 싸워야 했다. 장애인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 전에 장애라는 특성만으로 먼저 평가되어야 했던 것이다. 반면 2020년 현대에 들어서, 개인적으론 미디어에서 장애인을 나타내는 것에 대하여 많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2019년도에 개봉한 [나의 특별한 형제]와 [증인]은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다. 하지만 여기선 장애인을 특별히 의존적이거나 그들의 힘듦과 어려움을 바탕으로 영화의 내용을 전개하지 않았으며, 그저 한 개인이 자신에 맞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영화 외에도 요즘은 장애인 또는 장애를 가진 부모가 장애를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모습을 지상파 방송과 유튜브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근의 미디어는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디어의 파급력은, 더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에 나올 수 있도록 용기를 주며, 사회에 나온 장애인들이 장애라는 특성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깰 기회를 얻는다. 고령화 때문에, 출산 나이의 증가 때문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우리나라의 장애 인구 비율을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장애의 정의 또한 사회?환경이 개인의 특성을 수용하지 못할 시 장애로 판명하도록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우리 사회의 장애인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소수가 아닌 장애인과 함께 현 사회를 살아갈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그 가운데 미디어의 역할은 매우 크다. 이 글의 목적은 현재의 사회와 미디어를 비판하려 함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디어는 더욱 성숙해졌고, 미디어의 이런 바른 표현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데 큰 효과를 내고 있으며, 그 파급력은 더 많은 장애인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미디어는 지금과 같이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의 장애인이 함께 있음을 고려하고 그 장애인의 이미지를 정형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미디어를 받아들이는 소비자 우리 역시 책임감을 가지고, 미디어가 바르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여야 한다. 장애인을 배려하는 미디어 매체의 노력과 미디어를 보고 명확히 비판할 수 있는 소비자의 시선이 함께 했을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앞으로 더욱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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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0 16:18

지금 나의 상태 알기

정은실 사회활동가 2년 전 필라테스 수업에서 코어 운동 자세가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운동을 지속해갈수록 선생님도 나도 의문이 생겼다. 건축전공의 특성상 하루 10~12시간 이상을 의자에 앉아있고, 20시간 이상 일하는 때도 많았다. 게다가 운동이라는 단어가 삶에 없던 나에게 단련된 근육이 있을 리 없었다. 2~3개월이 지나고 우리가 내린 결론은 잘 단련된 코어근육이 아니라 몸에 배어 있는 긴장하는 습관이 원인이었다. 또, 4~5년 전 도수치료 물리치료사가 몸에 힘을 빼세요.라고 말하면 그 말이 어찌나 어려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결국 선생님은 같은 말을 여러 번 다시 했다. 그럴 때면 의문이 생겼다. 응? 어떻게 힘을 빼는 거지? 힘을 빼라고 하면 다시 힘이 들어가는 거 같고 자세가 편안해지지 않았다. 사실은 내 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지도 몰랐다. 힘을 빼라는 말에 아~ 내가 힘이 들어가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후에 몇 번의 유사한 경험이 이어지면서 알게 됐다. 긴장이 너무 익숙해서 스스로가 긴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긴장한 몸으로 살고 있었다. 놀라웠다. 경직되거나 긴장하는 경우가 곧잘 있다고만 생각했다. 긴장이 이미 숨 쉬듯이 당연해서 긴장한 줄도 몰랐다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나의 몸과 마음에 미안했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주인 때문에 지속해서 방치당해온 몸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내 몸의 상태를 알고 나니 돌아봐 지는 것들이 많았다. 소화가 잘되지 않아 체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밤에는 잠이 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었다. 일이 과하거나 압박감이 클 때면 날카롭게 반응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친구들에 비해 작은 일의 변화에도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었다. 긴장된 상태로부터 여유가 없어 벌어지는 일들이다. 긴장은 꼭 부정적인 발현만 있었던 건 아니다. 긴장은 나를 나태하지 않고, 보다 활력적이고, 생산적으로 만들어줬다. 힘들고 그만두고 싶을 때 행동하게 만드는 촉진제가 됐다. 지속적인 긴장으로 주변 사람들의 심리 변화를 빠르게 인지했고, 그에 맞는 대응도 빨랐다. 심리학자 K.레빈의 심리학 표현에 따르면 인격은 중심영역과 여러 하위영역으로 분화되어 있는데, 각 영역은 긴장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어떤 욕구나 의도가 생겼을 때 특정한 하위영역의 긴장이 높아지면 중심영역에는 불균형이 생기고, 전체적으로 균형을 회복하려고 하는 경향 또는 힘이 생긴다. 그러나 행동함으로써 목적에 도달하고 욕구가 충족되면 다시 균형상태가 회복된다고 한다. (두산백과) 나의 상태와 긴장이 운용되는 원리를 이해하고, 생활에서 여유를 가지는 노하우가 생겼다. 긴장이 기본값이어서 경계하는 마음 20~30%와 나의 현상태를 유지하려는 마음 20~30%가 이미 차 있어서 쉽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많으니 한 번 더 듣고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또한, 팽팽하게 당겨져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태가 곧잘 반복되기 때문에 일이나 관계에서 10~20% 정도의 여유를 항상 가져야 하는데, 이를 갖지 못해서 끊어지는 때가 생긴다면 주로 원인은 상대가 아닌 나로부터 비롯되는 때가 많았음을 되새기며 탓하는 마음을 먼저 내기보다는 내가 어디서 끊어지게 됐는지 살피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이렇듯 스스로의 상태와 마음씀씀이를 알고부터는 마음의 여유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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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3 15:33

