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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김연아 금메달, 자본과 주류의 인정 - 전용배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21회 동계올림픽이 17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폐회되었다. 우리나라는 금6, 은6, 동2개로 동계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지난 4년간 견디기 힘든 훈련을 제대로 소화한 선수들의 공이 가장 크다. 이번 대회에서 주목할 점은 쇼트트랙에 한정되었던 메달이 빙상 전 부분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역대 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쇼트트랙, 피겨 등 빙상 전 부분에서 금메달을 동시에 획득한 나라는 미국과 캐나다 밖에 없다.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스키, 스노보드, 크로스컨트리, 스키점프 등 설상부분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여기에서 질문하나. 역대 동?하계올림픽에서 수많은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유독 김연아의 금메달에 가장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제'(女帝), '여신'(女神)으로까지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국민들이 유독 피겨스케이팅을 좋아하기 때문이어서. 아니면 김연아가 너무 미인이라서. 피겨불모지에 나타난 천재에 대한 경의(敬意)인가. 아니다. 거기에는 '화폐'라는 숨은 그림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역사적으로 동계올림픽은 '선진국, 백인, 귀족'이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특히 설상종목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스피드스케이팅도 장거리는 '그들만의 리그'였다. 이번 대회에서도 한국, 중국, 일본을 제외하면 20위권 안에 랭크된 나라는 모두 서방선진국이다. 1992년부터 채택된 우리나라가 유독강한 쇼트트랙은 '이방인의 스포츠'일 뿐이다.장면하나. 1992년 세계쇼트트랙 선수권대회가 미국 덴버에서 있었다. 우리나라는 남자 전 종목을 석권하고, 여자부분도 개인종합 1위를 했다. 그럼에도 당시 개최도시 덴버의 지역신문에서도 제대로 취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그래도 세계선수권인데 개최도시, 지역 언론에서도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은 백인들의 선호도가 떨어지고, 돈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쇼트트랙은 동계종목 중에서도 소외받는 종목이었다. 주류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김연아의 올림픽 금메달이 가지는 함의는 서구주류 언론의 관심이다. 역대 동?하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수많은 금메달을 땄지만, 서구주류 언론으로부터 관심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심지어 황영조의 금메달마저. 전통적으로 올림픽에서, 서구 특히 미국인들의 저녁밥상머리에 올려지는 종목은 하계올림픽에서는 육상, 수영, 체조 등이며, 동계올림픽 종목은 피겨와 알파인 스키 등이다. 고액을 중계권료를 지불하는 서구 메이저 방송은 철저히 상업적이다. 오직 관심 있는 종목에만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다. 따라서 국내언론도 이러한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올림픽 금메달도 '가치와 금전'에서 사실은 굉장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우리나라 국민들이 평소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을 좋아해서, 김연아와 박태환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그들이 서구 언론에서 주목을 받기 때문에 더 열광하는 것이다. 변방은 항상 주류의 관심에 목말라 할 수 밖에 없다. 주류가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끼리의 '자화자찬'에 지나지 않으니까.스포츠는 자본과 결합하면서 보다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경기력만큼이나 상업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가장 먼저 간파한 곳이 스포츠마케팅 회사이다. 사실 김연아와 박태환은 소속사가 같다. 프로선수가 아닌 김연아와 박태환을 몇 년 전에 입도선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이들이 좋은 성적을 낼 경우 얼마나 큰 가치를 생산할 것인지 이미 기업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는 돈을 외면할 수가 없다. 의미가 있건 무의미하건 그건 운명이다. 따라서 스포츠에서도 종목 간 불균형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한쪽은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해도 '굶주리는' 상황이고, 한쪽은 등장만으로 돈이 몰린다. 이러한 구조는 우리가 만든 게 아니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그들이' 만든 구조이다.동계스포츠는 근본적으로 인프라 구축에 재원이 많이 든다. 자연환경도 따라야하고, 장비도 고가(高價)이다. 따라서 저변확대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설상종목은 훈련만으로 극복하기에는 자연환경이 따라주지 못한다. 경기력 수준을 높이려면 최소한 10년이 더 필요하다. 짧은 시간에 가능한 건 그래도 스피드스케이팅, 피겨, 쇼트트랙과 같은 빙상부분이다.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가장 큰 성과는 빙상 전 부분의 금메달획득이고, 어쩌면 김연아 때문에 한국도 동계스포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주류사회에 처음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이다./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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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3.05 23:02

[금요칼럼] 100년 인생을 설계하라 - 이영탁

얼마 전 공기업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곧 임기가 끝나간다기에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랬더니 별 계획이 없다면서 이제 나이도 60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좀 쉬어야겠다고 하였다. 그제야 이런 말을 하였다. 지금까지 30년 정도 일했을 것 아니냐. 그것도 대단한 일이다. 지금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판에 30년을 쉬지 않고 일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렇다고 지금부터 쉬겠다고? 앞으로 얼마나 살 것 같은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적어도 90까지는 살 텐데, 30년을 쉬겠다고. 그건 과거에 70정도 살다가 죽을 때나 하던 소리가 아닌가.그렇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이다. 과거의 사고에 갇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나이가 60이 된 사람은 일생을 통틀어 볼 때 절반 밖에 일하지 않았다. 앞으로 30년이나 남은 인생을 두고 일할 생각은 않고 놀 궁리나 하고 있는 것은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인생 후반 에 30년을 놀다가 간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하겠는가. 이런 인생을 두고 과연 보람 있는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지난 1960년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52세였다. 그러던 것이 2008년에는 80세가 되었다. 요즘은 매년 0.5세씩 올라가고 있다. 이런 식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난다면 앞으로 90세, 100세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 문제는 오래 산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행복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 그러자면 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잘 준비하는 자만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아가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각자의 취향과 형편에 따라 방법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금부터 남은 인생을 제대로 설계하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기 인생을 아무런 계획 없이 살아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어떤 미래학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미래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방향감각 없이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것과 같다고.미래를 설계하지 않고도 각자의 인생은 전개되고 삶은 이어진다. 그런 인생의 미래를 가능한 미래(possible future)라고 하자. 한편 인생은 각자가 가고 싶은 미래, 즉 바람직한 미래(desirable future)가 있다. 미래설계는 결국 가능한 미래를 바람직한 미래 쪽으로 근접시키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각자가 원하는 미래 인생의 목표나 방향을 정해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곧 미래설계이다.여기서 미래설계에 있어 필수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각자의 남은 인생에 있어 지금이 가장 젊을 때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까지 살 수 있을까, 즉 바람직한 건강의 미래를 설정하고 그 때까지의 인생설계를 지금부터 바로 시작하도록 하자.둘째, 뭔가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못한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라. 밑천을 대고 돈을 버는 일도 있지만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도 얼마든지 있다. 더구나 미래는 대개 물질적인 욕구는 어느 정도 채워졌기 때문에 정신적인 측면을 훨씬 더 중시한다고 한다. 물질적인 측면을 앞세우는 것은 아직도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셋째, 각자가 지금까지 남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를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그리고 어렵게 사느라 자신 이외에는 큰 신경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이만치 사는 것이 내가 노력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운이 좋았던 측면도 있다. 우리 주변에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더구나 미래의 세상은 윤리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열악한 조건에서 친환경적으로 농산물을 재배하는 농부들에게 적정한 이윤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공정무역(fair trade)이 그 한 예이다.지금까지 인생의 과정을 30+30+a라고 한다. 부모 밑에서 30년, 부모 노릇하며 30년, 그러고 나서 환갑 이후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는 30+30+30+a가 되었다고 한다. 오래 산다고 해서 무조건 축복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추가된 30년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전체 인생에 있어 행복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100년 인생을 설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영탁(세계 미래포럼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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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2.26 23:02

[금요칼럼] 무상급식, 어떻게 할 것인가? - 김명곤

초중등학교 무상급식 문제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여당과 야당을 가리지 않고 서울시, 경기도, 대전시, 광주시 등 일부 시도 단체장이나 교육감 후보들이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이에 대한 찬반으로 선거판이 달구어지고 있는 것이다.찬성하는 쪽에서는 지금처럼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만 무료급식을 하는 것은 대상 학생과 급식비를 내는 학생 사이에 나타날 수 있는 위화감이나, 그 학생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심리적 아픔을 생각할 때 교육적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반대쪽에서는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할 경우 매년 1조 5,000억 원에서 최고 1조 8,000억 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한데 한정된 교육 재정을 무상급식으로 돌리다 보면 다른 교육예산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으니 오히려 교육정책이 후퇴할 거라고 주장한다.이에 대해 찬성쪽에서는 무상급식은 단순히 교육적 차원에만 한정되지 않고 학교에 내는 급식비에서 절감된 돈이 가계의 지출에 활용됨으로서 경기부양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서민층과 중산층의 육아에 대한 부담을 줄임으로써 출산율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으며, 우려하는 예산 문제도 다른 부문에서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예산의 지출을 줄여서 국민의 세금 부담이 없이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으니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이에 대해 반대쪽은 강경한 어조로 무상급식이 선거를 염두에 두고 대중들에게 영합하는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다. <조선일보>는 2월 4일자 사설에서 "무상급식 다음엔 공납금 공짜 공약, 외고자사고 폐지 공약, 대학입시 추첨제 공약이 차례차례 또는 한꺼번에 등장할 것이다....아첨꾼 정치인들은 불평등과 빈부격차라는 사회의 그늘을 비집고 독(毒)버섯 돋아나듯 돋아난다"고 썼다. 같은 날 <동아일보>의 사설도 "국민을 속이고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공약을 남발하는 출마자들은 유권자들이 가려내야 한다"고 했다.포퓰리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나 아르헨티나의 예를 들어 좌파의 복지 정책이 국가를 부도 사태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반대쪽의 손을 들어 주었다. 2월 12일 한나라당 신임 당직자들과의 조찬회동에서 "있는 사람은 자기 돈으로 해결하고, 그 돈으로 서민을 도와야 한다...복지 예산을 늘리고 싶어도 북유럽 나라처럼 안 된다"고 밝힌 것이 그것이다.현재 전국의 모든 초중고생들을 대상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13% 정도의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논란의 초점은 바로 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이라는 단어에 있다. '한 반이 40명이라면 전국적으로 평균 5,6명의 아이들이 무상급식을 받는데 그 아이들에게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옳은 일인가?' 라는 질문은 타당하다고 본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감정이 예민한 어린 학생들이 다니는 초중등학교 안에서 아이들이 차별을 느끼고 소외감과 상처를 받게 되는 일을 막고 모든 아이들이 똑같이 나라에서 주는 밥을 먹고 평등하게 공부를 시키자는 원칙적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다만 현재 우리 국가의 예산 상황이나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그 시기나 범위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니 무상급식은 그 정책이 '옳으냐 그르냐'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시행되고 있는 수준을 '유지할 것이냐, 더욱 확대할 것이냐, 전면 실시할 것이냐' 하는 실행 방법의 문제로 보인다. 더욱이 무상급식 실행 여부는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에 속하니 부분적으로 실시하든 전면적으로 실시하든 지방정부가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본다.다만 재원조달 방안에 대한 대안도 없이 표를 의식해서 무조건 선심성 공약을 내세우는 후보는 철저히 검증해야 할 것이다. 그런 한편 이 문제를 포퓰리즘이나 좌파의 이념과 연결시켜 쟁점화하는 일 또한 미래의 꿈나무들을 위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무상급식 시행으로 인해 학부모들의 세금 부담이 증가하고 더 중요한 교육 사업들이 뒷전으로 밀려날 지, 아니면 평등교육의 혜택으로 인재 양성의 토대가 튼튼하게 마련될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이렇듯 민생이나 교육과 관련된 장기적인 문제일수록 정치적으로 쟁점화하거나 선거의 유불리만을 따질 것이 아니라 국가 백년대계의 수립이라는 과제 속에서 활발한 토론과 공론화 과정을 통해 유권자의 선택에 맡기는 게 올바른 민주주의의 실천이라고 본다./김명곤(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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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2.19 23:02

