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2-03 11:40 (화)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청춘예찬

‘시민의 숲 1963’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김성수 조각가 전주에는 전북도민의 힘으로 만들어진 역사적인 공간이 있다. 그곳은 바로 전국체전을 치르기 위해 만들어진 전주시 최초의 전주종합경기장과 야구장이다. 1963년에 만들어진 종합경기장과 야구장은 당시 44회 전국체전을 치르기 위해 합심한 전북도민의 성금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80년대생인 필자의 기억 속에는 90년대에 활동했던 쌍방울야구팀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구단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쓴 아이들이 야구장 주위에서 응원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97년도에는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렸고 종합경기장의 육상트랙에 물을 얼려 스피드 스케이트 경기를 진행했던 색다른 기억도 있다. 종합경기장터는 전북의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곳이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 관리와 보수문제를 안고 있었던 전주시의 오래된 숙원사업이었다. 2012년 전주시와 롯데쇼핑과의 기부대양여 협약을 통해 전주시는 롯데에 종합경기장터 부지의 52%인 1만 9000여 평을 넘겨주고, 롯데는 종합경기장, 야구장을 만들어 주는 대신 대형아울렛과 호텔 입점을 계획했지만, 시민단체와 지역 소상공인의 반대가 심했고 도민의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을 매각할 수 없다는 공론이 확산되었다. 2019년 3월 전주시는 롯데와의 기나긴 협상 끝에 양여가 아닌 50년 장기임대라는 절충안을 내놓았고 종합경기장터 3만 7000평 중에서 7000평은 롯데에게 임대하고 나머지 3만평의 부지를 시민의 숲과 컨벤션 센터, 호텔로 조성하여 전주시민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생태자연과 복합문화의 터전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발표하였다. 지난 1월 30일 건축, 조경, 도시, 교통, 환경, 미술 등 재생사업과 관련된 6개 분야 전문가 11명으로 구성된 전문가 자문단이 출범하여 지속적인 회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 3월에는 1963명에 달하는 대규모 시민참여단을 모집하여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아이디어를 얻는 등 진행 과정에서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시민의 숲이라는 이름답게 이 공간은 공공을 위한 숲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부분이다. 전주시는 주변 자연을 연결하는 생태 자연공원을 조성하여 정원의 숲, 예술의 숲, 놀이의 숲, 미식의 숲, 그리고 국제규모 컨벤션 센터가 조성되는 MICE의 숲까지 총 5개의 컨셉으로 구상을 진행하고 있으며 복합문화공간을 기반으로 한 시민문화 공간, 휴식공간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그동안 미뤄왔던 전주시립미술관 건립도 함께 추진될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도심 속 숲에서 문화와 예술이 함께 살아 숨 쉬는 모습은 전주시의 품격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올해 9월 세부 설계용역이 완수될 예정이고 2023년 완공을 목표로 한 시민의 숲 1963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시민의 숲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구상과 함께 이전될 예정인 종합경기장과 야구장의 모습도 그 계획과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여 시민들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 부분이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여 과정의 면면을 공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올해 3월 출범한 11인으로 구성된 전문가 자문단은 시민의 숲 1963 프로젝트와 관련해 시작부터 완료되는 전 과정에 깊숙이 참여하여 관련 전문 분야에 대한 자문 활동을 펼칠 예정이라고 하니 그 책임은 무엇보다 막중하다. 1963년 후손들을 위해 미래를 설계했던 전북도민의 한마음과 그 혜안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 지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희망이 담긴 시민의 숲이 만들어지길 기대해본다. /김성수 조각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0.05.24 17:24

발로 읽는 이야기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한 바위가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큰 돌. 대개는 그냥 지나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군가 옆에 서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바위는 호운석이다. 호랑이 호와 떨어질 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와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더라. 그때부터 바위는 단순한 돌이 아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구절처럼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된다. 동네, 길, 도로, 나무, 산, 절 등 이름이 허투루 붙은 경우는 찾기 힘들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살펴보면 모든 걸음걸음이 이야기로 가득하다. 반복되는 일상 속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생각의 폭을 넓혀 삶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나와 가까운 곳에서 이야기를 찾는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도로명주소다. 머물고 있는 동네, 매일 걷는 거리, 수만 번 지나쳤을 장소의 이름에는 우리 지역의 고유한 특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선이 닿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요즘 청년들은 알기 힘든 역사와 옛 전주의 모습, 생활 풍경 등을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64세의 나이로 전장에 나가 300여 명의 왜군으로부터 전주성을 지켜낸 이정란 장군(15291600). 그의 시호가 충경(忠景)이다. 장군의 의로움과 희생정신은 전주 시내를 가로지르는 주요 간선 도로인 충경로와 남고산 아래 산성마을의 충경사, 전라북도를 지키는 제35보병사단 충경부대의 이름에 남아 이어지고 있다. 태조어진과 경기전, 오목대와 이목대, 조경단과 조경묘 등 문화유적과 관련된 명칭들도 눈에 띈다.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 주변의 태조로와 경기전길, 1380년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오목대길, 고종이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묘에 단을 쌓아 명명한 조경단로 등 조선 왕조의 발상지였던 전주의 역사가 길에 스며있다. 이 고장의 자랑스러운 인물들도 만날 수 있다.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19471998)를 떠올리게 하는 최명희길을 비롯해 전북도립국악원에 기적비가 있는 비가비 명창 권삼득( 17711841)을 기린 권삼득로, 조선 시대에 평등한 세상을 꿈꾼 혁신적인 사상가 정여립(15461589)의 대동정신이 서린 정여립로, 병자호란 때 병사를 모집해 서울에 진격했던 이기발(16021662)의 호를 딴 서귀로, 효행으로 명성이 높았던 강서린을 기념해 조선 영조 때 건립된 지행당길 등 올곧은 신념으로 자신의 길을 걸었던 조상들의 자취가 표지판에 새겨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길들은 모두 선조들이 먼저 걸었던 길이다. 인간의 언어 속에 시간에 관한 우리들의 깊은 고민이 갈무리되어 있듯이, 길에는 시간과 시간의 길이에 대한 우리들의 고민이 총체적으로 깔려 있다.(김병용의 『길 위의 풍경』 중)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지역의 살아 있는 이야기는 일상에 녹아들어 잊어서는 안 될 가치를 들려준다.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를 지키며 더불어 사는 사회를 추구했던 전주 사람들의 마음. 전주라는 도시가 지닌 정신과 매력, 역사문화적 힘은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든든히 떠받치고 있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0.05.17 15:55

차별은 무지에서 나온다

김주은 도르 대표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자.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자. 장애인이 가진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인식개선의 시작이다. 여태껏 청춘예찬에 기고했던 모든 글의 결론이자, 앞으로 이야기할 모든 글의 결론이며, 이 칼럼을 통해 가장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다수가 장애인을 의도적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며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경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차별은 의도적인 혐오나 배제보다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어떤 행동이 차별로 느껴지며, 잘못된 인식을 가진 말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무지는 비장애인이 의도적으로 장애인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도록 분리되어 있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가장 크다. 그러므로 이 칼럼을 통해 장애인의 입장을 몰라준다고 비장애인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다만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무지에서 오는 차별을 줄이고자 장애인의 문제와 입장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비장애인은 사회의 다수로서 주류로서의 삶이 익숙하고 편안하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사회의 구조와 환경이 장애인에겐 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나라 정도면, 나 정도면 차별이 없는 편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대다수의 비장애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의 차별적인 상황과 환경에 묵인으로 합승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김지혜 작가님이 지으신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다. 책의 제목부터 강력한 전달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에는 장애인을 괴롭히고자, 혐오하고자 하는 사람보다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으려는 선량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이러한 선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고 있을까?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한 구절을 함께 살펴보자. 우리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권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누리는 특권은 대개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서 눈치채지 못한다.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서 자신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의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누군가가 시외버스 탑승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단어는, 우리는 대다수 차별은 없어야 한다는 선량한 마음을 품고 있으나, 자신이 무슨 특권을 누리는지 알지 못하기에 장애인은 사회적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어떠한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애 인식개선은 우리는 차별을 하지 않는다, 나 정도면 하지 않는다라고 안주하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으며 장애인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이 칼럼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평온한 우물에 돌을 던져야 하며, 돌로 인해 일어나는 우물 속 오물들을 걸려내야만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 이 글이 생각 우물에 돌이 되었으면 한다. 다수가 누리기에 편안한 삶이 익숙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 바닥에 깔려있는 차별적인 오물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물들을 마주하고 깨끗이 걸러내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차별하지 않는,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사회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05.10 16:10