출산을 주저하게 만드는 정상가족의 높은 문턱

박지원 변호사 지난 연재를 통해 저출산 관련 입장을 밝혔다. 저출산을 암울한 미래의 원인이 아니라 누적된 과거의 결과로 볼 것, 저출산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 행사의 일환이라면 긍정하되, 사회 문제에 대한 불만의 징후라면 해결책을 찾는 대화의 실마리로 쓰자는 것과 더불어 정책방향도 경제성장을 위한 인구 통제가 아니라 삶의 질 향상에 무게를 두자는 정도였다. 정부 역시 2018년부터는 출산율에서 삶의 질로 정책 초점을 전환할 계획임을 밝히면서 일자리, 주거, 보육, 교육 등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가고 있기에 고무적이다. 어찌 첫 술에 배부르랴. 소득과 고용안정성, 부동산과 사교육 등 밤새 토론해도 끝나지 않을 논의에 말을 더 보태지는 않겠다. 다만, 혹시 간과한 점은 없는지 짚어보려 한다. 그간의 정책 공급은 혼인한 부부의 출산을 독려하는 데 집중해왔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이 늦어지는 만혼과 결혼을 꺼리는 비혼이 보편화되면서 정책 효과가 줄어들자, 이제 정부는 어떻게 젊은이들을 빨리 결혼하게 만들지 궁리하는 모양이다. 고민의 관점을 달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결혼 없는 출산도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다. 결혼을 꺼리는 정책수요자의 말을 들어보면 집을 마련하기 힘들다거나(대체로 남성), 시댁/처가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대체로 여성) 현실적인 이유에서부터, 구속받기 싫고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자신도 없다는(남녀 공통) 철학적 이유까지 다양하지만, 결국 결혼과 가족제도를 너무 무겁게 느낀다는 것이 핵심이다. 가부장제 하에서 짊어져야 하는 부양의무, 두 배로 확대된 직계와 방계가족에 수반하여 요구되는 각종 의례와 노동을 고려할 때, 헌신과 희생만 요구될 뿐 별달리 효용이 와닿지 않는 가족제도에 편입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결혼을 꺼린다는 것이 개인화 성향이 강한 청년 세대의 속내다. 반대로 동거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인식을 보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전통적인 가족 규범에 들어가지 않으면 명절, 제사, 경조사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며, 여차하면 헤어질 수 있으니 단칸방 월세에 살아도 마음이 한결 가볍고, 같이 살다 좋으면 아이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고 한다. 이처럼 개인간 결합은 원하지만 가문간 결합이라는 규범을 거부하는 정책수요층이 존재하는 이상, 결혼보다는 느슨한 시민 결합을 제도화하는 방안으로, 수 년 전 추진되다 발의되지 못한 공동생활계약이나 생활동반자에 관한 법안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요지는 단순하다. 같이 사는 동반자를 등록하면 부부에게 주어지는 각종 권리나 제도 지원(상속권, 수술동의 등 중대 사무 결정권, 주거지원, 육아 관련 사회보장과 세제혜택 등)을 인정하되, 계약 해지는 이혼처럼 까다롭지 않다. 집안의 영속적 결합 대신 개인간 신뢰에 기반한 잠정적 결합을 존중하면서, 그 동안 사실혼의 이름으로 음지에서 어설픈 보호만 받던 관계를 양지로 드러내는 것이다. 몇 년 전 통계지만 한국의 혼외출산비율은 1.9%로 OECD 평균인 약 40%에 비해 현저히 낮다. 동거와 동성혼을 합법화하여 성적 문란을 조장한다는 둥 반대 의견이 벌써 들려오는 듯 하지만, 출산율을 고민하는 위정자라면 가족다양성을 포용하자는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볼 일이다. 결혼 없이 아이를 키워보겠다거나, 정상가족의 높은 문턱에 결혼을 단념하려던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고, 혼외출산이나 미혼모에 대한 지원과 인식 변화도 덤으로 따라올 것이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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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06 15:30

앞으로 나는 연극을 계속할 수 있을까?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올해 초 배우다컴퍼니는 열심히 준비한 무대작품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되었고 8월 22일, 23일 전라북도공연예술페스타(JBPAF)에서 연극 자화상을 통해 관객과 극장에서 만나기를 고대하며 3개월간의 촘촘한 회의와 연습을 거듭하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무대에서 실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아는 우리는 지원사업이 정말로 절실했고 열심히 준비해서 거머쥔 이번 공연의 기회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연습 과정도 즐거웠다. 참여 예술인의 팀워크가 좋았고 각자의 전문성을 존중하며 무리 없이 잘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연출이 그렇듯 연습이 잘 될 때는 현장에서 만난 관객들이 어떤 눈빛과 소리로 에너지를 더해줄지 기대했고, 연습이 잘되지 않을 때에도 우리의 작품을 숨죽이고 지켜봐 줄 관객들을 생각하면 게으를 수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실히 준비한 우리 작품은 극장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잠잠해질 거라 기대했던 코로나19는 다시 심각해졌고 재난상황이 여전히 낯설기만 한 예술단체와 주최 측은 아무 문제없이 페스타를 강행할 수 있을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우리는 감히 반드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1년 전 까지도 관객 없는 공연을 상상해 본 적 없었기에 관객 없는 공연을 직면할 자신도 없었다. 결국 배우다컴퍼니는 관객과 극장 모두를 포기하고 공연이 아닌 영상 형태로 작품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공연 예정일이었던 22일, 23일에 촬영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원래대로 라면 이 글을 쓰는 지금 즈음은 공연이 끝나고 가장 후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테지만 관객을 만나지 않기로 결정한 그날부터 내내 마음이 슴슴하다. 과정도 즐거웠고 첫 시도치고는 영상 결과물도 꽤 괜찮은 수준으로 완성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여전히 끝내지 못한 작업이 있는 듯이 찝찝하고 어색하다.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에 관해 어떤 이름을 붙여야 답을 찾을 수 있을지 혼란스러운 고민은 계속된다. 나의 고민은 동료들의 삶과 닿아있다, 코로나19와 함께 찾아온 재난상황 속에서 많은 예술인들은 제한 당하거나 중지 당했다. 급여도 대안도 없이 그저 기약 없이 멈추거나 미루는 방식의 지시에 지쳐 더는 버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연극을 포함한 많은 예술은 이제 그 기조가 달라졌다. 예견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고 보니 직면하기 두려웠던 나와 같은 예술인들과 코로나19의 종식만을 기다리며 일단 결정을 미루고 보았던 문화예술계 내 수많은 기관과 사업, 국가와 행정 모두가 아예 시스템을 통째로 바꿔야 할 시점에 당도했다.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다. 이제는 함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가능한 많은 소통 창구를 열어 현장의 목소리를 수용하고 현장에 숨을 불어넣어야 한다. 예술을 수치화하고 서류화하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존폐 위기에 놓인 창작 현장을 되살릴 수 없다. 이 글을 마무리 지으며 두 개의 질문이 머릿속에 맴돈다, 이번에 내가 한 작업은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나는 연극을 계속할 수 있을까? 지금 나는 내 젊은 날을 다 걸고 매진했던 연극의 존폐 앞에서 내 존재를 다시금 사유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지금, 내가 연극인으로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것이기에.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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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30 16:14

