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없다
한병성 전북대 명예교수 지난 9월 2일 문화재청은 경남합천 해인사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인 희랑대사 좌상을 보물에서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실존한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 작품인 높이 82cm좌상은 10세기경 제작되었다. 삼베에 옻칠을 입혀 여러 겹을 겹쳐 만든 건칠기법으로 제작된 좌상의 인자한 눈빛, 엷은 미소를 띤 입술, 주름진 얼굴, 앙상하게 불거진 뼈대와 노쇠한 체구 등은 오랜 수도생활을 통해 득도의 경지에 오른 노승이 아닌, 긴 세월, 온갖 세상 풍파를 이겨내고 삶을 해탈한, 찾아가 어려움을 토로하면 따뜻하게 위로해줄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후삼국 통일을 꿈꾸었던 태조 왕건은 귀신처럼 신묘한 백제군에 밀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해인사에 머물던 희랑대사와 사제의 연을 맺는다. 이 후 스승의 도움에 힘입어 백제군을 물리친 왕건은 스승을 더욱 공경하고 받들기 위해 전답 500결을 시납함은 물론 스승의 거처인 해인사를 증수한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보면, 왕건처럼 위대한 스승을 만남으로 삶이 바뀌거나 또는 혼란스런 시대에 방황하는 민중에게 등불의 역할이 되어 주었던 어른들이 많았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들을 상상한 작가 헬렌 켈러와 엔 설리반 선생의 만남이 그랬다. 해방말기, 혼란기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그러했고, 민주화 열기로 사회가 뜨거웠던 시절에 김수환 추기경이 그 예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스승이 없다. 어른이 없다. 개탄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가정이건 사회건 어른을 모시려하지 않는다. 어려움과 혼란을 잠재우고 새롭게 나아가기 위한 답을 어른들의 지혜로부터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어른을 부정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자초하고 있어 안타깝다. 구성원 간, 계층 간, 세대 간, 조직 간, 의견이 조율되지 못해 막대한 사회적 경비를 지출하고 있는 요즘 같은 때, 조정자 가 될, 등대가 될, 위로 자 가 될, 어른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 대체 어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어른은 귀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신들 앞에 놓인 부정한 이득을 포기하라는 어른, 자신의 잘못된 모습이 반추되는 거울 같은 어른, 막 나가고 싶은 발 거름을 가로막는 어른이 있어 뜻대로만 할 수 없어 싫은 것이다. 다음은 인터넷이 문제다. 어느 때 씨를 뿌릴지, 추수를 할지 등 삶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선배들의 경험으로부터 얻어졌던 농경사회에서는 어른의 경험이 삶의 원천이요, 성공과 실패의 지렛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인터넷만 뒤적거리면 수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어른의 경험을 여쭈어야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해도 무방해졌다. 어른의 경험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경험은 값없어 보이고, 경험담을 들려주면 귀찮은 참견으로만 느껴지게 되었다. 부모는 눈앞에 닥친 어려운 경제만 지원해 주면 되는 증여자의 역할로 충분하다는 배금주의가 만연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시대에 요구되는 어른의 덕목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은 올바른 가치관과 신념을 소유하되, 진실해야 한다. 자신의 미숙함, 잘못을 시인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타인을 향한 사랑이 넘쳐나야 한다. 폭넓게 소통하되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야 한다. 먼저 답하지 않으며, 타인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 변화를 빠르고 바르게 읽고 적응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구든 나이, 성별, 직분에 관계없이 어른이 될 수 있다. 항상 준비된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늘 깨여 있으라고 신은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병성 전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