안전하고 평등한 예술 창작환경을 위한 모두의 과제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2018년 2월, 도내 모 극단 대표의 성추행 고발 기자회견으로 점화된 전라북도 문화예술계의 미투운동은 연이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폭로와 고발에 이어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위드유로 확산되면서 지역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이후 성폭력을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문제로 치부하던 과거와는 다르게, 문화예술계의 창작 환경 전반에 대한 구조적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는 창작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또한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폐쇄적 구조, 소수 기득권의 권력 독점, 작품 내 빈번한 여성혐오적 표현, 불평등한 성별권력, 인맥과 품평중심의 진입 장벽 등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문제적 창작환경이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술인 당사자들의 자정적 움직임은 물론이거니와 안전하고 평등한 창작 환경을 위한 지자체와 문화재단의 성평등 정책에 대한 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미투 이후 정부는 성차별 해소를 위한 양성평등정책관을 문체부와 법무부, 교육부를 비롯한 8개 부처에 신설했으며, 문화체육관광부는 2020년 <문화비전 2030>을 통해 성평등 문화 실현이라는 의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내외적 상황과는 다르게 우리 지역의 행정은 성폭력 사안 중심의 대응 방식으로 일관했다. 성평등을 중요 과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역문화 발전에 흠결을 내는 것으로 오인해 정책적 연구와 시스템 마련이 더디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다. 또한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특정 성별 및 나이대를 성적 대상화한 작품을 창작하거나 작품 내 빈번한 여성혐오적 표현에 대한 여과 없는 재현, 자유분방함을 넘어선 성적 표현을 예술적인 자유로움으로 용인하곤 했다. 그러나 예술가의 창작물은 예술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성인지 감수성 함양을 위한 교육과 창작 환경 개선을 도모하는 행정의 성평등 정책 마련은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본 필자는 네 가지 정책 제안을 이미 2019 전주문화논총에 실은 바 있다. 첫째, 문화예술 기반 조성 및 제도 개선. 전담부서 신설 및 성평등 자치규약 제정, 실태조사 실시, 성폭력 근절 서약서 의무화, 성폭력 사안에 관련된 매뉴얼 마련, 예방교육 의무화 등이다. 둘째, 문화정책 전문인력 양성 및 활동 지원에서 젠더 관점 갖기. 교부금 심사위원 성별 균형 및 성인지 감수성 교육 의무화, 범 예술인 대상 포럼 및 세미나 개최를 통한 현장 자정의 기회 마련, 문화예술계 내 젠더 문제 해결 소모임 지원에 관련한 정책이다. 셋째, 문화 프로그램에서의 성평등 감수성 제고. 왜곡된 성별 고정관념 혹은 성차별적, 여성비하적 편견이 내재된 작품 소비 지양을 위한 캠페인이 필요하다는 정책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문화예술 지원사업 및 운영에 있어서 젠더 관점 가이드라인 제안에 대해 교부금 지원 창작물에 대한 젠더 관점 가이드라인 안내물 제작, 젠더 감수성 평가지표를 통한 사업 반영등 에 관한 정책이었다. 문화예술계의 미투는 단순한 이슈를 넘어서 시대적 정신이 되었다. 더는 아픈 과거가 재생되지 않도록 누구도 방관해서는 안 된다. 이제라도 성평등한 문화예술계를 위한 시스템 구축을 가장 중요한 정책적 과제로 인식하고 안전하고 평등한 창작 환경 만들기를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05.03 15:35

우리 동네에는 어떤 공공미술이 있을까?

김성수 조각가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어떤 미술작품들이 있는지 둘러본 적이 있는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의 생활 주변 공간에서 다양한 공공미술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 바깥에서 볼 수 있는 조형작품은 삭막한 도시 속에서 누구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띠며 우리 삶 속에 스며들어 있기에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 공공미술이 진행되는 경로는 크게 3개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로 퍼센트 법이라고도 불리는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로 설치되는 미술작품이 있다. 연면적 1만 제곱미터 이상 신축 또는 증축하는 일정한 용도의 건축물은 건축 비용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회화, 조각, 공예 등 미술작품의 설치에 사용하거나 직접 설치비용의 70%에 해당하는 금액을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납부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며 아파트나 대형빌딩, 병원, 마트와 백화점 앞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야외 조형물과 건물 로비에 설치된 미술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건축주가 사전 협의를 통해 지정 공모로 작가를 선정하기도 하고 건물의 목적과 컨셉에 맞는 작품을 공모를 내어 선정하기도 한다. 사업 대부분에 작가가 직접 참여하며 전북의 경우 전문가로 이루어진 20명 내외의 전라북도 건축물 미술작품 심의위원 회의를 통해 작품설치의 가부가 결정된다. 두 번째로 전문작가가 참여하여 커뮤니티 형성이 주축이 되는 마을미술프로젝트 계열의 사업이 있다. 건축물 미술작품 기금납부를 통해 모인 문화예술진흥기금이나 지자체의 예산을 사용하여 삭막해진 도시를 다양한 색으로 수놓는 벽화작업과 기발한 설치작품을 통해 침체되고 소외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예술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성격이 강하다. 전주시에는 2000년대 초반 공공미술프로젝트로 이루어진 동문예술거리와 자만벽화마을이 있으며 최근에는 첫 마중길 야외조각 전시, 예술있는 승강장 사업과 이동형갤러리 꽃심, 선미촌 2.0 프로젝트처럼 문화예술 도시를 지향하는 도시계획 속에 실험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공공미술프로젝트가 실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기념조형물의 형태가 있다. 조달청의 기준으로 집행되며 금액이 큰 만큼 지원조건이 까다로워서 조각가 혹은 전문예술인보다 조형물 전문업체나 기업형태의 접근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와 둘째의 경우 작가의 직접적인 참여도가 높고 전문가로 이루어진 심의위원 조성과 심사과정에서 작품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에 심미적 평가가 양호하나, 셋째의 경우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는 거액의 랜드마크형태의 조악한 조형물들이 무분별하게 설치가 되면서 기존의 좋은 취지로 만들어진 공공예술작품마저 함께 질타의 대상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각 지역의 특산물이나 상징물을 예술성의 고려 없이 확대하여 조형화시킨 것들이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공미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지면서 우리 주변에 설치되는 작품들의 선정절차와 작가선정에 대한 공정성과 투명함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 건물이 세워지면 어떤 작가의 작품이 세워지게 되는지 어떤 절차를 통해 작품이 선정되는지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도 작품을 관람하는 것만큼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예술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할 만큼 가까이 있으며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어떤 이는 작품을 보며 꿈을 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랑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지친 삶의 위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로 지친 요즘, 우리 주변에 숨어있는 미술작품을 찾아 산책을 해보는 건 어떨까. /김성수 조각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0.04.26 16:28