왜 선진국일수록 장애인이 많을까

김주은 도르 대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성희 님의 2018년도 주요 국가의 장애 판정제도 비교 연구와 2019년도 장애인 고용통계 자료를 비교해서 보았을 때 우리나라와 영국, 미국, 스웨덴, 호주, 독일 등 우리가 주로 선진국이라 부르는 국가들의 장애 출현율이 유의미하게 차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19년도 기준으로 5.39%의 장애 출현율을 보였으며, 2018년도 기준으로 영국은 21.1%, 미국은 19.3%, 스웨덴은 16.1%, 호주는 17.7%, 독일은 14.9%의 장애 출현율을 보였다. 적게는 3배에서 많게는 4배까지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까? 정말 선진국일수록 장애인이 많은 것일까? 아니다. 이는 장애를 규정하는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리는 장애를 오직 의료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했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비정상적인 외형이나 기능, 즉 손상을 가진 사람을 장애라고 정의했다. 이와 같이 손상에 초점을 두었을 때에는, 사회는 장애는 장애를 가진 개인의 문제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이 시선은 변화하고 있다. 장애를 개인의 기능적인 손상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경의 문제로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애초에 장애인이 활동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환경이었다면, 예를 들어 세상에 있는 모든 길에 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또는 세상에 계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체 일부의 어려움으로 계단과 턱을 오르는 것이 불편한 사람을 지체장애라고 정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시선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환경적으로 개인의 특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지점이 생겼을 시 사회적 의미에서의 장애가 생겨나고 이를 장애로 정의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변화된 시선에서 사회는 장애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경의 문제로 보고 있다. 변화된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은 위에서 언급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적용되고 있다.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은 비만을 장애의 한 영역으로 포함하고 있다. 비만인 사람은 취직에도 불이익을 받고, 만약 취직을 했다고 하여도 승진조차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 의미에서 개인의 특성이 수용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장애라고 정의한 것이다. 또 다른 예시로 스웨덴을 들 수 있다. 스웨덴은 외국 이민자를 장애의 한 영역으로 넣고 있다. 외국 이민자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불편함이 수용되지 못하는 사회적 의미에서의 장애로 판별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사례를 보고 부당하다 또는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러한 반응은 우리 사회가 장애에 대하여 부정적인 편견과 낙인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장애라는 단어는 누군가와 우리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다. 한 개인이 사회적으로 어떤 불편함을 겪고 있으며, 어떠한 배려가 필요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규정한 단어일 뿐이다. 때문에 장애는 그 자체의 문제보다, 장애를 보는 우리의 부정적인 시선의 문제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장애 인식개선이란 이러한 부정적인 편견과 낙인을 수정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장애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 장애라는 단어가 주는 편견과 낙인이 줄어들었을 때, 사회는 더 많은 장애인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는 장애인을 위한 더 폭넓은 복지정책과 배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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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3 16:12

환대를 위한 내 마음의 여유

정은실 사회활동가 지난 칼럼을 통해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단순히 만남의 시작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가 오는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므로 그의 갈피를 살필 수 있는 환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환대는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접촉 등. 세상에는 다양한 만남과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일에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때론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가볍게 스치는 인연에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수식을 달면 더 신경 쓰고 마음을 쏟아야 하는 일이 늘어나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마치 과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어느 한쪽에 부담을 지우기 위한 일이 아니라 서로가 조금 더 편안하고 따뜻하게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처음 누군가를 만나거나 혹은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날 때 환하게 웃는 미소, 반가운 인사말, 적극적인 행동 등을 갖춘다면 상대방의 눈에 직접 드러나는 반기는 태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지속해서 일관되게 나오기는 어렵다. 모임의 자리가 길어지고, 대화가 길어지면 어느새 중심은 나에게로 향해 있다. 무슨 말을 할까?, 어떤 말을 할까?, 어떻게 이야기할까?, 언제까지 하는 거지?, 이거 끝나고 뭐하지? 등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쏠리거나 이미 이 자리에서 마음이 떠나 다음을 계획하고는 한다. 나에게도 자주 있던 일이다. 이런 자리들이 반복되는 와중에 어떻게 하면 그 만남이 가볍게 흘러가지 않고 서로에게 유의미한 자리가 되어 다시 만났을 때 반갑고 기쁜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발견한 것이 있다. 누군가에게 환대를 잘 해주기 위해서는 우선으로 살펴야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의 상태가 아니라 바로 나의 상태ㅡ지금 나의 마음이었다. 첫 만남을 앞두고 내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새가 없다면 앞서 보인 반기는 말과 행동들은 흉내에 그치고 말 때가 많았다. 예의를 갖추려고 만들어진 흉내는 보는 사람이 제일 잘 알고 상대가 그걸 알게 되면 가까워지는 깊이가 얕아지게 된다. 그리고 여러 번 만나게 된 사람들은 얕은 깊이를 알기 때문에 딱 그 깊이 만큼의 관계가 된다. 이는 반대로 생각할 때 더 잘 보인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나나 우리보다는 자신만을 생각하고 챙기고 있다면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잘 나지 않는다. 웃으며 대하고 있지만 자기 생각을 하느라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느라 내가 말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서 같이 있는 곳에 내가 있을 자리가 점점 줄어든다면 나는 왜 여기 있지?, 없어도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렇기에 환대를 잘 해주기 위해서는 상대를 온전하게 챙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고 그 여유는 내 마음의 넉넉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자신을 챙기는데 급급하느라 상대를 살피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마음에 넉넉함이 남아 있어야 한다. 이 넉넉함은 굳이 애써 만들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있는 당연한 것이야 할텐데 요즘 주로 접하는 뉴스를 보면 각박하다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각박한 세상에서 넉넉함을 찾아 사람이 오는 일을 어마어마한 일로 삼을 수 있고, 그 어마어마한 일을 통해 환대할 수 있는 넉넉함이 다시 생겨 각박한 세상에 조금씩 윤기를 더해가길 바라며 내 마음의 여유에 대한 다음 기고를 기다린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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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09 16:42