[금요칼럼]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이유 - 이기호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겠지만, 우리나라의 학령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시점은 2016년부터이다. 그해부터 우리나라는 고교졸업자수보다 대입정원이 더 많은 사회에 접어들게 되며, 생산가능 인구 또한 하강곡선을 그리며 감소하게 된다. 그에 따라 많은 대학들이 통폐합이나 퇴출의 과정을 통해 사라지게 될 것이며, 기업 또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파산 절차를 밟게 되는, 우울한 현상을 곳곳에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학교나, 하나의 기업이 사라지게 되면, 단순히 그 구성원들만 실업자 신세가 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곳을 기반으로 삶의 터전을 닦아오던 많은 사람들, 그러니까 식당 주인들이나 문구사 주인들, 원룸임대업자, PC방 주인들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한데, 여기서의 학교나 기업은 주로 수도권보다는 비수도권 지역을 소재로 한 곳이 그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 이유는 지난 몇 년 간의 수도권 인구 유입 통계자료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수도권으로선 별 문제가 없는 것이 자연인구수가 아무리 감소한다고 해도, 그것을 감내해줄 사회적 인구 유입 증가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을 최소한 몇 년이라도 더 지연시킬 수 있을 거란 얘기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출산율 증가 대책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는 것은 대개가 비수도권 지자체들이고, 장학제도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지방대학들이다.따지고 보면 2016학번이 되는 친구들이 태어난 해는 바로 1997년, 이 땅에 가브리엘 천사처럼 IMF 구제금융이 당도한 해였다. 그 순간부터 우리나라의 인구 증가분은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이 땅의 출산율 감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고 싶다면 우선 그 시기에 대한 보다 면밀한 관찰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이야 외환보유고가 세계에서 몇 번째이니 우리끼리 서로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사실 이 땅에 남기고 간 IMF의 내상은 결코 간단치가 않은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땅의 광고에서 '부자되세요'라거나 '대박나세요'라는, 이전까지는 너무 속물처럼 여겨져 금기시되어왔던 카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기 시작한 것도 그맘때쯤이었고, 노숙자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도, 시골 고향집에 아이만 달랑 맡기고 사라지는 편부모의 숫자가 늘어난 것도, 모두 그즈음의 일이었다.집 안에 있는 금붙이까지 싹싹 끌어 모아 보다 빨리 IMF 체제를 극복하려 노력하다 보니, 이런, 어느새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최우선 가치는 '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우리 시대 최고의 가치는 계속 '돈'이었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어지지만, 그래도 분명한 건 그 이전까지는 최소한 그런 말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적인 사람들이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신문만 살펴봐도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 우리 시대의 화두는 '이념'이나 '민주'였지, '돈'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런 속물적인 화두의 갑작스러운 출물은, 구제금융의 트라우마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의식 자체를 아예 '투자 대비 창출 효과', 혹은 '은행 복리 계산법'으로 뒤바꿔놓았다. 간단한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지자체에서 출산축하금으로 몇 백만 원을 건넨다 해도, 보육료 지원을 얼마씩 인상한다고 해도, 이건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계산이기 때문에, 수지타산에 익숙해진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IMF가 남기고 간 이 땅의 내상이자, 트라우마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들 역시 예전 일본사람들을 비하하면서 종종 했던 말, 바야흐로 '경제동물'들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문제는 이런 화두들이 계속 지속되고 강화된다는 데 있다. 일례로 세종시 문제만 해도 그렇다. 세종시의 원안이 뒤집히는 결정적인 논리들은 무엇인가? 효율과 경제성이 아니던가? 그 역시 다퉈볼 만한 사항들이지만, 사실 원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들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눈에 띄지 않는 가치들이 모두 무시되고 있다는 것은, 현 정부의 가치지향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그런 지향점 아래에서 출산율을 높이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는 것 같다. 출산하는 부부에게 원형지를 거의 무상에 가깝게 공급해보라. 성급하게 예견할 순 없지만, 효과는 기대이상일 것이다./이기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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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2.12 23:02

[금요칼럼] 검찰과 법원 논쟁, 누가 반성해야 하나 - 전용배

공부와 운동병행이라는 시대적 경향으로 인해 최근 달라진 체육계의 현상 중에 하나가 운동선수출신들의 고시합격이다. 물론 아직은 그 숫자가 4-5명 수준에 불과하지만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중고 시절 운동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최하위권의 성적을 받았다하더라도 본인의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고시도 합격할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를 보여주었다. 합격한 이들이 하나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공학이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했겠지만, 사회과학영역이라 '체력'을 믿고 도전했다고 한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외우기만 하면 된다는 뜻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고시합격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사법고시 합격생 중에서도 우리사회에서 아직도 최고 엘리트집단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판사와 검사이다.최근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검찰과 법원의 논쟁을 보면서,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다. 적어도 엘리트 집단끼리의 논쟁이라면 보다 논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검찰과 법원의 마찰 과정에서 전혀 상관없는 '우리법 연구회'문제가 뜬금없이 튀어나오고 있다. 미네르바,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 야간 촛불집회,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전교조 시국선언, 강기갑 민노당 대표, 피디수첩 사건은 모두 우리법연구회와 무관한 판사들이 선고했다. 법원이 어떤 집단인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가치에 충실한 대표적인 집단이다. 왜냐하면 사법부는 기존질서를 지키는 역할을 주로 수행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진보적이라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미국 또한 예외 없이 사법부는 보수적이다. 게다가 판사는 독립적이긴 하지만 판단의 준거는 기본적으로 판례이기 때문에, 큰 틀에서 과거의 관행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일반 판사가 선고한 7건이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면, 답은 검찰의 무리한 기소 때문이다. 논쟁의 핵심은 기소내용에 대한 법리적 문제가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관없는 집단을 마녀 사냥하는 것이 21C 선진인류국가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물론 검찰은 '정치적 판결'이라 주장하면서 법원에 불만을 토로했지, '우리법 연구회'를 지칭한 적도 없고, 공격한 적도 없다. 진짜 정치적으로 이용한 집단은 '우리법연구회'와 이번 7대 무죄판결이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제를 제기한 거대언론과 여당이다. 검찰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지만 이 와중에 검찰이 궁지에 몰리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항 못하고 '복종'만 해온 역사 때문이다. 검찰이 '정권으로부터 부여받은 수사'에 충실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오죽했으면 지난해 1월 피디수첩 수사를 책임진 주임 검사가 "정부 비판을 명예훼손으로 기소할 수 없다"며 사실상 양심선언을 하고 사퇴했겠는가. 이번 검찰과 법원의 논쟁에서 자기반성이 필요한 집단은 검찰이다."수십 년 검찰역사 속에서, 국민에게 긍정적으로 각인된 검사를 배출한 경험이 없는 검찰. 기소독점이라는 절대 권력을 소유했으면서도, 그 칼을 힘없는 백성과 집단에게만 휘둘러온 검찰. 도쿄지검 특수부가 집권 민주당의 실세인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의 정치 자금을 수사 중인데 비해, 죽은 권력에만 칼을 들이대는 검찰. '거악'과 싸우기는커녕 '거악'과 결탁한 검찰" 이것은 필자의 주장이 아니라, 검사 출신의 김용철 변호사가 새로 출간한 책에서 밝힌, 오늘날 검찰의 자화상이다. 검사도 인간이기에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찌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국민의 공복(公僕)이라면, 최소한 역사를 두려워 할 줄도 알아야 한다. 검찰조직에서 질서, 충성, 의리, 복종 같은 단어가 유의미한 가치로 계속 인정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러한 가치는 필자가 몸담고 있는 체육계에서도 퇴출된 용어이다. 검찰 깃발에 그려진 칼과 대나무가 진정한 검찰의 상징이 되기를 고대한다./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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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2.05 23:02

