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만난 작가] 시인 이세재가 만난 원로시인 최승범
대나무에게설청의 눈부신 아침너를 바라본다너를 바라본다따로 날이 있으랴사철을바라보아도너로 설 수없는 것을설청의 이 아침에너를 다시 바라본다개운히 스미는 빛이여성글어 맑은 소리여빼어나밋밋한 마디여부추겨다오나를 나를제 1회 한국시조대상 수상, 그 아름다움과 외로움품격 있는 큰 상을 꼭 받아야 할 사람이 받는 모습은 아름답다. 고하(古河) 최승범 시인을 뵙고 제 1회 한국시조대상 수상에 대한 축하의 말씀을 드리는 일은 자랑스럽고 즐거웠다.민족문학의 정수인 현대시조 100년을 맞이해 사단법인 세계시조사랑협회가 ‘한국시조대상’을 제정하고 지난 5월 7일 그 첫 수상자로 최승범 시인을 선정 발표했다. 선생의 작품 ‘대나무에게’, ‘맨주먹 운동’, ‘쓰나미’, ‘춘초화개도(春草花開圖)’, ‘아침 북소리’ 등 5편을 수상작으로 뽑고, 오는 10월에 열리는 세계시조사랑축제에서 상금 1000만원과 상패를 수여하게 된다.현대시조 100년의 역사 중 절반인 50여 년을 시조와 더불어 살아온 선생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돌연한 비약이 없는 대신 읽다 보면 가랑비처럼 저도 모르게 감동이 일어 다 읽은 후의 울림이 신경통처럼 남는 드문 시편의 경작인으로 시가 있고 당대가 있고 그림이 있는 시조를 평생 같은 톤으로 누에가 실을 뽑듯 빼내온 시인’ 이라고 하면서 ‘그 시적 성과에 못 미치는 예우라 해도 이 상의 첫 문을 열어주는 것에 경하를 드리며, 이 상으로 하여 시조의 새 지평이 밝게 열릴 것을 예감한다’고 했다.최승범 시인이 ‘원로 시조시인’, ‘국문학의 대가’로 존경받고 있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선생을 잘 아는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최승범 시인에 대해 자상한 마음씨에 향토적이고 동양적인 멋과 풍류를 아는 ‘전주의 딸깍발이,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라고들 한다. 말이 쉽지, 이 시대에 전통적 멋과 운치를 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자기를 희생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영웅적 삶에서만 감동을 받는 것은 아니다.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를 희생하며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인생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혼란스러운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멋과 운치로 다듬은 선비적 풍모는 우리의 근원을 일깨우는 잔잔한 감동일 것이다.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부턴가 부귀와 공명에 눈이 멀어 이러한 감동의 신경이 무디어진 것 같다. 인내와 절제에서 우러나는 곧고 투박한 심성은 고리타분한 과거로 치부되기 일쑤다. 우리는 난삽하고 자극적인 언어와 몸놀림으로 껍질뿐인 나를 과시하며 사랑도 없이 너를 껴안고 있지는 않는지. 지금도 3000보를 걸어 자신의 문예관에 출퇴근하면서도 오히려 이렇게 사는 것이 안온하고 조용해서 좋다는 선생의 말소리가 잔잔한 외로움으로 젖어 들었다. 한국시조대상에 대한 얘기가 끝나갈 즈음 선생은 가람 시비를 쓸쓸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조의 새 지평이 밝게 열릴 것’이라는 심사위원들의 말을 옛 스승인 가람선생께 조용히 전해드리고 있었는지 모른다.오직 한 길로 민족문학을 풀어내다선생이 시조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45년 가을, 중학교 때였다. 당시 국어를 가르쳤던 선석렬 선생으로부터 ‘태산이 높다하되……’로 시작되는 3행의 노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부터 짧고도 정제된 그 시행에 매력을 느껴 매일같이 시조를 외우고 일기장에 기록을 했다. 그렇게 중학교 때 외운 시조가 1000여 수를 넘었다. 