저출산 담론이 의미를 가지려면

박지원 변호사 지난 글에서 연금 걱정 없게 아이 좀 낳아달라던 50대 지인을 향해 저출산은 외려 문명 발전과 인권 신장의 결과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 온통 저출산을 걱정하는 목소리 일색이니, 반골기질에 혼자 노라고 외치고픈 마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공포 마케팅처럼 보이는 저출산 우려 담론에는 쉬이 동조하기 어렵다. 일단 국가주의적 시각이 내재된 듯해 거부감이 든다. 이런 위정자나 경영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다보면 사람을 도구 취급하기 쉽다. 덮어놓고 낳으면 거지꼴 못 면한다며 국가가 불임수술하던 때가 60년 전이다. 출산율이든 GDP든 수치를 목표로 삼는 순간 비인간적인 발상은 끊어내기 어렵다. 대통령도 사람이 먼저를 외치는 시대다. 시민이 굳이 국가와의 일체감에 관료집단의 걱정까지 짊어져야 하나. 해서인지 정부야 아무리 나대봐라. 애 낳나. 고양이랑 살지라는 일갈을 듣노라면, 며느리에게 불임수술 권하러 온 공무원을 곰방대로 쫓아내던 60년대 시아버지 모습이 겹쳐 못내 후련한 마음도 든다. 국가주의적 저출산 우려 담론은 늘 암울한 경제 전망을 동반한다. 그러나 수십 년 뒤의 경제를 예측하는 시도는 그저 토정비결처럼 재미삼아 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나 싶다. 식량은 산술급수로 증가하고, 인구는 기하급수로 증가한다던 맬서스의 예측이 어찌됐나. 화학비료로 식량 생산은 폭증했고, 인구 감소를 걱정하게 됐다. 70년대 로마클럽 보고서엔 석유가 2000년쯤 고갈된다더니, 올해 유가는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예측만 잘하면 돈을 버는 주식시장에서도 수많은 전문가 예측이 수개월을 못 버티고 명멸하는데 누가 수십 년 뒤를 장담하는가. 섣부른 예측보다 기술혁신과 인간의 적응력을 믿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오죽하면 주식 격언에도 시장은 예측보다 대응이라 한다. 하나 더 보태자면 비관론자는 명성을 얻지만, 낙관론자는 돈을 번다. 사실 암울한 경제전망은 지난 세월 한국이 겪은 인구보너스 즉, 생산가능인구가 많고 부양대상은 적던 시기의 성장률이 유지될 수 없다는 불안에 기인한다. 그런데 지금 출산율을 높인다고 그 문제가 해결될까? 60년대 노동집약적 산업구조 하에서는 미숙련 노동이라도 투입만 하면 경제가 성장했다. 하지만 70~80년대 자본축적과 설비투자로 숙련 노동을 요하던 때를 지나, 이제 기계와 AI가 노동을 대체한다고 떠들썩하다. 생산요소 중 기술과 자본을 놓아두고, 노동에만, 그것도 질 아닌 양에만 천착해서는 나아갈 수 없는 시대다. 청년실업을 보면 노동 공급은 이미 과잉이다. 소비 감소도 걱정된다지만 우리 경제가 내수의존이 아닌 수출주도형이라는 점은 모두가 알지 않나. 또 어차피 지금의 소비는 대부분 돈 가진 사람이 쓰는 사치재에서 발생하니 수요의 기준도 인구가 아닌 자본에 방점을 두어야 맞다. 아이가 줄어도 유아용품 산업은 성장하는 이치다. 부양부담, 재정파탄이 우려된다지만 같은 맥락에서 소득과 자본 없는 청년은 생산가능인구라도 부양대상에 불과하다. 장기로 보면 베이비붐 세대가 파도처럼 인구 그래프를 쓸고 간 뒤에 오히려 부담 없는 인구구조가, 심지어 다시 인구보너스기가 올 수도 있다. 누구도 국가나 특정 세대를 부양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현 구성원에게 충분히 행복한지 물어야 비로소 의미있는 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 낳고 싶은지, 낳기 싫다면 어째서인지, 낳고 싶은데 어렵다면 고민이 무엇인지 귀기울여보자.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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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02 16:07

우리의 선택지는 결코 두 개가 아니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많은 매체들이 한사람의 상처에 관해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단독과 오보 사이를 달리며 누가 더 자극적인 언어를 뽑아내는지 겨루는 경주마 같은 언론이 그러했고 공감과 연대는 사라진 채 분노와 의심, 억측에 휩싸여 피해자라는 과녁을 조준한 화살 같은 SNS가 그러했다. 보고 있자면 턱 하고 숨이 막힌다. 2년 전 피해사실을 고백하던 그날의 기억이 소용돌이치며 가슴이 먹먹하고 뜨겁다. 여전히 의연하지 못한 나의 존재를 사유하며 혹 세상 어딘가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면 잔인하고 아픈 칠월을 잘 견뎌주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는 것이 살아있음을 감각하는 일이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이 지면을 빌어서. 나는 2018년 2월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극단대표의 성추행사실을 고발한 미투 생존자이다. 그 당시 얼굴을 공개한 피해자라는 이유로 용기, 진정성, 이슈 등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며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내가 얼굴을 공개한 이유는 신뢰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가해행위자로 지목한 대표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법적처벌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 확률이 높아 공론화가 필요했다. 또한 나는 직장이 아닌 개인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고 사업장의 수익은 생계를 꾸리는 데 충분했다. 또 평소 대화를 많이 하는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미투를 적극 지지했다. 다시는 연극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적어도 미투로 인해 내 생계와 일상이 위협받지는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코 모든 피해자의 상황이 나와 같지는 않다. 또한 피해자가 만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서 그 많은 상황들을 견뎌야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상처에 훈수를 두며 쉽고 간편하게 피해자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싫습니다. 못합니다를 하지 않은 이유를 몹시 궁금해 하면서도 그 요구가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무 환경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저의에 대해서는 온갖 억측을 하지만 얼굴을 드러낸 이후 완전히 달라진 일상 속 고통을 감당할 피해자의 남은 삶이 어떤 것일지는 짐작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마치 그의 삶에 어떤 지분이라도 있는 듯 믿을만한 증거를 운운하며 끝내는 한 죽음과 한 상처를 연관 짓고 책임을 묻고야 만다. 피해자가 나와 같은 직장인이고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사회적 일원으로 인정받아 안전하고 즐겁고 일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왜 떠올리지 못할까? 무엇이 우리의 상상력을 이토록 무력하게 만들었을까? 자 이제 내가 속한 공동체를 떠올려 보자. 공동체 일원 모두에게 싫습니다. 못합니다를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가? 그 말을 한 어떤 사람도 결코 불이익이 없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 말을 단지 하나의 의견으로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가? 피해자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피해사실에는 우리가 바꿔야할 많은 구조적 문제가 숨어있고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누구도 거절에 거창한 용기가 필요 없게 되는 날, 우리 모두는 분명 조금 더 성숙해져 있을 것이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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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26 16:22

장애 인식개선이란 무엇일까?

