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청춘예찬] 예수간호대학
85년 1월 의료선교사로 네팔에 첫발을 디딘 이춘심동문(23회). 5개월동안 언어교육을 받고 파탄병원 근무가 시작됐지만 언어장벽은 가장은 큰 고민거리였다. 의료활동 뿐아니라 선교활동을 맘먹고 온 그에게 언어의 벽은 답답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보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불교국가인 네팔에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정부였다. 골리앗같은 네팔정부의 핍박 속에서 꿋꿋히 버텨보기도 했지만 92년 한때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얼마만에 결국 다시 네팔로 돌아가 선교와 의료봉사활동 속에서 네팔인인 남편과 함께 기독교 종합대학으로 인가받는 결실을 맺고 있다.그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헌신과 사랑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녹원동산을 기억했을지 모른다.‘녹원동산’. 전주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인 곳. 반세기가 넘는동안 ‘소명감있는 기독간호사 양성’이라는 개교이념에 따라 꿈많던 소녀들에게 천사같은 간호사의 길로 안내해준 곳.1950년 미국남로장로회의 처녀선교사 고 마가렛트 프리챠드(Margaret Prictchard:한국명 변마지)의 손길로 문을 연 ‘전주예수병원 부속간호고등학교’(지금의 예수간호대학). 콜롬비아대학에서 배운 간호학과 아울러 기독교 교육학을 따로 공부했던 변마지 초대교장은 간호선교사 양성을 위해 생애를 아낌없이 바치며 소녀들에게 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보여줬다.예수간호대학이 50년이 넘는동안 기독선교 간호사라는 한결같은 길을 걸을 수 있었데는 바로 변마지 초대교장의 실천적인 삶이 바탕에 있었던 것이다.1948년 문을 닫았던 예수병원을 폴 크레인박사와 함께 힘을 보탠 변교장은 2년뒤 간호학교 설립의 뜻을 품고 3만5천불을 받아 간호학교 건립에 들어갔다. 그때 터를 잡은 곳이 바로 전주시 중화산동 1백49번지 현재의 엠마오 사랑병원 자리다.서양의술이 전해진지 50년이 되는 시기였지만 여전히 간호사를 천한 직업으로 여겼던 게 사실이었지만 첫해 입학생을 뽑을 때 10:1의 높은 경쟁율을 보이기도 했다. 개교한지 한달도 채되지 못해 한국전쟁이 발발해 휴교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2년뒤 정부로부터 공식인가를 받게 된다. 55년 1회 졸업생 10명을 배출한데 이어 지금까지 모두 3천여명의 나이팅게일 배출했다.3천여명의 동문은 전국 각지에서 설치된 지회를 중심으로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으며 특히 해외에서 활동중인 동문들이 적지않다.미국 2백여명을 비롯해 독일, 캐나다, 스위스 등에서 예수간호대생의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녹원 가족 가운데는 7명이 동문인 말그대로 ‘동문가족’인 집안도 있다. 한양대병원에서 몇해전 퇴임한 1회 졸업생 김정숙동문은 여동생 두명(16회 김인숙·17회 김명숙), 며느리 (조순복·31회), 조카(21회 한경희, 24회 유하숙), 조카며느리(31회 김신자)등 모두 7명이다.끈끈한 동문들의 후배사랑도 이어지고 있다. 4년제 대학설립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뜻을 모아 99년 8월부터 모금운동을 시작해 2000년 5월 개교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동문회장이 학교에 4년제 대학설립 발전기금 2억원의 약정서를 기증했다. 27일에도 개교 52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사랑과 봉사 몸으로 실천한 이 대학의 표상 - 초대교장 변마지"변마지의 삶과 철학"90년대 들어 이 대학 동문회의 활동중에 가장 의미있는 사업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변마지 초대교장의 일대기를 출간한 것이다. 그만큼 초대교장에 대한 동문들의 존경은 다른 대학이나 학과에서 만날 수 없는 특별함이다.‘변마지의 삶과 철학’에는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봉사자는 고통받고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와 누나, 딸이 되어주는 간호사’라며 늘 사랑과 봉사의 중요성을 심어준 그의 삶이 녹아져 있다.변마지 초대교장(1900∼1988)은 예수병원의 크레인박사와 함께 1950년 개교부터 1970년 은퇴할때까지 초대교장으로서의 대학의 발전에 평생을 바쳤다.어려서부터 선교사의 꿈을 키웠던 그는 1930년 8월 한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광주 그레엄 기념병원(제중병원) 간호과장으로 임명된 그는 당시 한국에 간호사들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감안해 광주간호학교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일제치하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와 미션계 학교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학교는 폐교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변교장이 전주로 돌아온 것은 1947년. 크레인 박사와 함께 예수병원 개원에 힘을 보태고 1950년 간호학교 개교 이후 20년동안 헌신적으로 학교발전에 참여한다. 늘 사랑으로 가득하면서 올곧은 모습이었다. 그의 별명이 된 ‘다가산 호랑이’에 얽힌 일화는 그의 인품을 그대로 보여준다.1950년대 당시 국무총리의 딸이 간호학교 입학을 원했지만 결국 시험에서 낙방하게 된다. 당시 독재정권 아래에서 총리의 자녀들은 원하는대로 대학을 갈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변교장은 총리의 딸을 원칙대로 불합격처리했고, 정부기관에서는 병원(예수병원)를 폐쇄하고, 변교장을 추방시키겠다며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교장은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으며 결국 총리의 딸은 외국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후부터 변교장은 ‘다가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동문회 총무인 김금자교수(대학 학사지원처장)은 “70년까지 초대 교장과 함께 생활한 학생들은 물론이고 이후에 입학한 후배들에게도 초대교장의 희생적이고 실천적이었던 삶은 동문들의 가슴속에 늘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학교 설립이념 따라 간호선교의 길을 걷는 동문들 주의 복음과 나이팅게일의 순수한 정신을 이어받아 설립된 예수간호대학. 대학은 학생들에게 간호사로서 사회에 봉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 것을 철저히 교육시키고 수업시작 전에 예배와 기도를 통해 대학설립이념을 이어가고 있다.3천여 동문들이 의료현장 뿐아니라 해외선교와 사회 의료봉사에 많은 동문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일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남미의 한 나라에서까지 봉사의 삶을 살고 있는 동문들은 10여명. 국내 선교활동에도 10여명이 봉사의 참뜻을 실천하고 있다. 또 동문회(회장 공순구)에서는 ‘또다른 밀알의 싹’을 위해 해외선교사역에 종사하는 동문들에게 활동비를 지급해오고 있다. 녹원동산에서 시작된 밀알을 세계의 온 인류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사랑의 실천에 동문들이 힘을 보태며 나섰던 것이다. 비롯한 큰 액수는 아니지만 힘을 보태는 동문이나 도움을 받은 해외선교에 나선 동문들에게 동문에 대한 자부심이나 끈끈한 동문애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해외선교사진청자(9회, 인도), 윤자애(12회, 네팔), 김정희(13회, 독일), 민경옥(15회, 키르키스탄), 이성옥(20회, 수리남), 이춘심(23회, 네팔), 박영희(25회, 중국), 최주엽(32회, 브라질), 오미숙(32회, 필리핀), 고은실(34회, 필리핀), 유연순(37회, 이집트)△선교단체 봉사서정순(6회,기독간호사회), 이숙재(19회, 침례교 여전도회 연합회), 유계숙(24회, 행복재활원), 김차옥(25회, 지리산 의료선교), 박혜란(32회, 서울시 적십자봉사대), 박순자(34회, 음성 꽃동네), 한명숙(37회, DSM 선교단체)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