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시대, 전북을 말하다] (4)황병기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유영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지난 20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는 마침 '정오의 음악회'가 열렸다. 지난 2009년 5월 이 공연이 처음 열렸을 때 음악회의 성공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2년째를 맞은 지금, '정오의 음악회'는 국립극장의 공세적인 관객 개발에 성공한, 간판 프로그램이 됐다.주말도 아닌 평일, 그것도 예외없이 오전 11시에 시작된 7월의 음악회에도 해오름 극장 1500여석 객석은 가득찼다. 연주가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사이 사이에 해설자 황병기 예술감독은 군더더기 없는 간명한 설명으로 연주곡 감상을 도왔다. 무대와 관객이 소통하는 현장은 감동과 신명이 넘쳐났다.전통을 바탕으로 현대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어온 가야금 명인 황병기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74)과 유영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54)을 만났다.황감독과 유감독은 전북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황 감독은 "부모님 고향이 군산(옥구)이어서 전북에 대한 생각이 특별하다"고 했고, '남원 사람' 유 감독은 1985년부터 10년동안 우석대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했던 시절까지 "모두가 소중한 삶의 기억"이라고 했다.같은 시기에 국립단체 예술감독으로 임용돼, 연임(임기 3년) 전통이 없는 곳에서 5년 반째 같은 일을 맡고 있는 황 감독과 유 감독과 나눈 인터뷰는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했다. 그만큼 새겨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연주로만 뵈었던 선생님을 해설로 만나는 무대가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해설 시간이 생각보다도 짧더군요.(황병기 감독-이하 '황')"오늘은 특히 음악이 길었거든. 그래서 보통 때보다 더 간단히 했어요. 해설은 항상 상황봐서 해요. 해설 하는 일요? 그런대로 또 재미있어요."(유영대 감독-이하 '유')"선생님은 음악활동 뿐만 아니라 사실은 우리나라 최고의 해설가세요. 작곡의 계기, 배경 등을 말씀해 주실 때에도 아주 구체적인데 상당히 보편적인 내용이지요. 말씀이 재미있고, 끌어들이는 힘이 있으세요."-두 분 모두 전라북도에 뿌리를 두고 계신데, 전북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지고 계시는지요.(황)"제가 삼대독자예요. 그래서 버릇 없이 자랄까봐 어머니께서 엄하게 하셨지요. '사람은 흙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교육이념이 확고한 분이셨죠. 방학이면 옥구 임피에 있는 외가로 쫓아 보내셨어요. 거기서 외사촌들과 함께 초가집에서 지내면서 시골의 정서를 이해하고 자연에 파묻혀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만 살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시골 냄새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한데, 칠십 평생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이야기들은 대부분 어린시절 외가에서 들은 것들입니다. 이런 경험과 기억들이 후에 나의 음악에 영향을 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유)"저도 그렇지만 우리 창극단에 전북 출신들이 특히 많아요. 그런데도 전주 공연을 가면 명창 뿐만 아니라 귀명창이 많아 단원들이 긴장을 하지요. 두려워하면서도 도전하고 싶어하는 무대가 전북입니다."(황)"이런 기억도 있어요. 50년대에는 1년에 가야금이 여남은 대 팔릴 때였지요. 그 때 가야금을 만드는 사람이 전주에 한 명 있었어요. 김광주라고. 우리나라 최초의 악기장, 첫번째 인간문화재였죠. 그 아버지가 김명칠씨였는데."-국립극장의 홍보 마케팅 전략이 돋보입니다. 소속 단체들도 많은 변화를 요구받았을 것 같은데요.(황)"2006년 예술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첫 임무가 상임지휘자를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진즉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는데, 노조에서는 반대하는 사람이었어요. 결국 상임지휘자를 뽑지 않고 대신 객원지휘자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체제가 안정된 후에는 어떻게 관현악단을 이끌고 나갈까 고민했습니다. 국악관현악단이 무조건 전통을 계승하는 단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죠. 나는 우리 단체가 '오늘날 우리의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나라의 음악을 대표하는 '국가 브랜드' 공연을 기획했고, 우리 정신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네가지, 기독교·불교·도교·무속신앙을 주제로 네 곡의 작품을 위촉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내가 너무 예술성만 생각하고 한국음악의 정체성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했지만 나는 정체성이라는 게 반드시 옛것을 답습해야만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신념으로 새로운 국가 브랜드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유)"아무래도 고전을 바탕에 두지만 고전과 현대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것을 고민하지요. 