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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칼럼] 구조조정의 중요성

근래에 게재된 국내 경제상황에 관한 기사들을 보면 위기 가능성에 대하여 엇갈린 주장들이 보인다. 국내 경제의 펀드멘털이 양호하니 경제위기는 없다는 내용이 있는 반면, 금융위기로 인해 경제가 파탄 날 수 있다는 내용의 기사들도 자주 보인다. 어느 쪽 주장이 진실일까? 금융위기는 올 것인가? 대책은 무엇인가? 등의 의문이 생길 수 있다.경제에 대한 경제연구소들의 진단은 국내경기가 경기 주기상 호황의 정점을 막 지났거나 곧 지날 것이라는 내용으로 정리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국내 경제의 펀드멘털이 아직은 양호하기 때문에 악화된 경제상황으로 인하여 경제와 금융부문에 위기가 도래할 때는 아니다. 그렇다면 근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금융위기설과 이로 인한 경제파탄 가능성의 근거는 무엇일까?과거 개발독재시대와는 달리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의 규모가 커진 지금은 금융위기에 따른 자금흐름이 경제부문을 강타할 수 있는 위력을 갖게 되었다. 만약 미국경제가 고유가 지속 등으로 연착륙에 실패하여 갑자기 침체에 빠지게 되거나, 혹은 해외 투자자들의 눈에 국내 구조조정의 진행이 부진할 것으로 확신될 경우,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한 외국인투자자의 자금은 IMF협약체결 전의 상황같이 급속히 빠져나갈 것이다.최근의 금융위기설은 미국의 주가수익률 하락에 따른 국내 투자비중 축소나 국내의 불확실한 구조조정 전망 등 국내외 금융부문에서 발생하는 요인들에 기초를 두었으며 현실화될 수 있는 주장들이다.금융위기의 여러 요인 중에서 우리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정책변수는 구조조정이다. 국민들이 고통의 대명사와 같이 여기는 구조조정을 외국인투자자들이 중요한 투자 잣대로 삼는 이유는 이들이 긴 세월 동안 유럽과 미국, 그리고 남미에 투자하면서 이들 정부와 기업이 금융위기와 경쟁력 상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실시한 구조조정의 실태와 그 결과들을 보아 왔고, 이로부터 구조조정의 중요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지금 해외투자자들에게 비쳐진 국내 구조조정의 모습은 확실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더 지켜 봐야한다'는 입장에 가깝다. 구조조정 반대세력의 저항과 차기 선거를 앞둔 정치논리에 의해 구조조정이 형식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은 국내 여러 집단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이들은 최근의 고유가, 중동사태 등 국제경제적 악재들이 발생한 후에 이것이 아시아국가들, 특히 한국과 대만의 미약한 금융부문에 미칠 악영향에 더욱 유의하고 있다.외국인투자자들의 이러한 상황과 향후 하락이 예상되는 경기추세를 고려할 때 구조조정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적당히 시간을 끄는 전략은 경기 주기상 늦었고 외국인투자자들의 신뢰도 무너질 가능성이 높아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적 위험이 크다. 금융위기가 도래하면 여당의 정권재창출에 큰 문제가 생긴다.이와 반대로 정부가 해외의 기대수준에 부합하는 구조조정을 실시할 경우에는 인기하락에 따른 선거패배 가능성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따르게 된다. 더 나아가서 인기하락으로 선거에서 지면 구조조정의 의지가 미약한 정권이 들어서게 되어 이로 인한 금융불안이 재개되어 선거 이후의 경제적 위험이 존재한다.결론적으로 정부는 구조조정이라는 사안을 놓고 국가가 부담하는 경제적 리스크와 정권이 부담하는 정치적 리스크를 어떻게 구성하는냐의 문제에 당면해 있다고 보여진다. 구조조정 여하에 따라 두 가지 리스크의 구성비와 총량이 달라진다.정부가 대승적 차원에서 적극적 구조조정을 선택한다면 여당에게는 정권을 잃는 정치적 리스크가 커 보이나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적 리스크를 많이 줄이게 됨으로써 두 가지 리스크의 총량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반대로 구조조정을 형식적으로 실시할 경우에는 금융위기에 따른 경제적 리스크가 매우 커지고 이로 인하여 정치적 리스크 또한 커져서 리스크 총량이 늘어날 것이다.해외 사례를 보면, 구조조정을 적극적으로 실시한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영국의 대처 내각이 구조조정에 성공하여 국가경쟁력을 되찾았고 정권유지에도 성공한 반면, 선거패배를 두려워하여 경기가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며 10년을 허비한 80년대 남미의 정권들은 지키려던 정권도 잃었고 경제도 망쳤다.'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이순신 장군의 말씀이 오늘날 정부가 중요정책을 선택할 때에도 유효한 것은 아닐는지?/김동식 (전북은행 리스크관리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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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0.20 23:02

[전북칼럼] 주거환경과 청소년 발달

최근 신문지상에 핫이슈로 떠오른 러브호텔은 학교 및 주거환경 저해요소로서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이에 당국은 구체적인 법규 제정을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현행법상 학교 2백미터 이내로만 제한한 유흥업소 규제는 당초부터 너무 어처구니 없는 규제였다. 초중등학교 학생들을 주변 거주 지역에서 도보로 통학하도록 유도하는 이 시점에서 2백미터는 도보로 5분 정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영국의 환경심리학자인 리 테란스는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들이, 걸어서 통학하는 아이들보다 도시와 자연환경에 대한 인지와 이해가 훨씬 덜 발달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걷는 일은 다리를 튼튼하게 해주고 어린이들이 주변 사물을 보면서 사회 및 주변 환경의 흐름과 동향을 수용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거주 인접지역의 지리적 공간에 대한 인지적 분석을 얻을 수 있다.미국 메사츄세츠주의 한 조사 결과 가정에서 어린 자녀를 유치원에 보낼 필요가 있을 때 멀리있는 무료 시설을 기피하고 유료라도 가까운 곳으로 보내기를 원하는 부모가 5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인들이 자녀발달을 위한 주거환경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시사해 준다. 이에 비해 우리 부모들은 통학차를 운행하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며, 외형적인 건물과 외형적 교육형식에 더 관심을 갖는 경우가 아직도 많은 듯하다.최근 전주시내 고등학교 2개를 선정하여 주변에 유흥업소가 많은 지역과 그렇지 않은 두 지역의 학생들 행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결과는 너무도 놀라웠다. 두 학교의 학생들 행태 차이가 매우 컸으며 술집은 물론 모텔과 여관을 이용한 학생들까지도 나타났기 때문이다.이웃나라 일본은 이미 수년전부터 '살기좋은 동네만들기'를 구청 중심으로 전개하여 주민이 주도가 되어 어린자녀는 물론 청소년과 여성 및 노인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좋은 동네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자녀 발달 시기 중 가장 민감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시기가 청소년임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이들의 성장기를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 많은 호기심과 취미에 대한 갈망, 그리고 육체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일에 대한 탐색에 열정적이다. 이러한 열정은 학생들에게 주어진 환경적 조건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됨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그러나 너무 유감스럽게도 우리 주변의 도시 환경 중 가장 외면되어 있는 것이 청소년을 위한 공간 환경이다.영유아 및 어린아동들의 경우 공동주거지역 내에 다소 부족은 하지만 심신의 발달을 위한 놀이터가 시설돼 있으며 이는 법적으로 규제돼 있다.어른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각종 스포츠 활동 등 여가활동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청소년들은 입시환경에 찌들어 심신이 쇠퇴하고 또 위축돼 있지만 학교는 물론 가정, 사회 등 어느 곳을 가든, 지친 심신을 맘껏 의지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몇 년전 필자가 사는 아파트 단지 옆 전주천 고수부지에 농구대를 비롯한 몇가지 체육시설이 조성되었다. 우리 아이들을 비롯한 동네 청소년들은 환호하며 당장 농구공을 사서 달려가 서로 어우러져서 농구를 즐겼다. 이런 모습은 주변을 지나는 모든 어른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얼마 안가 농구망은 찢어지고 떨어져 나갔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공을 던지며 즐거워 하였다. 또 한쪽에서는 '게이트볼' 코트가 조성되어 부부 노인들이 매일 매일 열심히 운동을 하였다.올림픽 스타를 양성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을 위한 신체 단련의 공간과 시설을 어린이 놀이터처럼 주거 단지 내에 시설하도록 법제화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청소년들이 육체적 에너지를 게임방이나 끽연 내지는 본드흡입, 비도덕적인 성적 행태로 분출하는 것을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이들을 위한 건전하고 밝은 주거환경을 조성해야 한다.우리사회가 그들에게 해 줄 일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도로환경을 보면 도시 환경에 대한 관계 부처의 태도는 한심하기 짝이없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심지를 벗어난 일반 주거 단지 도로는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인도는 간데없고 차도만 있다. 자동차를 피해 어디로 걸어야 할지 난감한 지역이 한 두곳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인도를 충분히 확보한 후 차도를 개설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송천동에서 어린이회관으로 오르는 길 역시 차도만 4차선으로 확보되어 있고 인도 폭은 불과 30센티미터도 안된다. 봄이나 가을 소풍때 아이들의 단체 행렬을 보면 정말 불안하고 화가 치민다. 도대체 이런 행정이 어디 있단 말인가.유채꽃 축제와 같은 행사보다는 일반인과 청소년을 위한 각종 기본적인 체육시설을 전주천 고수부지 곳곳에 설치해 누구든지 산책이나 조깅을 하며 쉴 수 있는 그린환경을 함께 조성해 주는 일 등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박선희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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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0.13 23:02

