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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인생 40년 맞아 책 '춤이 있어 외롭지 않았네'펴낸 김화숙 원광대 교수

현대무용가 김화숙 원광대 교수(61). 1971년 '김복희 김화숙 현대무용단'을 창단, 첫 작품을 올리며 그는 우리 현대무용의 시작점이 되었다. '현대무용의 대모' 육완순 선생을 바로 잇는 세대이니, 그의 이름이 곧 현대무용의 역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1985년 그는 전북에 현대무용단 사포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스물네번의 정기공연과 스물아홉번의 소극장 기획공연, 열한번의 야외공연은 이 땅에 현대무용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제대로 된 극장 하나 없는 현실에서 지하 창고에 조명을 달고, 자동차 전조등을 켜고 야외공연을 하던 시절을 지나왔다. 꼭 40년이었다.그는 남들보다 늦은 고 1때 발레를 시작했다. 지독하게 훈련했지만, 답습하는 발레보다는 창작에 대한 욕구가 컸다. 결국 대학에 들어가 토슈즈를 벗어던졌다."내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자유로운 정신. 현대무용은 정신이 중요해요. 춤 속에 자기 철학을 담아야 하죠.""미술로 말하자면 현대무용은 추상화와 같다"는 김교수. 그러나 작품 속에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역사성과 사회성을 담으려는 노력만은 잊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광주민주화항쟁을 5년에 걸쳐 만든 3부작 '그해 오월'(1995), '편애의 땅'(1997), '그들의 결혼'(1998)은 그의 춤인생에서 잊지 못할 작품이다. 특히 '편애의 땅'은 월간 객석의 올해의 무용가상과 한국춤비평가회의 춤 비평가상을 안겨줬다."2001년까지는 주로 서울에서 공연을 많이 했는데, 이후 10년 동안은 전북에서 신작을 발표해 온 것 같아요. 좋은 작품으로 지역을 성장시킬 수 있겠다는 믿음 때문이었죠. 덕분에 사포 공연을 보기 위해 일부러 서울에서 내려오거나 사포 공연만을 기다려 주시는 지역 관객들이 꽤 많아졌어요. 감사한 일이지요."그러나 사포는 성장했지만, 올해 25주년 기념 신작은 전라북도 무대지원금에서 제외됐다. 대본까지 써놓은 신작 대신, 지난해 공연한 '지나가리라'를 25주년 기념무대로 다시 올리는 것도 그 때문. 예술가에게는 돈보다 자존심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그는 순간 내가 이 노력을 서울에서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지역무용단 25년의 역사나 의미가 무시된 것 같아 서운했죠. 돌이켜 보면 서울에 가면 전북 사람, 전북에 있으면 서울 사람, 내가 경계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공연은 하자 했어요. 아무리 섭섭해도 사포 25년을 지켜준 관객들만큼은 초대하고 싶었거든요."그동안 참으로 많은 단원들이 거쳐갔고, 참으로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그는 "정년까지 내가 전북에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사이 사포가 자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오는 19일 오후 5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열리는 '지나가리라'(연출 김화숙, 안무 김옥·김자영·송현주)는 주문처럼 외우고 싶은 말. 그는 "사포의 지난 날들을 아름다움으로 간직하고 오늘 이 순간 또한 지나가리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사포가 자신의 전부였던 고 신용숙 대표가 25주년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 건 춤이었던 것 같아요. 정식 극장 공연으로만 70편을 안무했으니, 작품 만들며 세월 다 보낸 거죠. 무용가가 사라지면 그 춤도 사라지고, 그러다 보니 오랜 역사에도 무용 발전이 더딘 것 같아요. 그래서 후학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안무가가 직접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겠다 싶었어요."그는 최근 춤이 있는 에세이 「김화숙의 춤길 40년-춤이 있어 외롭지 않았네」를 펴냈다. 책에는 그의 춤과 글, 그와 그의 춤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담겼다. 12일 서울 인사동 아원공방 전시장에서 열리는 출판전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 문화일반
  • 도휘정
  • 2010.06.03 23:02

[노노 청춘] 닭살 자랑하는 '잉꼬부부' 나만호·이영인씨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60대 노부부가 무대에 오르자 객석이 일순간 술렁거렸다. 얼굴이 약간 상기되긴 했지만 이내 당당한 워킹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이 부부는 남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듯 젊은 연인들조차 하기 어려운 닭살 애정(?)을 과시했다.지난달 26일 오후 7시 전주양지노인복지관은 개관 2주년을 맞아 실버모델선발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예선을 뚫고 결선에 진출한 나만호(69)·이영인씨(62) 부부는 찰떡호흡을 과시하며 당당히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결선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포즈를 취할까, 어떻게 해야 멋있을까' 고민하면서 아내와 함께 꾸준히 연습했어요. 노력하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큰 상을 받아 기쁩니다."패션쇼 피날레 무대에서는 앙드레김 패션쇼 트레이드마크인 '이마 맞대기' 퍼포먼스를 선보여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고 장기자랑 시간에는 나만호씨가 장윤정의 '꽃' 노래를, 이영인씨는 벨리댄스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둘이 함께 하는 무대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거예요. 느지막한 나이에 주책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한다는 것은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잖아요."30여 년간 경찰공무원으로 활동한 나씨와 20여 년간 교육 공무원으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던 이씨는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아내가 충청도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주말부부로 생활했고,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둘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함께한 추억이 별로 없어서인지 몰라도 지금은 아내와 함께 하는 순간 순간이 새롭고, 신혼부부 같습니다."나씨 부부는 젊은 시절부터 춤과 노래 등 취미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지만 주위에서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까 걱정돼 가슴에만 담아뒀다."스포츠댄스 등을 배우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혹시 주위 사람들이 '공무원들이 왜 저래? 점잖지 못하게'라는 말과 함께 이상하게 쳐다볼까 두려워 가슴에만 담아뒀지요."전주 양지노인복지관이 개관할 때부터 함께 한 나씨 부부는 스포츠댄스를 비롯, 그룹사운드 활동 등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지 모를 만큼 바쁘게 살고 있고 둘이서 알콩달콩 즐거운 일만 해서 그런지 늙을 틈도 없네요."모든 활동을 함께하는 나씨 부부는 금슬 좋은 잉꼬부부로 알려질 만큼 노인복지관 내에서 인기가 높다. 또 질투어린 시선(?)을 받는 것도 예사다."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 고맙고 행복합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갔던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편안하게 생활하니 '행복'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곁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나이는 숫자에 불과, 몸과 마음은 이팔청춘(二八靑春)이라고 강조하는 나씨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건강하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다"면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게 생활하다보니 저절로 젊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노인복지관이 더 많이 생겨 노인들에게 평생교육과 사회교육 등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문화일반
  • 신동석
  • 2010.06.03 23:02

