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문화콘텐츠 50] ③동학농민혁명
전사를 만드는 것은 낫이나 괭이나 죽창 같은 무기가 아니다. 저항의 정신이 전사를 만든다. 조선의 농민군. 그 아름다운 정신에 기꺼이 동의한 갑오년 조선의 민중은 전사인 동시에, 현실의 불리함에 굴복하지 않는 삶의 가치를 보여준 진정한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다. 혁명의 끝은 처참한 고통을 안겼지만, 그들의 함성은 '파랑새'로, '녹두꽃'으로 옮겨져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졌고, 그들이 가졌던 희망의 싹은 미래의 터전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고, 거대한 나무가 되고 있다.한민족의 역사에서 한 시대를 뒤흔든 사건들 가운데 동학농민혁명만큼 각광받는 사건은 드물다. 우리 근세사 최대의 개혁운동이며 사상운동인 동학농민혁명. 이 혁명은 민중의 자각에 의한 최초의 전국적인 농민항쟁으로 기억된다. 왕조시대의 모순을 타파하고 만민평등의 근대시민정신을 추구한 이 혁명은 한국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문화원형적 소재다.동학의 귀함을 먼저 깨달은 예술인들은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억눌린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꺼진 혼불을 환하게 지펴 올리는 해원의 한마당을 선사하고 있다.'먹구름 속에 잠깐 내비친 하늘'로 동학농민혁명을 회상한 신동엽의 장편 서사시 「금강」을 시작으로 이 땅의 시인들도 그 역사에 동참했다. 김남주는 '죽창'으로, 김지하는 '핏발 선 눈'으로, 최형은 '녹두새 울던 여름'으로, 김용택은 '눈 내리는 모악'으로, 박두규는 '돌멩아 돌멩아'로, 박남준은 '전라도 사내'로, 안도현은 '척왜척화 척왜척화'하는 물결소리로, 사람의 이치를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귓가에 읊조려 주었다. 1970년대 이후 활발하게 쓰인 이러한 시들은 혁명의 주역인 전봉준·김개남 장군이나 동학의 시조였던 최제우 등 주요인물과 동학의 전개과정에 대한 회상, 전적지를 돌아본 기행, 농민운동이 가진 반외세 반봉건적인 요소에 대한 재평가 등을 주요 소재로 선택했다.우리 역사에서 반복되는 수탈과 저항을 동학으로 되살려 낸 박태원의 소설 「갑오농민전쟁」과 최인욱의 「전봉준」, 박연희의 「여명기」, 이용선의 「동학」, 유현종의 「들불」, 이병천의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도 그 뜻은 한결같다. 특히 송기숙의 「녹두장군」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답적인 질문에 명확한 해답을 들려줬다.'동학'은 시와 소설뿐 아니라, 연극·영화·창극·뮤지컬·무용 등으로 다양하게 창작되고 극화돼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자원이 되고 있다.1988년 극단 아리랑에서 제작한 <갑오세, 갑오세>는 먹쇠·춘복·판동 등 혁명에 참가한 평범한 농민들을 이야기 중심에 놓고, 전봉준·김개남 등 농민 전쟁을 이끌어 간 지도자들의 갈등, 외세와 결탁한 조정의 무능함, 청·일 전쟁을 일으키는 청국, 일본의 움직임 등을 주변에 배치해 다양한 측면에서 동학 농민 전쟁의 전 과정을 보여줬다. 또한 풍물과 민요, 꼭두각시놀이, 판소리 등 우리 고유의 연희 양식과 18기, 가부키, 일본 검도 등을 다양하게 활용, 작품을 풍성하게 했다.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인 1994년에 공연된 음악극 <천명>은 안숙선·왕기석 등이 주요 배역으로 참가해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천명>은 전봉준을 주요 소재로 극을 전개하고, 연극과 창극, 음악이 결합된 형태로 제작됐다. 신동엽의 동명 서사시를 바탕으로 한 가극 <금강>은 서양의 오페라와 뮤지컬에 우리의 창극을 접목했다. 안도현의 시를 극화한 마당극 <서울로 가는 전봉준>(창작극회)과 오페라·창극·무용극이 결합된 <녹두꽃이 피리라>(전북대학교), 창작오페라 <녹두장군>(호남오페라단), 무용극 <파랑새>(전북도립국악원예술단)도 동학을 매개로 한 대표적인 공연작품이다. 