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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 창조 전북을 위하여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작곡가를 꿈꿔왔던 것은 아니었다. 음악과 미술, 학문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으셨던 형님 옆에서 세계의 다양한 음악들을 접하게 되었고, 피아노를 연주하시던 누님의 어깨 너머로 따라서 연주하던 정도였다. 학교의 실기교실과 학원을 오가며 서예에 빠져 있었고, 집에 와서도 난과 죽을 치며 혼자서 하는 놀이에 빠져있는 성향이었다. 아마도 집안에서 초서를 즐겨하시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탓도 있으려니 했다.아직도 창작 예술인 처우 미흡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서예에서 잠시 멀어져 학업에 매진하던 찰나 느닷없이 학교의 동아리에서 쇠북장구 징 소리가 들렸고, 나도 모르게 그 소리에 매료되어 국악이라는 분야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푹 빠지는 감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해왔던 음악 임에도 국악은 새롭고,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렇게 나의 국악인생이 시작되었다. 전통악곡과 국악기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나는 악기마다 가지고 있는 매우 독특한 소리에 매력을 느끼고 한 가지씩 배워나갔다. 군 제대 이후 대학전공을 살려 연주회에 걸 맞는 형식의 곡을 쓰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쓰기 시작한 곡이 운이 좋아 외부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꿈꿔왔던 작곡가의 삶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곡을 짓는 작업이 어느 덧 십여 년이 흘러 그간 수많은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며 전업작곡가로서의 삶을 이어왔다. 물론 그러한 삶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세월이었다. 젊음이라는 자신감 하나 가지고 버텨왔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나는 여전히 청춘이다. 이제는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나이가 되어 실상 작곡가의 현실에 대해 지역에서 활동하는 후배 작곡가들을 위해서 더 나은 환경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창작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예술관련계에서 분명 알고 있을 법 한데 아직도 창작자에 대한 처우가 미흡한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새로운 인물이 탄생하고, 육성될 수 있겠는가. 창조적인 전북, 세계로 뻗어나가는 전북도의 예술 작품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창작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 있는 창작자를 세계적인 예술인으로 길러내야 하는 책임이 수반돼야 할 것이다.몇 해 전에 서울의 모 예술단체에서 상주작곡가 제도를 국악분야 최초로 도입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이는 국악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한 과제로 완성도 높은 창작곡 개발에 주목하기 위해서다. 또한 작곡가가 창작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해 국내 최초로 상주작곡가 제도를 도입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상주작곡가 제도가 전통문화 발상지인 전북도에 꼭 필요한 제도라 여겨왔다. 전북지역 민간단체에서부터 관 단체에 이르기까지 한 해를 기준으로 생산해내는 위촉 작품 대다수가 전북도와 도내 지역 문예진흥기금 지원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고서라도 턱없이 부족한 예산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작품 규모의 욕심은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관 단체의 수억 원대 브랜드사업과 견주려 하니 순수창작예술인의 등골만 휘어가는 형국이 됐다. 물론 문예진흥기금을 선정하는 기준 또한 작품의 실효성과 그에 따르는 예산이 동떨어진 심사가 매해 반복되다보니 사업에 참여하는 예술인 모두가 기금사업에 선정되었다 하더라도 녹록치 못한 환경 속에서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는 현실이다.문화예술인도민 관심과 노력 필요국악창작곡의 경우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역사에서 작품의 레퍼토리가 매우 적기 때문에 매해 새로운 주제의 위촉 창작곡을 통해 단체의 변화를 모색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공연예산으로 인해 단발성 공연이 지속되기 십상이다. 문화 충족의 전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창작예술인의 처우개선을 위해 문화예술인 뿐만 아니라 도민들의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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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06 23:02

청춘인생

청춘(靑春)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이다. 대개 10대 후반에서 20대를 뜻하기도 한다. 그 시기의 나는 진정 청춘이었나? 예고를 나와 미대를 졸업한 나는 예술적 성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비교적 다양한 일들을 하며 지내왔다. 스물한 살, 연예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간 것이 시작이었다.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사람들과 상황 속에서 첫 사회생활의 무서움을 느꼈다. 그 뒤로 다양한 곳에서 성인과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일은 물론, 쇼핑몰 MD, 모델, 디자이너, 회사원, 벽화를 그리기도 했고 백수로 지내기도 했다.청춘, 10대 후반20대 뜻하지만그렇게 20대를 보냈다.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 다양한 일을 했다는 것은 한 가지 일을 긴 시간동안 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펙이라고 할 만한 것 하나 없던 나는 뭐하나 끈기 있게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운 사람이었다.내 몸과 마음이 한없이 작아 보여 더 이상 작아질 수도 없을 만큼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시기에 공연을 하나 보게 된다. 드로잉쇼라고 하는 그 공연은 무대에서 다양한 기법과 효과를 주며 빠른 시간 안에 그림을 그려내는 흥미로운 그림공연 이었다.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작정 그 극단에 연락을 해서 오디션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곳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내 나이 29살 때였다.그 때는 몰랐다. 마냥 새로운 꿈에 부풀어 들어간 그 곳이 상상 이상으로 녹록치 않은 곳이란 것을.연극의 연자는 커녕 걸음걸이조차 문제였던 나는 그 극단의 천덕꾸러기이자 총체적 난국이었다. 게다가 단체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던지라 배우들 속에서 섞이는 법을 몰랐고 그렇게 매일을 하루가 한 달 같은 시간들을 보냈다. 그곳에서 나의 마지막 20대 청춘이 까맣게 타들어갔다.끈기 없이 쉽게 포기하던 내가, 그 전 같으면 진작에 때려 쳤을 그 일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붙잡고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가 그토록 원해서 하게 된 그 일조차 버티지 못하고 포기한다면 평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낙오자가 될 것만 같은 불안함과 절박함. 처음이었다.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루도 마음 편한 적 없었고 몸과 마음을 다치기도 했지만 나를 가장 성장시킨 시간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자의만으로 나를 이긴 최초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계기로 조금씩 나를 넘어서는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스스로를 이겨먹지 못해 후회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다만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보이던 대상을 한번 넘으니 더 이상 막막하지만은 않은 것처럼 마냥 나는 안 돼라고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고 작은 고비들을 넘기며 성취의 즐거움을 깨닫게 됐다.봄마다 푸른 싹 틔울 수 있다면 청춘까맣게 타들어가 더는 태울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숯이 다시 한 번 빨갛게 불타오르고 그 불꽃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끊임없이 부활할 것이다. 이미 꿈과 의지만으로 먹고살 수밖에 없는 삶을 선택해 버렸으니 그 숯이 재가 되지 않고 계속 타오를 수 있도록 즐기면 그만이다. 나의 청춘은 20대를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청춘이 뭐 별건가. 내 속의 나무가 말라 죽지 않고 매년 봄마다 푸른 새싹을 틔울 수 있으면 그게 언제까지고 청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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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27 23:02