[전북칼럼] 가을과 한 편의 시

진부한 말이지만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 다가왔다. 현란한 시각문화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마음의 등불을 밝히면서 느긋한 기분으로 한 편의 시작품을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문명의 속도에 지친 우리에게 그것이 큰 위안을 주지 않을까 한다. 특히 감각적인 대중문화에 물들어 있는 컴퓨터 세대들에게 가을이라는 계절과 관련하여 권해주고 싶은 시 한 편이 있다. 떨어지는 낙엽을 통하여 인생의 의미를 되짚게 해주는 정곡(鄭谷)의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시작품의 전문과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다. 개미는 돌아갈 구멍을 찾기 어렵고(返蟻難尋穴)/새는 돌아갈 둥지를 찾기 쉽다(歸禽易見巢)/낭하(廊下)의 뜰에 가득하나 스님은 싫어하지 않고(滿廊僧不厭)/일개 속인은 많은 것을 싫어한다(一個俗嫌多).정곡은 개미와 새, 그리고 도(道)를 닦기 위해 정진하는 스님과 보통사람인 속인(俗人)을 등장시키고 있다. 문제는 왜, 어째서 이러한 소재들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개미는 어째서 돌아갈 구멍을 찾기가 어렵고, 새는 돌아갈 둥지를 찾기 쉬운가? 뜰에 가득한데도 스님은 싫어하지 않고, 왜 일개 속인은 수북히 쌓인 그것을 싫어하는가? 동시에 가득히 쌓여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시의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의문들을 해결해야 한다. 첫째, 개미 구멍을 찾기 어렵고 새 둥지를 발견하기 쉬운 것은 낙엽 때문이다. 낙엽이 떨어져 개미구멍을 덮으니 찾기 어렵고, 무성한 나뭇잎 가지 위에 놓여있던 둥지는 그 잎들이 떨어지니 쉽게 눈에 띈다. 시간적 배경이 가을이라는 정보를 담고 있는 1-2구에서 시인은 낙엽이라는 단어를 단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낙엽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3-4구의 뜰에 가득히 쌓인 것과 속인이 싫어하는 많은 것도 낙엽임을 지시해 준다. 그 어디에서도 낙엽에 관한 말을 내비치지도 않으면서 시인은 낙엽을 함축하고 암시할 수 있도록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둘째, 낙엽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시인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가를 파악하는 문제이다. 이 시의 후반부는 보다 중요한 주제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낙엽을 통해 인생살이에 대한 어떤 인식과 성찰을 발견해 내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3-4구에서 대비되고 있는 두 인물인 스님과 속인의 마음가짐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 사람은 낙엽에서 인생의 귀중한 교훈을 발견해 내고 있는 반면에 다른 또 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낙엽으로 대표되는 자연현상을 통해 인생살이를 관조하려는 스님의 마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비유컨대 우리 인생살이도 낙엽과 마찬가지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가을이 되어 자신을 길러준 나무의 그루터기로 돌아가는 것이 낙엽만은 아닐 것이다. 스님은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인간도 때가 되면 자신을 길러준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연이라는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발견한 까닭에 스님은 아침저녁으로 힘들게 쓸어버려야 할 낙엽을 귀찮아하지 않고 싫어하지도 않지만 속인은 그렇지 않다. 자연 앞에 서서, 그 스승이 가르쳐주는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스님과 그렇지 못한 속인의 대비를 통해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자연의 질서와 운행 속에 감추어진 참 진리를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보고 즐기는 것보다는 읽고 느끼는 삶이 보다 진지하고 아름답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에도 그것이 매우 유익하다. 느릿느릿 음미하는 독서가 그런 것이다. 빠른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진지함과 여유를 빼앗아 간다. 속도의 시대 탓인지 독서에 대한 생각이 점점 희박해져가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그 속도와의 전쟁을 치르는 그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길이 바로 독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너무 감각적이고 표피적인 정서에 물든 컴퓨터 세대들이 한번쯤 마음의 등불을 켜고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절이 되었으면 한다./전정구(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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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0.06 23:02

[전북칼럼] 디지털 민주주의

아무래도 컴퓨터엔 별로 자신이 없다.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통신 기술이 시공간을 비약적으로 압축시키고 있는 이른바 '디지털 시대'에, 어쩐일인지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주눅부터 드는게 사실이다. 컴퓨터와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컴퓨터 모니터보다는 텔레비전이, 키보드보다는 리모콘이, 인터넷보다는 신문이 더 익숙하다.최근, 큰마음 먹고 새집을 하나 장만했다. 문패도 반듯하게 달고, 현관도 예쁘게 꾸미고 몇 개의 방엔 나의 생각과 계획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놓았다. 그럴듯한 주소도 받았으니 이제 집으로서 갖출 것은 모두 갖춘 셈이다. 사이버 공간의 네티즌 모두에게 개방된 이 집에 손님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따뜻한 격려의 말이나 호된 질책 혹은 그들의 바람과 걱정을 잊지 않고 남겨두고 있다.텔레비전보다 컴퓨터를 먼저 켜고, 리모콘 대신 마우스를 잡은 것은 사이버 공간에 새집을 마련하고 부터이다. 어렴풋이 생각되던 전자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서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된 것도 아마 그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텔레데모크라시, 전자민주주의 혹은 E-폴리틱스 등의 신조어는 어느새 새로운 세기, 새로운 정치를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잡고 있다.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 나날이 복잡해지는 정치구조 하에서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생각되던 대의민주주의가 국민의 참여부족이나 투명성의 미흡으로 인해 그 한계가 지적되면서 전자민주주의가 이러한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터넷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정보통신 기술을 바탕으로 전자민주주의는 그 동안의 정보독점 문제나 정책 형성 및 집행과정의 폐쇄성 문제를 보완해결해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물론, 아직은 기존의 대의민주주의를 완전히 대체하는 전자민주주의의 출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의제의 개선과 개혁을 위해 전자민주주의가 기능할 수 있는 기반은 이미 충분하게 조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인은 온라인 상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유권자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사이버 공간에서의 항시적인 접촉은 정치인으로 하여금 국민의 요구에 더 충성스럽게, 더 빨리 응답하도록 하고 있으며 국민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부의 입장에서도 국민에게 정부가 가진 정보를 전자적으로 신속정확하게 공개함으로써 투명한 정부를 실현할 수 있고, 원거리에 흩어져있는 일반 시민들이 디지털화한 통신매체를 이용해 정부와 대화하고 공적 토론에 참가하며 직접 공공정책 결정에 참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정부의 신뢰성을 제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그러나,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전자민주주의의 미래 역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급격한 발달은 그 한편으로 지식과 정보의 격차가 소득의 차이를 만들어 정보이용능력이 없는 디지털 빈곤계층을 양산함으로써 소위 '정보양극화 사회'를 출현시키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기본적으로 익명성과 개방성을 원칙으로 하는 인터넷상에서 거친 욕설과 인신공격, 근거 없는 비방이나 여론조작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자민주주의의 미래를 그저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이버 공간의 비민주성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전자민주주의의 밝은 미래상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쌍방향성'은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크다.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제안하되 타당한 비판은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보다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정착될 때, 전자민주주의는 미래학적인 꿈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사이버 공간을 민주적으로 만드는 열쇠는 바로 사이버 공간의 주인인 네티즌이 쥐고 있다. 네티즌의 자율성과 책임성만이 전자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게 할 수 있을 것이다./국회의원 정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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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9.29 23:02