김주은 도르 대표 장애인식이 개선된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인식이 변화한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명확한 척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차별 문제와 인권문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통해 우리나라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어떻게 변화해나가야 하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식과 차별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차별은 누군가를 사회에서 배제하려는 나쁜 마음으로 발생하는 경우보다 어떠한 행동이 차별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렇기에 인식개선이란 한 사람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행동을 송두리째 바꾸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떠한 행동이 장애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지 또 장애인에게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알리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노약자를 배려하는 것과 같이 장애인을 배려하는 방법이 알리고 권장하는 것이 장애 인식개선의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장애 인식개선은 왜 필요한 것일까? 단순히 장애인만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러한 인식개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차별받지 않기를 원하며 자신이 차별하지 않는 공정한 사람이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알지 못해서 실수한 행동으로 인하여 너는 차별을 하는 나쁜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는 것은 억울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차별을 하는 사람을 비판하기에 앞서 어떠한 행동이 장애인에게 차별로 느껴질 수 있는지 알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장애 인식개선은 꼭 필요하다. 장애 인식개선은 누구나 다양한 형태를 통해 할 수 있다. 장애인은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을 개선할 수 있으며, 장애인의 부모나, 특수교사, 사회복지사는 장애인을 동정하며 도와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것으로 인식개선을 할 수 있다. 또 장애인과 함께 일을 하는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을 편견 없이 보는 것만으로도 인식개선이 될 수 있으며, 장애인을 보지 못하는 비장애인들은 이러한 글을 읽음으로써 장애인을 알아가는 것으로 인식개선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장애 인식개선이란 착하고 마음이 바른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단한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알아가고, 마음이 움직이는 만큼 실천해 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장애 인식개선은 어떠한 척도와 결과로 평가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장애 인식개선으로 얻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장애인이 자연스럽게 버스를 타고, 길을 걷고, 영화를 보고, 일을 하는 것이며, 이렇게 장애인이 활동할 때에 힐끔거리는 눈길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장애인과 장애인의 가족, 친구와 같이 장애인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삶의 만족감이 커지는 것이다. 인식이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도록 생각 깊은 곳에 깔린 선입견과 편견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실 진정으로 인식을 개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애인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포기할 수 없기에 오늘도 장애인의 이야기를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오늘 이 글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자리에서 한걸음 더 장애 인식개선에 가까워졌기를 희망한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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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19 16:18

사람이 온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사람들과 새로이 인연을 맺을 때 생각하는 시 한 편이 있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ㅡ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사람에 대하여 지금 눈앞에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은 어떻다라고 판단하며 쉽게 타인에 대해 무례를 범하고, 서로를 혐오하곤 한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하나의 덩어리를 넘어서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삶, 그가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인식, 미래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결정체 같은 것이다. 그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얽혀 지금의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을 수 있다. 덧붙여 그 사람을 대하는 내 과거의 경험과 현재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그리고 나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불안이 모여 그 한 사람을 무엇이라 인식하고 때론 정의한다. 그렇다면 그 인식과 정의에는 상대방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겠다. 나의 삶의 경험과 가치가 기준이 되어 내가 만든 상자 안에 타인을 짜 맞추어 넣고 상자 위에 라벨을 붙인다. 이 과정에서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그 마음을 살피는 일은 생략되곤 하는데, 마음을 살피는 일이 상대를 다 꿰뚫어 보거나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것과 상응하지는 않는다. 그의 갈피를 더듬어 보고 살펴보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이런 과정을 살펴서 타인을 바라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 자신도 과거의 삶들을 충실하게 살피지 못할 때가 많았고, 현재도 일과 상황에 치여 그때그때를 살아가는 데 바쁘다. 그런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그림 또한 흔들릴 때가 많다. 이렇듯 나로서 30여 년을 살아온 나도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혼란이 있고, 정의 내리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남에 대해 내가 겪은 부분적인 모습들을 두고 그 사람은 어떻다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살면서 진정으로 환대해준 사람이 몇이 있을까? 그 경험을 더듬어 보기 전에 환대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다. 환대는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한다.라는 뜻인데, 사전적 정의대로 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마음이 즐겁고 기쁘게(반갑게) 맞이해야 하고, 온갖 힘을 다하여 참되고 성실한 마음(정성)을 담아야 하며, 마음 씀씀이나 태도를 너그럽게(후하게) 마땅한 예로써 대해야(대접) 한다.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살면서 진정으로 환대해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고 살아온 시간을 낱낱이 반성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다른 이를 환대하기 위한 마음, 그 마음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에 대해 주목하자. 반갑게, 정성껏, 후하게, 대접하는 것 이전에 내 눈에 보이는 일면에 사로잡히기보다는 한 사람의 일생을 마주한다는 마음으로 더듬어 볼 여유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우리는 날마다 어마어마한 일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 어마어마한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조금 더 상대를 바라보고 살필 수 있기를 바란다. 더듬어 보는 바람을 흉내 내 더 많은 사람을 환대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 정은실 사회활동가는 평화재단 청년포럼에이피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전주시사회혁신센터 공간지원팀에서 근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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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12 15:51