"21세기 선교 모색" 에든버러 선교대회 개막

1910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사대회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2010 세계선교대회'가 2일(이하 현지시간) 에든버러 제너럴 어셈블리 홀에서 개막했다. 1910년 세계선교사대회는 북미와 서구 유럽의 선교단체와 선교사 1천200여 명이 모여 개신교 선교운동과 연합ㆍ일치운동의 방향을 모색했던 행사다. 대회는 이후 1921년 국제선교사협의회,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대회 참석자들은 식민주의ㆍ인종주의 극복과 독립교회와 자립교회의 탄생과 발전을 소망했고, 다른 교파 기독교인과 타종교인, 비종교인과 어울리고 소통한다는 데도 공감했다. 그래서 1910년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린 에든버러는 '에큐메니컬(교회 연합과 일치)운동의 산실'이라고 불린다. 100년 전의 세계선교사대회가 20세기 개신교의 선교 방향을 결정지었다면, 2일 시작해 6일까지 계속되는 2010세계선교대회는 21세기 개신교의 선교 방향을 모색해 보는 계기가 된다. '이 세대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가 주제인 올해 대회 기간 열리는 콘퍼런스에는 세계 각국 선교사와 선교학 전문가 300여 명 등 1천여 명이 참석해 100년 전 이곳에서 열린 선교사대회의 정신을 되새기고, 세계 각국에서는 이 기간에 맞춰 지역별 선교 축제도 열린다. 한국 개신교계로서도 이번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는 뜻 깊다. 100년 전 대회에는 서구 백인 남성 선교사가 대부분이었으나 한국교회 대표로 윤치호(1865-1945)가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100년의 세월이 지난 올해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 한국교회 관계자로는 영락교회 이철신 담임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가 참석한다. 특히 이철신 목사는 선교대회 마지막 날인 6일 오후 에든버러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St. Giles' Cathedral)에서 열리는 주일예배의 핵심인 설교순서에서 설교자로 나서 세계에 한국교회의 높아진 위상을 알린다. 이철신 목사는 '평화와 복음의 전파자'를 주제로 한 연설에서 기독교 선교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역대 선교사들의 행적을 기리고, 영락교회 설립자인 고(故) 한경직(1902-2000) 목사의 삶을 소개한다.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은 1120년 무렵 스코틀랜드 왕실이 건립한 대성당으로 이후 칼뱅주의 종교개혁가 존 녹스(John Knoxㆍ1505-1572)가 설교한 세계 장로교의 '모(母)교회'다. 이날 예배는 인터넷으로 생중계된다. 영락교회는 이번 대회 기간 한국교회의 어른이자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1992년)을 받은 한경직 목사의 신앙과 선교ㆍ사회복지 활동을 소개하는 홍보물을 마련했다.

  • 문화일반
  • 연합
  • 2010.06.03 23:02

하동서 첫 삼국시대 고분군 발견…토기 등 출토

경남 하동에서 삼국시대 고분군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1일 하동군에 따르면 국도 19호선(하동읍~악양면) 확장사업 구간인 하동읍 흥룡리 산171-7 일대에서 문화재발굴조사를 벌인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이 삼국시대 수혈식 석곽묘 21기와 조선시대 분묘 16기, 그리고 토기를 발굴했다. 삼국시대 수혈식 석곽묘는 섬진강 동쪽 구릉을 중심으로 월영형(月影形. 달 그림자 모양) 주구(周溝. 봉분 주위를 두르는 도랑)가 설치되고 이를 중심으로 한 봉토내에 1기의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 무덤의 주인을 안치하는 공간)가 있는 단곽식과 2~3기의 매장주체부가 있는 다곽식이 함께 조성됐다고 연구원은 설명했다. 연구원은 단경호ㆍ장경호 등 토기 수십점이 출토된 것으로 미뤄 석곽묘 축조과정에 토기와 토기편을 함께 매장하는 장속(葬俗) 행위가 성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특히, 이 지역에서 발굴된 토기는 아래 부분에 일자 문양이 남아 있어 십자 문양이 남는 대가야 양식을 모방해 자체 생산한 것으로 연구원은 추정하고 있다. 토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점토를 두드리는 타날판의 문양이 일자와 십자 형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동지역은 그동안 대단위 고분군이 조사된 사례가 전혀 없는 문화적 공백지대로 분류됐으며 고분군이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원 관계자는 "발굴된 흥룡리 고분군은 섬진강 주변 지역과의 완충 역할을 하면서 이 지역에서 가야와 삼국시대로 이어진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문화일반
  • 연합
  • 2010.06.02 23:02

日 전통극 '교겐'과 韓 판소리의 만남

일본의 전통극 교겐(狂言)이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에서 첫 선을 보인다.전주국제문화교류협회(이사장 이명기)가 4일 오후 7시 전주전통문화센터 한벽극장에서 '한국의 판소리와 일본 교겐의 만남'을 연다.교겐은 노(能)와 함께 노가꾸(能樂)라 불려왔다. 노래나 춤을 중심으로 하는 비극적이고 몽상적인 극은 노가 됐으며, 판토마임적인 극이나 재밌고 웃긴 대사를 중심으로 하는 극은 교겐이 된 것. 교겐은 30분 안팎의 짧은 극으로, 등장인물이 두사람만 되어도 극이 성립된다. 간단한 형식으로, 무대장치나 배경, 조명, 반주음악, 화장 등을 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대사와 동작에만 의존해 배우의 역량이 확연히 드러나는 작품이다.이번 무대에는 교겐과 판소리가 차례로 오른다. 전주에 초대된 교겐 배우 다카자와 유스케는 1987년 데뷔, 교겐 지도자로 활동하며 유럽 등 해외 무대에 주로 서왔다. 이날 공연에서는 오이도둑을 잡기 위해 주인이 허수아비로 분장하는 '오이도둑'과 '타로관자'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시키는 '타로관자의 노래'를 선보인다. 교겐은 이즈미류와 오오크라류로 나뉘어져 전승되고 있는데, 이번에 공연되는 작품은 이즈미류다.판소리는 김연 전북도립국악원 교수가 출연, '심청가' 중 '심청이 눈 뜨는 대목'을 들려준다. 공연 전 한국어 해설을 먼저 할 예정. 공연은 무료다.전주국제문화교류협회는 해마다 일본에서 김장축제를 열고 일본 전통예술을 전주에서 펼쳐보이는 등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힘써왔다. 이번 공연은 전주국제문화교류협회 회원인 신뱅이김치 안명자씨가 주선한 것. 안씨는 "교겐은 현재도 일본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예술"이라며 "서울에서 한두번 공연됐을 뿐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의 전통예술을 전주에서 소개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 문화일반
  • 도휘정
  • 2010.06.02 23:02

