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문화의 발견] 도내 자치단체 박물관 설립과 운영
지난 1월, 국립박물관장들이 성명서를 냈다. 지극히 실용주의 문화정책을 추구하는 새 정부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문화관광부 소속의 국립박물관을 문화재청 산하기관으로 흡수·통합하겠다는 개편안을 발표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들은 문화계 인사와 박물관협회 등 관계 기관과의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고 결정한 '반문화적' 정책이라고 반발했다.국립박물관은 한 나라의 문화를 가늠하는 척도이며, 미래 문화창조의 원천이기 때문에 민족문화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담았다. 인터넷 카페와 전국박물관들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 성명 사건(?)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여전히 활화산일 수밖에 없다.공간적 범위를 좁혀서 볼 때, 지방자치단체에서 설립·운영하는 공립박물관 역시 그 지역의 문화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하지만 지역 공립박물관 역시 운영과 역할면에서 아쉬움이 많다. 커져가는 관람객의 요구나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공립박물관의 현황과 학예인력의 현장을 들여다본다.▲ 관람객 찾아오기만 기다리는 박물관지난 2002년을 기점으로 전라북도에도 전주역사박물관을 비롯해 고창판소리박물관·김제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남원향토박물관·익산보석박물관·진안역사박물관·순창장류박물관 등 크고 작은 박물관이 뒤를 이어 문을 열었다. 오는 2010년이면 부안청자전시관과 군산시립박물관도 문을 연다.부안청자전시관은 보안면 유천리에 사업비 200억 원 이상을 들여 전시장과 청자 및 도예 체험공간, 연구공간, 부대·관리시설 등을 건립 할 계획이다. 군산시립박물관도 장미동 내항 일원에 157억 원을 들여 전시실과 체험실 등을 갖춘다는 계획이다.자치단체가 박물관을 설립하는 것은 박물관이 그 지역의 문화관광을 진흥할 수 있는 훌륭한 문화자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치단체장의 성과주의도 한 몫하고 있다. 하드웨어에는 몇 십억, 몇 백억의 예산을 쏟아 붓지만 막상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예산에는 야박한 것이 현실이다.지역박물관이 해야 할 많은 과제를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한 선행조건은 전문성 있는 학예인력의 확보와 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예산지원이다. 그러나 도내 대부분의 공립박물관은 학예직이라고해야 겨우 1명에 그치고, 나머지는 운영과 관리를 담당하는 행정직 공무원로 운영되고 있다. 그나마도 정규직 학예인력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그 대부분은 근로기간이 정해진 전임계약직 형태로 운영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도내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대부분의 박물관은 '문만 열어 놓고' 관람객이 스스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일년에 기획전시 한 번 하기도 벅찬 현실에서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이나 홍보·마케팅을 전문화하는 일은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슈퍼맨'이어야 하는 학예연구사지난주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과 BK21사업단 주최로 '문화고시(文化考試) 학예연구사'에 대한 취업설명회가 열렸다. 지난해에도 진행된 설명회였지만 대학원생 뿐만 아니라 학부생들의 관심이 높았다. 그간 고고학, 역사학, 인류학, 미술사학 등의 특정 학문을 전공한 석사학위 이상의 고학력 전문가들에게 한정되어 있던 학예사자격제도의 폭이 지난 2000년 준학예사 시험제도가 실시되면서부터 크게 완화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현장에서 일을 하는 '고상한' 학예사의 삶은 역시 그림의 떡이다. 우리나라 역시 현행법상 '학예연구사'를 박물관경영, 교육, 홍보, 보존, 전시디자인 등 박물관의 모든 전문직으로 통칭하고 있다. 박물관 등록 조건에서도 종합박물관을 제외하고 모두 1명 이상의 학예사를 요구한다. 따라서 자치단체가 박물관을 설립하여 등록하고자 할 때, 학예사자격증 소지자 1인이라는 최소조건만 충족시키면 된다.미국의 사례를 보자. 미국박물관협회(AMM)는 박물관 전문직 종사자의 직렬을 ①관리위원회 ②관장 ③학예연구원 ④교육담당자 ⑤전시디자인 ⑥편집인 ⑦보존과학자 ⑧자료 관리자 ⑨사서 ⑩홍보기획담당자 ⑪서무 담당자 ⑫시설관리 담당자 ⑬안전요원 등으로 세분화하고 있다. 학예연구원 이외에도 교육담당자, 전시디자이너, 보존과학자, 홍보담당자 등 많은 박물관 전문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올 들어 3년 만에 처음으로 상설전시실 리노베이션을 준비하는 한 학예사는 요즘 몸이 5개여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아침부터 자정까지 일 하고도 시간이 부족해 주말까지 근무릴레이를 이어가고 있다.또 다른 학예사는 행정직 공무원의 학예업무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고민에 빠졌다. 쌓여가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보조인력이나 행정직 동료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그들은 그냥 '한 지붕 두 가족'일 뿐 더도 덜도 아니라고 토로한다.▲ 일할 수 있는 조직·합리적 예산 아쉽다지역의 박물관은 그 지역을 상징하는 자존심이다. 따라서 행정편의나 생색내기식의 건립과 운영은 지양되어야 한다.그렇다면 지역의 공립박물관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취재 과정에서 만난 학예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일할 수 있는 '조직(인력)'과 합리적인 '예산지원'을 꼽았다. 도내 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립박물관 가운데 전주역사박물관(민간위탁운영)의 경우 전시, 유물, 홍보, 교육 등 비교적 다양한 인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다른 박물관은 사정이 다르다.'박물관협력망'을 적극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 지난 2006년부터 시작한 이 사업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을 중앙관으로, 지역별로 대표관을 두어 '박물관에 관한 자료의 효율적인 유통·관리 및 이용과 각종 박물관 또는 미술관의 상호 협력을 도모하기 위한 협력 체제'다. 다소 늦게 구성되긴 했지만 전북지역 박물관·미술관협의회를 활용해 회원관간의 공동전시, 공동홍보, 자문 등의 실질적인 교류협력이 이루어진다면 부족분에 대한 보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지역에 있는 박물관은 모두 지역민들의 지지와 함께 지역내 문화단체(시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지역박물관이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문화원 등의 단체와 유기적인 협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지역문화를 보존하고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청주고인쇄박물관의 사례는 우리지역 공립박물관을 활성화 방안에 좋은 사례다. 지난 2001년 『직지』를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데 맹활약을 한 고인쇄박물관은 현재 학예직 4명과 교육홍보을 담당하는 3명, 기타 직원 14명이 종사하고 있다. 대개의 자치단체 박물관이 시·군청 문화관광과 소속으로 하나의 계(係)에 불과하지만 청주의 경우 운영과, 직지사업과, 학예연구실 등 제대로 체계를 갖추고 있다.2005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박물관의 수는 450여 개에 이른다. 전라북도에는 30여개의 국·공·대학·사립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그 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모든 박물관은 공통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전문가들은 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박물관은 대학이나 사립박물관보다 전문성과 효율성을 담보해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한다./정훈(문화전문객원기자·학예연구사·전주역사박물관 교육홍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