[전북칼럼] BIS비율과 리스크 관리수준

'리스크' 혹은 '리스크관리' 등의 리스크 관련 기사들이 IMF관리체제 이후부터 최근까지 국내 경제신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필자가 리스크관리업무를 맡다보니 주위에서 리스크관리 업무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리스크'란 '위험' 또는 '예상외 손실'이란 의미인데, 이 리스크를 구체적 금액으로 측정하고 적정한 수준으로 관리하는 업무를 리스크관리라고 한다. 리스크는 신용리스크, 금리리스크, 유동성리스크 등 그 원인에 따라 여러 종류의 리스크가 존재한다. 그 중에 BIS자기자본비율과 연관이 깊은 리스크가 신용리스크이며 주로 대출과 관련하여 발생한다. 은행은 어느 정도의 손실을 예상하고 대출을 하지만 실제 손실이 예상했던 것보다 커질 수가 있다. 갑작스럽게 경제위기나 불황이 닥치면 손실이 예상했던 규모보다 커지는데 이러한 예상외 손실을 평소에 측정하고 모니터링하고 은행이 부담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으로 관리해 나가는 일이 신용리스크관리이다. 예상외 손실은 대출고객에게 금리로 직접 부담시키지는 않고 은행이 보유한 자본금으로 부담하게 된다. 예상외 손실규모에 비하여 은행이 보유한 자기자본 규모가 적정한지를 나타내는 리스크측정지표 중 하나가 BIS자기자본비율이다. 예금보장한도 축소계획이 발표된 뒤부터 BIS자기자본비율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이제는 시골 할머니도 은행에 예금하면서 '당신네 은행의 BIS가 얼마요?'하고 물을 정도이다.이렇게 리스크와 BIS비율이라는 단어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요즈음 은행 고객들이 BIS비율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사실 중 하나는 BIS비율이 높으면 해당 은행의 리스크관리능력도 높은가하는 점이다. 단적으로 대답한다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이다. 왜냐하면 리스크관리능력이 높으면 평소 부실이 날 수 있는 자산의 규모를 적절한 수준 이내로 잘 관리하여 당연히 BIS비율도 높겠지만 BIS비율은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높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은행중 개인대출, 특히 주택담보대출을 많이 취급해 온 시중은행은 보유한 리스크관리능력에 비하여 BIS비율이 높은데 이는 주택을 담보로 대출할 경우 BIS비율 산출과정에서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리스크관리능력이 낮아 기업대출부문에서 큰 부실이 발생한 후 공적자금을 수혈 받아 자기자본이 많아진 시중은행들이 있다. 이 경우 일단 BIS비율이 올라가 건실한 은행으로 보이겠지만 문제는 공적자금을 받은 후 신인도 제고를 위해 해외 유명 리스크관리시스템을 비싼 값에 도입해도 리스크관리능력은 쉽게 향상되지 않는데 있다. '신토불이'란 말이 있듯이 외국의 선진 시스템이 국내 금융상황과 맞지 않는 점이 발견되고 있고, 또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가동시키는데 필요한 내부 역량과 데이터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스크관리능력이 조속히 향상되지 않는 상황에서 BIS비율이 회복되더라도 이는 일시적으로만 은행의 건전성을 높이게 된다. 결론적으로, 은행이 리스크관리능력을 향상시키고자 원한다면 BIS비율 산출에서 유리한 특정대출만 늘리려하거나 화려한 시스템 구축에 앞서기 보다 최고경영층이 리스크관리 향상을 경영의 중요 목표로 삼고 이를 꾸준히 추진해 가는 일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의지 없이 그 외의 빠르고 쉬운 방법을 찾아 리스크관리 수준을 높이려 시도하거나 BIS비율 자체만을 높이려는 노력은 해당 은행의 이익만 떨어뜨리고 고객을 착각시킬 뿐이다. 따라서 고객 측에서는 은행의 건실도를 알기 위해서 BIS비율 뿐 만이 아니라 경영진의 리스크관리능력 향상을 위한 확고한 의지도 함께 점검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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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9.22 23:02

[전북칼럼] 문화정책의 기본방향

시민의 생활 속에서 형성된 문화는 그것이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 충분한 존재의의가 있다.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금기시(禁忌視)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문화는 인간이 소비하는 물에 비유될 수 있다. 원래부터 청정한 물과 오염된 물이 없듯이, 문화도 그것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좋게 변화하거나 나쁘게 변질될 뿐이다.이분법적 사고로 나쁜 문화와 좋은 문화로 분류하여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들이 알맞게 흘러갈 통로를 마련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문화의 하수도를 인정하지 않는 정책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방향설정이 잘못된 것이다. 식수를 공급하는 상수도 물과 생활의 찌꺼기를 흘려보내는 하수구 물이 있듯이, 상수도로 공급되어야할 문화와 하수구로 흘려보내야 할 문화가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 문화정책 수립자들은 대부분 이 점을 간과해 왔다. 우리 사회에 항상 좋은 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나쁜 문화도 있고, 부정적인 문화도 존재한다. 모든 종류의 문화와 더불어 생활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의 유통이 원활할 수 있도록 각각의 통로를 확보해 주는 일이다.오염된 폐수가 흐르는 통로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주변은 온갖 폐수로 그득할 것이고, 그 폐수가 땅 밑으로 침투되어 맑고 깨끗한 지하수를 오염시킬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그 물은 상수도로 역류하여 식수를 오염시킬 것이다. 문화의 흐름도 동일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문화의 하수구가 폐쇄될 때 문화의 상수원이 오염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문화의 상수도가 본래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하수구라는 배출구가 필요하다. 하수구로 유입되어야 할 문화를 배척하면서 그 통로를 봉쇄하면 그곳으로 흘러야할 저질문화들이 본격문화의 통로인 상수도를 침범한다. 부정적이고 이롭지 못한 문화를 하수도로 흘러보내는 정책이 수립될 때 우리 사회의 문화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그것은 깨끗하고 좋고 유익한 것만을 받아들이는 입보다는 해롭고 나쁘고 더러운 오물덩어리를 쏟아내는 항문이 그 기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우리의 생활 속에 자리잡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존중해야 한다. 자연스런 문화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면서 유용하고 바람직한 문화로 가득 찬 사회를 꿈꾸는 것은 이상에 불과하다.인류역사상 인간이 소망해온 이상사회가 실현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좋든 나쁘든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 유통되는 것이 현실이다. 바람직하고 우량한 문화만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좋다는 발상은 위험하다.우수한 단일 종으로 이루어진 생태계가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생물들이 군집한 생태계가 바람직하다. 인간사회의 문화현상에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시민의 생활세계 속에서 숨쉬는 건강한 문화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매카시즘이 작용해서는 안 된다. 시민대중의 문화적 자정능력(自淨能力)을 의심하는 전근대적이고 엘리트 문화중심주의적인 편견이, 문화의 흐름을 왜곡시키면서 그것의 배설구를 막아왔다.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를 구분하여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고 그 반대편을 배척하는 이분법적 문화선별주의를 탈피하여 다원주의적 문화정책을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문화생산과 문화소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문화수요층의 선택권과 분별력을 존중하여 각종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방향에서 문화정책의 기본방향이 수립되어야 한다.이러한 점에서 공연예술과 영상예술의 등급제를 보류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은 문화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규제와 억압으로 현안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반시대적 발상을 21세기 시민사회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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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9.08 23:02

[전북칼럼] 대통령의 의자

구세대들의 푸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나이 50대에 접어들어 집안의 가장으로, 직장의 상사로, 그리고 사회의 리더로 자리잡고 있는 그들의 푸념이, 아니 불만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도대체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혹은 직장 상사로서의 권위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50대들의 하나같은 불만이다.일면, 그들의 푸념이 이해가 된다. 부모의 꾸지람을 듣기 싫다는 이유로 부모를 폭행하는 자식, 교사의 훈계에 앙심을 품고 경찰서에 고발해버리는 학생들의 뉴스가 떠들썩하게 들릴 때마다 기성세대의 '사라져버린 권위'가 안타깝게 여겨진다. '애비노릇도, 선생노릇도 못하겠다'는 50대들의 불만이 남의 일로만 생각되지는 않는다.혹자는 '어른의 권위'가 무시되는 오늘날의 현상을 무분별한 서구화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서구의 '자유분방함'이 도를 넘어 동양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무너뜨리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서구의 '무질서'가 동양의 '질서'를 뒤흔들면서 '부모를, 스승을 존중하는' 미덕이 사라져버렸다고 이야기한다. 서구사회를 들여다보면 부모 자식간의 관계, 선후배 사이의 관계,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 할 것 없이 모두 '질서'가 없어 보인다. 특히 미국의 경우, 종교적인종적 다양성과 자유주의적인 분권적 정치구조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조차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이런 '무질서'를 견뎌낼 수 있는 내성(耐性)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에 대해 '권위주의'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자발적인 조정과 합의의 과정을 존중하는 그들의 문화적 풍토는 '무질서'를 '다원적 민주주의'로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8월, 민주당 전당대회기간 중에 참석했던 한 연찬회는 '과연 권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 식장에서는 클린턴을 포함한 5명의 연사가 연설을 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참으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통령을 포함한 5명의 연사가 서게 될 행사장 연단의 뒤쪽으로 똑같은 모양의 의자가, 그것도 단 4개만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사가 진행되면서 다섯 명의 연설에 왜 네 개의 의자만이 필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즉, 다섯명 중 한명의 자리는 식장의 연단이 되고, 연설이 끝나면 다음 연설자가 일어난 자리에 앉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통령을 위한 특별한 의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도 다른 연설자와 마찬가지로 연설을 마친 후 빈자리에 앉아 다음 연설을 경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엄연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그 누구도 그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을 이끄는 미국 대통령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미국사회의 무질서가 아니라 '권위주의'의 옷을 벗은 진정한 '권위'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가장으로서의 권위, 스승으로서의 권위, 사회적 리더로서의 권위가 무시된다고 불평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해 보자. 우리는 진정 권위의 상실을 염려하고 있는가? 혹시 아직도 '권위주의'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장으로서, 스승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리더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는가? 혹시 그저 그 자리에 걸맞는 대접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우리는 산업화시기의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성공적으로 민주화를 일궈낸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정치사회 모든 분야에는 여전히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다.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권위'보다는 '권위 있어 보이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그렇지만 분명히 염두에 둘 것은 진정한 '권위'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능력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지 외면으로 치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겉모양에 집착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알맹이 없는 권위주의에 빠져버리게 된다. 이제부터라도 권위주의의 옷을 벗고 권위를 지켜야겠다. 아니 잃어버린 권위를 찾아야 하겠다./국회의원 정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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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9.01 23:02

