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만난 작가] 정양 원로시인 만난 기명숙 시인
정양 선생님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저릿해지며 말문부터 막힌다. 그 큰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고 징징대며 살아가는 미욱한 제자의 어깨를 토닥여주시던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 때문이다. 정양 시인은 어떤 분인가. 김병용 소설가의 답이 참 명쾌하다. “정양 시인이라는 가치중립적인 호칭을 사용할 수 없는, 정양 선생이 아니었다면 최소한 술자리의 삼분의 일쯤은 소집되지 않았거나, 미국이나 총칼로 집권한 군인들을 덜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육회나 바지락죽의 깊은 맛도 몰랐을 것이고 이병천 형이 수도 없이 막걸리값을 치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늘 바쁜 안도현 형이 집에 들르지도 않고 ‘새벽강’으로 달려오는 일도, 정양 선생이 안 계셨다면 정양 선생이 아니었다면······.” 문학의 숲에 뿌리깊은 나무되어문학만큼 정제된 자기표현 방법이 또 있을까. 눈물도 사랑도, 세상의 어깨에서 춤추는 신명도 문학의 프리즘을 통해 증폭되기도, 때로는 소리없이 잦아들기도 한다. 그리하여 문학은 한 떨기 꽃잎에도 성난 눈발 속에서도 오롯이 존재해 왔던 것. 문학의 숲, 그 박질의 땅을 뚫고 깊게 뿌리를 내리고 서서 세상을 향해 따뜻한 눈길을 나누어주는 한 그루 나무 같은 이가 바로 정양 시인, 내게는 이제 평생의 선생님이시다. 꼭 두 해 전, 정양 선생님을 처음 뵙던 날도 오늘처럼 벚꽃이 흐드러졌던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요.”그날 내 첫마디가 그랬던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는 넉넉한 미소만 수북히 담아내 주셨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벚꽃이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우석대학교 교정에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은, 진달래가 어디 있을랑가, 하시면서 걸음을 재촉하신다. “세상이 온통 벚꽃 천지다 보니 나는 촌스런 아낙 같은 진달래가 한결 곱고 귀합니다.”선생님의 옆모습이 첫사랑을 앓는 미소년 같다. 뜰에 옮기려고 진달래 캐러 왔다가진달래꽃 흐드러진 산자락, 삽자루에 기대어넋놓고 꽃구경만 한다 마음 다 비운 듯이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무래도 꽃들이 심상치 않다화장기도 화냥기도 없이 그냥 바람난바람난 게 무언 줄도 모르고 그냥 바람난아슬아슬한 여자애들만 같다 (‘진달래 캐러 왔다가’의 일부)벚꽃보다 진달래라시는 데 대해 민족의식을 슬그머니 들이댔더니 선생님은 손사래부터 치신다. “꽃은 꽃일 뿐이지요. 벚꽃과 민족감정을 연결시키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이데올로기야 당연히 우리네 인식의 복판에 있겠지만 그걸 정치적으로 악용하거나 독선과 아집의 효용물로 삼는 건 좋지 않다는 것이지요.”내친 김이라는 듯 선생님은 한 마디 덧붙이신다.“우리가 ‘저항시인’이니 ‘목가시인’이니 하고 부르는 것도 당사자들한테는 일종의 가시면류관이 아닐까 싶어요. 그걸 벗겨주어야만 시인들도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부터 어둡고 답답한 굴레에서 벗어나야지요. ”잔잔하게 말씀하시는 데도 어딘지 모를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선생님의 시에는 대체로 동시대적 삶의 풍경들이 가득하다. 특히 시집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에서 시인은 풍경과 객관적인 거리를 두면서도 땅바닥에 퍼질러앉아서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때는 시 쓰는 걸 그만두고 암실에 처박혀 지낸 적이 있어요. 정치적으로 참 암울한 시기였는데, 거창하게 말하자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안쓰러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카메라를 둘러메고 참 많이도 헤메고 다녔어요.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사진 속에 담아서 그 삶의 음영들을 재현하는 일에 심취했었다고 할까요.”선생님이 우리 전통문화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보내시는 것도 그와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은 ‘판소리의 이해’라는 과목을 강의하시면서, 판소리를 ‘시’로 접근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 저 유명한 ‘쑥대머리’와 ‘사랑가’도 선생님의 손에 몇 편의 시로 거듭났으니······. “우리 옛 노래 대부분이 음악은 없어지고 가사만 달랑 남았다는 걸 생각하면, 판소리는 음악도 가사도 온전히 살아있는 훌륭한 우리 성악문화의 자산입니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우리 소리문화가 홀대받는 현실이 안타까워 죽겠어요.”주욱겠어요, 하시는 시인의 얼굴이 낙조처럼 안타깝게 붉어진다. 선생님은 어느새 춘향이가 변학도의 모진 형장을 맞고 옥중에서 고생하는 대목을 소리로 만든 십이잡가의 한 대목쯤 거뜬히 해내실 태세이신데, 그건 컬컬한 막걸리 한 사발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고맙고 행복한 시인선생님은 얼마 전에 26년간 몸담았던 우석대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나셨다.“내가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하니까 아무렇지 않은데, 아끼는 후배나 제자들도 나처럼 늙어간다는 것이 불현듯 느껴질 때는 그것처럼 안타깝고 아깝고 서글픈 일이 없어요.”후배와 제자들을 향한 선생님의 사랑이 큰 만큼 그들이 갖는 선생님에 대한 애정 또한 몹시 크다는 것을 공자와 그 제자들과의 관계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분위기를 바꾸려고 재작년에 수상하신 백석문학상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그랬더니 웬걸, 이번에도 후배들 이야기다.