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농고 재학 시절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팔씨름 하면 늘 이겼고, 과별 체육대회에 씨름 선수로 출전해서 나의 완력을 지켜본 친구들과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레슬링 선수로 입문했다. 이후 나는 LH공사(=주택공사)에 스카웃되어 국가대표 선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고교, 대학, 실업선수를 거쳐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 정상으로 가는 길은 땀과 피와 눈물로 점철된 참으로 험난한 여정이었다. 마침내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가 됐다. 체중과 컨디션 관리는 기본이고, 매일 체력과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한 전투였다. 야심차게 올림픽을 준비하며 모스크바 올림픽 한달을 앞둔 시점의 어느날 태릉선수촌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렸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인한 서방의 모스크바 불참 선언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떨썩 주저 앉고 말았다. 또다른 4년이 흘렀고, 마침내 '84 LA올림픽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됐다. 올림픽 결승 경기에서 홈어드벤티지를 가진 미국의 Andrew rein 선수와 혈전 끝에 힘겹게 5대 4로 이기고 끝내 올림픽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이후 나는 일어나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는 말이 실감났다. 미국에서 귀국할 때 미국경찰이 도로를 통제하고 공중에 헬기까지 띄워 공항까지 에스코트했다. 경기중 허리부상으로 나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는데 현대 정주영 회장께서 직접 휠체어를 밀어주시며 앵커리지 공항 면세점에서 시계까지 선물해주셨다. 지금도 내 손목에 차고 다니는 시계다. 귀국 후 서울시청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는데 참여인원이 무려 100만명에 달했다. 청와대 초청 선수단 만찬때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헤드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갑자기 "유선수! 프로레슬링은 쇼인가? 아닌가?"물어서 당황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얼마 전 우리 전북이 대한체육회에 서울과 함께 올림픽 유치 신청을 했다. 사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다. 서울은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끈 경험과 인프라가 우수하다. 전북은 전남, 광주, 세종, 충남, 충북, 대구까지 아우른다는 생각으로 유치신청을 했다. 전북은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비수도권에서도 올림픽을 개최해야한다는 당위성이 있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는 특히 문화, 소리, 음식, 전통, k-POP 등의 발원지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점도 있기에 못할 것도 없다. 우리가 서울과 유치경쟁을 한다니까 "서울을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어?" 라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현실을 보면 그렇다. 전북이 가진 조직, 인프라, 경제능력 등으로는 서울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한번 도전해보자. 6일 대한체육회 현장점검 첫날 군산 새만금 33센터를 돌아봤고, 7일엔 무주태권도원 등을 둘러보며 과연 올림픽을 치를 수 있는지 실사를 했다. 홍보대사인 필자로서는 전북을 찾는 현장실사 위원들에게 우리의 진심과,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간절함과, 우리 도민의 하나 된 마음을 보여주는 이틀간의 여정이었다고 감히 자부한다. '지금 시작해서 되겠어?' '서울을 이길 수 있겠어?' 라는 의심을 버려야 이룰 수 있다. 이제 우리 도민들도 하늘에 소리쳐보자, 우리도 할 수 있다라고 말이다. 간절함이 없으면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2036년 하계 올림픽을 전북에 유치했다는 승리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우리 전북도민들의 요동치는 가슴을 그려본다.
유인탁 전 진천국가대표 선수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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