[전북칼럼] 갯벌 보존과 간척사업

갯벌(干潟地)을 보전(保全)해야 한다는 의견과 간척(干拓)사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다. 특히 새만금 간척사업을 두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학계시민단체지역주민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어있다. 간척사업을 두고 이해 당사자는 물론 지역과 단체 및 계층 간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간척사업의 필요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식량안보와 물 부족현상의 해결 등 경제적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간척사업은 갯벌을 농지나 산업용지 등으로 만드는 단순한 매립사업이 아니라 국토를 효율성 있게 이용하여 국가발전에 필요한 토지와 식량수자원 등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한 국토종합개발사업이란 설명이다. 간척사업을 통하여 식량증산 뿐 아니라 토지의 효율성을 높이고 수자원 확보한발 및 침수피해 감소교통여건 개선관광 및 휴양지제공지역의 균형개발고용창출 등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간척한 땅의 가치는 단순히 농지로 전용한다해도 연구결과 갯벌에 비해 많게는 2.6(1999년 12월 세종대 주명건 교수)배, 적어도 1.4배(1999년 11월 중앙대 최재선 교수)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특히 국토의 65%가 산지로 경작지가 부족한 우리의 현실에서 간척사업은 필수란 주장이다. 갯벌을 보전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생태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지상의 모든 생물은 먹이사슬로 얽혀 살아가고 있다. 무기물을 먹이로 해서 유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은 식물이다. 바다에서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을 만들어 내는 주된 생물은 식물플랑크톤이다. 동물플랑크톤을 비롯해서 작은 생물들은 식물플랑크톤을 먹고 살아가고 작은 물고기는 동식물플랑크톤과 작은 생물을 먹고 자라며 큰 물고기는 보다 작은 물고기를 먹이로 해서 생육번성해가기 마련이다. 식물플랑크톤이 유기물을 만들어 내는 일은 태양에너지가 근원이 된다. 태양에너지는 바다 물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힘이 약해서 물 속 1m가 되면 55%, 10m는 36%, 100m에선 2%로 급속히 감소한다. 조류(藻類)가 수심 200m 이하에서 살 수 없는 것은 여기에 있다. 갯벌은 물이 찰 때 수심이 수m 이내의 얕은 바다인 데다 식물플랑크톤이 번식하기에 알맞은 수온과 풍부한 무기(無機) 영양염류를 품고 있다. 갯벌은 또한 천연적인 하수처리장이다. 하천으로부터 유입되는 오염물질들은 갯벌에서 분해된다. 이렇게 해서 갯벌 속에 쌓인 영양소는 생물의 먹이가 된다. 간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갯벌의 기초생산력은 연근 해와 대륙붕에 비해 5-10배에 이르며 이를 생물량(biomass)으로 환산할 때 연근 해의 90배, 외양의 300배를 넘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갯벌이 짧은 기간에 만들어 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바다에 생명력을 주는 갯벌은 적어도 수 백년에 걸쳐 만들어진다. 최근 우리나라 연근 해 어업생산량이 크게 감소된 것은 계획성 없는 간척의 결과란 주장이다. 그래서 갯벌은 농지에 비해 3.3배 높은 경제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 연구결과(1996년 12월 한국해양연구소 이흥동 박사)란 설명이다. 갯벌은 생명탄생의 모태(母胎)이자 바다 생물의 보고(寶庫)란 이야기다. 또한 간척사업은 지역 어민들에 대한 보상을 비롯해서 간척후의 수질관리 등 잡다한 문제를 안고 있을 뿐 아니라 비교적 규모가 크고 공사기간이 길어 임야를 개간하는 일에 비해 돈이 많이 든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애초 8천2백억 원이 들 것으로 예상했으나 2조2천1백37억 원으로 대폭 늘어난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란 설명이다. 더욱이 새만금호 수질개선을 위하여 들어갈 추가비용이 수조원대에 이를 것이란 주장이다.갯벌보전과 간척사업을 두고 이와 같이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갯벌과 간척을 보는 시각이 다른데 있다. 생산 가치만을 따지면 간척이 유리하고 환경과 생태계 파괴 문제에 무게를 두게되면 경제적 가치마저 갯벌보전 쪽이 커지는 것은 여기에 있다.따라서 갯벌보전과 간척사업의 추진에 철학을 확립해야한다. 60, 70년대 식의 개발 위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지구적인 차원에서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 비중을 둘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아닌 우리의 후대를 내다본 장기적인 안목에서 종합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사업 초기부터 지역주민과 시민단체, 지자체의 협조와 이해 속에 추진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새만금을 포함한 논란이 되고 있는 모든 간척사업에 대해 종합적인 재검토가 있어야겠다./이광영(전북대 자연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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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8.25 23:02

[전북칼럼] 국민의 정부 후반기 과제

오는 8월 25일은 김대중 대통령의 후반부 임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이를 마라톤에 비유하면 반환점을 도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는 국민의 정부가 국정을 운영할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한다. 무엇이 국정운영의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인가는 전반부 개혁작업의 공과를 평가하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지난 2년 반 동안 국민의 정부는 오로지 '개혁'이라는 화두를 안고 줄기차게 달려왔다. 국민의 정부는 총체적 붕괴상태의 국정을 인수하여 금융, 기업, 노사관계, 공공부문 등 4대 부문에 걸친 대대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을 통해 국민의 정부는 많은 치적을 남겼다. 우선 정권교체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개혁이고 정치개혁의 커다란 계기였다. 한국사회의 위기가 다름 아닌 오랜 기득권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때, 국민의 정부 출범은 그 자체로 정치독점을 깨뜨리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둘째,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를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신속하게 극복했다. 정부는 그 동안 부실금융기관 및 부실채권 정리, 기업개선작업 등 구조조정작업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정부는 성장과 수출, 국제수지, 실업율에서 우수한 실적을 거두었다. 셋째,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종식시키고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서해교전과 같은 일촉즉발의 돌발상황과 햇볕정책을 무위로 돌리려는 수많은 내외의 도전들에 직면해서도 일관된 정책을 견지하고, 마침내 북한을 화해와 협력의 장으로 이끌어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몇몇 개혁조치들은 국민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첫째,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지역주의 극복 노력이 좌절되었다는 점이다. 국민의 정부는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집권초기부터 지역기반을 떠나 능력 있는 인사를 골고루 등용하였다. 그리고 정당명부비례대표제와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여 지역주의적 선거구도를 깨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지역주의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세력들의 저항에 부딪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4.13총선 결과에서 보듯이 지역주의는 오히려 더욱 심화되고 고착되었다. 둘째, 개혁의 피로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최근 의약분업사태, 금융노조파업, 롯데호텔사태 등이 보여주듯이 우리 사회는 분배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본질적으로 우리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럽고 일상화된 현상으로서 그 자체가 우려스러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회의 모든 집단들이 근시안적 이익에 집착하여 서로 공멸의 게임을 벌이는 데 있다. 셋째, 여소야대 정치구도도 문제이다. 우리 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합리적 토론, 대화, 협상보다는 숫자의 대결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현재의 정국은 거의 모든 정치 일정이 차기 대권과 관련한 정국주도권 쟁탈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권이 우리 사회에 속출하는 문제들에 대한 반응능력을 잃고 만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상에서 열거한 실패한 정책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을 갖는다. 애초 국민의 정부가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상당한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문제를 더 크게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태가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이런 문제들을 둘러싼 구조적 장벽이 너무 높은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가령 한국사회의 지역주의는 인사정책이나 몇 가지 제도 개선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훨씬 복잡하고 견고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보다 더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민의 정부가 이런 문제들에 대처함에 있어서 그 정책적 함의를 충분히 고려했는가, 혹은 전략적 숙고가 결여된 채 너무 기계적으로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을 성찰적으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의 정부 임기 후반부는 새로운 개혁과제들을 제기하기보다는 임기 전반부에 이루지 못한 미흡한 개혁과제들을 종합적으로 재점검하고 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국민의 정부 나아가 정권재창출의 향방이 좌우될 것이다.국회의원 이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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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8.11 23:02

