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책으로 읽는 세상] '더 플랜' : 미국의 새 비전과 민주당의 도전
"조지 W. 부시가 백악관에 입성한 바로 그날부터 백악관에서는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렇습니다. 이 말은 그해 국정연설에서 여러 번 등장했고, 4년 뒤 선거 유세에서는 더욱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 '세금'이라는 말이 '구제' 앞에 붙게 되면,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은유가 탄생합니다. 세금은 고통이다. 그리고 그것을 없애 주는 사람은 영웅이고, 그를 방해하는 자는 나쁜 놈이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입니다."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2006년 4월 번역·출간된 이 책은 국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당시 국회의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이라는 보도가 나왔는데, 아마도 현 민주당 의원들이 가장 많이 읽었을 것 같다.그러나 한국의 민주당 의원들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제대로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왜 그런가? 빌 클린턴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람 에마뉴엘(Rahm Emanuel)과 브루스 리드(Bruce Reed)가 쓴 「더 플랜 : 미국의 새로운 비전과 민주당의 도전」(안병진 옮김, 리북, 2008)을 소개하면서 그 이유를 말씀드려 보겠다.「더 플랜」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비판하는 책이다. 두 책의 저자들 모두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들이지만, 승리의 해법은 전혀 다르다. 「더 플랜」의 저자들은 "레이코프는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가 단지 공화당이 올바른 단어를 다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틀렸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레이코프의 분석이 정말로 위험한 점은 바로 그것이 민주당이 좋아하는 핑계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즉, 공화당이 성공한 이유는 바로 미국인의 눈을 속였기 때문인 것이고, 우리도 역시 똑같은 어둠의 기술을 익히기만 하면 곧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이들은 민주당이 결별해야 할 신화 중의 하나는 "'반대, 반대, 반대'식으로 무조건 반대만 하면 그것이 야당의 입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성공적인 공식이라는 생각"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성공적인 반대는 반대뿐만 아니라 대안을 제안도 해야 하는 것이고, 둘 다를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의회 내 민주당 의원들은 공화당이 잘못할 때마다 공화당에 확고하게 반대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미래에 이 나라가 따라갈 명확한 대안적 경로를 제시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 정치의 목적은 옳은 언어를 구사하거나 그럴듯한 말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해답을 찾는 데 있다. (…) 승리를 얻는 비밀은 단순히 더 나은 전술에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확고한 동원력이나 보다 나은 유권자 표 구하기 게임, 더 날카로워진 공격적인 광고 이런 것들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해답을 구하고 있다."감동적인 말씀이다. 「더 플랜」은 실제로 해답을 제시한 책이다. 이들이 제시한 해답들은 '전국민 봉사단', '전국민 대학교육', '전국민 은퇴연금제도', '모든 어린이를 위한 의료보험', '재정 책임과 기업복지의 종식', '서민을 돕는 세제개혁',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새로운 전략', '하이브리드 경제' 등이다. 이 의제들을 책의 각 장(章)으로 삼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흥미로운 건 대학교수인 레이코프는 '정치꾼' 같은 해법을 제시한 반면, '정치꾼'인 「더 플랜」의 저자들은 대학교수같은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누가 옳다거나 그르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걸까? 이건 아무리 봐도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해답'도 중요하고 '방법'도 중요하다. 양쪽 모두 다 옳은 말을 한 것이다. 저자들은 아무래도 레이코프가 클린턴의 성공을 설명한 다음과 같은 주장에 열을 좀 받은 것 같다."그는 상대방의 언어를 훔쳤다. 예를 들어서, 클린턴은 '복지개혁'에 대해 말하면서, '큰 정부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한다. 클린턴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했다. 단지 클린턴은 상대방의 언어를 활용하여, 그의 정책을 묘사하는 데 썼다. 그래서 상대방(공화당)이 열을 받은 것이다. 정말 영리한 기술이다."클린턴의 선거운동에 참여한 저자들로선 이런 평가를 모욕으로 여겼던 건 아닐까. 이들은 위와 같은 주장에 대해 "클린턴은 공화당이 캠페인에서 맨날 제시만 했지 실제로 집권해서는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이슈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는 업적으로 성공했지, 말 때문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고 반박한다.양쪽이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민주당을 되살린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목표'와 '방법' 중 어느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잖은가. 둘 다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당은 어떤가? 경향신문의 대표 논객 이대근이 9월 3일자에 쓴 '변하는 이명박, 변함없는 민주당'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눈길을 끈다. 그는 "이명박은 과거를 지워 자기 앞 길을 열고 있는데, 반대세력은 과거를 되살려내느라 애쓰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김대중·노무현 생존시에는 그들의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지 조금이나마 고민하던 민주당이 그들 사후에는 유지·계승을 주장하며 다시 울타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기회주의자였음을 고백함으로써 또 한번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고야 만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예상대로 갖가지 퇴행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누굴 중심으로 뭉치라 했다느니 하는 북한식 유훈통치, 동교동계니 친노니 하는 타임머신 정치,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 돌리는 노병정치,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의 이 초현실성이 놀랍다."민주당으로선 할 말이 많겠지만, 일단 이 주장에 최소한의 일리는 있음을 인정해보자. 왜 그럴까? 왜 그렇게 됐을까? 그런데 이게 단지 민주당만의 책임일까? 민주당은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민심을 좇느라 그렇게 된 건 아닐까? 그러다보니 '목표'는 오락가락하고 '방법'은 기회주의가 된 건 아닐까? 문제는 그 민심이라는 게 전국적 대표성을 갖는 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지지자, 그것도 열성 지지자들의 감정 폭발에 가까운 것이다. 그건 수명이 짧은데다 필연적으로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러니 지지율이 오를 리 없다.민주당이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전형적인 열성 지지자들의 목소리다. 어떻게 무슨 방식으로 싸워야 한단 말인가? 싸우기로 했으면 끝장을 보든가. 전 의원이 사퇴하겠다고 해서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제와서 보니 속된 말로 '쌩쑈'가 아니었던가. 그럼 애초부터 '플랜'으로 싸웠어야 했던 게 아닌가. 현재 민주당은 '플랜'도 없고 '프레임'도 없다. 당사에 갑자기 내건 두 전직 대통령의 사진이 그들의 '플랜'이요 '프레임'인가. 대중을 몰라도 이렇게까지 모를 수가 있는가. 두 서거 정국의 민심이 과연 그 수준의 것이었을까. 독해력(讀解力) 빈곤, 그것이 지난 10년의 업보란 말인가. 무작정 핏대만 올릴 게 아니라 차분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