여행이 주는 의미

주변에 보면 1년에도 여러 번 국내 뿐 아니라 해외로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여행을 가는 연령도 매우 낮아 진 것 같다. 자만벽화마을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자주 가는 편인데 벽화마을에서도 대학생이 아니라 중학생, 고등학생들도 친구끼리 연인끼리 여행을 오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일상 벗어나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또한 요즘에는 여행에 관한 정보도 SNS를 통해서 너무 손쉽고 다양하게 얻을 수 있다. 추천 코스, 추천 관광지, 추천 식당 등 없는 것이 없다. 기존에는 여행사를 통한 여행이 주였다면 이제는 스스로 항공을 예약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코스를 짜는 셀프 여행 족들이 굉장히 많아 졌다. 필자 주변에도 보면 인터넷으로 손쉽게 예약하고 일본, 유럽 등을 친구끼리 불편함 없이 즐겁게 자유여행을 하고 오는 대학생 친구들을 정말 자주 본다.반면에 해외도 한번 가보지 못하고 제대로 된 여행을 가보지 못했던 필자는 주변에 다 여행을 자주 가는데 아! 나도 한번 여행을 가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여행이 주는 어떤 매력 때문에 이렇데 다들 여행을 다니는지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남자 넷이서 2박3일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여 다녀오게 되었다.여행을 가보지 않아서 그런지 사실 두려움이 컸다. 항공기 예약은 어떻게 하고, 숙소는 어디로 하고, 차량은 어떻게 하고 등등 고민과 걱정이 기대감보다 앞섰던 것 같다. 하지만 괜한 걱정 이었다.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확인하고 실시간으로 결제까지 한 번에 해결이 가능하였다. 아 여행 준비 하는 것이 간편하네. 생각했다. 여행 간에도 코스도 인터넷을 통해서 또 지인을 통해서 추천 명소, 가볼만한 곳을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두려웠던 제주도 여행은 나름 성공적으로 즐겁게 마무리 되었다.여행 중에 그리고 여행에 돌아온 후에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여행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제일 좋았던 건 바로 일탈 이였다. 일상에서 벗어나 아무 걱정 없이 오롯이 어디 갈지 뭐먹을지 뭐하고 놀지만 걱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첫 여행이라 많은 의미를 담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 여행을 많이 다니는 지인들에게 물음을 던졌다. 여행이 주는 의미는 뭐예요? 여행은 왜가세요? 다양한 의견과 다양한 생각이 나와서 흥미로웠다. 인상적인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우리 삶에 플러스 되어주는 것나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 이에요. 여행은 심리상담을 하는 것 같아요. 나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하기도 하거든요. 여행은 미지의 낯선 곳을 간다는 두려움으로 시작해서 하나씩 알아가는 기쁨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재미예요. 처음 가는 곳, 처음 보는 사람들, 새로운 환경에서 보고 배우고 도전하는 의미입니다. 여행을 가는 이유는 여행을 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누구를 만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는 설렘이 있어요.각자 의미와 이유는 다 다르지만 여행은 우리의 삶에 플러스가 되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일상 중에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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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20 23:02

택견을 왜 하냐는 물음에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한 택견은 이렇다 할 정도로 고수는 아니지만 오래 한 만큼은 기본적인 실력은 있다 자부할 수 있다. 흔하지 않은 특기인데, 어떻게 시작했냐고 묻는다면 조금 웃기지만 택견복 때문이었다. 어릴 적 본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떠오르는 검은 조끼와 붉은 끈이 어찌나 예뻐보여서 검도도, 태권도도 아닌 택견을 선택했고 나는 현재까지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질문이 ‘택견을 왜 해?’라면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단순한 운동이나 무술이 아닌택견복이 예뻐서 택견을 시작했지만, 내가 택견을 지금까지 하는 이유는 택견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회를 나가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모습, 택견을 향한 사람들의 열정 같은 것도 있지만 택견을 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택견에서 서로의 실력을 뽐내며 경쟁하는 것을 ‘견주기’라고 한다. 견주기처럼 상대를 때릴 수 있고 때려야하는 상황이 온다면 누구나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 갑작스러운 대치도 아니고 뚜렷한 규칙도 있고, 보호구도 있음에도 이러한 상황을 처음 마주치게 되면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정말 때려야하는 것이 맞는지, 내가 누군가를 상처줘도 괜찮은 것인지 망설이는 동안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상대를 제대로 차지 못하는 나에게 당시 택견을 가르쳐주던 선생님께서 알려주셨던 것이 있었다. 견주기에서 이기고 싶을 때 제일 중요하게 삼아야하는 것은 ‘깡’이라고. 선생님께서는 ‘깡’이라고 표현했지만 상대와 대치할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한 것이겠다. 상대방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고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상태를 누구보다 빨리 준비하는 것. 그것이 ‘깡’이었다. 이 용기가 준비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밀려 자신의 자리를 잃게 된다. 제 아무리 자신이 연습 때 빠르고 강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해도, 용기가 없으면 견주기에서 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선생님은 나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라고.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라고. 눈을 뜨고 앞에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를 가지라고.깨달음은 얻었지만 경기에서는 졌다. 선생님은 경기를 보시고는 나에게 경기를 왜 이렇게 연습보다 못했냐며 한참을 나무라셨다. 져서 시무룩할 나를 생각하셔서 더 그러신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이후에도 택견을 하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 상대와 나의 거리를 재는 방법, 무게 중심 유지하기, 때로는 앞이 아닌 옆이나 뒤에서 상대하는 법,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가끔은 정직하지 않더라도 페인팅 하기…. 택견은 나에게 단순한 운동이나 무술이 아니었다. 나에게 살아가는 용기를 주고 살아가는 방법을 준 소중한 경험이었다.살아가는 용기와 방법을 준 경험사람들은 택견을 할 줄 안다는 나에게 자주 묻는다. 너는 택견을 왜 해? 사람들은 잘 안찾는 무예잖아. 구구절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항상 말을 잘 하지 못했다. 택견을 좋아하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놀림거리가 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리를 빌어 말하자면, 그래도 멋쩍게 웃어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다. 단지 누군가의 입에 쉽게 오르내리락 하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그만큼 소중한 경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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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3 23:02

땅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

필자는 국악작곡가로 활동해오며 다양한 주제를 음악적으로 다루고 있다. 과거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기던 가곡에 뿌리를 둔 경풍년(慶豊年)을 소재로 하여 작곡되어진 대금과 아쟁을 위한 이중주 격양가(擊壤歌)를 쓰게 된 작곡 노트의 일부분을 잠시 칼럼에 인용해 본다.백성들이 걱정 없이 즐겁게 사는 나라동양권에서 가장 이상적인 시대를 말할 때 요순시대를 빗대곤 한다. 요순시대에는 태평성대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때 백성들이 저절로 흥겨워 부른 노래가 바로 격양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풍년이 들어 오곡이 풍성하고 민심이 후한 태평시대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 격양가의 노래가사는 『세종실록』 권8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일출이작(日出而作) 착정이가(鑿井而歌) 경전이식(耕田而食) 제력하유어아재(帝力何有於我哉).해가 뜨면 일하고, 우물 파서 물마시고, 밭을 갈아 밥 먹으니, 임금의 은혜 어찌 우리에게만 있으리오.격양가는 중국의 고가로써 전해지는 내용은 이렇다.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이 되었을 때, 과연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자 평민 차림으로 거리에 나섰다. 넓고 번화한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이 노래 부르며 놀고 있어 그 노랫소리를 유심히 들었다. 우리 백성들을 살게 하는 것은, 그대의 지극함 아닌 것이 없다, 느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임금의 법에 따르고 있다. 그 뜻은 임금님이 인간의 본성에 따라 백성을 도리에 맞게 인도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법이니 정치니 하는 것을 염두에 두거나 배워 알거나 하지 않아도 자연 임금님의 가르침에 따르게 된다는 것으로, 이 노래를 강구가무(康衢歌舞)라고도 한다.임금은 다시 발길을 옮겼다. 한 노인이 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또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며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 노래의 요체는 정치의 고마움을 알게 하는 정치보다는 그것을 전혀 느끼기조차 못하게 하는 정치가 진실로 위대한 정치라는 것으로, 이 노래가 격양가이다. 노래한 노인이 했다는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또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는 행위가 곧 함포고복(含哺鼓腹)이다. 이는 장자가 다스림의 최고 경지라 한 것으로 백성들이 먹을 것이 풍족하여 아무런 걱정 없이 즐겁게 지내고 있음을 뜻한다.격앙가 부르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지금은 어느 모로 보나 이 나라 국민들이 배 두드리며 격양가를 부를 형편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 나라 위정자들이 정치를 아주 잘 한다고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예술가뿐만이 아니라 국민이라면 어느 구석에서든 불만이 있을 수 있으며 국민은 그 불만을 표현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것이 예술적 표현에서든 비폭력 시위를 통해서든 말이다. 촛불 집회를 벌이고, 예술가들이 곳곳에서 시국을 대변하는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이는 우리사회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을 두고 억압할 목적의 수단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매 정권마다 문화예술에 대해 편가르기식 지원을 하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문화를 요구하는 시대를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부디 이 땅에 살고 있는 국민 모두가 땅을 치고 배를 두드리며 격양가를 노래하는 그날이 하루빨리 찾아오길 우리는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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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06 23:02