[전북칼럼] 인터넷에 소외 당하는 사회계층

옛말에 설움 설움해도 배고픈 설움만한 설움이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런 배고픈 설움은 없어진지가 오래되었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 그리고 잘살아 보세!란 노랫속에 묻혀 우리 주변에서 보릿고개란 말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이런 경제적 어려움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설움들이 우리주변에서 모두 없어진 것이였을까? 아니다. 배고픈 설움은 모면하고나니, 집없는 설움, 못 배운 설움, 남들처럼 놀러다니지 못한 설움, 자가용없는 설움이 생겨났고 심지어 TV 세탁기 냉장고 피아노 없던 설움 등이 시기를 달리해 있어 왔다.이렇게 보면 사람 사는 세상에는 으레 나름대로 설움이 있기 마련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국민소득이 1만불을 오르내려 사는 수준도 높아져 있고, 또한 자유민주주의 세상이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도 균등하게 주어져 있어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되겠지 하는 희망과 노력때문에 그 느껴지는 정도도 엷어지고 성격도 변하여 많이 사라지고는 있다. 그래서 이제는 설움이란 운명론적 어감의 말대신에 사회학적 용어로 상대적 박탈감이니 사회적 소외감이니 계층간 갈등이니 하고 있지만 말이다.그런데 요즈음은 인터넷을 이용 못하는 설움 아니, 소외감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문제다.얼마전에 발표된 통계를 보면 이렇다. 서울, 대도시 중학생의 집에는 92%내외의 컴퓨터가 있는 반면 도시근교는 48%에 불과하고 시골의 경우는 20%에도 못미친다는 것이다. 초고속인터넷망이 깔려 있는 경우도 서울, 대도시에는 55%, 34%에 달하는 반면 도시근교, 시골은 전무한 실정이라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도시지역 학생의 컴퓨터 이용시간은 평균 24시간 인데 비해 도시근교이하 지역은 채 30분이 못되고 있다. 이는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된 것에 불과하므로 성인들에 있어 지역간 불균형 현상은 더욱 심할 것이다.이와같은 인터넷이용 격차는 소득, 지식, 연령(노령층), 성별(주부층) 등 다른 사회경제적 차이와 더불어 더욱 커져서 새로운 소외계층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다.그러면 왜 인터넷이용 격차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가? 다름아닌 인터넷의 사회적 영향력 때문이다. 앞으로 인터넷은 인간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포함한 생활전반에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건 인터넷을 이용 못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얻고 이를 활용할 기회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따돌림당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계층간의 소득격차, 문화격차 문제등을 더욱 심화시켜 사회적 갈등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다. 이런 우려되는 현상을 정보학자들은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정보격차-계층간 단절)란 용어로 경고하고 있다.함께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해결 가능그런데 이러한 우려는 아직 초기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는 해결방법에 있어 도로나 철도등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해 주느냐 마느냐의 투자의지와 같은 문제이고, 이미 치뤄낸 바 있는 문맹퇴치에 있어 주민교육 문제와도 유사하다. 더구나 인터넷인구 즈아에서 보듯 우리 국민은 이 문제에 대한 열망이 매우 높아 있다. 따라서 정부와 사회가 의지를 갖고 투자와 교육에 빨리 손을 쓴다면 얼마든지 해결 가능할 일이다.즉, 당장의 수요나 이익을 떠나 먼 안목으로 농어촌지역까지 인터넷 기반시설을 빨리 확장해 주고 저소득층에 대한 컴퓨터지원을 확대하는 것은 물론 인터넷에 익숙하지 못한 계층에 대한 사회교육 등 지역간, 계층간 인터넷 접속환경과 이용능력을 고르게 높여주는 노력을 기울린다면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다.우리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시대적 설움을 함께 극복해 왔다. 이제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인터넷으로부터의 소외계층 문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 정태원(한국통신전북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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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8.04 23:02

[전북칼럼] 정직성과 미래사회

거짓말하지 마라. 정직하라. 우리의 옛 어른들이 자녀에게 자주 들려준 말이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정직성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강조되고 있다.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는 물론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도 모두 자녀들에게 정직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초등학교 교육은 이웃을 위해 봉사할 것과 정직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17년 전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1년간의 연수과정을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고 있던 때의 일이다. 자동차 보험기간이 6개월이 남아 있어 이를 돌려받으려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했다. 보험회사 직원은 양식을 보내 줄 터이니 공란을 채워 우편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3일 만에 온 양식은 원하는 보험 만료 일시와 돈을 돌려받을 은행구좌를 적고 사인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보험회사를 찾아가 본인임을 증명한다거나 보험을 해지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지만 잔여기간의 보험금이 귀국 후 1달 만에 한국의 거래은행 통장에 정확하게 입금되었다. 귀국하기 3일 전쯤 가스와 전화회사에 전화를 걸어 은행에 자동이체 할 돈을 남겨 놓았으니 떠나는 날 밤 12시를 기해 끊어 줄 것을 요청했다. 모든 처리는 이름을 알려주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특히 전화 안내인은 전화회사로부터 빌려 쓴 전화기는 자신들이 회수할 것이니 그대로 두면된다는 설명과 함께 집을 떠나는 시간이 정확하게 언제인가를 물어왔다. 다음날 아침 10시라고 말하자 밤 12시 이후부터 아침 10시까지 오는 전화는 어느 곳으로 돌려주면 좋겠느냐고 했다.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이웃에 사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 집을 떠나기 직전 직장과 친지로부터 중요한 전화를 세 통이나 받을 수 있었다. 오늘 미국의 힘이 어디로부터 나오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었다.지금 우리는 정보화사회를 맞고 있다. 정보화사회는 컴퓨터와 통신이 결합함으로서 이룩되었다. 하지만 정보화사회는 컴퓨터와 통신이라고 하는 하드웨어와 이를 이용하는 소프트웨어 기술만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정직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성능의 컴퓨터가 초고속 통신망에 연결된다 해도 이를 이용하는 사람이 정직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정보화사회란 정직성이 바탕이 된 신용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는 전자상거래시대에 돌입해 있다. 자유로운 전자상거래시대를 열게 하는 IT(정보기술)헌장이 지난 23일 막을 내린 오키나와 주요 8개국(G8)정상회담에서 채택되었다. 이로 인해서 세계는 벌써부터 전자상거래 시장 장악을 두고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정직성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뿐만 아니라 오늘의 모든 국제관계도 정직성과 투명성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UN을 비롯한 WTO체제는 물론 북한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주는 KEDO 사업도 마찬가지다. 국제관계는 정직성과 투명성이 확보될 때 불확실성을 최소화하여 관련 국가들이 예측 가능한 정책과 전략을 세워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정보화사회와 국제화시대가 가속될 미래 사회는 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할 때 발전은 물론 지탱자체도 어렵게 될 것이다. 정직성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갖춰야 할 대단히 중요한 사회윤리이자 규범이 된 것이다.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 나라는 화재와 범죄 신고전화를 장난 삼아 거는 통에 업무에 큰 지장을 받고 있다. 이로 해서 오는 경제적 손실 또한 적지 않다. 작금의 정치부재와 금융시장의 불안에서 노사와 노정 대결 등 각종 사회적 불안과 갈등도 근원은 정직성이 문제된 것들이다. 미래 사회는 정직성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바로 설 수 없다. 우리의 정치경제사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도 정직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회에서 거짓을 몰아내는 일은 밝은 미래사회 건설을 위해 반드시 이룩해야 할 필수 조건이다. 우리 모두가 정직성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선진사회 진입은 물론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이 어둡다. 가정과 학교사회직장은 물론 정치권이 정직성회복을 위해 발벗고 나서야할 때다./이광영(전북대 과학학과 초빙교수 /과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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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7.28 23:02

[전북칼럼] 남원과 바이로이트

바이로이트는 독일의 한 작은 도시로 작곡가 바그너의 고향이다. 이 바이로이트에서는 매년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가 열리는데 전세계로부터 바이로이트 음악 연주가들이 대거 몰려들어 축제 기간 중에는 큰 혼잡을 이룬다. 특히 바그너의 오페라들은 예약표를 구하기조차 하늘의 별 따기이다. 오죽하면 바이로이트는 바그너로 먹고 산다는 말이 나왔겠는가.독일의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를 떠올리다보면 내 고향인 남원이 생각나곤 한다. 남원 역시 한국적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춘향전의 고향이자 판소리 동편제의 탯자리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남원은 예향중의 예향이라 할 수 있다. 도자기와 목기 같은 공예품이 활발하게 생산되어졌고 합죽선의 생산지로도 이름이 높았다. 임란 때 끌려간 남원 출신의 도공 심수관은 일본사회에서 그 뛰어난 도예 기량으로 신화적인 인물로 추앙 받을 정도였다. 그 땅에는 독특한 예(藝)의 정신이 면면히 흘러오고 있다고 보여진다. 산업사회에 와서 그러한 도도히 흐르던 예의 정신과 기질이 어느 정도 단절 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건과 계기가 마련되면 얼마든지 다시 부흥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남원과 같은 도시를 아예 <문화특구>로 설정하여 발전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앞으로는 한 지역이나 도시도 특화되어야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다. 문화의 세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는 문화 특구라고 불릴만한 도시가 마땅치 않은데 남원 같은 도시는 그런 점에서 문화도시로 클 수 있는 잠재력이 참 큰 것 아닌가 싶다.남원역 주변에 사라진 <객사>를 복원시키고 <판소리 박물관> <도자 박물관> <심수관 기념관> <옹기 박물관> 같은 전시 공간을 만드는 것도 미래의 문화도시 남원이 해야할 일들이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춘향전>을 국제적 오페라 차원으로 꾸며 춘향제 때는 물론 연중 무휴로 공연을 하게 하는 것이다. 세계가 이제 한 마당인데 좋은 구경과 아름다운 예술이 있는 곳이라면 많은 세계인들도 불원천리 찾아올 것이다. 남부 독일의 한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에 바그너의 음악혼을 찾아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 듯 한국 오페라 <춘향전> 구경을 위해 세계인들이 철철이 남원을 찾는 것도 결코 허황한 꿈일 수 만은 없는 것이다./김병종 (화 가,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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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7.21 23:02