전북 문학인 육필원고 DB 구축

최명희문학관(관장 장성수)이 6월부터 전주문화재단(이사장 라종일)과 함께 '전북지역 문학인 육필원고 모집·정리' 사업을 다시 시작한다.2006년 개관 이후 전북지역 문학인들의 친필원고를 수집해 정리하고, 관람객을 대상으로 '전북지역 시인·작가들의 친필 따라 쓰기'와 '전북지역 시인·작가들의 친필을 활용한 엽서 쓰기' 등을 운영해 온 최명희문학관은 문학인들의 범위와 규모를 넓혀 전북 출신 및 전북에서 활동했던 문화예술인들의 창작품 등 육필원고를 정리할 계획. 이를 DB화해 전북 문화예술인들의 생애기록으로서 자료로 활용하고 문화콘텐츠 활성화를 위한 기반으로 조성할 예정이다.사업 대상은 작고작가부터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까지, 시인과 소설가, 아동문학가, 수필가, 극작가, 평론가 등 장르를 아울러 전북과 관련된 모든 문학인을 대상으로 한다. 친필원고를 기본으로 하지만, 곳곳에 고친 흔적이 남아있는 이전 작품 원고와 작가의 순간적 감정이 담겨진 메모,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일상을 한 자 한 자 새겨 넣은 일기, 사인본 저서 등 작가의 육필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한다.모아진 원고와 자료는 최명희문학관에서 '전북문학인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진행한 뒤 발간사업과 전시사업 등에 활용할 계획. 최기우 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은 "육필원고는 우리 문학의 곳간을 풍성하게 채워온 문인들의 분신으로 작가 친필로 쓰인 원고는 엄밀히 말하면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라 문단 공동의 재산일 것"이라며 "가장 소중하고 시급한 문화프로젝트"라고 말했다.최명희문학관은 현재 1차적으로 작가들에게 친필원고 의뢰서를 보낸 상태. 최실장은 "아직 친필원고 의뢰서를 보내지 못한 작가에게는 주소가 파악되는 대로 보낼 예정이며, 작고작가의 친필자료는 자체적으로 수집 중"이라고 덧붙였다. 문의 063) 284-0570

  • 문화일반
  • 도휘정
  • 2010.06.01 23:02

"일제, 식민지배 정당화 위해 석굴암 복원"

일제강점기의 석굴암 복원이나 신라고분 조사가 일제의 문화정책 홍보와 식민지배 정당화에 이용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일제강점기와 우리 문화유산의 오늘'을 주제로 다음달 4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고대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문 '일제강점기 한국미술사 구축과 석굴암의 발견'을 통해 일제의 석굴암 복원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입증할 예정이다. 강 교수는 한국고대학회가 31일 배포한 발표문에서 일제가 "자기들이 (석굴암을) '발견'했고 '수리'했으며 '복원'했다"고 선전한 것은 자신들이 영화로운 조선의 과거를 되살릴 수 있는 식민본국임을 강조하려던 것이라고 주장했다.그에 따르면 일제는 석굴암을 "마치 이전에는 없었던 것인 양" '발견'됐다고 선전했으며 수리와 복원을 통해 "누구나 한 번쯤 가봐야 하는 제국주의의 성공적 지배의 상징"인 관광지로 탄생시켰다. 이에 따라 석굴암은 처음 조성됐던 종교적ㆍ예술적 맥락을 잃어버리고 '일제에 의해 변모된 조선 근대의 표상'으로서만 대중에 인식되도록 '재맥락화됐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일제가 석굴암과 같은 당시 조선의 유물을 평가절하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거꾸로 석굴암과 본존불을 동아시아에서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라고 칭찬했다. 그 이유는 석굴암을 비롯한 조선의 옛 유물은 결국 '전근대'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에 의해 '근대화'를 겪어야 할 대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더구나 일제는 석굴암과 본존불을 칭찬하면서도 이와 대비해 당시 조선의 현실이 '쇠락한 문명'이라는 것을 늘 강조했다. 실례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조선미술사'에는 조선의 미술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에 걸쳐 발달의 정점에 달했고 고려에는 쇠퇴의 조짐을 보이다가 조선시대에는 쇠퇴를 거듭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러한 일제의 평가는 결국 1920~193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까지도 과거 유물에 대해 찬탄하면서도 당시의 처지를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 평가가 발달한 문명을 가진 일본이 낙후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가 됐음은 물론이다. 강 교수는 조선의 문화재가 아름다운 여성적 곡선미를 지녔다고 평가되는 것 역시 일제의 이데올로기가 주입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식민지 조선을 '약자(弱者) 여성'에 비유함으로써 '남성 제국주의'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라는 것이다.김용성 중원문화재연구원 원장은 함께 배포된 발표문 '일본인의 신라고분 조사'에서 1920년대까지는 한반도 침탈을 위한 제국주의 인류학ㆍ고고학 조사에서 소외됐던 신라고분이 1921년 금관총(金冠塚)의 발견으로 활성화된 점에 주목했다. 그는 금관총에서 화려한 유물이 출토돼 관심이 집중되자 일제의 국위선양과 문화정책 홍보에 도움이 됐고 이 때문에 이후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서봉총 (瑞鳳塚) 등의 다른 신라고분 발굴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김 원장은 일제가 이처럼 국위선양과 홍보에 도움될 화려한 유물에만 집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무덤형태와 봉분구성 등은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보고 일제가 발굴한 신라고분들을 적극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기성 한신대박물관 특별연구원은 '일제 강점기 석기시대의 조사와 인식'에서 일제강점기에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였던 토리이 류조(鳥居龍藏)가 했던 석기시대 관련 연구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조상이 같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밑거름이 돼 '한일강제병합 정당화'에 쓰였다고 설명했다.