청년들의 현실적인 고민

요즘 청년들은 참 고민이 많다. 그 중에서도 깊은 고민이 바로 진로, 먹고사는 고민이다. 진로고민도 아주 다양한 직업군에서 취사선택하는데도 고민이 있겠지만, 직업을 선택한 청년들도 또다른 고민을 갖게된다. 바로 현실이라는 큰 벽에 부딪혀서이다.기성세대도 청년의 고민 함께해주길많은 청년들이 이 현실 때문에 안정적이고 급여가 높은 직업군을 많이 선호한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이 다 똑같을 수 있는가? 돈을 많이 버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으면 돈을 조금 버는 일을 하는 사람도 존재 한다. 주변에는 남들이 하지 않는 청소년, 대학생,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료 친구들이 많다. 이 친구들은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먼저의 고민은 어디서 이 비용을 끌어 올 것인가이다. 인건비는커녕 행사를 치르는 최소비용도 지원받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렇다 보니 열정으로 도전한 좋은 프로그램은 현실에 부딪혀 실패하거나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청년들에게 어른들은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좋은 경험이야, 그것이 쌓이면 나중엔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야, 그러니 조금만 참아 현실을 봐, 당장 배고픈데 무슨 좋은 일을 한다고 그래 당장 다른 일 찾아봐청년들은 두렵다. 또 고민이다. 내가 정말 즐겁고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이일을 좋은 경험이라고 자신을 다독여야 할지 아니면 현실이 힘들고 어려우니 포기하고 현실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하는 건지.청년의 고민을 청년 뿐만아니라 보다 더한 세월을 살아간 기성세대가 같이 고민해주면 어떨까? 이 고민에 정확한 답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고민을 해본 입장으로 같이 고민 해봤으면 좋겠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일이 어떻게 하면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를 반드시 고민해 봐야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또한 시선을 조금만 옮기면 다양하고 보다나은 수익모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즐거운 일, 하고 싶은 일만 추구하다 수익모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으면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평생 지원 받을 수 없는 연유다. 하지만 어떻게 좋은 일 하는 게 바로 수익이 될 수 있겠는가, 국가와 기업 단체들은 이미 잘 먹고 잘 사는 사회 및 경제적 강자에게만 시선을 주지 말고 열정이 넘치는데 현실과 경험의 선에서 고민 하는 젊은 청년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준다면 이런 청년들도 조금 더 노력해보지 않을까 싶다.필요에 따라서 전략적인 시간분배를 해보자! 일을 하다보면 이런 고민도 한다. 돈이 되는 일, 돈이 안 되는 일, 어떤 일을 할 것인가?때로는 투자헌신적 희생도 필요당연히 생계를 위해서 돈이 되는 일을 해야 된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어떻게 돈 되는 일만 주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고민을 한다. 돈이 안 되는 일이 주어졌을 때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열심히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기준이 있으면 한다. 이것이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목표와 목적에 도움이 될 것 인지, 연관성이 있는 건지 생산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물만 줘서는 안 된다. 가지도 쳐야하고, 거름도 해야 된다. 성공을 위해서는 돈 되는 일만 해야 되다는 현실적인 부분에만 치우치지 말고, 때로는 투자도 필요하고 헌신적 희생도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싶다. 그 때가 바로 지금 청년의 시기가 아닌가 싶다. 나라는 나무를 키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단기적이면서 중장기 적인 플랜을 포함한 시간분배를 청년의 컬러에 맞게 추진해나가자.△이정길 단장은 현재 제이알이벤트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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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23 23:02

우리들의 집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와 맥주를 마셨다. 우리 둘 얼굴이 벌겋게 되었을 때 쯤 우리는 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친구는 tvN 드라마 〈청춘시대〉를 재밌게 봤다고 했다. 혈연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한 집에 살며, 자신의 인생과 타인의 인생을 함께 사는 서사. 친구는 그 이야기가 참 부러웠다고 말했다. 우리는 갑자기 홀린 듯 드라마에 나오는 쉐어 하우스 이야기를 했다. 창업을 하네 마네, 규칙을 어떻게 하네 마네. 심지어 애인을 집에 들이네 마네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드라마 〈청춘시대〉처럼 젊은 청년들에게 복층 집을 내어놓는 마음씨 좋은 집주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집이 없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잠시 멈춘 대화 사이로 가수 한동근씨의 노래 〈그대라는 사치〉가 흘러나왔다. 그래 사치, 그댄 사치, 내겐 사치.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사치로 여겨지는 씁쓸한 보금자리그 때 우리는 웃었지만, 우리는 집이 없었고 우리에게 집은 사치다. 200만원을 웃도는 보증금과 30만원이라는 월세. 어떤 방은 빨래라도 하는 날이면 곧게 편 빨래 건조대 때문에 침대나 책상에서 내려가지 못했다. 어떤 방은 마치 공장식 축산농장의 닭장처럼, 침대와 옷장이 방의 전부이기도 했다. 방의 가구가 침대와 옷장뿐이라는 것이 아니라, 침대와 옷장이 끝인 방이었다. 다분히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서울과 수도권의 문제가 아니라, 전북권 대학 인근에서도 이런 방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집에서 사는 것이 어떤 지역의 특수성이 아니었다. 학점이고 취업 준비고 잠깐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고 싶은 집은 좁다 못해 가끔은 외로울 정도로 갑갑했고 슬프게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보금자리로서의 집 역시 다분히 사치였다. 사회의 노력하라는 말에 쫓기는 나에게 혈육은 남들도 다 그만큼은 한다는 말을 쉽게 했고, 어쩔 때는 그렇지 않다, 열심히 하고 있다고 대꾸할 힘조차 들지 않았다. 나를 향한 기대가 나를 짓눌렀고 그 기대만큼 잘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우리도 세상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항상 내 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미친 듯이 달리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집으로 돌아와 쉬고 싶은데 집조차 편하지가 않았다. 사람답게 살만한 집을 찾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아야했고 혈육이 있는 집은 맘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에게 집은 사치일 수 밖에 없었다.사치 아닌 '일상'이 되는 집 바란다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집을, 새로운 가족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나와 친구의 상상은 끝이 없었다. 나는 이런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아, 그런 부모가 되지 않을 거야, 내 가족이 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거야, 공간까지 내가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나의 가족이 집이라는 보금자리를 사치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줄줄 나열한 이 상상이 정말로 현실로 이루어질까, 우리는 믿음보다 의심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보증금 200만원과 월세 30만원을 당장 준비할 수 없어서 우리들의 집을 위해 가장 먼저 집이 사치가 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며 노력하기로 했다. 우리들의 집이 사치가 아닌 일상이 되는 집을 만들기 위해서.△권화담씨는 청년대안언론 Misfits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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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16 23:02

