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에서] 내고향, 절라북또! - 김은섭
「지난 7월17일 내린 폭우로 천안-논산 고속도로의 차령터널이 토사에 막혀, 수백대의 차량이 1시간 반 동안 터널에 갇혔고, 도로 통행은 6시간 넘게 중단됐다.」나는 이 차령터널을 지날 때마다 묘한 감정이 인다. 이는 아마도 호남인들에게 지난 천년 동안 짐이었고, 또 앞으로 얼마일지 모를 세월을 지고 가야 할 천형(天刑)같은 배산역수(背山逆水)의 풍수설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943년 임종을 앞두고, 가까운 신하 박술희를 불러 왕실의 후손들에게 전할 유훈을 내렸다. 이름하여 訓要十條. 왕건은 그 10조 중 제 8조에서 車峴以南...山形地勢竝 趨背逆人心亦然......... 雖其良民不宜使在位用授 -차령 이남의 산세와 지세는 모두 왕실이 있는 개성의 반대 방향으로 뻗어있고, 인심도 그러하니, ...........차령 이남 사람들은 비록 양민일지라도 등용치 말라라고 유언했다. 이렇게 호남에 대한 정치적 견제와 차별의식은 풍수지리설을 그 표피로 하여 정당화되었으며, 그것이 마치 풍수학적 진실인 양 800년 후인 1751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오늘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내가 본 나의 고향은 단연코 이와는 다르다. 내 고향은 한반도를 타고 가파르게 내달리던 백두대간도 급한 한숨을 돌리고 여유롭게 쉬어가는 곳, 덕유산에서 고원과 분지를 따라 진안과 장수, 남원으로 이어져 천왕봉에 다다르는 소백의 준령을 허리로 하고, 대둔산과 운장산, 모악산, 내장산, 방장산을 아우르는 노령의 준봉들을 가슴으로 하며,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섬진강을 그의 심장에서 발원시키고, 익산과 옥구, 김제, 정읍, 부안의 널따랗고 풍요로운 들녘을 복부로 삼고 있다. 이렇게 서해 바다를 맞돌아가는 고향의 산과 들을 바라보며 반지르르한 갈기를 휘날리는 준마 한 필이 천리를 달려와 새만금 넘어 넘실거리는 서해 바다를 한 숨에 들이킬 듯한 형상이리라.마한,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고려 이후에는 비록 정치적 변방에 머물렀으나, 마한과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것은 바로 우리들의 선조였다. 서동(백제 30대 무왕)은 기발한 지략과 풍부한 예술적 감성으로 신라의 선화공주를 사랑에 빠뜨려 아내로 맞이하였고 웅장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백제의 건축가였던 아사달과 아비지는 신라로 건너가 불국사의 석가탑과 황룡사의 9층 목탑과 같은 불세출의 걸작을 남겼다. 일본으로 건너간 왕인은 백제문명을 전파하여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를 일으킨 시조가 되었다. 또한 우리의 선조들은 만인의 총이 웅변해주고 있듯, 국가가 위난에 처한 때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며, 근대사의 변혁기에 동학농민운동은 사회개혁을 주도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선조들은 그야말로 평화롭고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산간과 평야, 바다를 아우르는 풍부한 물산은 넉넉한 인심으로 이어져 이웃 간에 베풀고 나누는 맛의 문화와 함께 풍류와 멋을 즐기는 멋의 문화를 낳았고, 판소리 동편제를 비롯한 농악, 산조, 시나위 등의 소리의 문화를 엮어내었다.지금, 고향 밖의 세상은 소용돌이처럼 급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는 극심한 경쟁으로 몰리고 있다. 21세기는 문화의 힘(Soft Power)에서 미래를 찾는 시대라고 이어령 선생은 말씀하셨다. 경쟁사회를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문명이 아닌 문화, 즉 다양성과 나눔, 동등함과 공감을 전제로 하는 문화의 전파이다. 다양한 재료들이 한 데 어우러지는 전주비빔밥이 기내식으로 세계를 누비고 있다. 효율성의 논리에 밀려 사라져갔던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들이 사람들의 감성을 일깨우고 있다. 이제, 선조들이 가꾸어 온 문화자산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하여, 차별을 넘어서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어서 일어나, 변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역사의 또 다른 주역으로서 우뚝 서자. 맛과 멋, 그리고 소리가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내 고향 절라북또! 기필코 우아하고 복되고 희망찬 내일이 펼쳐지리라!△김은섭감사관은 정읍출신으로 전주대와 연세대 행정대학원을 마치고 교육부의 여러 부서에서 근무한 뒤 대통령비서실 행정관과 전북교육청 부교육감을 지냈다. /김은섭(교육인적자원부 감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