  • 문화일반
  • 연합
  • 2010.06.01 23:02

'코리아 패션' 범부처 통합 추진체계 구축

산발적으로 추진돼온 패션 지원 정책을 조율해 통합적인 한국 패션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범부처 차원의 지원체계 도입이 추진된다. 정부는 이를 통해 '코리아의 디자이너 패션'에 국격에 맞는 차별적 이미지가 형성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패션을 단순한 산업적인 관점이 아니라 문화적인 창의성을 중시하는 창조산업으로 접근하는 선진국 추세에 맞춰 한국 패션 문화산업의 창조적 육성을 목표로 한 중기계획 '패션코리아2015'를 추진하기로 했다고 31일 밝혔다. 이번 계획은 섬유 수출(2008년 기준)은 세계 5위지만 의류 수출은 23위에 불과하며 고부가가치 제품의 경쟁력이 낮고 의류도 패스트패션 등 대량생산 위주의 육성으로 인해 창조적인 디자이너 패션에 대한 지원은 미비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와 관련, 문화부는 현재 연간 25억원에 불과한 예산을 점차 늘려 내년부터 5년간 390억원을 투입, 지난 2월 뉴욕패션위크 때 운영한 한국 패션문화 쇼룸을 매년 마련하는 등 한국패션을 대표하는 통합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다는 목표다. 특히, 문화부는 범부처 차원의 유기적 추진체계로 '패션문화정책 전략위원회'를 구성, 패션 문화정책 기본 계획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 문화산업진흥기본법에 패션 지원 정책의 근거를 명시하고 통계청의 산업 특수분류 기준에 '디자이너 패션'도 신설토록 할 방침이다. 아울러 국립패션미술관 건립, 인큐베이팅 시스템 구축, 염색ㆍ직조 제작공방 클러스터를 비롯한 예술과 패션의 협업환경 조성, 한국 패션문화의 정체성을 발굴하는 민관 연구협의체 구성 등도 추진과제로 검토 중이다. 이밖에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참여하는 '한국패션문화 포럼' 조직을 통해 한국의 명품 패션을 애용하는 분위기가 확산하도록 유도하고 패션과 한류가 해외진출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뒷받침할 계획이다. 문화부는 "고급 디자이너 패션에 초점을 맞춘 정책으로는 처음 수립한 중기계획"이라며 "이를 통해 의류 경쟁력도 15위까지 높인다는 목표"라고 말했다. 문화부는 이날 오후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원대연 패션협회 회장, 패션 디자이너 안윤정씨 등 패션계 관계자를 비롯한 200여명의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패션코리아 2015' 비전 선포식도 열었다. 유인촌 장관은 "우리 패션 산업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화일반
  • 연합
  • 2010.06.01 23:02

[전북일보로 보는 전북 60년] 원로 언론인에게 듣는 그때 그 현장

한국전쟁 이후 60년. 숨 가쁘게 달려온 역사의 현장에는 언제나 펜을 든 기자들이 있었다.지금은 일선 현장을 떠난 전북일보 원로 기자들을 만나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현장과 취재에 얽힌 일화를 들었다.◆ 문치상 - 곰티재 참사와 모래재 도로 개통"전화도 되지 않던 시절, 현장에서 돌아와 기사를 옮겨내기 위해 시간과의 전쟁을 벌여야 했죠. 당시 버스가 하루 두 번 뿐이어서 주민들이 불편을 겪었지만 모래재 도로 개통으로 교통량도 크게 늘었습니다."1966년 완주 곰티재 대형 교통사고를 취재한 문치상씨(69)는 언론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의제설정이라고 강조했다.사고 현장과 더불어 곰티재 도로의 구조적 위험성을 생생하게 전달한 데 이어 도로 개선의 방향성을 설정, 지속적인 보도로 모래재 도로 개설이라는 지역 현안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김대원 - 이리역 폭발사고1977년 11월11일 이리역 폭파사고 현장은 전북일보 기자들이 가장 먼저 달려갔다.당시 경찰 캡이었던 김대원씨(70)는 익산본부에 있다가 '쾅'소리가 나자 본능적으로 현장에 달려갔다고 했다. 그는 빈민촌이 형성돼 있었던 이리역 주변은 정전과 함께 대다수 건물이 부셔져 암흑세계와도 같았다고 회고했다.당시 김기자는 난민 구제를 위해 일자리 마련이라는 장기 대책이 필요하다고 판단, 기업체를 유치하자는 기획보도를 내보냈다.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현장에 찾아올 정도로 큰 사고였다"며 "사고를 계기로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내 도시정비 사업이 앞당겨졌다"고 회고했다.◆ 김종량 - 1980년대 민주화 항쟁"5·18 광주민주화 항쟁 직후 열렸던 전주 신흥고 학생들의 학내 시위를 취재, 기사화했지만 검열과정에서 빠졌습니다. 1980년 당시 군인들이 신문사에 상주, 기사를 검열하면서 정론직필을 주장하는 기자들의 저항이 이어졌습니다."1980년 8월 서슬퍼런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된 후 복직된 김종량씨(69)는 군사정권의 감시와 통제속에서도 기자들은 자유언론 수호를 위해 저항했다고 말했다.실제 전북일보 기자들은 1980년 5월 16일 편집국에서 기자협회 회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유언론 수호 선언문을 채택, '내·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배격, 정론을 펴는 역사의 증인이 될 것'이라며 공정보도를 결의했다. 이같은 기자들의 의지는 5월17일자 신문에 그대로 실렸다.◆ 정지영 - 사건현장과 사진"1980년 5월 광주, 모 방송국 앞에서 게시판을 보던 중 의심을 받아 시민군의 총에 맞을 뻔한 아찔한 순간도 겪어야 했습니다."역사의 현장을 담아온 정지영씨(68)는 사진부 기자로 활동하며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1980년 민주화 항쟁, 이리역 폭발사고 등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에 있었다.특히 5·18 광주민주화 항쟁이 일어나자 당시 사회부장이었던 이광영씨와 현장 취재를 나간일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순창에서 광주까지 걸어서 현장에 들어갔다고 회고했다.전두환 정권에서 민주화 항쟁 현장을 담은 '우공의 시위'라는 제목의 사진은 도내 언론 최초로 1985년 제20회 보도사진전에서 동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 문화일반
  • 도휘정
  • 2010.06.01 23:02