바람을 그리다

정유년(丁酉年)의 눈부신 새해 첫날, 필자는 천년 전북, 청년 전북의 닭띠 태생으로 올해는 남다른 해가 되리라는 바람을 안고 평소엔 오르지도 않던 모악산 정상을 밟았다. 지난날의 시련과 아픔을 멀리 떼어버리고 나와, 새해의 소망을 가슴 속에 되뇌었다. 지난 4년의 풍상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지만, 비단 필자의 개인적인 고뇌만은 아니었음을 -현 시국이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듯- 오늘 아침뉴스는 어제와 별다를 바 없었다.본질로 되돌아가야 새로움 얻어창작을 업으로 삼고 있는 필자는 병적으로 매순간 새로운 소리 혹은 가치 있는 소리에 목말라 했다. 악상의 부제로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을 느낄 땐 불현 듯 과거로 돌아가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결국 본질로 되돌아가야지만 새로움을 얻게 됨을 깨닫는다. 그땐 이미 마감시간에 쫓겨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이런 삶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지금껏 달려온 것을 보면 바보가 아니라면 청춘의 다른 이름, 열정이었을까.전라북도는 문화예술의 훌륭한 인적자원과 유구한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대의 전통문화 발상지이다. 수준 높은 전북의 귀명창이 소리의 고장 전북을 지켜내고 있다는 사실에 이견이 없을 듯하다. 창작음악 역시 그에 걸맞는 수준의 음악적 양식을 갖추어야 할 터이니 지역의 국악계를 이끌어갈 청년 국악인들은 어깨가 실로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요즘은 갈수록 자극적인 것의 수위가 높아만 간다. 뉴스, 드라마, 음식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러하다. 음악 역시 빠른 정보 습득과 유행을 쫓으며 편향되는 현상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자극에 익숙해질 때 즈음 우리는 더욱 심한 자극을 맞이한다. 새로운 공연주제와 무대연출, 소재의 홍수 속에 창작음악은 유행처럼 번지듯 관객의 구미에 맞춰 MSG를 뿜어낸다. 저마다 같은 소리와 무대를 보이며 악곡의 해석은 산(山)으로 갈 때가 허다하다. 때로는 과하다 못해 어떤 음악을 표현하려는 것인지 조차 분간이 안갈 때도 있다.우리가 지향해야 할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 실험적인 악곡의 다양한 편곡 방향을 정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악곡을 표현함에 있어 음향에 대한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음악을 억지로 짜 맞춘 것 같은 느낌보다는 조금 더 안정되고 효율적인 음악구조로써 새로운 세계를 만난 듯 발전적인 창작국악으로, 청년국악으로 나아가야겠다.1145년(인종 23)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전하길 신라 진흥왕 시절 우륵이 제자의 음악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樂而不流 哀而不悲 (낙이불류 애이불비) 즐겁지만 넘치지 아니하고 애절하지만 슬프지 않다. 이 말은 즐기되 지나치게 휩쓸리지 않고 슬퍼하되 비탄에 빠지지 않는다는 음악 최고의 경지를 뜻한다. 또한 애이불비(哀而不悲) 이전에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가 간추린 시경(詩經)에서 문왕(文王)과 후비(后妃)의 덕을 노래한 관저(關雎)라는 곡(曲)을 이렇게 평하였다. 樂而不淫 哀而不傷 (애이불상 낙이불음) 즐겁지만 방탕하지 아니하고 슬프지만 마음을 상하지 않는다.청춘들, 여유 갖고 너의 길 가라고대로부터 발전해 온 동아시아의 전통 사상은 음악이라는 예술에 살아 있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끊임없이 고한다. 절제하라! 치우치지마라! 여유를 갖고 너의 길을 가라!△강성오 씨는 국악작곡가 겸 지휘자이며 한국전통문화고전주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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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09 23:02

나의 Soul match

얼마 전 연사로 참여했던 강연장에서 한 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림을 잘 그리는 재능은 타고난 건가요? 타고난 재능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부모의 DNA 중 우성인자에 의한 선천적인 능력? 그렇다고 하기 에는 나의 부모님과 친가, 외가 친척들, 조상님까지도 미술업계에 종사하셨다는 분은 계시지 않았다. 혹은 재능이 있었지만 개발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다. 부모님도 두 분 모두 손재주가 좋으시니 말이다. 영혼 통하듯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일그렇다면 과연 나는 정말 타고났을까?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유치원 때? 그것보다 조금 더 과거의 이야기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림 그리는 행위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항상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것을 내밀며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나의 이름이 쓰여 진 스케치북에는 매번 다른 사람들의 그림으로만 가득 채워졌다. 그렇게 그림을 바라보기만 하던 꼬맹이의 첫 그림 입문은 바로 ‘먹지’의 존재를 알고부터였다. 그때부터 집에 있는 동화책 속 공주님이란 공주님은 죄다 베껴 그려지는 대상이 되었다. 좋아하는 그림은 몇 번 이고 베꼈다. 그림의 검정 라인이 덧그려진 나의 선들로 인해 너덜거렸다. 그러다 조금 더 크니 상상 속 공주님을 직접 그리게 되고, 집에 있는 사물을 보고 그리고, 풍경을 그리게 되더라. 나는 그냥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였지 특출난 재능을 타고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림에 대한 관심이 특별히 많았던 것이 선천적인 부분이라면 그렇달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들이는 만큼 실력이 향상되는 것은 누구나 매한가지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타고난 자신의 성향과 잘 맞는 일은 있다는 것이다.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 피아노 또한 좋아했다. 아직 손이 덜 자라 피아노를 칠 수 없을 만큼 작은 아이였을 때, 특별히 떼쓰는 것 없이 순했던 내가 피아노 학원 앞만 지나가면 그 앞에 앉아 울고불고 해서 엄마를 당혹케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꽤 긴 시간동안 피아노를 배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던 피아노가 어찌 보면 미래의 직업으로 선택하기에 더 알맞았을지도 모른다. 한두 번 콩쿨에 나가 입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대에서의 공포심과 실수에 대한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피아노는 나의 흥미에서 점점 멀어졌고 학원을 가는 것이 괴롭게만 느껴졌다. 여전히 무대에 서는 것이 참 힘들다. 대중 앞에서 이야기를 할라치면 평정심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법으로 강연을 망치고 돌아와 이불킥하기 일쑤이다.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림 공연을 할 때만큼은 예외다. 오히려 그들의 에너지를 받아 작품에 원 없이 표출한다. 그렇게 아낌없이 쏟아 그림을 완성하고 난 뒤 돌아서서 관객을 바라보았을 때의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남이 만들어 놓은 틀에 맞춰 살지 말자나에게 피아노와 그림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영혼이 통하듯 오롯이 집중해서 그 행위에 빠질 수 있는 어떤 힘이지 않을까 싶다. 소울 메이트처럼 직업에도 소울 매치(Soul match)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난 두 해를 나만의 소울 매치를 창조하기 위해 보내왔다. 그리고 2017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길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지라도 남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 맞추어 살기 위해 나의 몸과 영혼을 깎아 우겨넣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신은미 씨는 성신여대를 졸업하고 전주한옥마을에서 아트샵 새라바림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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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02 23:02

새로운 시절을 맞이하며

나는 대학시절 남들 보기에 ‘쓸 데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전공 특성상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면 취업에는 큰 지장이 없었던 덕분이었다. 기말 시험을 보러 가다가 눈 내리는 거리의 모습에 감명 받아 갑자기 그대로 남산에 가서 풍경을 본다거나,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으면 망설임 없이 관련된 다른 전공의 수업을 수강하거나 하는 식이었다. 물론 시험에 불참한 과목은 재수강을 하게 되었고, 쟁쟁한 전공생들 사이에서 얻은 타 전공수업 학점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그토록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기회는 그 때가 아니면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던 일그러던 어느 여름, 계절학기로 개설된 ‘성의 철학과 성윤리’라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무려 지하철로 열 정거장이 넘는 다른 학교까지 가서 말이다. 졸업을 앞두고 있었던 터라 주변에서는 쓸 데 없이 멀리까지 가서 학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수업을 듣지 말라는 조언을 했지만, 나는 그 수업을 듣고야 말았다.그리고 그 수업에서 나는 지금까지 마음에 새기고 있을 정도로 인상 깊은 말을 듣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불쾌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그와 비슷한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이 때 이것을 단순한 감정의 경험에서 끝내지 않고, 그 기분의 기저에 깔린 원인을 찾아 이성적인 언어로 표현해보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소통하고자 노력한다면 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한 마디로, 불평만 하지 말고 상황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보자는 말이다. 합리적이지 않은 규칙이나 제도 등에 의해 그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닌지, 나만 그런 불편을 겪고 있는 것인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일하면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나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등을 자주 보는데, 그런 노력들 덕에 이런 법률도 제정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일할 때에도 막연한 답답함을 적극적으로 말로 풀어보면서 그 말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관련 법령을 찾다 보면, 승소의 기쁨을 누리는 때가 많다. 모두가 수강하지 말라고 말렸던 저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었을 배움이다. 이 정도면 살면서 다소 쓸 데 없는 짓을 일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삶의 많은 부분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오히려 삶의 많은 부분 지탱해주는 힘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16년이 가면, 나는 이십대를 지나 서른 살이 된다. 그동안 계속 밖으로 에너지를 쏟아내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이십대 초반에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밑거름을 만들어둔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서른 살을 앞두고 다시 삼십대를 견뎌낼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일구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은 무엇인가 편치 않다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여 왔다면, 이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가 아닐까. 새롭게 삼십 대를 맞이한 시점에서의 ‘쓸 데 없어 보이는 일’은 무엇일까를 고민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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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26 23:02