다시 손으로 씁니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복고가 대세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트로트를 비롯해 경제문화예술 사회 전반에 퍼지고 있다. 고전문학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출판계 역시 그 바람을 타고 있다. 인터넷서점 YES24에 따르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1947)가 문학을 포함한 전 분야를 통틀어 3월 한 달 판매 순위 2위를 기록했다. 최근 개봉한 동명 영화로 입소문을 탄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1868)은 3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은 6위에 올랐다. 초판본 표지 디자인도 다시 등장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년 증보판을 시작으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1795),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 백석의 『사슴』(1936), 김구의 『백범일지』(1947) 등이 옛 얼굴로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디지털에 밀려 희미해져 가던 아날로그는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자아와 성찰을 다루는 과거 문학작품이 인기를 얻고, 전자 화면에 손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스타일러스와 스마트펜 기술이 발달하고, 컬러링북다이어리 북필사시집 등이 생겨난 것은 기계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인간 고유의 감성 때문이다. 사과문, 각서, 편지 등을 타이핑하지 않고 여전히 자필로 쓰는 것 또한 비슷한 이유이다. 우리는 활자가 주지 못하는 따뜻함과 정겨움, 진정성을 손으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다. 예부터 글씨는 인격을 수양하는 도구로 활용됐고, 오늘날에는 서예와 캘리그래피(멋글씨)가 느림과 정성의 미학을 뽐내며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문학청년들의 글쓰기 연습에 필사가 우선으로 꼽히듯 대다수의 시인과 작가도 손으로 먼저 글을 익혔다. 소설가 조정래는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연이어 쓰면서 하도 팔을 굴려 먹어서 오른팔 관절이 어긋나 버렸다.라고 밝히면서도 사람이 글을 쓰는데, 육필, 손으로 쓰는 글씨가 다 없어져 버리는 시대는 얼마나 삭막한가.라고 탄식했다. 작가 박경리는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다.라고 적었고, 시인 김수영은 글을 쓰는 것이 천직이라 좋은 만년필을 갖고 싶은 것이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욕망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만년필 사랑이 각별했던 소설가 최명희도 만년필과 원고지를 고집하는 이유를 만년필은 몸의 일부이며 원고지를 펼치고 펜을 잡을 때 신선한 영감이 온몸에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면서, 소설 「혼불」을 차가운 기계에 의존해 쓴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종이에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는 생각을 가다듬게 하고 마음의 안정을 준다. 특히, 필사는 건강한 스트레스 해소와 더불어 논리력과 어휘력을 키우고, 헷갈리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별을 보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은 불행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불행을 모른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자란다. 아이들아, 먼지의 장막 뒤에서 별들은 빛나고 있다. 아이들아, 별들은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김훈 『연필로 쓰기』 중) 여러모로 심란한 요즘, 가슴에 와 닿은 시 한 구절, 산문 한 문단을 따라 써 보며 조금은 느리고 불편하지만 과정이 주는 기쁨과 정성의 가치를 다시 느껴보길 바란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0.04.19 16:15

코로나19·텔레그램 N번방 이슈 속 장애인

김주은 도르 대표 수많은 이슈들로 시끄러운 세상이다. 바이러스부터 성범죄까지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아프고 있으며, 뉴스에 나오는 문제들이 곧 나와 내 가족의 문제가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이러한 이슈는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들춰보게 됨으로써 두려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러한 부정적인 면을 고쳐나갈 수 있을지 대안을 생각하게 되고,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문제가 이슈화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고쳐나가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이슈 속에서 장애인의 문제는 여전히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는 장애인이 겪는 문제의 심각성을 아직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코로나19로 만 명이 넘는 확진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아직도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확진자를 줄이기 위해서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안전 안내 문자를 보고, 질병관리본부의 브리핑을 듣고, 줄을 서서 마스크를 사는 것이 혼자서 어려운 장애인들이 있다. 이러한 장애인에게 대책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나 [자가격리]와 같이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장애인은 바이러스 감염 이전에 일상생활 유지가 어려워 위기 상황이 닥칠 수 있다. 하지만 전 국민이 함께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에서 국민의 5% 해당하는 260만 장애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여전히 가이드라인이 부재한 실정이다. (출처. 연합뉴스) 텔레그램 N번방 속에도 장애인 뉴스가 숨어있다. 미래 통합당은 N번방 사건을 위한 대책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알리며, N번방의 잔혹한 영상 중 장애인과 강제 성관계하는 영상 등이 있다고 설명했다. (출처. news1) 지적장애인의 경우, 성에 대한 지식과 판단 능력이 부족하여 성범죄에 쉽게 노출이 된다. 하지만 성범죄를 당해도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우리는 텔레그램 N번방이란 이슈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과 미성년자들이 성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보게 되었다. 자식과 동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였으며, 분노하였고, 관심을 가지고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텔레그램 N번방이란 이슈 속에서 장애인 성범죄라는 문제는 많은 공감과 관심을 얻지 못하였고, 대중에게 심각성을 알리지 못하였다. 커다란 이슈의 홍수 속에서 장애인이 겪는 문제는 나와 내 가족의 문제가 아니기에, 공감하지 못하고, 관심 가지지 않으며, 결국 뒤로 밀리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아직도 장애인을 우리 사회의 일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늘 명확히 존재하지만, 차별을 하는 사람은 늘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우리는 누군가를 차별하면서도, 차별한다고 인식을 못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애인 차별의 시작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수많은 정보를 접할 때, 장애인의 문제에 한 번 더 관심을 가진다면 내가 의도치 않게 장애인을 차별하게 되는 일은 없어질 것이며, 우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04.12 15:41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나의 20대, 이제 막 문화예술계에 진입했을 때 무대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시간이 흘러 무대가 나의 삶이 되겠구나라는 막연한 결심이 들 때쯤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진짜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열정이 솟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누가 진짜 예술가인지, 무엇이 진짜 예술을 판가름하는 기준인지 알지 못했고 유명작가, 유명연출가 등 대중에게 알려진 성공한 예술가가 하는 창작행위는 적어도 진짜 예술일 것이라는 믿음에 빠졌다. 그들의 작품을 관람하고 수집하는 데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저서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에 꽤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들의 작품을 닮고 싶었고 그들의 삶을 선망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저들처럼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과정을 시작하고 전문지식을 습득하여 구사할 수 있는 전문가적 언어가 늘어난 것에 대한 자신감은 커졌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예술은 수렁에 빠진 듯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위대한 작품들과 나의 작품을 비교하기 시작했고 창작과정에 대한 자기검열이 심해졌으며 열등감과 부끄러움이 더해졌다. 무대는 가장 무거운 숙제가 되어 나를 짓눌렀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렵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예정된 숙제였을지도 모른다. 정작 내 삶의 반경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들여다보지 않으면서도 무대 위 소재에 대해서는 내 일인 양 분노하였고, 다수가 인정하는 성공한 타인의 삶만을 욕망하며 그 외양을 흉내내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2월 공개기자회견을 통한 나의 미투는 이러한 치열한 자기고민에 대한 고백이었다. 더 이상은 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에 대해 외면하지 않으리라, 내가 서 있는 이 곳에서 내 세상을 관철하리라, 그것이 예술가로 존재하는 나의 시발점이며 정체성이고 오롯이 내가 담아낼 작품의 소재임을 깨달은 셈이다. 그리고 그 해, 수많은 문화예술계 미투를 보며 진짜 예술을 바라보는 나의 기준은 분명히 달라졌다. 천재라 불리던 유명연출가의 성폭력 사건을 보면서, 미투 가해자의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지켜보면서, 추앙받았던 그들의 유명 작품이 피해여성의 성착취가 묵인된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모든 상황을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전문가적 기량만을 뽐내기에 바쁜 몇 몇의 유명연출가의 행보를 보면서 내가 선망했던 진짜 예술은 어쩌면 허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최근 성착취채팅방 사건과 한 정치인의 딥페이크, 예술작품이라 생각하고 만들 수 있지 않냐는 발언과 관련 법안을 졸속처리한 국회를 보며 이 사회의 일원이자 여성인 나는 한없이 분노한다. 또한 이 분노가 무력감이 되지 않기 위해 예술적 동력으로 활용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 이바지할 작품을 세상에 탄생시켜야 한다는 책임마저 생긴다. 나는 여전히 진짜 예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타인을 착취하고 괴롭히며 묵인, 방조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던 어떤 것에도 예술이라는 이름을 허락할 수 없다는 기준은 명확하다. 폭력과 배설에 예술을 빙자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04.05 15:34