[전북일보로 보는 전북 60년] 흔들림 없던 '정론직필' 60년…역사의 물줄기 바꾸다

◇1980년대△격변기 민주화 열망 반영민주화 열망이 거셌던 1980년 5월, 전북일보는 계엄철폐를 외치는 대학가의 시위를 연일 보도했다. '전국 대학가 가두시위', '전북·원광대 5000명도', '군산대생 600여명도 시청앞 집회농성' 등의 기사로 민주화 촉구 시위에 휩싸인 대학가 소식을 전했다.또 소식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북일보 기자들은 5월16일 정론과 직필을 다짐하는 자유언론수호 결의대회를 열고 17일자로 이를 보도했으며, 21일 광주민주화운동의 첫 소식을 전한데 이어 22·23·24일자에 연일 보도했다. 또 27일자에서는 전북도와 도민들의 광주시민돕기 행렬을 전했다. 하지만 군부정권의 언론사 통폐합 및 언론인 강제해직사건으로 1980년 8월13일 정론직필에 앞장 선 기자 9명이 강제해직되는 아픔도 겪었다.△중국 어뢰정 예인·군용기 불시착중국과의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1985년, 중국 어뢰정이 서해상에 표류하고 군용기가 익산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전북일보는 '상관에 불만품고 총기난동'(1985년 3월25일)이라는 기사를 통해 군산 앞바다에서 중국 해군 소속 어뢰정이 군산수협 민간어선에 구조를 요청한 사건을 상세히 전달했다.같은 해 8월 24일에는 이리시(현 익산시) 신흥동 논에 중국 군용기가 불시착했다. 전북일보는 '중국 군용기 이리 불시착…조종사 망명 요청'(8.26 1면)으로 첫 소식을 전하고 사고 원인과 이후 전개, 중국 조종사의 대만 망명 소식 등을 보도했다.△전주 수돗물 악취사건과 상수원 개발1986년 전주시가 대아댐을 새로운 수원지로 하는 상수원 개발 계획을 발표한 것은 '금강수계 수돗물 5일째 악취'(1986.3.15)라는 전북일보 기사에서 비롯됐다. 당시 전북일보는 전주시 일부와 군산 옥구, 익산 일부지역 주민들이 수돗물에서 풍기는 악취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취수관리 전북참여 당연'(1986.3.19), '금강 물값 줄 수 없다'(1986.3.27) 등의 기사와 사설로 원인규명 및 사태의 근본적 해결을 바라는 도민의 목소리를 전했다.한 달 보름여에 걸친 보도로 결국 전주시가 대아댐을 새 상수원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을 발표(1986.4.15)하면서 일련의 사태는 막을 내렸다.◇1990년대△지방자치제 30년 만에 부활1991년 신년호 1면, 전북일보는 '도약 91'시리즈의 첫번째로 '지방자치제 실시'를 선정, 2개면에 걸쳐 출마 예상자의 프로필을 싣는 등 지방자치제 부활을 크게 반겼다. 또 도민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공명선거 운동에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아울러 지방자치 대학을 개설해 각 대학의 교수와 정치인, 학자, 행정가들을 강사로 초청해 지방자치제도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또 같은 해 6월 1일 창간호를 통해 '불붙은 광역선거…우리당의 입장'이라는 제목 아래 당시 민자당 조남조 도지부장, 평민당 최락도 도위원장의 대담을 실었고, 4일부터는 1개 면을 할애해 '광역선거 격전현장-각 지역별 진단'을 시리즈로 실어 각 지역 후보자를 유권자들에게 상세하게 알렸다.△부안 서해훼리호 참사1993년 10월 10일, 292명의 고귀한 인명이 수장된 비극적 해난사고의 충격은 지금도 도민들의 기억에 남아있다.이날 오전 10시 15분께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앞 해상에서 군산 서해훼리사 소속 110t급 여객선이 격포기점 4.5km 앞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전북일보는 곧바로 10일자로 2개 면의 호외를 발행했고 11일자에서는 1면을 비롯해 모두 6개면을 할애해 '서해훼리호 위도해상서 침몰', '강한 돌풍 파도 맞는 순간 바다 속으로', '대부분 선실서 참변…사체 44구 인양'등의 기사로 사고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또 사고수습이 어느 정도 진행된 10월 19일 '한에 묻힌 천혜보고 위도를 살리자'는 주제로 5차례에 걸쳐 캠페인을 진행했다. 서해훼리호 사고 뒤 위도종합개발사업이 본격 추진됐다.△IMF와 전북1997년 12월 국내경제는 IMF(국제통화기금)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도내에서는 거성, 쌍방울, 전풍백화점에 이어 서호건설이 최종 부도처리돼 지역경제에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졌다는 소식(1997.11.20)이 보도되며 IMF의 전조를 알렸다. IMF를 맞이하자 전북일보는 경제살리기 캠페인을 전개, 9차례에 걸친 시리즈를 연재했다.이듬해 실업문제가 시급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전북일보는 '길거리로 쏟아지는 실업자·실업자들'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재취업, 직업훈련 확대 등을 지적하고 나섰다.◇2000년대△축제와 문화의 도시로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2001년 제1회 전주세계소리축제 등 2000년대 들어 전북은 문화와 축제의 도시로 거듭났다. 또 2000년에는 동양 최대 규모인 고창 고인돌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도내 첫 세계문화유산이 탄생하는 기쁨도 누렸으며 2003년에는 판소리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새로운 문화의 태동 속에서 전북일보는 국제영화제와 세계소리축제의 가이드북을 발간해 무료 배포하는 등 문화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군산 윤락가 화재와 성매매특별법2002년 1월 29일 군산 개복동 성매매업소 밀집지역인 속칭 '감둑'거리의 한 업소에서 대낮에 화재가 발생, 14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2000년 9월 19일 군산 대명동 군산역 앞 속칭 '쉬파리골목' 성매매업소 화재로 5명의 여성이 숨진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민들은 경악했다.전북일보는 본사 취재기자, 사진기자, 군산지역 기자들로 특별취재반을 구성해 사고 즉시 현장의 생생한 모습과 진화 작업 등을 생생히 보도했다. 또 '숨진 윤락녀의 일기장'(2002.9.24), '생존 윤락녀의 검은 커넥션 진술'(2002.10.13)을 단독 보도했고, '군산 윤락가 포주와 경찰의 유착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어 전북여성단체연합과 함께 성매매방지 특별법 제정 촉구에 나섰고, 2004년 3월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됐다.△부안 방폐장 파문2003년 7월 당시 김종규 부안군수가 방폐장 사업을 신청한 이후 부안은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됐다. 방폐장 유치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세지면서 지역사회 갈등의 불씨는 폭력사태로 확산됐다.반대론이 거세지자 정부는 '3000억원+3000억원', 현금보상, 획기적인 지역개발사업을 들고 나섰지만 안전성에 대한 불안감을 돈으로 무마하려한 자세는 주민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사태는 더 커졌다.전북일보는 기획물 등을 통해 정부의 지원정책에 대한 신뢰성을 짚고, 외국 사례들을 소개하며 도민의 판단을 도왔다. 또 2004년 2월 14일 주민투표 실시(반대 92%) 이후 부안의 표정을 전하며 찬반 양측 모두 생업에 돌아가 화해의 길을 걸을 것을 당부했다.△새만금 시대를 열다세계 최장(33km) 새만금 방조제가 19년 대역사(大役事)를 마치고 2010년 4월 27일 마침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방조제 준공은 '물의 도시' 새만금 시대를 알리는 화려한 서막이다.1991년 방조제 착공으로 시작된 새만금 사업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전북일보는 사업 진행 현황을 보도하면서 지역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새만금 내부개발의 방향성을 지속적으로 제시했다. 또 전문가들과 함께 만경강·동진강 등 새만금 유역 수질환경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방조제 완공으로 군산∼김제∼부안 서해안의 4만100㏊의 바다가 내해로 바뀌고 2011년까지 여의도 면적이 140배인 2만8300㏊의 토지(간척지)가 조성된다.

