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이병천의 '모래내 모래톱'을 찾아서
진안 ‘촌놈’이었던 필자가 기억하는 한에, 맨 처음 전주 나들이를 한 것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동북부 사람들에게 모래내란 지명은 단순히 전주의 입구를 의미한다기보다, 전주 그 자체와 사실상 동일시되는 곳이다. 얼마 전 안골사거리로 자리를 옮겼지만, 나는 전주에 올 때마다 ‘모래내 차부’에 내렸고, 또 ‘모래내’를 등지고 고향을 찾았었다. 고 3때 마침내 솔가(率家), 이주한 부모님이 정착한 곳도 모래내였다. 처음 내가 본 모래내의 풍경은 무엇이었던가? 꽉 낀 ‘전여고’ 하얀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하나 막 빵집에서 나오던 것, 시장 통을 관류하던 모래내 양편으로 늘어선 순대국집의 흥건한 막걸리 냄새, ‘촌놈’ 눈에도 허름하기 짝이 없던 양복점이나 가구점 같은 것들… 모든 것이 정중했던 내 고향에 비하면 모래내는 너무 질펀했고, 상스러웠고 후텁지근했다. 함에도, 그때 한 번의 나들이는 나를 얼마나 신열에 들뜨게 하였던지… 1975년, 4학년 때였다. 일요일 아침, 동네형과 나는 무작정 모래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전주 백리길, 한 시간에 십리씩 걸으면 저녁 참에 모래내에 도착하고, 거기 사는 동네 형 친척집에서 밥 얻어먹고 차비 구해 다시 진안으로 돌아오면 된다는 단순 산술만 믿고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모랫재 구비 앞에 이르렀을 때,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밤새 걸어야 하는 길… 우리는 결국 전주로 방향을 정했다. 모랫재에서 화심까지 기껏 십여리 남짓, 하룻밤이 다 새도록 걷고 또 걸었는데도 그만큼 밖에 못 갔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나뭇가지 달빛에 떨 때마다 걸음을 재촉했고, ‘통금’을 어긴 ‘어린 범죄자’들은 드물게 만나는 차량 불빛만 보면 밤짐승처럼 길섶에 엎드려 바짝 숨을 죽였지만, 뿌연 흙먼지를 피할 수는 없었다. 다 풀린 다리를 질질 끌며 걸음 셈하느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수 천 번도 더 되뇌던 밤, 내 목소리가 왜 그리도 낯설고 무서웠던 것인지… 소양쯤이나 되었을까, 세상의 많은 뱀들이 밤새 도로 위에 제 몸을 던져 자살(?)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즈음, 우리 행색을 수상히 여긴 한 트럭 운전사를 만났고, 덕분에 모래내까지 우리는 트럭을 타고 입성할 수 있다. 진안을 출발한 지 꼬박 하루… 모래내의 아침은 1년 전보다 더 부산했다. 그 빵집에선, 분명히 아침부터 ‘땡땡이 치는’ 것이 분명한 여고생이 ‘얼빠진 까까머리’와 키득거리고 있었고, 문이 닫힌 선술집 앞엔 지난밤의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고, 아침 햇살 아래 흙먼지를 뒤집어쓴 모래내 시장은 더욱 싯누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 남루한 모든 풍경보다 ‘어린 여행자’였던 우리들의 행색이 더욱 누추했다. 모래내 물은 왜 그렇게 더러웠던가, 씻을 수도 없었고, 시장은 왜 그렇게도 미로 같은가, 금방 찾을 수 있다던 동네 형 친척집은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밀려오던 허기와 노곤함 앞에 우리는 무방비였다. 삶은 그야말로 고단한 여행이고, 종착지에 도착하면 더욱 허기진다는 사실을, 난 그 날 아침 모래내에서 배웠다. 이병천 형의 ‘모래내 모래톱’(문학동네·1993)을 처음 접했을 때, 난 1975년 어느 월요일 아침 모래내를 떠올렸었다. 내가 보았던 모래내의 풍경은 ‘모래내 모래톱’ 시절보다 족히 20여년은 지난 뒤의 것이리라. ‘군수 할아버지 집’이 ‘마부의 집’으로 바뀌었으니 ‘세상에 많고 많은 마부’를 모래내에서 찾을 수 없었고, ‘곰배팔이 덕수 삼촌’은 이미 ‘은영이 누나’와 사혼(死婚)을 치른 뒤였으니 더더욱 만날 수 없는 일… 내가 고교 진학했을 때, 처음 하숙하던 곳이 ‘구 형무소’ 근처이긴 했지만, 간수와 죄수에 얽힌 이야기조차 들어본 바가 없었다. 그러고 생각하니, 그때 내가 본 여고생은 ‘길자’였을 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내가 간직한 ‘모래내’의 지형은 ‘용수’가 먼저 살았던 그 지층 위에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 ‘모래내’의 현실적 좌표는 어떠한가? 