관현악단이나 우리 창극단이나 전통을 훼손시키면 문제가 있지만 오늘의 관객을 소외시키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두 분은 국악에 있어 새로운 실험을 바탕으로 한 창작작업을 주도해오셨습니다. 황감독님에게는 국악 창작을 통해 국제무대 진출을 이어내셨고, 덕분에 우리 음악에 활기와 발전을 가져왔지요. 특히 가야금에서 양손주법을 시도한 것은 파격적이었는데요.(황)"작곡을 할때면 늘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전통적인 틀을 부수어야 했어요. 그러다보니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런 작품은 허무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전통에만 머무르기는 더 싫었어요. 그래서 찾아낸 해결책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이를테면 조선 후기 음악을 넘어 신라시대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1974년에 발표한 '침향무'는 그렇게 나온 작품입니다. 이국적인 새로운 가야금 주법도 여럿 나오고, 장구 반주도 양쪽 가죽 말고도 나무통도 치고, 채를 내려놓은 손가락으로 연주하기도 하지요. 창작이나 창조는 어려운 길이에요. 그런데 사실 어려워야 재미있거든. 어렵지 않으면 식상해요."(유)"선생님에게 창작은 새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반복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움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작업은 그 자체가 먼저 충격으로 다가오지요. 고도의 음악성이나 익숙함 보다는 뭔가 충격적인 느낌, 그런데 그런 것들이 대중성을 확보해 나가죠.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게 전통과 일정한 맥이 닿아있어요.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사적인 정신세계와도 연결돼 있지요. 선생님의 작업을 보면 후기로 올수록 전통에 훨씬 더 충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을 더 명확하고 확실히 알아야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거죠."-요즈음 음악은 어떻게 보십니까.(황)"요즈음 사람들은 흥겹고 신나는 음악만을 찾는데, 옛날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민속악을 하는 사람들도 짜임새를 중요시 여겼죠. 격조를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원래 판소리 하는 사람은 판소리와 단가만 하지 민요는 물론 잡가도 안했습니다. 판소리 하는 사람은 광대, 잡가하는 사람은 잡가꾼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특히 산조는 격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어요. 격조가 높으려면 짜임새가 좋아야 해요. 요샛말로 하면 구성감이죠. 구성감이 있으려면 이것 때문에 이것이 있는 것, 즉 논리가 있어야 해요. 한 부분을 놓고 보면 판단이 안되니 넓게 봐야 해요."-가야금도 전통 12현에서 나아가 17현, 18현, 25현까지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데요.(황)"내 경우, 17현까지는 작곡 했지만, 25현 가야금은 하지 않았어요. 가야금은 20현이 넘어가면 너무 서양화 됩니다. 서양악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양방언씨 전공이 피아노인데, 20현 넘는 가야금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그냥 칩니다. 그런데 12현은 못치거든요. 실제로 20현 넘는 악기는 서양악기 하는 사람들이 잘해요. 가야금은 18현까지는 전통음계인 5음계로, 20현 넘으면 서양음계인 7음계로 해요."-유감독님은 '청'에 이어 '춘향', 최근에는 '로미오와 줄리엣'까지 새로운 창극을 연이어 내놓으셨는데요. 기대 이상으로 대중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 같습니다. 초창기에는 어려움도 있으셨죠.(유)"처음에 와서 보니 '배우들과 관객들이 근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500석 극장에 200∼300명 모아놓고 '얼씨구 좋다'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창극은 보편적·세계적 음악극이라고 선언부터 했습니다. 북장단이나 수성반주에 익숙한 소리꾼들에게 악보나 지휘자의 지휘봉을 보며 소리를 하도록 했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관현악곡으로 편곡하고 화성을 넣어 음악적 완성도를 높였어요. 대신 판소리 부분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십오세나 십육세 처녀'가 그 첫 작품입니다. 내부적으로는 반발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관객들이 우리 창극이 이렇게 좋았는지 몰랐다고 할 정도로 만족스러워 하자 단원들도 바뀌더군요."