  • 문화일반
  • 임상훈·신동석
  • 2010.06.01 23:02

[전북일보로 보는 전북 60년] 시련·감동의 현장 발빠른 보도 '시대의 거울'

신문은 '시대의 거울'이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다양한 모습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사회의 자화상을 촘촘하게 보여준다.1950년 전쟁의 포연속에서 도민들의 눈과 귀가 됐던 전북일보는 폐허속의 보릿고개를 민초들과 함께 넘으면서 지역사회 시련과 감동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했다. 또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고 도민들의 염원을 담아 지역의 미래와 희망을 힘껏 외치기도 했다.전북일보가 도민들에게 첫 지면을 선보인 후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으니 '전북의 타임캡슐'에 농축된 역사의 기록을 꺼내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전북일보 지면에 비친 굴곡의 현대사 60년을 되짚어, 새로운 도약의 기점에 선 전북의 미래를 조망해본다.◇ 1950년대△전란속의 전북 알린 전령사1950년 10월15일 문공부에 등록된 전북일보는 발행 초창기 한국전쟁의 전황을 도민들에게 알리는 '전령사'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에서 도내로 피란민이 몰려 들었고 토착 이재민만 20여만명에 이르렀다. 전북일보는 '물밀 듯 하는 피란민 군산에만 매일 100여명'(1951년3월16일)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전달했다.또 취재기자들을 최전선과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현장에 파견, 생생한 전황과 국군의 활약상을 전했다. 휴전후에는 식량부족과 재해로 비참했던 지역의 현실을 심층 보도했다.△재해 겹쳐 힘겨운 보릿고개전쟁이 남기고 간 폐해는 처참했다. 당시 식량문제는 특정 지역이나 계층이 아닌 전국적인 문제였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가뭄과 홍수 등 기상재해까지 겹쳤다.극심한 가뭄으로 시냇물과 방죽조차 모두 말랐고 논밭은 흉측스럽게 변했다. 1956년 여름에는 남원과 장수 지역에 240mm의 폭우가 쏟아져 21명이 사망, 87명이 부상을 당했다.당시 본보는 '물과 아우성의 바다'라는 제목으로 참상을 전했다.식량난은 더욱 악화됐다. 궁핍한 생활은 '보릿고개'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 전북일보는 '보리밭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기사를 보도하면서 자운영까지 베어 먹는 급박한 사정을 전했다.△전북일보 무주일(無酒日) 제창전쟁후 사회가 혼란스럽자 정부양곡과 구호미를 공무원들이 부정 착복하는 사례가 많았다. 식량난에 허덕이는 대다수 서민들의 궁핍한 생활과는 대조적인 일부 계층의 흥청망청한 모습을 전북일보는 '공무원 요정출입 성행'· '융성일로의 유흥가, 전주서만 매일 4백만원 홀랑' 등의 기사로 적나라하게 보도했다.음주가무가 판치고 공무원 등의 요정 출입이 정도를 넘어서자 본보는 1951년 3월 10일 '무주일(無酒日)'을 제정하자고 제창했다.△첫 지방자치제 실시풀뿌리 민주주의 근간인 지방자치제가 1952년 처음 도입됐다. 1952년 4월25일과 5월10일 역사적인 지방의회 선거가 시행됐다. 도내에서는 4월 25일 전주와 군산, 이리(현 익산) 등 3개 시에서 시의원 선거를 진행, 61명의 지방의원을 선출했다. 또 도의원 선거는 5월10일에 치러졌지만 치안상태가 불안정했던 남원과 순창, 정읍, 완주는 제외돼 46명 정원 중 32명을 뽑았다. 이후 치안상태가 회복된 이듬해 선거를 진행, 14명의 도의원을 추가로 선출했다. 첫 지방자치제가 도입되면서 전북일보는 도민들의 투표권 행사를 거듭 독려했다.◇ 1960년대△ 곰티재 참사와 모래재 도로 개통1966년 6월6일 오후 5시께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속칭 '곰티재'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 15명이 숨지고 54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북일보는 사고발생 다음날인 7일 호외를 발행해 안타까운 소식을 도민들에게 알렸다. 곰티재 사고와 관련된 기사는 사고발생 후 한 달여동안 계속되면서 당국의 근본 대책을 촉구했다.전북지역 산간부의 주요 간선 도로이자 각종 사고가 빈발했던 곰티재도로를 대체하기 위해 1966년 5월 10일 착공된 모래재도로가 1972년 11월17일 마침내 개통됐다.전북일보는'모래재 도로 드디어 개통'(1972.11.18)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도로 개통의 의미와 기대효과·개통식 상황 등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통학의 다리 놓기 캠페인도로와 교량이 열악했던 1960년대에는 교통사고와 익사사고가 잇따랐다.특히 비오는 날에는 등·하교 하던 학생들이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이에따라 전북일보는 학생들이 안전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통학의 다리를 놓아주자'는 캠페인을 1965년 7월17일부터 전개했다.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이듬해 6월26일 임실 관촌에서 첫 통학의 다리 준공식이 열렸다.통학의 다리 준공식은 임실에 이어 고창과 무주 등 도내 곳곳에서 이어졌다.통학의 다리 놓기 운동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큰 관심을 표시할 정도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전주공단과 공업화 바람전북지역의 공업화는 전주공단 설립에서부터 시작됐고 전주공단 설립은 새한제지 건설로부터 출발했다.전북일보는 1965년 1월17일 '전주에 새한제지 공장 건립 확정'이라는 기사를 실었고, 그해 6월19일에는 전주시 팔복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공업단지 조성 움직임을 소개했다. 또 1966년 11월 27일 '전주공업단지 본격화'란 제목 아래 5000만원의 보조금이 신년도 예산에 확정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도민들에게 전했다.전주공단은 1967년 3월 기공됐다. 전주공단 조성사업과 새한제지공장 건설, 화학섬유공장 건설사업 등은 순조롭게 추진됐으며 이들 공장은 전북의 공업화를 앞당긴 주역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전북경제를 이끄는 토대로 평가받고 있다.◇ 1970년대△ 호남고속도로 개통1970년 12월 말 도민의 염원이던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됐다.전북일보는 1971년 1월1일자에 '얼마나 그리워했던 꿈이었던가'라고 표현, 도민의 환희를 한마디로 대변했다.호남고속도로 1차구간은 1970년 4월15일 착공한 이래 개통을 보기까지 250여일이 걸렸지만 태풍과 장마 등 궂은 날씨 탓에 실제 작업일수는 고작 130여일에 불과했다. 또 전북구간(39.4km)에 동원된 연인원만도 47만여명이나 됐다.호남고속도로 개통은 지역발전을 앞당기는 새로운 전기가 됐다.△ 유신선포와 전북1972년 10월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특별선언'을 발표, 유신적 정치체제 개혁을 단행했다. 전북일보는 특별선언 발표일로부터 박 대통령 취임에 이르기까지 유신의 배경과 도내 유신촉진대회 상황, 국민투표 등의 진행상황을 연일 1면과 사회면 주요기사로 상세하게 보도했다.그해 11월21일로 확정된 유신헌법안 국민투표를 앞두고 전북일보는 11월18일, 전북지역 투표인수가 모두 115만2919명(남 56만0911명, 여 59만2008명)으로 확정됐다고 보도했다.11월23일에는 유신헌법안 개표관련 소식을 전하고 24일과 25일에는 유신헌법 확정 공표 내용을 비롯, 도내 투표율과 찬성률 등을 상세하게 보도했다.도내에서는 총 유권자 115만2919명 가운데 부재자 투표 4만6790명을 포함, 모두 108만6542명이 투표해 참가해 94.2%의 투표율을 보였다.△ 이리역 폭발사고1977년 11월11일 밤 9시10분께. 이리시(현 익산) 창인동 이리역 구내 입환 4호선에 정차 중이던 폭발물적재 열차가 폭발, 시가지를 삽시간에 폐허로 만드는 사상 최악의 참사를 빚었다.당시 인명피해는 사망 56명, 실종 2명, 중상 184명, 경상 1158명이며 재산피해는 78억원으로 집계됐다. 이재민은 무려 1만명에 달했다.전북일보는 사건경위 및 피해, 사망자 명단을 게재 하는 등 한달 이상 집중 보도하면서 도민들의 이해를 도왔고 끊임없이 사고 원인을 파고 들었다.사고차량은 인천시에 있는 한국화약 주식회사의 화학약품인 다이너마이트 흑폭약, 뇌관(36상자) 등 1139상자의 폭발물을 싣고 인천에서 출발, 광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폭발사고의 원인은 호송원이 만취한 채 촛불을 켜고 자다가 불이나 발생한 것으로 밝혀져 시민들을 경악케했다.폭발사고 이듬해인 1978년 3월30일에는 익산∼ 대전 구간 호남선 복선 개통식이 익산역 광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 문화일반
  • 임상훈·신동석
  • 2010.06.01 23:02