[전북칼럼] 국정운영의 난맥상

한달 전 필자가 본란의 칼럼을 쓸 때는 모든 국민이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에 환희와 희망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그 후 한 달은 의약분업사태, 롯데호텔, 국민건강보험공단, 금융노조의 파업 등 "사태"의 홍수 속에서 국민들은 짜증스럽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초유의 금융대란을 가까스로 피하면서도 안도해 하기보다는 다음에 또 무슨 "사태"에 시달려야 할지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최근에 밀어닥친 각종 사태는 우리 사회가 다원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불가피한 현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집단들간의 이익갈등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적 사건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권위주의체제에서는 집단간의 이익갈등이나 집단적 이익표출을 정부의 공권력으로 억압해서 잠재웠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최고 이념으로 표방한 '국민의 정부'에서는 집단적 이익갈등을 조정통합하여 사회전체의 공익과 합치시키는 것이 국정운영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국정운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과제는 권위주의적 문제해결방식으로 회귀하려는 충동을 억제하고 끈질긴 대화와 협상, 인내와 설득을 요구하기에 매우 어렵고 긴 시일을 요한다.그런데 우리 정부나 정치권은 아직 집단적 이익갈등의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과 규칙을 완비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집단이익의 표출이 종국에는 '사태'나 '파동'으로 변질되고 마는 악순환을 거듭해 왔다. 이 같은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정부의 신뢰가 상실되고 정부의 권위가 흔들려서, 걸핏하면 최종적인 문제해결자인 대통령에게 모든 문제가 집중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이런 악순환의 사슬을 끊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문제해결능력의 전략적 지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앞서 민주화된 다원사회에서의 정치의 본래적 기능이 집단이익의 조정통합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속에서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중의 하나가 바로 문제해결능력으로서의 '전문성'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정치과정으로 끌어들여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치수준이 권위주의체제에서의 투쟁수준을 벗어나 정책산출의 장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정치권은 다원적 갈등해결을 위한 전문성 제고, 조정능력향상, 민주적 절차의 확립, 행정체제의 전체적인 시스템 능력을 제고시키는 데 아무런 기여도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정치권의 이런 문제 때문에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불가불 관료적 해결방식으로 주로 대처하고 있다. 그러나 관료적 해결방식은 각종 이익집단들간의 분배적 욕구에 제대로 반응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관료집단은 본질적으로 정책의 집행단위이지 국가의사결정의 단위는 아닌 것이다. 국가정책의 집행단위가 시민들의 이익표출에 곧바로 노출될 때, 국가의 정책내용은 이리저리 기운 누더기처럼 되고 만다. 따라서 정치권이 의사결정과정에서 각종 이익집단들과의 충분한 토론과 심의, 조정을 거쳐 정책집행의 방향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율적 합의를 이끌어 낼 때, 정부의 정책추진에 과부하가 해소되고 일관성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필자는 국정운영에서 정책문제채택(agenda-setting) 능력의 한계를 절감한다. 국정운영에서 사회문제의 경중과 완급을 따져 우선 순위를 설정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할 때 국정운영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고 개혁을 체계화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필자는 개인적으로 의약분업 문제의 채택이 시기적으로 옳았는가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마지막으로 필자는 시민사회가 좀 더 성숙된 모습을 보여줄 것을 당부하고자 한다. 모든 집단들이 각자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강제하려 할 때, 결국은 그 피해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회전체의 공동번영의 관점에서 자신의 요구를 자제하고 조율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국회의원 이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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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7.14 23:02

[전북칼럼] 지역경제 활성화 새로운 대안

인텔의 앤디그로브 회장은 "향후 5년이내에 어떠한 형태로든 인터넷을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고 공언하고 있다.실리콘밸리의 회사들도 앞으로 대부분의 거래를 전자상거래로 진행할 것이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납품기회조차 갖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 정부도 모든 공공부문의 조달업무를 전자상거래 기반 위에서 구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렇듯 인터넷의 보급, 확산과 더불어 전자상거래의 중요성은 개인,기업, 지역경제에 걸쳐 매우 커지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개인과 기업,정부 등이 전자적 거래를 통해서 상품과 서비스를 주문하고 대금을 청구,지불 하는 등 가상공간에서의 상거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게될 것이며, 머지않아 기존시장에서의 거래액을 앞서게 될 것이다.그러면 이러한 전자상거래는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전자상거래의 일종인 인터넷 쇼핑몰의 예로 인터넷 백화점에 접속해보자. 거기에는 갖가지 상품이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고 소비자는 원하는 상품을 골라 주문을 할 수가 있다. 그런 다음 회원아이디와 비밀번호 입력 등 일종의 신분확인을 거치고, 지정된 방식으로 대금을 결제하고 나면 짧게는 몇시간,길어도 몇일 후면 주문했던 상품을 배달 받을 수가 있다. 인터넷 속에 있는 상점이나 기업체에 가서(실제로는안방에서 PC와 연결하여)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는 것과 흡사하다.이러한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되면 개인과 기업 모두에게 비용절감의 효과가 있음은 물론이고, 기존시장과는 달리 물리적,공간적 제약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기업의 경우,거래를 할 때마다 만들어야 했던 제품소개 카달로그나 물건을 파는 판매사원이 필요 없게 되고,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모두 시간과 지리적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여 먼거리를 오고가는 수고도, 매장마다 가격을 체크하고 돌아다니는 수고 없이도 단 몇 분안에 쉽게 나라 안팍,세계 각 지방에 널려있는 값싸고 질좋은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전자상거래의 특성인 지리적 제약의 탈피, 편리함, 용이함 등이 보다 경쟁력 있는 기업,지역,상품 등 강자는 살아 남고 약자는 쇠퇴의 길을 걷게된다는정글의 법칙으로 작용될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더구나 지역경제와 관련하여서는 이러한 전자상거래의 특성이 몰고 올 지역시장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그 예상되는 변화속에는 심각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서울이나 다른 선진지역에 몰려 있는 막강한 경쟁력과 전국적 유통망을 가진 기업의 값싸고 질좋은 우수한 상품이 시간과 지리적 거리를 초월하여 인터넷 속에서 판을 치게 될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본이나 서비스 경쟁력에서 뒤진 소규모의 유통점(가게)들이 외지의 대형 할인매장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과 같다. 전자상거래를 위시한 인터넷 경제하에서는 " 어느 지역경제든 거기에 맞게 발빠르게 변화하지 못하면, 그 지역경제는 보다 경쟁력이 높은 중앙경제나 다른 선진지역 경제에의 예속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다" 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보호차원에서 전자상거래 경제제체로의 체질변화를 타지역에 비하여 앞당길 수 있는 노력이 시급한 시기다. 이에는 우리 지역 고유의 특성과 특색을 살린 상품을 개발하고 이를 특화시켜 전국, 나아가서는 세계 전자상거래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예로부터 우리 지방은 맛과 멋 그리고 소리를 바탕으로 한 고유한 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리고 자연경관은 그대로 관광상품이다. 고을마다에는 어느 지방에서도 볼 수 없는 특산물이 산재되어 있다.이를 기반으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지역도 흉내낼 수 없는 상품을 개발하여 전자상거래 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들만이지역경제를 위한 전부라 할 수는 없다. 산업 전반에 걸쳐 타지역에 못지 않은 경쟁력을 갖춘 다양한 상품개발 노력도 함께 기울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세계무대에 내다 팔 전자상거래 업체의 육성에도 힘써야 한다.전자상거래는 가상의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상행위다. 따라서 이에는 반드시 신용문제와 불법,음란상품의 범람 등의 부작용도 뒤따른다. 그러므로 순박한 인심과 미풍양속을 간직한 지역적 자부심을 전자상거래 시장에서도 십분 발휘하고, 앞에서 언급한 우리 고장의 문화상품, 관광상품,지역특산물 그리고 여타의 우수한 제품을 가지고 나선다면 걱정할 것만은 아니다. '지방색은 그 지역의 경쟁력인 것이다우리 모두 단단한 각오로 지금까지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이 지역경제를 만회케 해줄 새로운 기회로 삼고 노력할 때다./정태원 (한국통신 전북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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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7.07 23:02