“나름대로 권위도 있고, 상금도 많아서 좋았지요. 그래도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상은 우리 후배들이 만들어 준 상입니다.”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후배 문인들이 제정해서 선생님께 제일 먼저 드린 ‘아름다운 작가상’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건, 문학적 성과는 물론이고, 후배 문인들이 존경하고 믿고 따르는 선배에게 드리는 상인데, 시인은 수상 당시나 지금이나 그 상만 생각하면 더없이 고맙고 행복하시단다. “등단한 후배 시인들이 글을 열심히 쓰지 않는 걸 볼 때가 제일 죽겠어요.”또 주욱겠어요다. ‘순결’이나 ‘안쓰러워 죽겄어’는 선생님이 즐겨 쓰시는 표현들인데, 이 또한 제자와 후배를 아끼시는 선생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아닌가.문득 선생님 홈페이지의 ‘글 입원실’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작고 예쁜 소망 앞에 코끝이 다 찡해 왔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1990년대 이후 우리의 문학적 상황도 많이 변했고, 또 다양한 관점들이 등장하다 보니 기존의 진보적 사유들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 문학적 상상력도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도 시인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봐야 하고, 또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를 개선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예술적인 완성도는 생각하지 않고 속에 있는 비분강개를 여과없이 쏟아내는 작품들을 대할 때가 있는데, 시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의 진정성이지요.” “정직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씀이신가요?”나의 우문에 선생님은 그저 빙긋이 웃으시면 한 마디 덧붙이셨다. “그저, 어둡고 고단한 시대를 견뎌온 사람들의 열정만은 쉽게 지나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겨우내 투전판에다 나락 마흔 섬 날려먹고속 터지는 만석이는 그 속 차리느라 고개 숙이고새벽마다 고샅길 개똥을 줍는다 (중략)미나리꽝에서 건진 젖은 개똥 속에는막 돋아난 미나리싹도 묻어 있다 (시 ‘이른 봄’의 일부)개똥을 줍는 행위는 시작하는 마음으로 시작(詩作)하려는 선생님의 깊은 속내를 뜻하는 건 아닐까. 불행을 말하되 희망의 끈은 놓지 않고, 고통스럽지만 그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치유되었으면 하는 것들.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선생님은 ‘시인이 시를 쓸 때는 광인(狂人)과 같다’라고 했던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시면서 시작의 치열함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슬그머니 내비치셨다. 시작에 게으른 제자로서 가슴 한끝이 뜨끔했다. 때마침 만개한 벚꽃이 흰눈처럼 펄럭이는 교정에는 시인이 사랑하는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이 잇몸을 드러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시인도 학생들도 만화방창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정양 시인은1942년 전북 김제에서 사회운동가인 아버지와 보통학교 교사인 어머니의 2녀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당신의 가슴 속에 사무친 한을 오롯이 삭이려고 자식들에게 아버지에 대해서만은 평생 함구로 일관하셨다고 한다. 부패한 정권과 불합리한 사회구조가 아버지를 향한 시인의 그리움을 더욱 사무치게 했는데, 시집 「빈집의 꿈」은 그 문학적 결과물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까지 도내의 중·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1981년부터는 우석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시작(詩作) 등을 가르쳐오고 있다. 한때는 전라도의 농경언어에 담긴 삶의 애환을 한 데 모으는 작업을 하기도 했고, 전북작가회의 회장도 지내셨다.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평생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1977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기도 했다. 시집으로는 「까마귀떼」,「수수깡을 씹으며」,「빈집의 꿈」,「살아있는 것들의 무게」「눈내리는 마을」「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나그네는 지금도」가 있고, 시 선섭「동심의 신화」와 판소리 평론집「판소리 더늠의 시학」, 그리고 「두보시의 이해」, 「한국리얼리즘 한시의 이해」등의 저서를 펴냈다. 제9회 모악문학상, 제1회 아름다운 작가상, 제7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금년 봄에 우석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나어린 제자들이 장성하여 사춘기로 접어든 그 자식들에 대한 고민을 토로할 때 선생님은, “나는 인제 사춘기인데 니 자식들도 사춘기냐?” 하시면서 웃으시곤 한다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열다섯 살짜리 소년 같다. 지금은 삼천천과 전주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근방에서 해오라비도 보고 천변을 뛰는 사람들의 모습도 바라보면서 아내와 함께 오붓하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