[지역신문을 읽자] 내가 전북일보를 읽는 이유

△ "'행복한 금·토·일' 공연·전시 정보 알차"이연주(53·전주시 효자동·크레용 유치원 원장)씨는 15년 째 전북일보를 구독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도 보고 있다. 유치원에 매어 있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어두워져서다. 출근하면 신문부터 챙겨 전북일보, 한겨레신문, 조선일보 순으로 훑는다. 중앙지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상반되는 점을 고려했다."아무래도 문화면(16면)을 먼저 보게 됩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공연이나 전시는 없는지 살피게 되거든요. 특히 주말 섹션인 '행복한 금·토·일'은 꼼꼼하게 봐요."이어 지역신문이 살아야 서울공화국에서 벗어날 것이라며 창간 60주년을 맞는 전북일보가 전북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전북일보, 지역신문을 읽자 캠페인 나서야""사람들은 자기 것의 가치를 잘 몰라요. 자기 것은 상대적으로 촌스럽고 낙후된 것으로 여기는데, 실제 그렇지가 않아요. 지역신문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에요. 지역민부터 지역신문의 가치를 알고 새롭게 봐야 하지 않을까요?"가정주부 박진화(58·전주시 동산동)씨는 전북일보의 오랜 구독자. 창간 60주년을 맞아 전북일보가 지역신문에 대한 의식을 바꾸고 지역신문을 보자는 캠페인을 주도적으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조선일보도 함께 구독하는 그는 스포츠와 지역면이 좀 더 밀도있게 담기길 바란다고 제안했다. 지역면은 14개 ·시군 중 매일 한 곳을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선택과 집중을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지역신문 아낄 때 지역경제 발전 돼"김종상(55·전주시 인후동·동양비니루 상사 대표)씨에게 전북일보는 조강지처 같은 존재다. 27년 째 전북일보만 구독했다."내가 사는 동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도 모르면서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하답니까? 다른 지역 소식은 TV나 인터넷을 통해 많이 나오잖아요."10~11면(사회), 8~9면(경제), 18~19면(오피니언)을 가장 열심히 들여다 본다. 하룻밤 사이 어떤 사건·사고가 났는지, 경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덕분에 직원들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전북일보를 보게 됐다며 지역 현안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전북은 그간 서울에 밀려 늘'뒷방 늙은이'취급을 받아왔습니다. 지역신문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우리 지역이 발전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더 절실하게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야구 뉴스에도 관심 가져달라"이광주(57·장수군 장계면·장계주민자치위원장)씨는 부친에 이어 2대 째 전북일보를 보고 있다. 1978년부터 30년 넘게 전북일보를 구독, 지난해 한국신문협회 우수독자상도 받았다.그는 "80년대만 해도 전북일보 밖에 없었고, 그 뒤로도 다른 신문이 나왔지만, 전북일보만한 건 없다고 생각했다."며 변함없는 애정을 자랑했다. 동네 마실 나가서도 친구들을 부추겨 전북일보 구독 신청을 해줄 정도로 열렬한 애독자다. 다만 스포츠를 좋아하는 데 프로야구 뉴스가 적게 실린다며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제안했다."앞으로도 전북일보를 좋아하고, 응원할 겁니다. 도내 대표 신문으로서 지금처럼 양질의 뉴스를 제공해주는 데 더 힘써주길 바래요."△ "사람들…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지난 1995년 첫 정기구독을 시작으로 전북일보와 인연을 맺은 유옥희(61·완주군 소양면·완주 소양농협 조합장)씨. 그는 읽을거리가 다양하고 지역의 세세한 정보까지 알 수 있어 전북일보를 구독하고 있다고 했다.신문 읽기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는 이미 신문 중독자. "조선일보도 함께 보고 있지만 지역신문을 읽지 않으면 지역의 소식들을 접할 수 없기 때문에 꼭 읽게 된다"며 "사람들(13면)을 즐겨 보면서 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을 얻었다"고도 했다."발로 뛰는 생생한 기사가 아무래도 재밌습니다. 바쁘시더라도 현장의 모습을 담은 기사를 많이 실어주셨으면 좋겠네요."△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가장 우수한 신문"노원준(77·순창 복실리)씨는 1980년 5월부터 현재까지 '일편단심' 전북일보 구독자다. "바쁜 날 하루라도 신문을 보지 못할면 마음이 '껄쩍지근'하다"는 그는 "저녁에라도 틈을 내서 전북일보를 읽게 된다"고 했다. 순창군 축협조합장·애향운동본부장 등을 역임할 때 지역 소식을 세세하게 접할 수 있어 많은 참고가 됐다. 하지만 손자가 신문으로 장난치는 걸 좋아해 신문을 모아 놓지 못한 게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노씨는 "오랜 전통으로 전북을 대표한 전북일보가 신속·정확한 정보와 날카로운 분석력이 뒷받침되는 신문사로 거듭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문화일반
  • 이화정
  • 2010.06.01 23:02

