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책으로 읽는 세상] '컨버전스 컬처'
"전북의 대표 음식이 비빔밥이라고 하는데, 나라면 외지에서 온 손님들께 권하지 않겠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맛도 없거니와 질린다. 너무 뻔하다고나 할까. 배 고플 때 집에서 반찬 남은 것으로 대충 쓱쓱 비벼먹는 것보다 못하다."어느 학생의 주장이다. 비빔밥을 만드는 분들이나 비빔밥에 지역적 자긍심을 느끼는 분들은 펄펄 뛰겠지만, 소수 의견이나마 이런 의견도 있다는 걸 참고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다. 비빔밥 애호가로서 내가 평소 아쉽게 생각하는 건, 종류를 좀 다양화해보는 건 안될까 하는 점이다. 그건 '비빔밥 표준화'에 반한다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건 표준화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린 문제이리라.최근 정부는 비빔밥 재료나 조리법을 표준화해 전 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농촌진흥청은 비빔밥에 들어가는 고추장의 매운맛 등급을 10가지로 분류해 다양한 외국인의 입맛을 공략하겠다는 계획하에 '매운맛 측정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표준화가 필요하다고 해서 다양한 조합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즉, 표준화는 다양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이다.좀 엉뚱하긴 하지만, 미국 MIT 인문학부 교수인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의 「컨버전스 컬처」(김정희원·김동신 옮김, 비즈앤비즈, 2008)를 읽으면서 해본 생각이다. '컨버전스(convergence)'란 '한 곳으로 모임(집합), 집중성, 통합'이란 뜻으로, IT업계에선 "다양한 미디어의 기능이 하나의 기기에 융합되는 기술적 기능"이란 뜻으로 쓰고 있다. 컨버전스 컬처(convergence culture)란 그런 기술적 기능이 가져오는 새로운 문화를 의미한다. 내 생각엔 '비빔밥 문화'로 번역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실제로 컨버전스 컬처의 원리는 비빔밥의 원리와 닮은 점이 많다.젠킨스는 기존 개념이 문화적 요소를 배제한 채 지나치게 기술적 요소만 강조했다며 컨버전스의 핵심요소는 '상호작용'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와 달리 콘텐츠가 다수의 매체를 넘나들며 미디어 생산자(미디어 기업)와 소비자의 힘(참여문화)이 복잡하게 얽히며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 상황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로 꼽히는 것은 소비자의 역할이라며, '컨버전스 문화 시대'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요소로 참여 문화와 집단 지성을 꼽았다.컨버전스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하는데, 비빔밥이라고 해서 진화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참여'와 '집단 지성'에 무게를 둔 비빔밥은 안될까? 뷔페식 비빕밥 업소에선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이지만, 여기에 스토리텔링을 덧붙인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예컨대, 체질별로 비빕밥의 유형을 여럿으로 나눠 골라 섞는 재미에 다양한 의미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건강 강박'에 걸려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건강에 집착하는 소비자들에게 그건 하나의 즐거운 게임이 될 수 있지 않을까?미래에 모든 미디어 콘텐츠가 하나의 블랙박스를 통해 우리 거실로 유통될 것이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지만 젠킨스는 이러한 예측이 빗나갔다면서, 이를 가리켜 '블랙박스의 오류'라 부른다. 실제로 우리 생활에서는 노트북과 휴대전화, 아이팟과 게임보이 등 블랙박스가 더 늘어나는 식으로 하드웨어가 분화되었고 콘텐트가 유통되는 방식만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이 점을 포착한 미디어 기업은 다양한 미디어 채널로 콘텐츠를 유통시키며 '시너지'를 창출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젠킨스는 1999년에 대중 담론에 처음 등장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관객과 평론가들은 <블레워 윗치 프로젝트>(1999)의 경이적인 성공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 저예산 독립영화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다. <블레워 윗치 프로젝트>를 하나의 영화로만 생각하면 큰 그림을 놓치게 된다. <블레워 윗치 프로젝트>는 극장에 개봉하기 1년도 더 전에 인터넷 상에서 팬들을 만들어냈다. (…) 많은 사람이 온라인으로 모든 디테일에서 완벽히 진짜처럼 보이는 이 신기한 웹사이트를 통해 영화의 핵심을 익혔다."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뒤에는 강력한 경제적 동기가 있다. 그래서 시너지 스토리텔링(synergistic storytelling)이라고도 한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는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며, 각각의 새로운 텍스트가 전체 스토리에 분명하고도 가치 있는 기여를 한다는 것이 젠킨스의 주장이다. 평론가들이 이 점까지 꿰뚫고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대중은 환호하는 데도 평론가들은 자기들만의 아집에 사로잡혀 헛발질을 하기도 한다."영화 평론가들은 영화 비평에는 익숙해도 영화 주변의 기제를 보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매트릭스가 좋은 평을 못 받은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게임을 해보거나,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본 평론가는 거의 없었고, 결과적으로 거기 포함된 핵심 정보를 섭렵한 이들도 거의 없었다."이 말은 비빔밥 전문가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겠다. 비빔밥만으론 부족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예컨대, 비빔밥 재료들에 대한 이야기거리는 어떤가. 각종 나물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 누군가에게 권한 적이 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음식 전문가는 물론 나물을 직접 생산해내는 분들, 조리·영양학자들까지 인터뷰를 해가면서 발로 써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누군가 꼭 이 일을 해주면 좋겠다. 비빔밥 업소들이 작게나마 서서히 이런 일까지 겸해서 고객들에게 정보 서비스로 제공하면 안될까?비빔밥의 최대 강점은 무엇인가? 무한대로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식당 뿐만 아니라 비행기 기내식에서부터 이동용 포장형에 이르기까지, 또 지금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방식으로, 비빔밥의 '미디어 플랫폼'도 더욱 다양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건 비빔밥의 본질적 속성, 아니 정신이다.젠킨스가 "미디어 컨버전스는 단순히 기술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 건 백번 옳다. "컨버전스는 기존 기술, 산업, 시장, 장르, 그리고 시청자 간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컨버전스는 미디어 산업이 운영되는 논리를 변화시키고, 미디어의 소비자들이 뉴스와 엔터테인먼트를 받아들이는 과정 또한 변화시킨다."비빔밥 이상으로 그런 컨버전스 정신을 잘 구현할 수 있는 음식이 또 있을까? 단지 먹는 걸로만 그치지 말고 생활 전반에 걸쳐 비빔밥 정신의 생활화가 필요하다. 그건 우선적으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실천일 것이요, 개방을 통한 혁신일 것이다. 1960년대에 250만명을 넘었던 전북 인구는 오늘날 180만명대로 쫄아들었다. 출산 장려도 좋겠지만, 고향에 불문하고 개방과 혁신과 화이부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전북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오늘도 비빔밥을 먹으면서 그 오묘한 이치를 잘 생각해보자.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