저출산이 사회악인가

박지원 변호사 첫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50대 공무원 지인으로부터 나중에 연금 떨어지지 않게 아이 좀 많이 낳아줘라는 말을 들었다. 농담 반, 덕담 반 섞어 웃음을 건네는 그였기에 차마 개그를 다큐로 받지 못하고 나 역시 웃음으로 답했을 뿐 아쉽게도 대화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한 마디는 여러 생각을 들게 한다. 당시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지면으로 전하고자 한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심사가 뒤틀리는 성격이다보니 후배의 출산을 축하하는 자리에 연금 걱정 운운하게 만든 사회 분위기에 아니꼬운 의문이 들었다. 왜 저출산을 근절 대상인 사회악으로만 보는가? 정부와 언론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한다. 저출산으로 잠재성장률이 저하되고 나라가 통째로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소식이었을 터. 인터뷰가 첨부된다면 단칸방에서 시작하던 옛 시절을 전하며 철부지들의 근성을 아쉬워하는 기성세대와,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는 시대에 희망 없는 삶을 물려주기 싫다며 욜로를 외치는 청년세대의 모습이 함께 그려졌으리라. 10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소위 호환, 마마, 전쟁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던 시대다. 물리적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농경사회에서 자녀는 유일한 노동력의 원천이자 노후대비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생존을 위해 다산했으며, 피임기술이 보급되지 않아 흥부는 뺨을 맞으면서도 굽신거리며 살았다. 시곗바늘을 50년만 뒤로 돌린다. 우리는 맹수, 질병, 전쟁, 기아 등 수 천년간 인류를 괴롭힌 문명사의 파고를 정복해나갔다. 산업화로 자본이 축적되면서 연금 등 복지제도가 싹을 틔우고, 도시화로 대가족의 효용은 줄어든다. 50년이 더 흐른 현재. 개인의 인권과 행복은 최우선 가치이고, 여성도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독립할 수 있다. 사회와 복지시스템이 일정 수준의 안전과 부양을 보장한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 운운하지 않더라도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면서 자아실현 욕구에 집중하게 되고, 가족 제도나 자녀의 효용이 감소하면서 출산율은 자연스레 낮아진다. 이처럼 돌이켜보면 저출산은 공포와 척결 대상이기 전에 인류 번영, 발전의 징표이자 자랑이다. 정히 저출산이 싫고 고출산을 원한다면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를 본받아 과거로 돌아가면 된다. 가부장제를 강화하여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고 피임을 금지하며, 사회보장을 없애고 부정부패를 만연케 하며, 군사력과 경찰력을 무력화시켜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다. 여성은 전쟁, 강도, 겁탈을 피해 혼인제도에 의탁하고, 무능한 국가에 기댈 수 없는 사람들은 생존과 노후를 위해 아이를 낳으며, 유력한 가문과 권력자의 보호를 받고자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다니면서 혈맥과 혼맥에 의지하려 애쓸테니 저출산은 그야말로 발본색원이다. 그런 사회로 회귀를 원하는가? 아니라면 개인이 스스로 행복을 위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정할 수 있는 데까지 온 우리 문명 발전사의 도도한 흐름을 자축하며, 그 노정에 작금의 저출산 현상이 있다는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나. 물론 저출산 우려 담론이 의미를 가질 수는 있는 지점은 분명히 있다. 그것이 본론이었는데 하도 연금 걱정으로 불안해하는 통에 등 한번 토닥이고 시작한다는 것이 서론이 길어졌다. 다음 글에서 뵙겠다. △ 박지원 변호사는 김제시 고문변호사, 서해대학교 이사, 전주MBC 시사프로그램 이슈옥타곤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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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05 16:18

문화예술계 성폭력, 이제는 제도로 답해야 한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여기, 자신의 삶을 걸고 성폭력피해를 공론화 한 여성예술인들이 있다. 법이 공정하게 잘못을 심판 해줄것이라 믿으며, 더 이상은 이런 아픔이 반복되질 않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지난 6월 19일 전북 문화예술계 박교수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박교수의 보석신청이 허가되어 석방되었다. 동료교수와 제자를 강제로 성추행하여 1년형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된 지 135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75개의 여성단체와 인권단체, 시민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열고 재판과정 중 피고인의 권리만을 신경 쓸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 또한 곤정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2차 피해를 준 것에 강력하게 규탄하며 피해자와 끝까지 연대하겠다고 공표했다. 또한 힘든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낸 피해자의 발언문도 낭독 되었다. 저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저의 피해사실은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수 십년간, 그에게서 갑질과 성폭력을 당해온 많은 선배, 동기, 후배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열 세명의 변호사를 선임한 박교수가 두렵습니다. 그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당하면서도 당했다고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나를 위해, 또 다른 피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박교수를 제발 엄중하게 처벌해주십시오. 그 자리에서 함께 구호를 외치던 나는 여러가지 생각들로 복잡해졌다. 어떤 문장과 수식어를 붙여도 결코 다 담길 수 없을 투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피해자들의 고민과 눈물의 날들이 떠올랐고 어떤 곳에서도 피해예술인들을 보호하지 않았던 문화예술계 내부의 차가운 현실을 깨달았으며 아무리 외쳐도 갖춰지지 않는 제도적 한계에 절망스러웠다. 또한 이 모든 상황을 여전히 남의 일로 치부하는 동료들의 무관심과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파할 사랑하는 사람들의 걱정 어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뒤섞여 눈물이 되어 아프게 흘러내렸다. 재작년 미투의 국면을 넘은 문화예술계 내부에서는 성폭력 없는 안전하고 평등한 창작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피해예술인의 보호와 회복, 복귀에 대한 논의는 미비했고 제도적 측면에서의 공론화 방안과 가해행위자의 징계처리 규정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사안은 흩어져버렸다. 아직도 문화예술계의 성폭력을 일회성의 이슈나 사건정도로 밖에는 인식하지 못하는 문화예술계 내부의 분위기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북 문화예술계 박교수 성폭력 사건 또한 2차 피해와 긴 재판과정의 피로감을 오롯이 피해예술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을 초래했으며 미투 이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문화예술계의 제도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더 이상은 피해예술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현장을 바꾸려는 노력을 그 누구도 방관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단위에서 이 과정에 적극 개입하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제도로써 그들을 보호하고 지침으로 가해자를 엄중하게 징계하는 분명한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어떤 피해예술인도 자신이 사랑하던 예술을 떠나지 않는 안전한 창작현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이제껏 맨발로 가시밭길을 걷겠다 마음먹은 피해예술인들을 위한 진정한 위로이자 성폭력 근절의 대안이며 평등하고 안전한 문화예술계로 거듭나는 안전판이 될 것이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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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28 16:24