[금요칼럼] 왜 미래인가 - 이영탁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미래를 모르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둠 속에서 방향감각 없이 절뚝거리는 것과 같다." 이 말대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미래란 먼 훗날에 오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늘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미래냐 하는 사람도 있고 온통 과거에 얽매어 옛날이 좋았느니 어쩌니 하면서 뒤만 돌아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제작년에 홍콩을 방문한 앨빈 토플러가 한 말이 새삼 기억난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지만 미래에 대한 준비가 소홀하다."미래는 항상 미래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금방 현실로 다가온다. 미래가 현재가 되고 또 과거로 바뀌면서 금방 새로운 미래가 나타난다. 따라서 미래를 잘 예측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미래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될 리가 없다. 이것은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다 마찬가지이다. 행복한 삶을 원하는 개인, 성공적인 기업경영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기업가, 국가사회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든 미래공부부터 하고 볼 일이다.미래변화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워낙 다방면에 거쳐 복잡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구변화나 지구온난화는 어떻게 진전되고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는 무엇인가. 과학기술의 발전속도와 방향, 그리고 그것이 우리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과연 인간이 죽지 않는 세상이 올 것인가, 온다면 언제 쯤인가. 교육이 나라의 장래를 결정한다는데 교육 자체의 미래는 어떻게 되며 미래형 인재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일자리 변화는 어떻게 되며, 어떤 직종이 부상하고 어떤 직종이 사라지는가. 장차 기업의 모습은 어떻게 되고 기업경영방식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개별 국가 대신에 지구촌 정부가 탄생한다는데 과연 그럴 날이 올까. 미래는 온통 사이버 세상이 된다는데 어떻게 적응해 나갈까. 그 때 사람들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생활방식은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 인간의 삶은 결국 행복추구에 최고의 가치를 둘텐데 미래인의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까. 이런 식으로 살펴보자면 끝이 없다.인구문제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인구문제는 한마디로 저출산-고령화-인구감소이다. 확실히 우리네는 별난 사람들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저출산 때문에 아무리 고령화 속도가 빨라도 인구는 곧 줄어들게 되어 있다. 얼마 안있어 노동력이 줄면 생산활동이 축소될 것이고 뒤이어 인구가 줄면 구매력과 시장이 위축될텐데. 일본의 잃어버린 10년도 노동력 감소와 함께 시작되었다는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고민이 아닐 수 없다.어느 시대, 어느 정부든 국정운영을 잘해서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되지 못하고 국민들로부터 많은 욕을 먹고 만다. 그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정부 당국자의 미래 마인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미래지향적 국정운영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왜 정부정책에 기를 쓰고 반대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국민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요즘 사람들은 저마다 똑똑하다. 인터넷이 집집마다 보급되어 있어 매일 매일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산다. 거기다 사람마다 휴대폰을 가지고 그때 그때 소통을 한다. 이처럼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무장한 똑똑한 군중들(smart mobs)의 활동영역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고 정부가 하는 일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한다.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집단행동을 하기 시작하면 그 위력이 대단하다.능력있는 정책 당국자라면 이들을 끌어안고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책 수립 단계에서부터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으고 특히 반대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들어 받아들일건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건 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결국 이들을 동반자로 만들어 함께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가오는 미래는 감성사회이다. 냉철한 머리도 필요하지만 따뜻한 가슴이 없이는 되는 일이 없는 사회가 바로 미래사회이다.우리가 알아야 할 미래는 너무나 복잡하다. 그런데 미래변화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고, 변화의 내용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남보다 먼저 미래를 파악하고 개척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고 한다. 단순히 예측만 하는 데서 나아가 각자가 원하는대로 만들어가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 더 큰 미래를 열어가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바이다. 그것은 곧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승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도 하다./이영탁(세계미래포럼 이사장)▲ 이영탁 이사장은전 총리실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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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29 23:02

[금요칼럼] 아마존의 눈물, 아바타, 아이티 - 김명곤

아마존의 와우라 족은 토기와 스테인리스 냄비를 함께 사용하며 발전기로 켜지는 텔레비전 을 즐겨 본다. 예전 브라질의 주요 수입원인 고무 채취에 동원됐던 마르보족의 상당수는 죽거나 마을을 떠났다. 여덟 살 소녀 릴리아니의 엄마는 병으로 죽고, 아빠는 도시로 나간 후 소식이 없다. 아마존 상류에 사는 마티스 족은 온 몸을 검게 칠하고 나뭇잎으로 몸을 감싼 어른이 회초리로 아이를 때리는 풍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이를 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매서운 회초리질이나 얼굴에 새긴 사나운 재규어 문양에도 불구하고 부족민들은 병들어가고 있다. 사냥꾼 비나는 간염 보균자이며, 그의 둘째부인과 딸도 간염환자가 되었고, 큰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역시 간염으로 죽었다.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은 지상 최대 생물의 보고이며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위기를 그리고 있다. 만약 아마존이 사라진다면 인류는 또 다른 행성을 찾아 고달픈 여행을 떠나야 할 지 모른다.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는 에너지가 고갈된 미래 지구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판도라라는 행성으로 날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매장된 자원을 얻기 위해 원주민인 나비족의 고향에 불을 지르려 한다. <아바타>를 보면서 <아마존의 눈물>을 떠올린 것은 판도라 행성의 자연이 아마존의 밀림을 닮았기 때문이고, 원주민들의 고향에 불을 지르는 짓거리가 바로 지금 아마존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바타>에는 <아마존의 눈물>에는 없는 '영웅'이 있다. 휠체어 신세의 다리를 얻기 위해 행성에 들어 온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판도라의 여인과 사랑을 하고 행성의 아름다움에 빠져 결국 행성을 구해낸다. 그런데 판도라의 자연을 파괴하는 주체도 백인이고, 그것을 구하는 주체도 백인이라는 설정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의문에 대해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영화 <아바타>가 "백인 메시아가 세계를 구한다는 우화를 강화시키는 백인 관점의 인종적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고 답하고 있다.1492년에 콜럼버스가 첫 발을 디딘 신대륙은 카리브 연안의 키스케야 섬이었다. 섬의 토착민들이 학살과 질병으로 몰살당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려와 노예로 부렸는데, 이들이 현 아이티 국민들의 선조다. 그 후 프랑스 식민지가 되어 가장 잔혹한 수탈을 당한 아이티의 노예들은 기나긴 독립 투쟁을 했고, 드디어 1804년에 세계 최초로 흑인 공화국이 되었다. 미주 대륙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 공화국으로 독립한 아이티에 대해 흑인노예들의 국가라는 이유로 국가 승인을 거부했던 미국은 1915년에 아이티를 점령해서 1934년까지 통치했다. 아이티가 독립 이후 34번의 쿠데타를 겪으며 최빈국으로 전락한 원인은 서구 열강의 탐욕스런 수탈과 군사개입과 점령을 반복했던 미국의 정책 때문으로 지적된다. 그 미국이 상상을 초월하는 강진 피해로 시신들과 통곡소리와 비명소리 가득한 '생지옥' 아이티의 구호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니 흑인들에게 병 주고 약 주는 백인들의 위세는 대단하다.북극의 빙하가 녹고, 아마존의 숲이 파괴되고, 지진과 해일, 폭염과 강추위가 지구를 뒤덮고 있는 지금 환경파괴로 인한 자연재해는 앞으로 우리의 삶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러한 자연재해를 보는 시선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아바타>는 웃었지만, 아마존과 아이티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이티, 아마존, 아바타. 공교롭게도 모두 '아'로 시작된다. 이 '아' 자들이 지금 우리 시대의 큰 화두를 제공하고 있다./김명곤(전주세계소리축제조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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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22 23:02

[금요칼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 이기호

미국의 작가 레이몬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단편소설엔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 한 쌍이 등장한다. 그들 부부의 아이가 세상을 뜬 것은 우연한 교통사고 때문인데, 그날은 마침 아이의 여덟번째 생일날이기도 했다. 아이의 갑작스러운 사고 때문에 미리 주문해놓은 생일케이크 따위는 잊어버린 채 슬픔에 빠져 있던 부부에게 제과점 주인은 왜 만들어놓은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느냐며 화를 낸다. 제과점 주인은 당연하게도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이 주문만 해놓고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는, 무책임한 손님들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작품 말미에 가서야 사정을 알게 된 제과점 주인은, 젊은 부부에게 사과하며 자신이 만든 롤빵을 내민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스토리로서만 바라보자면 어쩌면 제목 그대로 별것 없는, 밋밋하기까지 한 이 이야기가 감동스러운 것은, 슬픔과 허기를 같은 위치에 두고, 허기를 통해 슬픔을, 슬픔을 통해 허기를 이해하게 만드는 작가의 시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잃은 슬픔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것이 뻔한 부부에게 내미는 롤빵은,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고, 커다란 도움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그 빵을 통해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아이의 엄마는 그 자리에서 롤빵을 세 개나 먹는 것으로 묘사됐다. 개인적으론 그 부분이 소설에서 가장 슬펐다. 아이를 잃고 롤빵을 세 개나 먹을 수밖에 없는 엄마. 그녀의 허기.지난주엔 일 년 가까이 지연되었던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주 수요일은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꼭 일 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들의 장례식이 치러진 다음다음날, 어느 한 신문의 사설에선 유가족이 받은 보상금이 1인당 6억원이라는 액수를 강조하며, 그 대가를 대한민국 국민이 두고두고 치를 것이라고 일갈했다. 장례식 전전날엔 역시 사설을 통해 희생자들이 정당한 공무집행에 맞서 불법 폭력행위를 일삼다 숨진 사람들임을 강조했다. 사설을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순 없으나, 정말이지 꼭 누구인지 알아내어 이름 석 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싶은 심정이다. 사람이 무려 다섯 명이나 불에 타 죽은 일이었다.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들이 죽은 일이었다. 정파적 입장을 떠나서, 사람들이 죽은 자리에, 죽은 사람들이 떠나는 자리에, 꼭 그런 말들을 쏟아내야 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예의를 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과연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들인가를 묻는 질문이다.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용산참사에 관련된 법정에 꼬박꼬박 참석한 어느 한 후배작가의 글을 보면, 용산역세권 재개발로 인해 발생하는 건설사의 이익은 일조 사천억원이고, 조합원의 이익은 천팔백억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막대한 이익을 위해서 권리금과 시설투자비 포함 이억 육천만원이 투자된 음식점 주인에겐 이주보상비로 오천만원이 나왔고, 일억 이천만원이 들어간 중국집 주인에겐 육천만원을 주겠으니 나가라고 했단다. 엊그제까지 평범한 중국집 주인이었고, 갈비집 주인이었던,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아들들은 그래서 이름도 생경한 '전철연'에 가입했고, 아내의 귀를 때려 바닥에 쓰러뜨린 다음 배를 걷어차는, 깡패용역들에 맞서 망루에 올라갔다. 그들이 사고(이 단어는 쓰고 싶지 않으나, 참고 쓴다)로 죽었다. 남은 가족들은 그 죽음이 억울해, 희생자들을 냉동고에 보관한 채 일 년 남짓 거리에서 싸워왔다. 그리고 끝내, 어쩌면 사건의 일차적 책임이 있는 재개발조합 측과 합의를 하게 되었다. 아이를 잃고 롤빵을 세 개나 먹은 소설 속 엄마와는 같을 수 없겠지만, 유가족들이 받은 합의금엔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어떤 비릿한 아픔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과연 '떼를 써서' 받은 돈처럼 보이는가? 그 돈이 과연 금액으로, 1인당 얼마 하는 식으로, 셈할 수 있는 돈으로 보이는가?우리가 어느 한 사건, 어느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사건 속으로 보다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그 노력 다음에, 우리는 어렵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을 때, 우리는 최소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사람이 죽었을 땐 특히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때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일이기 때문이다./이기호(소설가광주대 문예창작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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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15 23:02