고등학교 때는 민족주의자 박종재 선생을 만나 국사공부에 전념했던 것이 고전문학뿐 아니라 국학 전반에 관심을 갖고 연구활동을 하게 된 바탕이 되기도 했다.6.25는 선생의 운명을 결정지은 계기가 됐다. 전북대학에 다니던 선생은 문관으로 종군하게 됐고 대전으로 배속돼 근무하던 중에 장암 지헌영(전 충남대 교수)선생을 만났다. 일요일마다 선생과 함께 고서점을 찾아 쓸 만한 책들을 모으며 국문학연구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지헌영 선생이 최승범 시인을 충남대로 데려가려 할 무렵 중절모에 가방을 든 가람 이병기 선생이 전북대에 나타났다. 청소년 시절에 이미 시조의 매력에 심취했던 선생으로서는 가람의 그림자만 보아도 따라갔을 터인데 직접 눈앞에 나타났으니 그 반가움과 설렘은 그를 꼼짝도 할 수 없이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6.25 전란으로 전북대에는 서울에서 낙향한 가람 선생을 비롯해 건재 정인승 선생, 김형규 선생 등 국어문학의 거목들이 든든하게 서 있었다. 최승범 선생은 이 분들 밑에서 그의 꿈을 마음껏 펼쳐 전북대학교 국문학과 1호 졸업생이 되었다. 특히 가람 선생에게는 개인적 사사를 통하여 그 분의 적통을 이어받은 수제자가 되었다. 그렇게 시조와 국문학의 길을 걸어 어언 반세기가 넘었다.삶이 팍팍할 땐 ‘고하(古河) 문예관’으로 오세요전라북도 교육청 앞 넓은 네거리에 스타 뱅크의 빌딩이 있고 그 건물 안에 200여 평의 ‘고하 문예관’이 있다.'고하(古河)’는 선생의 호이다. 최승범 시인의 시심과 인격, 그리고 학문적 업적을 사랑하는 도민의 염원을 헤아려 스타 뱅크 양효섭 회장이 마련한 우정의 공간이다. 양 회장은 최 시인의 학창시절 친구다.선생은 이곳에 자신의 손때가 묻은 3만5000여 권의 도서 및 국문학 연구의 각종 자료들을 기증하고 전북대학교 대학원생들에게 강의를 할 뿐만 아니라,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와 수필의 이론 및 창작 강의를 열고 있다. 벌써 10년 째, 이 강좌를 거쳐 간 사람만도 1000여 명을 넘었다. 세상이 혼탁하고 풍속이 어지러워졌다고들 하지만 이곳에 들르면 오롯한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컴퓨터 문자가 판을 치는 세상인데도 원고지에 만년필로 쓰는 글의 세상이 있고, 단 몇 개의 선을 그어서 천만 마디의 사연을 담은 그림도 있다. 매연에 찌든 일상에서 한번씩 묵향에 젖는 행복을 흔들어 깨우는 대나무 한 그루가 거기에 있다. 선생은 단아한 체구에 군살이 전혀 없다. 선생의 모습은 정제된 시조 시형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일흔 일곱의 연세인데도 청년처럼 담배를 맛있게 피우면서 낭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불쑥 담배를 권한다. 그러나 한 마디 한 마디 그분이 던지는 말씀은 유려하면서도 기품이 넘친다. 원숙한 시조시인의 품격이 향기롭기만 하다.최승범 시인은1931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전북대 국문과 교수, 인문과학대학장 역임. 현재 전북대 명예교수, 전주 스타뱅크 부설 고하 문예관 관장. 1958년 ‘현대문학’에 시조를 발표해 등단. 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장,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전북지부장,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전북지부장, 한국언어문학회장을 지냈으며, 정운시조문학상, 한국현대시인상, 가람시조문학상, 한국문학상, 목정문화상, 민족문학상, 그리고 금년에 한국시조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한국수필문학연구」 「남원의 향기」 「선악이 모두 나의 스승」「시조 에세이」「스승 가람 이병기」「풍미기행」 「한국을 대표하는 빛깔」「한국의 먹거리와 풍물」「벼슬길의 푸르고 맑은 바람이여」 「꽃 女人 그리고 세월」「소리, 말할 수 없는 마음을 듣다」 등이 있고, 시집으로 「난 앞에서」「자연의 독백」 「몽골기행」 「천지에서」 「가랑잎으로 눈 가리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