지역에 대한 자부심

우리 지역을 연고로 하는 전북현대 축구단이 10년 만에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랐다. 전북을 찾는 이들이 관광 코스로 전북현대 경기를 관람할 만큼 전북현대 축구단은 전북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실제로 필자가 운영하는 호스텔을 방문한 여행객들이 전북현대 경기 전날 전주에 와서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전주월드컵경기장으로 이동하는 여행경로를 준비 하곤 한다.우리지역의 자화상, 전북현대필자는 전북현대 광팬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프로스포츠 팀으로서 갖춰야 할 성적이 좋아서 그렇다. 그리고 유니폼이 친환경적인 녹색이기도 하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전북현대가 좋은 이유는 지역에 대한 전북도민들의 자부심을 높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10년전만 해도 전북은 그 어떤 프로 축구 선수도 가고 싶지 않은 구단이었다. 기존 선수들에겐 기회만 되면 떠나고 싶은 구단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인 선수들이 꼭 함께하고 싶은 팀이 됐다. 선수들의 평균 연봉도 12개 팀 중 가장 높고 세계적인 축구 구단들과 견줘도 모자람 없는 클럽하우스도 갖췄다. 자본주의와 지역사회가 충돌할 때 지역사회는 적지 않게 고군분투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 울타리에서 전북현대 축구단이 자본에 앞서는 수도권 지역의 팀들을 넘어 성적과 흥행 선두에 서 있는 일은 그래서 대단한 일이다. 축구단에 대한 모기업의 투자가 훌륭한 성적으로 이어졌고 그 성적이 다시 좋은 선수들 유입과 기업의 투자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전북현대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돈도 힘도 없고 경기만 했다하면 이길 때보다 질 때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전북현대의 모습은 우리 지역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힘 있는 기업들은 경제 기반이 약한 전북에 투자하기를 꺼렸고 유능한 젊은 청년들과 지식인들은 전북을 등지기 일쑤였다. 맛있는 음식 말고는 내놓을 게 없다는 지역 열등감이 팽배해 있을 때 전북현대 축구단이 바닥까지 꺼져가던 지역민들의 자부심을 다시 세워주고 있는 것이다.미국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들 교수가 그의 책 왜 도덕인가에서 역설한 것처럼 스포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강하고 끈끈한 지역공동체 형성에 큰 도움이 된다. 전북현대는 지금까지 정치와 행정이 할 수 없었던 전북도민들의 사회적 유대감과 자존심을 강화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필자를 비롯한 소수의 청년들이 지역에 대한 지역민들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 나름 일조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바로 1%지식나눔이다. 지식나눔의 가장 큰 목적은 우리 지역 안에서 나만의 길을 걸으며 멋지고 근사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공유해 지역민들에게 자부심을 나누는 데에 있다. 늘 그렇듯 자부심과 같은 열정은 예기치 않은 사소한 계기로 점화 된다.열정이 지역 자부심 지켜줄 것어느새 2016년 끝자락이다. 지난 12일. 2016년 마지막 지식나눔이 진행됐다.이날 금융전문가인 35세 청년의 이야기를 서서 듣고 계단에 앉아 경청할 만큼 많은 참여자들이 함께 했다. 매월 지식나눔을 준비하는 데에 많은 부담이 든다. 연사를 섭외하고 사전 인터뷰를 진행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해 나가는 이유는 나고 태어난 이 지역에서 청년으로 살아간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지식나눔 초창기의 뜨거웠던 열정보다 다소 차가워졌지만 지속가능한 열정이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지켜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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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19 23:02

상실의 시대, 야만의 사회

이른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12월이 되자 아직도 올해의 여러 날이 남았건만 우리 모두는 벌써 한해 마무리와 새해 맞이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2016년 12월 다이어리의 빈칸을 미처 채우지 않은 채 필자도 2017년 새 다이어리에 올해의 12월 칸을 적어 나가고 있다. 불안한 20대 청춘들이 그렇듯 본인 또한 희망적이고 도전적이 한해를 꿈꾸기보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들에 대한 안도와 평안을 찾는 한 해에 만족을 했더랬다.억지로 만족하던 삶그냥, 그런대로나는 원래 불안하고 소위 말하는 비빌 언덕이 없는 사람이니, 외부적 요인들이 흔들리거나 사회적 질서가 어긋나도 별 대수로운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미래는 꿈꾸는 것이라기보다 원래 불확실한 것이라 그런대로, 안정적인 직장은 내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나 이미 포화상태인 그런대로, 예술가는 가난한 것이라고 하니 부족한 그런대로. 나는 ‘억지로’ 만족하는 삶을 꾸려나갔다. 그것은 비단 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내 주위의 친구들이 그랬고, 20대의 청춘들이 그랬으며, 2016년을 살아가는 나의 이웃들이 그러했다. 방관하는 삶을 자처했고, 책임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꺼려했다. 그러니 뉴스를 보려하지 않았고,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해 사회나, 이웃을 돌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그러던 내가 뉴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시간이 역행을 한 것 아니냐, 어떻게 지금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의아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뉴스가 굉장히 자극적으로 연출된 드라마를 보는 착각까지 불러일으켰다. 한 나라를 이끄는 소위 어른이라 불리는 정치인, 기업 총수들은 조사를 하는건지, 농담을 하는건지 모를 정도였다. 개그show보다도 웃긴 티비show가 청문회라는 포장을 하고 전파를 탔다. 평소엔 세상 모든 이치를 알던 사람들이 그저 ‘잘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만 연신 되풀이했다. 응징으로써의 행동이 아닌 희망으로써의 미래 시민의 아픔 앞에 국가와 국민을 말하던 ‘어른들’,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회. 우리는 어쩌면 훨씬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순실의 시대라고 표현되고 있는 이 사회는, 사실은 상실의 시대 안에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만 그득한 느낌이다. 야만의 시대서 희망을 찾다하지만 희망은 있다. 누군가 국민은 현재 분노하는 마음이니 감정이란 것은 시간이 흐르면 사그라들고, 무뎌지기 마련이니 잠시 기다리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분노라는 단어로 국한 지어지는 감정 그 이상이다. 잘잘못을 따지고 그것에 응당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단순한 사고를 뛰어 넘어, 퇴보하는 사회에 대한 경계이며,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절절한 열망이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요지경 세상. 모순된 사회 앞에 우리는 조금 더 우리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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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12 23:02

사랑만큼 설레는 것

며칠 전 한 청년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대학모임에서 만난 두 명의 친구와 함께 각자 자신 있는 영역을 분담하여 출판과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글을 좋아하는 그는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쓰고 있었다. 소위 일류라고 말하는 대학을 다니는 엘리트들이었다. 사람들의 기대와 정해진 길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스스로가 원하는 일을 찾고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실천의 어려움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여러 가지 상황들, 시선, 두려움, 결정 장애, 게으름 등에 의해 민들레 홑씨와 같은 나의 결심은 땅에 안착하지 못하고 바람에 쓸려 날아가 나뭇가지에 걸리고 동물의 털에 붙기도 하고 강에 떨어져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흘러가버리고 만다. 그렇게 하염없이 떠다니는 홑씨들만 몇 십 포대는 족히 넘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온전한 상태의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은 씨앗이 반 토막 나있거나 또 어떤 것은 안이 썩어 있기도 하다. 그런 것들은 잎을 틔우기도 전에 문제가 생긴다. 내가 옳다고 믿어 실행한 일이었건만 막상 속을 뜯어보니 독선이었고 이기적이었다. 그런 과거의 경험들은 결국 건강한 씨앗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자양분이 된다. 12월의 냉각된 공기는 온몸을 타고 흐르며 세포 하나하나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올 한해 있었던 모든 일들을 회상하며 만족, 보통, 불만 표에 체크하듯 나를 평가한다. 그 기준은 ‘얼마나 실행 했나’였다. 다소 만족스럽지 못하다. 연말이 되면 부랴부랴 갈아엎어지는 아스팔트처럼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 2016년의 부족한 만족도를 높여 줄 실적을 조금 더 올려보고자 나의 버킷리스트를 꺼내 뒤적여 본다.긴 시간동안 생각만 하고 선뜻 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바로 ‘타투’였다. 몸에 평생 남을 무엇인가를 새기는 행위에 대해 아직까지도 부정적인 시각이 팽배하다. 그들의 우려로 항상 제지당해야만했던 흐물거리던 나의 의지를 이번에야 말로 빳빳하게 세워본다. 그렇게 나의 오른쪽 손목에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꽃심’이라는 말이 있다. 전주의 정신이라고도 불리는 이 꽃심은 만물의 중심 옴파로스(배꼽)를 의미한다. 나에게 아로새겨진 이 꽃은 앞으로 나의 중심과 의지를 잡아주는 부적이 될 것이다. 오랜 시간 고민하던 것을 해버리고 나니 마음 한켠이 홀가분해 왔다. 그리고 마치 신통한 부적인 양 용기가 생겼다. 차근히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해보고 싶은 것들을 나열해본다. 이번에는 급하지 않게 다음 목표와 기간을 설정한다. 원하는 것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노라면 마치 사랑할 때의 그것처럼 설레고 생기가 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부정적인 신호들은 어차피 내가 그 일을 잘 해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그러들 것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오롯이 집중만 하면 된다. 끊임없이 민들레 홀씨를 퍼뜨리자시끌벅적함에 휩쓸릴 12월보다는 담백하고 진정성 있게 나를 들여다보는 연말을 보내기로 한다. 매해 초 마다 흐지부지 되고 마는 작심삼일의 계획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말이다. 오늘도 여전히 나의 민들레 홑씨들은 정처 없이 이것저곳을 떠돌고 있다. 그렇다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흘러가던 씨앗들이 언젠가는 비로소 흙을 만나 찬란하게 피어나게 될지 모르는 것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씨앗을 만들고 퍼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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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05 23:02