[금요칼럼] 타이거 우즈와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전용배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성추문은 2009년 연말 지구촌을 강타한 최대의 가십이었다. 적나라한 사생활 폭로로 한 인간의 인권이 짓밟히고 있다는 시각은 극히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을 뿐 모든 것이 노출되어, 그동안 쌓아왔던 긍정적인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퍼라는 찬사를 들었던 타이거 우즈는 왜 이렇게 무너졌을까. 단순한 개인의 일탈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함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판단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타이거 우즈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도 현역시절 도박과 여자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도박은 중독수준이었다. 그 이외에도 세계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스포츠스타들 중에는 타이거 우즈나 마이클 조던과 같은 사례가 적지 않다. 결론은 극심한 경쟁에 따른 스트레스이다. 연예계, 정계, 스포츠계는 이등을 기억하지 않는 곳이다. 즉 승자독식구조이다. 승자독식구조는 참가선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승리 아니면 죽음을 다오'이다. 승리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일시적으로 안겨주긴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달콤한 열매'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끝없는 경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연예계 스타는 '자살의 그림자'가, 스포츠 스타는 '일탈의 그림자'가, 주목받는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의 그림자'가 운명처럼 드리워져 있다. 최고가 아니면 용서가 되지 않는 환경이 이들을 자극한다.원래 스포츠는 단순한 놀이에서 출발했다. 근대 유럽에서 발전한 스포츠는 '유희성'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오락이나 재미와 관련이 깊다. 이러한 스포츠가 미국에 전파되면서 새롭게 탄생했다. '경쟁성'이 추가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세계질서를 장악하면서, 스포츠의 '경쟁성'은 미국의 경쟁력을 담보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물론 강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는 하지만, 스포츠는 미국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무한경쟁을 선언하고 이를 통해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필요했던 것이 경쟁력 있는 '스포츠 영웅'의 출현이었다. 영웅이 없는 오늘날 유일하게 영웅대접을 받는 것이 스포츠스타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들은 영웅이 아니라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생존해야하는 나약한 인간 일뿐이다.타이거 우즈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 중에 '페인 스튜어트 사건'이 있다. 니커보커스 복장에 중절모가 트레이드마크인 페인 스튜어트는 1999년 여름 US 오픈에서 우승하고, 그해 가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협회는 PGA선수권대회의 일정을 조정하여 참가 선수들이 조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모든 선수들이 플로리다 주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타이거 우즈만 빠졌다. 장례식후 치러진 PGA 선수권대회에서 타이거 우즈는 당당하게 우승하고 개인적으로 묘소를 참배했다. 타이거 우즈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회를 앞두고 스튜어트의 장례식에 참석하면 마음이 흔들릴까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보편적 정서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지만, 극심한 경쟁이 상존하는 스포츠세계에서는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자들이 원하는 건, 현실에서의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경쟁은 피해갈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문제는 이러한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았는데도 슬프다는 것이다. 오늘 밤 타이거 우즈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라는 브레히트의 시(詩),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가 살아남은 것이고, 누가 살아남지 못한 것인가. 과연 이것이 타이거 우즈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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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8 23:02

[금요칼럼] 도시의 산소 탱크, 가로수 터널 - 전상국

지난 18일 폐막한 덴마크 코펜하겐의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 총회는 130여 나라 정상들이 참여한 그 규모면에서나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세계의 환경운동가들 수만 명이 매일 회의장 밖에서 벌인 환경 관련 시위만으로도 지구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두 번째 지구는 없다' '말만 하지 말고 지금 행동하라' '부자 나라는 기후변화의 빚을 갚아라' 등의 시위 구호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행동하는 양심, 지구에 사는 우리 모두의 마지막 희망 메시지, 그 절규만 같았다.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가 높은 굴뚝을 쳐다보며 우려했던, 인간 스스로 자초한 지구의 재난, 곧 인류의 멸망을 예언하는 여러 징후들은 남극 대륙의 빙하가 녹으면서 생기는 해수면의 상승 수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무 심는 시기가 많이 앞당겨졌다든가 강원도 영서지방에서는 그 식재가 쉽지 않던, 주렁주렁 열매를 단 감나무들을 보면서 어찌 기후 변화를 실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지구 온난화에 대비한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은 현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들이 앞 다투어 벌이고 있는 갖가지 온실가스 감축을 통한 각종 녹색성장 사업이야말로 지구 살리기는 물론 그것이 곧바로 우리 모두의 건강과 복지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녹색은 색체 구분으로 볼 때 안전진행구급구호 등을 뜻하는 안전색체로 통한다. 더 넓게 우리는 살아 있는 자연만을 녹색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녹색이 곧 생명이며 그 구원이라는 것을 뜻한다,그 녹색이, 생명의 원천인 자연이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본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녹지의 걷잡을 수 없는 도시화는 물론 골프장 등 산림의 난개발로 수십 년 된 나무가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구호가 왜 그리도 허황된 말로 들리는지. 자동차 한 대가 한 달 동안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일 년에 8백 그루 이상의 잣나무를 심어야 한다니 오랜 세월을 우리와 함께 산 나무들의 그 주검이 어찌 예사로 보이겠는가.온실가스 배출 그 공해를 줄이기 위한 답은 처음부터 있었다. 나무가, 숲이, 자연이 그 그을음을 정화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여 이룬 저 숲이 바로 녹색 생명, 산소 탱크라는 사실.모든 나무는 인간이 해치지 않는 한 인간보다 몇 배 더 긴 시간을 이 지구에 머물면서 묵묵히 지구를 정화할 것이다. 마을의 한 그루 정자나무는 수백 년 동안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됐음은 물론 그 마을 사람들의 삶을 정화하는 신목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수백 년 나이의 고목들이 터널을 이룬 파리 등 유럽 여러 도시의 가로수 거리를 생각한다. 청주의 관문인 플라타너스 터널 길을 지나면서 그 가로수를 지켜낸 이들의 위대한 승리를 생각한다. 무더운 도시라는 오명을 안고 있던 대구가 푸른 도시 가꾸기로 온도를 낮춘, 담 없는 건물들과 하나가 된 근린공원이며 가로수길 등 도시의 그 숲을 걸으며 놀라고 놀란다. 경주의 보문단지 가로수 길을 차로 달리면서 새삼스레 고도의 자연을 예찬한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 벚나무 아치로 도심 속의 숲을 가진 진해하동 등 가로수 터널을 가진 도시들을 지날 때마다 그 속에 사는 시민들이 달리 보였다.그러나 이 겨울 터널은커녕 가지들이 모두 뭉툭 잘려나간 채 그 나무줄기만 앙상한 고목 가로수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녹색 성장에 역행하는 검은 그을음 살리기를 저지르고 있는 여러 도시의 가로수 관리를 고발한다. 고목 한 그루가 전봇대 수십만 개보다 몇 배 더 효용가치가 크다는 것을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인가. 나무들이 그 수난 속에서도 저처럼 거대한 고목이 될 때까지 전깃줄을 땅 속에 묻을 생각도 못한 관리들의 그 무능을 나무의 이름으로 성토한다.지구 기후 변화의 주범, 온실 가스 배출 피해를 줄이는 가장 가까운 길, 산과 물이 도심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도시의 숲, 가로수 터널로 녹색도시를 디자인하자./전상국(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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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2.25 23:02

[금요칼럼] 해가 바뀔 때면 드는 생각 - 윤방부

필자가 제일 싫어하는 글은 마치 수도사 같고, 설교투의 글이다. 참으로 역겹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번 글은 바로 이런 류의 칼럼이라서 독자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나 한번쯤은 이해하기를 바라며.미국유학시절 미네소타 대학에서 전문의 과정을 보낼 때 이야기다. 병원의 입원환자를 보면서 깜짝깜짝 놀란 것은 한국사람이 꽤 많다고 느끼는 것이다, 회진할 때 누워있는 환자가 영락없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한국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위 Native American(미국 원주민)이라고 불리는 인디언들이었다. 정말 너무나 똑같이 생겼다. 가끔 병원 백인의사친구들이 나를 Are you native American? 이라고 물을 정도였다. 인디안 마을에 관광을 가서 보니 우리나라의 풍습과 비슷한 게 너무나 많은 것이었다.아메리카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이라고 부른다. 11월이면 나뭇잎도 떨어지고 싱싱하던 자연의 모든 생명 현상들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때를 가리켜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이라고 부른다니 참 재미있다.우리는 해가 바뀔 때가 되면, 지난 일년의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한다. 이미 흘러간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과거가 모두 지나가 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은 정말 그저 흘러가 버리기만 하는 것일까?우리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뿐, 시간은 분명 무언가를 남기고 간다. 아름다운 추억, 슬픈 기억, 아쉬움, 새로운 희망을 뿌려놓고 간다. 오늘이 없는 내일이 없듯이, 지난 일년의 다사다난했던 일들이 없다면 다가 올 새해의 꿈도 없는 것이다. 나뭇잎이 떨어진 앙상한 숲은 보면서도 그 속에서 지난 시간의 의미를 찾아내고, 다가 올 봄의 새싹을 미리 내다볼 줄 알았던 지혜로운 인디언들처럼, 시간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도 좀 더 겸허해지면 좋겠다.언제부턴가 나는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계획이나 희망을 세우기 전에 현재 내게 남아있는 것들을 먼저 돌아보게 된다. 한때는 나도 현재의 나를 돌아보기 전에 내일의 나를 꿈꾸는 일에 바빴다. '새해에는 이런 일을 해야지', '새해에는 꼭 이걸 이루어야겠다' 등등 무언가는 채우고, 더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보니, 현재 내가 가진 것보다 앞으로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이 눈에 더 띄었다. 집도 필요하고 차도 필요하고, 승진도 해야 하고 자꾸만 내게 부족한 것들을 먼저 생각했다.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일보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진정으로 아끼고 살아가는 일이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래서 요즘은 해가 바뀔 때마다 이런 생각들을 해본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이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하며 살았을까? 지금 내가 가진 것들 중에 버려 할 것은 무언일까? 이런 생각들을 곰곰이 하다 보면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 앞에 아직도 남아있는 나의 욕심이 부끄러워질 때도 있다.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간다. GAMZU YAVOR - This too shall pass!!벌써 2009년도 지나가는구나!새옹지마 - 새처럼 옹졸하게 지랄하지 마라!Spero Spera - 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이해인 시인의 "한 해를 뒤로 보내며" 몇 구절을 옮기며.한 해를 뒤로 보내며 / 이해인우리가 가장 믿어야 할 이들의무책임과 불성실과 끝없는 욕심으로집이 무너지고 마음마저 무너져 슬펐던 한 해한 해의 마지막 달인12월의 달력을 바라보는 제 마음엔초조하고 불안한 그림자가 덮쳐옵니다.연초에 세웠던 계획은 실천했나요?사랑과 기도의 삶은 뿌리를 내렸나요?감사를 잊고 살진 않았나요?남에겐 좋은 말도 많이 하고더러는 좋은 일도 했지만바쁜 것을 핑계로일상의 기쁨들을 놓치고 살며혼자서도 얼굴을 붉히는 제게조금만 더 용기를 주십시오다시 시작할 지혜를 주십시오.한 해를 돌아보는 길 위에서저녁놀을 바라보는 겸허함으로 /윤방부(가천의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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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2.18 23:02