좌판을 벌이는 시골 할머니들과 그들을 찾는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모래내 시장의 현 풍경이 그러하듯, 전주 외곽 동북 산간부 사람들에게도 그 시장의 소비자인 도시민에게도 모래내는 여전히 점이지대이다. 시골 사람들에게 모래내는 ‘도시의 문턱(liminoid)’이며, 도시 사람들에게는 외곽 경계가 아닐 수 없다. 급격한 도시화의 진행에 따라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고, 사람들의 집산(集散)은 그들 삶의 내력을 교직(交織)케 한다. 그리고, 그런 도시엔 정치·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는 중심-변경(邊境)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변경은 언제나 드는 물과 나는 물이 뒤섞여 소란스러운 사연이 모래톱처럼 켜켜이 쌓이는 곳이다. 이병천 형은 그 기수역(汽水域) 모래톱에 그려진 삶과 죽음, 떠나는 자와 남는 자, 과거와 현재의 무늬를 보았다. 용진면 시천(詩川)을 배경으로 하는 ‘저기 저 까마귀떼’(문학동네·1996)는 이런 점에서 후속작이라기보다 ‘모래내 모래톱’의 ‘잃어버린 반쪽’이라 할 수 있다. ‘모래내’와 ‘시천’은 아득한 듯 가까운 곳이며, ‘용수,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커진다’는 ‘향희’는 ‘길자’의 성장태라기보다 용수의 ‘아니마’(융의 분석심리학에 나오는 개념, 남자는 여성적 무의식적 인격체인 아니마가 존재한다)에 가깝다. 그렇게 용수는 ‘꿈과 더불어’ 커나가고, 우리는 용수가 부리는 말(言語)을 통해 ‘시천’과 ‘모래내’, ‘5~60년대’와 ‘현재’ 사이를 주유한다. 한편에는 ‘단도의 집’이 또 한 편에는 ‘농약꽃’이 서 있는 사이, ‘용수’가 있다. 용수는 ‘작가 이병천’일 수도 있고, 모래내를 거쳐갔거나 모래내를 동경하며 동시에 환멸 하였던 모든 이들일 수도 있겠다. 그런 점에서, 이병천 형에게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 약속’인가! 용수가 세상에 배달한 말은, ‘상집’이를 ‘한상준’으로 되돌아오게 하고, ‘어풍이 아저씨’ 대신 진짜 방송을 하게 하였으며, ‘설우형’을 또 만나게 해준다. ‘모래내 모래톱’과 ‘저기 저 까마귀떼’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소년 ‘용수’를 성장케 하는 두 개의 동력, 바로 삶과 꿈… 문학은 그 건강한 긴장 사이에서만 태어난다는 것, 세상의 입구와 출구 사이, 그 혼탁함 속에서만 맑은 눈물이 나온다는 것… 이걸 아는 자가 아주 없는 것 아니지만, 말로 그려낼 수 있는 작가는 정말 귀하다. 모래내가 작가 이병천을 키웠다면, 이병천 형은 ‘모래내’를 새로운 문화 지형으로 끌어올린다. 나는 그 모래내를 얼마나 부러워하고 또 그리워했던가. 작가 이병천의 문학세계지난 2월 이병천 형이 출간한 장편소설 ‘신시의 꿈’(한문화·2004)은 ‘소설가들이 존경하는 소설가가 이병천’이라는 ‘문단의 풍설’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 작품이었다. 선배 작가인 조정래가 “이병천의 능숙하고도 신들린 듯한 장인의 솜씨를 타고 홍암(弘巖) 나철(1863~1916)은 현란하게 우리 앞에 부활한다”고 표현했던 이 작품은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을 적절히 배합하면서 춤과 노래, 해학, 무속 신앙, 해금 가락, 역사 의식을 펼쳐 보이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국단위 행사가 있을 때 다른 지역 작가들은 전북에서 온 일당(?)들 속에서 꼭 이병천을 찾아낸다. 술과 풍류를 아는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생명의 기운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문학의 깊이를 한 수 배우려는 아슴찬 마음도 있으리라. 지금껏 그가 끌어올린 다양한 이야기 속에는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진지함과 연륜이 느껴지는 그윽한 맛이 우러나온다. 소설 미학의 진수. 1956년 전주에서 태어난 작가는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우리의 숲에 놓인 몇 개의 덫에 관한 확인’과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더듬이의 혼’이 당선됐다. 소설집으로 ‘사냥’ ‘모래내 모래톱’ ‘홀리데이’와 장편소설 ‘저기 저 까마귀떼’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전2권)’ ‘신시의 꿈(전3권)’, 어른을 위한 동화 ‘세상이 앉은 의자’를 펴냈다. 전북대 국문과 졸업, 현재 전주문화방송에서 근무한다. /김병용(소설가·백제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