우리가 모여서 말할 권리

나는 광화문 광장을 무척 좋아한다. 빌딩 숲과 번잡한 도로 한 가운데 아무렇게나 걸어 다녀도 괜찮은 그 공간은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공강 때면 학교 후문에서 버스를 타고 그곳에 가곤 했다. 광장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들고 나온 피켓 문구에도 눈길이 갔다. 피켓에 적힌 내용에 공감하기도 했고, 적힌 내용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나와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새삼스레 알게 됐다. 그 곳에 갈 때마다 온갖 사람들이 나와 아무 말이나 내뱉어볼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롭고 탁 트인 느낌이 좋았다.광화문광장에 얽힌 경험그런 광화문 광장이 내게 조금 더 특별해진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청계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 쪽으로 가려고 하자 경찰이 이를 미신고 행진으로 보고 길을 완전히 막아 통행할 수 없도록 해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한 대학생이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되는 일이 있었다. 내가 바로 그 대학생을 변론하게 된 것이었다.갓 스물을 넘긴 그 청년은 면담 내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청년이 참가한 집회는 마무리가 된 상태였고, 행진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설령 신고범위를 일탈하거나 신고하지 않은 집회라 하더라도 평화로운 것이라면 헌법상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대법원의 일관된 입장이다. 게다가 그곳은 평범한 인도 위였다.경찰관은 범죄행위가 목전에 행해지려 하고 있다고 인정될 때 이를 예방하기 위해 관계인에게 필요한 경고를 하고, 그 행위로 인해 사람의 생명신체에 위해를 끼치거나 재산에 중대한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긴급한 경우에 그 행위를 제지할 수 있으나(경찰관직무집행법 제6조), 당시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그저 길을 지나려던 것뿐이었다. 이들이 신고범위를 일탈한 혹은 신고하지 않은 행진을 했다 하더라도 평화를 깨뜨린 일은 전혀 없었다.그렇지만 1심에서 벌금형이 선고됐고, 깊은 상심에 빠진 나는 틈만 나면 그곳에 갔다. 길을 걸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청년은 집회 참가자라는 이유만으로 통행을 제지당했고, 이에 항의하다 처벌 받을 상황에 처해 있었다.그리고 집회 참가자에게 가해지는 일련의 제재를 지켜보며, 이대로라면 나도 집회에 참가했다가 예상치 못하게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는 분명 집회결사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것이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법률적인 주장으로 다시 다듬었다. 2심에서 1심 유죄 판결이 뒤집혔고, 1년 정도 대법원에서의 심리 기간을 거쳐 청년은 무죄 확정 판결을 받게 되었다.다행이었다. 판결 내용이 짧게 보도 되었고 그 내용을 다소 오해한 사람들이 내게 악플을 달았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정한 한계를 넘지 않는 수준이라면, 그런 댓글마저도 자유롭게 달 수 있는 세상이 계속될 수 있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우리가 합의한 민주주의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의 평화가 무결점의 상태일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이야기하게 되면, 조금은 시끄럽고 어쩌면 누군가는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유롭게 모여서 말할 권리를 계속 가지기 위해서라면, 다소의 소란스러움 쯤은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합의한 민주주의의 내용이고, 헌법의 정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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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28 23:02

진짜 필요한 교육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인 부끄러움을 모르거나 기꺼이 포기한 괴물 같은 1%들 때문에 나머지 99%가 유례없는 국가적 수치심을 느끼는 요즘이다. 이토록 비정상적인 1%가 어떻게 한국사회를 이끄는 리더 집단이 되었을까. 1%의 사람들에 대한 99%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99%의 사람들은 1%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먹고사는데 급급해서호스텔 운영이라는 개인사업을 하면서 필자의 삶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첫째, 시간 통제가 잘 안 된다. 게스트가 이용한 객실 침대 시트를 교체하고 다양한 커피 메뉴를 익히고 매월 한 차례씩 진행하는 강연회를 준비하다 보면 그새 한 주가 지나가 버린다. 정신없는 일상이 정신없는 국가 상황을 압도한다. 둘째, 한 주에 한권씩 책을 읽던 습관도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책은 정기적으로 계속 구매하지만 반절 읽기도 전에 새로운 한 주를 맞는다. 이런 삶이 계속되다 보면 누가 어떤 정치를 하든지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내 삶에 큰 영향이 없을 거 같은 착각마저도 든다. 무엇이 오랜 시간 지켜졌던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는지 진중하게 이유를 찾아 봤다. 먹고 사는 일이 이유였다. 먹고 사는 일이 일상에서 너무 비중이 커진 게 문제였던 것이다. 필자만 그런 게 아니라 대다수의 99%도 마찬가지다. 일이 좋아서 많이 하는 게 아니라 많이 해도 먹고 사는 일이 잘 해결이 안 된다. 공자는 인간은 배가 따뜻해야 인과 예를 안다고 했다.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지 않은 이들에게 정치니 도덕이니 당파니 연대니 별 의미 없다. 경제적 가난은 생각의 가난으로 또 행동의 가난으로 이어져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적극 나설 수 없게 하는 큰 요인이다. 실마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다시 교육이다. 아니 어쩌면 역사상 교육이 필요한 제일 중요한 시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과는 다른 교육이어야 한다. 고작 1%만 획득하는 대학간판을 위해 99%가 고유의 적성과 능력을 포기해야 하는 교육이 아니다.먼저 금융교육이 필요 하다. 한국사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혹은 의도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99%에 대한 금융교육에 인색하다. 자본주의에 살게 하면서 ‘자본’에 대한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단지 열심히 살아 노동과 시간을 맞바꾸는 일만을 가르친다. 그런데 어디 부를 독점하는 1%가 99% 보다 더 열심히 노동해서 돈을 축적하는가? 99%가 먹고 사는 일에서 해방되지 못 하는 건 개인의 역량보다 교육 시스템의 구조 문제일 가능성이 더 크다. 금융·인문 교육에서 해결책을여기에 인문교육이 더해졌으면 좋겠다. 인문학이나 인문정신을 뜻하는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말은 로마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가로 꼽히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만든 말이다. 키케로에 의하면 인문정신이란 공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점잖고 충실한 사적 삶을 영위한 덕성이다. 공공영역에 적극 참여라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건강한 시민의식을 갖추게 할 인문교육은 우리에게 왜 진행되지 않을까. 비판과 의심이 아닌 체제 순응에 맞춰진 교육에 너무도 오랜 시간 습성화 돼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회가 됐다. 짧게는 고교 3년, 길게는 초등학교부터 12년. 거기에 또 대학 4년. 길어도 너무 긴 교육과정 시간 동안 제대로 된 금융교육과 철학을 비롯한 인문교육이 한국 사회에만 없다는 건 정말 우연일까? 이러한 교육제도는 누가 만들고 있는가. 1%인가 99%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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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21 23:02