특히 동학을 소재로 창작된 시와 소설을 활용해 제작된 칸타타 <새야 새야 파랑새야>(정읍시립국악단)는 가슴 저린 시의 언어와 소설의 구조가 무대의 언어로 스며들어 더 귀한 감동을 선사했다.이처럼 꽤 많은 작품이 동학의 깃발을 앞세우며 무대에 올랐고, 오르고 있다. 문화콘텐츠로서의 가능성이 풍부하다는 증거다. 하지만 '동학'을 떠올릴 때 첫 손에 꼽을만한 작품은 아직 없다. 제작비와 공연비 부담 등으로 대부분 일회성 공연에 머무르고, 재공연이 된다고 해도 특별한 재창작의 과정 없이 다시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동학'을 한국 대표 무대극으로 성장시키고자 할 때, 먼저 살펴봐야 할 작품이 뮤지컬 <명성황후>다. 19세기말 외세의 틈바구니 속에서 쇠락해가는 조선의 왕비로 간택된 민자영의 일생을 다룬 이 작품은 제작비 12억 원과 제작기간 4년을 들여 1995년 무대에 올렸다. <명성황후>는 한국적인 군무와 노래, 화려한 무대 의상과 회전무대를 이용한 빠른 장면 전환 등은 첫 공연부터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 후 이 작품은 12년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창작 뮤지컬로는 드물게 장기 공연을 했기 때문이지만, 그 성공의 바탕에는 끊임없는 재창작의 과정이 있었다. 대본과 작곡, 연기, 무대 등 공연에서 지적되는 문제들을 꾸준히 다듬어 공연 횟수가 쌓여가면서 더욱 튼실해진 것이다. 또한 <명성황후>는 작곡가 미셸 쇤베르와 의상디자이너 왈라 킴 등이 기획과정부터 참여한 국제적인 프로젝트로 진행됐다.단일 작품으론 최초로 전용관을 운영, 개관 6년 만에 외국인 국내 관람객 100만 명을 돌파한 <난타> 역시 기획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하고 제작됐다. 뉴욕 브로드웨이나 런던 웨스트엔드 관객의 70~80%가 외국인인 것에서 가능성을 찾았다고 한다.1999년에 공연된 한국오페라단의 <황진이>는 우리 창작 오페라 사상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1990년 원로시인 구상에게 대본을 의뢰한 것을 시작으로 10년 가까운 준비 끝에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한국 뮤지컬의 대표작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도 오랜 공연기간 동안 꾸준하게 작품을 다듬어 왔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작품은 더 오랜 산고를 거쳐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동학'도 마찬가지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라는 군목 같은 노래를 통해 우리는 동학과 민중항쟁의 역사의식을 은연 중 익히게 되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21세기의 선진국은 '문화의 세계화'를 이룬 나라다. '문화의 세계화'는 민족 고유의 독창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이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일이며, 지역 주민의 삶이 문화적 삶이 될 때 가능할 것이다. 한민족의 사상적 기반인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알려나가는 일은 전북의 가치와 힘을 재확인하고, 세계 속에 빛날 우리 문화의 밝은 미래를 전망해 보는 기회다. '꽃심의 땅'곳곳에서 펄럭이는 동학의 깃발을 우리 문화의 앞선 콘텐츠로 삼고, 시와 소설로, 연극과 영화로, 뮤지컬과 오페라로, 창작판소리와 창극으로 알려내는 일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1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에도 생생하고 뜨겁게 느껴지는 동학농민군의 숨결과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외치며 들풀처럼 일어났던 그들의 혁명정신. 민중의 역사는 동학을 소재로 오래 기간 다듬어진 무대극을 통해 새로운 희망의 역사로 진화될 것이다. (……) 그러나 조금은 서둘러야 할 일이다. /최기우(극작가·전북일보 문화전문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