[금요칼럼] 대한민국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 전용배

고교시절 기억하나.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몇 년 앞두고 스포츠시설물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던 시절.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시민운동장 담을 넘어 봄 정취를 사진에 담고자 했던 필자는 경비에 발각되어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 보안과에 넘겨졌다. 어린고교생에게 고문은 없었지만, 하루꼬박 걸린 담당형사의 모욕적인 수사방식은 지금도 치욕으로 남아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굳이 헌법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래도 이 나라가 조금은 자랑스러운 것이 1990년대 중반부터는 이러한 원칙이 최소한은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한국정치를 항상 비아냥거리고 난도질하지만 아시아국가 중에서는 민주주의 지수가 1, 2위를 다투고 있다. 오늘 대한민국을 옥죄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보다 경제적 양극화와 불균형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서울과 지방, 대기업과 중소기업, 거대언론사와 중소언론사, 서울지역대학과 지방대학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지난 정부는 그래도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구호라도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구호조차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고 선진국 운운하는 것은 레토릭에 불과하다.기득권과 거대보수언론사들은 세종시로 일부 정부부처가 옮겨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수도가 분할된다느니, 효율성이 떨어진다느니 하면서 떠들고 있지만 실상은 '서울공화국'이 유지되어야 배를 더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지구상 어느 국가가 수도에 이렇게 국부(國富)가 집중되어 있는지. 미국, 일본, 중국,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수도와 지방간의 극심한 불균형에 대해 어떤 해답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넘어 한 국가의 모든 명문대학이 한 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정상적인 국가인가. 지방 사람들이 기대를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지방경제는 오래전부터 근간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 최근 들어 지역방송사와 언론사 중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광고가 중요한 수입원이 되는 곳도 있다. 광고할 기업이 지방에는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울의 거대보수언론사들은 용비어천가만 부르고 있다. '한국경제, 회복속도가 빠르다', '더블 딥, 우리나라와는 상관없다', '올해 플러스성장 가능'등.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어떠한 팩트를 적용시키느냐다. 2009년 올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호의적으로 추정해서도 0.25%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중국은 9%대이다. 주가, 국민소득, 외환보유고는 참여정부시절보다도 못하다. 반면에 외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부패지수와 개인의 자유도는 매년 추락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 평균 경제성장률 4.4% 기록한 참여정부를 '경제파탄 정부',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집권당과 거대보수언론은 지금의 정부를 어떻게 규정해야 옳은가. 국어사전에서는 '적절한 용어'를 찾기가 힘들 것이다.참여정부가 고성장 했다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도 서민들의 삶은 팍팍했고 힘들었다. 그래도 참여정부는 실천은 못했지만, 추구하는 지향점이 있었다.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한 흔적이 있었다. 현 정부는 조금은 솔직해져야 한다. '서울공화국'의 기득권을 지켜주지 않으면, 정권유지가 어렵다고. 거대보수언론사의 눈 밖에 나면 정권재창출이 안된다고. 비록 지금은 여러 가지 역학구도 상, 지방민이 단결하기 힘들지만 언제까지 침묵할지는 알 수 없다. 국가마저 자본과 기득권의 논리에 지배된다면, 국민들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지방민은 영원한 3류 국민인가.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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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2.11 23:02

[금요칼럼] 실용정부와 녹색성장 정부 - 한정호

정부나 회사나 할 것 없이 모든 조직체는 좋은 정체성 (Identity)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가 일 잘하고 회사가 돈 잘 벌면 되지 무슨 정체성이 필요하냐고 반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조직체 경영에 있어 정체성은 필수불가결하다. 우리는 무엇하는 사람들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해 창조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조직은 저마다의 역사와 개성과 문화가 있기 미련이며 이를 반죽시킨 것이 정체성이다. 정체성이 없으면 조직은 오래가지 못하고 힘을 극대화 시키기 힘들다. 좋은 조직은 자기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조직원들을 담합시키며 환경에 반응한다.조직체 정체성의 전문가인 로렌스 애커먼은 좋은 조직체의 정체성을 위한 7가지 조건을 설명한다. 첫째는 실존성이다. 조직체는 마치 사람 같아서 스스로에게 삶의 의미가 주어져야 한다. 나름대로의 조직의 존재가치를 추구해야 이 문제가 풀린다. 둘째는 개별성이다. 다른 조직체와 달라야 한다. 사람도 모두 다르듯이 조직도 자기 만의 특색을 가져야 한다. 셋째는 일관성이다. 창업이나 출범 때부터 해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일관성이 필요하다. 아무리 조직체가 변해도 면면이 이어지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넷째는 의지이다. 정체성은 앞으로 이 조직체가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는 가능성이다. 좋은 조직체의 정체성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사실 정체성 자체가 미래지향적이다. 여섯째는 관계성이다. 정체성에 의해 조직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다르게 설정이 되어야 한다. 조직체가 좋은 정체성을 가지면 아래, 위, 옆의 구성원들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만난다. 마지막은 이해성이다. 조직체의 정체성이 남에게 쉽게 이해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정체성도 너무 복잡하거나 애매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실패한다.뚜렷하고도 좋은 조직체의 정체성은 조직체 관리의 효율성을 최대화시킨다. 인사, 행정, 재무, 기획의 여러 정책들이 흩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며 정책과 행동에 대한 설명을 명백하게 해준다. 정체성이라는 구심점이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으며 그렇게 해도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쉽게 나타낼 수 있다.정부의 경우 정체성은 한 정권이 다른 정권과 달리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나를 보여준다. 그 정권다운 특성으로 목표를 세우고 사람들을 결집하고 색깔을 드러낸다. 정부의 정체성의 정점에는 대통령이 있다. 그의 리더십은 바로 정체성의 발현이다. 대통령이 행하는 인사, 이벤트, 사업, 발언, 정책, 대화 모든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나타난다. 좋은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하나의 궤를 가지는 것이다. 이제 MB정부는 4대강 살리기, 세종도시, 자원외교, G20 회의, 녹색 성장, 서민정책 등 수 많은 사업들을 계획, 추진하려고 한다. 국민들에게 이 모든 것을 잇는 무언가의 축이 느껴져야 한다. 그 축이 무언지 굳이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좋은 정체성을 가지면 자연스레 정체성을 설명하는 이름이 붙여지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러한 뚜렷한 정체성이 대통령의 머리와 마음 속에 있는가하는 것이다.MB 정부는 스스로를 실용정부라고 부르고 이를 정부의 정체성으로 주장하며 자기변호를 열심히 했다. 아마도 과거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상응하는 정부의 정체성 이름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체성으로 그 정부의 이름을 불러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MB 정부는 스스로를 실용정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거리낄 필요는 없다. 실용정부는 괜찮은 이름이다. 이대통령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 실용주의의 철학은 이념적이거나 형식적인 것으로 부터의 탈피를 강조하고 실제 (practice)적 성과를 강조하는 이른바 존듀이의 실용주의 (pragmatism) 노선을 따르는 것인데 실용정부는 이러한 정신을 높이 사는 것으로 설명하면 된다. 그러나 실용정부에서 말하는 실용은 스타일이지 정체성은 아니다. 이 대통령이 자신의 정부를 실용정부라고 말하는 것은 좋으나 자신의 통치의 정체성을 실용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도데체 실용이라는 축으로 지금과 미래의 사업과 정책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그런 면에서 MB정부의 정체성은 차라리 녹색성장정부로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비록 외교나 국방, 안보면에서 설명력이 떨어지나 사업과 정책의 중점을 환경과 인간을 강조하는 질적성장으로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실용정부보다는 훨씬 나은 정권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다만 녹색성장의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더 이상적으로 밝히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서민을 중요시 여기는 인본주의와 과학기술에 바탕한 환경주의. "나는 한국적 녹색성장의 주춧돌을 놓는 사람"이라는 개인적 정체성이 "실용주의 정부의 책임자"보다 더 낫다고 본다. 이제집권 2년이 되어 가는 마당에 굳이 정권의 이름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실용주의 정부는 MB정부의 일하는 스타일을 명명하는 것으로 역할이 충분하다. 대통령의 머리와 마음 속에 자신 있게 형성한 정체성이 있으면 된다. 그 정체성이 성공적인 것이면 이 정부가 끝날 때 쯤 멋있는 이름을 언론들이 붙여줄 것이다. 현재까지 내 놓은 것으로는 "녹색성장정부"가 제일 좋다./한정호(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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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2.04 23:02

