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전주세계소리축제 리뷰]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잡색X'
사건명: 20240814-잡색X <잡색X>는 2024년 8월 14일 밤에 명백한 ‘사건’으로 출현(出現)했고, 나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공동의 기억이자 유의미한 대상이 되었다. 이 사실이 어떤 결과나 해석보다 가장 중요하다. 작금의 전통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놀라운 문제 제기 도입부는 마치 전쟁 게임 속 판타지(fantasy) 현실 속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관객석에서 보이는 전방은 새까만 컴퓨터 창(窓)이 되고, 무대 위 인물들은 감시자의 눈을 연상케 하는 철 구조물을 배경으로 두고 서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저(User)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언어대로 움직였다. 부족 간 전쟁이 있고, 적장이 죽고, 마을 부족의 우두머리[상쇠]가 배 혹은 철탑, 상여로도 해석될 수 있는 구조물 앞에서 적장의 넋을 달래는 의례를 행한다. 연출은 풍물굿의 전통적인 의식(儀式) 행위를 활용하되, 맥락은 제거하고 뼈대 요소만 서사 전개 곳곳에 나누어 이용했다. 제2막에서는 암흑 속에 익숙한 물체[세탁기]가 등장하고, 그 안에서 흰빛의 생명들이 연이어 토해졌다. 밖으로 나온 존재들이 눈먼 이들처럼 바닥을 뒹굴고, 기고, 웅크리며, 좀처럼 딛고 서지 못하는 모습일 때, 내 체온이 내려갔다. 체온 하강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경계심과 긴장감과 불편함에 대한 신체 반응이다. 마침내 그 한낱 여린 것들이 하나둘 손을 잡기 시작하고, 일어서고, 큰 하나가 되어 생기발랄해졌다. 비로소 나도 고른 숨을 내쉬었고, 뭉클한 가슴 통증을 즐기는 데까지 나아갔다. 만약 이런 내 반응이 관객의 반응 시퀀스(response sequence)까지 계산한 결과라면 경외감을 표하고 싶다. 무엇보다 필자가 크게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작품 곳곳에서 전통의 본질은 모른 채 표피에만 집착하고 신성화하는 낡은 전통 의식(意識)과 태도를 향해 날리는 문제 제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다행히 ‘반항이 아닌 살리고자 하는 열망’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공간이 바뀌어도(당산나무 대신 철탑 앞의 제의 장면), 인성과 사회성이 변해도(부족 화합이 아닌 대립과 죽음 장면), 인권에 대한 존중과 위로와 해원(解冤)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이 연신 들렸다. 연출은 이전 마을공동체에서 비롯한 풍물굿의 문화 핵심이 그랬고, 여전히 유효함을 힘있게 말하고자 상상력의 최대치를 짜가며 고심했던 게 아닐까? 날것의 풍물굿을 주인공으로 한 키치 스타일(Kitsch style) 다큐멘터리 <잡색X>는 박제(剝製)가 아닌 날것의 풍물굿을 주인공으로 삼은 키치한 단편 사실극 영화였다. 필자는 적어도 이 문장 이상으로는 <잡색X>의 독보적인 특질을 집약해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미학에서 정리하는 키치는 ‘예술이 되지 못한 것’, ‘모조품’, ‘싸구려 문화상품’ 등으로, 주로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내리는 말이다. 그러나 ‘작정하고 키치’를 내세운 연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결과적 키치가 아닌, 키치를 이용해 작품의 예술적 의도를 완성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잡색X>의 키치함을 ‘작정한’ 것으로 해석한다. 강렬한 날 것의 냄새, 그 대체 불가능한 아우라(Aura)를 가져온 것은 풍물굿의 플래그십(flagship)이라 할 수 있는 임실필봉농악 깃발과 치배,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함께 구성한 퍼레이드와 재능기놀음 막(幕)이다. 쇠잽이, 자전거동호회 무리, 장구잽이, 해녀 무리, 북잽이, 교복입은 십대 무리, 징잽이, 실버 세대, 열두발 상모잽이, 의사와 간호사들, 할미, 공놀이 하는 아이와 그 가족, 대포수 등등 온갖 인생을 사는 생활인들이 잡색X가 되어 무대를 휘저었다. ‘잡색X’는 무한수였다. 어디에나 있었고, 앞으로 무수히 있을 것이며, 그들이 있는 공간은 무한(無限)·무궁(無窮)이다! 이 클라이맥스로 전막(前幕)에서 돌연 천공이 열리고, 우주인 잡색X들이 행성을 떠돌고, 천체에 있어야 할 별자리가 바닥 아래로 내렸던 맥락을 이제야 비로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잡색X>는 현대적 얼굴을 한 판굿 역시 풍물굿은 생활 주체들의 예술적 놀이일 때 제맛이다. 풍물굿 잽이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의 생활인을 위해 공연하고, 공동체문화로서의 풍물굿 자리는 생활인들의 인생을 떠받치는 ‘뒷것’이 맞다. 이 면에서 2024년 8월 14일에 첫 출현한 <잡색X>는 분명 ‘현대적 얼굴을 한 풍물굿’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충분히 오늘 풍물굿의 잡색X가 될 권리와 자질이 있다! 양옥경 전북대 학술연구교수 국립국악고와 한양대 국악과에서 국악 기악을 전공했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음악학 전공으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전북대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한국전통문화대학교·전북대에 출강하고 있다. 장애인문화예술원(이음) 심의위원, 한국공연문화학회·한국민요학회·한국풍물굿학회·한국음악사학회·한국국악학회의 임원 및 정회원 소속으로 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