[전북의 강, 전북의 길] 걸음, 삶의 자각

강이 내 마음 한 가운데로 흘러, 나로부터 길이 이처럼 길게 뻗어나간다선사(先史)의 강(江), 역사의 길강의 물길이나 땅위의 길이 모두 '길'이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생성과 성장은 서로 다르다.강은 지구의 탄생 이후 지각 변동을 반영한 물길의 유구한 흐름을 보여주고 또 인류의 문명을 길러냈다고 할 수 있다. 여기 비해 육상 '도로'는 문명 이후, 인류가 걸어온 지난하고 장구한 역사로 다져진 길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 전북만 해도 금강, 섬진강, 만경강, 동진강을 따라 사람의 마을이 꽃피었으며, 이 마을에서 저 마을까지 사람들은 늘 그리움과 미지에의 기대를 담아 길을 나섰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논둑길을 건너 팍팍한 고개를 넘기도 하고,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너며 우리는 우리 삶의 반경을 확장해왔다.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특성, 그리고 강은 언제나 산줄기의 계곡 흐름에 의해 규정된다는 자연의 이치로 인하여 금강은 활처럼 휘어져 북류하다가 서해로 합류하고 섬진강은 남진을 계속하여 남해에 들어서고, 동진강과 만경강은 농도(農道) 전북의 젖줄이 되어 호남평야를 억만년 적시고 있다.강물, 구도의 길고 깊은 물줄기'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 혹은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어진 사람은 억만년 부동심을 지닌 산의 모습을 그리고, 지혜로운 이는 반짝이며 출렁이는 수면 그 아래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하는 수심의 깊이를 따라 삶과 죽음, 반영과 반성, 가라앉는 일과 다시 떠오르는 일을 생각한다는 것.전북의 4대 강 주변에 살아온 우리 또한 흐르는 강을 보며 살아왔다. 우리 마음에도 강물이 흘러들고, 물줄기의 긴 생애를 따라 우리의 생각도 멀리 흘러 명경지심에 이르는 일…. 물빛에 너울너울 일렁이는 윤슬을 보고자 새벽별 물안개와 이슬 젖은 초승달과 함께 강변에 앉아 있는 일….발원에서 유역까지, 유역에서 다시 발원으로 물의 생애는 늘 근원을 생각게 만든다. 이처럼 물을 바라보는 일은 구심적이니, 그 물을 그윽히 바라보는 사람의 눈길은 구도적이다.인류의 삶은 모두 길을 따라 뻗어나왔다길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분기하고 팽창한다. 역사 이래, 그 무한 팽창은 이제껏 한 번도 그치지 않았다.인간의 욕망, 인간의 상상력이 닿는 곳마다 새롭게 당도해야할 목표 지점이 발생한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우리가 꿈꾸는 지점까지 선을 대고 그으면 그게 곧 길이 된다. 하여, 길의 역사는 곧 인류 욕망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지도 바깥으로 행군하라'는 한 여행가의 외침은 기실 동서고금 모든 인류의 부르짖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란 자신의 팽창욕을 현실화시키려는 욕망에 허덕이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이제껏 한 번도 길을 잃은 적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인류에게 세상의 길은 딱 두 가지만 존재한다. 눈앞에 현존하는 길과 곧 개척되어 새롭게 드러날 길….임진년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의 침략 명분은 '명을 치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는 것…. 그 단순한 폭력성에 담긴 팽창 욕구는 명료하기 짝이 없다. 전쟁의 역사는 이처럼 대부분 길을 두고 싸운 전쟁들이다. 길의 치리(治理)를 두고 다투던 인류는 언젠가부터 길의 이치<道理>라는 형이상학적이고 점잖은 논쟁을 벌이게 되었지만, '지금 나로부터 내가 꿈꾸는 지점'까지 자신의 길을 밀어붙이는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길은, 길에 나서는 일은 이렇게 '나를 확장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세계 방방곡곡을 배낭여행하던 때는 더 큰 삶의 반경이 간절한 탓이요, 둘레길 올레길을 찾는다는 것은 내면의 사색이 더욱 절실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뒷산을 오르거나 천변을 산책하는 일 또한 '재충전'으로서 시간이 필요한 까닭….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걷는 그 길이 나를 말해준다보행의 주요 수단이 두 다리에서 타이어로 바뀌고 난 뒤, 오히려 사람들은 더 많이 걸으려고 애를 쓴다.티벳의 성지 순례,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 일본의 고야산 보도와 같은 '길'을 구축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지자체나 민간 활동 기구도 늘어나고 있다. 둘레길이나 올레길은 그중 대표적인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각기 지리산과 제주도라는 천혜의 '하드웨어'를 '걷는 일'에 적절히 접목하여 성공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삼남대로, 관동대로, 문경새재 옛길과 같은 역사적 길을 복원하는 일도 적극적으로 시도되고 있으며, 호응도도 높은 편이다. '길'이 갖는 역사성이 도보여행자들에게 '역사 속으로의 여행'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섬진강의 발원인 데미샘에서 물줄기를 따라 광양, 하동까지 걷는 경우도 있다. 생명의 유구한 내력을 따라 걷는 길이 아닐 수 없다.이처럼, 우리는 내가 걷는 길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연 속에서의 재충전, 역사 테마 기행, 생명 기행을 하게 된다. 종교적 순례길을 걷는다면 명상과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될 것이다.어떤 길이든, 걷는 일은 소중하다.왜 인간에게 두 다리가 있는지…. 흙과 바람, 햇빛과 구름 속으로 걷는 일은 우리 인류가 분명히 자연의 일부임을 다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할머니들이 마실 장터 나가는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삶의 내력을 내 두 다리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내 두 다리로 내 삶을 다지고 있으며, 내 의지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구나 하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있다.내 삶의 주인은, 내 두 다리의 주인인 '나' 자신이며, 다른 이를 만났을 때 '우리'가 되고, 자연의 일부임도 더욱 강렬하게 깨닫게 된다.걷기를 통한 삶의 자각…. 당장 오늘부터라도 시작해보자. /김병용(소설가·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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