[금요칼럼] 아이들, 정보의 노예로 키울 것인가 - 전상국

'알아야 도둑질도 한다.' 는 속담이 있듯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교육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표어는 우리네 교육열을 세계 최고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그러나 '모르는 것이 상팔자다.' 혹은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의 종이다.' 등 때로 그 앎이 불러올 수도 있는 여러 가지 불편함을 넌지시 경계하는 속담도 꽤 있다.아는 것이 병이 되지 않기 위해 알 것을 제대로 가려 알자는 이런 뜻의 말이야말로 정보화 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가 새겨들을 만하다.정보가 한 개인이나 사회변동의 원동력이 되는 사회를 정보화 사회라 한다. 국어사전은 정보란 낱말을 '관찰이나 측정을 통하여 수집된 데이터를 실제문제에 도움이 되도록 해석하고 정리한 지식이나 그 자료.'로 정의하고 있다.정보는 내가 앞서가기 위해 상대방에 대해 아는 일이며 무엇을 미리 헤아려 짐작하거나 그 중 어떤 것을 가려 뽑기 위한 판단의 결정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예측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 그 성찰과 판단을 흐리게 하는 정보로 해서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내게 꼭 필요한 정보를 결정적으로 훼방 놓는 그런 정보를 우리는 잡음정보라 일컫는다.많은 정보 중에서 무엇이 유용하고 그 쓰임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재빨리 알아내는 정보 마인드를 유연하게 작동시키는 것이 유익정보라면 잡음정보는 오히려 그 촉수를 마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물론 유익정보도 그것이 너무 넘칠 때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감당하기 힘든 그 정보에 완전히 함몰되어 생각의 갈피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정보의 홍수, 정보의 공해가 정보화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그 무한량의 정보 온라인화 앞에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완전히 기가 죽었다. 무섭게 진화하면서 오직 빠른 기능만을 필요로 하는 첨단 기기 앞에서 사람들의 사고력은 점점 위축되거나 황폐화하고 있다.특히 정보는 빠른 속도를 요구한다. 누구보다 먼저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허겁지겁 마구잡이로 주워들으면서 그것이 모두 자기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특히 속도는 생각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남들을 따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면 남들 흉내만 내고 있을 뿐 자기 생각, 자기 인생을 깡그리 잃어버리게 된다.서구 선진국에서 어린이들의 인터넷 사용이나 그 속도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남들이 아는 것, 가진 것을 그와 똑 같이 갖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남들의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아직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 마음의 안정, 그 여유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어른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 규제가 가능할 것이다.제대로 된 정보화 사회는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을 잡음정보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어른들을 필요로 한다. 나이 많은 사람도 무엇이 유익한 것이고 무엇이 잡음인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아직 판단력이 제대로 잡히기 않은 아이들이야말로 정보의 홍수, 그 잡음정보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아이 기죽이지 않겠다고 값비싼 휴대폰을 손에 들려주고, 몇 시간이고 인터넷 앞에 죽치고 있는 얼빠진 아이를 천재 났다고 자랑하는 어른들이 아닌, 진정으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그런 어른들이 나설 때다.정말 필요한 지식 정보를 얻기 위해 공부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상혼이 낄낄거리고 있는 게임 위주의 인터넷 사용은 마약 중독보다 더 나쁘다.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인 아이들의 창의력과 올바른 생각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 백해무익한 잡음정보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야 한다.종이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그 나이에 벌써 자기만의 생각 찾기, 그런 마음의 여유로 자연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 모습이 어찌 대견하지 않겠는가./전상국(소설가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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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1.27 23:02

[금요칼럼] '영감님의 증거' - 윤방부

전세계 80세 이상의인구가 2050년에는 30명당 1명이 될 것이라고 한다. 현재도 노인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한국도 곧 노인왕국이 될 것 이라고 한다.얼마 전 헬스클럽에서 가끔 만나던 분들과 골프를 쳤다. "윤 교수님과 골프 한번 쳐보는 게 소원" 이라며 하도 익살을 부리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섰다.그런데 골프를 치는 내내 그들은 서로를 '김 영감' '이 노인' 하고 부르는 게 아닌가? 다들 사회에서 한자리 하는 분들이니, 평소에는 '이 사장님' '김 이사님'으로 통했을 텐데 그날은 장난기가 발동해서인지 마치 노인정에서 만난 노인들처럼 서로 영감, 노인 하며 재미있어했다.나도 그날만큼은 '윤 영감'으로 통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영감'이라는 호칭이 싫지 않았다. 이젠 나도 나이를 먹어서일까?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영감이란 말이 오히려 정답게 느껴졌다.따지고 보면 나도 영락없이 영감이다. 이미 손자 손녀가 있고 환갑도 지났으니 할아버지가 아닌가. 조선시대 같으면 이미 황천객이 되어 제사상 받을 나이이고, 1950년대만 해도 틀림없이 뒷방 늙은이가 되었어야 할 나이이다.그날 골프를 마치고 식사를 하면서, 하고많은 호칭 중에 왜 하필이면 '영감'이냐고 물었다. 한 분의 대답이 참 명답이었다."늙었다는 세 가지가 증거가 있는데, 첫 번째 부드러운 것이 딱딱해지고 딱딱한 것이 부드러워지며, 둘째는 해야 할 것을 안 하고 안 할 것을 하고, 셋째는 금방 한 얘기는 잊고 3일 전 것은 기억하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도 이런 증세가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영감이지요."속으로 꼽아보니, 다행히도 나는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도 해당되는 것이 아직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늙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가지 않는가.중국의 옛말에도 '하루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명마도 늙어 쇠하면 걸음이 느려져서 둔한 말이 앞서게 되고, 영웅도 늙으면 보통 사람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새뮤얼 울먼은 <청춘>이라는 시에서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청춘이란 연령이나 연령이 제한하는 육체가 아니라,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나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대의 청년보다 60대 노인에게서 더 싱싱한 청춘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늙은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그러니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가슴속에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과 인생을 헤쳐나가는 용기, 삶을 이끌어가는 강한 힘이 있다면 언제까지나 젊은 청춘으로 아름답게 늙어갈 것이다.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을 늙음에 대한 각자의 철학이다. 미국의 낭만파 시인 롱펠로(Longfellow)는 비록 머리칼은 하얗게 세었지만 또래의 친구들보다 훨씬 밝고 싱그러운 피부를 유지하며 활기찬 노년을 보냈다. 하루는 친구가 와서 비결을 물으니 "정원에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이제는 고목이지, 그러나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어 그것이 가능한 건 저 나무도 매일 조금씩 계속 성장하기 때문일세 나도 마찬가지야."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국가에서 주는 경로우대증이 있지만 노인이라는 것이 싫어서 공공 교통기관을 이용할 때 사용하지 않고, 지하철에서 젊은이가 자리를 양보해도 사양하고, 젊은 오빠 또는 아저씨로 불러주면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하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인생은 어차피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법이니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다고 그렇게 서러워할 이유는 없다.영감! 이 명칭이야말로 조물주가 수여하는 인생 최고의 훈장이다./윤방부(가천의대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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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1.20 23:02

[금요칼럼] 야구와 축구 그리고 국가정체성 - 전용배

하나의 사물이나 유기적 조직을 본질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역사?문화적 배경 그리고 정체성(Identity)을 이해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파악이 어렵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대표적인 구기종목인 야구와 축구도 깊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일단 야구와 축구가 동시에 인기 있는 나라는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 미국과 일본을 축으로 하는 야구문화권은 야구가 주류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유럽을 거점으로 성장해온 축구문화와 시스템은 유럽의 세계관을 등에 업고 전 세계로 파생되었다.몇 년 전 사이언스지(誌)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스포츠종목가운데 가장 예측 불가능한 종목으로 야구와 축구를 꼽았다. 이 예측불가능성이 오늘날 야구와 축구를 번창시킨 본질적인 요소이다. 먼저 기능적인 메커니즘 관점에서 보면 야구와 축구는 차이가 있다. 축구는 기본적으로 유연성과 예술성을 기저에 두고 있다. 쉽게 말해 천재들이 하는 운동이다. 골 결정력은 노력만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다. 물론 어느 종목이든 스포츠는 '천재'가 유리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특히 축구가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현란한 개인기에 유럽은 시스템으로 겨우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야구는 게임수가 많은 관계로 '일상의 스포츠'이다. 야구 천재들이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기는 하나 장수하는 경우는 드물다. 야구는 스스로 변하고 관리(Well Organizing)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공부처럼 반복훈련만이 생존을 보장한다. 또한 적응의 스포츠이기에, 정신적인 면이 깊이 영향을 미친다.시스템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야구와 축구는 보다 확연한 차이가 있다. 축구는 열린 문화이다. 동네 팀도 세계적인 클럽 팀과 겨룰 수 있는 제도가 구축되어 있다. 프로리그는 승강제를 통해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축구가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근본이유는 이 오픈 시스템과 '서민친화적인'요소 때문이다. 또한 축구는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 3세계 정치지도자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도, 축구가 갖고 있는 정치성과 내셔널리즘 때문이다. 반면에 야구는 고비용 구조와 폐쇄성으로 인해 세계화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국내리그의 성공을 이루었다. 시장주의와 엘리티시즘을 근간으로 하는 야구는 자본주의 논리에 가장 충실한 편이다. 게임 수가 많은 야구는 구조적으로 오픈 시스템을 취하기 힘들다. 야구와 축구는 각자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번영을 구가했다. 즉 자기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생존할 수 있었다.정치적으로는 축구의 오픈 시스템이 사회가치에도 영향을 미친 유럽은 '친서민정책'이 핵심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기회평등과 분배, 증세는 유럽사민주의의 근간이다. 스웨덴, 독일, 프랑스, 핀란드,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 국가는 전통적으로 좌파정부가 득세했다. 반면에 야구가 득세한 미국과 일본은 민주주의와 시장 경쟁을 통한 효율성에 초점을 두었기에, 보수주의와 엘리티시즘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상이한 색깔을 가진 야구와 축구가 동시에 인기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은 어떤 색깔과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헌법에 나와 있는 것처럼, 좌와 우의 공존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사회는 민주적 가치에만 함몰되어 공화(共和)적 가치는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공화적 가치는 무엇인가. 어원과 기원을 따지기 전에, 한마디로 '공공선(公共善)'에 대한 가치규정이다. 무릇 국가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개인과, 더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조직의 이해관계를 절충해야 하는 역사적 운명이 있다. 세종시와 혁신도시가 효율성만을 따진다면 지방으로 올 이유가 없다. 그러나 공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균형발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다. 현 정부는 이 나라가 '민주'그리고 '공화국'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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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1.13 23:02