조각가의 하루

김성수 조각가 아침 6시반, 알람 소리와 함께 하루가 시작된다.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은 후 삼례에 있는 작업실로 향한다. 운전대를 잡은 왼손의 붕대 안의 상처는 전보다 많이 아물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계속 신경이 쓰인다. 지난 1월 21일 구정을 앞두고 손을 다쳤다. 4인치 그라인더로 금속판을 자르던 중 회전하는 절단날이 왼쪽 집게손가락 위를 덮쳤고 깊게 들어간 날은 피부를 찢고 인대를 스쳤다. 급한 대로 작업실에 갖춰놓은 구급함 붕대로 지혈하고 허겁지겁 도착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10여 바늘을 꿰맨 후 수술은 마무리되었고 다행히 신경은 무사하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작업하거나 그림을 그릴 때 왼손을 사용하기에 작가 생명을 좌우할 수 있었던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직도 왼손 검지는 깊게 말리지 않아 불편함이 있지만, 밀린 작업 진행을 위해 오늘도 작업실에 도착했다. 지난겨울은 봄을 시샘하지 않는 듯 몹시 춥지 않아서 작업하기 딱 알맞은 온도였다. 묵직한 망치로 금속판을 두드리고 불꽃이 튀는 용접작업을 하는 필자는 더운 여름보다 시원한 겨울을 선호한다. 가끔 망치질할 때 생각을 비우기도 하지만 곧 다가오는 작업실 월세라든지, 다음 달 생활비를 생각하며 한탄 섞인 망치질을 하기도 한다. 오늘은 오전 내내 1제곱미터 넓이 분량의 금속판을 두드렸다. 농사짓는 분들이 솟아나는 볏모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려나. 잘리고 두드려진 금속판들을 보면 말할 수 없는 보람이 느껴진다. 2009년에 데뷔해서 올해로 작업 11년 차 조각가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지만, 작업실에서 시나브로 완성되어가는 작품을 볼 때 생애 첫 작품을 바라보는 것처럼 뿌듯함과 희열을 느낀다. 고된 망치질 덕에 허기를 느껴 점심을 간단히 먹고 돌아와 오후에는 용접을 진행했다. 망치질에 비하면 용접은 나름 신선놀음이지만 섭씨 1,500도의 강한 알곤가스 용접의 빛에 눈이 종종 화상을 입곤 한다. 조각가의 숙명이려니 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린다. 예술의 범주에서 놀고 있지만 고된 노동력을 수반하는 작업성향 덕에 노동자의 옐로칼라가 훨씬 잘 어울리는 듯하다. 언제까지라도 이 재밌는 놀이(?)를 계속하고 싶지만 내 몸이 버텨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못 버티면 그때 가서 할 수 있는 작은 작품을 만들면 되지! 하고 위안을 하곤 한다. 조각가들은 고된 작업성향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은 다른 미술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요즘은 부드럽고 가벼운 재료와 오브제를 사용한 개념 위주의 작품들도 많이 볼 수 있지만, 재료의 물성을 기본바탕으로 하는 작업의 형태는 전통적인 조각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북에서 활동하는 대략 40~50명 정도의 조각가들은 대부분 노동력을 수반하는 땀 흘리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재료와 숙성기간, 음식을 담는 그릇이 다르면 그 맛이 천차만별 다르듯 각각의 조각가의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개성 있는 작품들은 그저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3D프린터가 나오고 기술이 고도화되는 시대로 흐를수록 만드는 행위의 기본이 되는 시간과 땀의 소중한 가치는 오히려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작업을 마치고 어둑해진 길을 나서며 보람찬 하루를 보냈는지 자신에게 되묻는다. 난 오늘도 뜨거웠는가? 오늘도 이렇게 조각가의 하루가 지나간다. /김성수 조각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0.03.29 15:19

설령 코앞에 삼재 팔난이 닥칠지라도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알록달록 색을 더해가는 전주한옥마을 담벼락. 낯설게 고요하다. 익숙한 재잘거림이 사라진 거리에 상인들의 한숨이 나뒹굴고 있다.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19는 평범했던 일상과 특별했을 계획을 모두 얼어붙게 했다. 소살소살 흘러온 봄을 보고 있자니 더욱 야속해진다. 사람이 아무 살도 안 띠고 평생을 순탄하게 살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법이란다. 누구라도 한두 가지 살은 맞게 되어 있지마는, 그러더라도 어쩌든지 제가 미리 알고, 조심허고, 뛰어갈 거 걸어가고, 소리칠 거 어루만지고, 그렇게 삼가면, 설령 코앞에 삼재 팔난이 닥칠지라도 가벼이 지나간단다.(소설 「혼불」 중) 전주시의 지침으로 도서관박물관체육관 등 대부분의 공공시설은 문을 닫았지만, 최명희문학관을 비롯한 일부 민간위탁 문화시설은 정상 운영하며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문학관 역시 다수의 사람이 모이는 문학강연문학기행체험행사문학제 등 모든 행사를 잠정 중단한 상황이다. 출근길 전주사고 근처를 지나니 과거 조상들은 전염병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궁금증이 인다. 지금보다 의학지식도 첨단장비도 부족했던 왕조시대에는 심각한 국가위기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 『조선왕조실록』에는 1,455건의 전염병 기록이 등장한다. 1392년부터 1917년까지 연평균 2.73회 발생했다. 임금별로 보면 숙종이 25회로 가장 많았고, 영조(19회)와 현종(13회)이 뒤를 잇는다. 유행 빈도는 3월(12.3%), 2월(12%), 4월(10.4%) 등 봄철이 34.7%로 가장 많다. 겨울에 시작해 봄에 확산된 코로나19의 상황과 비슷하다. 병자 격리, 처방문 배포, 위생관리, 구휼미 제공 등 대응 방안도 지금과 유사한 부분이 눈에 띈다. 1437년 봄 전염병이 진제장(무료급식소)을 휩쓸어 수많은 백성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1444년 또다시 역병이 돌자 세종은 7년 전의 전처를 밟으면 안 된다.라며 빈민들을 분산 수용하고 질병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1526년 중종은 평안도로 의약품을 내려보내 마음을 써 치료하도록 하고, 또한 중앙에서 제사 지낼 것을 예조에 말하라.라며 피해자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했다. 1613년 2월 광해군은 백성들이 병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전염병 매뉴얼인 『신찬벽온방』을 전국에 배포했는데, 물을 반드시 끓여먹고, 옷가지를 삶아서 입고, 몸을 깨끗하게 하고, 고여 있는 물을 퍼내어 쓰라고 적혀 있다. 기록 속 조상들의 모습에서 전염병을 개인의 희생이 아닌 사회문화적 문제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엿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현재로 이어져 코로나19를 막는데 큰 힘이 되고 있다. 전주에서 시작한 착한 임대료 운동과 재난기본소득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부, 피해지역 의료봉사, 사회적 거리두기, 예방수칙 지키기 등 사회 전반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기분 좋은 소식들이다. 과거에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공동체 문화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은 재물을 풀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병으로 농사를 못 짓는 가정을 위해 이웃에서 대신 농사를 지어주는 것.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고통받는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는 이유이다. 우리는 이 위기를 잘 이겨내고 소중한 일상으로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설령 코앞에 삼재 팔난이 닥칠지라도.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0.03.22 15:16