여행하고 음악하라

얼마 전 필자는 세계 최대의 월드 뮤직 마켓인 womax에 다녀왔다. 올해 워맥스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라고 하는 작은 스페인의 소도시에서 개최되었다. 많은 이들에게 까미노라불리우는 순례길의 고요한 이곳. 워맥스가 개최 되는 기간, 산티아고의 매일 밤은 순례객 대신 각 나라의 내로라하는 음악인들과 그들의 콘서트를 듣고 즐길 관계자들로 채워졌다. 아름다운 가을날, 유럽에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환상적인 음악과 함께라니. 생각만으로도 황홀하고 그 자체로도 그저 행복한 날들이었다.기회의 땅 , 워맥스워맥스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여러 부류이다. 각 나라의 축제 담당자들, 매니지먼트사, 레코딩회사며 예술경영지원센터와 같은 국가기관, 그리고 뮤지션, 아티스트 등 그야 말로 음악시장의 작은 지구본과 같은 느낌이다. 매일 낮이며, 밤, 날을 새가며 각 나라에서 선발 된 뮤지션들의 공연이 펼쳐진다. 30분이라는 시간동안 그들은 자신이 가진 가장 보석 같은 곡들을 선발해 워맥스 무대에서 맘껏 펼쳐 보인다. 특히나 showcase가 진행되었던 산티아고 대성당 주변의 크고 작은 공간의 무대들은 성스러운 순례객들 뿐만 아니라 흥겹게 마시고 즐기는 워맥스 관객들도 넓게 열려 있었다. 낮에 진행 되는 daycase와, 밤에 열리는 showcase는 참여 예술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행운이자 영광과 같은 공연들이다. 가장 화려하고 활동적인 음악적 청춘에게 주어지는 무대. 워맥스라는 타이틀 자체로도 충분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보니 그곳의 엔지니어들의 프로다움에 필자도 무대 욕심이 불끈 불끈 솟아났더랬다. 특히 워맥스에 참가한 뮤지션들은 자신의 음악을 팔기 위해, 각 나라의 음악시장에 참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그것은 긍정적인 의미로의 굉장히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첫 날 말레이시아에서 온 한 뮤지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나의 CD를 줘도 될까? 너무도 흔쾌하고 감사한 선물에 필자는 대답했다. Of course, why not! 워맥스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왜 그가 그토록 조심스럽게 자신의 음반을 건넸는지 이해 할 수 있었다.CD를 건네기 힘들어. 왜냐면 다들 돌아갈 때 너무 짐스러워 하거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필자의 트렁크엔 3kg쯤 되는 CD가 그득했다.필자가 워맥스에 참가한 이유는 음악적 견해를 넓히고, 월드뮤직시장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서 느끼고 바라 본 지점은 그것보다 훨씬 다양했다. 수준 높은 뮤지션, 풍성한 음악 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온 많은 뮤지션들의 태도 에서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얼마나 안일하고 나태한 태도로 살아왔는지, 그들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아왔을지. 그곳에 참여한 예술인들의 연령대는 굉장히 다양하고, 그들의 삶은 또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지.삶에 치열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속에서 나는 다양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음악을 자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 온 흔적들이 고스란히 무대에서, 음반과 같은 결과물에서 자연스럽게 묻어 나왔다. 무대에 서지 못하더라고 그 이후의 무대를 위해 준비해 온 그들의 보따리에 비하면, 그저 누군가의 음악을 듣기 위해 떠나온 나의 가방이 초라하고 볼품없어 한참을 부끄러웠다.좋은 계절, 여행하고 음악하는 삶 속의 청춘의 잎사귀가 풍성해지는 가을. 우리는 왜 광장으로 향하는 주말을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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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14 23:02

약자의 꿈틀거림

서걱서걱 내리는 비가 주변의 온기와 소음을 흡수해 유난히 적막하던 날 밤이었다. 샵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덜컹거렸다. 그 소리에 놀라 쳐다보니 지저분한 행색의 수상쩍은 아저씨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다가가서 무슨 일이냐 묻자 우물쭈물한다. 예상치 않게 문이 잠겨 있어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다 곧 뒤따라오던 비슷한 모습의 일행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마침 문을 잠가 놓았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들어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이후로 나는 해가 지면 항상 문을 잠그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작업을 한다.약자의 자리에서 낸 용기본인보다 약한 상대가 보이면 힘으로 제압하고 욕구를 채우려 드는 사람들. 대중교통에서 분풀이 대상이 되어 이유없는 욕을 들어야 했던 기억,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불합리한 상황에 응하게 만들던 사람들과 일말의 가책 없이 성추행을 자행하던 남자들.나는 항상 약자였다.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오빠를 둔 탓에 눈치 보는 것에 익숙했고 내 주장을 펼치지 못하는 성인으로 성장했다. 제대로 의견을 이야기하지 못해 원치 않은 일을 해야 했고 혼자 속앓이하기 일쑤였다. 항상 폭력적인 힘에 의해 제압당해야 했던 나는 물리적, 정신적으로 나약한 존재였다.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우습게 보는 사람들을 향해 당당히 내 권리를 지키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용기도, 도와주는 이도 없어 결국 자책만 했다.순두부처럼 야리야리하게 흔들리던 초등학교 시절. 딱 한번 용기를 낸 적이 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왕따를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평소 나답지 않게 친구 편에 서기로 마음을 먹고 한동안 대다수의 친구들을 등지고 지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보란 듯이 당당하게 그 친구와 둘이서만 다니면서 뒤에서 욕을 하던, 앞에서 손가락질 하던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약자처럼 보였지만 그때의 난 약자가 아니었다. 왜 그 이후에 난 그때처럼 행동하지 못했을까. 약자기 때문에 당하는 것보다 스스로 약자임을 인정하고 고개 조아리는 상황이 더 나의 가슴을 사무치게 했다.지금 온 나라가 한 가지 이슈로 들끓고 있다. 그녀가 강자의 위치에서 군림하다가 아래로 끌려 내려오니 모두가 벌떼처럼 달려든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며 그녀는 과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을까. 약자로 살아온 이들은 당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평생을 강자로 살며 부당한 이익을 챙겨온 그들은 그녀의 딸의 인터뷰처럼 자신의 잘못을 신경 쓰지 않는다.당당함을 가지고 일어나야내가 오빠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몇 대 때린 거 가지고. 이 한 마디에 다리 힘이 풀렸다. 온힘을 다해 버티는 나와는 달리 가해자는 한번 슥 쳐다보고는 태연히 자기 볼일을 본다. 그때부터였다. 당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깨닫게 해주리라고 다짐을 한 것이. 남을 변화하기에 앞서 내가 변해야만 했다. 내가 약자라는 사실보다 진정 부끄러운 것은 목소리를 내야 될 때 스스로 두려움을 집어먹고 그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끔 거들었던 상황들이다.지금의 난 과거에 비해 여러모로 나아지고 있다. 쉽지 않은 과정이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로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지만 더 이상은 당연히 굴복당할 수 없기에 그동안 조금씩 이겨내온 나의 값진 시간들 속에서 용기를 한 움큼 꺼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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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07 23:02