[전북칼럼] 포스트 '게놈' 시대

세계는 지금 인간게놈지도 완성 소식에 크게 흥분하고 있다. 인류가 마침내 생로병사의 비밀을 간직한 판도라 상자를 열어 무병장수의 꿈을 실현하게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보도 대로라면 인류는 곧 암치매에이즈당뇨고혈압천식과 같은 난치병을 극복하고 의료제약농업축산환경 등 관련 산업분야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머지 않아 인공생명체도 만들어낼 전망이다. 그러나 인간게놈지도 완성이 곧바로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것이란 성급한 기대는 금물이다. 인간게놈지도 완성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인간게놈지도 완성은 인간게놈 프로젝트(HGP: Human Genome Project)의 산물이다. 인간게놈 프로젝트는 인간이 가진 모든 유전자의 염기(鹽基)서열을 파악하고 각 유전자의 역할을 규명하는 연구로 1990년 미국이 주동이 되어 착수, 30억 달러를 투입해서 2005년에 완성할 계획이었다.미국은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많은 돈과 기술 그리고 인력을 필요로 하는 대형 연구과제이어서 영국을 비롯한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선진 18개국 350여 연구기관이 참여하는 국제 공공 컨소시엄을 만들어 이를 진행해왔다. 인간게놈지도 완성이 계획보다 앞당겨진 것은 이 계획에 동참했던 크레이그 벤터 박사가 민간기업(셀레라 제노믹스)으로 옮겨가 획기적인 염기서열 분석법(shot-gun methode)을 개발함으로써 가능했다. 게놈(genome)이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의 합성어로 생명체가 필요로 하는 단백질을 만들기 위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유전자를 포함하는 모든 DNA를 의미한다. DNA는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 nucleic acid)의 약어로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효소 등 각종 단백질의 생산을 지령, 제어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물질이다. DNA의 역할은 속에 간직하고 있는 네 가지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 염기의 배열이 갖는 암호에 의해 결정되며 생물의 종(種)은 바로 이 염기배열 차이로 생겨난다. 사람의 DNA는 약 30억 개의 이들 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인간게놈지도의 완성은 바로 이들 염기서열을 밝혀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게놈 활용 연구는 이제부터이다. 인간게놈지도를 바탕으로 30억 개의 염기서열 중 10만에서 15만개로 추산되는 유전자를 찾아내 이들의 구조와 기능을 밝혀, 이용법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게놈 프로젝트는 선진국들의 유전정보 독점과 특허권 확보를 통한 기술패권주의를 한층 심화시킬 것이다. 동식물 유전자 확보를 위한 쟁탈전이 이미 선진국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로 해서 선진국과 제3세계와의 빈부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선진 각국은 포스트 게놈시대를 대비해서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 있다. 우리 나라는 인간게놈지도 작성분야에서 선진국에 크게 뒤져있다. 하지만 인간게놈은 사람마다의 특성이 있기 마련이어서 우리의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유리하다. 우리도 이런 면에서 포스트 인간게놈 연구에 국가적인 뒷받침이 있어야겠다.한편 인간게놈 연구와 활용은 종교와 윤리도덕법률 등 분야에서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인간 유전자 정보가 알려졌을 때 나타날 문제만 해도 간단치 않다. 태아가 유전자 진단을 통해 결함이 발견되었을 때 유산시킬 가능성이 높고 정보가 밖으로 유출될 때 취업과 보험가입에 불이익이 초래될 수 있다.또한 유전자조작을 통해 생물계가 급격하게 바뀌어갈 때 생태계에 큰 혼란을 일으켜 인류의 종말을 재촉할 수도 있다. 유전자변형식품이 세계 곳곳에서 말썽을 빚고 있는 것은 여기에 있다. 인간게놈연구가 인류 복지에 활용되기 위해서는 안전성 확보는 물론 오남용을 막기 위한 확실한 제재책과 함께 지속적인 과학적 평가와 감시체제를 구축하는 등 유전자 조작에 대한 조례를 마련해야한다. 그리고 인간게놈 기술의 활용에는 대다수 사람들의 동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광영(전북대 자연대 초빙교수/과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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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6.30 23:02

[전북칼럼] 시인의 땅

얼마 전 김용택 시인으로부터 책 한 권을 받았다. 「촌아 울지마」라는 산문집이었다. 김 시인은 논농사 밭농사 지어 도회의 아우에게 올려 보내주는 고향의 장형처럼 마암 분교와 진메 마을과 섬진강 주변에서 지은 글 농사로 책을 묶어 서울의 내게 한 권씩 보내주곤 한다. 특히 책의 겉 표지를 들추면 아주 짧고 간결한 계절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이번 「촌아 울지마」라는 책에는 강가에 붓꽃이 예쁘게 피었노라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일찍 고향 떠나 도회지의 아스팔트에서만 맴돌았던 나는 붓꽃이 어떻게 생긴 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붓꽃이 피는 강가에서 사는 시인은 참 행복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김 시인의 시나 산문에서는 한결같이 흙 냄새가 나고 물소리, 바람소리가 들리고 꽃향기가 번져온다. 서울의 한쪽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길에 채이지 않으려고 모질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고향 떠나온 나 같은 사람에게 김 시인의 화신(花信) 담긴 책은 반갑기 그지 없다.특히 이번 「촌아 울지마」라는 책은 받아드는 순간 그 제목에서부터 가슴이 찡해 왔다. 언젠가 읽은 김 시인이 엮어낸 「콩, 너는 죽었다.」라는 제목에도 감탄을 했는데 '촌아 울지마'라는 책 제목에는 책의 모든 것이 다 함축되어 있는 듯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흙을 떠나고 촌을 떠나 도회로 도회로만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온갖 어지러운 풍경들이 나무하게 되는 요즈음 우리들이 버리고 온 촌은 서럽게 눈물지을 것만 같다.가끔 속세를 떠난 수도자의 글 중에는 깊은 산 석간수처럼 시리고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글들이 있지만 생활의 애환과 흙 냄새가 나지 않는데 반해 김 시인의 글에서는 삶의 자잘한 감동과 갈등들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어 감동을 준다.김 시인이 나같이 서울에서 살게 되어도 그처럼 맑고 영롱한 그러면서도 어쩐지 뭉클한 글을 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마암 분교가 있고 진메마을이 있고 섬진강이 있어 시인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그러고 보면 전북은 시인이 잘 되는 곳이 아닌가 싶다. 김 시인 말고도 안도현이나 박남준 시인처럼 전국적으로 독자를 지닌 시인들이 전북에 유난히 많기 때문이다. 전북은 다른 도에 비해 도세(道勢)도 좀 약하고 재정 상태도 그리 튼실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글이 잘되는 시인의 땅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한 문향(文鄕)이 우리들의 고향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운가.그러니 조금쯤 약하고 조금쯤 가난하게 산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더구나 눈물 흘릴 이유도. 속으로 가만히 되뇌어 본다. 「촌아 울지마, 전북아 울지마.」/김병종(화가, 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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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6.23 23:02

[전북칼럼] 남북정산회담과 향후 과제

2000년 6월 13일. 남북 7천만 국민이 환호하고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북정상간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양체제간 대결 속에서 막대한 물자 낭비와 정신적 피로감에 시달려야 했던 지난 반세기의 세월들이 이 날만은 한낱 신기루와도 같이 느껴졌다. 대통령을 최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햇볕정책 입안에 참여했던 필자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회와 함께 회담의 성공을 염원하고 또 염원하는 마음으로 정상회담 내내 가슴 벅찬 나날들을 보냈다. 남북정상은 6월 14일 회담에서도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양 통일방안의 공통성 인정, 8.15 친척방문단 교환, 경제협력을 통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다방면 교류, 합의 실천을 위한 당국간 대화에 합의 서명하였다. 이는 양 체제의 현실적 입장을 십분 고려하면서도, 사실상 남북관계의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상호대립과 분단의 55년사를 청산하는 단계에 돌입하였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성과는 그 동안 우리 정부가 대북 정책에서 보여준 냉철한 상황 판단과 이를 뒷받침하는 확고한 비전, 인내, 의지의 산물이었다. 서해교전사태 등 여러 번의 돌발적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결국 북한이 대화의 장으로 나올 수밖에 없게 한 우리 정부의 끈질긴 노력이 주효했던 것이다. 사실 북한이 남북간 대화에 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북한이 겪고 있는 혹심한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측의 도움이 필연적이었다. 또 북한이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의 한계를 스스로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에게도 중요한 이해관계가 걸린 것이었다. 즉 정상회담은 김정일에게 김일성 주석의 유훈(遺訓)과업을 완수했음을 대내에 과시함과 아울러 새로운 비전과 스타일의 리더십을 갖춘 '강성대국' 중흥의 유일 지도자임을 만방에 과시할 수 있는 기회이다. 바로 이 같은 요인들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정확한 판단과 유연한 대처가 마침내 북한을 화해협력통일을 향한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번 회담의 성과를 실질적인 관계개선으로 이어가는 여정에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북한의 내부구조는 급격한 변화를 수용하기에 너무 많은 제약요인들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개혁을 주도할 세력이 미약하다. 당은 무기력과 타성에 젖어 있으며, 군부, 국가보위부 등 사회통제를 담당해 왔던 세력들은 그 속성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내부의 힘은 그 사회의 모든 면에 걸쳐 막강한 카리스마를 구축하고 있는 김정일 자신에게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북한 사회의 변화는 가느다란 줄을 타고 발빠르게 움직여 나가는 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이 제약된 조건하에서 북한이 남북화해의 노선을 꾸준히 추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쪽의 현명한 대처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첫째, 이번 정상회담이 일회성 거품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북간에 신뢰를 더욱 확고히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래의 감정에 사로잡혀 모처럼 이끌어낸 대화의 장 밖으로 북한을 몰아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둘째, 정치권의 초당적 협력이 중요하다.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폄하하는 식의 정쟁이 우리 정치권 내에서 계속 재현되고, 남북정상회담의 당사자인 김대중 대통령의 정국장악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할 때 그들은 또 다시 머뭇거릴 것이다. 셋째, 남북 해빙의 길은 멀고도 험할 수밖에 없다.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돌발 변수가 발생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연하고 확고한 태도이다. 지난 서해 교전 사태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하는 확고한 대처와 함께 포용력을 잃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넷째, 한미일 공조를 굳건하게 유지해야 한다. 한미일 공조는 남북간 화해 통일을 위해 국제사회의 이해와 협력을 구하는 매우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틀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그에 대한 북한의 오해를 불식하고 한미일 공조가 전체 민족의 이익과 합치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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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6.16 23:02