우리나라 장애인 인식의 역사

김주은 도르 대표 조선시대 우리나라는 장애인의 대우와 인식은 긍정적이며 선진적이었다. 하지만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으로 쇠퇴되었으며 현재 우리의 장애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오늘은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에 따른 장애인 인식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정창권의 「근대 장애인사」의 내용을 정리, 재조합하여 글쓴이의 의견을 덧입힌 것으로 원작의 흐름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힌다. 먼저 조선시대의 장애인 대우와 인식을 알아보자. 조선시대엔 지능에 문제가 없는 척추장애인, 건강장애인(뇌전증), 지체장애인 등은 장애와 상관없이 과거를 보아 관직에 나갈 수 있었고, 능력만 있다면 정 1품 정승까지 오를 수 있었다. 또 시각장애인은 점을 치는 점복, 경을 읽어 질병을 치료하는 독경,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와 같은 직업을 가졌다. 이에 세종대왕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관직으로 명과학, 명통시, 관현맹인을 설치하여 장애인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였다. 그 외 교육이 어려운 지적장애인, 언어장애인 등은 가족이 부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국가에서도 시정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활동보조인을 제공하고, 자립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은 재생원 같은 구휼 기관을 통해 구제하는 등 다양한 복지 정책을 펼쳤다. 조선시대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복지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장애인을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인식했다. 때문에 오늘날처럼 장애를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고, 한계나 극복의 대상으로도 보지 않았다. 오직 그 사람이 지닌 능력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장애에 국한되지 않고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존중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장애인 인식은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근대화로 단순노동 위주의 장애인 직업은 사라져갔고, 점복과 독경을 미신으로 여기고 금지했다. 또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수탈로 많은 장애인은 심각한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그 결과, 장애인들은 구걸로 생활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우리는 장애인을 불쌍한 존재로 인식했다. 근대의 부정적인 장애인 인식은 장애인을 용어의 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민간에선 장애인은 병신이라 부르곤 했다. 여기서 병신이란 오늘날처럼 조롱이나 비하, 욕설의 의미가 아니라 장애를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화기에는 장애인을 불구자로 불렀다. 이는 후구샤(不具者)라는 일본에서 온 말로 ~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란 뜻이다. 즉 기능적으로 결함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한번 장애를 입으면 고칠 수 없는, 즉 나을 희망이 없이 평생 불구자로 살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장애인을 불쌍하고 희망이 없는 존재로 여기는 인식은 근대화와 일제강점기로 인해 생겨났다. 우리는 일제로 인해 가지게 된 부정적인 장애인 인식을 지양하고, 조선시대 때의 우리 고유의 긍정적인 장애인 인식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장애는 바꿀 수 없으나, 장애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바꿀 수 있다. 장애인도 그저 나와 같이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 하나뿐이기에 나와는 다른 존재로 인식하길 바란다. 우리가 장애를 떠나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배려한다면 장애인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03.15 15:56

해결책은 이미 우리 안에 있지 않을까?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위기 경보가 심각 단계로 격상 되면서 문화예술계의 시계는 마치 멈춘 것만 같다. 극장과 전시장, 행사와 강연, 교육과 지원사업까지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을 모으는 모든 곳의 일정이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었다. 같은 처지의 예술인들을 만날 때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두려움과 막막함을 쏟아내고 우리 중 누구도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한다. 맞다. 정말 두렵다. 돈을 벌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없이 무기한 기다려야 하는 이 상황이 지치고 점점 화도 난다. 마치 내가 입은 피해가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특정한 누군가 때문에 발생된 무자비한 바이러스로 느껴진다. 그렇게 한참동안 비난의 화살을 퍼붓다가 퍼뜩 깨닫는다, 어쩌면 나는 이 어려운 현실을 감당할 수 없기에 마땅한 분노의 출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익숙한 방식은 내가 겪었던 혐오와 몹시 닮아있다. 4년 전 연극작품 보조금 신청을 위한 면접을 준비하던 중 한 선배가 나를 향해 물었다. 보조금 타내려고 단체 만들었니? 실력도 없는데 돈 욕심 때문에 물 흐리지 마라 면전에서 들은 이유 모를 비난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떨린다.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지역 문화예술계에 대다수의 생계수단은 보조금이다. 때문에 새로운 단체가 나타날 때면 파이를 빼앗긴다는 두려움 때문에 배재와 혐오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곤 한다. 가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우리지역에 예술시장이 자리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민들을 위한 예술은 무엇이고 전향적 변화를 위해 예술가와 행정은 어떻게 상생해야 하는지 등의 협력의 방법을 찾지 않은 채 그저 서로의 파이를 잃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서로를 미워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창궐의 원인은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와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들의 포획, 식용으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절제되지 않는 인간의 정복욕에 대한 자연의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을 외면한 채 특정대상을 향한 손 쉬운 배척과 혐오만을 일삼고 있다. 또한 집단감염으로 많은 수가 사망한 폐쇄병동의 정신장애인을 보면서도 신종바이러스로 인해 가장 고통 받는 위치에 누가 놓이는지에 대해서 외면해버리곤 한다. 몇몇의 사악한 인간들은 바이러스를 도구화하여 선동하거나 여론을 악용하여 권력을 쟁탈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안전하게 할까? 라는 질문은 또 다른 언쟁을 발생시킨다. 이 물음이 더욱 지혜로워 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협력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을까? 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평화를 유지하고 인간적인 존엄을 지키면서 발전하려면 상생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타인과 타생명체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성찰로부터 예술도 시작된다. 배제와 불신으로는 예술이 성장 할 수 없다. 각자도생이 표제어가 된 현실이지만 예술의 힘과 기능은 여전히 살아 움직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선함을 깨닫고 이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이렇게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서 배우고 다시 성숙해질 것이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 그러길 바란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03.08 16:58

2020년 전북의 청년작가들 (2)

김성수 조각가 청년은 시대를 불문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축으로 존재해왔다. 사전적 의미로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20대 정도의 연령대를 말하지만, 오늘날의 청년은 19살부터 34살 언저리의 연령대를 살아가는 남녀를 포함한다. (청년기본법 참고)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청년은 우리 지역에서 어떤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을까. 전북에는 꾸준히 자생력을 쌓아가며 활동을 이어가는 청년작가단체가 있다. 그중 하나로 C.art(씨앗) 단체가 있다. 2011년 전북 도내 예술대학과 미술학과의 정원이 축소되고 폐과가 되는 현실에 위기감을 느껴 전북에 위치한 4개 대학 (전북대, 전주대, 원광대, 군산대)의 졸업을 앞둔 미술학과 4학년 학생들이 합심하여 창립 후 현재까지 매년 새로운 기획전시발표와 국내의 저명한 미술평론가를 초빙하여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10년째 이어가고 있다. 단체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위기감에서 시작했지만 다른 지역 청년작가단체와의 교류, 공개 아티스트토크 등 매년 새로운 시도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더젊음 이라는 단체는 2014년부터 대중들에게 다가서는 실험적인 기획과 전시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트상품제작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생대회를 여는 등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춘 참신한 기획을 통해 긍정적인 반응을 만들어가고 있다. 2018년 12월부터 전주 선미촌에 물결서사라는 책방을 열고 주민 워크샵과 청년작가 기획전시 등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물왕멀이라는 단체가 있다. 미술,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로 이루어진 이 단체는 미술의 제한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르와 융합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예술에 접근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전라북도에서 활동하는 청년작가들은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지닌 채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으며 그들에게 보내는 격려와 응원의 박수는 전혀 아깝지 않다. 척박한 토양을 스스로 일구어나가고 있는 굳센 농부들이며 하루하루 정해진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탐험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시장의 화려한 조명과 작품 뒤에는 생활과 창작이라는 두 줄 타기를 아슬아슬하게 견디는, 이 시대 청년으로 살아가는 작가들의 치열한 삶의 단면이 존재한다. 88만원 세대로 시작하여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일컬어지는 이 시대의 청년들의 얼굴에는 당찬 푸르름이 느껴져야 당연하지만, 오늘의 빵과 내일의 꿈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청년작가들의 하루는 점점 여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1월 9일 청년기본법 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청년의 권리 및 책임, 청년 정책의 수립조정 및 청년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기본법의 주요 내용은 청년의 권리 보호 및 신장, 정책결정과정 참여확대, 고용촉진, 능력개발, 복지향상 등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청년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와 있다. 청년이 직접 참여하고 결정되는 정책적인 부분에서 청년들의 기본권이 나아진다면 생활과 창작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는 청년작가가 중도 포기하지 않고 예술가로서 스스로 입지를 다져갈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라 믿는다. 청년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권리를 가진 시민이자 정책의 주체로서, 대안을 함께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언젠가 우리 지역예술계의 중요한 한 축으로서 청년작가들이 당찬 푸르름을 내뿜으며 우뚝 서는 그날을 기다려 본다. /김성수 조각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0.03.01 15:27