꽃차를 만드는 일

나는 초년생 변호사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따금씩 일에 익숙해진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힘들어 일을 그만 두고 싶으면서도 아주 가끔 찾아오는 보람 때문에 선뜻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있다.내 일터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고성이 오간다. 내가 일하는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정서는 분노와 억울함이다. 잔뜩 골이 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맥 빠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감정일 터이다.불안정한 인생에 대한 고민그래서 결심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취미를 하나 더 가지기로 말이다. 마침 친구가 꽃차 소믈리에 수업을 들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서 배우기로 결심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우아해 보이는 취미를 갖고 싶었던 차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꽃차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그런데 유리병 속 색색의 꽃차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꽃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꽃이 필요하다. 뜨거운 물에 우려 마셔도 될 만큼 깨끗한 식용 꽃을 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같은 꽃이어도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특성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같은 방법으로 같은 품질의 꽃차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꽃잎을 잘 다듬어 건조작업을 하는 것 또한 보통 일이 아니다. 꽃잎은 연약한 만큼 열과 습기에 민감하다. 꽃을 덖는 작업도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수분이 모두 빠질 수 있게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수업을 들은 날은 집에 와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자야 한다. 꽃을 완성되지 않은 채로 오래 두면 금세 상태가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겁게 짓누르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깊은 밤에 꽃을 덖고 있자면, 쉽게 예쁜 꽃차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던 나 자신이 슬며시 부끄러워진다. 이런 고된 과정을 거치고도 타버린 몇몇 꽃잎을 보다 보면, 세상에는 손쉽게 내 손에 쥘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대학교에 입학하면 인생의 관문이 끝날 줄로만 알았던 시절을 지나, 취직을 하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직업을 가지고도 끝없는 고민을 하고 있다. 하던 일을 그만 둘까, 이미 시작해버려서 그만 둘 수 없는 일을 계속 하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결코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청춘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았던 불안정한 인생에 대한 고민은 사실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었다니, 배신감이 크다.취미로 배우는 꽃차 정도는 그래도 손쉽게 만들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이것 또한 단계마다 나름의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삶을 만들어 가는 일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고된 일이겠는가.모든 것엔 꾸준한 노력 있어야그저 예쁜 꽃을 보고 싶어 시작한 일인데, 꽃을 덖다 보니 겸손한 마음이 절로 든다. 일을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많지만 때로 보람된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면, 이 일을 계속 해도 되지 않을까. 고되긴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새로운 꽃차를 마실 수 있는 이 취미가 꽤 마음에 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나 자신을 조금 더 격려하며 청춘의 또 다른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 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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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31 23:02

왜 다시 총학생회인가

7년 전, 필자는 26일 동안 자전거로 전국을 여행 했다. 나름 테마를 정한 기획된 여행이었는데 그건 바로 대학과 사람이었다. 전국의 거점 국립대를 탐방해 대학과 그 안의 구성원들의 생각을 들어 보고자 했다. 전북대에서 출발해 전남대, 경상대, 경북대, 부산대, 강원대, 서울대, 충북대, 충남대 순으로 지역거점 대학을 방문했다. 각 대학만의 홍보팀과 대학언론사를 찾아가 그 대학만의 고민과 장단점을 비교해보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오늘날의 총학생회 역할을 찾는 데에 있었다.대학은 작은사회, 대표기구 역할 중요자전거 여행을 한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때 만난 몇몇의 총학생회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가장 지역과 밀착된 총학생회는 강원대 총학생회였다. 학교로부터 학생회 간부들에게 지급되던 비용을 모아 강원도 도서벽지 곳곳에 도서관을 지어줬다. 지역에 대한 강원대의 애정과 헌신의 크기는 강원대에 대한 강원도민의 자부심에 비례한다. 학교본부와 의기투합한 곳은 경상대 총학생회였다. 경상대는 유일하게 지역이름을 붙이지 못한 거점 국립대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꽤 많다.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경남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현재 경남대는 사립대고 경상대가 경남지역을 대표하는 거점 국립대다. 당시 경상대 본부와 총학생회의 신경은 온통 경남국립대로의 이름 복원에 있었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서울대 대학언론사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고 있었다. 서울대 대학신문 1면 기획기사 주제는 여전히 학생자치대표기구로서 총학생회가 필요 한가 였다. 기껏해야 연예인 섭외해 치르는 축제나 학생복지 사업 등을 진행하는데 총학생회의 타이틀을 걸고 해야 되는 이유가 굳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었다.총학생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단순한 회상 때문이 아니다. 대학이 지역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에 따라 지역 공동체의 모습이 달라진다. 대학은 작은 사회다. 총학생회는 그런 작은 사회의 대표기구다. 작은 사회의 대표기구 역할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은 큰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총학생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설령 과거 유럽에서처럼 전제적 지배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책 대신 무기를 들고 전장에 앞장 서는 시대는 아니더라도, 총학생회가 은행 ATM기를 늘리거나 잔디를 심은 운동장을 확산하기 위한 역할을 위해 존재해선 안 된다. 오히려 대학생을 비롯한 수많은 청년들 개개인의 꿈과 적성, 그리고 능력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회에 저항하고 바로잡는 데에 앞장서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 일을 할 사람들이 총학생회 선거에 도전해야 하고, 그들을 투표로 지지하고 응원해야 한다.그릇된 사회 바로잡는 이가 회장돼야『논어』에서 공자는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했다. 이 말은 그 이름(名)에 부합한 실제(實)가 있어야 그 이름이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매년, 11월이면 전국의 대학가는 총학생회 선거를 치른다. 모두가 다 이름을 바로잡는 데 나설 수는 없다.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성적 관리도 해야 하고, 취직 준비도 해야 한다. 다만 총학생회다운 총학생회를 이끌 이들을 관심 가지고 잘 뽑자. 1%때문에 99%가 힘든 시대라면 반대로 1%만 좋은 생각과 행동을 해줄 대표기구를 뽑으면 99%가 근사하게 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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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24 23:02

전주를 떠나는 청춘들

정확히 10년 전, 수능을 앞두고 대학 캠퍼스 생활과 이십대의 앞날을 그리던 시기.많은 친구들이 ‘인서울’을 목표로 열을 내던 날들이 있었다. 학창시절 제일가는 성공의 척도이자 우열을 가리던 의미의 그 말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을 뜻하기도 했다. 어떤 이에게는 학업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졸업 후 취업 성공에 한 발짝 다가가려는 선점과도 같은 걸음이었다. 하지만 아마 대부분은 십대의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벗어난 온전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으리라. 지역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사람들. 그리고 젊음의 청춘들. 그곳을 향하는 저마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청년과 농업 상생할 수 없을까사실 도내 청년 인구는 서울뿐 아니라 타 지역으로의 인구유출이 심각한 수준이다. 물론 전주만 그런 것은 아니고 타 지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전주를 떠나는 청춘들은 곧, 지역을 떠나는 청춘들, 그리고 서울을 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대할 수 있다. 차고 넘치는 곳임을 알고도 청춘들은 서울로 간다. 지역을 떠나 많은 청춘들이 중앙과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청년들이 그들의 지역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취업’이다. 특히 전북은 이렇다 할 대기업이 없는 열악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북에서 청년 인구가 증가한 곳은 완주군이 유일한데, 이는 현대자동차나 KCC와 같은 대기업이 완주산단에 밀집돼있고, 혁신도시 조성으로 인한 인구 유입 때문일 것이다. 완주군을 제외한 도내 시군의 청년층의 인구유출은 꽤 심각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대기업 유치만이 지역의 청춘들의 발목을 잡아 둘 유일한 방법일까. 그렇지는 않다. 대기업으로 취업할 수 있는 청년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것 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의 일자리 창출이 이뤄져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지역색’을 띠어도 무방하다고 보는데, 농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도내 현실을 반영한다면 청년과 농업이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기업이 일하기 좋은 전라북도에서 나아가 청년에게 젊음의 열정을 꿈꿀 수 있는 기회의 지역이 되어야 한다. 청년 창업이나, 청년 일자리 창출에 쏟는 재정과 시간적 호흡을 길게 가질 필요가 있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숙제처럼 이루어지는 지원은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누가 그러고 싶겠냐만은 망하기 위해 창업하는 식의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야 한다. 또한 청년문제가 일자리 창출에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문화, 복지차원에서도 탄탄히 이루어져야 한다. 벌어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건강한 시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역이 탄탄해야 건강한 나라얼마 전 필자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지역에서 성공하는 청년 예술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는데, 왜 꼭 지역인가?’ 나는 대답했다. ‘모두가 중앙을 향하는 시대, 조금 외진 곳이라도 삶의 터전에서 인정받고 꾸준히 활동하는 것. 그 자체로도 아직 칭찬받을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지역이 탄탄해야 전체가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고, 나는 지역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건강한 청년 예술인의 본보기가 되고 싶다.’ 나의 대답이 허황된 말뿐이 되지 않기 위해, 청년들 적극적인 자세와 사회의 협조적 구조가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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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1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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