[금요칼럼] 과학적인 공익 캠페인의 절실함 - 한정호

매년 국내 전력소비량을 돈으로 환산하면 30조에 이른다. 산불로 인한 피해액은 한 해 1,200억원에 달하며 음주운전에 의한 사망자수는 매년 6,000여명이며 피해액은 무려 2,100억원이나 된다. AIDS에 의한 사망자 수는 현재까지 1,200명에 달하며 1인당 경제적 비용이 4억원으로 추정된다. 흡연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간 9조 가까이 된다. 이 엄청난 손실을 줄일 수는 없을까? 이러한 문제들의 공통점은 법적인 조치로는 한계가 있으며 개개인의 자각이나 참여 없이는 해결이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도와 정책은 강제로만 규정하기에 한계에 이른다. 때로는 벌금으로, 때로는 형벌로, 때로는 포상으로 해결해보려 하지만 한계가 있다. 개인이 자기 스스로의 이득을 위해서 동기를 부여받거나 사회적인 이득을 위해 자발적인 협력을 보여야만 이루어진다.이러한 공익적 손실문제나 목표달성을 해결하는 데는 3E의 조치단계가 있다. 첫 번째 E는 Enforcement로 법적인 강압조치이다. 둘째는 Engineering으로 기술적인 차원에서의 조치이다. 셋째는 Education으로 교육적인 조치이다. 산불방지를 예로 들면 법적인 조치는 산 근처에서라도 흡연을 하면 과중한 벌금을 부가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다. 기술적 조치는 안전한 곳에 캠프촌을 만들어 준다든가 산불이 나기 쉬운 진입로는 폐쇄조치를 하는 것이다. 교육적 조치는 효과적인 산불방지 캠페인이나 계몽교육을 전국적으로 벌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법적인 조치와 기술적인 조치는 그런대로 강한 편이다. 음주, 흡연, 산불 안전벨트 등에 대한 법적인 규제와 기술적인 조치만 해도 괄목할만한 수준의 강화나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적인 면, 즉, 계몽과 공익 캠페인의 수준은 그러하지 못하다. 선진국에 비해 두드러지게 낙후하다. 과학적인 조사나 이론 없이 마구잡이식 구호가 난무할 뿐이다. 가장 눈에 많이 뜨이는 교통안전의 예를 들면 전국도로나 고속도로에는 아직도 "쉬어가요 졸음운전, 두고 가요 음주운전 "식의 4, 4조 구호가 대부분을 이룬다. 어떤 표현이나 소구방법, 전략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진지한 고려는 거의 없다고 본다. 특히 이 문제를 과학적 이론과 조사연구와 결부시켜보는 노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학문적으로도 이 분야는 낙후하다. 심리학, 마케팅학, 커뮤니케이션학, 광고홍보학, 사회학 등 관련분야에서 간헐적으로 연구가 나오고 있기는 하나 매우 빈약하다. 정부에서는 해당 이슈에 따라 표어 공모전을 벌이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과학적 접근의 가장 좋은 예는 공익 캠페인에 마케팅의 개념을 도입하는 시도이다. 이른바 마케팅 이론의 핵심인 제품 (product), 가격 (price), 장소 (place), 촉진 (promotion)의 4P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개발도상국의 경우 AIDS방지를 위해 콘돔보급을 확산시키기 위해 먼저 콘돔을 여러 가지 색상으로 제작했으며 (product), 편의점에서도 쉽게 콘돔을 구할 수 있도록 했다 (place). 정부에서 보조하여 콘돔의 가격을 낮추고 (price) 인기가수의 노래를 통해 사랑의 책임을 강조 하도록 했다(promotion). 미국의 스모키 베어 (Smokey Bear) 캠페인은 1950년 산불로 화상을 입어 연기에 그을은 새끼곰의 상징을 이용하여 60년째 지속되고 있는 공익캠페인으로 매우 다양한 교육과 이벤트가 전략적으로 이루어진다. 마케팅의 개념을 도입한다는 것은 과학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하다는 것이다. 감각에 의존하지 말고 실증적인 조사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강에다 불법적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공익광고를 보면 사람들은 의외로 "다른 사람들도 쓰레기를 강에 버리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역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산불방지를 위해 맥과이어 같은 학자들은 무려 16가지 인식적인 접근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밤에 동물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산이 인간들의 심신단련장이 아니라 동물들의 마을과 같은 곳이라는 인식을 주는가 하면 (마을에 어떻게 불을 지르나!) 산불을 방지하는 행동자체를 짜증스런 일이 아닌 스릴과 도전으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한다. 방법은 마치 기업의 브랜드들이 시장에서 경쟁하듯 다양하며 큰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공익 캠페인에 거는 일반인의 기대는 대체적으로 미미하지만 비용대비 효과를 생각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공익캠페인 전문가들은 효과적인 에너지 전략 캠페인으로 5%의 절약목표를 달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1조 5천억의 거금이며 같은 목표치를 적용하면 음주운전의 경우 한 해에 300명의 목숨을 구한다. 60억원의 산불피해를 줄인다. 공익캠페인의 비용은 법적인 조치나 기술적인 조치에 비해 훨씬 적다. 운이 좋으면 히트한 공익광고 하나로도 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이는 과학과 전략의 영역이다. 소득수준의 증대로 복지가 향상되면 공익 캠페인의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암과의 전쟁, 자연보호, 산성비 피해 줄이기, 낙태 줄이기, 청소년 음주 방지, 대중교통 이용하기, 안전벨트 착용하기, 비만예방조치 등 수 많은 사회적 과제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이를 위해서는 결국 법적인 강제조치는 최소수준에 머물고 많은 부분이 공익캠페인에 의존하게 된다. 이제 OECD 국으로서의 면모를 살려 과학적인 공익캠페인의 개발과 지원에 눈을 돌려야 한다./한정호(연세대 언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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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1.06 23:02

[금요칼럼] 고령화사회, 나잇값하기 - 전상국

기차역 기다림방에서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한 분이 매표구 역무원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역무원이 뭔가 정중히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계속 자기 할 소리만 거친 욕설을 섞어 내쏟았다. 그 소동을 구경하던 젊은이 하나가 혼잣소리하듯 말했다. 나잇값 좀 하시지.'나잇값'은 그 연륜에 비해 행실이 좀 가볍거나 덤벙대는 사람을 질책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나잇값, 나잇살-. 젊은 사람보다 주로 나이 많은 사람을 겨냥해 낮잡아 쓰는 말이라 바야흐로 고령화 사회의 노인 깔보기 키워드가 됨직하다.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0.7%, 곧 인구 열 사람 중 한 명이 나이 65세 이상 노인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이에 따라 노인 한 사람을 부양하는 생산 가능인구 수도 10년 전 10.4명에서 올해 6.8 명으로 대폭 줄어 그에 따른 의무나 책임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고령 인구가 증가하는 원인인 사망률 감소는 노인들이 자나 깨나 자신의 건강관리에 철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나 몸이 건강하다고 모두 나이대접을 받고 사는 것은 아니다. 몸은 씽씽 건강한데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건강한 몸에 비해 마음 건강이 신통치 않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이와 달리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몸까지 병약해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으며 사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마음이 건강한 이들만이 누리고 사는 복이다.고령화 사회에서 성공한 인생으로 사는 길은 오직 자기 절제의 겸허와 행실의 부드러움으로 그 나잇살에 걸맞은 나잇값을 하며 사는 일일 것이다. 고령화 사회, 노인들을 위한 각종 복지 정책과 시설 갖추기도 중요하지만 그런 복지 혜택을 주문하고 누리기 위한 우리 스스로의 자격 갖추기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어려운 시대, 어른 모시고 자식들 위해 헌신하며 열심히 살아온, 그 공든 탑을 깡그리 허물어 내고야 세상을 뜨는 그런 어쩔 수 없는 늘그막의 비애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다.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늙은 자기를 왜 그처럼 가까이 하기를 저어하는가를 아는 일이다.내가 네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그 공치사하기. 그 불편한 심기가 불쑥 치밀면 불 같이 화내기.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기.자기 생각만 옳고 남의 생각은 냅다 무지르는 고집불통. 고집은 늙은이 병중 가장 더러운 것이다. 게다가 귀까지 어두우니 남의 얘긴 아랑곳없이 자기 목소리만 점점 높아질 밖에. 감투 벗은 지 오랜 뒤에도 그 감투 위세하며 살기. 내가 잘 나갈 때 그 놈이 날 찾아와서는, 집에 금송아지 키우던 그 놈의 왕년 병은 현재의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마음 불편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로 그 말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가소로움에다 깊은 연민까지 불러일으킬 뿐이다.나이 먹을수록 마음속에 생기는 갖가지 마음 불편함을 스스로 덜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를 원망하는 일도, 무시당해 화가 나는 일도, 자기 말이 안 통하는 그 울화도 모두 자신의 마음 건강을 결정적으로 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새벽안개 속에 두부 배달을 하는 등 그 나이에도 일터에서 묵묵히 일하는 노인들의 밝은 얼굴. 어린이 놀이터나 길가에 다니며 비닐주머니에 휴지를 줍고 있는 팔십 노인의 근면, 안녕하세요, 이웃 사람들한테 언제나 먼저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그 할머니의 곱게 늙어가는 모습, 이 모두가 건강한 마음으로 나잇값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다.얘들아, 조용히 해! 지금 할아버지 책 읽고 계셔.할아버지 할머니의 책 읽고 있는 모습, 이런 것이 진짜 가정교육일 터.나이대접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잇값을 하는 그 즐거움을 찾아 나선 길 위에서 얻어질 것이다.그러나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 이 나이쯤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면서도 그 실천은 결코 쉽지 않다. 이미 굳어진 행실을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쌓아놓은 것도 없으니 허물어질 것도 없다는 체념의 비애, 그 자위가 고작일 뿐.문제는 고령화 사회를 넘어 나잇값을 하며 살기가 지금보다 몇 배 더 어려울 것이 분명한 고령사회의 주인공인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다.'채근담'에 이런 말이 있다. 젊어서 덕을 쌓지 않으면 늙어죽을 때 고기 없는 빈 연못을 지키는 따오기처럼 쓸쓸하게 죽는다./전상국(소설가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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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30 23:02