문학의 길에서 꽃심은 피어나고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어느 장소든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그 힘은 그곳에 애착을 갖게 하고, 그곳에서 자란 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전주시는 도시에 자연스레 쌓인 얼을 탐구해 전주 사람들의 고유하고 특별한 성질인 대동풍류올곧음창신의 정신을 찾았다. 그리고 전주의 정신을 꽃심이란 단어에 담았다. 그중 올곧음은 의로움과 바름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으로, 부당함에 맞섰던 민족정신을 상징한다. 임진왜란 때 안의손홍록오희길 등이 지켜낸 조선왕조실록이 있던 전주사고, 동학농민군 집강소를 두었던 전주성, 을사늑약 이후 서문 밖 일본인들에게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전주한옥마을, 31 만세운동이 열렸던 남문장터 등 눈에 닿는 곳곳이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전주를 찾는 관광객은 물론 이곳에 사는 우리조차 그 가치를 잘 모르고 있다. 역사는 문학을 매개로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작품은 머무는 공간에 대한 뚜렷한 정체성을 각인시킨다. 현실감 있게 버무려진 기록을 통해 자연스럽게 지역의 역사가 전해지고, 작품에 새겨진 삶의 자리를 보며 내 고장의 지난날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 시절을 살아냈던 우리의 문인들은 현실과 역사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고, 시대의 아픔을 글로 남겼다. 전주에서 고독의 굴레를 벗은 시인 박봉우(19341990)는 1975년 전주에 정착해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전주에서 펴낸 시집인 『황지의 풀잎』(창작과비평사1976)에서 독재와 혁명의 6070년대를 시인이 어떻게 몸부림하며 부딪쳐왔는가를 엿볼 수 있다. 오늘은/완산칠봉/내일은/풍남문 근처에서/아직/전주를 알기는 이르다/당분간/시가 되지 않은/이 밤/울고만/울고만 싶어라(「전주에 와서」 중) 1987년 6월 항쟁부터 1991년까지 전주의 민주화운동을 대하서사시로 형상화한 시인 최형(19282015)도 꾸준히 시대의 아픔을 토해냈다. 그의 대표작인 『다시 푸른 겨울』(시와사회2000)에는 이윽고 모두가 중앙성당 앞에 이르러서/촛불 행진은 끝낸 셈이지만/누구라 없이 그대로 거리와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시위행렬로 넘쳐나던 팔달로와 관통로, 코아백화점(현 세이브존) 광장 등 그 장소에서 함께 한 이들의 진솔한 기록이다. 작가 최명희(19471998)의 소설 「혼불」에도 의병활동, 우리말우리글 쓰기 운동, 독서회 조직, 독립만세운동 등 일제강점기 전주의 수난사와 항일투쟁의 행적이 세세하다. 기미년 삼월에 독립만세 운동이 거국적으로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이 용머리 고개를 하얗게 넘어오며 목메어 만세를 불렀지.(「혼불」 10권 296쪽 중) 완산칠봉, 풍남문, 중앙성당, 팔달로, 용머리 고개 등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는 대부분 우리에게 낯익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낯설다. 전주시는 이병기신석정유진오하근찬이태 등 우리 고장과 깊은 인연을 맺은 올곧은 문인들을 조명하고, 문학 속 전주정신을 일깨워야 한다. 청년예술가들과 함께 전주문학지도를 만들어 도시의 정체성을 품은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면, 역사와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이의 발길이 전주로 향할 것이다. 꽃심의 향기가 널리 퍼질 때, 국가관광거점도시 전주는 더 활짝 피어날 것이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0.02.23 15:46

장애란 운이 없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김주은 도르 대표 우리 사회에서 장애는 언제부터 문제 시 되었을까? 오늘은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의 정의와 유례를 알아보고 이와 연결하여 장애가 언제부터 사회에서 문제(Problem)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란 성별, 연령, 국적, 문화적 배경, 장애의 유무에도 상관없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 및 사용 환경을 만드는 디자인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 범용(汎用) 디자인으로도 불린다. (출처. 두산백과) 다양한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유니버설 디자인은 아동, 여성, 노약자, 장애인을 포함하여 비장애인까지 우리 모두가 사용하기 편안한 제품과 환경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유니버설 디자인은 1960년대 후반 2가지 커다란 사회적 요인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엄청난 수의 부상자, 즉 장애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미국은 이 많은 부상자들을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해 장벽이 없는 디자인,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Design) 디자인을 고안하였다. 이 배리어 프리 디자인이 발전되어서 장애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 미국형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 시작이 되었다. 두 번째, 북유럽은 당시 스웨덴을 시작으로 고령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었다. 1960년대는 유럽의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였기에 늘 일손이 부족하였다. 집안의 가능한 모든 노동력이 일을 하러나가고, 혼자 집에 남겨진 노인들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상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 유럽의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시작이었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은 우리가 찾은 해결 방법(Solution)이었으며 해결하기 위한 문제(Problem)는 장애인과 노약자의 일상생활 영위였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장애인과 노약자가 없었을까? 왜 갑자기 문제(Problem) 시 되었던 걸까? 20세기는 2차 세계대전과 제2차 산업혁명이 함께 일어났던 시기이다. 전쟁과 산업혁명의 흐름 속에서 비장애인들은 모두 군인으로, 노동자로 사회로 나갔기에 장애인과 노약자를 돌봐줄 인력이 없었을 것이다. 또 노동력과 생산력이 가장 중요시되는 사회로 변화하면서 힘이 없는 장애인과 노약자는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장애인과 노약자가 문제(Problem) 화 된 것이다. 장애는 운이 없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과 산업화라는 사회 전체적인 변화로 인해 우리가 장애인을 문제(Problem) 화 시킨 것이다. 장애인이 생겨나게 한 것도 우리이며, 장애인을 생산력이 없다고 배제한 것도 우리이며, 당연히 배려하고 당연히 함께하였다면 이름 짓고 구분 지을 필요도 없었을 장애란 개념을 만든 것도 우리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만들어 낸 것도 우리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자신의 일만으로도 벅차게 변화해 가면서 잠시 잊었을 뿐이다.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우리 모두의 책임을. 우리가 함께하는 사회를. /김주은 도르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02.16 15:50