팔복예술공장에는 희망이 있다

김성수 조각가 전주 팔복동에는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던 공장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CD등 새로운 기록 매체에 자리를 내주고 폐업을 결정한 후 25년간 물리적, 사회적인 호흡이 멈춘 오래된 사진처럼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2016년부터 전주시와 전주문화재단이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여 팔복예술공장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이 공간은 올해 계획 중인 야외 예술놀이터, 수변공간을 포함하여 전시실, 창작 스튜디오, 유아 예술놀이 공간 등을 보유한 다양한 문화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고 2018년 3월 개관 이후 어느새 누적 방문객이 11만 명(2018-2019년)에 이른 전주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명소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유년기를 팔복동에서 보낸 필자는 어렴풋이 80년대의 팔복동의 느낌을 기억한다. 공단 굴뚝에서 끝없이 뿜어져 나오는 회색 구름, 철로 만들어진 낡은 놀이터와 기찻길, 공단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의 색바랜 유니폼. 흐릿한 유년기의 추억 등등. 상대적으로 열악한 주거환경을 가지고 있었던 전주시의 아픈 손가락 같은 팔복동이 문화와 예술로 덧칠한 도시재생의 메카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롭다. 이러한 팔복예술공장의 혁신적인 변화에는 많은 사람의 숨겨진 공로가 있기에 가능했다. 팔복동의 기억을 간직한 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팔복동 거주민들과 공간의 새로운 대안을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심했던 전주의 예술가들은 무엇보다 우리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팔복예술공장을 찾았다. 거기에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고 수용하려 노력했던 기획담당자들의 열정과 전주시의 낮은 자세가 더해져 좋은 시너지를 만들어내었다고 생각한다. 공간의 변화는 소수의 몇몇으로 인해 바뀔 수 없기에 마음과 뜻을 모은 모두가 이룬 성과라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끊임없이 성장 중인 팔복예술공장이 보완하고 갖춰야 할 부분은 아직 남아있다. 예술공장이라는 이름답게 다양한 재료를 요구하는 거친 입체조형작업을 할 수 있는 다목적 창작 스튜디오의 부재와 유아로만 한정된 예술놀이 공간의 협소함은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개선이 가능한 점이다. 주차장의 좁은 간격도 공간을 찾는 시민들에게 불편함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을 하는 공간의 목적성이 있는 곳으로서 다양한 예술 분야의 전문인력(도슨트, 스튜디오 테크니션, 어시스턴트)의 육성과 추가배치를 통해 예술공장을 찾고 이용하는 관람객과 참여작가들에게 더욱 나은 사유의 경험과 창작의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은 근무와 창작의 환경적인 측면에서 개선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올해 3월부터 팔복예술공장의 3기 정기입주작가로 참여하여 창작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몇 개월간 오가며 그동안 안에서 바라본 팔복예술공장의 모습은 바깥에서 바라본 시각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팔복예술공장을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팔복운영팀, 창작기획팀, 예술놀이팀의 직원분들의 노고가 더해져 이 공장이 돌아가는 모습에 측은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낀다. 이제 다음 주가 되면 입주작가로 들어온 지 딱 100일째가 된다. 10명의 입주작가와 작은 축하의 의미로 모든 직원분께 감사의 떡을 돌리기로 했다. 예전 이 공간에는 써니(카세트 공장에서 일했던 여성 근로자를 상징하는 팔복예술공장의 마스코트)가 공장의 불빛을 밝혔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계신다고 말하고 싶다. 어둑해진 밤, 팔복예술공장은 아직도 희망의 불빛을 킨 체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김성수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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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21 16:13

화사한 꽃밭 같은 동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전주한옥마을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전주시는 문화시설 연장개관과 온라인 스탬프 투어를 운영하며 시민과 관광객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으라차차 향교길 공연, 전통연희 퍼레이드 등 코로나19 감염 상황을 보며 대기 중인 프로그램도 한가득이다. 주말 평균 관람객 수가 150명대에서 300명대로 늘어난 최명희문학관도 지난 11일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열며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이 시간이 너무 그리웠다.는 수강생들은 먼저 나서서 개인위생을 지키며 문학 강연을 즐겼다. 문화시설과 이용자 모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중인 것이다. 문학관이 터를 잡은 이곳. 어린 최명희(19471998)가 뛰어놀았던 화원동(현 풍남동) 일대는 오랜 시간 주거 공간으로 사랑받았던 동네다. 현 전주시청 자리에 전주역이 있어 접근성이 좋았고, 큰 시장과 가까워 많은 사람이 거쳐 가는 물류의 중심이었다. 또한 주요 기관과 공장 등으로 근거리 출퇴근이 가능해 3만 명 내외의 인구가 사는 부촌이었다. 하지만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선정되고 덕진동을 중심으로 부도심이 형성되면서 문화연필, 백양 메리야스로 대표되는 공장들이 이전하고, 1981년 전주역이 우아동으로 옮겨 간 뒤에는 경제활동 주력 층이 점차 빠져나가게 된다. 구두 수선소며 가방 도매상들은 이미 자취도 없어진 채, 어디론가 밀려나버리고,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노트사, 그리고 낯익은 금은방들도 어수선한 흙먼지에 뒤덮여, 간신히 고개만 내밀고 있는 형국이었다.(최명희 단편소설 「만종」 중) 1980년대 전국체전을 계기로 풍남동 일대에서 벌어진 변화를 다룬 최명희의 단편소설 「만종」을 보면 당시 분위기가 생생하다. 사람들 모다 빠져나가먼, 매급시, 돈은 객지에서 다 갖꼬 가고, 여그는 빈껍데기 건물들만 남능거 아닌가?라고 걱정하는 마을 어르신의 목소리와 절반은 이미 허물어져 가시 철망으로 둘러놓은 울타리, ㅁ 중에서 ㄱ 부분만 남아있는 경기전까지. 사람들의 눈길에서 멀어져 시간 속에서 스러지고 있는 것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글에 담겨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쓰러졌던 담벼락이 새 단장을 하고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된 것은 2000년대부터다. 2010년 슬로시티로 지정과 2012년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 선정 등으로 전주는 교육도시에서 관광도시로 다시 태어난다. 한옥이 모여 생긴 독특한 풍경과 경기전오목대전주향교 등의 문화유산, 향토음식, 남부시장 청년몰과 야시장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지면서 전주한옥마을은 전주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콘크리트 같은 딱딱한 일상에 지쳐 휴식이 필요해 전주한옥마을에 왔어요. 구석구석 예쁜 한옥마을 전경과 맛있고 푸짐한 음식이 함께하니 숨통이 트이네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니 저까지 밝아지는 기분이에요.(최명희문학관 방명록에서, 한○윤서울) 단 한 사람만이라도 제가 하는 일을 지켜본다면 이 길을 끝내 가리라라고 말했던, 아늑하고 화사했던 풍남동 은행나무 골목의 유년 시절과 잠깐 살다 옮긴 전동집에서의 짧은 기억을 사랑했던 작가가 지금의 고향땅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골목마다 보물이 숨어 있는, 소소한 행복이 넘실거리는, 화사한 꽃밭 같은 이곳을 우리는 잘 지켜내고 가꿔야 한다. 애정 어린 눈길과 적당한 거리, 배려하는 마음이 모여 틔워낸 웃음꽃에서 그윽한 향기가 풍겨온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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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4 15:57