[전북칼럼] 건강한 사이버 환경 만들기

부산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 수사반은 해킹프로그램으로 남의 인터넷 게임 아이디(ID)와 비밀번호를 알아낸 뒤 그 사람의 게임 전리품을 훔친 혐의로 중학교 3학년 권 모군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는 지난 5월 29일자 한 일간지에 게재된 기사의 일부이다.이제는 이처럼 물리적인 힘의 작용이나 지리적 공간의 이동이 없이도 물건을 훔치는 것과 같은 '이상한 유형의 사건들'이 컴퓨터 키 조작만으로 사이버 세상에서 간단하게 벌어지고 있다.사이버 테러,폭력,시스템 폭파,사기,상도의를 무시한 전자상거래 등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사이버 범죄의 심각성을 잘 일깨워 주는 통계도 많다. 지난해 우리나라 기업,정부기관,대학,개인이 사이버 테러를 당한 경우가 1천6백여건에 이르고 이는 전년의 7배에 달하는 수치라는 보고와 우리나라 학생의 17.8%는 성폭력 경험이, 77.1%는 음란정보나 포르노 정보를 경험했다는 조사결과가 그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국내 총 범죄건수는 전년도에 비해 3.4%가 감소한 반면 사이버 범죄는 오히려 4배가 증가했다는 통계도 있다.인터넷 인구의 급속한 성장세를 감안한다면 그 확산 속도는 더 빠를 것이 자명하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나 안이하고 순진하게 사이버 세상의 도래를 바라고 있었다는 반증들이기도 하다. 인터넷이 가져다주는편익만 찬미했을 뿐 그 폐해에 대한 대책 마련에는 소홀해 왔음이다.우리는 흔히 전쟁,범죄,비윤리적 행위 등은 인간의 속성이 바뀌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그리고 인터넷의 속성이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많다는 점이다. 사이버 범죄자인 해커(Hacker)등을 오히려 영웅이나 재주꾼으로 바라봄으로써 사회적으로 죄의식을 이완시킨다든지 사이버상의 윤리성 실종을 우리 스스로 방조해 오고 있는 것이다. 'O양 비디오 사건' 등에서 우리는 그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인터넷이 개인과 기업 국가경쟁력의 관심사가 되고 이를 정책적으로 장려하는 과정에서 그 역기능은 무시되거나 필요악 정도로 치부되는 경향도 문제다.사이버상의 범죄도 강도나 절도처럼 반드시 처벌받아야 하고 윤리적 타락도 사회적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우선 이를 방지하고 단속하기 위한 정부차원의 법제정과 정비가 시급하다.나아가 근본적인 문제의 차단과 단속을 위한 시스템 보안장치의 마련도 서두를 필요가 있다. 정부가 직접나서서 투자에 앞장서는것은 물론이다.인터넷 세상에서는 국경을 넘나드는데 비자가 필요없다. 따라서 여러유형의 범죄나 윤리적 오염행위를 방지하고 단속하는 일은 더 이상 어느 한 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민간차원의 사회운동도 함께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터넷상에서 존재하고 있는 여러 논란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고 이를 규범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해커들의 알권리에 대한 과도한 주장이나 최소한의 정보제한 원칙,불건전정보 단속기준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이러한 합의는 하루 빨리 사회운동을 통하여 실천에 옮겨져야한다. 사회단체들은 기존의 활동영역을 넓히고 또학부모,주부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이버 방범대와 같은 자치조직의 결성을 통하여 일정부분의 역할을 담당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 어떤 노력들보다도 중요한 것은 윤리적 인간성 회복에 대한 사명감이다. 그래서 비록 '낙원같이 아름다운 사이버 세상'은 아니더라도 그 속에 건강한 문화만이라도 살아 숨쉬게 하여야 한다.제러드 반 더 룬은 이런 소망을 '인터넷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건설된 인류 최초의 자유로운 세계공화국이다.이 공화국은 인류 모두의 것이다. 다만 그것을 지킬 수 있을 때만 그렇다.'라고 말하고 있다./정태원(한국통신 전북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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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6.09 23:02

[전북칼럼] 대통령과 과학기술

통치자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지원은 국가과학기술발전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는 독재 국가에서는 물론 현대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같다. 우리는 이 같은 사례를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중반이후 미국 역대 대통령의 상당수가 과학기술에 큰 관심을 갖고 많은 지원을 했다. 루즈벨트의 원자탄개발, 아이젠하워의 고속도로건설, 케네디의 인간 달 정복, 닉슨의 암 정복사업, 레이건의 별들의 전쟁 프로젝트는 좋은 사례로 꼽힌다. 클린턴 정부의 정보고속도로건설과 신세대차량개발계획도 그 중의 하나이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이와 같은 관심과 지원은 바로 미국 과학기술 수준을 세계 정상의 자리로 끌어올렸다. 미국은 특히 2차 세계대전이후 기초과학육성에 큰 힘을 기울였다. 미국이 1943년에서 1996년까지 53년 동안 과학부문 노벨상 수상자를 자그마치 168명이나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같은 기간 영국은 68명, 독일 55명, 프랑스 24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미국이 오늘 세계를 이끄는 슈퍼파워로 우뚝 서게된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 대통령의 공이 컸다.프랑스의 과학기술을 말할 때 드골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드골은 1958년 제5공화국 대통령이 되자 '불란서의 영광'을 내걸고 대전 중 각국에 흩어졌던 과학기술자들을 모아 국립과학연구센터(CNRS)를 설립하고 우주항공원자력해양에너지자원 등 분야에 집중 투자했다. 오늘 프랑스가 이들 과학기술 부문에서 세계 첨단수준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드골의 정책에 바탕을 두고 있다.일본의 많은 총리들도 패전 후 과학기술발전을 위해 큰 힘을 기울였다. 역대 총리들은 과학기술청 장관에 거물급을 포진시켜 일본의 과학기술발전을 주도해갔다. 과학기술청 장관을 지낸 인사 가운데 6명이 총리가 된 것은 일본의 통치자들이 과학기술에 보인 면면을 잘 보여준다. 일본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단시일 내에 경제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과학기술발전 정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우리의 과학기술은 60,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보인 관심과 지원으로 불모상태에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우리의 통치자가 과학기술에 보인 관심과 지원은 미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대해 관심은 많은 것 같으나 실질적인 뒷받침이 아쉽다는 것이 과학기술계의 지적이다.과학기술진흥 없이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제 교과서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세계는 지금 산업화사회에서 정보화사회, 지식기반사회로 옮겨가는 변혁기를 맞고 있다. 시대의 변혁기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라와 민족의 부침(浮沈)이 이 시기에 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한편 우리는 과학기술이 전국민의 의식과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고서는 경제 사회 발전을 효과적으로 이룩해 갈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1세기 정보화사회, 지식기반사회를 제대로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논리나 경제논리로서는 어렵다. 21세기는 과학기술정신 다시 말해서 창조성과 합리성능률성정확성정직성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지탱해 갈 수 없다. 전북대에 '과학문화연구센터'를 설치한 것은 이 같은 이유이기도 하다.오늘의 정치지도자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이 같은 현실과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고 과학기술력에 바탕을 둔 경제사회발전책은 물론 과학기술정신에 바탕을 둔 국가 경영전략을 마련해야한다. 이는 중앙정부 뿐 아니라 지방정부도 같다./이광영(전북대 초빙교수과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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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6.02 23:02

[전북칼럼] 전북의 힘

나라마다 지역마다 각기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영국 같은 나라는 정치 제도에서 그리스와 같은 나라는 조각예술 분야에서 일본과 같은 나라는 경제에서 그리고 인도와 같은 나라는 종교와 철학에서 그 특장을 잘 발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에 내놓아 손색없고 앞설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일까를 곰곰 생각해 보는 때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술과 같은 분야가 아닐까 싶다. 한국인은 확실히 천분의 예술적 감각을 지니고 있고 그점은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인정한 바이다. 특히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는 한국의 이름없는 도공이 빚은 막사발 하나도 끔찍한 예술품으로 받들고 아꼈던 것이다. 그들 일본 민족이 도저히 따라 올 수 없는 그 어떤 예술적 재능을 우리 민족은 가졌던 것이다. 그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 그 중에서도 호남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전북의 문화예술적 자질을 함께 논하지 않을 수 없다.전북은 도세가 약하고 그간 정치적으로도 큰 빛을 못보아 발전이 더디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지나친 속도의 산업화, 공업화로 인한 후유증을 비교적 덜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는 산업 폐기물이나 공해 환경으로 심한 몸살을 겪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도저히 치유나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에 와 있는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오래오래 살아 갈 타전들이 병들게 되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지난 10여년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염이 덜한 호남쪽을 이상향처럼 찾아 들었다. 자연환경 뿐 아니라 선조들의 뛰어난 문화 유산까지 함께 있어서 호남은 한반도의 마지막 살만한 땅으로 인식되어졌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전북이 그렇게 인식되어졌다.그렇다고 해서 나는 우리가 자족하고 있어서만은 안된다고 생각한다. 문화 전북의 특성화에 의해 보다 경쟁력 높은 지역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공장의 굴뚝에 연기 한 줄 내지 않고도 순전히 문화만을 수출해서 잘 사는 나라나 도시는 수없이 많다. 프랑스의 파리는 피악(FIAC)이라는 현대미술견본시장을 열어 일주일 못되는 기간 동안에 일본의 도요다 자동차가 1년내내 전 유럽에 자동차를 팔아 남기는 수익금을 웃도는 이윤을 얻고 있다. 바그너의 고향인 독일의 바이로이트만 하더라도 바이로이트 축제로 인해 전세계 애호가들로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선비도시이자 양반도시인 전주를 비롯, 판소리 동편제의 탯자리인 남원과 시인 매창의 땅인 부안, 선운사와 서정주의 고창 등 전북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화 자원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 문화 자원들을 적극 개발하여 국내는 물론 세계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그래서 문화 전북의 기상을 날려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북의 힘은 문화에 있다./김병종(화가, 서울대 미대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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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5.2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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