“예비예술인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지난 2월 5일 전북지역 문화예술교육계 박00 교수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 이후 50여개의 여성단체가 모여 열었던 기자회견의 회견문에는 박교수의 공판 과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년전 2018년 3월 지역 방송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박교수의 성추행은 2018년 9월 10일에 사건이 접수되었고 2019년 4월 15일에 첫 공판이 시작되었다. 무려 7개월을 기다린 공판의 시작이었다. 네 번의 공판 끝에 2019년 8월 12일. 드디어 선고기일이 잡혔다. 그러나 피고인은 또 다른 변호인을 추가로 선임하였고 세 번의 공판을 지나 바로 오늘 2020년 2월 5일, 사건접수 514일 만에 전북지역 문화예술교육계 박OO교수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유죄가 선고 되었다.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한번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의 행실을 운운하며 억울함과 분노로 일관한 가해자의 태도를 비춰보았을 때 실형을 선고한 재판부의 유죄선고는 가르침을 주는 판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그저 재판의 결과만을 기다리던 피해학생들의 긴 시간의 고통들이 이 판결로 보상될 수 있을까? 그 자리에 피해자들과 함께 있던 나는 판결문을 듣는 내내 울분과 눈물을 참아야 했다. 처음 방송을 통해 자신의 피해사실을 용기 있게 고발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박교수의 제자들이었다. 그 아픔에 연대의 뜻을 밝힌 몇몇의 선배들은 지지문과 성명서 발표, 서명 등으로 박교수와 학교에 사과를 요구했고 이를 통해 총장의 사과와 총학생회의 움직임 등 조금의 변화가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얼마못가 학교의 입장은 달라졌다. 1심판결을 기준으로 징계 수위를 결정하겠다며 자체 조사위를 꾸리지 않은 것이다. 지극히 당연하게 보장되어야 할 안전하고 평등한 교육환경 조성에 대하여, 이를 침범한 행위자에 대한 처벌과 재발방지에 대해 학교는 친절한 방관자로 일관한 것이다. 재작년 언젠가 피해학생을 돕던 졸업생이 내게 고민을 토로했었다. 용기 냈던 사람들이 좌절하고 있다. 당연히 해야 되는 말을 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이러다가 우리만 다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이 무력감이 무섭다 학교는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학생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교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 원초적 질문이 우습게 들리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인가? 작년에 발제자로 참여한 토론회에서 이런 질의를 받았다. 성폭력에 취약한 예비 예술인들을 돕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대답했다. 그들이 마땅히 싸워야 할 것들에 목소리 내어본 경험, 그리고 그것에 대해 사과 받고 보상 받아본 경험은 정말로 소중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에서는 언제나 실수와 오해, 잘못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성찰하고 공감하며 자신의 잘못에 사과하는 과정을 통해 더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나는 예비예술인들이 학교에서 그 건강한 과정을 배우고 익히기를 소망한다. 누구도 패배감과 무력감에 갇혀 자신을 수동적인 도구로 인식하는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예술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발화해도 충분히 괜찮다는 것을 배우기를.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02.09 16:08

2020년 전북의 청년작가들 ①

김성수 조각가 바야흐로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의 미래가 현실이 되는 시점이 도래했다. 지금 현재 30대 중후반을 살아가는 어른이들은 어렸을 적 이 애니메이션을 시청했을 때 2020년이 다가오지 않을 것 같은 아주 머나먼 미래로 느꼈을 것이다. 비록 현실은 만화처럼 비행선을 타고 외계로봇과 싸우기 위해 우주를 날아다니거나 캡슐로 된 알약으로 식량을 대체하는 일상을 보내진 않지만, 어느새 30대가 되어버린 나는 외계로봇 대신 매일 보이지 않는 현실의 불안함과 싸우기 위해 하루를 버텨내고 있으며 간편한 인스턴트푸드로 공허한 마음속 허기를 채우곤 한다. 위에 언급한 애니메이션은 프랑스 칸 필름마켓 TV 시리즈 부문에서 만화 강국인 일본의 작품을 제치고 최우수 작품상을 받을 만큼 완성도 높은 수작이라는 평단의 평가를 받았고 프랑스와 일본에 수출되었다. 무엇보다 그 당시 KBS에서 세계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역량 있는 한국의 제작자들을 한데 모아 만든 국가적 지원을 받은 첫 애니메이션이었다. 이후 꾸준한 지원과 척박한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규모를 키우는 인식전환의 계기가 있었더라면 더 큰 발전이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을 정도로 국산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문화 예술적으로 좋은 창작환경을 만들어 가능성 있는 청년작가들이 싹을 틔우는 토양과 토대를 만드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 물론 자생력을 갖자는 의미에서 처음부터 지원 없이 버텨보는 것도 중요한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이어진 도내 예술대학의 축소와 순수미술 관련학과의 폐과 과정을 통해 작가의 배출구가 좁아진 현실에서 지역 예술계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한다면 예술의 씨앗인 우리 지역 청년작가들을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는 문화예술 도시를 지향하는 전주시와 전라북도가 가져가야 할 큰 과제이다. 그 지역의 문화예술 생태계를 볼 때 중간 청년층의 두꺼운 분포가 건강한 상태를 말해주듯 건강한 싹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산소(문화예술)를 만들어주는 숲(작가군)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의 성장 과정 중에 스스로 자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자양분(지원)과 가지치기(관심)가 필요하듯이 전주시와 전라북도의 청년작가들을 위한 꾸준한 지원과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전주에서 매년 공모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동형 갤러리 꽃심과 작가와 직접 매칭하여 진행되는 예술 있는 승강장 조성사업 그리고 전주시, 전라북도, 완주군의 신진, 청년작가들에게 주목한 창작지원 프로그램은 그 좋은 예이다. 더 많은 우리 지역의 청년작가가 참여하고 지원받을 수 있도록 확대하고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도내의 공공기관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한 창작공간지원과 전시공간지원, 비평가매칭, 도록제작, 작품운송을 포함한 세분화된 지원은 청년작가들에게 더욱 효율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글의 서두에 언급한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이름은 아이캔으로 영어로 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척박한 국내 애니메이션 환경 속에서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분투했던 그 당시 제작자의 각오와 희망으로도 보이는 주인공의 이름은 첫 방영 후 30년이 지난 현재에도 물음표를 지닌 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 지역의 소중한 예술의 씨앗들이 가능성에서 끝나지 않고 비옥한 터전에서 성장하여 풍성한 문화예술의 숲을 이루길 간절히 바라본다. /김성수 조각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0.02.02 15:11

설에 소설 '혼불'을 읽어야 하는 이유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2020이라는 낯선 숫자에 적응하는 사이 설이 코앞이다. KTX 설 예매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명절선물세트가 눈에 띄니 비로소 달력이 넘어간 느낌이다. 함께 윷을 던지며 놀던 사촌들은 대학, 취업, 직장, 결혼, 육아 등의 이유로 명절에도 보기 힘든 얼굴이 되었다. 차례, 성묘, 설빔, 세찬(설에 먹는 음식)도 간편화되고 사라지는 추세다. 대가족에서 4인 가구를 지나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요즘, 농경사회에 기반을 둔 설 본연의 의미보다 연휴의 개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사회구조 변화와 가족 형태 다양화가 반영된 현상이지만, 세시풍속은 상대적으로 희미해지고 있다. 세시풍속을 비롯한 전통문화는 우리에게 여전히 어렵고 낯설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온 풍습은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개성이 경쟁력인 시대에 독특한 무늬를 이루며 공유되어 온 우리만의 것은 소중한 자랑거리다. 한글문서 저장 아이콘의 실체를 몰랐던 청소년들이 플로피 디스켓을 사용했던 이전 세대와의 대화를 통해 의미를 알게 되고, 기억이 이어지는 것처럼, 청년들은 전통문화를 배워 다음 세대에게 전해줘야 할 책임이 있다. 비교적 쉽고 간편한 방법이 세시풍속이 담겨 있는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작가 최명희(19471998)의 소설 「혼불」이다. 며칠 전부터 집 안팎을 깨끗하게 치우고, 차례 올릴 준비를 하며, 식구들 설빔도 빠지지 않게 새로 지어야 하니, 이렇게 바쁜 날, 천하 없는 게으름뱅이라도 부지런히 일을 하여 설 준비를 해야 하는 그믐날, 누구라서 잠을 잘 수 있으랴. 그런데도 만약 잠자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눈썹이 하얗게 세어 버린다 했다.(소설 「혼불」 5권 22쪽 중에서) 「혼불」에는 우리 고유의 생활풍속이 생생하다. 섣달그믐날 저녁이면 가족들이 둘러앉아 무사태평을 외치며 무를 베어 먹었다. 껍질과 속 안팎이 모두 희어 티 없이 깨끗한 무처럼 하는 일마다 순탄하고, 무 먹은 뱃속같이 속시원하라는 마음이다. 섣달 스무나흘에는 부뚜막 조왕단에 정화수를 올리고, 잘한 일만 고해 달라!며 조왕신에게 빌었다.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이 하늘로 올라가서 그 집안에서 한 해 동안 일어난 좋은 일과 궂은 일,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낱낱이 고하는 날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정월대보름, 달을 맞는 풍경도 보인다. 달이 뜨고 달집이 타오르면 열두 발 상모에 꽃 같은 고깔을 쓴 농악대는 달집을 돌며 신나게 풍물을 울렸다. 아낙들은 달을 향해 소원을 빌고 남자아이는 정초에 날렸던 연을, 여자아이는 저고리에 달린 동정을 뜯어 달집에 던졌다. 책을 펼치지 않았다면 몰랐을 우리네 귀한 풍습으로, 역사의 한 줄이 아니라 살아있는 일상으로 다가온다. 문학은 인문학이고, 인문학은 문화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재미와 감동을 느끼고, 삶의 지혜와 통찰력을 얻는다. 덤으로 소중한 가치도 지켜나갈 수 있다. 다가오는 설, 고마운 이들에게 세배 다니는 틈틈이 묵은 책장의 먼지를 털고 책을 꺼내보자. 새해의 나날이 밝고 환하여 하는 일마다 순탄하게 되기를 비는 소박한 마음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설이 꽃봉오리처럼 화사해질 것이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0.01.19 16:02