-창극의 가능성을 어떻게 보십니까. 뮤지컬 대중화가 확연한 지금, 창극으로도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요.(유)"물론입니다. '청'은 2006년 전주에서 초연을 했죠. 지금까지 72회 공연해 8만3000명이 관람했습니다. 지난해 만든 창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특히 연극하는 사람들이 많이 봤습니다. 8월 '제19차 국제비교문학회 세계대회'와 10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도 초대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창극은 가능성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단, 동시대 사람들의 취향을 반영하며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우리시대 창극이어야 합니다. 전통창극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과 지역성에 현대적 보편성을 더해야 해요. 이 작업을 전라북도가 해야 합니다."-전통을 지키는 것과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것 사이에서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통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요.(황)"창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창작을 하든지 전통에서 출발하는데, 한편으로는 그 전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걸 만들려고 하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과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 이 두가지가 긴장관계인데 그 긴장 속에서 창작품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전통에만 너무 치중하다 보면 고루해지고, 전통에서 너무 벗어나려고 하면 허무해집니다. 새로운 걸 내놓았지만, 뭐가 뭔지 몰라 허공에 둥 떠버리고 말죠. 그래서 전통과 새로운 것, 그 사이에서의 갈등, 딜레마에서 창작이 나오는 겁니다. 그것을 해내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예술성이지요."-결국 창작이란 전통과 새로운 것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는 말씀이시군요.(황)"좋은 것은 완전히 상반된 것에서부터 나옵니다. 동양의 '음양'만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미인을 보면 그림 같다고 하지요. 기가 막히게 잘 그린 그림을 보면 살아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매력있는 남자는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있어야 하고 아름다운 여성은 건강미가 있어야 합니다. 묘하게도 항상 반대를 끌어안는 게 있어야 해요. 좋은 음악을 들으면 눈 앞에 풍경이 떠오르고, 아름다운 풍경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려옵니다."-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황)"아직 창작 작업 계획은 없어요. 연주는 많이 합니다. 28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올림푸스홀에서 '琴 et 이마쥬, 가야금 황병기'라는 제목으로 연주 합니다. 흔히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데,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마음을 비우고 청산과 녹수처럼 절로절로 살아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가야금을 매일 하면서 열심히 배우고 친구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겠습니다."(유)"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의뢰를 받아 상설공연될 작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전남 구례에서 열리는 '동편제소리축제'를 맡게 됐는데, 절대 전주세계소리축제와 경쟁 관계는 아닙니다.(웃음) 장기적으로는 브레이트의 대표작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과 '패왕별희'를 창극으로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지는 우리 고전이 현대에 와서 어떻게 호흡하는 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얼마전 전주 한옥마을을 갔는데, 많이 좋아졌더군요. 작은 창극을 기획해 일년 내내 공연이 가능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하루도 가야금을 쉬지 않는 황 감독은 "나에게 가야금은 우리 민족으로부터 받은 은혜"라고 했다. 1500년간 전해온 그 가야금 소리를 좀더 바르고 새롭게 내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 그 은혜예 보답하는 일이라고도 덧붙였다.유 감독은 한국에 창극이란 장르가 있다는 걸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길은 멀고 날은 썩 밝은 것 같진 않지만, 여기가 출발점이고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대담 = 김은정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