우리는 장애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김주은 도르 대표 우리는 장애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지난 칼럼에서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무지, 즉 어떠한 말과 행동이 장애인에게 불편함을 주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실제로 장애 인식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 나눴던 사람 중 대다수는 장애인을 특별히 싫어하는 건 아닌데, 장애인을 만났을 때 자신이 몰라서 실수를 하게 될까 봐 다가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 칼럼에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자연스럽게 함께할 수 있도록, 장애인을 만났을 때의 가져야 할 올바른 생각, 말, 행동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전제(생각)는 다음과 같다. 먼저,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동일한 한 인격체임을 인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똑같은 한 사람이기에, 비장애인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언행은 당연히 장애인에게도 불편함을 유발할 수 있는 언행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또, 장애는 개인의 다양한 특징 중 한 가지일 뿐, 그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단편적인 예시로, 장애인이라고 모두 의존적이고 불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 사회에서는 장애인을 미디어로 만나는 경우가 많기에 장애라는 단어로 장애인을 과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장애인을 장애라는 특징으로 성격과 정체성을 일반화하여 생각하는 것을 지양하고, 한 개인으로 인정하고 알아가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장애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을까? 첫 번째, 장애인이 아니라 개인의 이름으로 호칭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비장애인 역시 빡빡이, 뚱뚱보와 같이 개인의 한 특징이 그 사람의 전부인 것 마냥 호칭된다면 불쾌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에게 장애도 개인이 가진 특징 중 하나이므로 장애가 개인의 정체성인 것 마냥 호칭되는 것은 불쾌한 일이며, 이름으로 호칭해야 한다. 두 번째, 도움이 필요한지 질문한 뒤 승낙했을 경우에만 도움을 준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또는 장애의 특징과 정도가 달라서 도움이 필요하지 않거나, 알맞은 도움이 아닐 수 있다. 또 장애인에게 요청하지 않은 과한 배려는 장애인이라 못할 것이다라는 동정이나 무시로 이해될 수 있기에 장애인에 도움이 필요한 것으로 보일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라고 질문한 뒤 승낙하면 도와주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다. 세 번째, 정상인, 일반인이란 단어 사용은 지양한다. 장애인 앞에서 정상인, 일반인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면 장애인은 비 일반적이고 비정상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불쾌감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장애인이 아닌 사람을 지칭할 때는 비장애인으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올바르다. 앞서 설명한 장애인을 만났을 때 올바른 생각, 말, 행동은 전달 상의 오류를 줄이고자 최대한 일반적이고 포괄적으로 내용으로 구성하였으므로 특정 장애에 따라 행동이 변형되거나 추가될 수 있다. 또 모든 행동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으므로, 이번 칼럼의 내용이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는 없음을 밝힌다.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는 장애인을 비장애인을 똑같은 한 인격체로 인정하고 대해야 한다는 것이며, 장애인을 몰라서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서 물어보고 알아가며 함께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행동이라는 것이다.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 그 자체로 충분히 올바르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읽고 생각하고 행동할 당신을 기대하고 응원한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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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7 15:59

내겐 정말 그리운 그녀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이야기 하나. 14년 전 겨울쯤일까? 아무 기대 없이 보러간 선배들의 연극에서 무대 위 너무도 반짝이던 Y를 처음 보았다. 티비에서 보던 화려한 배우들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배역의 호흡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그녀의 연기에 완전히 매료되어 알 수 없는 울렁거림과 벅참을 느끼며 생각했다. 10년 뒤에 나도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 아마도 그 날 부터였다. 소극장 특유의 쾌쾌함도 휑한 객석도 배고픈 현실도 다 잊을 만큼 매력 있는 직업을 찾은 것 같다고 느낀 순간이. 이야기 둘. 기본기가 짱짱하고 무대장악력도 대단하다는 H선배의 모노드라마를 보러가기로 했다. 현장에서 꽤 자주 마주쳤지만 친근하게 다가가기엔 어딘지 어려웠던 그녀. 평소 남 눈치를 많이 살피는 내 성격상 친해지고 싶다는 말은커녕 씩씩하게 인사도 한번 해본 적 없었지만 공연장으로 응원을 가게 된다면 친해질 기회를 조금은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역시 그녀는 공연내내 그 많은 관객들을 혼자서 울리고 웃기며 배우다움을 마구 뿜어댔다. 완전히 그녀에게 매료되어 버린 채, 나는 생각했다. 아주 오랫동안 배우를 하셨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꼭 같은 작품에서 만날 수 있게. 이야기 셋. 우여곡절 끝에 다시 연극을 시작하게 된 나는 K대표님을 만나 배우 인생에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남성연출가의 시각에서 창조된 여성캐릭터만을 연기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다양한 배역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대표였던 그녀는 나에게 특유의 집요함과 꼼꼼함으로 매순간 완벽함을 요구하며 오로지 배우로 성장할 것을 강요했다. 혹독했지만 불합리 하다고 느낀적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보다 더 많은 것들을 더 완벽하게 수행했으니까. 그녀와 함께 하는 매순간 느꼈다.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이제껏 어떤 어른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나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이야기 넷. 동물적인 감각으로 연기를 하는 C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풍부한 감정표현과 공감능력을 가진 그녀는 이야기를 상상하고, 상상한 이야기를 사랑스럽게 전달하는 능력 또한 으뜸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이상한 흡입력으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매순간 진실한 마음을 녹여내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작품에서도 현실에서도. C, 언제나 네가 부럽고 한편으론 자랑스러웠었어. 당신은 정말 타고난 배우야. 나는 그녀들을 다시 무대에서 보고 싶다. 다시금 무대에서 활개 치는 그녀들의 모습이 진정으로 그립다. 누구와 비교해보아도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잘난 그녀들이 본인의 역량을 뽐낼 수 있는 터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 속에서 그녀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싶고 찐하게 협업하고 싶다. 어쩌면 나 혼자만의 소망이거나 주책 맞은 오지랖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들을 현장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 여전히 이곳은 배고프고 열악하지만 더 많은 여성예술인들과 함께 하고 싶다. 그녀들과 있는 힘껏 연대해 이곳을 바꿔보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볼 생각이다. 그녀들이 돌아 올 이곳이 안전하고 아늑할 수 있도록. 어떤 이유로도, 여성예술인이 현장을 떠나지 않길 바라며.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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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3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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