결국 또 하나의 다양성일 뿐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장애란 무엇인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 사회는 장애라는 한 가지 이슈에 대해서 장애인/비장애인 2가지로 분류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분류는 장애를 나아가 장애인을 이해하기에 커다란 장벽이 되고 있다. 본 저자는 장애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 즉 개인의 다양성에 포함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름, 차이 즉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장애라는 테두리 안에 가둬두고 있다. 예를 들어 우울장애, 불안장애, 원하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강박사고와 강박행동을 나타내는 강박장애를 포함하는 정서행동장애. 빠른 말 속도 때문에 문법적으로 오류가 생기는 속화, 억양 및 매끄러운 대화에 문제가 생기는 말더듬을 포함하는 의사소통장애. 이렇게 많은 장애 중 나는 아무것도 속하지 않았을까? 나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얼마나 많은 장애가 있는지 몰라서, 장애에 대한 이슈는 늘 뒤편으로 미뤄두었던 것은 아닌가? 전북 장애인 청년들의 자조모임 어쩌다 청년에서 강의를 할 때 물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장애란 무엇인가요? 그들은 대답했다. 신체가 약한 사람. 남들과 다른 사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불편함이 있는 사람 나는 반문하였다. 신체가 약한 사람들은 모두 장애인인가? 남들과 다른 사람은 모두 장애인인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편함이 있는 사람은 모두 장애인인가? 그렇다면 그 불편함을 정의하는 것은 누구인가? 불편함의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지 않는가? 개인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장애가 아닌 것인가? 이 글은 주장이 아닌, 질문의 글이다. 우리는 장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와 다른 모습이기에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단정 짓진 않았는지. 장애를 몰라서, 내가 불편하지 않아서, 또는 불편함을 숨겨서 장애가 아니었던 것은 아닌지. 혼자서 던져도, 던져도 결론이 나오지 않는 끝없는 질문들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면서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부부를 뜻하는 딩크족, 취업에 대한 의욕이 전혀 없어 취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니트족,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여성 애자, 남성 애자, 양성애자와 젠더 퀴어, 트랜스젠더, 간성, 제3의 성 등을 포함하여 다른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 성별 등을 지닌 성소수자, 갈수록 늘어나는 우리 사회의 소수들은 외친다. 우리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라고. 장애도 사실 이 정도의 다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다른 소수들은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다수를 이해시키고 인정받아 권리를 찾는 것이 빨랐고, 장애인은 고유의 특성 때문에 목소리를 높여 다수를 이해시키는 것이 늦어졌을 뿐이다. 현재의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에서 그리고 그 모든 다름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나와 달라서, 소수여서, 나는 경험해 보지 못해서 장애라고 정의했다면 우리는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그들이 가진 다양성을. 그리고 인정해야 한다. 장애란 우리의 문제임을. /김주은 도르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01.12 15:33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질문이 필요하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새 해 첫날 그녀가 물었다. 올해는 어떤 작품을 하고 싶어? 그녀가 무심하게 던졌던 이 짧은 질문은 나를 둘러싼 사회의 많은 것들과, 과거와 현재의 나에 대한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올해로 14년째 연극활동을 하고 있다. 배우로 10년 그 후엔 연출로, 처음 연극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연예인이 얼마나 힘든 직업인 줄 아느냐는 (질문을 가장한) 질타였다. 나는 연예인이 되고 싶은게 아니었는데... 5년쯤 지나고 나니 아직도 연극 하니? 라는 냉소어린 비아냥을 받기도 했고 10년쯤 되니요즘은 연극 같은거 해도 벌이가 되느냐?며 끈기를 인정(?)받기도 했다. 예술가를 직업군에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우리사회의 인식은 어린 날의 나를 안정된 직장인이라는 기준에 한참 못미치는 객기 넘치는 철부지로 규정했고 그로인해 꽤 긴 시간 나는 나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왜 하필 연기가 하고 싶을까, 내가 가진 재능이 마치 독이라도 된 듯이 무명의 연극배우가 감내할 것은 배고픔이라 믿으며 온갖 불합리한 환경 속에서도 참고 버티는 것만이 해결책라고 믿고 버티고 또 버텼다. 돌아보면 짠내나고 암울했던 기억들.. 초라해질 대로 초라해진 그때의 나에게 너의 창작과정은 근로로 환산할 수 있으니 너의 배고픔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은 높이 평가 받아야 마땅하며 너의 권리는 반드시 보장받아야 한다고 일러주는 선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또한 그게 어떤 일이든 우리 모두는 그저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괜찮다며 내 손을 잡고 격려해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느덧 나는 그런 진심 어린 위로를 해줄 어른으로, 예술가의 권리에 대한 제도적 변화를 주장할만한 선배로 성장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크고 작은 자리에서 청년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발언하고 30대 중반의 여성예술인이자 연출가로서 동시대에 예술의 기능적 요소를 이해하는 창작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제야 이 직업을 선택한 스스로를 인정하고 긍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즘 나에게 다시 시련 같은 질문이 많아진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계획이냐? 가슴이 턱 하고 막힌다. 예술가로 고군분투 하며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의 흔적이 완벽하게 지워지는 느낌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여자 선배들을 일컬어 독하다고 치부하거나 히스테릭하다고 폄하하는 분위기를 체험했기에 결혼과 출산은 여성예술가로 하여금 완성된 삶의 형태라고 믿게 하기도 했다. 더 큰 사회적 인식의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이다. 그렇게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은 나는 또 한번 이 사회에서 철부지로 평가되는 위기에 놓였다. 그런데 그녀는 결혼이나 출산, 가족관계, 연봉 등 사회적 기준이 아닌 내가 살고자 하는 삶에 대해 질문해주었다. 올해는 어떤 작품을 하고 싶어? 그것은 나를 다시 살게 하는 질문이다. 나를 더 잘 살게 해줄 질문이다. 무척 사적이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은 질문. 나를 오롯이 창작자의 위치에 놓아두었기에 가능한 질문. 나는 대답한다. 어딘가 불편해서 자꾸만 외면하고 싶었던 이야기, 들여다보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야기, 하다보면 잘 했다 싶은 이야기.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01.05 16:08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