[금요칼럼] 대학총장 선거제 폐지하자 - 윤방부

몇 년전 일이다. 집사람이 여자들 모임에 갔다 와서 묻는다. "혹시 당신 학교에 총장후보자로 나온 사람들 알고 있어요?" 아니, 잘 모르는데. 사실 오늘 여자 몇 명이 모이는 모임에 갔다가 좀 황당한 일을 당해서 그래요. 뭔데. 어느 부인을 소개 하는데 이번에 모 대학 총장 후보였던 000 교수의 부인이라고 하더란다 그러면서 당신은 그래도 꽤 이름깨나 있는 교수니까 여자들 모임에서 기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하면서 참 희한한 소개라고 한적이 있다. 최근 청문회를 통해서 난도질 당한 전직 대학총장이 있다. 어느 신문에서 하도 거짓과 허위가 많아 가면 갈수록 문제가 생겨 "양파"라고 불리기도 하고 재직시에 하도 외부기관과 단체의 자문, 고문 등등을 많이 맡아서 "고문총장" 등등의 별명이 있다. 우선 안타까운 일이다. 명색이 필자도 대학교수생활 40년이고, 작지만 알뜰한 대학의 부총장직을 맡고 있으며 나 자신도 대학교수 평균 보다는 아주 많게 각종사회단체의 장, 고문, 이사 등등을 맡고 있어서 솔직히 이런 글을 써야 할까? 망설여 지기도 한다. 그러나 각종매스컴에서 또 사적으로 참여하고 만나는 모임에서 대학총장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편견을 감지 할 수 있고 더구나 우리 어린 시절의 그 유명했던 S대 윤일선 총장, Y대의 백 낙준, K대의 유진오 총장의 이미지와 개념으로 소위 대학총장이라는 직책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좀 안타깝기도 하고 또 역시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추억, 경험, 기회의 잣대로 생각하는 것을 정말 때로는 심각하게, 또 시세말로 뼈저리게 느껴서 이 칼럼을 쓴다. 노태우정권때 6.29선언이 나오면서 선거만능주의가 탄생되었다. 무조건 선거로, 직선제로 결판내자는 사회풍조가 그때부터 만연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오죽하면 엄마, 아빠도 선거로 결정하자는 말이 있었을 정도니까? 이러한 사회풍조에 가장 보수적으로 대응해야 할 대학의 교수사회가 가장 재빠르게 대응하는 집단으로 변하였다. 그때 나온 것이 교수협의체인 현재의 교수평의회였다. 쉽게 말해 교수들의 모임 체를 만들어 학교행정 내지는 경영 등등에 참여하자는 취지의 모임이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서 나온 의견중의 하나가 총장선거를 교수들이 직접하자는" 총장직선제가" 탄생되었다. 마치 그 동안 총장직선제가 없어서 학교발전이 안된 것처럼그 동안 국립대학교는 정부에서, 사립대학교는 이사회에서 총장을 선임하는 방식이었다. 하여튼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총장>이라는 감투가 투표라는 형식을 통해 총장선거가 시행 되었다. 총장이 교수들의 선거로 결정되다 보니 교수들 가운데 일부는 이 제도를 이용해서 총장이 되겠다는 포부와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총장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교수들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인맥을 동원하고, 학맥을 동원하고, 출신지역을 동원하고, 전공분야, 대학별로 동원되고, 선거본부가 생겨서 투표작전이 시작되었다. 사회의 선거방식을 꼭 빼 닮고, 더러는 배운 게 있으니까 선거방식을 더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일례로 호텔에 선거본부를 차리고, 예산을 쓰고, 또 각급 단위 별로 조직책을 선정하여 선거전략을,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또 타 후보의 약점을 들춰내고, 때로는 금품 제공, 골프접대, 식사접대 등이 자행되는가 하면, 연설회 때 박수부대 동원하고, 때로는 오직 선거에 이기는 것만을 생각하는 거의 단말마적 행위를 자행하여 눈살을 찌프리게도 하였고. 또한 총장선거제도가 생기니까 너도나도 미래 지향적으로 언젠가는 한번 당선되겠다고 생각하여 무조건 출마하여 이름을 알리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렇게 하여 10년 만에 당선된 사람도 있었다. 또 선거가 끝나고도 계속 상대방을 붙잡고 늘어지고 계속 승리한 측과 패배한 측이 세상에서 생각할 모든 짓거리를 과감히(?)실행하여서 개인의 사생활까지 파고들어 들추어 내기도 하였다. 또 당선된 측은 자기들 측만 소위 학교보직을 싹쓸이하여 임명하는 등등 한마디로 흔히 사회에서의 각급, 각종선거에서 보는 모든 방법이 가감 없이, 어떤 경우는 한 수 더 떠서 소위 '지성인' 이라고 하는 교수들의 선거 <총장 직선제>가 그 동안 시행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일부 뜻있는 교수들과, 비교적 나이 들고 보수적인 교수들은 총장선거제 뿐 아니라 학내 선거제도에 대해 비판하고 중단할 것을 생각했고 요구했지만, 자기 손으로 직접 투표하여 뽑아야지만 이사회의 눈치를 안 본다든지 또 학교가 발전되고, 교권이 확립된다는 교수들의 반론과, 특히 젊은 층 교수들의 생각도 만만치 않다 보니 지금까지 <총장선거제도> 등 학내선거가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선거제도에 어떤 종류의 교수가 출마할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소위 대학교에서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는 교수들은 능력이 없어서인지(?) 또는 혐오감을 느껴 출마하지 않게 되었고 흔히 교수들 중 사회성 있고, 명예욕 있고, 또 가장 정치성이 있으며 나아가 정계나 행정부의 진출을 원하는 다시 말해 <총장>직위를 이러한 곳에 자의든 타의든 연결시키기를 원하거나 연결이 가능한 교수들이 출마하게 되었다. 따라서 선거제도를 통한 총장은 흔히 우리가 머릿속에, 추억 속에 그려있거나 그리고 있는 예전 총장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확신한다. 그 동안 유수한 대학교에서 선거를 통해 당선되어 총장이 됐던 분들이 정계에, 행정 계에 진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본인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대게는 개인을 위해서나 출신대학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으로 사료된다. 이번에 또 한 명의 대학총장 출신이 정계에 진출 하였다. 아직도 언론과 국민들은 선거제도에 의한 대학총장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언론에서 품위 있고, 교양 있는 대학총장이 운운" 되는 것을 보니.「대학총장선거」라는 허울 좋은 명칭 하에 펼쳐지는 창피스럽고 한심한 총장선거제도 이제는 쓰레기통에 버려야겠다./윤방부(가천의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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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23 23:02

[금요칼럼] 사람들은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 전용배

직장 때문에 부산에 거주한지 거의 6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곳 사람들의 야구 사랑이다. 집착에 가까운 야구 사랑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전공자의 입장에서 여러 갈래로 해석해 보려하지만 쉽지 않다. 본질적으로 스포츠는 허구(虛構)의 세계이다. 영화, 음악, 미술 등 예술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재미나 오락적요소가 있다고 여기지는 영역들은 자세히 보면 예외 없이 허구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나이가 어릴수록 이러한 세계에 쉽게 몰입하는 반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현실을 직시하는 기성세대가 되면 자연스럽게 시들해진다. 순수한 감정이 사라지면 스포츠나 예술에 몰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곳 사람들은 순수해서 야구에 몰입하는가.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수많은 이유가 내재되어 있다.엘리스 캐시모어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스포츠, 그 열광의 사회학'에서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를 현대사회가 가지는 특성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현대사회는 과거에 비해 예측가능한 일이 많아 졌으며, 그에 따라 삶은 과거에 비해 비교적 안전하다는 것이다. 즉 삶이 너무 뻔해지다 보니 무언가 자극적인 것이 필요하고, 예측불가능 한 영역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스포츠라고 규정하였다. 옳은 말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한편에서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팬들을 향해, 스포츠의 비합리적 낭비성을 질타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스포츠가 가난과 가정불화, 인종차별 또는 기타 현대사회의 어떤 병리현상의 개선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은 스포츠에 열광한다.도대체 스포츠의 무엇이 우리를 사로잡는가? 첫째는 도전과 응징이다. 인간의 본성은 도전에 맞서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진화적 적응의 일부이다. 인간이 하나의 종(種)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도전에 맞섰기 때문이다. 스포츠에서 승부는 도전과 대립 그리고 극적인 결과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공정한 경쟁이다. 오늘날 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는 경쟁이라는 요소가 적용되고 있다. 문제는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실력이 있음에도 좌절하는 경우는 다른 많은 영역에서는 흔하디 흔하다. 세상이 꼭 실력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정확한 잣대를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어떤 영역에서든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사파무림(邪派武林)'의 고수는 널려있다. 그러나 적어도 스포츠 세계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많지 않다. 아무리 감독이나 코치가 선수를 폄하해도, 실력이 있으면 벤치에 머물지 않는다. 관중석의 팬들이 가만두지 않는다. 경기력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회는 오게 되어 있다. 그냥 쓰러져간 다른 영역의 '무명용사'와는 확실히 다르다. 셋째는 대리만족이다. 인생과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극복하기 힘든 것들이 스포츠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를 대신한 그들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는 것'이 바로 스포츠이다. 때로는 좌절하지만 다행히 스포츠에서는 영원한 패배자가 없기에 언젠가는 승리하게 되어있다. 물론 영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러한 대리만족은 희망을 상징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일본 오사카를 기반으로 하는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는 75년 팀 역사상 일본시리즈 우승은 오직 한번 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구상에서 가장 열광적인 팬을 거느리고 있으며, 게임당 평균관중이 4만 명이 넘는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일본인들도 스포츠 앞에서는 '비이성적'이다. 게임당 2만 명 이상을 동원하는 롯데자이언츠도 성적만 보면 초라하다. 지난 27년 동안 정규리그 1위는 해 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팬들은 열광한다. 비록 스포츠가 허구와 비이성의 세계임에는 분명하지만, 적어도 스포츠는 조작이나 편집이 없는 진검승부이다. 우리가 스포츠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는가./전용배(동명대 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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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1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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